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5시반, 호치민시의 팜응오라오 거리는 조용하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통행인은 보이지 않는다. 빈 골목길을 습기띈 바람이 지나면서 종이 조각이 펄럭이다 떨어졌다. 날은 밝았지만 하늘이 흐려서 마치 저녁무렵 같다. 골목 끝의 식당 기둥에 등을 붙이고 선 윤성일이 다시 시계를 보았다. 5시 20분에 나와 10분째 서있는 참이다. 어젯밤 치킨 식당에서 나와 근처의 배낭여행자 전용 맥주집에서 맥주 6병을 마시고 김가영과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에 이곳에서 내일 아침 5시반에 만나기로 한것이다. 물론 윤성일의 일방적 약속이었고 김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 하나는 약속해줄수 있지.”
민박집 앞에서 윤성일이 그렇게 말했다. 김가영은 시선만 주었는데 술기운이 섞인 두눈에 불빛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입술의 갈라진 세로줄도 없어졌고 습기를 머금어서 번들거린다. 윤성일이 똑바로 김가영을 내려다 보았다.
“둘이 한 방을 쓸거야. 같이 다니면서 방 두 개를 쓰는 놈은 자지가 없거나 미친놈 중의 하나일 테니까.”
김가영이 웃지도 않고 노려보았으므로 윤성일은 정색했다.
“하지만 절대로 이상한 짓 안 할게. 네가 지금 한방을 쓰는 수잔보다 더 편한 분위기에서 지내도록 노력할게.”
김가영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렸으므로 끝의 몇 단어는 듣지 못했을수도 있었다. 다시 손목을 치켜든 윤성일은 5시 37분이 되어 있는것을 보았다. 약속시간은 5시반이다. 아니, 나오라고 했다. 그때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으므로 윤성일은 몸을 돌렸다. 김가영이다. 골목에서 김가영이 나오고 있다. 야구 모자를 썼고 긴소매 셔츠에 바지. 등에는 커다란 배낭을 맨 차림으로. 시선이 마주쳤을때 윤성일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리고는 두팔을 번쩍 들어보이며 환영사를 뱉는다.
“웰컴 고스트.”
“뭐야?”
난데없었는지 다가선 김가영이 눈을 치켜떴다. 김가영한테서 옅은 비누냄새에 섞인 채취가 맡아졌다. 옷냄새인가?
“뭐가 고스트야?”
김가영이 따졌을때 윤성일이 발을 떼면서 말했다.
“진짜야. 내 꿈에 네가 나타났을때 얼굴이 너무 선명해서 귀신 같았어.”
“그거 욕이야?”
따라 걸으면서 김가영이 묻자 윤성일은 머리를 저었다.
“칭찬이야, 고스트.”
“싫어. 다른걸로 불러.”
“천사라고 부를 순 없잖아?”
텅빈 거리를 걸으면서 윤성일이 김가영의 배낭에 올려진 담요와 비옷, 그리고 묶여진 잡동사니 뭉치를 풀었다.
“뭐해?”
김가영이 묻자 풀어낸 짐을 제 배낭 위에 얹으면서 윤성일이 대답했다.
“짐이니 몸무게 반은 나가겠다. 이따 짐 정리 좀 하자, 고스트.”
열차는 해안선을 끼고 달리는 중이다. 창가의 의자에 앉은 김가영이 머리를 돌려 앞쪽의 윤성일을 보았다. 윤성일은 머리를 벽에 붙이고는 깊게 잠들어 있다. 다낭행 기차에 탄지 이제 두 시간이 되어간다. 완행열차여서 오후 7시반에 도착 예정이지만 출발 시간이 한 시간도 넘게 지연 되었으니 언제가 될지 알 수없다. 열차안은 소음으로 가득찼고 레일을 지나는 바퀴의 마찰음과 진동으로 지진이 난 것처럼 차체가 흔들렸다. 김가영이 다시 윤성일을 보았다. 잠든 모습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옆쪽에 앉은 두 노인 부부가 윤성일과 몇 마디 월남어를 나누더니 금방 호의에 가득 찬 표정이 된것도 신기했다. 윤성일의 월남어 실력은 인사 몇 마디 뿐이었는데도 그렇다. 그때 옆에 앉아있던 소녀가 손에 쥐고 있던 빵을 쪼개더니 김가영에게 한조각을 내밀었다. 마르고 딱딱한 빵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소녀는 수줍게 웃었다. 열서너살쯤 되었을까?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속눈썹이 길다. 옆에 앉아있던 40대쯤의 여인이 김가영에게 받으라는 손짓을 했다. 둘다 검정색 바지에 저고리를 입었는데 전통옷이다. 김가영이 빵조각을 받고는 소녀에게 말했다.
“땡큐.”
소녀의 까무잡잡한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때 앞쪽 할머니가 월남어로 소녀에게 말하자 소녀가 대답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다. 이제 마주보고 앉은 두줄의 좌석에도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때 윤성일이 눈을 뜨더니 몸을 세웠다. 그리고는 발밑에 깔린 배낭을 들어 세우더니 안에서 볼펜 한 박스를 꺼내 김가영에게 내밀었다.
“이거 쟤한테 줘.”
김가영이 볼펜 박스를 받아들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런 거 갖고 있었어...요?”
“너처럼 쓰잘데없는건 안갖고 다녀. 대신 이런게 많지.”
그때 네쌍의 시선이 볼펜 박스에 모여져 있었으므로 김가영이 소녀에게 내밀었다.
“가져.”
“선물이라고 해.”
윤성일이 코치했다.
“프레젠트야.”
다시 김가영이 내밀었다가 박스 뚜껑을 열고 볼펜 한 자루를 꺼내었다. 그때 윤성일이 바닥에 떨어진 신문지 조각을 내밀었다. 김가영이 신문조각을 받아 볼펜으로 글씨를 써보였다. 그리고는 박스 안에 볼펜을 모두 꺼냈다가 다시 넣고는 소녀에게 내밀었다. 소녀의 얼굴은 물론 엄마의 얼굴도 굳어져 있다. 그때 앞쪽 할아버지가 월남어로 말했다. 받으라는것 같다. 엄마가 굳어진 얼굴로 김가영과 윤성일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말하더니 머리를 숙여 보였다. 김가영과 시선이 마주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연신 머리를 끄덕였는데 얼굴에 따뜻한 기색이 가득차 있다. 소녀는 이제 볼펜 박스를 두손으로 감싸쥔 채 눈치만 살피고 있다.
소녀와 엄마가 내렸을때는 한 시간쯤 후였다. 내리기전에 둘은 인사를 했는데 얼굴에 정성이 가득차 있었다. 빈자리로 사내들이 몰려왔으므로 재빠르게 일어난 윤성일이 제 창가 자리는 비워놓고 김가영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윤성일의 창가자리로 옮겨갔다. 윤성일의 왼쪽에는 40대쯤의 사내가 앉았는데 몸에서 땀냄새가 진동을 했다. 할아버지 옆쪽에 앉은 사내도 마찬가지다.
“괜찮아?”
그 냄새를 맡은 김가영이 미안한 표정을 짓고 물었으므로 윤성일은 머리를 끄덕였다.
“반쪽은.”
잠깐 의미를 몰랐던 김가영이 눈을 깜박였다가 피식 웃고나서 물었다.
“근데 형은 언제 돌아갈거야?”
“너 지금 형이라고 했어?”
“그게 그중 나은것 같아.”
머리를 끄덕인 윤성일이 지그시 김가영을 보았다. 바로 옆에 앉았기 때문에 초점 잡기가 힘든 듯 눈이 가늘어졌다.
“글쎄, 호치민까지 가보고 나서 결정해야겠다.”
“하롱베이는?”
“거기까지는 가야겠지.”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그래야지.”
“가서 뭘 할건데?”
그러자 가늘어졌던 윤성일의 눈이 치켜 떠지더니 입술끝이 비틀려졌다.
“아직 결정된거 없어.”
“군에서는 언제 제대했는데?”
“3월이니까 두달 조금 넘었네.”
의자에 등을 붙인 윤성일이 고분고분 대답했다. 지금까지 둘은 서로의 신상에 대해서 묻지도 않고 알려고 한적도 없다. 그저 나이와 윤성일이 군에서 제대했다는것만을 말했을 뿐이다. 머리를 돌린 윤성일이 김가영의 귀를 보았다. 반달 모양의 잘생긴 귀다. 아래쪽 턱부분이 도톰했고 그 흔한 귀고리 구멍도 없다.
“너 그러고보니까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왔구나?”
그러자 김가영이 윤성일을 보았다. 이제 둘의 눈이 이십센티 간격을 두고 일직선상에 놓여졌다. 둘은 상대방의 눈동자에 찍힌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네.”
김가영의 입술이 달삭였다.
“근데 이상해, 형.”
“뭐가?”
“나 형이 하나도 안무서워.”
“왜?”
“그 이유를 모르겠어?”
“지금 나한테 묻는거야?”
“그래.”
그러자 윤성일이 눈썹을 좁히고 김가영을 노려보았다. 김가영의 눈동자에 박힌 언놈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이윽고 그 자세 그대로 윤성일이 되물었다.
“미토?”
“그래.”
“그 비바람?”
“맞아.”
김가영의 두눈에 조금 습기가 번진 것 같다. 번들거리기 시작한다. 눈을 크게 뜬 김가영이 말을 잇는다.
“형도 그 말을 새겨들을줄 알았어.”
“새겨들었다기 보다도 그냥...”
“어쨌든 박힌 거야.”
“박다니? 여자가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그순간 윤성일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뱉어졌다. 김가영이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기 때문이다.
열차가 해안선에 아주 가깝게 붙어서 달리고 있다. 오후 7시반, 이미 주위는 어두워졌고 열차안의 소음도 줄어들었다. 지나가는 역무원에게 물었더니 9시경에는 다낭에 도착한다니 한 시간반쯤 남은 셈이다. 김가영이 눈을 뜬것은 입술을 건드리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머리를 든 김가영이 손등으로 입술을 비볐다가 곧 사연을 알았다. 윤성일이 손에 쥔 손수건 때문이다. 윤성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던 자신이 침을 흘린 것이다.
“왜 흘겨?”
손수건을 내밀면서 윤성일이 투덜거렸다.
“네 침이 내 어깨에 묻고 있어서 그랬다.”
“시끄러.”
냄새를 풍기던 사내들도 내렸고 앞좌석에는 부부로 보이는 30대 남녀가 앉았다. 잠이든 사이에 노부부도 떠난 것이다.
“너 참 잘 자더라.”
윤성일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김가영을 보았다.
“지금까지 내 어깨에 기대고 그렇게 잠을 잔 여자는 없었거든.”
“다른 여자는 있었고?”
“아, 그거야...”
하더니 윤성일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넌 뭐하고 있었니?”
“난 이 년째 알바 뛰고 있어.”
“무슨 알바?”
“대개 편의점이야. 매장 일도 했고, 홍보업체 일도.”
“알바 뛰기 전에는?”
“학교 나녔지. 2학년 마치고 휴학한거야. 동생이 입학하는 바람에 둘이 다닐 형편이 못되었거든.”
“그렇구나.”
“한양여대 영문과야. 확인해봐.”
“그게 무슨 말야? 확인해보라니?”
“형한테 술술 털어놓은 내가 신통해서 그랬어. 대개 이런때는 멋진 옷을 입힌다고 하던데 말야.”
“나는 한국대 경제과 3학년 마치고 군대갔다왔다.”
“음, 머리는 내가 좀 좋을줄 알았어.”
정색한 김가영이 말했으므로 윤성일은 어깨만 들었다가 내렸다. 한양여대는 여자대학중 1류다. 한국대는 2류 사립대인 것이다. 힐끗 윤성일에게 시선을 준 김가영이 말을 잇는다.
“하지만 위축될건 없어. 좋은 대학 나왔다고 다 잘된다는 법은 없으니까.”
“....”
“기운내, 형.”
했지만 윤성일은 웃지도, 그렇다고 찌푸리지도 않는다. 머리를 돌린 윤성일이 창밖을 보았다. 밖은 어두워서 열차안의 풍경이 그대로 유리창에 비치고 있다. 유리창에서 김가영과 시선이 마주치자 윤성일이 말했다.
“난 그냥 그럭저럭 살았어.”
김가영이 시선을 받은 채 윤성일이 말을 잇는다.
“평범한 가정, 평범한 인생이야. 그럭저럭 살다가 여기까지 왔어.”
“어떻게 먹고 살았는데? 난 그게 중요해.”
“그럭저럭.”
했다가 어깨를 들었다 내린 윤성일이 풀썩 웃었다.
“너처럼 알바 뛰기도 했고. 뭐...”
“3학년 마쳤다면서. 복학은 할거야?” “봐서.”
“졸업은 해야되지 않겠어?”
“그렇겠지.”
“남의 일처럼 말하고 있네.”
눈살을 찌푸린 김가영이 유리창에서 시선을 떼고는 의자에 등을 붙였다. 그러자 어깨가 닿았고 땀냄새가 섞인 윤성일의 채취가 맡아졌다. 그때 윤성일이 김가영의 귀에 대고 말했다.
“우리 오늘은 다낭에서 제일 좋은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자자.”
머리를 든 김가영이 시선을 주었는데 미쳤냐고 묻는 표정이 얼굴에 씌어져 있다. 그래서 15센티 거리에 떠있는 김가영의 눈을 보면서 윤성일이 말했다.
“내가 이러려고 알바 죽어라고 뛴 거야. 가끔 아주 가끔 이렇게 기분전환을 해야돼.”
첫댓글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즐감요
^^
즐감요~
굿,,즐감,,
감사히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
잘 읽고 갑니다^^
♥ 늘 감사합니다.
신선한 스토리..
즐감하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