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말이야
이게 내 진심이야
기어이 이어지고 마는 마음이 있다는 것
흐릿해져도 글자의 모양은 변하지 않으니까
흐릿한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여전하니까’
- 유선혜 詩『그게 우리의 임무지』
- 시집〈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문학과지성사
며칠 쌀쌀하더니, 도로 따뜻해졌다. 이러다 겨울이 되겠지. 입김이 날릴 테고 눈이 내리겠지. 서점 앞 가득해진 낙엽을 쓸면서 눈이 보고 싶다, 생각한다. 우스운 일이다. 정작 눈이 내리면 치우기 힘들다고 투덜댈 거면서. 퐁당퐁당 변덕을 부리며 우리의 시간은 간다.
대빗자루를 서점 벽에 세워 두고 문방구로 간다. 불현듯 편지가 쓰고 싶어졌다. 딱히 누구를 떠올린 건 아니다. 편지지를 펼쳐두고 펜을 들면 그때 생각나리라. 무작정. 이것도 변덕이다. 제법 느긋한 변덕이다. 문방구가 갖춘 편지지는 몇 가지 없었다. 하기야, 요즘 같은 때에 편지를 쓰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예전에는, 대학생 때만 해도 갖가지 종류의 편지지로 한 벽 가득했었다. 그중 제일 단정해 보이는 것을 고른다. 예전엔 알록달록한 것에 먼저 손길이 닿았었는데. 슬쩍 나이 탓, 시절 탓으로 돌리면서. 자, 이제 편지지를 꺼내자. 여전히 나는 누구에게 써야 할지 알지 못한다. 버튼 몇 개 누르면 실시간으로 닿는 시대에 편지란 걸 반가워할 이가 있을까. 답장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핑계고 실은, 편지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그 요령을 까먹어버린 거다. 그만두어버릴까, 생각했다가.
무수히 떠오르는 이름 중 하나를 낚아챈다. 가깝다 여기는 친구이나 보지 못한 지 꽤 되었다. 먼저 그의 이름을 적는다. 다음 인사를 건넨다. 한동안 멈춰 있던 펜은 작심한 듯, 나의 요즘을 술술 고백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한 장 가득 나의 이야기로 채워지고, 두 장 가지곤 부족하겠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