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는 자는 쫓지마라! 적의 대형을 허무는 게 우선이다!!”
마뉴엘이 이끄는 카타프락토이 기병은 비잔틴군 우익의 가장 끝에서부터 적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투르크군의 입장에서는 날벼락같은 일이었다. 전방의 비잔틴군도 상대하기 벅찬데 난데없는 기병이 옆구리를 들이받은 것이다. 가장 가장자리에 있던 투르크병사들은 맹렬히 전진하는 말에게 채여 쓰러졌다. 그들은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내장이 파열되고 입과 코로 역류하는 피를 쏟으며 죽어갔다. 하지만 말발굽을 비껴간 자들도 결코 운이 좋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몇 번 더 숨쉴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투르크군의 좌익은 지옥의 아수라장이었다. 전방과 측면의 비잔틴군은 낫으로 풀을 베듯 아군을 죽이며 전진하고 있었고, 아군의 기병은 저 멀리 우익에서 도끼를 든 적군과 씨름하고 있어 구원은 요원했다. 자신들이 수적으로 비잔틴의 우익을 압도한다는 사실은 처참하게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공포에 얼어붙은 투르크의 좌익은 더 이상 전투집단이 아니었다. 비잔틴군에게 그것은 살아있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투르크군에게 예상보다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적을 압도할 수 있다는 확신은 그들을 마주하고 있는 비잔틴군의 전의를 더욱 부채질하였고 그에 비례하여 투르크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공포가 위험수위를 넘자 급기야 농민병 중에서 속속 이탈하는 자가 생겨났다. 지휘계통이 마비되고 병사들의 두려움이 행동으로 이어지면서 투르크군의 좌익은 순식간에 패닉상태에 빠져 너도나도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수적인 우위는 더 큰 혼란만을 가중시켰다. 투르크군의 좌익은 부풀어오른 풍선이 끝내 터지듯 삽시간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언덕 위에서 전장을 주시하던 술탄 슐레이만 2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전장의 상황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로 흐르고 있었다. 수의 우세를 바탕으로 한 그의 전략은 누가 생각해도 틀린 데가 없었다. 많은 수의 농민병을 좌익에 집중하여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안 중앙과 우익에 치우친 정규군이 비잔틴의 중앙과 좌익을 제압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 이것이 술탄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기병까지 가세한 우익은 아직도 적을 밀어내지 못하고 중앙역시 치열한 접전만을 벌일뿐, 확연한 전장의 변화는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투르크군의 왼쪽 날개가 주저앉은 것이다. 아무리 농민이라지만 자신들보다 적은 병력에게 등을 돌리다니! 술탄은 경악했다. 남은 예비대도 전부 농민병들 뿐이었다. 그들조차도 도망치는 아군의 모습에 심하게 동요하는 듯했다. 결국 술탄은 남아있는 병력 전부를 직접 인솔하고 뛰쳐나갔다.
투르크의 좌익을 허물어뜨린 비잔틴의 우익은 곧바로 투르크의 중앙을 향해 진격하여 비잔틴의 중앙군과 연계한 반포위망을 형성했다. 그러나 역시 투르크군의 정규군은 농민병과 달랐다. 포위망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그들은 대형을 알맞게 변형시켜가며 침착하게 대처하였고 그에 따라 비잔틴의 피해도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이때 술탄이 직접 이끈 예비대 140명이 중앙군을 구원하기 위해 비잔틴군을 덮쳤다. 상황은 반전되어 이제는 비잔틴군이 역으로 혼란에 빠졌다. 처절한 접전을 벌이면서 투르크의 지원에 대비한 대형을 미리 갖추지 못한 것이다. 전투의 흐름이 투르크군으로 옮겨지려는 찰나, 비잔틴군에서도 지원군이 도착했다. 황태자 알렉시우스 2세가 직접 이끄는 카타프락토이 기병대는 쐐기대형을 이루어 투르크의 중앙군을 향해 돌격했고 그 맹렬한 기세를 얼마 버티지 못하고 중앙군은 와해되었다. 결과적으로 술탄은 포위되고 말았다. 전면의 마뉴엘군과 어느새 자신의 후방으로 돌아나온 황태자군 사이에 갇힌 것이다. 이를 악문 술탄은 알라를 외치며 칼을 쳐들었다.
바랑가드와 비잔틴보병의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비잔틴의 왼쪽 날개는 붕괴 직전에 있었다. 굴람 기병과 베두윈 낙타병은 비잔틴군의 활약에 놀라기는 하였으나 그들 역시 투르크의 정예병이었던 것이다. 애초부터 수적 우세에 개의치 않은 그들의 자세는 비잔틴군의 분발을 무마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도 술탄이 적에게 포위되어 있는 모습에 적잖이 혼란스러워했다. 결국 접전을 벌이던 굴람 기병대가 술탄을 구하기 위해 차출되었고 그에 따른 전력의 약화는 자연스레 비잔틴군의 좌익을 붕괴에서 모면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장군 로마누스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비잔틴 보병대를 긴 횡대대형으로 바꾸어 적을 감싸게 했다. 이미 베두윈 낙타병도 잃은데다 굴람기병의 이탈로 인해 사기가 저하된 투르크군은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굴람의 이탈로 적이 없어진 바랑기안 가드가 다가오자 그들의 표정에는 두려움과 절망감이 짙게 드리워졌다.
“술탄이시여! 속히 피하십시오. 지금이라면 제가 어떻게든 포위망을 뚫을 수 있습니다!!”
“아닐세, 알라의 땅과 자식들을 모두 잃은 내가 이제와 어디로 간단 말인가.”
“술탄! 이슬람의 자식들은 언제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후일을 기약하십시오. 알라의 은총과 가호가 있을 것입니다. 아직 아르메니아가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메메드 장군의 간청에도 술탄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투르크군의 우익도 지리멸렬했고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굴람기병은 트레비존드 궁수의 화살세례로 도착하기도 전에 병력의 태반을 잃었다. 술탄에게 더 이상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아르메니아로 후퇴해도 목숨만 부지하는 도망일 뿐이었다. 어차피 치욕을 당하느니 알라의 전사로서 깨끗하게 이름을 남기리라.
“메메드 장군! 살아남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자는 퇴각하라 명하시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인간이 입에 올릴 수 있는 유일한 신은 오직 알라임을 잊지 말라는 것도 함께!!”
총사령관의 마지막 명령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투르크의 마지막 술탄이 남긴 유언이기도 했다. 패전을 앞두고도 의연한 술탄의 모습에 투르크의 병사들도 결연한 의지로 마지막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제는 수적으로도 우세한 비잔틴군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술탄은 마지막까지 말 위에서 비잔틴군을 닥치는 대로 베어나갔다. 마뉴엘은 궁수들에게 술탄의 말을 향해 화살을 집중하게 하였고 말은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어 널부러졌다. 낙마한 슐레이만 2세는 끝까지 칼을 휘둘렀으나 이내 화살과 칼, 창에 찔려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투르크의 마지막 술탄이 죽자 병사들은 갑옷과 무기를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그때 말 위에서 황태자의 호통소리가 들렸다.
“적이라해도 그는 왕이다. 예우를 갖추어라!!”
그는 술탄의 시신을 잘 수습하여 투르크의 깃발로 감싸도록 했다. 패배한 적일지라도 그의 명예를 존중하는 것이 로마군의 전통임을 황태자는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 황태자 알렉시우스 2세는 전장을 수습토록 하는 한편, 그루지야로 하여금 아르메니아를 공격하도록 명을 내리고 에뎃사와 시리아 방면으로도 원군을 보내 치안을 강화하게끔 하였다.
한낮이 꼬박 걸린 소 아시아의 전투는 투르크군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또한 투르크의 왕가가 무너지는 사건이기도 했다. 1000명대 2000명으로 시작한 전투는 투르크군 사망 1200명, 포로 325명, 비잔틴군 전사 629명으로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2년 뒤, 1120년 아르메니아의 함락으로 투르크는 멸망했다. 이로써 20년간의 길었던 대 투르크전쟁은 비잔틴의 승리로 매듭을 지었다. 투르크의 영지는 모두 비잔틴으로 병합되었고 동로마인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황제 알렉시우스 1세와 그의 아들들을 칭송했다. 일설에 의하면 황태자는 수도로 귀환하는 도중에 자신이 직접 구원했던 소 아르메니아에 들러 그가 약속했던 대로 축제를 열어 승리의 기쁨을 함께 했는데, 그 곳에서 마신 포도주의 맛이 너무 좋아 만든이를 궁의 포도주 공급자로 삼으려 했으나 본인이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소 아르메니아 포위전에서 투르크군을 맞아 끝까지 살아남은 병사들 중 하나인 피케트였는데 자신의 포도주를 황태자가 알아준 데에 감사하여 매년 포도주를 태자에게 선물하였다.
1121년, 투르크전쟁을 승리로 이끈 황태자 알렉시우스 2세는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여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백마가 이끄는 전차에 올라 개선식을 열었다.
*일단 이 정도를 끝으로 투르크 전쟁을 마무리지었습니다. 글이라는 것을 처음써서 그런지 읽어보면 어색하네요. 원래는 見山水味님의 ‘비잔틴의 부활’ 팬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연재가 중단되어서 아쉬운 나머지 내가 한번 해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써 봤습니다. 처음에는 시칠리아의 음모로 서방과 충돌하는 과정을 써보려 했으나 투르크의 침략으로 방향이 홱 바뀌고 말았습니다. 다음의 스토리를 쓰게 된다면 아마 서방과의 충돌일 듯. 어쨌든 졸작임에도 읽어주신 분들과 평해주신 분들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kkry119님의 다음편과 신격카이사르님의 새로운 스토리도 기다립니다...^^:)
첫댓글 kkry119님과 겨울달님은 카페 소설의 쌍두마차라고 할수 있습니다....
흠...비잔틴이 콘스에서 테크트리로는 아직 바랑가드는 않나올테고 수도에 있던 1부대를 쓴 듯하군요-_-ㅋ 하지만 1부대정도라도 왕실기사2부대와 굴람친위대2부대정도는 보리밭처럼 날려버리는 것이 바랑이니-_-;;; 제일 믿을만한 듬직한 부대-_-ㅋ
친구에게서 대략 바이킹을 받아서 설치했다는-_-;;; 비잔틴전용에딧이 필요한데 아직 올려주는 사람이 없군요(-_-) 대략 야자와 에딧의 압박으로 이 두가지가 해결되면 저도 올리게 될듯-_-ㅋ (허접한 거라서 큰 기대는 마심이--;;;)
^0^ 어렵지만..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다른면을 보게 되는 군요
원래 비잔틴하면 다 1차적으로 투르크랑 전쟁하실것입니다-_-ㅋ 그 다음에나 이집트나 시칠리아 이태리,헝가리 이 4국가중하나랑 이제 맞짱뜨실 것이구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