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COVID 민초들의 3.1정신으로 이겨내자.
어제 일요일은 3.1절이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복병을 만나 전쟁 중이다. 일개의 종교이단 단체가 퍼트린 우한 폐렴사태는 대구 경북지방을 초토화 시키고 있다. 미국에서조차 이 지역 주민을 입국금지 시켰다.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가 해외로부터 우리국민이 격리조치 당하고 해외 시장으로부터 입국제한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이러한 위기에도 끈기와 인내로 버텨온 역사를 안고 산다. 우리나라가 해방 된지 72년의 역사에서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한 과정은 일제하의 치욕을 견디며 익혀온 죽느냐 사느냐의 투쟁의 결기로 다져진 집념의 결과다. 이런 집념의 원초는 3.1운동이다.
누군가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길 “해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새로 읽고 그 감동을 글로 옮기면 우리의 자서전을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햄릿의 고뇌와 방황, 그 처절한 사랑과 죽음은 우리 모두의 아픔일 수 있다는 뜻이겠다고 풀이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다”라는 햄릿의 독백은 운명의 굴레에 묶인 모든 실존의 절규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코로나바이러스로 고통은 민초들의 죽느냐 사느냐의 절규다.
죽고 사는 것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개념은 동양사상이다. 이런 동양사상에서 보면 ‘죽느냐 사느냐’는 고민할 만한 문젯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여길 수 있다면 우리의 정신은 얼마나 자유로울 것인가. 비록 그처럼 높은 지혜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무슨 일이든지 죽을 각오로 해낼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보람될 것인가. 우리가 21세기 문명시대에 고리타분한 동양사상을 염두에 두고 이 위기를 말하려면 우리 선배와 선조들이 겪어온 과거 3.1 운동시대의 아픔을 그 정신을 뒤돌아보는 것도 그 분들을 위한 우리의 정신자세 일지도 모른다.
일제(日帝)의 침략에 비분강개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순국열사들,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 사랑을 위해 생명을 버린 순애보(殉愛譜)의 연인들, 일제의 압박과 설음에도 묵묵히 삶을 살아온 민초들, 생명 같은 자식들을 위안부로 징병으로 보내야했던 일제당시 부모님들 그 얼마나 치 떨리는 나날을 보내야 했던가.…, 이처럼 치열한 영혼들이 없는 세상이라면 나라의 품격도, 신앙의 자유도, 사랑의 순결도 찾을 길이 없을 것이다. 일제가 내린 훈작(勳爵)으로 호의호식하던 친일매국노들은 민족의 역사 속에서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완용 박제가 등 을사오적은 당시는 호의호식하던 명예는 누렸을지언정 역사의 죄인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이 시대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그러나 목숨을 버리는 것 못지않게 어렵고 값진 일이 있다.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기에 앞서 금쪽같은 자식을 군대에 보내고 어려운 이웃과 아픔을 나누며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일, 신앙을 위해 생명을 버리기 전에 ‘지금 여기에서’ 신앙의 바른 자리를 지켜내는 일…, 이것이 죽어서 국립묘지에 묻히는 것보다 더 고결한 일이요, 죽은 뒤에 천당 가는 것보다 더 거룩한 일일 수 도 있다.
우리 모두는 마땅히 죽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쓰라린 삶의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기 마련이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 가치와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기에 고통의 삶을 살아내는 것…, 이것이 진정한 자유이자 참다운 용기일 것이다. 이것이 정의를 외치며 분신자살하는 것보다 더 깊은 사랑일 수 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린도전서 13).
현대미술관에서 내가 젊어서 빗자루로 글씨를 쓰는 운보를 보고 비난했던 벙어리에 귀머거리인 운보(雲甫)가 그린 초기작품을 접하고 살아 날아 가는듯한 새와 살아서 미소 짓는 여인의 그림에 혼탁했던 내가 문 앞에 앉은 운보 김기창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목례만으로 인사하고 돌아서 나온 그 부끄러움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 천박스럽고 경박스런 나 자신을 발견했었다. 운보 김기창이 조선학도병 격려 포스터에 부끄러운 삽화 몇 점 끄적거려 주고 모질게 살아남지 않았던들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가 로마 교황청 안에 걸릴 수 있었을까. 친일(親日)의 논란 속에서도 학교를 세우고 신문을 찍어낸 선각자들이 없었더라면 식민지의 척박한 땅에서 민족 언론과 민족 사학이 뿌리내릴 수 있었을까. 각고의 투혼이 빚어낸 결과물을 우리는 만나고 있다.
어제 일요일은 순국열사들의 숭고한 민족혼을 기리는 3·1절이었다. 살 떨리던 치욕의 세월을 억척스러운 삶으로 견뎌낸 옛 어른들께 숙연한 추모의 묵념을 올린다. 3·1절은 열사들의 죽음만을 기억하는 제삿날이 아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빈주먹, 맨몸으로 이 땅을 지켜온 민초(民草)들에게 경건히 머리 숙이는 감사절이기도 하다. ‘죽음의 피’보다 ‘삶의 땀’이 먼저다. 이 순서를 뒤바꾸는 것은 생과 사의 엄숙한 섭리를 거스르는 신성모독일는지도 모른다. 친일을 모독으로 일제와 함께 살아온 그날이 모욕으로 생각하고 백성 모두가 3000만이 순국했다면 이 나라는 지금 누구의 것이었겠나? 살아서 조국을 지킨 이들을 개 같은 이념으로 모독하지 않았으면 한다. 친일명부를 만든 그들이 뒤에선 구린내 나는 짓을 서슴치 않게 하면서 말이다.
역사는 정신과 실태(實態)의 결합이다. 열사들의 장렬한 죽음이 민족사의 혼이요 정신이라면, 민초들의 고단한 삶은 그 정신을 겨레의 터전에 우뚝 세운 우리 역사의 실태일 것이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일제 시절, 이름과 성을 가는 창씨개명의 수모까지 겪으면서도 아들딸 낳아 어렵사리 기르며 피땀 흘려 가르쳐온 어르신들이야말로 수난의 민족사를 지탱해온 버팀목이었다. 그 시대 목숨을 부지하고자 비록 친일의 경지를 다녀온 수천만 민족의 생사는 국가의 존망이었다. 일제하에 살아남았기에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공출을 하지 않은 민초가 어디 있으며 일제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백성이 어디 존재하는가. 강도는 다르지만 친일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친일 명부는 그 당시 3000만의 이름이 모두 새겨져야했다.
오늘도 민초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어린 나이에 많은 재산을 물려받고 때가 되면 병역면제 혜택까지 거머쥐는 속칭 금수저들이 떵떵거리는 세상에서, 흙수저라 불리는 힘없는 서민들의 가슴이 어찌 막막하지 않으랴. 그러나 더 흙수저를 울리는 것은 겉으로는 정의와 공정과 평등을 내세우고 속으로 온갖 파렴치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던 이 정권의 표리부동이다. 명문대 서울대 전 교수이며 민정수석과 법무장관을 지낸 조국이 그 부인 정경심과 온갖 부정 비리를 저질러 지금은 검찰고소에 재판중인 사건이 이 시대 민초들의 영혼을 서글프게 한다.
그래도 희망은 영혼이 서글픈 민초들 그런 민초들에게서 나온다. 누군가의 귀한 자식들이 군복무를 건너뛰고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동안, 선량한 보통 사람의 아들들은 눈보라 치는 전선에서 묵묵히 나라를 지키고 있다. 외국 영주권을 포기하고 조국에 돌아와 자진 입대하는 청년도 적지 않다. 천안함의 46용사는 젊디젊은 나이에 영해의 수호신이 되었다. 이 시대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무명(無名)의 실태들이다. 북한의 핵무장으로 긴박해진 안보 상황에서 이처럼 반듯한 젊은이들의 모습은 여간 듬직하지 않다.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한 물음은 비단 저 불행한 덴마크 왕자 앞에만 놓였던 물음이 아니다. 오늘의 민초들인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물음이기도 하다. 자괴(自愧)를 무릅쓰고 그 물음을 이렇게 고쳐 묻는다.
“나라를 위해 죽기 전에 나라를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 기미년 그때의 민초들처럼, 전방의 듬직한 젊은이들처럼.“
어제는 우리의 3.1절이었다. 그 정신으로 우리의 현 위기를 넘겨야한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대구경북지역의 주민들이 생사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 진원지가 중국 우한을 다녀온 신천지 교인임이 들어나면서 진료방향이 신천지교인을 우선하고 있다. 신천지는 예수교를 빙자한 이단이다. 예수님은 교리를 말하지 않았다. 오직 진리만을 말씀하셨다. 우리의 젊은 지성들이 이런 사이비 교단에 빠져드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 젊은 영혼을 썩게 하는 이단은 사라져야 한다. 오직 깨달음만이 극복할 수 있다. 오늘날도 우리에게는 일제치하의 과정처럼 나라를 위해 죽기 전에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하는 심정으로 신천지를 극복하고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해야 한다.
우리 모두 남녀노소 불문하고 악착같이 병마와 싸워 이겨야 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나약한 영혼보다 깨닫는 영혼이 되어야한다. 이만희 같은 신천지 교리는 절대로 이 땅에 구현되지 않는다.
어제 3.1절을 생각하며
2020년 3월 2일 오전 8시
율 천 이 권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