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김아타는 ‘사진 한 장으로 뉴욕의 신화가
된 사나이’라고 불렸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사진가들이 너도나도
목을 매고 전시 한 번 하기를 고대하는
미국 뉴욕 국제사진센터(ICP)에서 2006년 아시아 작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면서도 그는 고개 한 번 숙이지 않았다.
ICP 사람들이 먼저 그를 찾아오게 만들었다.
사진 본바닥에서 갈고 닦은 온갖 이론으로 무장한 뉴욕 토박이 큐레이터(학예연구사)들 앞에 “감히 공(空)의 실체를 더듬어 보았노라”고 초대장을 내밀었다.
이 개인전 뒤 그는 사진철학자란 칭호를 얻었다.
이 개인전 뒤 그는 사진철학자란 칭호를 얻었다.
‘아타이즘(Attaism)’이란 용어도 생겼다
.
“내가 하는 짓거리는 자연의 섭리를 주워듣고,
사진이란 매체를 차용해 그 이치를 옮겨 쓰는
것일 뿐”이라는 그의 세계관은 서구 이론가들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얼떨떨해
하는 그들이 물었다.
“너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니?”
“설렁설렁 걸어왔지.” 그와 몇 시간씩 토론하던 뉴욕의 거물들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난 그네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다. 경쟁은 관심도 없다. 그들이 못 보여준 걸 내가 보여주겠다.” 그는 아시아 하고도 한반도에서 태어난 걸 자랑으로 여긴다.
김석중, 김아타(金我他)라는 새 이름을 짓다
“니캉나캉(너랑 나랑).” 진한 경상도 사투리에서 피어나는 어감이 듣는 이를 빨아들인다.
“난 그네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다. 경쟁은 관심도 없다. 그들이 못 보여준 걸 내가 보여주겠다.” 그는 아시아 하고도 한반도에서 태어난 걸 자랑으로 여긴다.
김석중, 김아타(金我他)라는 새 이름을 짓다
“니캉나캉(너랑 나랑).” 진한 경상도 사투리에서 피어나는 어감이 듣는 이를 빨아들인다.
“이름은 누군가 준 거잖아요.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을 때 나를 내가 규정하는 새 이름이 필요했어요.
나는 모든 사물과 같구나. 아니, 같거나 낮거나.
그들 하나하나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이름이죠.”
그는 1980년대 말에 이름 모를 잡초들과 작은 돌들, 흐르는 시냇물과 바람소리,
그는 1980년대 말에 이름 모를 잡초들과 작은 돌들, 흐르는 시냇물과 바람소리,
태양의 자양분을 대화의 파트너로 삼았다.
‘사물과의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실존을 확인해가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사물을 관조하는 법, 사물과 하나가 되어 타자에 몰입하는 방법을 익혔다.
‘세상의 이치는 그대로인데 내 정체성의 정도에 따라 인식 능력이 달라진다.
남을 탓하지 말라.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깨달음이 왔다.
수십만 번의 칼질 끝, 법을 터득하는 백정처럼
수십만 번의 칼질 끝, 법을 터득하는 백정처럼
인간을 유리박스에 담아 그 존재 의미를 캔 ‘뮤지엄 프로젝트’ #030 ‘필드 시리즈’, 122×162㎝, 1996 |
‘내가 곧 우주’라는 자각이 들면서
‘내가 내 법을 따르겠다’는 생각은 바로
사진 작업으로 이어졌다.
1991년부터 5년 동안 진행했던 ‘해체’ 연작은
발가벗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판에 자신을
스며들게 한 실험작이었다.
씨 뿌리듯 자연이란 밭에 몸을 부려놓는
행위를 통해 관념의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반성의 몸짓이었다.
2002년까지 이어진 ‘뮤지엄(미술관) 프로젝트’는 인간을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처럼 유리 박스에
담아 그 존재 의미를 물었다.
“사진 작업을 하면서도 동서양의 철학책을
“사진 작업을 하면서도 동서양의 철학책을
많이 읽었어요.
사진 찍는 시간보다 책 보고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었지요.”
인터뷰를 위해 만났을 때 그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었다.
뉴욕의 사진 전문가들이 그와 대화하면서 혀를
내둘렀다는 그 박학다식, 이론으로 똘똘 뭉친 학자다운 풍모의 배경엔 이런 노력이 있었다.
“백정은 수십만 번의 칼질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고기 살을 발라내면서 동시에 칼날을 세우는 법을 터득합니다. 제 작업이란 백정질과 같습니다. ‘하늘이 앞을 막으면 하늘을 벨 것이고, 신이 가로막으면 신마저 벨 것’이란 말이 있죠. 부처님도, 예수님도, 장자도 공자도, 그들만의 리그입니다. 내 것이 아니죠. 아타는 내가 만나고, 내가 두드리고, 내가 핥아본 나의 법을 세상에 전할 것입니다.”
먼지·얼음으로 말하다, 우리가 못 본 세상을
“백정은 수십만 번의 칼질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고기 살을 발라내면서 동시에 칼날을 세우는 법을 터득합니다. 제 작업이란 백정질과 같습니다. ‘하늘이 앞을 막으면 하늘을 벨 것이고, 신이 가로막으면 신마저 벨 것’이란 말이 있죠. 부처님도, 예수님도, 장자도 공자도, 그들만의 리그입니다. 내 것이 아니죠. 아타는 내가 만나고, 내가 두드리고, 내가 핥아본 나의 법을 세상에 전할 것입니다.”
먼지·얼음으로 말하다, 우리가 못 본 세상을
얼음이 녹은 자리엔 아무 것도 없지만 비어 있는 건 아니다. ‘온 에어 프로젝트’ #152-8 ‘Ice Dia’, 188×258㎝, 2007 |
세간에 김아타의 이름을 드높이며 화제를 몰고 온
‘온 에어(On Air) 프로젝트’는 20년에 걸친
‘아타식’ 내공의 결과물이었다.
필름 한 컷에 8시간 이상의 긴 노출을 주어 움직이는 것을 그 속도만큼 사라지게 하는 것이 그 첫째였다.
이를테면 사람과 차로 혼잡한 세계 주요 도시의
번화가에 설치한 카메라가 잡아낸 건 결국 먼지
한 줌이었다.
빨리 움직이면 빨리 사라지고 천천히 움직이면
천천히 사라진다.
각각의 아이덴티티를 지닌 여러 컷의 이미지를
쌓아가면서 그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하는 것이 두 번째였다.
수천, 수만 장의 사람 얼굴을 포개 하나의 이미지로 만든 ‘자화상’ 연작이다.
각각의 특성은 겹치면서 사라졌지만
아예 없어진 건 아니다.
만 분의 일 지분은 독립해 같이 있는 것이다.
상대의 가치를 존중할 때 ‘나는 영원한 나로서 존재’한다는 역설이다.
고체였다가 천천히 녹으면서 액체가 된 뒤 결국 사라지는 얼음의 물성을 이용한 ‘마오의 초상’ ‘파르테논 신전’ 등 ‘얼음의 독백’ 연작이 세 번째다.
고체였다가 천천히 녹으면서 액체가 된 뒤 결국 사라지는 얼음의 물성을 이용한 ‘마오의 초상’ ‘파르테논 신전’ 등 ‘얼음의 독백’ 연작이 세 번째다.
20세기 사회주의의 아이콘이라 할 마오쩌둥의 상반신을 대형 얼음으로 조각한 뒤 그가 녹는 모습을 담은 ‘마오의 초상’, 그 녹은 물을 108개의 컵에 나눠 담은 광경을 찍은 ‘마오의 108 번뇌’는 있음과 없음, 결국 관계를 얘기한다.
얼음이 녹은 자리엔 아무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비어 있는 건 아니다.
모든 것은 관계하고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이 다가 아닌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모습이다.
카메라 버리고 자연이 그리는 그림을 얻다
카메라 버리고 자연이 그리는 그림을 얻다
미국 산타페에 설치된 ‘드로잉 오브 네이처’ 캔버스. 미국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1887~1986)가 캔버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던 바로 그 지점이다. |
그는 올해부터 ‘인달라’와 ‘드로잉 오브 네이처(Drawing of Nature)’ 연작에 매달리고 있다.
‘아티스트 인달라’ 시리즈는 피카소·고흐·터너 등
서구미술사의 거장들 작품을 하나로 묶는 작업이다.
수백에서 수천 점의 작품을 겹쳐 놓으면 결국
뿌연 색면 하나가 남는다.
그들의 걸작 하나하나를 뜯어보면서 그는 20세기 자본주의의 비극 하나를 보았다.
“내가 제일 혐오하는 게 반복인데 피카소는 말년으로 갈수록 결국 똑같은 걸 그리고 또 그리다가 갔더군요.
“내가 제일 혐오하는 게 반복인데 피카소는 말년으로 갈수록 결국 똑같은 걸 그리고 또 그리다가 갔더군요.
왜 그랬을까요.
그림의 노예, 시장의 노예가 됐기 때문이죠.
피카소가 불쌍해 죽겠어요.”
‘자연이 스스로 그린 그림’이라 풀 수 있는
‘자연이 스스로 그린 그림’이라 풀 수 있는
‘드로잉 오브 네이처’야말로 김아타의 야심작이다.
우선 전 세계 주요 도시와 자연, 문명과 역사가 깃든 지역에 185×140㎝ 크기의 빈 캔버스를 2년 이상 설치한다.
이 캔버스엔 바람과 구름과 비와 눈과 자연과 환경의 변화만으로 흔적이 남게 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히로시마에 설치된 캔버스에는 인류의 카르마가 스며들 것이고,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의 캔버스에는 지혜의 바람이 숨을 불어넣을 것이다.
그는 “사과나무를 심듯 지구 곳곳에 캔버스를 심는다”고 했다.
그는 “사과나무를 심듯 지구 곳곳에 캔버스를 심는다”고 했다.
이제 “카메라를 버렸노라”고도 했다. 사진가 말고 그냥 아티스트(artist)라 불러 달라 했다.
적게는 대여섯 장에서 많게는 몇 십 장씩 찍어낼 수 있는 사진 대신 단 한 장 자연이 그려주는
‘드로잉 오브 네이처(Drawing of Nature)’에 와서야
그는 “작가로 살아온 이유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제 가진 것이 있다면 다 버려도 좋을 것”이라는 그에게서 새로운 세상을 만난 이의
눈을 발견한다.
글= 정재숙 선임기자
사진= 아타김 스튜디오 제공
글= 정재숙 선임기자
사진= 아타김 스튜디오 제공
[시시콜콜] 삭발 & 블랙
12년 전 삭발 앞둔 여자 모델 안쓰러워 그가 먼저 밀었다
빡빡 밀어버린 머리,
검은색으로 휘감은 옷차림.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김아타의 차림새는
12년 전 시작됐다.
1998년 2월 28일,
그는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뮤지엄(미술관) 프로젝트’의 하나인 법당 작업의 첫날,
‘뮤지엄(미술관) 프로젝트’의 하나인 법당 작업의 첫날,
삭발을 앞둔 여자 모델은 처연하다 못해 숙연한 모습이었다.
그가 성큼 나섰다.
“나부터 먼저 밀고.” 그 뒤로 스님처럼, 또는 도인처럼 보이는 그의 헤어스타일이 정착됐다.
90년대 중반까지 기록사진에 나타나는 그의 긴 머리 모습은
꽤 어울려 보인다. 다시 기르고 싶은 마음은 없을까.
“사실 몇 번 시도를 했어요. 근데 김아타 하면 트레이드마크
“사실 몇 번 시도를 했어요. 근데 김아타 하면 트레이드마크
처럼 삭발 머리를 떠올리니 기르다 실패하기를 반복했죠.
무인도에 표류해서 어쩔 수 없이 기르기 전에는 당분간
긴 머리는 힘들 것 같아요.”
중국식 칼라를 한 검은색 양복 또한 그의 카리스마를
중국식 칼라를 한 검은색 양복 또한 그의 카리스마를
돋우는 한 장치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을 떠오르게 하는 그의 검은색
옷차림은 유별나다.
“편안하기 때문에”가 이유지만 그의 사진작업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모든 존재하는 것이 사라질 때’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색,
그것이 검정이다.
정재숙 선임기자
정재숙 선임기자
김아타(Atta Kim)는
1956년 경남 거제생
1956년 경남 거제생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뒤
독학으로 사진수업
지난 25년 동안 동양사상을
바탕으로 한 선(禪) 수행으로
독자적인 정신세계 구축
존재하는 것들과 사라지는 것들의
경계를 지워버림으로써
권력과 신화와
이데올로기를 무화시키는 작업 진행
주요 연작
‘해체’ ‘뮤지엄(Museum) 프로젝트’
‘온 에어(On Air) 프로젝트’ ‘인달라’
‘드로잉 오브 네이처(Drawing of Nature)’
주요 전시
2002년 제25회 상파울루비엔날레 한국관 대표
2004년 미국 뉴욕 아파추어파운데이션에서
아시아 작가 최초로 ‘뮤지엄 프로젝트’ 전시
2006년 뉴욕 국제사진센터(ICP)에서
아시아 작가 최초로 개인전
2008년 서울 로댕갤러리에서 개인전
2009년 제53회 베니스비엔날레 초청 특별전
주요 수상
2002년 제1회 하남국제페스티벌 국제사진가상
2006년 제4회 이명동 사진상
2007년 제6회 동강 사진상
2008년 제6회 하종현미술상
2002년 제1회 하남국제페스티벌 국제사진가상
2006년 제4회 이명동 사진상
2007년 제6회 동강 사진상
2008년 제6회 하종현미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