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인줄 알았더니 윤성일은 열차 역에서 택시부터 탔다. 그리고는 운전사에게 ‘가장 좋은’ 호텔로 가자고 한 것이다. 김가영이 말리려고 입을 벌리기는 했지만 말을 내놓지 않았다. 종일 지진에 시달린 것 같은 몸이 욱신거리는데다 꿀꿀한 기분을 업(up) 시킬 필요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 텔 현관을 보자 김가영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하더니 프런트에 다가간 윤성일이 가격을 묻지도 않고 (스위트룸)을 달라고 했을 때는 눈앞이 노래졌다. 김가영이 어젯밤 계산해본 여행비 잔액은 425불이 남았다.
“550불입니다.”
하고 프런트 직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윤성일에게 말한 순간 김가영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릿속은 하얗게 되어서 아무 생각이 안 났지만 말은 나왔다. 아마 조금 전에 박혔던 말이 튀어나온 것 같다.
“안돼, 돌아가. 미친 짓 말고.”
그리고는 윤성일의 팔까지 쥐었다. 그때 윤성일이 말했다.
“오케이.”
왠 오케이? 이 남자가 55불로 들은 거 아녀? 하는 생각에 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더니 윤성일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었다.
“형, 왜이래? 550불이래.”
다급하게 한국말로 했지만 윤성일은 지갑에서 달러를 꺼냈는데 백불짜리가 두툼했다. 프런트 직원도 그것을 보
았다. 잠깐 사이에 직원 옆으로 살찐 체격의 지배인이 다가와 있었는데 그의 시선도 지갑에 꽂혀져 있다.
“형, 미쳤어?”
하고 김가영이 물었을 때 이번에는 지배인이 물었다.
“선생님, 몇 박 하십니까?”
“일박만.”“그럼 1천불을 디포짓 하셔야 됩니다.”
“오케이.”
또 오케이다. 이 바보가. 눈을 치켜뜬 김가영이 숨을 들이켰다가 윤성일을 잡은 팔을 놓았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나 안 갈래.”
“어딜?”
돈을 세던 윤성일이 움직임을 멈추고는 김가영을 보았다. 눈이 동그래져 있다.
“어딜 안가?”“방에.”
“왜?”
“형, 진짜 미쳤어? 천불이나 주고...”
“맡긴거야, 천불은.”
“그래도 그렇지.”
“하룻밤만.”
다시 몸을 돌린 윤성일이 돈을 세면서 말을 이었다.
“기분전환이야. 돈은 이럴 때 쓰라고 열심히 벌었다구.”
안가기는 왜 안가? 잠시후에 둘은 호텔 10층의 스위트룸 안에 들어와 있다. 지배인이 직접 안내를 했고 직원 둘이 둘의 배낭을 각각 들고 따랐으며 스위트룸 담당 직원까지 가담한 행차가 되었던 것이다. 직원들이 다 물러가고 스위트룸에 둘이 남았을 때 김가영이 소파에 앉더니 말했다.
“참내, 기가 막혀.”
“진짜다.”
방안을 둘러보던 윤성일이 베란다로 다가가며 말했다.
“진짜 기가 막히게 좋구나.”
한국 평수로 계산하면 1백 평 쯤 되는 규모였다. 현관 앞쪽은 회의실 겸 휴게실이었고 그 안쪽으로 응접실과 욕
실이 딸린 침실이 두 개, 주방은 넓었으며 식당에는 6개의 고급 의자가 놓인 식탁이 배치되었다. 벽걸이 TV가 모두 4개, 전화기는 5개, 냉장고는 3개나 있었는데 음료와 술병으로 가득차있다.
“가영아, 일루 와봐.”
베란다에 선 윤성일이 불렀으므로 김가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베란다로 나온 김가영은 숨을 들이켰다. 바닷가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오후 10시반경이어서 깊은 밤이었지만 바닷가 가게들의 불빛으로 바다는 선명하게 드러났다. 윤성일의 옆에 선 김가영이 마침내 탄성을 뱉었다.
“아름다워.”
“그렇지?”
윤성일에게는 대답하지 않고 김가영이 심호흡을 했다. 바닷가 공기가 폐 안으로 잔뜩 흡입 되었다가 나갔다. 비리고 텁텁한 냄새가 맡아졌다.
“배고프지?”
다시 윤성일이 물었으므로 김가영은 머리를 끄덕였다. 기차 안에서 저녁 무렵에 바나나 한 개씩을 먹었을 뿐이다.
“피곤하니까 룸서비스 시키자.”
“비싸잖아?”
했다가 김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맘대로 해.”
“옳지.”
김가영에게로 머리를 돌린 윤성일이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래야 내가 제대로 생색이 나지.”
“근데 정말 비싼 값어치는 있네.”
“그렇지?”“궁전 같아.”
“좋니?”“위압감이 들다가 금방 적응이 되고 있어. 사람은 간사한가봐.”
“그것 봐.”
“근데 형은 이런데 자주 와 본거야? 와본 사람처럼 말하고 있잖아?”
“스트레스 푼다고 스위트 두 번쯤 가봤어. 돈 많은 선배 덕분에.”
“그렇구나.”
“그 선배 소개시켜줘?”
“왜?”
“돈 많으니까 맨 날 비행기 일등석에다 스위트로만 찾아 다닐텐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밥 먹자.”
“그러자.”
몸을 돌린 윤성일이 웃음 띈 얼굴로 김가영을 보았다.
“어디 이곳 스위트 룸서비스는 얼마나 맛있는가 보자.”
스위트가 아니라 스위트 할애비 방에 묵는다고 해도 뭘 알아야 제대로 먹지. 룸서비스 메뉴는 수백 개가 있었지만 둘이 시켜 먹은것은 (베트남 쌀국수)와 (닭 날개구이) 그리고 (야채 사라다) 였다. 둘이 식사를 마쳤을 때는 오후 11시 반. 식탁에서 일어선 윤성일이 말했다.
“나 씻고 나올 테니까 베란다에서 한잔 어때?”
윤성일의 시선을 받은 김가영이 머리만 끄덕였다. 이미 둘의 방은 정해져있는 것이다. 응접실에서 왼쪽이 김가영, 오른쪽이 윤성일의 방이다. 잘 때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욕조는 넓어서 혼자 헤엄쳐 돌아다닐 만 했으나 윤성일은 샤워만 하고 베란다로 나왔다. 베란다에는 테이블에 비치용 의자까지 갖춰져 있었으므로 윤성일은 냉장고에서 맥주와 양주, 안주까지 날라다 놓았다. 밤바다를 내려다보면서 한잔 마실 작정이었다.
“어휴, 이게 뭐야?”
뒤쪽에서 김가영이 놀란 목소리로 묻더니 다가왔다. 스치고 지나는 김가영의 몸에서 상큼한 비누냄새가 맡아졌
다. 김가영의 짧은 머리는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아서 달라붙었다. 흰 목, 갈아입은 흰 셔츠 밖으로 뻗어 나온 미끈하고 활력을 띈 팔, 그러나 밑은 면바지로 갈아입었고 맨발에 슬리퍼를 걸쳤다. 이렇게 시선은 위쪽 한곳에 두더라도 한눈에 다 보이는 것이다. 옆쪽 자리에 앉은 김가영이 두 다리를 비치용 의자위로 길게 뻗었다. 슬리퍼를 신은채여서 아직 이쪽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자, 마담. 한잔 하시죠.”
맥주병을 쥔 윤성일이 말했을 때 김가영이 머리를 저었다. 젖은 머리칼이 볼에 붙었다가 떨어졌고 불빛에 반사된 눈동자가 검정색 전구 같다.
“싫어.”
“응?”
“위스키 마실래.”
“얼씨구.”
양주병으로 바꿔 쥔 윤성일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내 스타일이구만.”
“맥주는 배가 불러. 난 소주 스타일이야.”
위스키 잔을 쥔 김가영에게 잔을 부딪쳐 보인 윤성일이 말했다.
“자, 건배다.”
한 모금에 술을 삼킨 윤성일이 길게 숨을 뱉는다.
“이제야 사는 것 같다.”
“전에는 안 그랬어?”
“재미없었어.”
어느새 김가영의 잔도 비워졌으므로 윤성일이 다시 술을 채우면서 말했다.
“사는 게 말야.”
“왜?”
“왜는 무슨? 이유 없어.”
술잔을 든 윤성일도 의자에 길게 다리를 뻗고 밤바다를 보았다. 바다 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서늘했고 뒤쪽 커튼이 출렁였다. 작은 소음과 파도소리가 이명처럼 울리고 있다.
“형, 혹시 여자 문제야?”
불쑥 김가영이 물었으므로 윤성일은 시선을 주었다. 시선이 부딪치자 김가영이 웃는다.
“대답 안해도 돼.”
“얀마, 그런 문제는 없어.”
“지금까지 여자가 없었다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지?”
“말 빙빙 돌리지마.”
그러자 김가영이 다시 홀짝 술을 삼켰다. 안주로 땅콩과 오징어, 육포까지 놓았지만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 김가영이 더운 숨을 뱉고 나서 말했다.
“뭐 이렇게 호텔방에 둘이 있게 되었으니까 내가 형한테 호감 느꼈다는 건 숨길수가 없지.”
“말 길다.”
“시끄러.”
눈을 흘겨보인 김가영이 말을 잇는다.
“이젠 형 차례야. 분위기에 어울리는 말 좀 해봐.”
“어쭈구리.”윤성일도 따라서 눈을 흘겼다.
“그러다가 네가 먼저 날 침대로 잡아 끌 기세구만.”
“나 그렇게 간단한 여자 아냐.”
“잘났다.”
“말해.”
“난 여자 없어. 됐냐?”
제 빈 잔에 위스키를 채운 윤성일이 김가영의 잔을 기웃거렸더니 김가영이 병을 받아갔다. 윤성일이 밤바다를 응시한 채 말을 잇는다.
“만나고 헤어진 여자는 많아. 아니, 헤어졌다는 표현이 그러네. 그냥 스치고 지났다고 해야 맞을라나? 그래, 두어 번 만나서 좋아졌다가 제 갈 길을 가는 거지...”
“알겠어.”
머리를 끄덕여 보인 김가영이 답답한지 발을 흔들어 슬리퍼를 떨어뜨렸다. 흰 발이 베란다 창살 쪽으로 펼쳐져 있다.
“난 남자 사귄 적 없어.”
한 모금 술을 삼킨 김가영이 머리를 돌려 윤성일을 보았다.
“한번도.”
“지기미.”
입맛을 다신 윤성일이 심호흡까지 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뭐가?”
“너 수녀 되려고 그러지?”“응?”
“그러니까 손도 못 댄다고.”
“미쳤어.”
이제는 김가영이 눈만 껌벅였고 윤성일이 손을 뻗쳐 테이블 위의 맥주 캔을 쥐었다.
“이거 취하지가 않아.”
투덜거린 윤성일이 맥주잔에 맥주를 따르더니 양주를 부어 섞었다. 그리고는 상체를 세우고 숨을 고르더니 벌컥이며 마셨다. 다섯 모금에 잔을 비운 윤성일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야, 맛있다.”
“....”
“그래. 너 남자하고 손을 잡아본 적도 없단 말이지?”
“....”
“키스는 물론이고 그지?”“....”
“혹시 마스터베이션. 그러니까 자위는 해본 적 있어?”
그때는 김가영이 바다를 보고 있었는데 문득 허리를 세우더니 손으로 바다 한쪽을 가리켰다.
“저것 봐. 배들이 꼭 별무리 같다. 그지?”이번에는 윤성일이 입을 다물었고 김가영의 말이 이어졌다.
“관심이 선으로 보인다면 세상은 무수한 선으로 엉켜져 있을거야. 그지?”“....”
“나쁜 생각은 검정색, 호감은 노란색. 그렇게...”
“성욕은 붉은색?”다시 폭탄주를 만들면서 윤성일이 말을 가로챘더니 김가영은 길게 숨을 뱉었다.
“형 나 성 경험이 없어.”
“....”
“그냥 그렇게 되었어.”
“....”
“성욕도 느끼고 자위 비슷한 것도 해보았어.”
그러자 윤성일이 폭탄주 잔을 내려놓더니 두 손을 들어보였다.
“항복.”
정색한 윤성일이 김가영을 향해 말을 잇는다.
“이제 그런 이야기 안할게. 니코가 크다.”
“미안해, 형.”
“이젠 좀 익숙해지겠지.”
술잔을 든 윤성일이 이번에는 네 모금에 폭탄주를 마시고는 길게 숨을 뱉었다.
“꿈이 맞아. 어젯밤 꿈에 난 산속의 탄광 비스무레한 곳에 갔었는데 탄광의 문이 꽉 닫혀 있는 거야. 자물쇠도 이따만하게 큰 것이 딱 잠겨졌고...”
두 손을 벌려 자물쇠 크기를 보여주던 윤성일의 얼굴에 김가영이 던진 타월이 들어붙었다.
첫댓글 날마다 행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즐감요
굿,,즐감...
즣감요
즐감요~
즐감하고 갑니다 .
감사히 잘봤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 늘 감사합니다.
재미있어요~~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