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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데 섬에 상륙하다
행 28:1-10
1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3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5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7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행 28:1-10 / [멜리데 섬에서] 우리는 상륙한 곳이 멜리데 섬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2) 섬사람들은 우리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고 날이 추웠기 때문에 그들은 불을 피워 놓고 우리를 맞아 주었다. 3) 바울이 마른 나뭇가지를 한 아름 안아다가 불속에 넣었다. 그런데 나뭇가지 속에 있던 독사 한마리가 뜨거움에 놀라 튀어나와서 바울의 손에 달라붙었다. 4) 섬사람들은 독사가 달라붙은 것을 보고 `살인자가 틀림없어! 바다에서는 살아 왔지만 정의의 여신이 결코 살려두지 않을 거야' 하고 서로 수군거렸다. 5) 그러나 바울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그 뱀을 불속에 떨어 버렸다. 6) 섬사람들은 바울의 몸이 부어 올라 당장에 쓰러져 죽으려니 생각하고 지켜보고 있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바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이번에는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하였다. 7) 해변 가까운 곳에는 그 섬의 추장 보블리오의 땅이 있었으므로 추장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동안이나 친절히 대접하였다. 8) 그때 마침 보블리오의 부친이 고열과 이질에 걸려 앓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이 가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손을 얹어 낫게 하자 9) 그 섬 안에 있는 병자들이 다투어 찾아왔다. 바울은 그들의 병도 모두 고쳐 주었다. 10) 그러자 그들은 우리를 극진히 대접해 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가 떠날 때에는 여행하는 데 필요한 온갖 물건을 배에 실어 주었다.
결국 바울이 탄 배는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습니다. 죄수인 사도 바울이 리더의 위치에서 일행을 이끌었습니다. 배는 파선 했지만 276명의 선원 중 단 한명도 인명피해가 없었습니다.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1-6) 안전하게 구조된 후 알고 보니, 그 섬은 현재 ‘몰타’로 불리는 멜리데 섬이었습니다(1).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은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하고 바다에 빠져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모닥불을 피워주며 몸을 녹일 수 있도록 큰 친절을 베풀었습니다(2). 바울은 그들의 친절한 행동을 받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같이 돕기 위해 나뭇가지를 한 묶음 모아 땔감으로 불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뭇더미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독사가 불길에 놀라서 바울의 손을 무는 일이 발생했습니다(3).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고 매달려 있는 모습을 원주민들이 본 것입니다(4). 원주민들은 난파선에서 헤엄쳐 나온 많은 사람들이 죄수라는 것을 로마 군인들로부터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독사가 바울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목격했을 때 ‘이 사람은 살인자가 분명하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바울이 당한 불행이 바울의 저지른 죄에 대한 증거로 생각한 것입니다(4). 바울이 독사에 물린 것을 보고, 멜리데 사람들은 바울이 죽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바울은 그 위험한 뱀을 불에 툭툭 털어 버렸고, 조금도 상하지 않았으며 쓰러져 죽지도 않았습니다. 멜리데 사람들은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많이 보았을 겁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멀쩡하니까 바울을 “신이다”라고 합니다(6).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7-10) 멜리데 섬에서 가장 유력한 지주였던 보블리오라는 사람은 바울 일행에게 사흘간 머물게 하며 친절을 베풀었습니다(7). 친절을 베푼 대상을 ‘우리’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276명 전원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바울과 누가와 아리스다고와 그 외 몇몇 사람들 정도를 초대해서 사흘 동안 머물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누가 있었든지, 그렇게 여러 명을 사흘씩이나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며 친절을 베풀고 음식을 베풀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집에 머물며 보니, 그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그에게 가서 기도하며 안수해주었습니다(8). 그러자 그의 병이 나았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을 바울이 고쳤다는 소식을 듣고, 섬 주민들 가운데 병든 사람들이 와서 또 고침을 받는 일이 일어납니다(9). 섬 주민들의 선의에 대해 치유의 기적으로 답한 바울에게, 그들은 다시 더 큰 호의로 화답을 합니다. 바울의 일행을 후하게 대접하고, 쓸 것을 배에 실어줍니다(10).
적용: 복음을 증거하는 곳, 믿고 구원을 받는 현장에 표적이 나타나리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막 16:15-18). 바울이 독사에게 물리는 불행이 있었지만 불행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습니다. 당신은 선교, 전도의 현장을 펼치고 살아가는지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를 따라 환난 중에도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백성들에게 특별히 도움을 베푸셔서 위로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한순간도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낙심하고 도망 중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백성을 위로하고 도우십니다.
호크마 주석
=====28:1
안즉...멜리데라 하더라 -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육지에 상륙하고 난 후에야 그곳이 멜리데라는 섬인 것을 알았다. 멜리데( * )는 오늘날의 말타(Malta)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섬은 시실리 남쪽 약 98Km, 아프리카 북동쪽 약320Km 지점에 위치한 섬으로, 전체 길이가 약 29Km 되고 너비가 15Km 정도 되는작은섬이다. B.C. 1000년경 페니키아인들은 이섬에 이주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나B.C. 218년 로마가 제 2차 카르타고 전쟁 초기에 이곳을점령하여 다스려 왔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섬을 관할(管轄)하는 행정관을 세웠는데, 그 명칭은 '멜리데의 자치에있어서 모든 일을 관할하는 우두머리'라는 뜻의 '멜리테시움 프리무스 옴니움'(Melitesium Primus Omnium)이었다. 뿐만아니라 그는 이 섬에 많은 수의 퇴역 군인과 그들의 가족들을 이주시켰기 때문에 이 섬은 상당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한편 '멜리데'의 위치에 대해서 현재의 말타(Malta)라고 보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는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멜리데'가 달마티아(Dalmatia) 해안 앞에 있는 '멜레다'(Meleda)라고 이해한다(Bryent, Papulus). 그러나 '멜레다'(Meleda)가 멜리데(Malta)의 북동쪽에 위치한 아드리아 해(Adriatic Sea)의 북동쪽 달마티아 해안에 있다는 것은 다음 기항지가 '수라구사'라는 것(12절)과 조화를 이루지못한다. 왜냐하면수라구사는 멜리데(Malta)바로 위에 있는 시실리 섬의 항구 도시이기 때문이다. 결국후자의 견해는 '아드리아의 바다'(the sea of Adria, 27 : 27)fmf '아드리아 해'(theAdriatic sea)로 오해한 데 기인한 것일 뿐 정당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바울의 예언은 성취되었음이 확인되었다(27 : 26, F.F. Bruce).
=====28:2
토인들이...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 '토인들' 에 해당하는 헬라어'호이 바르바로이'(* )는 의성어로 멜리데 섬의 토착민들이사용하는 페니키아어가 '바르'(Bar)- '바르'(Bar)로 들렸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단어에서 영어의 '야만인'(Barbarian)이 파생되었기 때문에,문명화되지 못한 미개인을 나타내는 것으로 오해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그 용법상 야만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헬라인들이 그 말을 쓸 때 의미하는 바는 헬라민족이 아닌 '타민족'을 가리킨다(롬 1 : 14).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NIV에서는 '섬 사람들'(islanders)로, RSV에서는 '원주민들'(natives)로 번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섬에 사는사람들은 배에서 내린 바울 일행에게 적대 행위를하지 않고 동정을 베풀어 불을 피워준 뒤 추위에 지친 몸을 녹이도록 배려(配慮)해 주었다. 더구나 그들이 베풀어준 친절은 일상적인 것이 아닌 특별한 친절이었다. 본문이 보여주는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27 : 24, 25).여기서 '우리'가 뜻하는 것이 276명 전체를 가리키는지(27 :37) 아니면 바울과 함께한 기독교인의 소그룹을 뜻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276명 전체가 하나의 불을 피워 놓고 둘러앉아 몸을 녹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Haenchen). 그리고 이야기의 초점이 바울에게 모아져야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물론 다른 사람들도 적당한 규모로 무리를 지어 불을 지폈을 것이다(Richard N.Longenecker).
=====28:3
독사가...손을 물고 있는지라 - 계속해서 불을 피우려면 많은 나무가 필요했으므로 사람들은 불을 쬐는 틈틈이 마른 나무를 주워 모아야 했을 것이다. 바울은 죄수 신분이기 매문에도 그렇지만 그의 성실한 생활 태도 때문에도 열심히 마른 나무들을 주워다 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마른 나믓가지를 한아름 주워다 불에 넣고옆에 앉아 불을 쬐려니까 그 나무 속에있던 독사 한 마리가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뛰어나와 바울의 손가락을 무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서 '독사'(* ,에키드나)는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에게 사용한 단어이며(마 3: 7 ; 눅 3 : 7), 예수께서도 사용한 바 있는 말이다(마 12 : 34 ; 23 : 33). 그런데 혹자는 오늘날 멜리데 섬에 독사가 없다는 조사 결과와(Preuschen), 바울이 물렸으나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않은 것에 비추어(5, 6절), 바울의 손에 달린 뱀이 독이 없는 것이었을 가능성이있다고 본다(Loisy). 그러나 원주민들이 독사와 독이 없는 뱀을 구분하지 못했을 리없고 의사인 누가가 그런 정도의 구별을 못했을 리 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 섬에 독사가 없다고 해서 오랜 과거에도 없었다고 단정하기 힘들다. 따라서 독사가 아닐 것이라는 견해는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문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생태계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 결과 상당수의 생물이 멸종하거나 도태되어 버리는 것이일반적인 자연 현상이고 보면, 이곳 멜리테 섬의 독사도 이렇게 도태되어 없어진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Ramsay).
=====28:4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 원주민들은 틀림없이 바울이 독사에게 물린것을 확인했고 따라서 그가 죽는 것은 자명한 사실로 여겼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바다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왔으나 끝내 독사에게 물려 죽게 되는 것은 필경 그가 살인자이기 때문이라고 여긴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의' (,헤 디케)가 끝까지 응보한 것이라고 여겼다. '디케'(* )라는 표현은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인과 응보적 정의의 신개념을 나타내는 것인데 누가가 헬라적배경에서 정의의 신을 일컫는 이름인 디케(Dike)를 사용하여 표현한 듯하다(Lenski).그러나 정확하게 무엇을 가르키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아마도 멜리데 섬의 토속 신앙의 대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濟藤篤美)=====28:5
바울이...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 바울은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손을 흔들어 뱀을 불속에 떨어버렸다. 바울은 독사에게 물렸고, 원주민들은 바울이 죽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바울에게는 이상한 일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이것은 막 26 : 18의 약속이'성취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본절에서 '짐승' 으로 표현된 '데리온'(* )은 위험한 짐승 특히 뱀을 가리킬때 사용된 말로 입증되었다(Bauer,Worterb).
=====28:6
그가 붓든지...신이라 하더라 - 바울이 뱀에 물렸으므로 당연히 그의 손이 부어오르고 조금 있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그들이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그 원주민들에게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원주민들은 달리 해명할 길이 없게 되자 바울더러 신(神)이라고 칭하였다. 신의 심판을 받은 자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했던 그들이 이제는 정반대로 바울을 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멜리데섬의 원주민들은 루스드라에서(14 : 11-18)와는 달리 바울을 신으로 경배하려 하거나당연히 신에게 취해야 할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들의 말은 바울이 '신의사랑을 받은 자'라는 의미였을것이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뱀에 물렸으나 기적적으로 생명을 잃지 않은 클레오메네스(Cleomenes)에 대해 '신이 사랑하는 자'(*, 데오필레스) 라고 묘사한 풀루타크의 기록이 있다. 그래서인지 바울은 그들의 생각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바울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고 그분의 은총을 입고 있다는것을 모르는 원주민들로서는 그 이상 달리 생각할수는 없었을 것이다(Haenchen).
=====28:7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 - '제일 높은 사람' 이 이 섬의 토착민 추장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이 섬의 최고 행정 책임자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영수' (領袖)를 뜻하는 '프로토스'(* )가 로마에서 파견한 최고 행정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 용례가 있음을 감안할 때(Corpus Inscripionum Latinarum10.7465),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잇다. 그의 이름 '보블리오' (* ,포플리오스)는 라틴계 이름으로 보이며 '푸블리우스'(Publius)나 '포필리우스'(Popilius)를 그렇게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Ramsay, Haenchen, Bruce). 는누가가 이 사람의 이름만을 기술한 것에서, 석달 동안 바울 일행이 그곳에 머물면서바울, 누가 그리고 보블리오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형성 되었음을 추측하기도 한다(Zahn). 아무튼 이 사람은 바울 일행을 자기집에 영접하여 사흘간 친절한 대답을 하였다. 아마 이 사람은 꽤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소작인들을 거느닐 만큼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28:8
열병과 이질 - 여기서 복수형 '푸레토이스'(* ) 로 묘사된 열병은 멜리데와 지브랄타의 지중해 해역에 오랫동안 널리 퍼져있던 말라리아와 같은 것이다. 이 열병에 걸리면 그 고통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데 보통 4개월이상 고통을당하였고 긴 경우에는 2-4년간 지속되기도 했으며 심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이 병이 멜리데의 염소 젖을 먹고 발병한다는 것과 그 병원체가 미생물 '마이크로코쿠스 멜리텐시스' (Micrococcus melitensis)라는 것이 의학적으로 규명된 것은 1887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뒤센테리오'(* )으로 표현된 보블리오의 부친이 앓고 있는 또다른 질병 '이질'은 곱똥이 나오고 뒤가 잦은 질병을 가리킨다. 의사인 누가는 보블리오의 부친이 앓고 있는 질병을 정확하게 진단하였으나병을 고치는것은 오직 바울의 기도와 안수의 결과였다. 바울이 병을 고치기 위하여기도를 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의미도 있지만 자기를 알리는 의미도 있다고본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병을 고침으로써 자신이 증거하는 복음과 하나님께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기회로 삼고 있는 것이다(R. N. Longenecker).
< 설 교 >
멜리데 섬을 거쳐 로마로
사도행전 28:1-15 / 서금석 목사
육지에 상륙한 바울 일행은 그곳이 멜리데(Malta)섬 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멜리데 섬 사람들은 매우 친절해서 비가 오고 날이 추워지자 자기들에게 낯선 사람들인 바울 일행에게 불을 피워 줌으로써 몸을 녹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바울도 몸을 녹이기 위해 불 옆에 있었고, 불에 넣기 위해 땔감 나무를 집어 넣는 순간 뱀이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멜리데 섬 사람들은 그 뱀이 독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이 믿어온대로 바울은 신의 노여움을 사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바울이 죽지 않자 그들은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루스드라 사람들과는 달리 바울이 독사에 물리고도 아무렇지도 않자 멜리데 사람들은 바울을 숭배하려고 하기보다 신의 사랑을 입은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멜리데 섬의 제일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Poblius)의 집에서 겨울을 보내게 됩니다. 마침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있었는데 바울이 기도하고 안수해 병을 낫게 해 주었습니다. 섬 안의 다른 병자들도 바울을 통해 고침을 받았고, 바울 일행이 겨울을 보내고 로마로 떠날 때가 되자, 섬 사람들은 바울 일행을 잘 대접하고 배에서 먹을 음식과 입을 옷까지 준비해 주었습니다.
멜리데 섬에서 3개월 동안 겨울을 보낸 바울 일행은 디오스구로(Dioskouroi)라는 배를 타고 수라구사(Syracuse)에 도착, 그곳에서 사흘을 머물다가 레기온(Rhegium)에 이르렀고 다시 레기온에서 남풍에 의지하여 340km 떨어져 있는 보디올(Puteoli)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보디올에 도착한 바울은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죄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곳 보디올에서 7일 동안이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백부장의 이러한 배려는 바울이 폭풍 속에서의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준 생명의 은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디올에서 7일 머문 후 바울 일행은 드디어 로마로 향하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바울을 맞이 하기 위해 로마시로부터 50-60km 떨어진 압비오 광장(Forum of Appius)과 '세개의 숙소'라는 뜻을 가진 트리온 타베르논(Tres Tabernae)라는 곳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로마의 성도들을 보면서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한 가지만 물어봅니다. 바울이 멜리데 섬에 도착한 것이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답하기 힘드시지요?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템플이라는 감독이 켐브리지 대학교에서 설교 부탁을 받아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석학들이 모인 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설교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준비해서 당당하게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한 청년이 와서 따져물었습니다.
"목사님,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기도가 응답된다고 말씀하십니까?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어쩌다 그렇게 되는 우연입니다. 그래서 우연의 일치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저 그렇게 요행으로 된 것입니다"
템플 목사님은 청년에게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래! 청년의 말도 일리가 있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도하면 우연이 생기고 안하면 우연이 안 생긴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기도하는 거라네.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우연이든 아니든, 기도하면 응답이 오기 때문에 기도가 중요한 것이라네."
그 말씀으로 인해 그 집회에 큰 은혜가 쏟아졌습니다.
여러분, 이제 대답하실 수 있지요? 우리의 삶이 우연입니까?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1.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미항에서 뵈닉스로 가던 도중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바울 일행은 광풍 속에서 바울의 예견대로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 모두 무사히 한 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그곳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곳이 멜리데 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멜리데 섬은 오늘날 '말타(Malta)'라고 불리우는 섬으로 시실리 남쪽으로 약 98km 떨어진 곳이며 전체 길이가 약 29km 너비가 15km 정도 되는 작은 섬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실 겨울을 좀 편안하게 보내려고 뵈닉스로 가려고 했다가 폭풍을 만나 죽을 고생을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뵈닉스보다 로마에 훨씬 가까운 곳에 도착해 겨울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바울 일행이 멜레데에 간 것이 우연입니까?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평범한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보면 우연일 수 있습니다. 광풍에 휩싸여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배가 파선되고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멜리데 섬까지 표류되어 온 것, 생각해 보면 우연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멜리데 섬은 바울도 그렇지만, 그 배에 타고 있는 사람 누구도 그 섬이 멜리데 섬인지를 알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무도 와 본적이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우연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 믿음없는 사람이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결코 우연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사람도 상함이 없이 왔다는 것이 우연일 수 없습니다. 요즈음도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태풍을 만나 배가 침몰되거나, 난파되는 사건들을 뉴스를 통해 듣게 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마다 어떤 내용이 보도됩니까? 몇 명 죽고, 몇 명 실종되었다는 소식 아닙니까? 시체 찾지 못했으니 실종이지 실제는 죽은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요즈음 배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태풍만나면 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항해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배가 깨어지고 사람이 죽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은 한 사람도 상함이 없었습니다. 실종된 사람도 없었습니다. 죽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배가 성능이 좋아서 그리되었습니까? 항해 기술이 발달되고 장비가 좋아서 광풍을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도저히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납득되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라고 밖에는 고백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계획일까요?
첫째는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할 때, 그 복음의 능력이 명백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데 다른 증인들을 예비해 두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혼자 살아서 로마에 간 것이 아닙니다. 무려 275명의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서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혼자 살아서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는 가운데, 로마로 오는 도중 이러 저러한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또 다시 미쳤다는 소리밖에 더 듣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275명의 사람으로 하여금 폭풍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보게 함으로써 자기들 입으로 하나님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살려 주셨어요. 폭풍 속에서 예수께서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셨어요.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바울의 증거보다 죽음에서 살아난 275명의 증거가 더 위력적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섭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뵈닉스에 바울이 무사히 가서 그곳에서 겨울을 잘 보내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미 하나님은 바울에게 지혜를 주셔서 뵈닉스로 가는 도중에 '하물과 배만 아니라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고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의 말을 믿지 못하고 백부장과 선장 그리고 선원들은 뵈닉스로 가려했습니다. 결국, 뵈닉스로 가는 도중 광풍을 만난 것 역시 철저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의 편의만을 추구하던 사람들, 철저히 자신들의 지식과 기술과 경험만을 의지하던 사람들의 고집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바울 한사람 때문에 하나님께서 뵈닉스로 무사히 가게 했다고 칩시다. 그랬다면 백부장, 선장, 선원들이 '와 역시 바울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는 사람이야'라고 고백했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아마도 '역시 우리의 항해술은 뛰어나'하며 자화자찬 하지 않았겠습니까? 더군다나 유흥도시 뵈닉스에서 3개월 동안 지내면서 온갖 쾌락을 즐기지 않았겠습니까? 뵈닉스에서 무사히 3개월을 보내고 로마로 갔을 때,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게 될 때, 누가 바울의 고백과 증거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것만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뵈닉스로 가려는 사람들에게 광풍의 고난도 주셨지만 은혜도 주셨습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뵈닉스에서 3개월 보내고 그 다음 봄에 로마로 출발했더라면 더 많은 시간이 걸렸겠지만 지금은 조금만 더 가면 로마에 갈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가야만 했던 길을 광풍 때문에 떠 밀려오기는 했지만 많은 시간을 단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멜리데 섬에 도착한 후에도 계속됩니다. 바울 일행이 멜리데 섬에서 원주민을 만났습니다. 섬 사람들의 입장에서 처음 낯선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생각 했겠습니까? 많은 수가 죄수 차림이었을 것이고, 난파되어 간신히 살아 육지에 올라온 사람들의 행색도 말이 아니었을 텐데 섬 사람들로서는 대하기가 편안해 보였겠습니까? 아니면 위협적으로 보였겠습니까? 당연히 위협적으로 보였겠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섬 사람들은 바울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 줍니다. 불을 피워 몸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영접해 줬어요. 쉽게 생각할 수 없었던 일 아닙니까?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뱀이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섬 사람들은 바울이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었습니까? 독사에 물렸다면 당연히 죽어야 하는데 바울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섬 사람들이 바울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결국 바울 일행이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지 않습니까? 유라굴로 광풍과 모래톱에 걸려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바울에게 섭리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욥의 고백을 생각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인생이 고달프십니까? 순간 순간 나의 앞날이 어떻게 될까 걱정되어 불안하십니까? '인생은 고난이다'라고 말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나 기억하세요.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여러분을 더 잘 아십니다. 내가 가는 길 - 나는 어두워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해주십니다. 따뜻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셔서 당신의 넓으신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지 않으세요? 영의 눈을 뜨세요. 기도하세요.
"주님, 내 삶 속에 지금 찾아와 주시옵소서. 제가 미쳐 생각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만져주시고 다스려 주옵소서. 고난 가운데 주님 뜻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역경 가운데 주님의 섭리하심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간구 속에 주님 만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몰려드는 사람들(7-9)
바울을 신(神)이라고까지 생각했던 멜리데 섬의 사람들 중 제일 높은 사람-보블리오가 있었습니다. 이 보블리오라는 사람이 바울 일행을 영접하여 사흘동안 친절하게 돌보아 줍니다. 7-8절 말씀을 함께 봅니다.
"7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8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그런데 바울 일행을 친절하게 맞이한 보블리오의 집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 즉 말라리아와 심한 설사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요즈음에도 말라리아와 이질은 그리 쉽게 치료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의료 기술과 약이 허술했던 당시에는 어떠했겠습니까?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섭리였습니까? 보블리오가 바울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했던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고, 바울 일행 가운데 의사 누가가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성경에는 바울이 보블리오 부친에게 '기도하고 안수하매 병이 낫다'고만 했지만 의사인 누가의 역할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보블리오의 집안은 초상집 같은 분위기가 되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가족들 중에 괜히 낯선 사람들을 집안에 들여 놓아 부친이 말라리아와 이질에 걸렸다고 바울 일행을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구원의 역사를 보이셨습니다. 이런 일이 있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섬에 사는 다른 병자들도 바울에게 몰려왔습니다.
9절을 봅니다. "9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을 고쳐주자 이 소문이 모든 섬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 왔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은혜를 베풀기 시작하니까 역사가 일어나고 그 역사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참으로 귀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왜 섬 사람들이 바울에게 몰려왔습니까? 바울에게서 얻을 것이 있었어요. 먹을 것이 있었어요. 은혜가 있었어요. 기적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바울에게 몰려왔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몰려올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은혜를 나누면 됩니다. 일상 생활을 보세요. 무슨 모임이 잘 됩니까? 모여서 일단 먹는 모임이 잘됩니다. 먹으면 모임이 잘 돼요. 왜? 먹어야 사니까. 먹는 것 속에 나눔이 있어요. 먹는 것 나눌 때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부흥하는 교회가 왜 부흥합니까? 나눠 먹기 때문이지요. 육의 양식도 자주 나눠 먹어야 합니다. 영의 양식도 풍부해야 합니다. '춘천 중앙 교회만 가면 먹을 것이 풍성하다 육의 양식도 풍성하고 영의 양식도 넘쳐 흐른다'하면 모여 들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간에 모이면 영적 교감이 이루어지고, 나눔이 있고, 서로를 위해 사랑하며 기도하는 교회는 부흥합니다. 저는 간절한 바램이 있습니다. 우리 춘천중앙 교회는 성도들간에 육적인 양식의 나눔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나눔도 풍성해 지시기 바랍니다.
나누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강단에 더 은혜가 넘치고, 성도들간에 더 사랑과 간증이 풍성해지고 사람과의 만남에서 음식과 차도 따뜻하게 나눔으로 많은 영혼들이 몰려드는 교회가 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3. 로마에 도착 바울(10-15)
멜리데 섬에서 3개월의 겨울을 보낸 바울과 그 일행은 드디어 로마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0절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릴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바울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입은 멜리데 섬 사람들은 바울 일행이 그 섬을 떠나려고 하자 감사한 마음으로 후하게 대접하고 또 로마까지 가는 길에 배에서 필요한 것들을 실어줍니다. 바울 일행은 폭풍 가운데 장사할 밑천인 밀까지 다 버리고 몸만 남았었지만 이제 필요한 것들은 멜리데 섬 사람들이 채워 줍니다. 이것도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드디어 바울은 로마에 도착합니다.
바울이 어떤 신분으로 로마에 갔습니까? 죄수의 신분으로,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의 모습을 보니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지 않습니까? 병자도 고치고, 친구도 만나고, 로마에 와서는 형제들의 환대도 받고, 여러분,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바울의 삶을 보노라면 순간순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힘을 얻습니다. 움츠려들지 않았어요. 기죽지 않았어요. 오히려 담대해 집니다. 15절 말씀을 봅니다.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바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만일 바울의 삶에 믿음이 빠진 평범한 삶이었다면 바울은 지금까지 버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감옥에서 수년동안 고생했고, 풍랑에서 수없는 죽음의 고비를 맞으면서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쓰러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에 나타난 바울을 보세요. 더욱 담대해지지 않습니까? 오히려 더 힘이 솟아나지 않습니까?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많이 느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내가 신앙생활하지 않았으면 내 인생이 어찌되었을까?' 그런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사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런 고백이 매일 매일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전도하기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체험한 주님의 능력을 말하면 됩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만나는 사람에게 그것을 말하면 그것이 바로 복음 증거 아닙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합니까? 받은 은혜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 속에 고난도 있고, 슬픔도 있고, 역경도 있고, 온갖 어려움이 쌓여 있어도, 우리가 세상을 등지고 살지 않고 세상 속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복음증거입니다. 바울이 로마까지 그렇게 가려고 했던 이유가 복음 증거 아니었습니까?
은혜 받았습니까? 전합시다. 전합시다. 바울처럼 복음 전하게 위해 공부하고 복음 전하기 위해 일하고,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전도합시다. 이것이 성도의 삶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정 리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 일행이 멜리데로 간 것이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멜리데 섬으로 간 것, 그리고 멜리데 섬에서 있었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우연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여세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세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세요. 사는 목적이 바뀔 수 있습니다. 돈버는 것, 명예 얻는 것, 권력 얻는 것 - 이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는 것 - 은혜 속에 아름답게 사는 것 자체가 전도 아니겠습니까?
은혜받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 /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기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침내 로마로
행 28:1-16, 30-31 / 서명성 목사
‘꿈은 이루어진다.’ 2002년 한국에서 열린 월드컵 대회 때 나온 구호입니다. 한국 대표팀은 예상을 뒤엎고 4강까지 오르는 동안 강호로 알려진 폴란드, 이탈리아, 스페인팀들을 하나하나 물리치며 꿈을 현실로 이루었습니다. 그때 장면은 지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뜁니다. 오랫동안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적이 있습니까? 그 꿈이 이루어졌을 때 기분이 어떠하던가요? 교회적으로도 교회당 마련의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2004년부터 기도하며 준비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칼스배드에 구입한 땅에서는 교회당을 짓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적지 않은 부담이던 땅을 팔았고 그 대금을 종잣돈으로 하여 건물을 구입하려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제 에스크로를 오픈하고 산마르코스 시청에서 business zone을 religious zone으로 바꾸는 Conditional Use Permit을 얻어야 합니다. remodeling 설계와 시공을 해야 합니다. 건물 입주는 빨라야 내년 창립주일 때가 되지 않을까 추측하여 봅니다. 교회당 건물 마련하는 것이 대부분의 성도들에게는 일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사건입니다. 교회가 모든 면에서 upgrade 되는 기회입니다. 온 교우들이 하나가 되어 기도로 물질로 시간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로마로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꿈이었습니다. 그 꿈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에 바울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죄수의 몸으로 호송됩니다. 그냥 로마로 끌려가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바울이 탄 배가 심한 풍랑에 시달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배가 좌초하니까, 로마 군병들은 죄수들이 도망칠 까하여 그들을 죽이려하는데 백부장이 막아 바울은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간신히 섬에 상륙하여 젖은 몸을 말리려고 불을 쬐다가 바울이 독사에 물립니다. 시련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그 뒤에는 바울을 통하여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여정 가운데 함께 하시고 마침에 로마로 가게 하십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지금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이 택하신 분들이라면 하나님은 그저 고통만을 위한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사랑의 손길로 인도하시고 크신 능력으로 건지십니다. 여기에 우리가 낙심치 않고 소망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로마로의 여정은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여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기초한 꿈을 꾸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각자에게 부담으로 주시는 그 꿈을 이루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멜리데 섬에 상륙합니다(28:1-10)
바울이 탄 배가 율라굴로 광풍 속에서 표류하였습니다. 풍랑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기진맥진한 무리들에게 바울은 자기가 믿는 하나님께서 배에 탄 사람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계시를 주셨다며 음식을 먹으라고 권합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그들을 인도하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전합니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을 때 배가 모래톱에 걸려 좌초합니다. 배에 탔던 사람들이 헤엄을 치거나 나뭇조각을 붙잡든지 하여 섬에 올라왔습니다. 배에 탄 276명이 바울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 살아났습니다. 그들이 상륙한 곳은 시실리 남쪽에 있는 멜리데라는 섬으로 오늘날 몰타(Malta)라고 불립니다. 누가는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을 원주민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경멸하는 의미가 아니라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지칭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멜리데의 원주민들은 재난을 당한 바울 일행을 불쌍히 여겨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비가 오고 날이 차니까 그들을 위해 불을 피워줍니다. 바울은 어디서나 섬기는 데 적극적입니다. 바울이 직접 나뭇단을 거두어다가 불에 넣는데 그 속에 있던 독사가 뜨거우니 튀어나와 바울의 손을 뭅니다. 그 장면을 본 원주민들은 바울이 틀림없이 살인자일 것이라고 수군거립니다. 그가 바다에서는 운 좋게 살아나왔는지는 모르지만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4절에 언급된 ‘공의’는 헬라 신화에 나오는 ‘정의와 복수의 여신’ 디케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여신이 독사를 보내어 바울을 심판한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며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 때문입니까”(9:2) 이들이 던지는 질문을 보면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소경된 것이 누군가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경된 것도 억울한데 죄 때문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가난이나 질병이나 현재의 고난이 다 과거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인과응보의 사상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일 예배를 자꾸 빠지든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다가 그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면 무엇이라 수군댑니까? ‘엉터리로 신앙생활 하더니 하나님이 벌을 내리셨다’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소경이 된 이유를 과거에서 찾으신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찾으셨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독사에게 물린 것도 그가 과거에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독사에 물린 바울은 별일이 아니라는 듯 그것을 불 속에 떨어 버립니다. 독사의 독이 쫘악 퍼져 몸이 부어오르거나 열이 오르면서 곧 죽을 것으로 기대하고 바울을 계속 지켜보는데 시간이 흘러도 바울은 멀쩡합니다. 조금 전까지 바울을 ‘살인자’라고 부르던 섬사람들이 깜짝 놀라 이제는 바울을“신”이라 부릅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이적이 우상에 물든 그들의 마음을 열게 되었고 그들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접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16:18) 하였는데 그 예언이 바울에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집에 가서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인지 알아본다고 뱀을 집어올리고 독을 마시는 흉내를 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감당할 능력을 주시고 친히 보호하여 주십니다.
독사에게 물렸는데 바울이 무사하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멜리데 섬에 퍼졌을 것입니다. 그 섬의 최고 관리인 보블리오(Publius)가 바울 일행을 영접하고 친절하게 대접하였습니다. 마침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는 것을 알고 바울이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안수하여 낫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소문을 듣고 다른 병자들도 몰려왔는데 바울이 그들을 다 고쳐주었습니다. 바울이 멜리데 섬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병만 고쳤겠습니까? 그동안의 행적을 보면 바울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땅의 것에만 소망을 두고 살던 자들, 쓸데없는 것을 신으로 섬기던 자들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원주민들은 바울을 인하여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복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보블리오는 멜리데 교회의 첫 번째 감독이 되었다가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파선을 당한 그 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제공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섬사람들은 바울이 베푼 은혜에 감사하여 3개월 동안 일행을 정성껏 대접하고 떠날 때는 필요한 물건까지 배에 실어 주었습니다. 복음을 들음으로 사람들이 변화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전도자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변화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바울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나타나야 합니다.
마침내 로마에 도착합니다(28:11-31)
다시 바닷길이 열리는 2월 중순이 되자 바울 일행은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떠납니다. 뱃머리에는 디오스구로(Dioscuroi)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디아스구로는 제우스(Zeus)와 스파르타의 여왕 레다(Leda)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 카스토(Castor)와 폴룩스(Pollux)를 가리키는데 이들은 당시 뱃사람들의 수호신으로 널리 숭배되고 있었습니다. 누가가 디오스구로를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험난한 항해 길에서 누가 진정한 보호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풍랑 가운데서 바울을 포함한 276명을 지킨 것은 디오스구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둔 밤이 지나면 상쾌한 아침도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멜리데에 도착할 때까지 바울 일행은 엄청난 풍랑에 시달렸으나 멜리데를 떠나 로마에 도착하기까지 순조로운 여정이 이어집니다. 시실리 동쪽 항구인 시라큐스(Syracuse)에 배를 대고 거기서 3일을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이탈리아 반도 최남단의 항구인 레기온(Regium)으로 가서 하루를 지낸 후 때마침 불어오는 남풍에 힘입어 이틀 만에 약 230마일을 항해하여 알렉산드리아 곡물 수송선단의 최종 기착지로서 나폴리 만에 있는 보디올(Puteoli)에 이르면서 길고도 험난했던 항해를 마치게 됩니다. 보디올에서 바울 일행은 그곳 그리스도인들의 초대를 받고 일주일을 함께 지냈는데 이는 백부장이 바울에게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보디올에서 로마까지는 125마일 정도 떨어져 있으며 도보로 가야 합니다. 바울 일행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 교인들이 로마에서 약 12마일쯤 떨어진 압비오 광장(Appii Forum)과 약 8,9마일쯤 떨어진 큰 여관의 일종인 트레스 타베르네(Three Taverns)까지 마중을 나옵니다.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바울을 만나기 위하여 거기까지 마중 나온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압비오 광장은 원래 동방제국을 정복한 장군들이 개선행진을 하는 압비오 대로상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 교회의 대표격인 로마 교회의 환영을 받은 셈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를 위해 고난의 길을 걷는 바울을 격려하고자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바울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적으로 큰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압비오 대로를 통하여 바울이 마침내 로마에 도착합니다. 말로만 듣던 로마에 처음 발을 디디는 순간 바울이 얼마나 감격하였겠습니까? 그가 겪었던 수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와서 어디에 머뭅니까? 로마 정부가 제공한 집에 머뭅니까? 아니지요. 바울이 비용을 내어 머물 곳을 구했습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빌립보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후원을 받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만 바울이 재판을 기다리고 받는 과정 가운데 적지 않은 돈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바울은 경비병 한 사람과 함께 실질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가택 연금의 상태에 있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대담을 가집니다. 자기는 회당을 찾아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죽을 고비를 당하고 이렇게 로마까지 죄수의 몸으로 잡혀 온 것도 동족의 시기 때문이지만 동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소망이 예수님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로마로 호송된 이유를 말합니다.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해를 끼치려는 입장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가 지금까지 재판이나 청문의 자리에서 역설하던 바를 이곳에서도 다시금 강조합니다. 자신은 유대의 신앙적 전통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도 없고 로마의 실정법도 어긴 바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은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의 소망에 충실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염려했던 바와 달리 유대인 지도자들은 본토로부터 바울에 대해 아무런 전갈도 받은 것이 없었고, 단지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지역에서 유대인들의 반대를 받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로마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이야기를 일단 들어보기로 결정합니다. 약속한 날에 많은 유대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청중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임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반응은 이번에도 두 가지로 나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사야의 예언(6:9-10)과 같이 완악한 마음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복음에 대해 보였던 것과 같은 열정을 보이지 않고 흩어지고 맙니다. 바울은 그들의 닫힌 마음을 안타까워합니다. 그 결과 구원의 소식은 이방인에게로 전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온갖 역경을 헤치고 로마에 입성하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것은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 상황에서 바로 깨닫기 보다는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아는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섭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때로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백성들도 고난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 탄 배를 풍랑 가운데 멜리데 섬으로 인도하신 것은 헛된 신들만 붙들고 있던 멜리데 사람들에게 누가 참 신인지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사에 물렸으나 바울을 죽지 않게 하셨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보블리오의 부친이나 다른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보여주자 섬사람들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해야 했지만 하나님은 몰타 섬에도 복음이 전해지기 원하셨습니다.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은 당장 어렵고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을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참을 수가 있고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은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비록 현실은 암담하였으나 하나님의 위로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가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하며 감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끌어 가시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당하나 때로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욥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크고 놀라운 일을 많이 준비하고 계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의 손길을 인정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2)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바울이 가는 곳에는 항상 위험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언제나 자기 곁에 계시고 고난을 통해서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끌어내리는 '무거운 짐과 얽어매는 불신앙의 죄'를 벗어버리지 않고는 신앙의 경주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미련, 집착, 욕심 때문에 벗어버릴 것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무겁게 지고 신앙의 경주를 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섬기시며 사명에 충실하셨습니다. 이 귀한 사명은 뒤로 한 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가 나를 알아주느니 않느니 섭섭해 하며 네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사명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맡기신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도 없으나 주님께서 능력을 주시면 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안일함을 벗어버리고 적극적인 자세로 주님께 대한 헌신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하는 모든 일이 귀합니다. 주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신실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모험도 할 줄 아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한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기억하시고 갚아주십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마칠 때 누가 환영합니까?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하나님은 히브리서 12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마라톤 경주를 할 때 코스를 따라 그리고 finish line이 있는 스타디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 달리는 선수들을 환호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달리는 신앙의 경주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 베드로 등등. 그들도 각자에게 주어진 코스를 충실하게 달리고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을 가리켜 단지 관객이라 하지 않고 ‘증인’들이라 부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가 경주하는 것을 단순히 보기만 하는 관중들이 아니라 그들이 본 것을 하나님 앞에 낱낱이 고하는 증인들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달란트 비유를 보면 성실하게 일을 잘한 종들에게 주인은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리라고 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였는데 많은 것으로 맡긴다고 하였으니 종의 노력에 비하여 주인의 보상은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또한 주님 앞에 섰을 때 상급을 바라보며 충성스럽게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
3) 영혼 구원은 계속되어야 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31절). 로마에서 바울 사역의 요약입니다. 바울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된 상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었던 2년의 기간 동안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비록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갈 수는 없었지만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바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죄인의 신분으로 재판을 기다리며 미래가 불확실한 처지에 있었지만 이 기간 동안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치는데 전력하였습니다.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서 풀려난 후 마게도니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체포된 후 로마에서 재수감되었고, 로마 외곽에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마치면서 바울의 죽음이 왜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사도행전은 바울의 전기가 아니라 “땅 끝을 향한 복음의 거침없는 전진”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역사책입니다. 결론적으로 누가는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복음전파의 사명은 모든 역경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누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막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 땅 끝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세력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여 죽이는 권세자들도 복음의 앞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기독교 2000년 역사가 증거합니다. 복음의 역사는 하나님이 바울과 같은 신실한 일꾼을 통해 여전히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교회를 통하여 복음은 여전히 전파되어야 합니다. 교회당 마련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우리가 더 훈련받고 준비되어 영혼 구원에 힘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일어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귀한 역사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주신 사명에 충실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분들이 믿음을 가진 사명자, 목표가 분명한 사명자, 인내하는 사명자, 열정을 가진 사명자들이 되셔서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여 주님이 예비하신 상급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드디어 로마에!
행 28장 1~31절 / 이동휘목사
1.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작정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은 기근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행11:27-30). 그래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들러 구제 헌금을 모아 기근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롬15:26)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바울은 이렇게 예루살렘에 구제 헌금을 가져가면서, “(행19:21)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며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결심을 하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결심한 것은,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유럽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를 전초 기지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는 세상의 중심이라고 할 만큼 번성했을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몰려온 다양한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기에 선교 효과가 클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도나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한 곳에는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롬15:20)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그래서 그는 이미 다른 전도자들이 교회를 세우지 않은 유럽으로 시선을 돌려 로마로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돌아려는데 돌아가는 길에 들린 교회마다 예루살렘에 돌아가지 말라며 성도들이 울며 극구 말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행21:11-13)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이 예루살렘에 돌아가자, 과연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을 충동하여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심지어 성전에 이방인과 함께 들어갔다고 소리지르며, 바울을 외진 곳에 가두고 폭행까지 휘두릅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 성이 소동이 나고 그 소문이 로마 주둔군 천부장에 들어가자 급히 군사들을 거느리고 현장에 도착합니다.
(행21:27-32)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천부장은 바울을 체포하고 군중들에게 무슨 일로 그러냐고 묻지만, 그 진상을 제대로 알 수 없어 바울을 영내로 연행합니다. 그리고 이튿날 유대인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 세워 심문을 받도록 했지만, 바울에 대해 유죄를 인정할만한 사실이 없어 천부장이 다시 영내 감옥에 투옥합니다. 그 밤에 바울은 하나님의 이같은 말씀을 듣게 됩니다.
(행23:11)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다음 날, 산헤드린 법정에서 유대인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여러 장로들이, 자신들이 꾸민 거짓 소문을 가지고는 바울을 죽일 수 없게 되자 바울이 정치적으로 소란을 일으켰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로마 총독에게 고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벨릭스 총독을 비롯하여 그 후임 베스도 총독, 그리고 아그립바 왕에게까지 심문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 총독들에게 심문을 받을 때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합니다.
(행26:27-29) (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바울은 이렇게 심문을 받으며 자신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로, 유대인들의 재판을 받지 아니하고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 재판받기를 원한다고 상소합니다.
(행25:9-12) (9)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돌아오기 전에 자신이 로마에 복음 전하고자 한 결심과, 또한 하나님께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느니라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 베스도 총독에게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호송되어 가게 됩니다. 항해 중 배는 유라굴로라는 무서운 광풍을 만나 파선(破船) 당하게 됩니다. 파선의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27:22-26)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비록 죄수의 몸으로 호송되어 가는 바울이지만, 그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그 배에 승선한 276명이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않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복음 전도의 사명을 지닌 바울 사도 한 사람으로 인해 그들 모두가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2. 배는 파선되었지만 그 배에 승선한 276명(행27:37)은 하나도 생명을 잃지 않고, 당시 카르타고의 점령지였던 멜리데 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원주민들의 특별한 동정을 얻어 따뜻한 영접을 받았습니다. 원주민들이 불을 피워준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한 아름의 나뭇단을 거두어 불 속에 넣었습니다. 그 순간 그 나뭇단에 숨어있던 독사가 불의 뜨거움으로 인하여 바울의 손을 물고 늘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토인들은 바울이 살인죄를 범한 자로서 저주를 받아 곧 죽을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독사를 불에 털어버리고 아무런 해함도 상함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에 토인들은 바울을 신(神)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같은 이적(異蹟) 외에 그 섬에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는 것을, 바울이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이후에 그 섬에 병든 자들을 다 고쳐주었습니다. 과연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도록 여러 표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막16:17-18)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은 시종 일관 초자연적인 역사(役事)였습니다.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신 사실이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사실 등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길 없는 이적들인 것입니다. 이외에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 기간 수많은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적을 행하신 목적은 먼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 즉 구세주이심을 믿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초월적인 여러 표적과 이적들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과 영혼까지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에게 자기의 말을 믿을 수 없거든 자기의 행한 일들이라도 믿어,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자신이 계시고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깨달으라고 친히 권고하신 바 있습니다.
(요10:37-38)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특히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육체와 영혼의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서 죄와 사탄과 온갖 저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이심을 밝히 증거해 보이신 것입니다. 바울은 멜리데 섬 원주민들에게 단순히 그들의 육체적 질병만을 고쳐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그들에게 영혼의 구원을 가져다 준 것이었습니다. 조난자들을 환대했던 멜리데 섬 원주민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좋은 전도 대상자였으며, 바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불을 쬐면서 독사에 물렸지만 아무런 해함을 받지 않게 된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믿게 하고, 그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들려오는 말씀을 믿게 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모두가 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주어진 사건들이었습니다.
3. 멜리데 섬에서의 이적들로 인해 후한 대접을 받은 바울 일행은 석달 후 드디어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의 형편은 복음 전파에 전혀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죄인의 몸으로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루 종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로마법을 준수하는지 예의 주시(銳意注視)했습니다. 일종의 가택 연금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가 거처하고 있는 작은 집을 오로지 복음전파의 본거지로 만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죄인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가능한 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로마에 복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로마 선교전략은 바울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그에게 오도록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자유의 몸일 때에는 회당이나 시장에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갇힌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문서선교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로마에서 감금된 생활 가운데 네 개의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등 옥중서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여 복음을 전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시도 좌절해서 부여된 사명을 저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2년 동안 체류하면서 하루도 태만하게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결박되어있는 몸이었지만, 로마 사람들에 의해 결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결박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포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포로”였으며, “그리스도께 얽매인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자신의 서신들 맨 앞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종”,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이라고 자신을 불렀던 것입니다.
(빌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몬1: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
우리는 비록 바울과는 달리 신체적인 고통을 당하지 않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역시 신체적인 장애나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서 제약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은 어떠하든지, 그 제약된 상황이 하나님께서 주신 전도의 기회임을 믿으시고, 그야말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처럼 항상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된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자기 처소에 초청한 사람들은 유대인들 중에 가장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 자신이 로마에까지 오게 된 경위를 간단히 설명합니다. 한마디로 바울이 그렇게 쇠사슬에 매인바 되어 로마에 오게 된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함이라고 증거합니다.
(행28:20)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쇠고랑을 찬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까지, 죽음을 무릎쓰고 달려온 것인가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가문이나 학벌, 뛰어나 문벌이나 지식 등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얻어 한 치도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푯대를 향해 달려 온 그 험한 길은, 오직 “이스라엘의 소망” 즉 온 인류의 소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영혼이라도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진정한 소원은 자기 형제요 동족인 이스라엘이 이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고 구원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러한 고백을 지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롬9:1-3)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2) (1절에 포함됨)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스라엘이 사는 길이 이 길 뿐이었습니다. 그것만이 이스라엘의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그외에 이스라엘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노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 민족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인류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나라 민족이 살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인류가 살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이 나라 민족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는 길만이 나라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념 정책 제도 등이 나라 민족을 살리는 것 결코 아닙니다. 먼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거듭나야만 합니다. 한 나라 민족의 흥망성쇠는 전적으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는 나라 민족은 결코 바로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만이 이 나라 민족의 소망이 있으며 사는 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나라 민족은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39: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것은 참 소망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라 민족과 온 인류의 산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주님이 주신 소망만이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한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가 어두워지고 세계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면 휘말릴수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은 더 찬란히 빛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의 소망입니다. 이 나라 민족의 소망이며 소망이어야만 합니다. 이 민족에 대한 소망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두고 복음을 전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미 성령님을 통하여 이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증거한 복음의 내용은 “인류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행28: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옛날 궁중에서 왕을 즐겁게 하고 때로 왕이 잘못을 했을 때 풍자적인 놀이로 왕의 잘못을 깨우치게 했던 직업 가운데 광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광대의 바보 같은 익살을 보고 임금님께서 당신의 지팡이를 건네주며 “너보다 더 멍청한 사람을 만나면 이 지팡이를 주라.” 고 말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 임금님이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유언을 하며 임금은 “이제 나는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난다.” 고 말을 하자, 광대가 앞으로 나서며 “폐하, 폐하께서는 다른 나라를 방문하실 때 꼭 사신을 보내 준비토록 하셨는데, 이번 여행도 충분히 준비를 하셨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물론 왕은 전혀 준비를 못했노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때 광대는 가장 바보같은 사람에게 주라고 했던 그 지팡이를 임금님께 건네주며 “폐하, 나보다 더 멍청한 사람을 이제야 발견했습니다. 이 지팡이를 받으시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여러분,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한 사람이 넓은 길로 가지 않고, 좁은 사잇길로 가다가 그만 실수로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그곳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써도 자기 힘으로는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꼼짝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깨끗한 옷을 차려입은 어떤 젊잖으신 한 분이 그 옆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하고 소리치는 그 사람에게 지나가던 젊잖으신 분이 혀를 끌끌 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군자 대로행이라 했거늘 사나이가 왜 좁은 사잇길로 가다가 그 꼴을 당하는고. 또 설사 수렁에 빠졌기로서니 대장부가 젊잖지 못하게 꽥꽥 소리를 질러!” 그러고는 그냥 지나가더랍니다. 누구의 가르침이겠습니까? 바로 공자의 가르침입니다. 잠시 후 또 다른 사람이 지나갑니다. 또 그 사람은 지나는 사람에게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역시 그도 구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인생은 어차피 고해이니라. 생노병사에 시달리는 또 하나의 중생이 있구나. 거기서 잠시 고행을 하여 지푸라기라도 잡고 나올 수 있는 힘을 기르시오.” 하고 자기 갈길로 바삐 지나가 버렸습니다. 누구의 가르침입니까? 이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입니다. 잠시 후 세 번째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이번만은 꼭 살아야겠다는 신념으로 더욱 목청껏 죽을 힘을 다해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이 세 번째 사람은 “너는 왜 넓은 길을 놔두고 좁은 길로 가다가 이 고생을 하느냐?” 하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불쌍하다고 동정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대로 수렁으로 뛰어들어 빠져서 다 죽게 된 그 사람을 강뚝에 건져내고는 자신은 나오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대신 죽어갔습니다. 이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당시 세계의 지배자인 로마에서 2년 동안 체류하면서 선포한 것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오늘날 증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교회가 전해야 하는 것은 “국민의 뜻”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하나님의 백성은 군주제나 민주주의를 위하여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 그가 만왕의 왕이시라는 진리, 그의 법이 모든 인간의 법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 오직 그의 뜻이 이루어질 때만이 비로소 사람들이 더욱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위하여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은 사도 바울의 로마 선교에 있어서 최고의 주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를 증거하는 데 있어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은 적들이나 감옥이나 쇠사슬이 있는 곳에서도 결코 방해를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매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연합하여 기독교의 증거를 대적한다 할지라도, 결국 그들의 세력은 부서지고 파괴되고 망하여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과거에 이 증거의 말씀이 아닌 로마와 네로가 망하고 무릎을 꿇었듯이 말입니다. 이 세상의 세력들은 결국 망하고 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유대인들에게 전했으나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이러므로 복음은 이제 이방인들에게 돌아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행28:26-28)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기거한 곳은 23절의 “우거하는 집”과, 30절의 “셋집”이었습니다. “우거하는 집”과, “셋집”은 다릅니다. 처음에 바울은 로마 병사가 그의 곁에서 감시하는 상태로 손님으로서의 친구의 집에 우거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들을 불러 모아서 강론한 곳은 바로 이 ‘우거하는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들에게로 돌아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후에는, 자신이 세낸 집에서 2년 동안 기거하였습니다. 로마의 죄수로서 언제라도 황제 앞에 불려 나갈 입장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로마 당국은 그가 로마에 머물 수 있도록 그의 숙식 비용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에서의 복음전도 사역을 위해 자신이 집을 세내어 우거했던 것입니다.
후에 로마의 황제가 기독교를 신봉하게 되어 교회의 후원자가 되는 때가 왔습니다. 이 때 황제는 교회당을 세워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즉 로마가 교회를 후원했을 때야말로 기독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어둡고 파괴적인 시기였습니다. 황제가 교회를 위하여 교회당을 마련해 줄 때에는 그가 교회를 좌지우지하기 마련입니다. 세속 권력이 교회의 일을 다스리게 되면 “교회”는 세속 권력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이용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 로마의 죄수, 사도 바울이 로마의 재정적인 지원 하에 숙식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마다하고 자신의 비용으로 셋집을 얻어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은 짧고 간단하지만 아주 숭고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종결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지금 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사도행전의 역사를 계속해 나갈 것인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계속 기록해나가는 사명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리우기 파라시오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죽을 때에 이상하게 그 얼굴이 이지러지고 해서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그는 바이올린 수집가였다고 합니다. 한평생 246개나 되는 바이올린을 세계 도처에서 수집했습니다. 그저 진기한 것이라면 사다가 자기 집 천정에 감춰놓고서 그 비싼 바이올린을 만져보고 쳐다보고 쓰다듬으면서 즐겼다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그는 바이올린을 즐긴 것 같으나 바이올린의 선율을 즐길 줄 몰랐던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름다운 선율을 강탈하는 죄를 지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이올린으로 좋은 음악을 연주해서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줘야 했었는데, 전부 사들여서 꽁꽁 묶어 놓았으니 바이올린은 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좋은 바이올린이 썩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인도 바로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행28: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는 마지막의 말씀이, 성도 여러분을 통해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를 계승해가는 성도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위대한 기적
행 28장 1~10절 / 유민용목사
오늘은 성령강림후 마지막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 스물여섯번째 주일이 지나고 나면 교회력으로는 한해가 또 다시 시작됩니다. 12월 첫째 주일이 한해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의 순환은 매년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고, 사순절 기간에는 주님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며, 부활주일을 거쳐 승천하신 주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26주 동안 성령강림절기로 보내게 됩니다. 예수님 생애에 대한 주기는 우리에게 예수의 옷을 입혀 주고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생애 사이클에 삶을 조율해 나갈 때 그리스도와 한몸의 원리로 연합되어지게 됩니다.
지난 주일 바울과 그 일행은 죽음의 유라굴로 강풍을 만나 갈 방향을 잃어 버린채 800km를 표류했습니다. 14일이 지나고 난 후 아침 그들이 타고 있던 배가 한 섬에 상륙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풍랑에 의해서 800km를 표류한 배가 로마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있는 멜리데 섬에 걸렸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멜리데 섬 근처 뻘에 배 앞부분이 걸려서 배가 파손되자 수영할 수 있는 사람들은 먼저 헤엄을 쳐서 육지로 나가고 이후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과 부조물을 의지해 헤엄쳐 지상으로 나왔습니다.
인생이 그렇지요. 풍랑을 만나고 역경속에 놓여 질 때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막연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오늘 그리고 내일의 시간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믿음의 길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고 부르심을 따라 응답하며 믿음으로 걷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바다 한 가운데 항해하는 것 같을 때에도 믿음으로 부르심에 응답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해도 달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살 소망 조차 잃어 버렸던 이들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은 배가 파선 되는 위기속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게 육지에 상륙했으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이끄심을 알게 해 줍니다.
2절을 보면 때마침 비가 오고 날이 추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가 11월이니까 겨울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 낮은 기온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노년의 때가 되어 육체가 쇠약해진 바울을 비롯해 겨울 바다를 헤엄쳐서 상륙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불이었습니다. 누가는 그 섬에 살던 사람들이 불을 피워 주면서 친절하게 대해 주며 맞이해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어찌 보면 276명은 배가 난파되어 구조된 난민들입니다. 14일 동안 먹지 않았으니까 몸은 극도로 쇠약해 져 있었을 것이고, 몸에 비축했던 당분도 바닥이 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어진 환경속에서 섬에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 통해서 환대를 받게 하시고 3개월이라는 시간동안 바울에게 쉼을 주십니다.
(1) 환대의 기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갑자기 몇 백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섬에 상륙했다면 경계하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2023년 세계난민의 날 국제구조위원회에서는 유엔난민기구(UNHCR)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전 세계적으로 난민들이 많아져서 강제로 고향을 떠나게 된 이주민이 1억 1천만명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 숫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인데요. 아무래도 계속되는 전쟁과 여러가지 전염병으로 인해 세계경제도 불안정하다 보니까 안타깝게도 안전을 찾아 헤매는 난민들이 환영 받지 못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경쟁력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현대사회속에서 낯선 이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는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섬사람들이 보여준 모습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에게도 인상 깊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믿음은 구조된 사람들을 환대했던 섬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믿음의 태도는 세상속에서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구원은 자기중심적 죄의 뿌리가 뽑히고 하나님의 사랑에 다시 뿌리 내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내가 원하는 것만 요구하지만 믿음이 성숙해 지면 나만 옳다고 여기는 생각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게 됩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말하는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게 할테지만 기적의 시작은 환대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환대하는 사람입니까? 경계하는 사람입니까? 주님은 연약한 우리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시고 두팔로 감싸주심으로 십자가를 참으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후 바울을 통해서 놀라운 기적과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3절을 보면 바울이 주변을 다니며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섬사람들이 피워 놓은 불 속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었습니다. 불에 내려 놓을 때 나뭇가지에 숨어 있던 뱀이 뜨거우니까 튀어 오르며 바울의 손을 문 것입니다. 그 뱀은 분명히 독사였습니다. 섬 사람들은 독사에 물린 바울이 살인죄를 지어 정의의 여신의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죽을 때만 기다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바울에게 아무런 이상도 나타나지 않자 섬사람들은 바울을 신으로 오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제와 다르고 오늘이 다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바라보고 믿고 있는지에 따라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섬에서 독사의 물린 사건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하나님의 사람 바울을 주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 일 후에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섬의 가장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에게 까지 알려지게 됩니다. 보블리오는 친절하게도 사흘씩이나 자신의 집에 유숙할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독사에 물린 사건으로 인해서 섬 전체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에서 뱀은 인간의 원죄를 가져 오게 한 간교한 동물입니다. 죄의 기원도 뱀이 간교함으로 인간을 미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뱀을 악의 세력을 대표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뱀은 피조물 가운데 한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영리함을 선물 받은 피조물이었는데 슬기로움에서 간교함으로 변질되어 하나님의 선물을 악용한 것입니다. 멜리데 섬에서 뱀은 오히려 바울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해주는 도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아니하며..”주신 권세를 기억해 보면(막 16:18)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이끌릴 때에 주께서 주신 권세를 성취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는 선과 악의 양면성이 누구나 존재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할 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권고하셨지요. 뱀처럼 슬기롭게 세상속에 살아가며 비둘기처럼 거룩함을 더하라는 뜻일 겁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의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자 하나님은 불뱀으로 그들을 치셨고, 구리뱀을 만들어 쳐다보는 자들을 낫게 하십니다. 구리뱀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예표하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날 죄악된 세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주의 피로 씻김을 받게 됩니다. 지친 마음을 위로 받게 되고요. 그 사랑은 바닷물과 같아서 평생을 마셔도 마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회복될 때까지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마치 마음의 성전에 새로운 가구가 들어서는 것과 같이 새로운 마음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섬기고 환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도들에게는 '독(毒)도 약(藥)이 됩니다. 독은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잘 활용하여 약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벌의 침은 독이 있지만 봉독을 소염 진통제로도 사용하고, 그 안에 멜라틴이라는 성분은 혈액순환과 면역기능을 강화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뱀에 있는 독에서 추출한 ‘캡토프릴’도 고혈압 치료제로 사용한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독은 무엇일까요?
토마스 머튼은 ‘현대사회에서 돈은 성령이 교회에서 차지해야 할 역할을 악마적으로 찬탈해 버렸다’라고 했습니다. 돈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협할 수 있는 어두운 면과 좋은 면인 양면성을 다 지녔습니다.
돈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돈의 풍족함은 신앙생활을 잘했다라고 하는 축복의 표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대상은 언제나 가난하고 상처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뜻은 돈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보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물었을 때에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돈의 힘을 거부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 힘은 우리를 사로잡는 영적인 힘이고, 죄의 유혹으로 끌고가는 힘입니다. 인간은 경제적인 사회 구조를 벗어나서 살아 갈수는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출세를 하고 공적인 위치에 있다면 그 이유는 부와 권력까지도 선한 영향력을 위한 일로 사용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바울은 배고픔과 풍족함이라는 모든 환경에서 만족하는 비결을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땅에서 재산, 후손을 얻었지만 그는 여전히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습니다. 이스라엘 자녀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어 들일 때 하루 먹을 분량 이상의 것은 썩게 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매일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는 법을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물질적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뢰를 배워가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격려 해야 합니다. 성도 간의 교제 안에서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이 하나님의 품을 느낄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노동을 통해 재정을 채워 가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며 감사를 배우는 것입니다. 매일밤 뒤척이며 잠못 이루던 날들을 보낸 이는 아침에 일어나서 잠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일은 하나님과 깊어지는 시간이 됩니다.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되어 간다면 이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믿음이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3) 기적은 값없이 받은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멜리데 섬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신앙은 미신적이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뱀에 물렸으니 신에게 벌을 받는 자로 여기고 몸이 이내 부어올라 당장 쓰러져 죽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자 생각을 바꾸어,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울을 숭배했다는 언급은 없는 것으로 보아 바울이 신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여겼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소문이 멜리데 섬의 추장이던 보블리오에게 까지 알려졌던 것입니다.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의학적으로 고열과 이질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던 점을 감안해 볼 때에 매우 정확한 진단이었을 것입니다. 의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이 병을 쉽게 치료하지만 당시에는 이질이 걸린 환자로 인해 세균이 전염되어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생명을 잃게 되는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병들어 있는 보블리오 아버지에게 겁 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가갑니다. 고열과 이질에 걸려 병상에 누워있는 것을 알고도 손을 얹고 기도한 것은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이 병에서 치유된 소식은 온 마을에 삽시간에 퍼졌을 것입니다. 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자신들의 병도 고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로 가는 길에 거쳐가는 작은 섬이었지만 복음이 필요한 그곳에 바울을 보내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병에 대한 이유를 묻지도 않고 기도해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결과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는 문화속에 있습니다. 결과에 따라서 믿음도 평가합니다. 믿음을 설명하려고 하다 보니까 원인을 규명하게 되지요. 그런데 세상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예기치 않은 문제 앞에서 한결같이 질문합니다. 주님,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부족하고 잘못된 일들을 밝히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인해 섬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마음 한켠에는 소외된 마음이 있었을텐데 바울의 치유사역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에게 찾아온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줍니다. 이것이 다시 한해를 살아가기 위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권세입니다.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믿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멜리데 섬에서의 뱀에 물린 사건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말씀해 줍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었던 보볼리오가 멜리데의 섬에 세워진 바울 기념 교회의 최초 감독이 되었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멜리데 섬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 예배를 드리던 장소인 지하 묘지 카타콤(Catacomb)'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말타섬에는 90%가 넘는 인구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삶의 위기는 단순히 시련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값없이 받은 그 은혜를 전하는 자의 삶은 나의 만족과 유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척박한 삶의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며 대강절기를 보내게 되는데 성탄의 기쁨을 사모함으로 기다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마쳐졌지만 이제부터는 각자에게 허락하신 거룩한 사명으로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실 사도행전 29장을 써 나가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은혜를 만나게 하셨지만 이제 다음의 역사하심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부어지는 기적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기적의 주인공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양향모목사 / 행 28:1-10
바울이 죄수의 몸이 되어서 예루살렘을 떠나 로마로 가는 여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가이사랴에서 아드라뭇데노라고 하는 작은 배를 타고 가서 루기아의 무라에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서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대형선박인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갈아타고 로마로 가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백부장에게 겨울이 가까이 오니까 여기서 겨울을 지내고 출항하기를 권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마침 순풍이 불어오니까 출항을 하였는데 바울이 염려했던 대로 유라굴라 광풍이 불어와서 14일 동안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면서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한 섬에 도착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대로 276명의 사람이 다 살아서 육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정식 항구도 아닌 이상한 곳에 배를 간신히 대고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수영해서 올라가고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널조각이나 기구들을 타고 육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무슨 섬인지 모르고 올라와서 보니 그 섬에 멜리데라고 하는 섬이었습니다. 멜리데는 지금의 몰타라는 섬나라를 말합니다. 제주도의 6분의 1 정도 되는 아주 작은 섬이지만 주변의 작은 섬들과 함께 한 나라를 이루고 있는 섬입니다.
바울 일행이 그곳에서 3개월 정도 머무르면서 겨울을 지내고 봄에 로마로 출항을 했습니다. 그 3개월 동안 바울이 특별히 복음을 전했다는 기사는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당연히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도착한 그 만을 사도바울의 만이라고 부르고 있고 그 항구를 사도바울의 항구라고 지금도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곳곳에 사도바울의 행적을 기념하는 기념교회들이 세워져 있고 그 나라의 국민 95%가 비록 천주교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 일행이 그 멜리데 섬에 도착하여 그 섬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것과 그 섬에서 일어난 몇 가지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받을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본문 1~2절 말씀에 “1.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멜리데라고 하는 섬에 올라갔더니 거기에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원주민들이 특별한 동정을 베풀고 그들을 영접하였다고 했습니다. 원주민들이 그들을 영접하고 특별한 동정을 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원주민들이 바울 일행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14일 동안이나 별로 먹지도 못하고 파도와 싸워서 그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 비는 오고 날씨도 춥고 옷은 이미 다 젖었고 그냥 두면 다 쓰러져서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특별한 동정을 베풀었을 것입니다. 불을 피워서 옷을 말리게 하고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나누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생각할 것은 당시의 원주민들이 그렇게 사람들을 도와주고 할 그런 착한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삼백여 명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곱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흉악한 죄인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갑자기 강도로 변해서 난동을 부리고 덤벼들어서 자기들이 가진 것을 빼앗으려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진심으로 도와줄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그 일행을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착한 마음으로 바꿔주셨을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에 임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착한 마음으로 바꾸어 주신 것은 더 큰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착한 마음으로 대하였고 바울은 그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주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별로 배운 것도 없는 원주민들이었지만 그들에게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가 광풍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도착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곳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원래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이런 착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마음을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함께 살아가도록 착하게 창조해주셨습니다.
그런 우리가 타락하여 악한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사탄이 우리 마음을 장악하여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못되게 하고 서로 시기하고 싸우는 나쁜 마음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런 타락한 마음에도 성령님께서 오시면 다시 착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악한 영을 쫓아내고 착한 마음을 가지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만 믿으면 되니까 예수님을 믿고 나서 악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믿으면 모든 죄가 다 용서받게 되니까 예수님 믿기 이전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의 마음에 성령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실 때만 우리가 진심으로 바른 믿음을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믿음만 고백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주십니다. 새사람으로 바꿔주시고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살게 해주십니다. 나도 행복한 사람이 되려고 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주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한꺼번에 완벽하게 깨끗한 마음이 되지는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계시면서 점점 더 그런 착한 마음을 가지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고백할 때 이미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해주시지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점점 더 착한 마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여기 모인 저와 여러분은 정말로 다행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도록 악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저히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도록 마음이 악해져 있고 죄악에 깊이 물들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술, 마약, 사기, 도박, 오락이나 쾌락에 빠져서 바른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미 사탄에게 충성스러운 종이 되어서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을 하는 것은 그들이 사탄의 종이 되어 죄악에 빠지기 전에 복음을 알게 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강도같이 흉악한 죄인이 된다고 해도 성령님께서 그를 변화시켜서 예수님을 믿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아주 특별한 경우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한번 악에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사탄의 종으로 평생 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래도 비교적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산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착한 사람이 되게 해주셨고 세상의 죄악에 물들기 전에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살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조심할 것은 이미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사탄이 다시 우리를 자기 종으로 삼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시초는 우리가 죄를 짓게 하고 죄에 물들어서 믿음을 유지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믿음을 지키는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본문 3~6절 말씀에 “3.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5.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멜리데 섬에서 일어난 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라고 한다면 사도바울이 독사에게 물렸으나 아무 일 없이 살아난 일일 것입니다. 메리데 섬에 바울이 독사에 몰린 이 자리에 기념교회를 세워놓을 정도로 특별한 일입니다.
비가 오고 추우니까 사람들이 나무를 가져다가 불을 피웠습니다. 바울도 나뭇단을 가져다가 불에다 넣었는데 그 나뭇단 속에 있던 독사가 뜨거워서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원주민들이 그것을 보고 바울이 독사의 독 때문에 죽을 줄 알았습니다. 독사의 독 때문에 온몸이 퉁퉁 붓든지 아니면 갑자기 쓰러져 죽든지 할 줄 알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독사를 털어서 불에 넣어 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이 가진 두 가지의 생각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공의에 관한 사상입니다.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그 대가로 벌을 받게 된다는 사상입니다.
바울이 뱀에 물렸을 때 그 원주민들이 생각하기를 바울이 살인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살인죄를 지었기 때문에 신이 풍랑을 일으켜서 죽이려고 했지만 어쩌다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죽음을 피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공의가 살아 있어서 결국 독사에 물려 죽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우리 인생들 양심 속에는 이런 공의의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짓을 하고 사는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이 잘 지켜지면 모든 사람이 다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과 그를 따르는 악한 사람들이 이런 질서가 지켜지지 않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잘살고 착하게 사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원리에 따르면 착한 사람이 복을 받고 잘 살에 되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악하게 사는 사람은 반드시 그 죄악에 대하여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서 이런 하나님의 원리를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원리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착하고 바르게 사는 삶을 통하여 의로운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완전하게 착한 사람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한 사람이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이 벌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독사에게 물렸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보고 원주민들은 사도바울을 신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신이라고 하면서도 그 앞에 절을 하거나 예를 갖추지 않은 것을 보면 신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신이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을 정말로 신이라고 생각했다면 신을 두려워하고 섬기던 당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신 앞에 벌벌 떨면서 신에게 예를 갖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만 신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신이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함께하신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사람들이 보아서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바울과 함께하셨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것 같지만 그 어려움을 이기고 피할 길을 하나님께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시고 늘 함께 해주십니다. 비록 세상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어려움을 당하기는 하지만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지혜도 주시고 힘도 주시고 기회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특별히 하나님께서 자녀처럼 여겨주시는 특별한 우리 성도들은 그런 경험을 많이 하면서 삽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는 합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일도 능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본문 7~10절에 “7.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8.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라고 했습니다.
멜리데 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보블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멜리데 섬이 그렇게 일찍 복음을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기독교 국가로 남아 있는 것은 이 보블리오라는 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도자가 악한 생각을 가지고 바울 일행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 다른 방법을 통하여 바울 일행을 로마까지 인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블리오가 지도자로서 바울 일행에게 호의를 베풀고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그들이 대대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본인 자신도 친절한 마음으로 자기 땅에다가 임시숙소를 만들고 바울 일행을 영접했습니다. 그런 친절이 또 더 좋은 일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로 누워 있을 때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안수함으로 낫게 해주었습니다. 당시의 이질을 동반한 열병은 사람의 손으로 고칠 수 없는 중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고칠 수 있는 병이었습니다.
그의 부친뿐만 아니라 섬에 사는 많은 사람도 그 소식을 듣고 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보블리오의 친절 덕분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입은 보블리오와 섬사람들은 석 달 동안이나 후한 예로 그들을 대접해 주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섬을 떠나서 로마로 향할 때 필요한 것들을 배에 실어 주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사는 삶의 원리도 이런 친절을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잘 되어야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잘되도록 도와주면서 사는 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베푸는 삶이 우리의 삶에도 기적을 불러오는 삶이 됩니다. 이렇게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동정의 삶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으면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를 베풀고 또 성찬예식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예식은 우리가 피로 세운 새 언약에 참여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복을 받고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산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더 착하고 보람된 삶을 살려고 다짐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행 28장 1~6절 / 신성종목사
오늘의 요절은 5절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바울이 그 짐승(독사)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독사들을 손으로 떨어뜨렸는데도 상함이 하나도 없을 수 있습니까?
이 독사들은 중국의 [백보사]나 인도의 코브라나 방울뱀 종류를 말하는데 한번 물면 두 이빨 자국으로 독이 신경계통이나 혈관을 통해서 주입되어 죽게 만드는 무서운 뱀입니다.
뱀은 파충류 중에서 가장 특수한 동물인데 지상에 약 2,700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뱀 중에서도 독사들은 독니가 있어서 두 가지 일을 합니다. 하나는 먹이인 동물을 포식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자기를 방어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떻게 뱀을 집었으나 조금도 상함이 없었는지부터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뱀에 의해 바울이 상함을 받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1)[예언의 성취]때문이었습니다(막16:18절).
마가복음 16장에 보면 믿는 자에게 나타날 4가지 표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냅니다.
둘째는 뱀을 집어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넷째는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경우는 두 번째의 표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적이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항상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자기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막16장의 표적이 일어나는지를 실험하는 사람들이 매년 몇 명씩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그 결과로 생명을 잃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에 관한 많은 예언들이 있습니다. 약 390 여 가지가 되는데 현재로서는 주님의 재림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다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메시아의 시대가 올 때 많은 이적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때에도 일어났고, 바울을 통해서도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바울의 머리카락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하였던 것입니다.
(2)바울이 로마에 가서 [해야 할 사명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손을 쓰신 것입니다.
구약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에게도 꼭 같은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명은 생명을 가진 모든 피조물에게 다 있습니다. 심지어 하늘의 구름과 바람도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발에 차이는 돌들도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필요하게 만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사명이 중요한 것은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사명이 있는 동안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망각하고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몇 번에 걸쳐 경고도 하시고, 깨우쳐도 주시지만 그래도 안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가룟 유다처럼 버리시는 것입니다.
(3)바울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귀한 사도임을 증명]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도 귀중품은 잘 보호합니다. 혹시나 도적이 와서 훔쳐 가지 않을까? 깨어지거나 더럽혀지지 않을까? 하면서 보호하는 것입니다.
저의 집에도 도적이 왔다 갔습니다. 가장 큰 손실은 저의 컴퓨터였습니다. 남들에게는 별것 아니지만 그러나 제게는 많은 자료가 되기 때문에 귀중품 중에서도 귀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창조한 것과 또 예수님의 보혈 때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자중자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귀중품이고, 또 예수님의 보혈로 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4)[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믿는 사람들에게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머리카락은 하나가 없어도 아프지도 않고, 변하는 것도 없고,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머리카락 하나도 손대지 못하도록 하신다는 말은 우리가 너무도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마와 오른 손에 인을 찍으신다고 했는데 왜 그런지 아십니까?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을 찍으신 것은 어느 누구도 손을 델 수가 없습니다.
예 화
1887년 애굽에서 [텔 엘 아마르나 문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주전 14세기 전의 외교 문서로 360개나 되는 점토판에 바빌로니아 설형 문자로 조각된 고대 역사 연구에 신기원을 연 보화이다.
하루는 고고학자들이 애굽 벌판에서 땅을 파기 시작하였는데 근방에서 농사를 짓는 여자들이 이 낫선 외국인들을 귀찮은 침입자로 여겨 흙덩어리를 던졌다. 이 흙덩어리를 보고, 이거다 하면서 고고학자들이 기뻐했다. 이것이 바로 텔 엘 아마르나 문서였다.
애굽의 사람들은 평생 밟고 다니면서도 그 귀중함을 알지 못하였던 것인데 나중에 그것이 보화 중에 보화임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들은 다 흙으로 만들어진 애굽의 점토판과 같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예수님의 보혈로 산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세상은 광야이기 때문에 항상 위험이 따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1)무엇보다도 사명의 사람인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온 천하보다 귀중하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귀중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 하고 분해를 했는데 칼슘과 철분과 석회석 등으로 분해를 해서 값으로 따지니까 10달라가 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귀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요 사명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명을 버리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사명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참으로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2)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편 91:4절에서 말씀했습니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요15:4절에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함께 혹은 안에 있다는 말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주님께 꼭 붙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그리스도에게 꼭 붙어있으면 우리들은 많은 열매도 맺거니와 항상 그의 보호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3)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악한 세력과 싸울 때에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기 때문입니다.
엡6:16절에 “모든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상대적인 것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절대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심지어 운동선수가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면 자기의 실력의 두 배 이상의 힘을 가집니다.
하물며 우리들이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면 무슨 일을 하든지 승리합니다. 믿습니까?
찬송가 397장 2절을 다 함께
“온 인류 마귀 궤휼로 큰 죄에 빠지니 진리로 띠를 띠고서 늘 기도 드리세. 참 믿고 의지하면서 겁 없이 나갈 때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4)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능력은 기도할 때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막9:23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했고, 막9:29절에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 해전에 미국에서 아폴로 13호를 달나라를 향해서 쏘아 올렸다. 고장이 날 확률은 백만분의 1에 불과할 만큼 거의 완전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아폴로 13호가 지구를 떠나서 20만 마일 되었을 때에 산소통이 터졌다. 더 이상 우주여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돌아올 수 있는 지를 나사 본부로 물었다.
창 밖을 보면 북극성이 보일 터이니 그것을 기점으로 해서 돌아오라고 했다.
이제 세 우주비행사는 우주의 미아가 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 때에 미국의 대통령 이하 모든 국회의원과 온 국민들이 오전 9시를 기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마침내 아폴로 13호는 무사히 돌아왔다. 이들이 돌아온 후에 주간 타임지 표지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크게 게재되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인 스위저트란 사람이 기자회견 석상에서 이렇게 고백을 했다. “우리들은 지구에 계신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다. 이 기도의 힘으로 우리들이 돌아왔다고 확신 한다”.
이처럼 기도는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된다.
맺는 말
우리가 사는 세상은 광야이기에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과 접붙여져 있으면 조금도 상함이 없이 보호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사명이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들을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보호해주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사명을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서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은 왜? 이적은 또 왜?
행 28:1-10 / by 고동엽
지난 주일, 제자훈련 강사로 오셨던 분이 돌아가는 길에 큰 교통사고를 당하셨는데, 모두 운전자가 사망하였으리라 여겼던 사고에서 아주 경미한 부상을 당하고 무사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도 장로 부인 권사님들이 기도원에서 3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중앙선을 넘어오는 덤프 트럭과 충돌하는 대형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사고에 비하면 피해는 너무나 적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지켜주셨음을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어느 분이 “왜 큰 사고에서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아예 사고가 나지 않게 해주시지 않으셨을까요?” 하는 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웃었지만 정말 생각해 볼 질문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마 그런 생각을 평소에 하셨던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성도들이 고난 중에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과 같은 일들을 통해서 보호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을 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는데, 애초에 그런 어려움이 없게는 못해주시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지난 주일 이상춘 장로님께서 주일예배에 함께 참석하여 모든 교인들이 뜨거운 박수를 쳐드렸습니다. 2006년 7월 간암 3기 진단받은 날 장로님은 수술받고 침상에서 병마와 싸우기 보다는 마지막 남은 심지를 주의 일을 위하여 태우다가 하나님께 가리라 결단하고 퇴직 후 섬기던 여주교도소로 가셨습니다. 그 후 기적과 같은 4년 동안 참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엄격하셨던 교정 공무원이시라고 들었는데, 미소천사로 사셨습니다. 수많은 재소자가 장로님 통하여 새 삶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말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간의 혈관이 터져 병원으로 후송 가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장로님을 부르시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장로님 마음에 ‘하나님 내가 다시 일어나서 교우들과 함께 예배 드릴 수 있는 역사를 보여주세요.’ 하나님이 정말 함께 하시고 역사하셨음을 보여달라는 간절한 기도에 믿어지지 않을 회복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결국 교우들과 함께 예배 드리시고. 그래서 우리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도록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올려드린 것입니다. 장로님의 암투병 그리고 그 암 중에도 사역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아니시면 도무지 할 수가 없는 역사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에 질문이 생기기를 ‘간암되시고 난 다음에 이런 기적적인 역사를 주시는 것도 너무 놀랍지만, 아예 암에 걸리지 않게 해 주시면 훨씬 더 좋았을 걸.’ 그런 생각도 듭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수많은 이적들을 행하여 성도들을 고난에서 건져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고난을 주시고 이적을 주시는 것입니까? 아예 고난 자체를 주시지 않으시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섭리에 대하여 귀한 깨달음을 주십니다.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14일 동안 죽을 고생하였던 바울 일행 276명이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멜리데(Malta)섬에 상륙하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멜리데 섬 원주민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276명이라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조난을 당해서 들어오는데다가 거기에는 로마 군인도 있고 죄수들도 있었으니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될지 그들도 처음에는 난감했을 것입니다. 비가 오고 날은 추워 조난당한 자들을 동정하여 불을 피워 주었는데, 사도 바울이 땔감 나무를 불에 넣기 위해 집어드는 순간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순간 멜리데 섬 사람들은 바울이 대단히 큰 죄를 지어 신의 노여움을 산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풍랑에서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으나, 독사에게 물려 결국 죽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바울이 붓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태도가 180도 바뀌어 신이라고 부르며, 멜리데 섬의 제일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Poblius)가 집으로 초청하여 대접을 하였습니다. 마침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바울이 들어가 안수하여 기도하니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섬 안의 다른 병자들도 너도 나도 와서 바울을 통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멜리데 섬 사람들의 대접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군인들도 있고 죄수도 있는 276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난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 이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바울을 '신'이라고 부르며 일행들을 잘 보살펴주었을 뿐 아니라, 겨울이 지나 로마로 떠날 때가 되자 배에서 먹을 음식과 입을 옷까지 준비해 주었습니다.
사실 유라굴로 광풍에서 276명이 다 구원받은 일도 기적입니다. 선원들도 믿을 수가 없었던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싸개로 보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일을 보면서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이적을 베풀어주셔서 하나님의 사람을 보호하시고 도움을 받게 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이 남습니다. 이런 이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왜 풍랑은 막아주시지 않으셨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선원들이 겨울을 유흥가에서 보내려는 의도로 무리한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났지만,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셔서 뵈닉스까지 잘 가서 편안하게 겨울 잘 지내고 로마로 가게 할 수도 있었지 않겠습니까?
풍랑을 만나 죽을 고생을 하게 하고 겨우 목숨은 살려 주신 후 멜리데 섬에 올라갔을 때, 이적이 일어나 뱀에 물려도 살고 병든 자들을 고치게 하셔서 잘 대접받게 하시고, 로마로 가게 하셨다.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고난을 주시기도 하고 기적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당할 때 이적을 볼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할 때, 이미 있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16절에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자유를 누립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들어갔을 때 분명히 재판을 받을 죄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지 않고 군인 한 사람과 함께 따로 지내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자유인처럼 삽니다. 23절에 보면 마음껏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집에 사람들이 마음대로 찾아오고 그래서 로마에서 복음을 마음껏 전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로마에 살았던 적도 없고 아는 일가 친척도 없었으며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을 죄인의 신분이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인이 무려 275명이나 함께 로마로 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폭풍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보았던 275명이 한결같이 자기들 입으로 하나님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말하라 말라 했겠습니까? 자기들이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얼마나 이야기하고 싶었겠습니까? ‘사도 바울 이 사람이 보통 분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고 저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은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을 우리들이 다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몇 번 씩이나 죽을 뻔했습니다. 이 사람 때문에 다 살았고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아마 275명이 광고하고 다녔다면 로마가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에 대한 대접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죄인 취급을 받지 않고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비밀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 일행이 유라굴라 풍랑을 피하게 하여 뵈닉스 항구에 무사히 도착하여 겨울을 잘 보내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군인들과 선원들, 그리고 많은 승객들이 유흥도시 뵈닉스에서 3개월 동안 지내면서 온갖 쾌락을 즐기지 않았겠습니까? 그랬다면 편안한 여행은 했을지 모르지만,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게 될 때, 누가 바울의 고백과 증거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었겠습니까? 복음 증거는 사도 바울 혼자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무슨 관심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가 참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에 도착하기 이전에 바울의 일행에게 왜 그렇게 극심한 시련을 주셨는지 이제는 좀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왜 고난을 허락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통하여 더 유익한 것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무슨 유익입니까?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증거되는 유익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적은 왜 일으키시는 것입니까?
역시 십자가의 예수님의 증인을 세우시려고 이적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275명 다 살려 주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도 버리지 않고 다 살려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증인을 만드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는 흉악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시다. 그들도 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으니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큰 증거가 되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에 한 사람도 소홀히 생각하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쓸데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고난이 닥치기도 하고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 모든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로 하여금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의 증인되게 해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진짜 살아계시구나, 예수님 십자가 복음이 참 복음이구나.’ 하는 것을 증거하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고난이 오든 이적이 오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고난과 이적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냐 역사하시느냐 하는 것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고난은 하나님이 안 계신 증거요 이적이 일어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라고 여깁니다. 아닙니다. 고난이냐 이적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증인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닥쳤다고 낙심할 것도 없고 이적이 일어났다고 흥분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시려는 성령님께 민감하면 됩니다.
에베소서 6장 16절에서 마귀가 불화살로 공격을 하여 성도도 넘어뜨리려고 역사하니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엡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여러분,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습니까? 믿음의 방패가 제대로 된 방패인지 아닌지 잘 점검하셔야 됩니다. 마귀가 불화살을 쏘았는데 방패로 막았다고 막았는데 뚫고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믿음의 방패를 가지기는 했는데 제대로 된 방패를 가져야 됩니다. 제대로 된 방패인지 아닌지는 무엇을 믿느냐고 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어서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면 하나님이시구나. 고난이 오면 하나님이 안계시구나. 무엇을 가지고 믿음을 삼으려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은 지금 가짜 방패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종이 방패 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불화살을 쏘면 그것은 견디지를 못합니다. 왜? 하나님의 능력은 마귀도 얼마든지 흉내 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방패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춘 믿음은 믿음의 방패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이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자는 미혹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마귀도 얼마든지 이적을 행할 수 있습니다.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능력인 것처럼 역사하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표적이나 기사나 이적만 보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거나 이적만 추구하면 반드시 실족합니다. 마지막 때가 오면 다 넘어갑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고 고난이 오면 한 순간에 다 무너져 버립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지려면 믿음을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사랑이시고 지혜가 충만하시며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에 초점을 맞추어야 마귀의 불화살 공격을 능히 이길 믿음의 방패가 됩니다.
욥은 믿음의 방패를 가졌던 전형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큰 복을 주시자 사단은 욥을 참소하기 시작합니다.
욥 1:9-11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지금도 마귀는 이렇게 우리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참소합니다. “잘 될 때나 믿는 것이지요. 이적이 일어날 때나 믿는 것이지요. 고난만 당해 보세요. 어려움만 겪게 해보세요. 다 하나님 욕하고 하나님 어디 계시냐고 하고 떠나가지요.” 그렇게 마귀가 우리 믿음을 조롱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욥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이 본성상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은 아니다!” 그리고는 사탄이 욥을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욥 1: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여러분, 사단이 우리를 참소해서 우리 믿음을 하나님이 점검하시려고 때때로 우리에게 고난을 주셔도 시험을 주셔도 하나님은 다 사단에게 맡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절대 손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어떤 어려움과 시험이 있다 할지라도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절대 마귀가 손 대지 못하도록 지켜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아야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셔도 끝까지 지켜주시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 중에 정신 놓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면 깨닫게 됩니다.
욥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말할 수 없는 시험이 자기에게 닥쳐왔을 때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왜? 욥은 하나님의 능력에다 초점을 맞추어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도무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형편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자기 재산 다 날아가고 자식들 다 죽고 자기 몸에는 악창이 났어도 그는 사랑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욥 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이런 믿음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욥은 고난이냐 축복이냐를 보고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믿기로 결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은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기에게 있던 많은 복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내가 태어날 때 알몸 밖에 무엇이 있었나?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기 몸은 그대로니 “하나님 찬송 받으세요!” 고백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믿음이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방패입니다. 욥이 믿음의 방패를 제대로 가지고 있었으니까. 마귀가 욥의 입에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비난하고 원망하도록 그렇게 역사했지만, 오히려 욥의 입에서는 하나님께 찬송이 나왔지 않습니까? 그래서 욥이 나중에 갑절의 복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신실히 믿어야 됩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든 이적을 경험하든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로 인해서 예수님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증거되도록 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어느 자매가 보낸 상담 편지를 받았습니다.“저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이렇게 시작하는 메일이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쯤부터 우울증으로 인해서 자살도 하려고 했었고, 스트레스로 몸, 마음이 모두 망가져서 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 많이 원망했었고, 신은 없다고 믿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제가 5살 때 이혼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교도소에 가기 일쑤였습니다. 7살이었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빠는 없고 아빠 편지만 있어서 참 많이 울었답니다. 그때도 아버지는 교도소에 갔습니다.
저는 그 이후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전화 한 번, 따뜻한 말 한 번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둘째 새 엄마와 잠깐 살았었지만 동생을 임신하고는 친 엄마와 자기 중에 엄마를 결정하라고 다그치셨고, 주저하면서 대답을 못하자 저를 할머니에게로 돌려보냈습니다.
아빠가 너무 무서웠지만 그래도 사랑했는데, 고등학교 기숙사 사감 선생님께 상담한 것을 알고는 심한 욕설을 하며 엄청나게 화를 내셨습니다.
견딜 수 없어 친 엄마에게‘너무 힘드니까 데려가 달라.’고 했을 때, 엄마는 거절하였습니다. 수련회를 갔다가 정말 엄마를 용서해야지 결심하고 연락하였을 때, 미안하다며“엄마가 다시 전화 걸께.”라는 말을 끝으로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집에서 혼자 울고, 너무 힘들어서 차에 뛰어들려고도 하고, 창문에서 떨어지려고도 하고, 손목도 그어보고, 약도 먹어보려고 하고, 유서도 써놓았습니다.
부모님을 용서하고, 원망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엄마도 힘들고, 아빠도 힘드니까 나라도 힘내야지. 그러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부흥회를 참석하면서 .친 엄마가 계속 생각 났습니다. 너무 외롭고. 정말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런 나 자신이 너무 싫었습니다.
저는 단 한번도 나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저도 언젠가는 예수로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 메일을 읽고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 설교는 어쩌면 이 자매를 위해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이들이 너무나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있습니다. 고난을 주목하느라고 여전히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느 경배와 찬양 집회에 소록도에서 오신 노인들의 간증과 찬양 순서가 있었습니다. 10여 명 모두 70세 전후의 노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시각 장애자들이었습니다. 10살 전후로 문둥병이 들었고, 그 합병증으로 30세 전후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하나님께 넘치게 감사하는 고백과 찬양을 드렸습니다. 한 분이 이렇게 간증을 시작하였습니다.“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너무 감사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그가 감사한 것은 나병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영원한 소망을 갖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자기를 버린 부모와 형제를 원망했던 것 조차 회개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자리에서 가장 감사를 넘치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고난이냐 이적이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 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정말 믿고 다시 상황을 보면 전혀 새로운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반드시 함께 하시는 주님을 알게 됩니다.
이랜드그룹 회장이신 박성수 장로가 창업 10년쯤 된 어느 날, 지난 10년을 회고하다가 중요한 하나님의 교훈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10여 년 동안 몹시도 괴롭히던 동료 세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의 괴롭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랫동안 참고 인내하면서 그리스도의 본을 보여 줌으로 결국은 그 세 사람이 참으로 많이 변화되어 지금은 그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인물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자신이 이러한 인내와, 오래 참음과 본을 보인 일에 대해서 늘 뿌듯함과 자랑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마음 속에 이렇게 질문하시더랍니다. ‘너는 누가 가장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을 받은 박성수 장로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많이 변화되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세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 세 사람이 투입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도 허락하시고 또 이적도 행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과 이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여러분, 마음 열고 “주님 그렇게 하십시오! 제게 어떤 일이 있든지간에 저를 통해서 예수님이 증거되기 원합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주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십시다.
은혜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역사를 찬송합니다.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감사하게 하소서.
찬양하게 하소서.
믿음의 방패를 듭니다.
고난이 오든 이적이 나타나든 오직 예수님이 증거되기 원합니다.
멜리데에서의 기적
행 28:1-10 / 김좌근목사
서론: 지난 주일에는 행 27:27-44을 본문으로해서 '멜리데에 상륙'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폭풍을 만난지 14일 만에 바울과 또 그와 함께 배를 타고 가던 275명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헤에 의해 폭풍에서 구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 때문에 그 함께한 275명의 생명을 구해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멜리데라는 섬에 상륙하게 되었지만, 선장과 선주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배와 운반하던 모든 짐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그 댓가를 치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결정을 내리게 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행 28:1-10입니다. 바울과 그 함께한 사람들이 멜리데에 상륙한 후 두 가지 기적이 일어납니다. 첫번째의 기적은 바울 자신에게 일어났고 두 번째의 기적은 바울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기적이었습니다. 기적은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 그리고 개인의 경험을 통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믿는 사람들은 기적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보면 기적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십니다. 우리는 바울이 경험한 기적을 통해 성경에서 보여주시는 기적에 대한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1) 본인에게 나타난 기적 (1-6): 1. 바울과 그 일행이 구조되어 알아보니 그 섬의 이름이 멜리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멜리데는 지도에서 보시는 것처럼 이탈리아 바로 남쪽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2. 겨울에 비가오니 날씨가 아주 추웠습니다. 그 섬에 사는 원주민들이 바울일행을 동정해서 바깥에 불을 피워주었습니다. 3. 사람들이 둘러 서서 불을 쬐고 있는데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가지고 와서 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랬는데 불이 뜨거우니까 그 나무 묶음에서 독사가 한 마리 나와서 바울의 손을 물고 있었습니다. 아마 살모사나 그런 뱀이어서 사람들이 보면 바로 독사인 줄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뱀인것 같습니다. 4. 뱀이 사람을 물고 있으니 원주민들은 바울이 무슨 죽을 죄, 즉 살인죄 같은 것을 지어서, 비록 바다에서는 구원을 받았지만 이 세상의 공의가 있으니 그 공의가 결국 바울을 그냥 두지 않고 뱀에 물려 죽게 만드는구나고 생각했습니다. 5. 그런데 바울은 그냥 그 뱀을 불에 떨쳐 버렸는데, 바울의 손에 큰 상처가 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6. 독사에게 물리면 금방 손이 붓든지 갑자기 쓰러져야 하는데 제법 오래 있어도 바울에게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보고 생각을 바꾸어, “아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신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일반적 상식이나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상황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논리나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따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 16:14-18). 신기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기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그러한 기적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흔히 열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기적을 추구하는 경향성을 기지고 있는데 그러한 태도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열심히 전할때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러한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복음은 전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퉁족시키기 위해 기적을 추구하면 바리새인 같이 위선하게 됩니다 (막 8:11-13). 이러한 원리를 이해하면 크게 무리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2) 남의 유익을 위한 기적 (7-10): 7. 그 멜리데 섬에 로마에서 임명된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보블리오입니다. 이 보블리오가 바울과 그 함께 있는 사람들을 자기 집에 초정해서 사흘간이나 머물게 했습니다. 8. 그런데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었습니다. 바울이 들어가서 안수기도를 하니 그 병이 나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를 들으시고 보블리오 부친의 병을 낫게하신 것입니다. 약 5:13-18을 보시면 병든 사람들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 죄에 대해 사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에 죄사함에 대한 확신을 주실 것입니다. 장로들이 의사는 아니지만 의사들이 못 고치는 병을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도록 기도드릴 수는 있습니다. 9. 그랬더니 그 섬에 잇는 많은 사람들이 병든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이런 기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때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 14:34-36). 10. 그 후에 바울과 그 함께한 사람들이 멜리데를 떠나 로마로 갈 때에 잘 대접하고 사람들이 쓸 것을 배에 실어주었습니다. 감사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님의 은사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고 도움이 되게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전 12: 4-11). 자신의 과시나 다른 비정상적인 목적을 위해 성령님의 은사를 오용하지 말며, 또 그런 사람들에게 현혹되지 않아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 것은 가장 큰 기적은 죄인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적입니다.
멜리데 섬에서 생긴 일
행 28장 1-10절 / 이준원 목사
오래 전 한국 KBS의 <역시스페셜>에서 조선시대 시인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의 이름은 ‘정초부’입니다. 정초부라는 사람은 그 당시 굉장한 시인이었지만, ‘초부’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조선시대 최하층인 천민 노비인 초부, 즉 나무꾼이었습니다. 이름도 없는 나무꾼 정씨였습니다.
한시는 운율이 있고 기승전결 구성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한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하고, 그와 함께 15가지 정도의 한시 작성법을 알아야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비도 10년 이상 공부를 해야 제대로 시 한 편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노비였던 그가 어떻게 그런 한시를 지을 수 있었고, 그것도 조선 후기 최고 시인들의 작품을 실은 <병세집>이라는 책에 그의 시가 무려 11편이나 실릴 정도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습니까?
그의 시집을 찾아낸 연구 팀은, 노비 정씨의 재주를 알아본 주인 여씨가 자기 아들 여춘영의 글공부에 노비 정씨도 함께 배우게 해주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조선 후기 명문가 양반이었던 여춘영이라는 사람은 어린 시절에는 그를 노비가 아니라 스승으로 대했고, 나이 들어서는 친구로 여겼다고 합니다. 결국 여씨는 정초부가 45세 때 그의 노비증서를 불태우고 면천시켜, 현재 양평군 양근 근처 갈대울에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참 얼마나 놀라운 사람입니까.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었고 신분제도가 엄격하던 시절에, 여씨는 하인을 친구로 여겨 깊은 교분을 나눴을 뿐 아니라, 그의 시를 사대부 시회에 소개했고, 심지어 ‘동원아집’이라는 양반 모임에 가서 시를 나눌 수 있게 기회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때 나무꾼 정씨가 왔을 때 양반들이 ‘아니, 이런 천한 것이 어디 감히 여기를 오는가?’라고 하며 내쫓은 것이 아니라, 그의 시에 감명을 받은 양반들이 그가 살던 월계협으로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최하층 천민인 노비가 양반들을 뛰어넘는 시인으로 높임을 받았던 일이 있었다는 이 사실을 보면, 조선시대의 우리 선조들이 전부 다 꽉 막힌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그들은 우리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삶 속에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누리는 축복이 자기에게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못 누리는 사람들도 누리도록 흘려 보내주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분과 재산과 사회적 위치와 학벌 등으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자기 입맛에 맞게 재단하며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이 요즘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한 이 시대에, 그런 넓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서 우리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나에게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흘려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멜리데 사람들의 호의와 뱀의 출현 (1~6절)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1절)
안전하게 구조된 후 알고 보니까, 그 섬은 현재 몰타(Malta)로 불리는 멜리데 섬이었습니다. 몰타 섬은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있는 시실리(Sicily) 섬과 북아프리카 튀니지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인데, 현재는 전 세계에서 은퇴 후 가장 살기 좋은 곳 중 하나로서 상위권에 올라 있는 곳입니다.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2절)
지금은 개역개정을 사용하지만 이전에 한국교회에서 사용하던 개역한글 성경에 오타나 잘못된 번역이 많아서 개역개정으로 바꾸었습니다. 개역한글에서는 섬의 원주민들을 ‘토인’이라는 단어로 번역해서 마치 대충 아래만 걸치고(?) 사는 아프리카 토인들을 연상하게 했었지만, 지금 사용하는 개역개정에서는 ‘원주민’이라고 잘 번역했습니다.
원주민이란 단어가 영어성경에는 ‘islanders’라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가 헬라어로 ‘바르바로이(barbaroi)’입니다. 바로 여기서 영어의 ‘barbarian’(야만인)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당시 로마의 라틴어나 그리스의 헬라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말하는 민족 출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이 마치 ‘바르바르’ 하고 중얼중얼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에, 로마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다 ‘야만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을 무시하는 표현입니다. 강한 민족이 약한 민족을 무시하는 겁니다. 실제로 멜리데 혹은 몰타 섬 주민의 다수는 카르타고 출신으로, 페니키아 말을 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로마 사람들이나 그리스 사람들에게 무식한 야만인으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멜리데 사람들은 풍랑 이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오다가 난파하여 헤엄쳐서 탈출해 온 이들이 아주 지쳐 있었고, 비바람에 온 몸이 물에 젖어 있는 이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 줄 아는, 아주 친절하고도 따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보통 이상의 친절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과 동정의 마음이 있었고, 난파된 외국인들에게 불을 피워 따뜻하게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일부 크리스천들, 특히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만 사랑과 친절이 있고,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인격도 예의도 사랑도 없는 것처럼 짐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데, 특히 시골 같은 데 가보면, 소위 입만 살아 있는 일부 교인들과는 달리, 교회에 안 다녀도 손님 대접을 너무 잘하고 나그네를 환대해주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슬람권에 가면 문화 자체가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 보는 외국인인데도 자기 집에 오라고 해서 대접합니다. 이전에 갔을 때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들이 가장 크게 환영하는 표시는 음식을 갖다 주는 것이었는데, 특히 2리터짜리 코카콜라를 갖다 주며 마시라고 했습니다.
이런 환대를 바울과 뱃사람들과 장사꾼들과 로마 군인들과 심지어 죄수들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성경 말씀에서 가르쳐주는 것처럼 나그네를 환대하고 친절을 베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마땅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조금이라도 실천해보자고 해서, 목장 모일 때 돌아가며 자기 집을 열어 대접하는 겁니다. 섬김의 훈련을 하자고 돌아가며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금요찬양집회가 있는 주에 손님 초대의 날을 해보자고 하는 것도 그런 취지입니다.
그런데 자기 집을 오픈해보고 손님 초대도 좀 해보자고 해도, ‘그런 걸 왜 하나’ 하며 싫어하고 귀찮아하고 회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건 믿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못하는 것은 괜찮지만, 일부러 싫어하고 회피하고 귀찮아한다면, 그렇게 하는 우리가 세상을 향해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믿는 우리보다 더 잘 대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멜리데 섬 사림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떠내려온 사람들이 죄수인지 군인인지 장사꾼인지 묻지 않고, 폭풍을 만나 난파하고 물에 빠져 추위에 떨고 있는 사림들을 위해 모닥불을 피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로 몸을 녹일 수 있도록 아주 큰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보여주어야 할 일입니다. 보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런 게 나와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만인이라고 무시당하던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이 그런 일을 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들에게서 우리는 이런 점을 배워야겠습니다.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3절)
아마도 바울은 그들의 친절한 행동을 받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너무나 지치고 힘든 상황이었으며 이전에 고문을 당하는 등 몸도 온전하지 못했지만, 같이 돕기 위해 일어나서 땔감으로 나뭇가지를 한 묶음 모아 불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뭇더미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독사가 불길에 놀라서 나오며 바울의 손을 무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뱀이 바울의 손을 물고 가만히 있는 겁니다. 3절 끝에 “물고 있는지라”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를 보면 바울의 손에 뱀이 붙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붙어 있으니까 사람들은 뱀이 물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4절)
멜리데 섬 원주민들은 난파선에서 헤엄쳐 나온 많은 사람들이 죄수라는 것을 로마 군인들로부터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독사가 바울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목격했을 때 ‘이 사람은 살인자가 분명하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뱀이 문 것을 보니까 살인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비록 죽음의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지만, 몰타 섬 포에니족의 신화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신 디케에 대한 개념에 의하면 그가 죄인이기 때문에, 공의가 살려두지 않고 결국 처벌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공의’라는 것은 정의(justice)라는 뜻도 있지만, 그리스 신화에서는 인간의 행동을 심판하고 처벌하여 질서를 바로잡는 공의의 여신 ‘디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사상은 인과응보적 처벌 또는 복수입니다.
그런 사상적 배경 속에서 몰타 원주민들은, 유대 최고의 율법사에게 훈련을 받았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 사도로 세움을 받아 그 동안 복음을 열심히 전한 바울을 살인범이라고 하며 인과응보의 사상으로 심판을 받은 것으로 여기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갖는 가장 가벼운 생각은, 어떤 사람이 회를 당하거나 재난을 당할 때, ‘저 사람은 분명히 뭔가 죄를 지었다. 인과응보다. 하늘의 권선징악이다. 정의의 여신이 살아 있다.’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불교에도 인과응보와 업보의 사상이 있고, 성경도 죄의 결과나 죄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죽음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업보나 인과응보 개념을 뛰어 넘습니다.
욥기를 보면 욥의 네 친구가 가지고 있었던 사상이나 유대교 랍비들의 가르침도 사실 불교의 인과응보 개념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특히 유대인 문헌인 탈무드나 미드라쉬 같은 데 보면, 질병을 갖고 태어난 아이의 문제에서 랍비들이 가르치는 내용, 유전적 질병을 가지고 있는 태아의 문제에 대한 생각에서 그런 사상, 즉 뭔가 죄나 잘못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사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지난주 큐티 본문 중 하나가 요한복음 9장이었는데, 9장 2절에 보면 제자들이 지나가다가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청년을 만나서 예수님에게 질문합니다.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이것은 율법에 기초한 삶을 살던 유대인들에게 일반적으로 깔려 있던 시상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요 9:3, 새)
예수님은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렇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이게 다 업보나 이전에 지은 죄에 대한 인과응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도 굉장히 많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누가 어떤 일을 당하니까 ‘저 사람이 뭔가 잘못했나 보다. 제대로 못 살았나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때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한 일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분명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어서 나자마자 눈이 안 보였던 이 사람의 경우나 구약의 욥의 사건을 보면, 전혀 인과응보 개념과는 다른, 온 우주의 주안이신 하나님의 주권 속에 벌어지는, 그러나 우리가 당장은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에 대해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관점을 배우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우리가 좁은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끔 보면 ‘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이렇고 저렇고, 예수가 이렇고,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 이런 걸 왜 믿는가?’라고 합니다. 객관적으로 열심히 연구한 결과 그런 결론을 얻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말이 안 되니까 못 믿겠다’고 하면 그것은 전혀 검증되지 않은 생각이 아닙니까?
우리 좁은 머리로 어떻게 다 이해합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셨던 것이 무엇인지는, 욥기를 끝까지 읽어보고, 요한복음을 잘 읽어보고, 또한 사도행전도 28장까지 다 읽어보면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나에게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는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함부로 ‘저 사람, 뭔가 잘못해서 저렇다. 신앙생활을 잘 못해서 저렇다. 뭔가 죄가 있어서 저렇다. 하늘의 벌을 받는 것이다.’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 한국 교회 교인들 가운데 여전히 암이나 어떤 불치병에 걸렸을 때 그 사람이나 부모나 조상의 죄 때문이라고 하는 사상이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이단 시비가 붙었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라는 책이 인기가 있었던 겁니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너무 많이 간 내용입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 근처에 있던 교회에서 아주 젊은 장로님들을 대거 세웠습니다. 40세 전후였던 분들을 한꺼번에 장로로 세웠습니다. 그 중 한 분이 택시 운전을 하던 분이었는데, 강도를 만나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저도 장례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들어갈 때 보니까 뒤에서 몇몇 어른들이 수군수군하고 있었습니다. “저 장로님이 요즘 교회에도 잘 안 나오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 했대.”라고 한 겁니다. 어린 마음에 ‘그런가?’라고 생각했지만, 그때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이 장로인데 신앙생활을 잘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에이, 그냥 죽어라’ 하고 벌을 내리셔서 죽은 겁니까? 그게 성경적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당장 알 수 없습니다. 특히 그 가정에 어린 아기도 있었는데 그 가정에 그것이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겁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하나님과 제대로 관계를 하지 못할 때 만약 나에게 어려움이 온다면, ‘아,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한 번 주님 안에서 정결하게 해주시려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하고, 잘 섬기고,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도 열심히 하고, 기도의 사람, 말씀의 사람. 믿음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어려움이 왔다면, 갑작스런 질병이 찾아오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회사에서 잘렸다면, 이것은 분명히 연단입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이것을 통해 훈련시키셔서 정금과 같이 나오게 하시려는 훈련의 과정입니다. 만약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아, 하나님이 지금 나를 훈련시키셔서 더 크게 쓰려고 하시는구나!’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의 올바른 생각입니다.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그들은 그가 붓든지 혹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5-6절)
바울이 독사에 물린 것을 보고 멜리데 사람들은 그가 죽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바울은 그 위험한 뱀을 불에 툭툭 털어 버렸고, 조금도 상하지 않았으며 쓰러져 죽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죽겠지’ 생각했는데 전혀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복음의 증인들에게 약속하신 능력에 대한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터인데, 곧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막 16:17-18, 새)
이 말씀을 의지해서 수많은 믿음 좋은 사람들이 일부러 뱀이 있는 데 손을 넣고 일부러 독약을 먹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됐겠습니까? 다 죽었습니다. 그 앞을 안 봤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은 문맥을 보면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복음을 들고 나가 전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약속을 주신 것이지, ‘어디 내가 한 번 해볼까’ 하고 시험하는 사람들을 위한 약속이 아닙니다.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사도 바울을 죽일 뻔했던 독사뱀을 3절에서 분명히 “독사”라고 했는데 4절과 5절에서 “짐승”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뱀을 ‘짐승’이란 단어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때보다 훨씬 후에 쓰인 책이지만,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사탄을 용 혹은 옛 뱀이라고 하는데, 하늘 전쟁에서 패한 그 용이 땅으로 내쫓기자(계 12:9),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싸우려고(계 12:17) 바다에서 한 짐승을 불러내고(계 13:1) 땅에서도 다른 짐승(계 15:11)을 불러냅니다. 그 짐승을 묘사한 단어가 바로 ‘therion’(짐승)이라는 단어로, 여기 5절에서 뱀을 묘사한 ‘짐승’(therion)과 같은 단어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어린양의 혼인잔치 후에 흰 말을 탄 분이 나타나시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오셔서 짐승과 그 일당들을 유황불이 타는 못에 던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복음의 증인인 바울이 독사에 물려도 해를 받지 않은 이 일은 조금 전 말씀드린 마가복음 16장을 떠오르게 하고, 그를 죽이려던 뱀을 위험한 짐승으로 묘사한 다음에 그 짐승을 불에 던져 넣는 것은 요한계시록 19장과 비슷하다고 느껴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고대 사람들은 지식이 뒤떨어져서 대충 기록했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할 그런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인 28장을 통해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아주 치밀하게 그리고 정교하게 이야기를 구성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6절을 보면, 독사에 물린 바울이 즉시 죽지 않습니다. 원주민들은 독에 대한 반응이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한참 기다리셨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붓거나 갑자기 쓰러져 죽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시간이 많이 흘러도 아무 이상이 나타나지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멜리데 사람들은 똑같이 생긴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많이 봤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멀쩡하니까 뭐라고 하는가 하면 “신이다”라고 합니다.
유대 사회 최고의 율법학자에게 제대로 교육받은 바울을 유대인들은 반율법주의자이고 반성전주의자로 몰아서 죽이려 했습니다. 멜리데 섬 주민들은 살인자라고 여기더니, 이제는 신이라고 합니다. 아주 극과 극을 달립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가벼움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렇게 가볍지 않습니까? 세상을 살면서 벌어지는 일들, 특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함부로 판단하고 쉽게 정죄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요즘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도 그렇고, 한국이나 미국의 정치도 그렇고,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미디어에 나온 게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그것도 한 사람의 관점을 통해 나온 이야기일 뿐입니다.
우리가 전체를 다 알지 않고는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이 사람은 잘못됐고 저 사람은 잘못됐다고 얼마나 판단하고 재단하고 그럽니까?
신앙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나의 얄팍한 지식과 경험으로 판단하고 쉽게 정죄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성경을 제대로는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 아니라 안 믿는다. 성경은 가짜다.’라고 하는데, 사실 제대로 연구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냥 대충 내 생각에, 내 얄팍한 경험과 지식으로 그렇게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이겠습니까? 아주 일부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이런 게 나왔다고 하는데, 이전에는 손으로 하트를 그리거나 머리에 손을 올려 하트를 만들었지만, 요즘은 손가락 두 개로 하트를 만듭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을 볼 때마다 ‘네가 아는 건 요거 밖에 안 돼’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습니다. ^^
하나님을 어떻게 내 지식으로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것은 진짜 조금입니다. 그래서 정말 겸손하게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 함부로 이건 이거다 저건 저가다 말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얄팍한 지식이나 경험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남들을 쉽게 정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6절에서 멜리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인과응보와 정의의 심판이란 개념에서, 이제는 신이라고 언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극단에서 극단으로 뛰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에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대표적인데,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위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리스도(구원자)는 고난 받고 죽고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시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하고 예수님을 붙들고 야단치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셨습니다. 조금 전에는 아주 칭찬을 들었던 사람이 최악의 말을 들었습니다.
또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데, 베드로 차례가 되니까 “절대 못 씻기십니다.”라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럼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라고 하시니까, “몸까지 다 씻겨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사람이 왜 이렇게 극단적인지...
그런데 가끔 그런 분들이 보입니다. ‘이거다’라고 하다가 그게 아니라고 하니까 ‘그럼 저거다’라고 합니다. 극에서 극을 달리는데, 그런 경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평범한 사람을 신이라고 여기는 생각과 그런 것을 즐기는 사람들의 문제를 언제나 지적합니다. 지난 사도행전 12장에서 본 것처럼, 헤롯(아그립바 1세)이 사도 야고보를 죽인 후에 빛나는 왕복을 입고 멋진 보좌에 앉아 연설을 할 때 사람들로부터 ‘이것은 신의 소리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음으로 벌레에게 먹혀 죽은 사건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또 14장에 보면, 루스드라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던 장애인을 사도 바울이 일으켜준 사건에서, 그곳 사람들이 바나바를 제우스 신이라 하고 바울을 헤르메스 신이라고 하며 제우스 신전 제사장들이 소를 끌고 와서 이들에게 제사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끝까지 말렸던 장면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제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 멜리데 사람들에 의해서 신이라고 추앙을 받습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벌어지면 세상 사람들은 신이라고 여기고 숭배하려고 하는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역사에 보면 많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을 보면 그 일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그것을 일으킨 사람을 신으로 숭배하려는 경향은, 가벼움을 넘어 어리석음이고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사람들의 우상숭배입니다(롬 1:19-25). 성경은 그것을 우리의 죄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씀해줍니다.
살인자라고 여겨지다가 단번에 신이라 불린 바울은 신이 아니라 신의 종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사도라고 부르지만, 사도라는 말도 위대한 인물을 뜻하는 교회 내의 어떤 계급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종일 뿐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고, 순교자와도 같은 의미입니다.
교회에서 요즘은 쓰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옛날에는 부흥회 같은 때 잘못된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주의 종’ 뒤에다 ‘님’ 자를 붙여서 ‘주의 종님’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국문법 파괴입니다. 아주 잘못된 표현이고 없어져야 합니다. ‘주의 종’이면 종이지, 그게 어떻게 ‘님’이 되겠습니까? 높여질 수 없는 존재가 종입니다. 남들 앞에서 존경받는 것은 좋은데, 그것이 지나쳐서 숭배하는 식으로 가게 되면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종은 하나님의 영광을 헤롯처럼 자기가 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림들의 잘못된 신관을 통해 자기가 증언해야 할 복음의 기회, 사역의 기회로 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2. 바울을 통한 병 고침의 기적 (7~10절)
이렇게 바울이 독사에 물리고도 해를 받지 않은 것은(6), 마가복음 16장 18절 앞부분에서 독사를 손으로 집어도 괜찮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마가복음 16장 18절 뒷부분처럼 안수할 때 병이 낫는 사건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의 다음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은 주인인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눅 4:40), 연약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치유해줍니다.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7-8절)
멜리데 섬에서 가장 유력한 지주였던 보블리오라는 사람은 바울 일행에게 사흘간 머물게 하며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친절을 베푼 대상을 “우리”라고 했으니까, 276명 전원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바울과 누가와 아리스다고와 그 외 몇몇 사람들 정도를 초대해서 사흘 동안 머물게 해주었고, 또 바울이 사흘 동안 다른 사람 집에 가서 머물 수 있었다는 것은 책임자인 백부장이 그것을 허락해서 된 것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 백부장과 몇몇 군인들도 거기에 함께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누가 있었든지, 그렇게 여러 명을 사흘씩이나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며 친절을 베풀고 음식을 베풀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블리오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집에 머물며 보니까, 그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아파서 누워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그에게 가서 기도하며 안수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병이 나았습니다. 그 후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9-10절)
보블리오의 부친을 바울이 고쳤다는 소식을 들은 섬 주민들 가운데 병든 사람들이 와서 또 고침을 받는 일이 일어납니다. 섬 주민들의 선의에 대해 치유의 기적으로 답한 바울에게, 그들은 다시 더 큰 호의로 화답을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이들이 예수님을 모르고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며, 잘못된 신관을 가지고 바울에게 살인자라고 했다고 신이라고 하며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또 이교도였고 로마 사람들에 의해서 야만인이라고 불리던 원주민들이지만, 어떻게 보면 지금의 우리보다 더 후하게 베푸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절에서 풍랑에 지친 나그네를 영접하고, 10절에서 후히 대접히는 환대에 이어, 떠날 때에도 쓸 것까지 실어주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그네를 영접하고 환대하라는 성경 말씀이 얼마나 많습니까? 과연 그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우리로 하여금 돌아보게 해줍니다.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시내에서 전시장을 경영하는 어떤 분이 있었는데 믿는 분이었습니다. 하루는 크리스천인 친구가 와서 요청하기를, 자기가 아는 친구 중에 아들이 예술가인 친구가 있는데 그 아들의 작품 전시회를 해야 하지만 마땅한 전시장이 없고 또 돈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료로 대관해줄 수 있는지 요청해서 그렇게 해주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인데도 그렇게 해주었습니다.
허락을 받은 젊은 예술가가 와서 보고, 자기가 그 동안 기도하면서 원했던 전시장과 똑같은 전시장을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셨다고, 너무 기뻐하고 감사하며 전시장 주인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전시회가 끝날 때까지 그 전시장을 무료로 빌려준 전시장 주인에게는 단 한마디의 감사도 표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자기가 기도한 전시장과 똑같은 전시장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갑자기 자기에게 어디서 뚝 떨어진 겁니까? 사실은 그 전시장 주인을 통해서 온 게 아닙니까? 전시장 주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준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 예술가를 위해, 그의 미래를 축복하는 마음으로, 사실은 자기가 손해 보는 일인데도 일주일간의 대관료를 안 받고 해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젊은 예술가는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당연히 감사해야겠지만, 동시에 자기를 위해 기꺼이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어 준 전시장 주인에게까지 진심으로 감사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뭘 믿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전시장 주인이 이 젊은이를 이제 겪었는데, 다음에 또 전시회를 해야 해서 해달라고 하면 오라고 하겠습니까? 다른 데 전시장을 알아보니까 그 전시장 주인이 이쪽 주인에게 연락을 합니다. 그 사람 괜찮으냐고, 믿을 만하냐고 할 때 ‘사실은...’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 젊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를 겪어 본 사람들이 또 다시 그를 위해 축복의 통로가 되어 주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가 잘된 것 같아도 결국 자기 손해가 된 겁니다. 그런 사람의 삶을 통해 새 생명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실제 일어난 일인데, 그 젊은 예술가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인간에게 나누어주는 복의 통로의 사명을 다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깨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신 그 구원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어디서 뚝 떨어진 게 아닙니다. 누군가를 통해 그것이 전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해주신 일을 누군가가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어 주었기 때문에 나에게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 은혜의 통로가 되어 준 사람이 누구인가? 사실은 이런 것을 연말에 꼭 해야 합니다. 이미 새해가 되었지만, 혹시 작년에 또는 올해 한 달 동안 나를 위해 하나님의 통로가 되어 준 사람이 있었는데도 내가 혹시 그분들에게 감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않은 건 아닌가 돌아보기 원합니다. 그래서 감사 인사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있는 분이면 찾아가서 커피나 차 한 잔 따뜻하게 대접하며 감사하고 교제하며,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겠습니다.
이제 2020년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11개월 가까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그 은혜의 통로, 축복의 통로가 되어 준 사람들에게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갑니다. 그래서 ‘통로’입니다. 우리는 통로가 되어야지, 우리에게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왔는데, 사해처럼 나에게서 끝나버리고 나가지 않으면 죽음의 바다가 되는 것처럼 죽음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갈릴리처럼 받은 은혜를 계속 내보내줄 때 생명이 넘치는 바다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계속하여 그 은혜의 통로, 축복의 통로가 되고, 그것을 받은 사람이 또 통로가 되고, 그럼 이것이 계속 이어져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런 새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멜리데 섬에서의 선교
행 28:1-10 / 권오진 목사
지난해 1월부터 시작한 사도행전 강해가 드디어 오늘 사도행전 마지막 장에 도착했습니다. 28장 말씀을 세 시간에 걸쳐서 전하려고 하는데, 마지막 세 시간 동안 큰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27장의 말씀에서 바울 일행이 두주 동안 풍랑으로 고생하다가 구사일생으로 구조된 이야기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구조된 후 정신을 차려 보니 그 섬이 멜리데 섬이었다고 본문 1절을 말합니다.
“우리가 구조된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이해를 돕기 위해서 지난 번 보았던 지도를 다시 보십시다.
<참고 - 바울의 4차 전도 여행지도>
가이샤라에서 출발 / <아드라 뭇데노>로 가는 배를 타고 항해하다
<무라>에서 로마로 가는 무역선 <알렉산드리아 호>를 갈아탑니다.
항해하여 <그레데 섬> 미항에 도착했고, 바울은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자고 했지만 선장, 선주, 백부장은 큰 항구 뵈닉스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뜻대로 뵈닉스로 가다 초겨울에 부는 무서운 계절풍 <유라굴로>를 만나 14일간 바다에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그 죽을 고생 끝에 <멜리데> 섬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이름은 <몰타공화국>입니다. 우리교회 최예진 청년이 몰타에 가서 1년 동안 영어공부를 한 곳입니다. 멜리데 섬의 크기는 제주도의 6분의 1정도의 작은 섬입니다.
우리는 멜리데 섬에 도착한 바울과 일행을 보며,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 지도를 다시 보세요. 유라굴로 풍랑을 만난 것은, 그레데 연안이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배가 14일 동안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타고 있던 배가 어느 쪽으로 갈 수 있을까요?
출발했던 가이사랴로 되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또 아래로 아프리카 쪽으로도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서쪽으로 계속 가서 스페인으로도 갈 수 있었습니다.
표류하는 배가 어디로 갈지 어느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잘 보십시오. 14일 동안 표류하던 배가 도착한 곳이 다름 아닌 <멜리데> 섬이었습니다.
여러분, 멜리데 섬에서 위쪽을 보면 83km지점에 시실리 섬이 있고, 그 위에 이 탈리아가 있고, 이탈리아 수도가 <로마>입니다.
지금 바울이 14일 동안 풍랑을 만나 죽을 고생을 했고, 구사일생으로 멜리데 섬에 도착했는데, 그 섬이 <로마로 가장 가까운 섬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묵상하다 보면 찬송가 한 곡이 생각납니다.
오늘 설교 후 부를 373장 <고요한 바다로>입니다.
이 찬송 중에 2절 가사를 제가 읽어드립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음에서, 입술로서 아멘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찬송 가사는 <톱레이디(A. M. Toplady) 목사>(1740-1778)님이 쓰셨습니다.
톱레이디 목사님은 38년을 살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짧은 인생을 살았습니다만, 누구 못지않게 많은 풍랑을 겪었던 분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가난에 늘 시달려야 했고,
육신적으로 폐병에 걸려서 고생을 했습니다.
영적으로는 목사가 되어 사역을 하면서 자신보다 37세나 많았던 요한 웨슬레 목사님과 교리 문제로 논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32세 때였습니다. 32세 때 육신은 폐결핵을 앓았고, 영적으로는 요한 웨슬레와 결별하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때 이 찬송시를 쓴 것입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톱레이디 목사나, 본문의 사도바울 뿐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삶도 깊숙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도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큰 풍랑을 만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건강문제로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보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자녀 문제로 힘들었던 분도 계실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너무 힘들어서 고통당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인간관계 문제로 고민 고민하여 힘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풍랑을 만나 그냥 지나와는데 돌아보니 그 풍랑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그 풍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셨던 자리, 구원받는 자리로 인도했음을 고백하실 것입니다.
마치 욥이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고 고백한 것처럼, 여러분의 삶도 감당하기 힘든 풍랑으로 인해 순금 같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줄 믿습니다.
바울도 보십시오.
바울이 가이샤라에서 배타고 어디로 가고자 했습니까? 로마였습니다.
바울이 사명 때문에 로마로 가야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으로부터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 23:10) 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은 14일간 표류한 끝에 로마에서 가장 가까운 멜리데 섬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 지금 현재 여러분의 삶에 여러분이 감당하기 어려운 풍랑이 일어나더라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만 굳건하게 부여잡고 있으면, 때로 풍랑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풍랑을 이용하셔서 여러분이 가야 할 축복의 자리, 사명의 자리로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럼, 멜리데 섬에 도착한 바울 일행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계속 살펴보십시다.
2-6절 말씀을 먼저 읽어보십시다.
“비가 오고 날이 차매 원주민들이 특별한 동정을 하여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 바울이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으로 말미암아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 원주민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매달려 있음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 하더니 ○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 그들은 그가 붓든지 갑자기 쓰러져 죽을 줄로 기다렸다가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되 그를 신이라 하더라”
여러분! 알렉산드리아호가 파선하여, 헤엄 칠 수 있는 이는 헤엄쳐서, 어떤 이는 파선하는 배의 나무나 물건에 의지하여 뭍으로 나왔을 때, 그들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날씨는 초겨울이었고 비가 내렸으니 가히 그들이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서 온몸이 추위 때문에 벌벌 떨었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멜리데 섬 원주민들은 그들에게 동정을 베풀어 줍니다. 불을 피워서 그들을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먹을 것도 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불을 피워 도움을 주자, 바울도 그냥 있지 않고 나무 한 묶음을 거두어서 불에 넣었습니다. 영적 지도자로서 솔선수범한 것입니다.
바울이 나뭇단을 불에 넣을 때, 바울이 들고 있던 나뭇단에서 겨울잠을 자려던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어 버렸습니다.
3절 하반절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를 (원어에는 “독사가 수직으로 매달려서 대롱거리다”)로 말씀합니다.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독사에게 물린 바울은 그 즉시 독사를 불 위에 떨어뜨렸습니다.
여러분! 시골에서 크신 분들은 독사에게 물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 것입니다. 저도 중학교 다닐 때, 1년 선배가 독사에 물린 것을 봤습니다. 당시 가난한 시대라서 부모님들이 용돈을 주지 않아서 학생들이 뱀을 잡아서 뱀 집에 팔면 500원, 혹은 1,000원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돈으로 과자도 사 먹고 군것질을 했습니다.
1년 선배도 독사 한 마리를 잡아 비닐봉지에 넣고 가게로 가게 되었습니다.
비닐에 있는 뱀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 놈 팔면 500원, 이 놈 팔아서 000 사먹어야 하지”하다가, 비닐 안에 있는 뱀에게 손가락을 물어버렸습니다.
뱀에 물리자 손가락부터 순식간에 부어올랐습니다. 지금 같으면 바로 병원으로 갔을 텐데, 당시에는 병원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동리 어르신들이 <뱀에 물린 손가락을 큰 비닐로 싸고, 그 속에 살아있는 개구리를 넣어서 해독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개구리가 들어가서 독 때문에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도 독사에게 물렸는데 ....... 어떻게 되었을까요?
독사에게 물린 바울을 보면서 원주님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바다에서는 살아났지만, 이 사람이 극악한 살인범이었기에 신이 이 사람을 죽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멜리데섬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들이 알고 있었던 <속설>때문입니다.
옛날 아프리카의 북부 리비아 해안에 아주 완악하고 포악한 해적들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풍랑을 만나서 배가 파손되고, 이들이 바울처럼 멜리데 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간신히 헤엄쳐 나와 ‘이제 살았다’하고 쉬고 있는데 이상한 뱀이 나타나서 이들을 다 물어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멜리데 사람들이 바울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이 바다에서는 용케 살아났지만, 공의의 신이 뱀으로 나타나서 바울을 물었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그들의 생각과 말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시간이 지나도 바울의 몸에는 아무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뱀에게 물린 손이 붓든지, 혹은 독이 바울의 온 몸에 퍼져서 갑자기 쓰러져야 하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 바울이 멀쩡하였습니다.
그러자 ... 멜리데 사람들이 처음 생각과 정반대의 생각을 합니다.
독사에게 물린 이 사람은 .... 사람이 아니고, 신이구나 생각하고 <신이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바울이 신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디서입니까?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루스드라>에서 전도하면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설교를 듣는데 얼마나 진지하게 듣는지, 바울은 그 사람이 낳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큰 소리를 쳤지요. <네 발로 일어서라> 그러자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때 루스드라 사람들을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믿어버렸습니다. 물론 바울은 자신이 인간임을 밝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함으로 마무리 했지만,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이 신으로 취급받습니다. 물론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처럼 자신은 인간이고,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뱀에 물렸지만 무사했던 이 사건에서 두 가지 정도는 꼭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마가복음 16:17-18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여러분 이런 기적은 지금도 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기적이 누구에게 나타납니까?
마가복음 16:15 절에 그런 역사가 나타나는 자를 소개합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렇습니다.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이런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지금도 선교사님들의 선교보고를 들어보면 선교지에서 이런 기적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선교지 뿐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한국 땅에도 이런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아무 일이 없는 것도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죽을병(암)에 걸렸다가 나으면 –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차는 폐차가 되었지만 손 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면 – 기적이라고 합니다. 물론 확실한 기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아무 일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 자체도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뱀에 물렸는데 아무 일이 없는 것이 기적이듯이
오늘 우리의 삶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자동차 운전하다가, 혹은 질병으로 언제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 일 없이 목적지까지 도착하고, 오늘도 이렇게 건강하게 예배당에 나와 예배하는 것 이 모든 것이 기적임을 믿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십시다.
7-10절입니다.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머물게 하더니 ○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7절에 보면 멜리데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가장 놓은 사람”의 뜻은 <첫째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보블리오는 이 섬에서 첫째가는 사람, 영주되는 사람 같습니다. 멜리데 섬의 1인자가 바울의 그 동안의 모든 사정을 듣고,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3일 동안 극진히 대접합니다.
그러던 중에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린 것을 알고 바울은 <기도하고, 안수하여> 병을 치유해 줍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준 것처럼 바울도 보볼리오의 아버지의 병을 고쳐준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멜리데 섬에 있는 다른 많은 병자들도 병을 고치려고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아마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임시진료소를 만들어서 기도하고, 의사였던 누가는 의술로서 최선을 다해서 병자를 치료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다>(9절 하반절)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말은, 육신의 병은 물론이요, 영적인 병도 치료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육신적으로는 병이 나았고,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영적으로도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멜리데 섬에서 선교한 이야기, 교회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역사가들은 멜리데 섬 1인자 이었던 보블리오는 개종하였고, 후에 멜리데 섬의 최초 주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영육이 고침을 받은 멜리데 사람들은 바울과 바울 일행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10절을 보십시오.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영적인 은혜가 물질과 상관관계가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은혜를 받았다면 그 증거로 물질이 사용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보블리오 와 원주민들이 영육의 은혜를 받았더니, 3개월 동안 276명을 후한 예로 대접했고, 그들이 떠날 때에 그들이 쓸 것을 배에 싫어주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심방을 오니,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고, 토색한 사람들에게 네 배를 갚겠다고 했습니다.(눅 19장 참조)
오늘 여러분도 이런 면에서 여러분 스스로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물질을 잘 쓰십니까?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헌금(십일조, 감사, 선교, 장)을 하는데, 교우들을 위해서 밥 한 그릇을 사려면 손이 벌벌 떨립니까? <이유는 은혜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교회 모든 교우들이 보블리오와 멜리데 섬 원주민처럼 영육간의 은혜를 받고, 축복을 나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질도 나누고, 시간도 나누고, 기적도 나누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와 복을 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