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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담의 빅뱅, 일년전쟁의 완벽 도해!!
건담 매니아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첫 시리즈가 나온지 30년이 된 장대한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팬, 반다이를 비롯한 프라모델 메이커에서 발매된 건담프라모델(속칭 건프라) 팬, 건담을 기초로 한 게임의 팬, 다양한 스핀오프 시리즈를 가진 소설 팬 등등.. 그 중에서도 가장 골수 팬을 꼽자면 바로 퍼스트에서, 제타, 더블제트, 뉴건담으로 이어지는 UC(우주세기) 팬일 것이다.
그런 우주세기 매니아들을 위한 책이 바로 이 '기동전사 건담 일년전쟁사'이다. 책의 기획의도는 건담 세계관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마치 빅뱅과도 같은 일년전쟁을 ‘진짜 있었던 전쟁처럼 다뤄보자!’인것 같다. 픽션에 대한 논픽션적 접근이랄까? '전투'와 '병기'만이 아닌 (책에서도 자주 거론되는), 클라우제비츠의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피를 흘리는 정치-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 구분법처럼, 전쟁을 다루려면 그 시기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아우르는 시야가 필요하다. 그 전쟁이라는 본편과 배경이라는 프롤로그/에필로그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한 애니메이션에 존재하는 가상의 전쟁을 마치 실제 전사를 다루는 오스프리의 켐페인 시리즈(한국에도 '세계의 전쟁'시리즈로 출간 되어있다)와 같은 느낌으로 책을 뽑아내었다.
지구연방이라는 인류 사회가 성립되는 역사부터 시작해서 스페이스노이드와 어스노이드 간 갈등의 사상적 배경, 지온공국과 지구연방의 대립 추이, 우주전쟁의 발전/변화 과정, 전장의 모습을 바꾼 모빌슈츠라는 신병기에 대한 다각적 분석이 다채롭고 수준 높은 일러스트와 모형, 도식으로 구현되어있다.
재미있는 것은 일년전쟁이라는 가상 역사에 대한 설정은 퍼스트 건담으로 불리는 '기동전사 건담'의 애니메이션이 끝난 후, '슈퍼로봇(마징가, 컴배틀러V 등의 기계를 뛰어넘는 요소를 지닌 존재)'적인 요소가 많았던 기존 설정에서, 건담 스스로가 정립한 '리얼로봇(앞의 개념과 상반되는 병기로서, 기계로서의 존재)'이라는 계보에 맞추기 위해 추가된 설정이 많은데 이를 짜맞추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주로 등장하는 약점 중 대표적인 것이 군대 조직에 대한 묘사다. 본 책에도 나오지만 일개 소령이 함대 사령관이 되지 않나, 지온군의 경우는 독재체제라는 설정을 넣더라도 영관급이 방면군 사령관이 되거나 영관보다 위관이 나이가 훨씬 많은 것 등은 전쟁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쉽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수십억이 사망'하고 '콜로니 낙하'라는 전지구/인류적 혼돈으로 이런 것을 '설명할 수 있게'끔 하느라 원작자들이 고생 했을 것 같다.
뭐 그런 문제점은 30년 전에 나온 TV 방영 애니메이션이라는 제약을 감안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에 타당한 이유를 붙이기 위한 것이 바로 이 책이 아닌가. 지구연방군과 지온공국군이라는 두 세력의 조직적/구조적 '고찰'은 우주세기 매니아들이 더욱 깊게 일년전쟁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토록 독특하고 기발한 기획의 책을 한글로 읽을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고, 구매해서 읽어 주는 것이 그 노고와 용단에 보답하는 길이리라.
하지만 상권을 다 읽고 하권도 2/3 정도 읽은 현시점에서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는 게 문제.
신경 써줬으면 하는 언어의 순화
위에서는 굳이 어색하게 건담매니아라는 용어를 썼지만, 무엇을 감추리오. 이 책은 순수하게 건덕후, 그 중에서도 골수라고 불리는 우주세기빠들을 위한 책이다. 솔직히 말해서 2000년 이후 양산된 건담 시드나 현재 방영 중인 건담 더블오 팬들(상당수가 우주세기 팬들이지만)이 이 책을 사볼 리는 만무하다.
그만큼 책의 마케팅에 필요한 STP 전략을 구상하기가 수월하며, 어지간해서는 잠재 독자군이 실재 독자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게다가 번역/감수/자문까지 담당한 사람이 여러 건담 커뮤니티에서 높은 평판을 자랑하고 있으니 더더욱 마케팅에 있어서는 호재일 것이다. 건담에 대한 지식과 식견은 이 책에 있어서 기존의 단순 번역자들이 놓치기 쉬운 부분을 빈틈없이 잡아주고 오역의 가능성도 많이 줄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세밀하고 조밀한 독자군의 설정과 실현은 양날의 검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난 이 책이 왠지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아니 힘들었다기 보다는 뭐랄까. 묘한 위화감에 휩싸였다고 할까? 흔히 온라인, 즉 모니터로는 익숙한 문장을 종이로 된 책으로 보는 데서 오는 그것이었다.
............둘러 말하는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이 책이 지닌 가치에 비해 번역은 '졸역'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실망스럽다. 전체적으로 '한국어'로 순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초벌 번역 수준이다. 최소한 이런 수준의 '오역'은 아니라는 점에서 기뻐해야 할까?
역자의 첫 출간인걸 감안해서 단순히 요즘 번역서의 트렌드인 위화감은 차치하더라도 왜 굳이 일본어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직역해서 사용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과 같이 국어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일본식 한자 용어는 어색하더라도 국어사전에도 존재하니 굳이 지적하지는 않겠지만, 왜 굳이 일본식 외래어를 그대로 가타가나에서 한글로만 바꾼 표현을 쓰는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 현대 국어로는 외래어를 사용하지 않는 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케이스리스', '트라우저', '트리거' 같은 용어를 '무탄피', '바지', '방아쇠'로 순화시키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여러 번 등장하는 미국을 왜 아메리카라는 일본어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로 표기하는지, 백보 양보해서 아메리카 합중국이라는 정식 명칭이 위키피디아 한글판의 등재어(표준국어대사전에는 같은 용어라고 나와있지만 미국이 등재어다)이기 때문이라고 쳐도, 굳이 미군을 아메리카군이라는 용어로 부르는 이유는 이해할 수가 없다.
또, 인명/지명과 같은 고유명사는 표기법과 발음법에 있어 정설도 없거니와 그에 대해서는 역자가 충분한 노력을 기울여 합리적인 표기를 이끌어 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스페이스 콜로니 군집인 사이드에서 각 콜로니에 붙여진 'バンチ'를 왜 굳이 '반치'라는 의미불명의 한글을 표기할 필요가 있을까? 다분히 '번지'의 일본어 발음을 가타가나로 표기하여 일어가 아닌 느낌을 주기 위한 용어인 듯 한데, 위키피디아에는 영어로 'bunch'로 표기하나 이것도 정확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면 역자가 이에 대한 전후 상황을 알고 있다면 반치(번지)라는 표기 이외에 정확한 설명을 해줬어야 하는 부분이다.
한국어 군사 사적(밀리터리 클래식과 같은 사관학교 교관들의 번역서를 기준)에서는 주로 사용하지 않는 용어가 사용된 것 등 솔직히 말하면 지적 거리가 한둘이 아니다. 순전히 '요즘 트렌드'에 맞춰서 이해하고 독자 자신의 역량(건담에 대한 지식)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는 부분일지도.
픽션을 논픽션의 기법으로 다룬 기획의도에 맞춰서 한글판도 그에 상응하는 수준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단순히 일본어라는 외래어를 한국어로 순화하는 과정 말고도 일반적인 군사서적에 사용되는 용어로 '순화'함이 바람직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 이런 부분은 역자도 신경 써야할 부분이지만, 편집을 담당한 출판사에서 더욱더 신경 썼어야 하는 문제이다.
오타쿠의 언어 생활
물론 이는 단순히 역자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솔직히 이 책을 보면서 나와 같은 위화감을 느낀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이는 바로 무의식적으로 일본어와 한국어의 구별이 없어진 것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는 한국 오타쿠 문화(덕후 문화)의 총체적인 언어 습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건담 시리즈가 일본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일본의 자료를 지속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일본어와의 접촉이 많으면 많을 수록 언어적으로 비슷한 일어와 한국어 사이에서 혼돈이 일어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물론, 이는 일본어만의 문제가 아니라 장기간의 영어 교육 덕분에 국어의 영어화 문제도 대두되고 있다.
일본어를 읽어도 한국어를 읽어도 둘 사이의 차이점이 없어지는 상태이다. 아니 원래 콘텐츠 생산은 바다 저쪽에서 발생하는 것이니깐 그 콘텐츠를 접하고 생산된 언어인 후자 쪽이 전자를 따라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 한국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일본의 2ch과 어떤 형식으로든('펌'이든 '번역'이든 어떤 형태든 간에) 교류를 하고 있고, 특히 온라인 용어의 맛을 살리기 위해, 역자의 역량과 아마추어 번역이라는 한계 때문에 '직역'수준의 번역을 의식/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언어생활에 있어서 온-오프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경향이 일상생활, 온라인 커뮤니티의 '게시판'이 아닌 종이로 만들어진 '책'으로 옮아 오는 것은 미래의 일이 아닌 지금 당장의 문제가 되며, 본인은 이번 '일년전쟁사'가 그 증거라고 믿고 있다.
물론 이렇게 어떤 형태로든 등장한 생산물을 '까고'있는 본인이라고 그런 습관과 현상에서 예외일 수는 없고 오히려 그런 현상의 한 가운데 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출판사와 엄청난 에너지를 투입한 역자의 노고를 깎아 내리기만 할 수는 없다. 이는 이 책의 등장을 기뻐하고, 예약판매로 구매하고, 다른 이를 사게끔 만든 것만으로도 나는 이 출판사와 역자의 노고에 답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난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클릭 몇 번으로 읽는 게 아니라 정가 5만원(온라인 할인가 45천원)으로 산 구매자이기 때문이다.
차후에 또 이런 기획이 한글로 이루어질지는 의문스럽지만 혹시라도 또 이런 기회가 생긴다면, 출판사와 역자는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로 된 생산물을 만들어줬으면 한다.
알고 있겠지만 요즘 흔히 보이는 wwwwww라던지 2222222와 같은 용어는 순전히 일본어에서 파생된 '네트어'이다.
첫댓글 <팔루자 리포트> 읽어보셨나요? 그 책에 비하면 거론하신 두 책 조차도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_- 50페이지까지 읽다가 중도포기할 정도였다는.
나오자말자 사서 서가에 꽂혀있습니다. ㄷㄷㄷㄷㄷㄷ
그나저나, 한번 사봐야 하겠군요. 일본애니 중에 여러모로 정말 건담만한 애니도 없으니... 근데 한 질 5만원이나 하는군요 ㅋㅋㅋ
와우 ㄷㄷㄷㄷ
인터넷주문에 신한카드 할인까지 하면 4만2천원대에 구입이 가능하더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