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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도착한 바울
행 28:11-16
11 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12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13 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14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15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행 28:11-16 / [멜리데에서 로마로] 파선을 당한 지 석 달 후에 우리는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쌍둥이 형제호'라는 뜻의 디오스구로라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게 되었다. 12) 우리는 첫번째로 수라구사에 들러 사흘을 지낸 후 13) 그곳을 빙 둘러서 레기온으로 갔다. 하루를 거기서 묵고 남풍에 실려 그 다음날 보디올에 도착하였다. 14) 그곳에서는 신도들의 간청에 못 이겨 이레를 함께 머물면서 대접을 받은 후에 로마를 향해 떠났다. 15) 로마에 있는 신도들은 우리가 온다는 말을 듣고 압비오 광장까지 마중을 나왔는가 하면, `세 여인숙' 이라는 뜻의 트레스타베르네라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울은 그들을 보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더 큰 용기를 갖게 되었다. 16) 우리가 로마에 도착하자 바울은 경비병 한 사람의 감시를 받으면서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본문은 로마로 가는 항해의 여정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에 가니라(11-14) 11절은 ‘석 달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석 달’이라는 긴 시간동안 바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겨울을 보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일행은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보낸 후에 로마를 향해 출발합니다. 전에 타고 왔던 배는 완전히 파선했기 때문에 새로운 배에 올라 출항을 합니다(11). 이 배는 수라구사에서 사흘을 머무르고 (12) 레기온에서 하루를 지내고 남풍을 만나 보디올에 이르게 됩니다(13). 우리가 나아가야할 믿음의 항해가 바로 이렇습니다. 내가 계획했다고 다 순적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항해하다 멈추고, 또 멈추고,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야 합니다. 남풍을 만나 도착한 보디올에서 바울은 신앙 공동체의 형제들을 만나 한 주 동안 이들과 머물렀습니다. 바울은 아직 죄수의 신분입니다. 죄인의 신분인 바울을 영접하는 것은 형제들에게도 위험한 일입니다. 바울과 같은 한 패로 취급받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디올에 있는 성도들은 바울을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 된 형제로 여기며 대접하였습니다. 어려운 항해의 여정 속에 생각하지 못했던 위로를 받습니다. “로마로 가니라”(14) 이제는 바다가 아니라, 육지 길로 로마를 향한 걸음을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보디올에서 믿음의 형제들을 만난 후 그들의 위로와 격려 환송을 받으며 로마로 가는 길에서 큰 힘을 입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15-16) 바울이 항해를 끝내고 로마를 향해 가려하자 로마에 있던 형제들이 브리올에 있는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마중을 나옵니다(15). 이 형제들은 3년 전에 바울이 쓴 편지 ‘로마서’를 읽었을 것입니다. 로마서의 편지를 통해 바울이 로마로 가기를 원한다는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고, 바울이 오기를 기다렸을 것 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맞으러 브리올까지 마중을 나왔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들과 함께 로마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16).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고 말합니다(16). 복음은 결코 갇히지 않았습니다.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을 때, 바울이 무엇을 했을까요?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울이 죄수의 신분이여서 복음을 전할 수 없을 것 같지만, 하나님의 복음은 결코 갇힐 수 없는 것입니다.
적용: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야 할 로마는 어디입니까?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의 로마를 향해 가실 수 있으십니까?
우리의 삶에서 수많은 난관과 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시는 곳에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계획과 생각이 아닌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신뢰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복음을 전한다면 하나님이 많은 성도들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28:11
석 달 후에 - 당시에는 선박들이 겨울 철 3개월 동안 항해를 중단하는게 일반적인 통례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를 출발하여 가이사랴로 가는 사절들이겨울철 항해중지 기간으로 인해 3개월간 중간에 머물러야했다(Josephus). 항해가재개되는 시기에 대해서는 2월 8일에 서풍이 불면서 시작되었다는 기록(Pliny theElder, Natural History)과 3월 10일까지는 항해가 불가능했다는 기록이(Vegetius, onMilitary Affairs iv. 39) 있다. 그런데 후자의 기록은 근해 항해가 아니라 먼 바다의 항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Bruce), 따라서 전자의 기록에 의거해 볼 때 바울 일행이 탄 배가 태풍을 만나 파선당한 것은 11월 초순경이었을 것이다. 알랙산드리아 배...디오스구로. - 바울 일행은 마침 그곳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지낸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날 수 있었다. 아마 그 배는 멜리데 섬의 '발레타'(Valletta) 항구에서 겨울을 지냈을 것이다. 여기서의 '우리'가 276명 전체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백부장과 그의 부하 군인들과 죄수들 그리고 바울과 누가, 아리스다고를 포함하는 그룹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 배도 곡물 수송선이었다면 후자일 가능성이 있다. 누가는 이배의 이름을 '디오스구로'(* ) 라고밝히고 있다. '디오스구로'는 제우스(Zeus)와 레다(Leda)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Pollux)를 가리킨다. 이들 쌍동이 별자리'제미니'(Gemini)는 폭풍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해주는 항해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아마 이 배의 앞 머리 양편에는 이 쌍동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 '디오스구로'라는 명칭이 씌어 있었을 것이다(Longenecker).
=====28:12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 이 도시는 시실과 섬의 수도로 섬의 동해안 남쪽에 있는 중요한 항구이다. 멜리데로부터 약 150K 떨어져 있고 성의 둘레가 35Km 되는 번창한 도시였다. 이 도시는 유명한 수학자 아르키메테스(Archimedes)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B.C. 734년 고린도인들이 식민지로 건설하였고, B. C. 212년 이후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 이 배가 왜 이곳 수라구사에서 사흘간 머물렀는지는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1) 멜리데에서 불어오던 남풍이 멈추었기 때문이라는 견해와(Bruce) (2) 심한 역풍(逆風)을 만났거나 짐을 내리고 새 짐을 싣고 가기위해서였다(Haenchen)는 견해가 있는데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28:13
레기온 - 이는 오늘날의 '레기오 디카라브리아' (Reggio di Calabria)를 가리는데 메시나(Messina) 해협의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있는 항구이다. 지리적 위치상 중요한 항구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폐항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남풍이 불기를 기다리며 하루를 묵었다. 남풍이 일어나므로...보디울에 이르러 - 바로 다음날 남풍이 불어 주었기 때문에더이상 지체하지 않아도 되었다. 레기온에서 340Km 떨어진 보디올까지 이틀만에 도달할 수 있었다. '보디울'(Puteoil)은 '작은 샘' 이라는 뜻을 가지며 오늘날은 포주올리(Pozzuoli)라고 부른다. 보디올은 나폴리 만에 위치한 네압볼리(Neapolis)의 외항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송해온 곡물들은 이곳에서 내려져 내륙으로 운반되었다.보디올에 도착함으로써 바울은 긴 해상 여행을 끝내고 로마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이제 로마까지는 불과 220Km 밖에 안 남았고 그 정도의 거리는 건강한 장정이 아피오도로를 통해 걸어서 오 일이면 갈 수 있었다(Zahn).
=====28:14
믿는 사람...믿지 아니하는 사람 -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행한 바울의 증언은 노력에 비해 충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사람의 믿는 사람을 얻었다. 대체로 학자들은이때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본다(26, 27장). 유대인동족(同族)에게 복음 증거하여 믿음을 갖게 하려는 바울의 노력이 극히 부분적으로만성공을 거두었던 경우는 본서에 여러 차례 기록된 바이며(14 : 4 ; 17 : 4 ; 19 :9)그것에 대해서 바울은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도 않았고 동족을 포기하지도 않았다(롬 9-11장)
=====28:15
압비오 저자 - 이는 압비우스 광장(Forum of Appius)을 가리키며 로마로 부터65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압비아 대로상에 있다. 이 대로는 B.C. 312년 로마의 감찰관 압비우스 글라우디오(Appius Claudius)가 이 도로의 건설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의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도로는 로마로 향하는 길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완벽한 도로의 하나로 로마의 장군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의 입성을할때, 군중들이 열열한 환영을 하며 맞이하던 길 이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으로 그 길을 걷고 있지만 사실상 그 길은 복음으로 로마를 정복하기위한 영광의 길이었다. 삼관 - 이 지명은 '트리온타베르논'(* , )을 의역한것으로 삼관(三館) 즉 '세 개의 숙소'(Tres Tabernae)라는 뜻이다. 이곳은 로마로부터 50Km정도 떨어져 있다. 그러니까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두 곳에서 바울을 맞기 위해 기다려고 있었던것이다. 맞으러 오니...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 바울과 로마 교인들과의 만남은 매우 감격적인 것이었다. 바울로서도 일찍이 와보려고 했었고(19: 21), 또한 주님께서도 그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과 약속을 주신 일이있던(23:11;27:24) 로마에 오게 되었으니 그 기쁨과 감사가 말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한 이곳로마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어서 그를 환영해주었으니 마음이 든든했을 것이다.본문의 '맞으러'는 '아판테신'( * )으로 어떤 도시의 대표단이나, 왕이나 장군을 맞이할 때 쓰는 단어임을 생각할때 로마의 성도들이 바울을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로서 얼마나 뜨겁게 환영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는 것은 그가 성도들을 만나기 전에는 절망을 하거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음으로 해서 낯선 곳에 대한어색함이 없어지고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 생겼다는 의미일 것이다(Bruce).
=====28:16
로마에 들어가니 - 드디어 바울이 로마애 당도했다. 오래된 서방 사본에는 "백부장이 죄수들을 시위 대장에게 넘겨주었"다는 문구가 첨가되어 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항소를 하였으므로(25 : 11) 황제 휘하의 부대 책임자에게 넘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한 군사와 함께 따로 - 누가는 중간 과정에 대한 자세한 언급 없이 바울이 한 군사에 의해 따로 감시를 받게 되었다는 결과 만을 언급하고 있다. 몸센(Mommsen)에 의하면 군인에 의해 따로 감시받게 를 것은 감옥에 감금시키는 것보다가벼운 형벌이었다. 아마 거기에는 베스도의 긍정적인 조서(25: 25; 26: 32), 그리고호송 책임자였던 율리오가 바울에 대해 경험한 대로 작성한 긍정적인 보고서 등이 작용했을 것이다. 로마법에 의해 군인의 한 손과 바울의 한 손이 사슬에 묶인 상태였는지 아니면 자유롭게 활동수 있도록 허락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사람들을 초청하여대화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자유가 허용된 것은 사실이다(17-23절).
< 설 교 >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
김춘섭 목사 / 행 28장 11~16절
인간은 괴로움과 고통의 심연 속에서도 일을 찾게 되고, 호흡이 있는 순간까지 견디어내려고 힘을 씁니다. 그러나 마지막 걸었던 최후의 것마저 수포로 돌아갔을 때, 완전히 기진하게 되고 따라서 모든 의욕은 사라지게 됩니다. 철저하게 믿었던 사람에게 배반을 당했을 때, 모든 것을 걸고 기다렸던 꿈이 좌절되었을 때, 도저히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탈진의 끝에 도달하게 되고, 꼼짝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하루에 5명꼴로 자살하고 있습니다. "사는 게 아냐!" "죽지 못해 사는 거지!" 믿는 사람들의 입에서도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생의 절박한 순간에 도달해 본 적이 있습니까? 다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은 경험을 가졌을 때가 있습니까? 그러나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할 수 없이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까? "그래, 정말 살만한 세상이구나. 이렇게 신나는 일도 있구나. 한번 해보자." 스스로 격려하며 힘을 얻었던 적이 있습니까?
바울은 인생의 황혼기에 로마에 도착합니다. 늘 찌르는 육체의 가시인 여러 가지의 병마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었고, 겨울 동안 지중해를 항해하면서 미친 바람으로 불리는 태풍 속에서 파선이 되어 지친 몸은 더 심각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죄수의 몸이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건강과 정신은 최악의 상태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에게 로마를 향하는 길은 최후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칠 대로 지친 바울이었지만,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행 28:16)"고 오늘 사도행전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로마로부터 150리나 먼 곳까지 마중 나온 믿음의 형제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마중 나온 형제들을 보고 무엇을 느꼈기에 그토록 견딜 수 없이 감사하는 마음과 삶을 향한 용기를 새롭게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나를 또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내가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1. 나를 기다리는 사람
바울이 겨우내 지중해 항해로 고생하였습니다. 풍랑 속에 배도 파선되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배를 만나 몇 군데를 거쳐서 보디올이라는 항구에 이르게 됩니다. 그곳에서 믿음의 식구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이 간청으로 일주일을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압비오 광장을 지나 삼관이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믿음의 형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곳은 로마로부터 40마일 되는 길인데, 바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에서부터 먼길을 마중 나온 형제들이었습니다. 아마도 보디올에서 머무는 동안데 바울 소식이 로마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바울은 뜻밖에도 그 믿음의 형제들을 보는 순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용기가 솟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와 함께 일하기 위해서 나를 기다리는 믿음의 형제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교회로부터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마음 깊은 곳에서 굳건하게 자리잡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박해시대 때, 예수 믿는 것은 어쩌면 죽음과도 교환되는 시기에 마중 나온 동지들을 바라볼 때, 바울의 가슴은 뜨거워졌던 것입니다. 자기를 기다리는 동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나와 함께 일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힘을 얻게 됩니다.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 가면서 버스가 연착하여 읍에서 내렸는데 막차가 이미 떠난 후였습니다. 자반 고등어 한 손을 들고 30리 밤길을 가는데, 무서운 짐승이 나올까봐 겁이 났습니다. 고등어를 버리고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기다리시는 할머니를 생각하니 그럴 수 없었습니다. 힘을 내서 뛰다시피 하여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감사하게 하고, 용기를 가지게 합니다.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며 다시 용기를 냅니다.
2. 내가 사랑할 사람
바울은 그뿐 아니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중 나온 그들과 함께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을 들어야 하는 수많은 로마 사람들을 본 것입니다. 그토록 지치고 쓰라린 환경 속에서도 마중 나온 믿음의 식구들을 바라보면서 그들 배후에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많이 있음을 본 것입니다.
바울은 일생 동안 미움도 많이 받았고 배척도 많이 받았습니다. 수많은 박해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스스로 고백하기를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고후 5:4-5)"의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랑할 사람이 있다는 신념이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고, 삶에 대하여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모든 이들이 복음을 받아야 자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사랑을 받아들여야 할 소중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지난 10월에 한 달 동안 다녀온 콜로라도 볼더한인교회에서 '아름다운연합교회 성도님들께'란 제목으로 감사카드가 왔습니다.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세태를 능력있게 거스르시는 아름다운연합교회의 하나됨의 정신을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과 아름다운연합교회 성도님들께서 보내주신 그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저희들 개인이 그리고 저희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제자와 공동체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믿으며, 그런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는 날을 위하여 애쓰겠습니다."
감사카드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 두 교회와 주고받는 사연이지만, 그 교회가 감당해야할 많은 영혼들을 봅니다. 그들이 사랑해야 할 그곳의 사람들을 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함께 일해야 하는 믿음의 동지들과 함께 그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다른 사람들의 영혼도 보는 것입니다. 다시 눈을 떠봅니다. 주변의 사랑할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삶의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3. 보람찬 일거리
분명히 바울은 지친 육신에 죄수로 갇힌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중 나온 믿음의 형제들을 본 순간 로마에서 보람찬 일거리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보람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 하나님! 나로 하여금 이 형제들과 함께 로마에서도 해야할 보람찬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더욱 담대한 용기를 가진 것입니다.
열심히 전도하는 교우들을 봅니다. 몇 명을 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합니다. 이름을 적어서 가지고 올 때마다 이렇게 보람된 일이 없다는 즐거움이 역력하게 보입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일이 있다는 것이 가슴을 뛰게 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늘 감사와 감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하며 진심으로 감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람은 일거리가 없을 때 좌절합니다. 일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정말 인생은 일거리가 없어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보람찬 일거리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눈을 뜨면 우리에게 보람찬 일거리들이 있습니다. 신바람나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골프하러 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전날 저녁 가슴이 뛰어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면 실망으로 바뀝니다. 그것이 보람찬 일과 다른 점입니다. 보람찬 일은 결코 실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김재호 교우님을 보면서 저렇게 신나게 일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알코올에 젖어서 산 사람이 조금씩 사랑을 경험하면서 새로워지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분의 신앙이야 하나님이 아시겠지만 진실로 그는 보람된 일거리를 찾은 것 같았습니다.
진정으로 오늘 나를 움직이는 것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서 주저앉고 싶은 그런 탈진한 순간에도 내 마음에서 감사를 나오게 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와 함께 일하기 위하여 나를 기다리는 믿음의 식구들을 봅니다. 그들과 함께 해야할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들이 있습니다. 나의 손길을 통하여 전해야할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를 움직입니다.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양항모 목사 / 행 28:11-16
우리가 그동안 바울의 행적을 죽 살펴보았습니다.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평생을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소아시아지방과 서유럽 마게도냐 지방을 거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바울은 후일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고통들을 고린도후서 11장에 이렇게 말합니다.
“23....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라고 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엄청나게 맞고 심지어 돌멩이로 맞기도 하고 타고 가던 배가 세 번이나 파선이 되고 강도들 동족 중에서 나쁜 사람들 이방인들에게 위험을 당했습니다. 수고하고 애쓰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고난들은 다 당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한두 번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참고 넘어가겠지만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어려움을 당하면 몇 번 하다가 때려치웠을 것입니다.
또 어려움을 당해도 좀 견딜만한 어려움을 당하면 조금 고생이 되어도 참고 넘어가겠지만 이렇게 죽도록 고생을 하다가 보면 도저히 참을 수도 없고 계속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 고생의 세월이 몇 년쯤이라면 그래도 견뎠을 것입니다. 근 30여 년 동안을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고 계속해서 고생하고 또 고생하고 일평생을 그렇게 보내야 한다면 우리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세월을 보냈습니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거나 한 번이라도 원망하고 후회를 하거나 그만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땅끝까지 가서 더 많은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어디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나왔을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서 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용기도 주셨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와 함께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전도 여행길에 많은 사람이 동행했으며 이번 마지막 로마로 가는 길에도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동행했습니다.
누가는 의사로서 육체적으로 연약한 것으로 알려진 바울의 건강을 살폈을 것입니다. 또 여행 중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도 기록하여서 이렇게 우리가 보는 사도행전으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제법 재산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전도 여행을 다니는 도중에 필요한 비용들을 대어주는 재산가였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울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여행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가는 도시마다 바울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서 바울을 환영해주고 바울을 따뜻하게 대접해주어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바울에게 힘이 되어 주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곳곳에서 그리스도로 한 형제가 된 사람들이 있어서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본문 11절에 “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라고 했습니다.
멜리데라는 섬에서 3개월을 보냈습니다. 때가 추운 겨울철이라 배들이 출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겨울을 보내고 봄이 왔을 때 드디어 출항하는 배가 있어서 그 배를 타고 로마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라는 배가 출항을 했는데 이 배에 바울 일행이 승선을 하고 로마로 출발했습니다. 바울과 함께 왔던 276명이 다 그 배를 탔는지 일부만 탔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다 그 배에 탄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탄 배가 알렉산드리아라고 해서 전에 타고 오다가 거의 파선이 된 그 알렉산드리아 배인 줄 알았는데 같은 이름의 다른 배였습니다. 전에 탔던 알렉산드리아라는 배는 지난번 풍랑에 거의 다 부서졌기 때문에 고칠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배에다가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당시 이집트의 유명한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출항하는 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출항해서 지중해의 여러 도시를 거쳐 로마까지 항해하는 배였습니다.
이 항구도시를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한 것은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도 유명하고 그 왕이 세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가 유명한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배들이 그 이름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배의 머리 장식에 디오스구로라”라고 했습니다. ‘디오스구로’는 제우스 신의 쌍둥이 아들(카스토르, 폴룩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쌍둥이 아들이 폭풍 가운데서도 배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믿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옛날 사람들은 미신을 많이 믿었습니다. 특별히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어부들 가운데는 이런 미신을 많이 믿어서 귀신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심지어 심청전에 나오는 것처럼 신에게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그곳 사람들도 이런 미신들을 많이 믿었습니다. 바닷길이 너무나 험하기 때문에 배를 타고 나간 사람들이 무사하게 귀환하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는데 그중에 중요한 것이 그런 미신의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박의 이름도 큰 힘을 가졌던 알렉산더 대왕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로 하고 쌍둥이 수호신인 디오스구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배가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배에다가 다 붙인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이런 미신을 섬기는 배에 탔다는 것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모든 배가 이런 배들이었고 바울이 배를 골라서 탈 힘이 없어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그런 배에 태우시고 로마까지 가게 하신 것은 그들에게 참 신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려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 미신들로 자연의 재난을 이길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재난도 이길 수 있는 분이심을 알게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수많은 재난이 있습니다. 그런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행운을 가져다주는 숫자나 물건 같은 것이나 심지어 부적을 사서 가지고 다니기도 합니다.
이런 재난을 이길 힘은 그런 미신이나 행운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만이 이런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본문 12~14절에 “12.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13.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낸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14.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라고 했습니다.
로마로 가는 도중에 들렸던 도시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기록된 도시들은 이탈리아에 속한 도시들이었습니다. 이미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에 도착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멜리데를 떠난 배는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머물러 있었습니다. 수라구사는 이탈리야 남부 시실리섬의 항구도시입니다. 그 섬에 사도바울이 그곳에 들러서 복음을 전파했다는 장소와 돌 제단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사흘 동안 머문 것은 당시의 기상 상황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배로 싣고 오던 물건을 내리거나 다른 물건들을 싣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울은 그곳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냈습니다. 레기온은 이탈리아반도의 남쪽 맨 끝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이 도시에서는 남풍이 일기를 기다렸다가 하루 만에 남풍을 만나서 떠난 곳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보디올은 이탈리아반도의 중심부로 꽤 올라온 부분입니다. 바울이 가고자 했던 로마에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보디올에 이미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이곳 사람들이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되었던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갔던 사람들이 당시 일어났던 기적을 보고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와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을 서로 형제라고 칭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불렀습니다.
교회 안에 형제들은 육신의 형제들보다 더 친밀하게 지내야 하는 형제들입니다. 육신의 형제는 이 세상에서만 형제지만 영적인 형제는 영원토록 형제지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일주일 동안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만났는데 자신들이 있는 것으로 바울을 청했고 바울은 그들의 초청을 받고 가서 일주일 동안을 머물렀습니다.
바울이 죄수의 몸이었지만 이렇게 자유롭게 초청을 받아서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인솔하던 백부장이 바울을 신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이 도망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았을 것이고 오히려 바울 덕분에 그들이 모두 목숨을 건진 것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거기 머물면서 무엇을 했는지는 기록하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그동안 어려운 여행으로 인해서 지친 몸을 회복시키고 편히 쉬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나 마나 바울을 강사로 부흥회를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기적을 보고 복음을 듣기는 했지만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마음이 많았을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복음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듣기 싫다는 사람에게도 억지로라도 전해야 할 복음인데 듣겠다고 한다면 신나게 전했을 것입니다.
제가 요즘 복음을 전할 기회가 더 많아졌습니다. 설교나 강의할 기회가 좀 많아진 것 같습니다. 설교가 쉬운 것 같지만 참 어렵습니다. 설교 한편 작성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설교를 듣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든지 가서 설교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고 그들 중의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듣고 바른 믿음을 가지게 된다면 더없이 기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본문 15절~16절에 “15.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16.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라고 했습니다.
14절 마지막 부분에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라고 했습니다. 보디올에서 형제들과 일주일을 머문 후에 거기를 떠나서 로마로 왔습니다. 보디올에서 로마까지는 육로를 통해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에도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울 일행이 로마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나왔다고 했습니다.
압비오 광장은 로마에서 65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광장이었습니다. 압비오 광장은 압비오 대로상에 있는 광장인데 압비오 대로는 로마로 통하는 가장 오래되고 완벽한 도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도로는 로마의 장군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의 입성을 할 때 이용하는 도로라고 했습니다. 군사들이 승리의 입성을 할 때 군중들이 도로에 나와서 열렬히 환영했던 길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승리의 도로로 입성을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나와서 환영을 하는 것은 복음의 승리를 예고하는 귀한 발걸음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을 초라한 죄수의 몸으로 입성을 하지만 후일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귀한 발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트레이스 타베르네는 세 개의 숙소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로마에서 50Km 떨어진 곳입니다. 압비오에서도 형제들이 마중 나와서 환영을 했고 좀 더 올라오니 트레이스 타베르네에도 형제들이 마중을 나와서 바울 일행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환영을 받은 바울은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 위축될까 봐 미리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을 준비하시고 바울에게 힘과 용기를 얻게 해주셨습니다.
요즘에 우리나라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서 여기저기서 수시로 기독교인들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기독교인들은 정말로 몇 명 안되는 시절이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정말로 반가웠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당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마음대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이렇게 재판을 받으러 로마까지 죄수의 몸으로 끌려오고 있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면서 바울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바울에게 큰 용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능력이 있구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구나 하는 것이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전도해서 우리 교회 구성원들이 많아지게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게 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기에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성도들이 많아지는 것이 우리 서로에게 믿음의 담력을 주는 귀한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이 모여서 예수님을 믿으면 힘이 없어집니다. 복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적어지면 복음의 능력을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 서로에게 힘이 되고 믿음의 담력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많아지도록 열심히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 일행이 드디어 로마에 도착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곳곳에서 바울 일행을 마중 나와 환영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바울은 힘을 얻고 담대함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도 저에게 힘을 얻게 하고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귀한 분들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더욱 큰 힘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전도에 힘을 쓰셔서 교회가 부흥하는 일에 사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행 28장 11~16절 / 김인환목사(광교지구촌교회)
■ 생각해 볼 이야기
¶ 맨발의 사도, 인도의 성자라 불리는 썬다 싱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눈이 무섭게 내리던 어느 날, 썬다 싱이 지인과 함께 험한 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는데 가는 길목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러자 썬다 싱이 아직은 이 사람이 살아 있으니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인은 눈길에 혼자가기도 어려운 데 쓰러진 사람을 들쳐 메고 갈수는 없다며 그냥 혼자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썬다 싱은 얼어 죽어가는 사람을 들쳐 업고 험한 눈길을 걸었습니다. 한 참을 가다보니 몸에서는 땀과 열이 나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그 열로 인해서 업혀 있던 사람의 얼었던 몸도 서서히 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업혀 있던 사람이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운이 다 빠져 쓰러 질 지경이 된 썬다싱을 그 사람이 부축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도우며 계속해서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 보니 앞에 어떤 사람이 쓰러져 숨져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썬다 싱과 함께 길을 가다가 먼저 가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혼자 걷다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 20여 년 동안 무려 300만 명을 만난 후에 얻은 변하지 않는 승리의 원칙을 책으로 낸 분이 있습니다. 바로 베스트셀러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의 저자 이종선씨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가장 큰 장애는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함께 하고 싶어 하면서도 함께 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사람들은 외로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 성경 속의 진리 찾기
■ 오늘 본문은 바울이 치유의 섬, 멜리데에서 출발해 드디어 로마가 당도하는 장면입니다. 본문 16절 보세요.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 아무런 감동이 없으시네요. 지금 꿈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수많은 환란과 핍박, 감당하기 어려운 수많은 고난과 광풍을 지나 드디어 로마에 당도 한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벅차오르는 감격과 함께 주마등처럼 지나간 일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난 여정 속에서 자신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분명 마음속으로 이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난 여기 까기 올 순 없었을 거야!
-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로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지만 그 여정 속에는 그와 함께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인생은 홀로 걷는 길이 아닙니다. 인생은 함께 하는 길입니다. 아니 인생은 함께 해야만 끝까지 걸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함께 하는 삶의 원리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Ⅰ. 그렇다면 함께하는 삶,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붙들어야 할 원리는 무엇일까요?
■ 진리 찾기 Ⅰ
힘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 존 맥스웰이 쓴 책 중에 “함께 승리하는 리더”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가지고 우리가 함께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 캘리포니아 주립대 감독인 페퍼 로저스가 정말 형편없는 성적을 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자신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내조차도 말입니다. 자신의 애완견만이 유일한 친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속상한 마음에 아내가 자신을 격려해 주기를 바라면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 사람이라면 적어도 친구가 둘은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아내의 격려를 바랬더니... 다음 날 아내가... 개를 한 마리 더 사왔다고 합니다.^^
- 함께 하는 삶의 첫 번째 원리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힘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비판하고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힘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바울에게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6장 1-절 보세요.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 바울에게 어떤 존재가 있었다고요? 바울의 보호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어서 3-4절 보세요.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 뭐라고요?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바울에게 어떤 존재였다고요? 바울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고백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어서 로마서 16장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힘을 주었던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도 그것을 증언하고 있어요. 본문 15절 보세요.
그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 무엇을 얻었다고요? 담대한 마음입니다. 힘을 얻은 거예요. 용기를 갖게 된 거예요. 누구 때문에요? 하나님 때문에요? 아니요,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어디까지 와서 바울을 맞이하고 있다고요? 압비오 광장입니다. 로마에서 무려 7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입니다.
- 그런데 본문을 잘 보면 그런 형제들이 또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로마의 형제들이 로마에서 56킬로미터 떨어진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와서 바울을 맞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격려하기 위해 계속해서 바울에게 힘을 주는 사람들을 보낸 것입니다.
-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한 평생 가장으로, 또한 형제 중 맏이로 인생의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살아온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분이라 한 번도 제대로 쉬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난생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뉴욕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저 하지 않고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제가 있는 린치버그에서 차를 가지고 출발해 8시간을 운전해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만난 순간 얼마나 큰 감동이 밀려오던지, 그때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목사님, 처음으로 이런 대접을 받으니 눈물이 납니다.
- 바울의 마음이 그러지 않았을까요? 생각지도 못했던 마중, 로마라는 도시에서 살기에 바빴을 그 형제들이 그것도 걸어서 그렇게 먼 거리까지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거예요
- 바울은 눈물이 났을 것입니다. 사실 바울도 지쳐 있었거든요. 계속되는 핍박과 환란, 끝나지 않는 재판, 급작스럽게 불어온 광풍과 난파, 그 어느 것 하나 녹녹한 것이 아니었잖아요? 사실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주님만 바라보고 가는 길이었지만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먼 거리에서 한 걸음에 달려온 로마의 형제들을 보는 순간 바울은 눈물 나게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나면 힘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로 인하여 힘을 얻어 끝까지 사명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Ⅱ. 한발 더 나아가서 함께하는 삶,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붙들어야 할 원리는 무엇일까요?
■ 진리 찾기 Ⅰ
환상을 버리고 서로를 용납해야 합니다.
- 탁월한 설교자인 존 오트버그가 쓴 책 중에 “우리는 만나면 힘이 됩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에서 오트버그는 함께 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서로에 대한 환상을 깨라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상대방이 정상이라는 환상에 빠져 관계를 맺는다면 그것은 곧 진실을 거부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상대방을 자신이 가진 환상에 맞게 뜯어 고치고 통제하려 들기 때문이다.
- 여러분은 어떠세요? 혹시 댁에 있는 배우자와 지금 편안하십니까? 편안하지 않다면 아직도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남편이 이렇게 되어야 할 텐데… 아마 지금도 그런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런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은 결코 쉽지는 않을 거예요. 늘 싸울 것입니다. 속상할 거예요.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생각하는 여인네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언 25장 24절입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 남성들 아멘이십니까? 공감이 되시는 남성분들이 엄청 많으시네요^^ 그래요. 곁에 있다고 해서 다 힘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함께 할수록 힘들어지는 경우가 더 많아요. 왜요? 가까이 하면 갈수록 남이 보지 못하는 그 사람의 허물과 단점을 보게 되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뜯어 고치려고 하잖아요.
- 그런 생각이 들자 저는 본문에서 가장 이해되지 않은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그 사람이 누굴까요? 바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입니다. 왜 누가가 이해가 되지 않냐고요? 생각해 보세요. 누가가 어떻게 사도행전을 기록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과 늘 함께 하면서 바울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관찰하고 본 거예요. 그러니 누구보다도 바울의 허물과 단점을 많이 봤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누가가 지금도 바울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본문 14절 보세요.
거기서 형제들을 만나 그들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머무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로마로 가니라
- 누가 로마로 갔다고요? ‘우리’ 입니다. 자, 이 우리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네 바로, 누가입니다. 그렇다면 이 누가가 언제부터 바울과 동행했습니까? 사도행전 16장 10절입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 그렇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환상을 보고 드로아를 떠날 때부터 함께 했던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이때부터 사도행전은 3인칭복수가 아니라 1인칭 복수로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는 바울과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동역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 그러니 얼마나 많은 바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바울의 허물과 단점을 보았겠습니까? 하지만 누가는 지금도 여전히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로마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10-11절은 그 누가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떠나가는 그 순간에도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곁에서 의술과 섬김으로 바울의 곁을 끝까지 지킨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누가였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끝까지 바울과 함께 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완벽한 사람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니요. 그것은 바로 바울의 단점과 허물을 받아들이는 용납함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함께 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상대방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서로 용납하십시오.
Ⅲ.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삶, 살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붙들어야 할 원리는 무엇일까요?
■ 진리 찾기 Ⅰ
죄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 오늘 본문을 보시면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 구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 자, 누가를 포함한 바울과 그 일행이 로마로 들어갈 때 무슨 배를 들어갔습니까?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배의 머리장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장식이 무엇이었습니까? ‘디오스구로’입니다. 왜 세상 사람들은 이 장식을 달았을까요? 디오스구로는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당시 항해를 하는 모든 이들이 믿었던 수호신이었습니다.
- 정말 그렇습니까? 다른 이들은 몰라도 바울과 그 일행, 아니 바울 일행과 함께 했던, 다시 말해서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은 알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광풍을 만나 난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갈 수 있는 것,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이 이 배의 장식을 의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한 배에 타고 있는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함께 할 수도 로마로 갈 수도 없었다는 것을 역설과 해학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각기 다른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것, 함께 풍랑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것,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우리는 환상을 깨뜨리고 서로 용납하며 함께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이것을 망각합니다.
-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를 보셨습니까? 거기에 보면 헬렌 헌트는 잭 니컬슨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감정으로 매우 혼란스러워합니다. 니컬슨이라는 상대가 자신과 아픈 이들에게 잘 해주는 장점이 있지만, 광장공포증, 강박신경증, 구제불능에 가까운 무례함이라는 단점들을 소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무례함은 헬렌을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무례함 때문에 폭발 직전에 이른 헬렌이 자신의 엄마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엄마, 난 그저 정상적인 남자친구가 필요한 것 뿐이라고요.
그러자 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엄마가 이렇게 타이릅니다.
누구나 그런 친구를 원하지, 그렇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단다.
- 그래요. 그런 사람은 없어요! 교회는요?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더해요! 왜 교회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하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은혜 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성도 간에 교제를 할 때 반드시 전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비정상이라는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는 거꾸로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뭔가 다를 거야. 저 공동체는 다를 거야.’라는 환상을 갖는 것이죠. 하지만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현대인을 위한 성도의 공동생활”이라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와 같은 모든 환상을 곧바로 깨진다.
- 뭐라고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그 모든 환상이 깨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되세요? 아니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가 갖는 이상과 환상을 깨뜨리는 것일까요? 은혜란 우리가 서로를 향해 품는 이상과 환상을 실현해 주는 것 아니에요? 아니요.
-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 받을 수 없는 망가진 존재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에 대한 환상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마저 깨뜨리고 서로를 용납할 수 있는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그 은혜에서 벗어나게 될 때, 그 은혜를 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상대방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을 갖고 공동체를 파괴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 회퍼는 그의 책 “현대인을 위한 성도의 공동생활”에서 계속 합니다.
이런 환상은 빨리 깨질수록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유익하다. 크리스천 공동체의 실제 모습이 아닌 자기만의 환상을 더 선호하는 사람은 아무리 자신의 의도가 정직하고 진실하고 헌신적이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크리스천 공동체를 파괴하고 만다.
- 사랑하는 여러분, 크리스천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와 같이 망가진 사람, 나와 같이 더러운 존재 안에 들어오셔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 은혜 안에 머물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판단하기 보다는 서로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며 격려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말씀따라 생활속으로
- 존 맥스웰의 “함께 승리하는 리더”라는 책에 ‘전우와 함께 들어갈 큰 참호를 파’라는 부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제 갓 다섯 살이 된 트레이시가 아버지에게 친구 집에서 놀고 와도 되는 지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허락하는 조건으로 저녁 식사 시간이 오후 6시까지는 꼭 돌아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약속했던 6시가 다 되었지만 트레이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약 25분이 지나자 아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아버지는 약속을 어긴 아이를 보면서 화를 억누르며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아빠, 늦어서 미안해, 하지만 내가 막 집에 가려고 할 때 친구 인형이 부서졌어.”
“오 그랬구나, 그것을 고치느라 늦었구나!”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같이 우느라 늦었어.”
- 사랑하는 여러분, 함께 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바꾸어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같이 느끼고 울어주는 것입니다.
- 저는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것, 임마누엘이 되신 것은 죄와 허물로 망가진 우리와 같이 우시기 위함이라고 말입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여러분, 우리 서로 기대와 환상을 갖기 보다는 연약한 서로를 붙들고 함께 울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은혜를 안다면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