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舜)임금 시대에 이르러서는 유묘씨(有苗氏)가 복종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복종하지 않은 까닭은 남쪽에는 대산(大山)이 있고 북쪽에는 전산(殿山)이 있으며, 왼쪽에는 동정호(洞庭湖)가 있고 오른쪽에는 팽려호(彭蠡湖)가 있기 때문이다.
이 천연의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복종하지 않은 것으로 우(禹)가 그들을 정벌하려고 하자 순(舜)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말했다.
‘아직 타이르고 가르치는 일에 힘을 다하지 않았다.’
타이르고 가르치는 일에 힘을 다하자 유묘씨가 복종하기를 청하였다.천하 사람들이 이 일을 듣고 모두들 우(禹)의 방법을 비난하고 순임금의 덕정에 귀의하였다.
설원 제1권 군도.
설원의 기록에선 순 임금 시절, 우의 정벌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순 임금은 우에게 명하여 남쪽의 유묘씨, 현재의 묘족을 치게 했습니다. 그러나 묘족은 항복하지 않았고, 순 임금은 이에 전쟁을 중단하고 군대를 철수했죠.
그러고는 더욱 너그러이 문덕을 베풀고 간척무악을 추며 그들을 교화하였고 그 뜻에 감화된 묘족은 순 임금에 복종하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동아시아에서 이 시기를 요순시대라고 하여 이상적인 태평성대를 뜻하였지만, 실제 현실은 설원 등에서 기록하는 이상적이고 평화로운 상황도 아니었을 것이며, 덕성의 결과뿐만도 아니었을 겁니다.
여기서부터는 어디까지나 제 상상에 불과합니다.
순 임금은 우를 시켜 유묘씨. 즉, 묘족을 공격하여 복속시키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형이 워낙 훌륭한 터라 쉽게 굴복시키지 못했고, 얼마간의 교전으로 그들의 전력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복속을 청하였다는 것을 보면 실제론 그들을 복속시키기 위한 치열한 물밑 외교전이 있었을 개연성이 있습니다.
순 임금은 자신의 군사력을 실제보다 더 과장했을 것이며, 치열하지 않았던 교전은 유묘씨로 하여금 그들의 전력을 과대평가하게 만들었을 것이며, 지속적인 접촉과 외교전은 그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오갔을 것이고, 친순파를 만들었을 수도 있으며, 그들이 복속하면 보장해줄 권리와 전쟁을 했을 때 발생할 손해를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의 무역로를 방해하고 그들의 외부 활동을 억제하기도 했을 것이며, 때때로 협상을 하기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공개적으로, 혹은 공개될 수 있는 움직임들은 일부러 덕으로 교화하는 내용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묘족은 순 왕의 압박과 회유에 결국 굴복하고 순 임금에게 복속되었죠. 실제 역사적인 순 임금에 대한 기록과 추측은 그가 상당히 정치적인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실제 역사적 사실은, 현실적인 이유에서라도 단순히 덕으로 타이르고 가르쳤다고 그들이 순 왕의 선의와 덕성에 감화되어 복속하였을 개연성은 부정적입니다.
덕과 교화는 듣기에 좋아보이고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러한 무력을 쓰지 않거나, 최소한으로만 쓰면서도 합의를 낼 수 있다는 건 상당한 정치력과 교섭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무력 내지는 실력 역시 상당해야 한다는 것 역시 그렇고요.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은 쉽지만 말과 이루어지는 외교로 합의를 보는 것은 어렵고 지난한 일입니다. 그러한 말이 단순히 좋은 말과 정당한 합의 뿐 아니라 다소간의 협박과 위협이 포함되더라도 말이죠. 애당초 힘을 비롯하여 내세울 게 없다면 어떤 말에도 의미가 없을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겠고요.
어떠한 정치 세력이든 자신들이 믿는 바를 실현시키기 위해선 단순히 힘만 강해서도 안 되고 옳기만 해서도 안 됩니다. 힘만 세서 남들을 찍어 누르는 권위주의 집단은 품위 없는 양아치에 불과하고 그저 옳기만 하다면 아무런 현실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아무리 많는 말을 하고 그것이 실제 현실에 유의미한 통찰이라 하여도 그것을 실현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고, 그러한 통찰이 없어 강력한 힘을 통해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면 그 사회는 더 나빠지기만 할 것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비전을 가져야 하는 조직은 단순히 힘만 세다고, 혹은 옳기만 하다고 의미 있는 게 아닙니다. 적당한 정치적 교활함과 그것을 통해 승리할 수 있는 실력, 무엇보다 누구에게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순 임금은 덕으로 교화하는 성군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교활한 정치적 공작의 달인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무력을 사용할 줄도 알았을 군주였습니다. 성군이라는 이미지가 단순히 만들어진 것만은 아닐 것이기에, 그는 그러한 방식으로 얻어낸 승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이용하진 않았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