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1530∼1578
나가오(長尾)가문의 가독(家督)을 이은 겐신은 오로지 에치고지방의 평정에 노력하고 있었다.
겐신은 전국무장으로서 희안할 정도로 영토욕(領土慾)이 없었다.
에치고가 외적에게 침략받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하지만 그 당시, 신겐의 용맹함은 이미 인접국의 무장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시나노(信濃)
지방을 신겐에게 뺴았긴 무라카미(村上)등은 모두 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겐신 은 남의 부탁이라고 하면 거절하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겐신은 의(義)를 위해 신겐과 싸우게 된다.
또 호죠씨에게 관동(關東)을 빼앗긴 관동관령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도 겐신에게 관동관령직을
내주고 관동지방의 질서회복을 요구했기 때문에 관동에도 출병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겐신의 생애는 전장에서 시작해 전장에서 지는 삶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겐신은 전국최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강했다.
싸우면 반드시 승리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도움을 요구해 왔고, 그에 응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원래 겐신은 출가의 몸이었다. 일생을 불도를 위해 바칠 생각이었으나, 가문을 위해 자신의 이상과는
전혀 다른 전쟁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겐신은 둘도 없는 호전적 인물이었다.
이렇게 겐신의 생애는 모순에 가득 차있기도 했다.
겐신은 정치가는 아니었다. 허(虛)와 실(實)이 혼재하는 속세에 혐오를 느낀 겐신은
타카노야마(高野은 타카노야마산(高 野山) 에 은둔해 버리는 사건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겐신의 전쟁은 극히 순결하고, 좀 더 교활했더라면 하는 장면도 매우 많았다.
그러나 의(義)에 반(反)하는 행동은 겐신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겐신의 의에 준한 행동은 숙적 신켄과 호죠 우지이에(北條氏康)도 겐신을 신뢰해, 신겐은아들 가쓰요리에게 " 그런 용맹한 사내와는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 겐신은 부탁이라고 하면
거절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겐신에 의지하며 가이(甲斐)를 존속시키도록 하라 " 고 유언했고,
우지이에도 " 신겐과 노부나가는 표리 부동한 인물로 믿어서는 안된다.
겐신만이 도움을 요청하면 꼭 의리를 지키는 인물이다 " 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것이 슬프기까지한 겐신의 매력이었고, 무로마치막부가 시작된 이래 이처럼 훌륭한 관동관령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가시노(長篠) 전투후의 가쓰요리(勝賴)로서는 겐신이 정신적 지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한 겐신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공격해 온 적이 있었다.
천장 5년(1577)의 일로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 아케치 미쓰히데(明知光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등 쟁쟁한 무장들 이었지만, 겐신은 테도리가와(手取川)에서 이들을 크게 격파하고 빗츄(越中), 노토(能登), 가가(加賀)를 평정했다.
긴키(近畿)지방에서 최강을 자랑하던 노부나가 군단도 겐신이 이끄는 군대에는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전국무장으로서는 유일하게 「정도(正道)를 걸은 인물」 겐신은 의(義)를 중시했고, 결코 도를 벗어나는행동은 하지 않았으면서도 발 빠르게 한 시대를 달려왔던 것이다.
그런 겐신에게는 연중행사 처럼 매년 전투를 즐기는 습관 또한 있었으며, 그 상대가 바로 일본 전국시대상 최고의 라이벌이라 불리는 다께다 신겐과의 전투이다.
신겐 과는 나카카와지마에서 12년간 5차례 대치했다.
그 중에서도 네 번째 싸움은 상당한 격전이었는데, 겐신과 신겐의 일기토(一騎討:장수와 장수가 일대 일로 싸우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계속하여 영토를 확대해 가는 신겐 행동을 악으로 정하고, 그를 토벌한다는 대의명분은 겐신의 전쟁수행에 촉매제 역할을 했다.
또한 겐신은 신겐 살아가는 방식 또한 싫어했다.
무로마치막부의 권위를 높여 아시카가(足利) 쇼군체제하의 질서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던 보수적인
겐신으로서는, 파괴자·신겐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신겐이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氏眞)를 공략중 우지자네의 책략에 의해 가이지방에 소금을 수출하던
타국으로부터 수출 금지조취를 당하고 만다.
아무리 신겐라고는 하지만 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고, 영민들도 혈기를 잃어 갔다.
겐신은 이마가와家 로부터의 협력요청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시나노 출병을 재촉하는 가신들에게이렇게 말했다.
「가이·시나노 영민들의 생활상을 듣자하니, 소금부족으로 인한 고통이 소문보다 훨씬 심각한 듯 하다.한시라도 빨리 북해(北海)지방의 소금을 가이·시나노 영민들에게 전달하도록 하라」
가이 지방에 속속 소금이 들어왔다. 그리고 신겐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병가(兵家)의 싸움에, 쌀과 소금을 이용하는 법은 없다. 쌀과 소금은 백성이 생산하는 것이며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에 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귀국에 소금을 전달하는 데는 특별한 뜻은 없다.
편한 마음으로 내 성의를 받아 달라. 그리고, 군마를 정비해 다시 전장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하자」
신겐은 이 한통의 편지에서 겐신의 순결한 숨결을 느꼈다고 한다.
카스가야마성(春日山城)에 신겐의 사망소식이 도달했을 때, 식사중이었던 겐신은 먹던 음식을 모두 토하고
「 아아... 다년의 호적수와 다시 만날 날은 이제 없단 말인가」 라고 한탄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1578년. 다음 목표인 관동지방 출진을 눈 앞에 둔 3월 9일...
겐신은 카스가야마성(春日山城) 에서 쓰러져 의식불명인 상태로 13일에 사망했다.
평소에 술을 좋아했던 것이 원인으로,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죽기 한 달 전에 남긴 한시(漢詩)에
영원토록 영번하는 한잔의 술, 49년은 한순간의 꿈, 생을 모르고 죽음 또한 모르니,
세월 또한 꿈과 같구나』라는 글귀가 있다.
출처 :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03&docId=47874997&qb=7Jqw7JeQ7Iqk6riwIOqykOyLoA==&enc=utf8§ion=kin&rank=6&search_sort=0&spq=0&sp=1&pid=gj1hzv331xhsssLe4T4ssv--096341&sid=Ta1XxCJQrU0AAHH0CS0
첫댓글 음 근대 저애갠 드라마 풍림화산서 각노인이 그 역을 맡는 바람에 비호감 이미지로 남은 군웅 ㅠㅠ 망할 각노인
호죠 우지이에가 아니라 호죠 우지야스 아닌가요??
실제로는 당시 노부나가 다음가는 일본 최고부자였고 축재 방법이 타국침략때 인신매매와 약탈이라고 하던데 다케다에게 소금보네준것도 엄청난 바가지여서 다케다가 무지 열받아 했었다고ㅋㅋㅋㅋㅋ(경고:인터넷에서 주어들은 거니 신뢰성은 별로임)
글쎄요.. 신겐도 죽기전 아들에게 겐신한테 의탁하라고 하지 않았나요??
저는 전국 다이묘중에서 겐신이 가장 좋더군요 ㅋㅋ 외교도 가장 약한쪽과 동맹맺는거 보면은 ㅋㅋ
신겐?..
거품의 제왕이라고 하지만 역시 캐릭터로서는 싫어하기 힘들죠
겐신 신겐 이름도 라이벌
우에스기가 굉장히 귀엽지. 나도 좋아해.
역시 각하!!! ㅋㅋㅋㅋㅋㅋㅋ
하악하악.
어...?내스똴...
겐신 신겐 .. 헷갈리네요
근데 왜 자꾸 쳐들어와 우에스기 ㅜㅜ
신겐한테 소금보내줄때 생필품이 없으면 백성이 고생한다고 시중가보다 싸게 보내줬다고 합니다
또한 일본최고의 부자중의 하나이며 상경도 돈으로 여러차례했죠
여성설 떡밥이 없다니. 실망 :-)
22우에스기 겐신 불임ㅋ
분명 매력적인 인물이지요..
매력적인 캐릭터인건 맞지만...겐신의 적들 한테는 천재지변과도 같지않았을까요....이익도 없는데 계속 덤비구..공격해 들어왔다가 겨울되기전에 돌아가구...
취미 : 전투 / 특기: 전투 /
켄신의 적들에겐 산(?)돌게이죠 ㄲ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