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신문에서 전국 고교생 506명을 대상으로 `6·25가 남침이냐? 북침이냐?'라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69%인 349명이 “6·25는 북침이다”라고 답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학생들이 북침과 남침이라는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설문에 임했을 수도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요즘 청소년들이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우리 민족사에서 최대 비극인 6·25가 발발한 지 63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목숨바쳐 싸워 이 나라를 지켜주신 참전용사들이 얼마나 원통해하시겠는가? 이분들께 사죄와 감사의 마음을 담아 “6·25는 김일성이 일으킨 남침전쟁이었다”라는 사실적 증거를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첫째로 전쟁 개시 3일 만에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우리가 북침했다면 평양을 3일 만에 점령했어야 이치에 맞는 것 아닌가? 둘째, 6·25 직전 북한은 남한보다 경제력은 2배, 군사력은 3~4배 우세하여 충분한 공격능력을 보유한 반면 우리 국군은 방어할 만한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공격부대는 방어부대보다 전투력이 3배는 우세해야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 군사학의 상식이다. 셋째, 국군은 전쟁이 임박한 6·25 발발 2~3주 전에 지휘관(사단장, 연대장)을 대규모로 교체하고 전·후방 부대 교대까지 실시했다. 또한 6월11일 발령되었던 비상경계령을 6월24일 0시를 기해 해제하고 전 장병 50% 휴가, 외출, 외박을 실시했다. 군 수뇌부들은 육군 장교클럽 준공기념 연회를 6·25 새벽까지 진행하는 등 공격하는 군대라면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전쟁 직전 군 내부에서 벌어졌다. 이 사건들은 지금까지도 군 수뇌부의 간첩설을 의심하고 있는 부분이다. 넷째, 1994년 6월2일 정상회담차 러시아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북한의 남침계획 비밀문서를 제공하고 인정했다. 다섯째, 2010년 6월24일 중국의 인민일보가 6·25는 북한의 남침이라고 보도하며 인정했다. 이처럼 6·25는 김일성 북한군이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에 기습 남침하여 남한을 공산화하려는 전쟁이었다. 전쟁을 승인한 러시아도, 전쟁을 지원한 중국도 남침을 인정했다. 이 시점에서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 주는 말이 생각난다. 1807년 프랑스 나폴레옹에 패한 독일의 피히테라는 지도자가 “독일이 패망한 것은 군대가 약해서가 아니라 국민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이기심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을 통해 국가 혼을 길러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64년 후 전쟁에서 프랑스를 점령하고 돌아온 독일군 총사령관 몰트게 장군은 “이번 전쟁의 승리는 나와 우리 군인들의 공이 아니라 아이들을 훌륭하게 길러준 초등학교 교사들의 공이다”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