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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지도자를 청함
행 28:17-22
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1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행 28:17-22 / [드디어 로마에] 바울은 도착한지 사흘이 지났을 때 그곳 유대 지도자들을 모으고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손에 잡혀서 고소를 당하여 로마 정부에 넘겨졌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전해 준 관습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18) 로마 정부는 나를 재판하였지만 유대의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것 같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찾지 못하자 나를 석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 그런데도 유대 지도자들은 이 결정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동족을 고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하는 수 없이 가이사에게 상소를 냈습니다. 20) 오늘 내가 여러분을 여기 오시라고 한 것은 이런 사정을 피차에 알고 지내기를 바라며 또 내가 이 쇠사슬에 묶인 것은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메시야가 오신 것을 믿은 때문이라는 것도 아울러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21) 그들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당신을 고소한 일에 대해서 아직 아무 것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유대에서 편지를 받은 일도 없고 또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에게서도 아무 보고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22)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당신네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곳에서 고발당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믿음에 대해 직접 말씀해 주십시오.'
어제 본문 16절에 바울이 드디어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로마에 도착한지 사흘 후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연설을 합니다.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에 높은 사람을 청하여(17-19) 이 연설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를 고소한 것에 관하여 무죄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백성들과 조상들의 관습을 배척하지 않았는데, 당시 바울을 반대하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한 관습을 지키지 말라’라고 가르쳤다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21:21). 그래서 바울을 반대하던 유대인들에 의해 죄수로 내어진 바 되었습니다(17). 아무 죄가 없는 바울은 로마 군대 천부장의 지시에 따라 채찍질을 당하며 심문을 받았습니다(22:24). 그 때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23:26) 바울을 심문한 결과를 총독 벨릭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한 것은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23:29). 또한 신임 총독 베스도가 부임하여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앞에서 자기가 살펴본 결과 바울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25:25). 모두가 다 바울이 무죄임을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바울을 놓아주려 했지만(18) 유대인들이 반대함으로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여 무죄함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과정은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자 한 바울의 소망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결과가 되었습니다.
내가 쇠사슬에 메인 바 되었노라(20-22)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이 왜 쇠사슬에 메여 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로마법을 어긴 죄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인함이라고 해명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 소망이란,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메시야를 말합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라고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것입니다(20). 바울의 해명을 들은 로마의 유대인들은 바울과 관련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도 없고, 누가 와서 바울에 대해 험담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21). 이 말이 진실 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어디를 가나 반대를 받는다는 사실만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적용: 노년의 바울은 로마 군인과 함께 쇠사슬에 매여있지만, 사실은 천국에 대한 소망에 매여 있었습니다. 이런 억울한 고난 속에서도 천국을 바라보는 소망이 있기에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어떤 어려움을 견디게 합니까?
주위에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거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전에 만난 기독교인과 부정적인 관계들, 소식들 때문에 복음을 듣기도 전에 거부하고 외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오해와 애곡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가진 오해와 선입견이 무엇인지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호크마 주석
=====28:17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사람들을 청하여 - 바울이 로마에 도착 하여 제일 먼저 한일은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 중 지도자급 되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하나의 통합(統合)된 공동체 기구를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보며, 따라서 바울이 초청한 이들은 개별적 공동체들의 장로,지도자, 회당장과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본다(Wendt). 유대인들이 로마에 거주하기시작한것은 마카비 시대(B.C. 166-63)부터 였고, B.C.63년 에는 폼페이가 유대의 독립운동을 진압한 후 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오기도 했기 때문에 로마에는 제법 많은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실례로 B.C. 6년 유대인들이 헤롯 아켈라오의 폭정을 로마에 고소하기 위하여 50명의 대표를 파견 하였을 때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이 무려8,000명이나 동조하였다는 기록이있다(Josephus. Anitp. xii. 1 ). 바울이 유대인지도자들을 자기의 숙소에 초청한 것은, 그가 죄수의 신분으로서 활동 공간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었고, 그들을 초청한 목적은 대략 다음의 두 가지라고할 수 있다. (1) 자신을 변호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에대해서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로부터는 자기에 대해 어떤 소식을전해들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야 거기에 적절히대응하면서 자신을 변호할 수 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바울에 대해 부정적인소문을 듣고 그것을 사실로 판단하여 황실(皇室)에 뇌물을 주면서 부정적인 내용의고소를 한다면 바울로서는 여간 괴로운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2)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다(23절).바울 자신로서는 개인의 일신상의 안전을 염려하는 것보다는 무엇보다도 복음을 중거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 전파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형제들아...배척한 일이 없는데 - 바울은 정중한 태도로 자신이 로마에 재판을받기 위해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그는 자기가 동족인 유대인을 거스리거나 유대의 관습을 반대한 일이 없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오해의 여지를 없게 하였다.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에게 허위의 누명을 씌워 사형(死刑)을 가하려 했으나 로마 군사들이 구해준 일(21: 32, 33)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다만 무죄하게 로마인의 손에 넘겨졌다고만 한다.
=====28:18
로마인은...놓으려 하였으나 - 로마인이라 함은 천부장 루시아의 총독 벧릭스 및베스도를 가리키며 그들은 모두 바울의 무죄를 알고 있었다(23 : 29; 24: 22-26). 그러나 이들이 바울을 석방하고자 했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의 무죄를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적극적으로 바울을 놓아주고자 한 일이 없고 베스도 같은 경우에는 도리어 바울을 유대인들에게 내어주려고 했기 때문이다(25 : 9).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진술이 결코 허위는아니다. 다만 바울이 말하려 했던 것은, 자기가 지금 재판을 받기위해 로마에 이송되어 온 것이 궁극적으로 유대인들의 적대감 내지는 오해 때문이었다는 것 즉 유대인들이 원인 제공자라는 것과 거기에 비해 로마인들은 부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것이었다. 한편 로마인들은 바울을 놓아주려 했으나 유대인들이 방해했기 때문에 석방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예수의 모형을 염두에 두고 그것과 바울의 유사성을 보여줌으로써 바울의 사도성을 부각시키려는 누가의 신학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3: 13 참조).
=====28:19
마지못하여...아니로다 - 본절에서도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이 유대인에 대해서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있다.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적대 의식 때문에 불가피하게 가이사에게 상소(上訴)하기는 했지만, 조금도 동족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고백이 그것을 말해준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반대하여 그로 하여금 가이사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지만 바울이 자신을 살해하려한 동족을(23 : 2-15 ;25 : 3) 송사할 의사가 없다고 한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한 동족을 용서하신 사실을 연상시킨다(눅 23 : 34)
=====28:20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 이것은 공의회 에서도(23 : 6), 벧릭스 앞에서도(24 : 15),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26 : 6) 증언 했던 내용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소망' 이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다. 바울은 이 소망의 예수그리스도에게 완성되었다고 하였으나 정치적이며 현세적 메시야를 기다렸던 일반 유대인들은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차이 때문에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던 것이다.
=====28:21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 편지에 해당하는 혤라어 '그람마' (*)의 본래적의미는 '그려지거나 씌어진 어떤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산헤드린에서발송한 바울에 대한 공식 고소장을 가리킨다고 본다. 누가 와서...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 앞에서는 문서를 통한 연락이없었음을 말했고 여기서는 사람을 통한 정보의 전달도 없었음을 밝히고 있다. 본문에서 '고하든지 ' 의 '아펭게일렌' (* )은 공식적인 알림을 뜻하고 '이야기한'의 '엘랄레센' (* )은 사적인 알림을 나타낸다.결국 유대인 지도자들의 말은, 공식적인 문서를 통해서나 혹은 공식적인 임무를 띠고온 사람을 통해서나 도무지 바울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는 것이고, 또한 여행객을 통해 사적으로도 들은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말대로 하자면 바울은 그들에게 베일에 싸인 인물인 셈이다. 만약 이들이 실제로 바울에 대해서 전혀 아는바가 없었다면 그것은 아마 다음의 이유때문일 것이다. (1) 예루살렘의 반(反)바울적유대 주의자들은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를 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리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로마에 미리 연락하지 못했다(Meyer). (2) 연락을 하려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바울의 이송이 거의 마지막 항해 시기였기 때문에(11절 주석 참조) 교통원의 어려움이 있었다(Alford, Lumby). (3)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령 이후 다시 로마에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멀리 본국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가까운 지역에 흩어져 있다가 돌아오는 것이었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바울사건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었을 것이다(Olshausen, Hervey). 이 가운데 첫번째 견해는 타당성이 희박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하더라도 반(反)바울적 유대 주의자들은 바울이 항소할 때 현장에 있었으므로(25 : 11),그 때에라도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공문을 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번째와 세번째의 견해가 타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혹자는 로마의유대 공동체 지도자들이 바울에 대해 아는 바도 들은 바도 없다고 한 것은 단지 외교적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로마의 유대인들이 바울과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어느징도는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것이다. 이 견해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와 동방 간에는 정규적인 왕래가 있었고, 바울
=====28:22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고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단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일음을 말해준다. 본문에서 '파'(* , 하이레시스)는 '이단'으로도번역되며(24 : 4), 이에 의거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유대인들에 의해 이단시 되었다는견해를 피력하는 학자도 있으나(Bronhauser), 본문에서 보여진 유대인들의 태도는그렇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바울에게 기독교에 대하여 '듣고자' 했다. 만약그들이 기독교를 이단이라고 여겼다면 바울에게서 무엇을 듣고자 했을 리가 없다. 또한 '하이레시스'의 보편적 의미는 '이단'이 아니라 ' 종파'라는 점에서 이 단어를반드시 '이단'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아마 로마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다만 유대교의 많은 종파 가운데 하나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 설 교 >
무엇을 위해 수고할 것인가
서정호 목사 / 행 28장 16~22절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민과 아픔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던 생각, 시간, 계획, 방법, 일, 사람, 환경이 아닌 현실에 처하게 될 때 오는 아픔을 누구나가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담아놓은 그림과 실제 그려지고 있는 그림이 너무나 차이가 날 때,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향해 설레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 많은 준비를 하고 떠났는데 실제 막상 그곳에 도착하고 보니 실망이 너무나 큰 경우를 여행을 해보면서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환경이나 시간이나 사람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주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께 붙잡힌바 되어 오늘 여기까지 왔노라고 신앙고백하게 될 때 모든 어려움에서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고난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베푸신 특별 은총을 체험했습니다. 때로는 아마 우리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내가 정말 구원을 받은 사람인가?'하고 이렇게 회의를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좋을 때는 무조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어려울 때는 무조건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특별은총이 임한 바울에게도 많은 환난과 역경과 고난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주의 종들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특별은총을 베푸시고 역사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마침내 로마에 오게 되었고 오자마자 한 일이 무엇이지를 잠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오게 된 것은 자유로운 전도인으로서 온 것이 아니라 쇠사슬에 매인 바 되어 왔으며,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있는 몸이었습니다.
17-19절은 어떻게 사도 바울이 로마에 오게 되었는지 그 사정을 요약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잘못한 것 없이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하여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넘겨졌고, 로마인들은 심문 끝에 그에게서 아무 죄목을 발견하지 못해 석방하려 했지만 유대인들의 반대 때문에 할 수 없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로마에 재판을 받기 위하여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의 부당한 박해가 자기로 하여금 로마에 오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는 아직 기독교신자들에 대한 네로의 박해가 시작되기 전이어서 그런지 바울이 상당히 자유가 허용된 연금 상태에 있었음을 본문 16절은 엿보게 합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한 것은 그가 감옥이나 군대의 병영에 갇혀있지 않고 바울이 택한 거처에 감시하는 한 군인과 함께 머무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유롭게 나가 다닐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을 자기의 거처로 불러 모이게 할 수 있었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들어온 지 사흘 만에 그곳의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했습니다. 23절을 보면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했습니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박해가 오히려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 당시 세계의 중심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루 종일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님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상대적으로 관용적일 시기의 로마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의 씨를 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결국 로마에서 죽게 된 것은 복음의 중단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더 큰 확산의 기회였습니다. 로마에서 뿌린 그의 순교의 피는 로마 세계 전체로 튀어 복음의 씨가 되었으며 30배, 60배, 100배, 아니 그 이상으로 엄청나게 놀라운 결실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드디어 로마에 도착을 했습니다. 소 아시아 지역을 복음화한 소위 그 당시 최고의 복음의 기수로서 바울은 명예롭게 세계 최고의 도시 로마에 입성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바울의 계획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죄수가 되게 하고 3년 동안이나 죄수로서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그렇게 로마에 도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3년 동안 바울이 고생한 속에서 얻어진 일이 유대 총독과 이스라엘 왕 헤롯 앞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또 밀리대 섬 한 종족 전체가 개종을 했고 배에 타고 있던 죄수와 로마군인 276명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 갑니다. 바울에게는 엄청나게 힘든 3년이었지만 그 동안에 하나님은 바울을 붙들고 위로하시면서 굉장한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리고 이 3년 동안에 바울의 수고와 고역이 어떻게 앞으로 로마 선교에서 아름답게 확장되어 나가는지,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오면서 새로운 사역에 대한 걱정이 많았지만, 바울이 이렇게 고생하는 가운데 온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 교회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서 그를 영접하는 과정 속에서 바울은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새롭게 시작하는 로마에서의 사역에 하나님은 바울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혼자 로마에 들어가지 않고 우리라고 하는 동역자들과 함께 로마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란 정확하게 몇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누가, 아리스다고 등등의 여러 사람들이 바울과 함께 로마로 가는데 바울이 죄수로서 로마에 호송되는 것입니다.
F. F. 부르스라고 하는 신학자는 "바울 곁의 사람들"이란 책을 썼습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은 항상 사역자에게 도울 수 있는 손길을 허락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역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로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 곁에는 수 십 명 있었습니다. 누가, 디모데, 마가 같은 사람들을 항상 두셔서 함께 일하게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바울의 모든 사역과정을 글로 남겨서 사도행전 같은 귀한 책을 우리에게 전해 주게 됩니다. 또한 그는 의사이기에 연약한 바울을 한평생 따라다니면서 그의 몸을 건강하게 돌봐 주었고 또한 비서 역할도 담당합니다.
참 놀라운 것은 바울이 3년 동안, 2년 가까이 갇혀있고 벌써 1년 가까이 배를 타면서 고생하고 있는데, 그때도 바울 곁에 사람들은 기다려 주었습니다. 사역자가 성공의 때만이 아니라 가장 비참해진 순간에도 몇 년 동안 바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그 주변에다 방을 얻어놓고 간호하고 도와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게 됩니다. 정말로 굉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바울 곁의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함께 힘을 모아서 이제 사역을 해나가는데 전체 사역의 이름은 바울 선교라고 하는 큰 사역을 위해서 맨 앞에 바울이 있고 그리고 바울을 돕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다니면서 일을 해 나갔던 것입니다. 바울 사역의 위대함,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함께 한 사람들의 수고와 눈물과 땀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냐? 여기에 대한 자기 나름의 분명한 답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누가는 바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라고 하는 확실한 생각으로 무장하고 이 생각이 한 평생 이어집니다. 그리고 바울을 죽을 때까지 끝까지 따라다닙니다. 감옥에는 같이 못 갑니다. 바울이 죄수가 될 때는 주변에서 살고 감옥에서 나와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면 그곳까지 따라가서 함께 사역을 합니다. 그래서 로마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 모든 기록을 글로써 남기게 됩니다.
부르스는 누가 더 큰 상을 받을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 선교사역 이라고 하는 큰 단체 속에 바울이 있는데 우리 생각에는 바울이 더 큰 상을 받겠고 누가는 작은 상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부르스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고 능력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상은 자기가 맡은 역할의 충성도에 따르는 것이지 누가 더 큰 것은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울의 상을 받을 것이고, 누가는 누가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는 아무도 없으며 각자의 섬김의 모습이 다를 뿐입니다.
누가는 바울을 위하여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향한 자기의 충성에 현실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하겠다고 하면 그 충성이 구체적으로 한 곳으로 보이는 곳에 모아져야 됩니다. 죄수 바울과 그리고 바울 곁의 사람들이 한 평생 하나가 되어서 거룩한 사역을 해 나갔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받았다
이것이 특혜입니다. 그 당시 관례를 보면 친위대에 인도되면 병영 내에서 머무르게 되고 양팔에 호송하는 군사 두 명이 팔과 팔로 연결된 수갑을 차고 이렇게 감시를 하고 이제 이것이 재판 받을 때까지 계속되는데 바울이 초기 얼마 동안만 이렇게 묶여 있었던 것 같고 바로 그의 사상이 검증되면서 자유롭게 거할 수 있는 집을 얻어서 셋집에서 가택연금 상태라고 하는 큰 자유를 얻는 것을 발견 하게 됩니다.
사람의 영혼은 똑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모두 생명 보다 귀하지만 문제는 사람의 영향력은 모두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높은 사람들 특권층의 사람들은 영향력이 더 많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바울을 죄수로 만들어서 친위대에 갇히게 하고 핵심 계층들과 만나게 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어쩔 수 없이 전하게 되고 그들도 거부할 수 없이 듣게 되고 그런 가운데서 점점 친위대 속에 복음이 확산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권력의 핵심부가 기독교화 되고 있었습니다.
온 시위대 안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서 복음이 번지고 있음을 깨닫고 그는 기뻐하게 됩니다. 그래서 옥중 서신서 속에서는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로마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오묘한가를 바울은 이때 가서야 조금 깨닫습니다. 그리고 기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가 죄수가 되어서 친위대에 갇힌 것은 선교에 있어서는 최고의 환경, 가장 좋은 환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내가 원하는 대로 되면 제일 좋겠지만 내 뜻과 맞지 않는다고 불평할 필요는 하나도 없습니다. 빨리 벗어나서 내 나름대로 전도하고 싶은 것이 바울의 마음이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바울 보다 훨씬 깊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환경이 되어야만 가장 좋은 일이 벌어진다고는 절대로 장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환경이 되기까지 기다렸다가 하겠다고 사역을 미루어서도 아무 일도 못합니다. 주어지는 환경이 최고의 환경인 줄로 알고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면서 이 환경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선교의 기회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게 지금 주신 기회와 방법. 이 형편을 극대화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수동적인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이 신앙적입니다. 바울은 수동적인 환경 즉 죄수로써 친위대에 갇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그의 선교전략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소망의 극치는 구원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구원을 바라며 살아갑니다. 나름대로 구원의 개념은 다르겠지만 소망의 극치는 구원이요. 구원을 바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소망을 인하여 쇠사슬에 매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수고하고 또 노력해야 할 것인가요?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이 소망을 인하여. 예수를 통한 구원, 이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고, 이 소망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인생인 줄 압니다. 이 소망을 위하여 나가야 하고, 이 소망을 위한 충성의 현실성을 오늘 우리의 환경 속에서 찾아 나가는 것이 성도의 갈 길입니다.
사도행전의 핵심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강림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일명 성령행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그 동안 제1차 제2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시켰고 또한 소아시아 지방에 많은 교회를 세웠으며 그리고 그들을 말씀으로 무장시키고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바울은 로마까지 가야 했습니까?
사도바울이 로마로 간 이유는 로마서 1장에 잘 나와 있다.
로마서 1장 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라고 했습니다. 즉 사도바울은 복음전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도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았고 특별히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고 두 번째는 내가 빚진 자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사람들에게 빚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실 그는 로마사람들에게 빚을 진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빚을 졌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보혈을 흘려주심으로 인하여 사도바울의 모든 허물과 죄가 사해졌고 또한 그가 지은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또한 하나님이 예비하신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되었으니 사도바울은 주님께 큰 빚을 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빚을 주님께 갚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빚을 이방인들을 위하여 대신 갚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도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타의에 의해 로마에 가게 되었다.
먼저 하나님은 그를 택하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하사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도바울에게 사명을 주시어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시고 또한 사도바울의 마음에 로마사람들을 위한 빚진 자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니까 하나님은 주위의 환경을 통하여서 사도바울을 로마로 가게 하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섭리는 사도바울에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도 똑같이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시고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택하시고 때가 되면 교회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받게 하시어서 주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시고,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서 사도바울처럼 마음에 소원을 갖게 하십니다. 사도바울의 소원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환경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주신 소원을 이루게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현재 어느 단계에 와 있으며 또한 복음에 대한 어떠한 소원을 가지고 계십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사도행전의 역사에서 어느 단계에 와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은혜로 부르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또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제 부터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과 은사를 따라 땅끝까지 나가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여러분이 가야할 로마는 어디입니까? 여러분들이 가야할 로마는 예루살렘은 나의 가정이며, 온 유대는 여러분들의 친척이며, 사마리아는 여러분들의 이웃입니다. 그리고 땅 끝은 아직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미전도 종족들이 사는 곳입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척과 이웃에게 주님을 전할 수 있지만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시고 교회를 통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지상에서 2000년을 버티고 있는 레드우드라는 나무는 세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나무보다 뿌리가 더 깊이 뻗어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른 나무보다 잔뿌리가 많은 데, 그 잔뿌리가 수분을 모으고 나무에 공급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뿌리가 바위를 칭칭 감고 있어서 강한 태풍에도 끄떡없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형통한 사람은 믿음의 뿌리가 더 깊고, 사랑의 잔뿌리가 많아서 어느 누구든지 다 수용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법, 성령의 법에 따르고 지키면서 능력을 얻습니다.
우리 영암교회가 50년의 역사와 전통을 깊이 뿌리내리면서 영암의 모든 성도들의 사랑과 기도와 전도의 잔뿌리를 통해 견고한 교회지도력을 유지하면서 바위를 칭칭 감고 있는 뿌리처럼 중심을 벗어나지 않는 협력하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의 주인공은 클라크 케이블과 비비안 리입니다. 클라크 케이블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일약 백 만 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클라크 케이블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동분서주하여 영화를 열심히 찍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열심히 모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돈을 더 벌려고 하십니까? 그때 클라크 케이블은 말하기를 아내가 임신을 하였는데 세상에 태어날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돈을 모으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클라크 케이블은 그 아내가 자식을 낳기 전에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내일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돈을 더 많이 벌은 후에 또는 나의 신앙이 좀 더 성장한 후에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시겠다고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부터는 우리가 사도행전을 계속 써 내려가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강림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까지 우리에게 이루어 졌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지 않는다면 사도들의 행전은 우리 대에 와서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를 내일로 미루지 마시고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현재 만나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주님을 증거하고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기 바랍니다. 이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남은 여생, 무엇을 위해 수고하시겠습니까?
드디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행전 28:16-31 / 서금석 목사
오늘로서 사도행전 강해 100번째 시간이 되었습니다. 100번의 시간. 만 2년의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어떠한 마음이 드십니까? '참 지겨웠다' 하시는 분도 있겠고, '참 은혜로웠다' 하시는 분도 있겠지요. 어느 쪽에 속하십니까? 쑥스러운 질문이긴 하지만 은혜 받으셨습니까? 설교하는 제게는 은혜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설교자가 은혜가 되지 않는 설교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시는 분들은 좀 지루했을 것입니다. 사실 강해 설교는 때로 반복되는 내용 때문에 지루할 수도 있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하는 것이기에 조금은 딱딱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100회의 사도행전 강해를 통하여 얻은 교훈은 무엇입니까? 제 마음에 사도행전을 끝내면서 확신이 생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반드시 성장되어야 하는데 교회의 성장에는 끊임없는 기도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기도함으로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은 그때부터 담대히 복음을 증거했어요. 예수를 핍박하던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완전히 변화되어 '오직 복음 증거'만을 삶의 목표로 삼지 않았습니까?
성도 여러분, 주님 만나세요.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세요. 이것이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주님 전하는 삶이 생명력 있는 신앙생활임을 마음에 새기고 그대로 행하여 사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드디어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로마에 도착한 바울의 신분은 죄수였습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바울이 생각했던 대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누가 죄수의 신분으로 가기를 원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사도 바울은 편안하게 로마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매 순간 순간 복음 전하는 일에 온 힘을 다했습니다.
로마에 온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비록 죄수의 신분이긴 했지만 가슴이 벅차지 않았겠습니까? "네가 가이사 앞에서도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받은 지도 몇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드디어 로마에 왔으니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로마에 오긴 왔는데, 바로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지 못합니다. 재판받기 위해서라도 가이사 앞에 서야 복음을 전하든지 할 것이 아닙니까? 오랜 시간 죽음을 넘어서서 로마에 까지 왔는데 그런데 또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몇 년을 기다렸습니까? 2년. 그렇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와서도 무려 2년이라는 세월을 미결수로 남아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주 쉬운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바울이 미결수로 로마에 있었던 2년 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전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 기간에도 오직 복음 증거하는 일에만 힘썼습니다. 역시 바울 아닙니까?
좀 쉴만도 한데, 쉬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이 어떻게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계속되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전화 위복의 신앙(16)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어떤 대접을 받았습니까? 16절 말씀을 봅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바울은 로마에 도착해서 다른 죄수들과 함께 감옥에 간 것이 아닙니다. 독방에 갇힌 것도 아닙니다. 참 이상하지요? 더군다나 바울은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지냈어요. 몸센(Mommsen)이라는 성서학자에 의하면, 군인에게 따로 감시받게 한 것은 감옥에 감금시키는 것보다 가벼운 형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누린 혜택은 단지 한 군사에 의해 감시받는 정도가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가 거하는 곳에 사람들을 초청하여 대화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짐작이긴 하지만 아마도 베스도의 긍정적인 조서내용과, 호송책임자였던 율리오가 바울에 대해 경험한대로 작성한 보고서가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외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바울이 이 정도의 자유를 허용받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섭리이며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죄인으로서 이런 정도의 자유를 누린다면 어디 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라면 구치소에 있던지, 감옥에 갇혀 있던지 그래야지, 셋집이 살면서 사람들은 집으로 초청할 수 있다면 그게 죄인입니까? 이름만 죄인이지 결코 죄인의 삶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군사 한 명하고만 같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일 바울이 다른 죄수들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같이 있는 죄수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겠지요? 그런데 바울이 다른 죄수들과 같이 있지 않고 오직 자신을 감시하고 보호하는 군사하고만 있었다는 것은 죄수들에게가 아니라 군사에게 복음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고 군사에게 복음 전한다는 것이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바울을 보호하고 감시했던 이 군사는 가이사 황제의 친위대 소속이었습니다. 로마에 약 만 명 정도의 친위대 군사들이 있었는데 한 사람이 고정으로 바울을 지켰다기보다는 교대로 지켰을 것입니다. 이들 친위대 소속 군사들은 왕에게 충성하는 사람들로 정예부대원들이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머리도, 가슴도 실력도 기술도 철저하게 훈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이 친위대 군사에 의해 보호받고 감시받는 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말하나마나 예수를 전했을 겁니다. 복음을 증거했을 겁니다. 바울에게 있어 자신이 친위대 군사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들 한 사람만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영향받고 예수 믿게 될 것은 뻔한 일 아니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부하 직원이 상사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당연히 상사가 부하직원을 전도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회사에서 제일 말단이 "사장님, 예수 믿으셔야 합니다. 교회에 나가세요"한다는 것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눈치도 봐야 하지요. 잘못했다가는 회사에서 쫓겨나기라도 할까봐 쉽게 입이 떨어지겠어요? 하지만 사장의 입장에 있다면 다르지요. 눈치 볼 것 없지 않습니까? 그뿐입니까? 아랫사람은 "내 행실로 모범이 되어 우리 사장님 꼭 예수 믿게 해야지" 결심하고 전도하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이 '아이구, 아부하고 있네' 눈치주고 빈정대며 좋게 보아 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사장은 자신이 변화된 모습만 보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믿지 않는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서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아! 그렇구나, 전도는 사장이나 하는 것이로구나! 나는 사장도 아니고 부장도 아니니 전도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생각하는 분이 있을까봐 걱정입니다. 여러분,
전도는 높은 사람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는 언제 어디서나 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신분과도 상관없이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어떤 신분으로 군사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죄수의 신분으로 전했어요.
복음 전하면서 죄수의 신분이었다는 것이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하나님, 복음 전하기를 원하신다면 자유의 몸으로나 만들어 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하고 하나님께 항의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 1:12에서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무슨 뜻입니까? 죄수가 된 것이 도리어 로마군 정예군사인 친위대 군사에게 복음 전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냐? 죄수된 것이 도리어 다행이라는 말입니다.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비록 감옥에 갇혀 있고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지만, 그래도 내가 이런 상황에서라도 복음을 증거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믿도록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될 터이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죄수의 신분이 아니고서야 어찌 친위대 군사와 쉽게 만날 수나 있었겠습니까? 말 한마디 잘못 붙였다가 변이라도 당하기 십상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이 죄수의 신분이니 친위대 군사와는 함께 있을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다가 결국 복음까지 전할 수 있게 된 것 아닙니까? 그것이 '도리어' 다행이라고, 죄수가 된 것이 복음 전하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는 바울의 심정을 우리 모두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예수 전합시다. 비록 내 상황이 어렵더라도 기도하며, 주님 음성 듣고, 전도에 힘쓰다보면 화가 변하여 복이 될 줄 믿습니다. 전도하세요. 주님이 기뻐하세요. 주님이 축복주십니다. 전도 대상자를 적극적으로 찾아가세요. 전하세요. 제가 춘천중앙교회 온지 14년이 다 되어 가는데 참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말해볼까요? 새로 나온 성도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만나도 모르는 사람과는 인사도 안 해요. 말도 안 해요. 같은 성도, 형제자매가 아닙니까? 전도하려면 교회에서부터 훈련해야 돼요. 모르는 사람만나도 인사하세요. 해봅시다. "안녕하세요?", "은혜 받으셨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 인사하다보면 마음이 열리고, 세상에서도 예수 전할 수 있습니다.
2.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유(17-20)
로마에 온지 사흘 후에, 바울은 유대인들 중 높은 사람들을 자신이 머무르는 곳으로 초청했습니다. 바울이 초청한 사람들은 개별적 공동체들의 장로, 지도자, 회당장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 지도자들을 자기의 숙소에 초청한 것은, 그가 죄수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활동공간이 제한되어 있었기에 볼가피한 일이었으며 여기에는 바울 나름대로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자신을 변호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로부터는 자기에 대해 어떤 소식을 듣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거기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습니다.
먼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변명하는 모습을 살펴봅니다. 17-20절 말씀입니다. "17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 바 되었으니 18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19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20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먼저 여기서 집고 넘어갈 내용이 있습니다. 19절에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사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한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득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 하에서 모든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쫓겨났다가, 이제 조금 법이 완화되어 쫓겨났던 유대인들이 로마로 돌아와서 살 수 있게 된 터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정착하여 회당을 일곱 개나 지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한다는 것은 이방인 가이사에게는 단지 유대인들의 종교적 분쟁 정도로 비쳐질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일로 로마 황제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다시 학대하는 구실을 제공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명히 밝힙니다.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이제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바울이 본격적으로 전하려는 핵심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유대인들에 의해서 내가 고소당하고 재판을 받고 무죄임이 입증되었는데 여전히 이곳 로마에까지 오게 된 것은,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지 못해 억울해서 이것을 꼭 해결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이제껏 유대인들이 간직했던 생각, 즉 '이스라엘의 소망'에 대해 증거하고자 함이다" 이런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메시야 사상'이 있었습니다. 즉 다윗왕의 후손 중에 다윗 왕이 누렸던 부귀와 영화를 회복시킬 메시야가 도래해서 다스릴 것이라는 그런 소망이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힘이 없이 지배당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다윗왕의 영화를 회복시켜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며 살아왔습니다. 바로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살아왔던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바울이 왜 이토록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힘썼습니까? 한 마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전에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정치적으로 해방시켜줄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긴다고까지 고백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영원한 가치, 참된 진리를 붙잡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가치를 붙잡는 것입니다. [주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 명예와 / 행복과 바꿀 수 없네 ... 세상 즐거움 /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이 영원한 가치를 붙잡을 때 흔들리지 않습니다. 참 자유, 참 평안, 참 기쁨이 있습니다. 영원한 가치 -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소망과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3. 바울의 전도(21-28)
바울의 변명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1-22절 말씀입니다. "21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 한 일도 없느니라. 22이에 우리가 너희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유대인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들은 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의 사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듣기 위해 일자를 정하였습니다. 며칠 후 정한 날짜에 바울이 머무는 곳에 유대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자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23절입니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도 권하더라" 증거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렇습니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 나라와 예수가 모세와 선지자들이 증거한 바로 그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반응이 나타났습니까? 24절입니다. "그 말을 믿는 삶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두 가지 부류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전도할 때도 이런 경우가 있지요? 아무리 전도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전혀 믿지 않을 것 같아 전도하지 않다가 우연한 기회에 '예수 믿읍시다. 교회에 가보지 않겠습니까?' 이 한 마디에 전도되어 교회에 나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도는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도하다가 실족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왜 안 믿는 거야!" 아무리 전도해도 믿지 않으니까 그만 실족하고 더 이상 전도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바로 열매가 맺히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전할 뿐입니다. 이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6:15-16절입니다. "15…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이것이 바로 영적인 현실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면 복음을 받는 사람이 있고 이상하게 귀를 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그들이 할 일이지만 결과는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끊임없이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포기할 일이 아닙니다. 복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전도임을 깨닫고 끝까지 전도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셋방에서 다시 세계로(30-31)
바울은 로마에 와서도 2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30-31절을 봅니다. "30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더라."
바울이 어디에서 복음 증거했다구요? 셋방. 바울은 셋방에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였지만, 셋방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교도소가 아니라 세를 내고 사는 집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자신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인의 신분으로 복음을 증거했는데도 그 누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반대할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셋방에 거하면서도, 죄수의 신분이면서도 복음 증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때로는, '나는 부족하다', '나는 가진 게 없다' 핑계하며 복음 증거를 회피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성도 여러분, 복음 증거는 장소가 좋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100주년 기념 교회를 하나님께 드린 춘천중앙의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절대로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거만해서도 안 됩니다. 더욱 더 겸손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전하면서 우리의 외형적인 모습이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겉모습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게 된다는 사실 - 명심하세요.
반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영적인 회복,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우리 속에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정 리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로 100회에 걸친 사도행전 강해를 마칩니다.
비록 사도행전 강해는 여기서 끝이 났지만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시대의 사도행전은 이제 우리가 써 내려가야 합니다.
낙심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그래서 세상에 나가 복음을 증거했던 것처럼 그리고 예수를 핍박하던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복음 증거에 자신을 바쳤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예수님 만나고 성령 체험하고 전도하는 일이 바로 우리 자신의 일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이 들리십니까?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로마에 복음이 전해진 이야기
행 28:16-31 / 김명혁 목사
사도행전은 구원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으로, 북쪽으로 전해진 이야기와 그 다음에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전해진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사도행전은 구원의 복음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전해지다가 마지막에 로마에까지 이른 것을 기록하고 마감합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을 읽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여기 셋집이란 로마의 감옥을 말함]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오늘 아침에는 구원의 복음이 어떻게 로마에까지 전해졌고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주도하심과 인도하심으로 복음이 로마에 전해졌습니다.
로마는 그 당시 반 기독교 세력의 심장부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못 박아 죽인 정치 세력의 심장부였습니다. 서기 64년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악독한 박해가 네로 황제에 의해서 자행될 곳이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서기 64년 네로 황제에 의해서 자행된 극심한 박해의 양상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갖가지 조롱을 받다가 죽음을 당했으니 동물의 가죽에 싸여 개들에게 찢기기도 했고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저녁이 되었을 대 이들은 밤을 밝히는 불빛이 되었다. 네로는 이 장관을 위해 자기 정원을 개방하여 서커스까지 공연했으며 스스로 전차를 타고 다니며 군중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로마는 구약의 관점에서 보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와 같은 악독한 곳이었습니다. 로마는 그 당시 대표적인 '악의 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울을 부르실 때부터 로마를 마음에 품고 계셨습니다. 누군가를 로마에까지 보내는 일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을 부르실 때부터 마음에 지니고 계셨던 궁극적인 관심과 뜻은 사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물론 로마 사람들에게까지 십자가의 복음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악에 축’에 대해 심판의 손길이 아닌 구원의 손길을 펴는 것이 예수님이 지니셨던 궁극적인 관심과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그리고 바울에게 하신 말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23:11).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3-25).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제1차, 제2차, 제3차 선교 여행을 하게 하신 것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에 복음을 전하게 하신 다음 마지막에는 로마에 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데 궁극적인 목적을 두었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행23:11). 이 말씀 가운데 주님의 관심과 뜻이 분명하고 강하게 나타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복음이 로마에 전해진 것은 예수님의 주도하심과 인도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둘째, 사도 바울의 순종과 핍박과 고난을 통해서 복음이 로마에 전해졌습니다.
구원의 복음이 언제 로마에 전해졌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오순절 날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강림했을 때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순례자들로 찾아왔는데 그들 중에는 로마에서 온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로마로 돌아가서 그곳에 복음을 전했다고 생각합니다. 행2:5,10을 읽습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그러나 로마에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해진 것은 사도 바울로부터였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부터 그의 인생관과 민족관과 국가관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본래는 이스라엘 족속 중의 이스라엘 족속이었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부터는 그는 이스라엘 족속의 국가관과 히브리인의 민족주의와 바리새인의 종파주의를 너머서는 세계인이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 그는 또 자기는 이방인에게로 간다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 결국 사도 바울은 세계적인 기독교 종교를 선포한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선교 여행 중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한 다음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와 아덴과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제3차 선교 여행을 떠났습니다. 제3차 선교 여행은 소 아시아의 교회들과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교회들을 돌아보는 목회적 선교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제3차 선교 여행을 하면서 로마 선교를 항상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분명한 의지를 항상 품고 있었습니다. 행19:21을 읽습니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19:21). 사도 바울이 3차 선교 여행 중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머무는 동안에도 예루살렘에 가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복음을 전한 후 로마로 가기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머무는 동안 아주 중요한 일을 한 가지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직 가 보지도 못한 로마를 생각하면서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주옥과 같은 복음의 편지를 써서 보낸 일이었습니다. 그 편지가 사도 바울이 쓴 편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편지인 로마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그들에 대한 자기의 지극한 관심과 사랑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3-15). 이 말씀 가운데 주님의 지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순종의 마음과 로마 사람들에게 대한 뜨거운 관심과 사랑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얼마나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바울의 가슴과 로마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깊은 사랑과 애정의 가슴을 느끼면서 저는 얼마나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공회 앞에서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한 후 가이사랴로 호송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 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새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의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도 사도 바울의 가슴에는 로마 선교가 항상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일부러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기를 원한다고 총독 베스도에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행25:11). 베스도 총독은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행25:12). 사도 바울이 얼마나 주님의 지시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고 얼마나 로마에 가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사실 로마로 가는 것은 핍박과 고난을 받으러 가는 것이었고 죽으러 가는 것이었는데도 사도 바울의 가슴에는 로마 선교로 가득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얼마나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는지 모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우여 곡절 끝에 즉 바다의 풍랑과 배의 파선을 당 한 후에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석 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거기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난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이레를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행28:11-14). 사도 바울은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서기 61년경이었습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편안한 집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곳은 군사들이 지키는 감옥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매임 당한 죄수의 몸으로 2년 동안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정부의 호의로 아니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사도 바울이 비록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했고 군사들이 그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를 찾아오는 방문자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방문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감옥에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고 저의 아버지도 감옥에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행28:16).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행28:23).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28:31). 사도 바울은 옥중 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로마 선교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시 자기의 복음 전파의 상황을 이렇게 기쁨으로 기록해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빌1:12-14).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빌4:22,23).
사도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 이년 동안 머물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로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리고 네 개의 옥중 서신까지 썼습니다. 그것이 빌립보서, 빌레몬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등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옥중에 갇혀 있는 2년 동안 그의 마지막 심혈을 다 쏟아바치면서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을 말로 글로 그리고 삶으로 로마 사람들에게 전했고 동시에 마게도냐 선교와 소 아시아 선교까지 수행한 것이었습니다. 구원의 복음이 로마에 전해진 것은 사도 바울의 순종과 핍박과 고난을 통해서 그리고 로마인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애정과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셋째, 사도 바울의 순교를 통해서 복음이 로마에 뿌리 내렸고 교회가 튼튼하게 세워졌습니다.
어느 곳이든지 복음이 깊이 뿌리 내리고 주님의 교회가 튼튼하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말과 삶을 통한 복음 선포와 함께 그것들을 완성시키는 순교의 피 흘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사탄의 세력과 죄악의 세력을 도말하고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는 말씀 선포와 함께 순교자들의 피가 요구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튼튼하게 세워지는 데는 예수님의 대속의 피와 함께 스데반과 야고보의 순교의 피가 요구되었습니다. 로마 교회가 튼튼하게 세워지는 데는 사도 바울의 순교의 피가 요구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들이 온전한 교회들이 되기 위해서 자기의 피를 필요로 한다면 자기는 기쁨으로 자기의 피를 제물로 드릴 용의가 있다고 표현하곤 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피의 제사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빌2:17).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내 자신까지 허비 하리라[자신을 제물로 드리리라]"(고후12:15).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십자가의 죽음의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결국 사도 바울은 반 기독교 세력의 심장부인 로마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튼튼하게 세우기 위해서 저기의 몸을 순교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2년 동안의 옥중 생활을 마친 후 서기 63년경 잠시 풀려나서 에베소와 마게도냐를 방문하고 그곳의 교회들을 돌보다가 서기 64년경에 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이송되어 다시 감옥에 구금되었습니다. 네로 황에에 의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던 때였습니다. 로마에서의 제2차 구금 생활은 보다 혹독한 구금 생활이었습니다. 이때에 사도 바울은 그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 전서와 후서를 써서 믿음의 아들에게 보내며 마지막 유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디모데에게 “너는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분부하면서 자기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렸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기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은 지극히 인간적인 정서를 진솔하게 나타내 보이기도 했습니다. “너는 어서 내게 속히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나 아멘”(딤후4:9,10,11,13,14,15,17,18).
초대 기독교의 역사는 서기 66년이나 65년 경에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꺼꾸로 십자가에 달려서 순교를 당했고 사도 바울은 목 베임을 당하므로 순교를 당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지시하시고 알려주신 길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달려 갔습니다. 주님께서 사도 바울이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많은 해를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많은 해를 받았고 마지막에는 순교의 죽음을 당하는 해까지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달려갈 길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몸을 순교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는 필생의 복음 전파를 그의 죽음으로 마감하고 죽음으로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순교의 피로 로마 교회를 튼튼하게 세웠습니다.
로마에 구원의 복음이 어떻게 전해졌습니까? 첫째는, 예수님의 주도하심과 인도하심으로 복음이 로마에 전해졌습니다. 둘째는, 사도 바울의 순종과 핍박과 고난을 통해서 복음이 로마에 전해졌습니다. 셋째는, 사도 바울의 순교의 죽음 통해서 복음이 로마에 뿌리 내렸고 교회가 튼튼하게 세워졌습니다.
오늘도 복음 전파의 역사는 계속되고 인간 구원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자기 땅에 오셔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고 그리고 그 후에 북쪽으로, 북쪽으로 그리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반 기독교 세력의 중심지에까지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기를 간절하게 원하시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후예들을 찾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후예들이 지금 세계 곳곳에서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을 충성스럽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핍박과 고난을 짊어지고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오늘의 작은 바울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고 허락하신다면 우리도 우리의 몸을 순교의 제물들로 바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저와 여러분들을 복음의 일꾼들과 거름들로 사용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복음의 운반자
행 28:16-31 / 김경년 목사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사도행전 마지막 강해를 하면서, 먼저, 지난 10개월 동안 사도행전 강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교회와 각 개인에게 큰 은혜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사도행전 강해는 끝나지만은 사도행전의 나타난 성령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교회와 이 민족 가운데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말씀드린 내용을 다 소개할 수는 없고, 지난 10개월 동안 말씀드렸던 제목을 한번 다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부흥을 기다리는 사람 [행1:1-14(신약187쪽)]
2. 부흥에 쓰임받는 사람 - [행1:15-26(신약188쪽)]
3. 부흥의 원동력 [행2:1-13(신약188쪽)] 2006-02-07
4. 부흥하는 공동체 [행2:42-47(신약188쪽)] 2006-03-06
5. 부흥의 증거 [행 3:1-10(신약191쪽)] 2006-03-06
6. 모퉁이의 머릿돌 [행 4:1-12(신약192쪽)] 2006-03-06
7. 한 마음과 한뜻 [행 4:32-37(신약193쪽)] 2006-03-06
8. 어떤 부부의 이야기 행 5:1-11(신약193쪽) 2006-03-13
9. 교회의 문제해결 [행 6:1-7(신약196쪽)] 2006-03-21
10.마지막 순간까지 [행 7:54~60(신약199쪽)] 2006-03-21
11.흩어진 사람들 [행8:1-8(신약200쪽)] 2006-03-30
12.변화된 사람들[행9:1-9(신약202쪽)] 2006-04-10
13.신앙과 삶[행10:1-8 (신약204쪽)] 2006-05-03
14.교회에 필요한 사람 [행 11:22-26(신약207쪽)]
15.옥문이 열리는 기적 [행12:1-5(신약207쪽)] 2006-06-02
16.본받고 싶은 교회 [행 13:1-3 (신약208쪽)] 2006-06-02
17.성령 충만한 사람 [행13:48-52(신약210쪽)] 2006-06-08
18.사명자의 삶 [행14:19-28(신약212쪽)] 2006-06-16
19.바나바와 바울의 교훈 [사도행전 15:36-41(신약215쪽)]
20.기적을 체험하는 인생 [행16:25-34(신약216쪽)]
21.신사적인 사람 [행 17:10~15(신약217쪽)] 2006-07-12
22.아름다운 만남 [행 18:1~4(신약218쪽)] 2006-07-20
23.로마를 보는 비전 [행19:21-22(신약221쪽)] 2006-07-27
24.밀레도에서 [행20:17-24절(신약223쪽)] 2006-08-05
25.예루살렘에서 [행21:13-14(신약224쪽)] 2006-08-22
26.간증하는 사람 [행 22:1-11(신약226쪽)] 2006-08-22
27.네 마음을 일으키라 [행 23:1-11(신약228쪽)]
28.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행 24:24-27(신약231쪽)]
29.걸음을 인도하시는 자 [행 25:1-12(신약231쪽)]
30.당당한 외침 [행 26:24-29(신약233쪽)] 2006-09-13
31.풍랑을 만난 사람들 [행 27:13-20(신약235쪽)]
32.복음의 운반자 [행28:16-31(신약237쪽)] 2006-09-24
이제 사도행전의 마지막 설교 제목은 ‘복음의 운반자’입니다. 복음의 운반자란 복음을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옮기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누가는 의사 출신으로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귀한 일을 감당한 사람입니다. 누가는 분명히 복음의 운반자였습니다.
사도행전은 1-12장까지는 초대교회의 탄생과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까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주로 주요 인물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 복음의 운반자였습니다.
13-28장까지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복음이 드디어 이방민족인 로마에 까지 증거된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주요 인물은 바울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이렇게 누가, 베드로, 바울 등 수많은 복음의 운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도 복음의 운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운반자입니다.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유럽으로, 독일로,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세계 각국으로, 점점 확장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운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 복음의 운반자는 어려움을 기회로 받아들입니다.
본문 16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본문에 보니까, 사도 바울은 드디어 로마에 도착합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이것은 누가가 기록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드디어 바울이 로마에 들어가는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바울에게는 로마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곳입니다. 이곳까지 오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한마디로 그는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로마에 도착했지만 바울은 한 군사와 따로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죄인의 몸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다고 어려움이 안오는게 아닙니다. 교회 다니면 어려움이 안생기는 줄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사고 안당하고, 기도하면 위기가 안 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잘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과 기도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만듭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바 되었으니.”
여기보세요.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 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형제들아....”
바울은 여전히 죄인의 몸이었지만, 그리고 가택연금 상태에서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없었지만 그는 그런 어려움을 원망하고 불평하여 삶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기회로 삼아 복음을 전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다가 보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몸의 질병으로, 혹은 우리 자녀들의 탈선으로, 혹은 여러분의 사업과 직장의 어려움을 당할 때가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결코 원망이나 불평, 혹은 좌절과 절망으로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그런 환경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바울은 어디에 있든지 복음의 운반자로서 충실히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고, 또한 그곳에서 옥중서신이라고 하는 기독교 교리의 진수인 에베소서-빌립보서-골로새서-빌레몬서 등의 서신서를 기록하는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특별히 감옥에 있는 동안 바울은 교회론의 핵심인 에베소서를 기록하는데 거기서 6장 말씀을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영적 싸움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면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등과 같은 말씀이 나오는데, 어떻게 바울이 그런 말씀을 기록했는가? 그것은 그가 가택연금 상태로 있을 때, 그를 감시하던 로마 군인의 복장을 보고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에게 있어서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한 사건과 환경은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복음을 증거하는 수단이요, 도구로 보였으며 그렇게 사용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눈에도 모든 환경들이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보여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를 문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모든 코드가 문화에 맞춰져 있는듯 합니다. 문화를 모르면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 문화로 복음을 접근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수단과 도구로 삼아야지 문화가 목적이 되고, 결과가 되면 안됩니다.
여러분, 삶 속에 어떤 어려운 문제가 와도 결코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랍니다. 뜻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길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운반하는 자로 먼저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도 우리에게 선한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복음의 운반자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본문23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로마에 가서 2년 동안 자기 셋집에 있었다는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죄수의 몸으로 갔지만 그의 죄는 단순한 종교적인 문제였으므로 로마정부가 그를 단순히 가택연금을 시켜둔 상태였습니다. 집 엔에서는 자유롭게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고, 이렇게 자유롭지만 다만 집 밖으로 출입을 통제해 둔 상태입니다. 그렇게 2년 동안 로마에 머물면서 그는 무엇을 했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바로 “아침부터 저녁까지”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의미가 매우 큽니다.
바울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종일 복음을 전하다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성경을 기록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옥중서신이 탄생된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이고, 빌립보서는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이고, 골로새서는 골로새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이고, 빌레몬서는 빌레몬에게 보면 편지입니다.
바울이 가택 연금 상태에서 보낸 편지들을 읽어보면 그가 로마에서도 얼마나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잘 아실 것입니다. 어린 목동 다윗이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어떻게 넘어뜨렸습니까? 그것은 물매와 물매 돌로 넘어뜨렸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단순히 돌맹이 한 개를 던져서 그런 큰 승리를 가져왔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다윗이 골리앗의 이마 한 가운데(급소)를 정확하게 명중 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평소 생활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목동으로 양들을 돌볼 때, 수없는 이리때와 짐승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악한 짐승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물매돌을 던졌고, 수없는 훈련과 노력과 성실과 인내로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다윗이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유명한 물매돌 선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거듭된 훈련과 반복, 그리고 끝없는 인내로 오늘에 다윗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살아온 다윗에게 하나님이 때가 되어서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의 삶이 과거의 결과물이요, 미래에 있어서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복음의 운반자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본문 31절 말씀입니다.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여러분, 복음의 운반자였던 바울은 수없는 어려움들을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고, 또한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국 그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되 금하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최후의 승리자였음을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에서 기록한 빌립보서를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빌립보서 4장 22절 말씀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 집사람 중 몇이니라.”
여러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특별히 가이사 집사람 중 몇 명이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이사 집이 어떤 집입니까? 바로 로마의 황제의 집입니다. 로마의 황제의 집에 몇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이 가택연금을 당한 상태에서 가이사 황제의 집안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그렇게 시작된 로마 선교가 바울이 죽고 난 뒤, 260여년에 지난, 주후313년에 드디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결국 복음의 운반자는 최후의 승리합니다. 반드시 승리합니다. 하나님은 이기십니다. 사단은 결국 패하고 맙니다. 우리는 결국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든지 승리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결 론
우리는 복음의 운반자입니다.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유럽으로, 독일로,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세계 각국으로, 점점 확장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운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으로, 동네로, 친구에게로, 민족과 세계 열방으로 우리가 복음을 운반하는 귀한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 오시는 날까지 열심히 복음을 운반하여 세계 복음화가 이루어지고, 남북통일이 이루어지고, 주님 나라가 속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복음을 위해 사는 삶
행 28장 16~31절 / 박종광목사
드디어 사도행전의 마지막 강해 시간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아주 많은 교훈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어떤 다른 서신서나 복음서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그런 특징적인 교훈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사도행전은 대체불가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마가복음이 없었더라면, 조금 아쉬움은 있었겠지만 그래도 다른 세 권의 복음서가 있기 때문에 우린 안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보서가 없었다면, 에베소서나 골로새서 등과 같은 다른 옥중서신이 있었기에 ‘그래도 괜찮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행전은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서와 서신서를 연결하는 유일무이한 다리 역할을 합니다.
만일,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신약의 교회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승천 이후, 제자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성령이 언제, 어떻게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확장된 경위는 물론이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경위와, 유럽 복음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인 사울이 바울이 된 과정도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신학적 주제도 놓쳤을 것입니다. 먼저, 교회론은 사도행전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교회는 모세의 지도하에 있었던 구약교회가 가지는 인종적, 민족적 한계를 초월하여 초인종적이며 초국가적인 특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교회에 참여하는 방법은 아브라함의 육적 혈통이 아닌, 회개하고 주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로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노아의 방주를 대신하는 새로운 구원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현대에서 참다운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세워져야 하며, 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을 때, 우리 모두는 사도행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사도행전을 통해서만 참된 교회의 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영교회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참된 교회되길 소망합니다.
또, 우리는 성령론의 중요한 교리들이 사도행전을 통해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다른 별명이 있습니다. 이 별명은 성령행전입니다.
성령은 사도행전에서 총 58회나 언급될 정도로 복음의 진전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모든 장면을 통해, 성령이 복음의 효과적인 증거를 위한 능력과 담대함을 복음의 증인들에게 수여하는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교회는 어떤 사람의 능력이나 열정으로 시작되거나 성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 교회는 세워지고 성장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 모두는 성령충만 받는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득차 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사람이 바뀌고 지역이 변화되며 교회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다른 여러 성경보다 성령에 관한 정보가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밖에도 우리는 이 사도행전을 통해 교회의 중요한 역사를 알 수 있고, 교회가 어떤 과정을 거치며 성장하였는지, 또 어떤 경로를 통해 박해와 핍박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경건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인 ‘기도’에 관한 교훈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라는 단어가사도행전에 총 58회 등장했다면, ‘기도’는 무려 32회 등장합니다. 기도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 마다 등장합니다. 사람을 세울 때도, 선교사역을 감당할 때도, 병자들을 치료할 때도, 이런 기도를 통해 사도행전에는 놀라운 기적이 수 없이 연출됩니다.
우리가 이런 사도행전을 기억하는 최고의 방법은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경로를 인식하며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복음은 먼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예루살렘 인근의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 되었고, 이후에는 ‘고넬료’로 시작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고 이제 복음은 아시아 전역에서 그리고 최후에는 유럽에서 전파되어 지는데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주 짧은 시간에 이방 세계의 중심지에 도달한 것을 설명해 줍니다.
자,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의 가장 마지막 장면에 도달해 있습니다.
오늘 이 마지막 단락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묘사는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성실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한지 사흘 후에 유대인 들 중 높은 사람을 청합니다. 기록된 자료들에 의하면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에 로마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합니다. 한 예로, B.C 6년 유대인들이 헤롯 아켈라오의 폭정을 로마에 고소하기 위해 50명의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그때 로마에 거주한 8천 명의 유대인들이 이들의 주장에 동조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긴 여행의 여독이 미처 풀리지 않았을 것 같은데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열심을 내었습니다. 바울은 이내 나아온 유대인들에게 아주 정중한 태도로 자신이 로마에 재판을 받으러 온 것이 동족 유대인들을 거스르거나 유대의 관습을 배반한 일이 아니라고 밝혀 오해의 여지가 없게 했습니다.
이제 오해가 풀리고 여러 사람들이 바울의 사상에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이때부터 바울은 눈.코뜰새 없이 바빠졌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이 유숙하고 있는 곳으로 많이 몰려왔는데, 문제는 방이 작아서 그 사람들을 일일이 다 들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날짜를 정해 바울의 집을 찾아와야 했고, 바울은 찾아온 사람들에게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가르치고자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강론했습니다. 이 강연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예언내용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증언했던 것입니다.
저는 바울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 남자가 생각났습니다. 그 사람은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었습니다. 부모님도 있었고, 형제. 자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순간 아내와의 사이에 불화가 찾아 왔습니다. 그 남자는 그 일로 너무 힘들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남자는 깜쪽같이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는 집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집 문서도, 땅도, 어떤 옷 가지도 들고 나가지 않고 홀몸으로 가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만이 살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버렸고,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버렸고, 자기와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준 아내를 버렸고, 같은 피를 나눈 형제. 자매들을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저 남해안에 있는 어떤 무인도처럼 홀로 떨어진 곳에서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은 복음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복음에 대해 문외한입니다. 이 남자의 경우는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사람에게 인생의 어려움과 환난이 찾아올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한 가지 예를 보여준 실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려움과 시련이 인생에 찾아올 때 복음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의 현실을 외피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싸움을 합니다. 이 남자의 경우에 싸움은 이혼이겠지요. 어떤 상황을 택해도 이 남자의 선택은 행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에 반해, 바울은 어떤 갈등과 괴로움 앞에서도 자신의 생을 회피하지 않고 부딪치는 용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바울이 로마에 도착 하자마자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입니다. 사실, 이제 유대인들이라면 바울의 입장에서 신물이 날 법도 했습니다. 바울이 회심하고 난지 벌써 30년이 되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유대인들은 바울을 방해하고 바울의 선교사역을 말살하려 하였고 그를 감옥에 가두고 때리고 돌을 던지고 재판하고, 음모를 꾸며서 여러 차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최종 종착지인 로마에 이르러서도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한 것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이해가 됩니까? 같은 민족이니까 그럴수 있다 생각합니까? 제 경험상, 외국에 나가보면 한국 사람인데도 아닌척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부러 누군가 한국말 사용하면 모른척 한다 합니다. 만나봐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같은 한국 사람에게 당한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안 좋은 경험을 한 사람일수록 외국에서는 한국 사람이 아닌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혹시, 한국사람 인가요?”하고 물어보면, 일부러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쓰기도 한다 합니다. 그에 반하여, 바울은 자기에게 숱한 해로움을 안겨 주었고, 자신의 온 몸을 멍들게 하고, 생명까지 위협했던 유대인들에 대해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자기 동포에 대한 초지일관의 모습을 끝까지 견지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대합니다. 바울은 끝까지 유대인들을 품고 사랑하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바울 자신에게 어떤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할지라도 바울은 복음의 전령으로써, 하나님 보내신 사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자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복음’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복음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이에게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 자녀 삼아 주시며,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약속입니다. 또한 이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사망을 이기고 부활의 다음 열매가 될 수 있다는 것에 관한 승리의 소식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복음은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나아가 복음이 그 한 사람에게 들어가면 가족 전체를 바꿀 수 있습니다.
봅시다. 바울에게 아내란 존재는 유대인입니다. 바울은 그 남자와 아내의 갈등처럼, 유대인들과의 사이에 오랜 세월 동안 큰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과 이혼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기가 감당해야 할 선교적 사명을 힘들다 하여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이 한 최선의 선택은 유대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끝까지 사랑한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 종착지인 로마에 이르러서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씀을 강론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비밀을 알려 주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안에 복음의 씨앗이 심겨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상황을 가정할 때, 만일 그 남자에게 복음이 들어가 있었다면, 그 역시 마지막까지 가정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되었다면 그 남자가 지키고 있을 그 자리 때문에 아내와 자식들이, 형제와 자매와 그 부모가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사도행전의 마지막 단락에서 다시 한번 복음의 위대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복음이 들어간 한 사람은 죽음의 자리도 헤치고 살아 나올 수 있지만, 복음을 거절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쓰레기 더미에도 파묻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한 복음을 통해 한 사람만이 생명을 얻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그 가족과 친척과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사실은 그 한 사람만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지역을 살리는고 나라를 살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경우입니다. 바울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회심했을 때, 세상에 난리가 났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울로 인해 복음을 듣고 회심한지 모릅니다. 많은 지역에서 교회도 생겼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던 30여 년 전의 이야기는 이제 로마에서 끝이 납니다. 사도행전 초기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었던 교회는 이제 만단위로도 헤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다이나마이트여서 그렇습니다. 다이나마이트는 한번 터지면 주변의 모든 것을 박살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던 복음의 폭발이 2천년의 시간 동안 먼 극동 아시아 한국에까지 번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를 거쳐 전해진 복음은 이제 유럽을 넘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에 이르러 더 폭발적인 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힘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넘어 그 사람이 속한 모든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사람을 넘어 자연세계에까지, 그리고 그 자연세계를 넘어 영의 세계에까지, 과거에서 지금까지, 지금을 넘어 저 먼 영원의 세계까지 복음은 폭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30절과 31절은 바로 그런 복음의 무제한 폭발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바울이 2년을 셋방살이 집에서 머물며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합니다. 이 2년의 시간은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이 오기 전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허용된 시간 내에서 어느 누구의 제제도 받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거침없이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 그 무엇도 하나님의 복음을 가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심판의 날, 종말의 날이 오기 전까지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전파되어질 것이고 그 하나님 나라에 관한 소식을 막을 수 있는 장벽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세상이 바로 그러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 지역, 국민의 99%가 무슬림인 지역도 복음이 들어갑니다. 무슬림 지도자와 나라가 그것을 강제로 막고자 하지만 막을 수가 없습니다. 전파를 통해, 인터넷을 통해 TV 안테나가 세워지고 랜선이 깔린 곳을 통해 복음도 더 빠른 속도로 증거되어 집니다. 저, 얼음의 땅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등에도 이제 곧 철도가 놓일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북극의 얼음이 녹아 이제는 저 멀리 둘러가지 않아도 북극을 통해 유럽으로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부산에서 출발하여 북한과 중국. 러시아를 거쳐 그동안 왕래 하지 못하였던 지역에 길이 나고, 로마의 길을 통해 복음이 전해졌던 것처럼, 새로운 도로, 철도, 뱃길을 통해 복음은 거침없이 전파되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미래를 바라보며 이 자리에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역사 가운데 28장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지금도 사도행전 29장의 역사는 쓰여지고 있다는 것을 믿으며, 이제는 바울이 주역이 아닌, 저와 여러분이 새로운 주인공으로 사용되어지길 소망하며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
사도행전 28:16~22 / by 고동엽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 한 일도 없는니라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그렇게 가고자 소원했던 로마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본래 소원했던 시간이나 소원했던 환경, 소원했던 여건에서 로마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계시로 약속해 주신대로 분명히 로마에 도착했습니다마는 그 과정은 자신이 바랐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 하시는 가운데, 그가 본래 생각했던 시간보다 3년 후에, 자유의 몸이 아닌 죄수의 몸으로, 평탄한 길이 아닌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내가 바라는 방법대로, 내 눈앞에서 이루어지리라고 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이루어지기는 하나, 그 시간과 장소와 방법이 내가 생각한 것과 같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같지 않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지연될 따름이요 방법이 다를 따름입니다. 그 방법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고 해서 일이 잘못됐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묘하고 신비로운 역사 가운데서, 더 크게, 더 놀랍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 여러분이 기도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혹은 자녀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 뭐가 좀 잘못된 것 같고, 뭐가 좀 멀어지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절대로 의심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한 그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특별히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기도는 그 자녀에게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응답이 내가 생각한 방법대로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세요. 잠시 내 뜻과 다른 길로 일이 진행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결과는 더 크게,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로마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고생을 해야 하나, 왜 3년이나 지연되어야 하나, 왜 나는 자유의 몸이 아닌 죄수의 몸으로 또다시 감옥에 쳐 박혀야하나'하는 의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이제 빌립보서 1장 12절에서 풀립니다. "나의 당한 일이"----대체 일이 왜 이렇게 돼야 하나 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그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기적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이것이 놀라운 역사입니다. 바울이 이를 미리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습니다마는 그는 미처 다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바울이 이렇게 수고하고 역사함으로써 불과 한 200년 후에 대로마제국이 기독교국가가 됩니다. 기독교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훗날로마 한복판에 베드로성당과 바울성당이 세워집니다. 지금도 거기에 가면 그 성당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바울이 진작 알았더라면 아마도 로마감옥에서 좀더 큰소리로 찬송을 불렀을 것입니다. 자, 이렇듯 우리가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의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가(16절)"하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276명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로마에 도착했다고 해서'우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는 바로 이 사도행전의 기자(記者)인 누가 자신을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누가야말로 참으로 충직한 바울의 assistant, 그를 돕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의사로서 바울을 따릅니다. 저는 죄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죄수가 가는 길을 곁에서 따라갑니다. 로마까지 따라갑니다. 감옥에는 못 들어갑니다만 감옥 가까이 있으면서 계속 바울을 돌봅니다. 참 대단한 분이지요.
여러분은 혹 이런 것을 생각해보았습니까? '반드시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그리 잘하는 생각은 아닙니다. '내가 할 수도 있지만 앞에서 일하는 사람이 잘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되겠다, 어떤 사람은 의술로, 어떤 사람은 경제적으로, 내가 도울 수 있는 무엇으로든 돕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이렇게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그런 지혜와 능력, 그런 각오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누가 자신이 얼마나 복음을 전했는지는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누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누가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신 이 분을 어떤 면으로든 돕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바 전부이다.' 생각해보세요. 누가는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 그를 면회하면서 돕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후송될 때에는 고생을 감수하면서 따라갑니다. 로마에 가서도 계속해서 그를 돕습니다. 이렇게 뒤에서, behind man으로 평생토록 주의 일을 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가만히 보면 저마다 목사 되겠다고, 전부 자기가 하겠다고 합니다. 남이 일하는 그 뒤에서 협력할 줄 몰라요. 뿐만 아니라 '내가 저 분을 돕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 하는 것이다'하는 확신이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누가는 확실한 봉사를 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대로 "바울은……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16절)" 합니다. 바울을 따로 있게 허락했다. 그 말은 바울이 다른 죄수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그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비록 제한된 자유지만 그실 상당한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때로 있어서, 한마디로 말하면 성경을 볼 수도 있고, 기도도 할 수 있고, 찬송도 할 수 있고, 또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사람들을 초대할 수도 있었습니다. 밖으로 나가지는 못해도 사람을 불러서 만날 수가 있었어요. 자, 이만큼의 자유를 얻은 바울입니다. 그는 아직 재판 전이라서 확실하게 석방될 수도 없고, 또 무슨 형(刑)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미결수로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후한 대접을, 더욱이 로마사람으로 볼 때에 이방인인 유대사람 바울이 받는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제껏 바울과 동행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 동안 풍랑 속에서 되어진 일들을 다 얘기하고, 또 백부장은 아주 자세한 보고와 함께 특별히 바울에 대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관대하게 해줄 것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이 분은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건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우리는 확실히 증거할 수 있습니다, 하는 보고를 분명히 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죄수이지만 영적 권세가 당당합니다. 로마의 정치가들도 마음속 깊이 바울을 존경하게 됐습니다. 어떤 사람은 호기심을 가지고 그를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만큼의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분문에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한 군사와 함께"----여기가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보면 사도 바울의 팔을 묶였던 쇠사슬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정말 바울을 묶었던 것인지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좌우간 혼자서는 꼼짝못하도록 각기 두 사람의 한쪽 팔들을 각각 바울의 양팔에 딱 묶어놓았습니다. 그야말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먹어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화장실에도 같이 가고…… 사도 바울과 같이 묶여 있는 군사는 하루에 한 사람씩 교대합니다. 싫으니 좋으니 해도 하루종일 두 사람이 같이 있게 됩니다. 바울에게는 이 때야말로 절호의 기회입니다. 개인전도 넘버원입니다. 하루24시간을 그대로 함께 있으니까 이게 보통 관계입니까? 바울은 이제같이 묶인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이런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군사들은 친위대입니다. 당시 친위대라고 하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지금도 청와대나 어디나, 많은 사람들이 경비를 섭니다. 우리는 문민정부이고 민주국가니까 그렇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독재자들이나 왕 같은 사람들은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언제 누가 자기를 죽일는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자기 주변에 친위대를 둡니다. 우리 북녘 땅의 김일성만 해도 주위에 그를 지키는 사람이 3만 명이었답니다. 남북 회담하면서 정상회담도 하겠다 했지만 '김일성 수령'은 서울에 못 온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가 여기에 오려면 5만 명이 동원돼야 한답니다. 그러니 움직일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아무리 따져봐도 우리 쪽이 갔으면 갔지 저는 못 올 것이라고, 이렇게들 생각했었습니다. 아무튼 옛날 왕들은 신변 안전이 제일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을 높이 쌓은 거예요. 중국의 서안 같은 곳을 가보면, 청나라 때에 세워놓은 엄청난 성이 있습니다. 가보면 굉장히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 성 안에는 왕과 친위대와 왕의 친척들만 살았습니다. 백성이 사는 게 아니예요. 무서우니까, 언제 누가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성을 높이 쌓아놓고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친위대가 그곳을 지킵니다.
이런 친위대가 로마에는 약 만 명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친위대는 특별합니다. 저들은 왕에게 가장 충성하는 사람이요, 정예부대요, 요샛말로 하면 훈련이 잘된 군사들입니다. 몸도, 기술도, 머리도, 충성도, 마음도, 가슴도 철저하게 훈련된 사람들입니다. 사실은 이 사람들이 실권을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12년 동안 친위대원으로 성실히 봉사하고 나면 노예의 신분이었던 사람이라도 자유인이, 로마시인이 됩니다. 그 다음은 귀족이 됩니다. 주로 로마를 다스리는 정치가도 친위대를 제대한 사람 중에서 나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선교 전략적으로 생각하면 만 명의 이 친위대만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면 로마는 뒤집히는 것입니다. 로마는 복음화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저들이 실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로마감옥에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바울은 매일 한 사람씩 만나게 됩니다. 매일 한 사람씩 전도합니다. 1년이면 365명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이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 하 사람 전도하게 되어서 마침내 친위대 안에 복음이 전파됐습니다. 그 전파되는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라고 말씀하게 됩니다. 참으로 희한합니다. 일부러 만나려고 해도 몇 달을 두고도 못 만나는 친위대사람들입니다. 저들에게 전도할 기회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매일 한 사람씩 하루종일 붙들려 있으니까 자연히 전도하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매일매일 교대하니까 한 사람 전도하고 다음날은 다시 다른 사람을 전도하게 되니, 이 얼마나 희한한 일입니까? 그런고로 충성된 전도자에게는 어디서나, 어느 때나 어떤 환경에서든 전도의 문은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기회는 따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직장에 나가면 그곳이 선교자가 되는 것이고, 건강하면 건강한대로, 병들면 병원에서, 사업을 하면 사업하면서, 무역을 하면 무역하면서, 여행을 하면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에게…… 충성된 전도자에게는 언제나 전도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어디서나 전도할 수가 있어요. 더구나 일이 잘되고 형통할 때보다는 인간적으로는 좀 불행해졌을 때에 보호본능을 일으키게 되어 상대방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그런 순간이 오히려 전도하기에 유익한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에게 전도하기란 어렵습니다. 오히려 병든 사람이 건강한 사람에게 전도하면 아주 효과적입니다. 성공한 사람이 실패한 사람에게 그저 참고 견디라고 해봐야 그 말을 들어줄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실패하여 아주 비참해져 있는 사람이 친구를 위로하려고 찾아갔을 때, 그 형편없이 어려워진 사람이 입을 열어 전도하게 되면 그야말로 전도는 효과적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한 죄수가 여기에 있고 바울이 권세 있는 자유인으로서 감옥을 방문했다고 입장을 바꾸어봅시다. 전도가 되겠습니까? 어쩌면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죄수입니다. 죄수가 간수를 향해서, 자유를 잃은 자가 자유한 자를 위해서 복음을 전할 때에 이 전도는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여러분은 불행하다느니 행복하다느니…… 그런 것은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잘되고, 못되고, 어디를 가고 말고…… 그것이 문제가 안됩니다. 정말로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고 하는 확고한 뜻만 있다면 전도의 길은 어디에나 열려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선교적 차원에서 보면 바울은 아주 효과적인 환경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7절을 보세요.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라 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한 사흘 후에 유대인들 중의 높은 사람들을 청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워낙 큰 도시이므로 유대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 중의 높은 사람, 즉 유대사람의 대표되는 장로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여행 중에 되어진 일과자기가 여기에 오게 된 목적 등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할 때마다 가는 곳이 어디든 꼭 유대인 회당을 방문했습니다. 회당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이며, 기성시설과 기성조직, 기성집회를 이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며, 이미 성경을 아는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등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선교적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회당을 방문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방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을 볼 때에 그는 마음이 아팠어요. 왜 우리 동족은 안 믿을까, 이 귀한 예수를 내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믿어주지 않을까, 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디를 가든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더욱 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많은 핍박은 대부분 유대사람들에게서 받았습니다. 집요하게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끈질기게 바울을 괴롭히는 것은 바로 유대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저들로 인해 많은 핍박을 당하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바울을 괴롭히고 전도사업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직접적으로 바울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암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를 고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바울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유대사람들은 30여 년 동안 끈질기게 사도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그는 30여 년 동안 끈질기게 저들로부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유대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렇듯 괴로움을 당하고도 아직도 유대사람들을 불러서 전도하고자 하니 말입니다. 바울의 민족애, 동족애가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정말로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잘해드리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어떤 희생을 하든, 무슨 굴욕을 당하든 상관이 없어요. 어떻게 해서라도 부모를 예수 믿게 하고 그래서 하늘나라 가게 해드리는 것이 최고입니다. 구원받게 해드리는 것, 그 이상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서 잘먹게 하고, 많이 위해드리고, 평안히 계시게 하고, 효도관광 시켜드리고……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자녀를 제일 사랑한다면 자녀를 예수 믿게 하고, 남편을 제일 사랑한다면 남편을 예 수믿게 하고, 아내를 제일 사랑한다면 아내를 예수 믿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을 사랑합니다. 로마서 9장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저들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1, 2절)"-----내가 지옥에 갈지라도 내 동족, 내 사랑하는 민족이 구원받는다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은 간절합니다. 그래서 유대사람들의 박해로 인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까지 쫓겨오고도 또다시 유대사람들을 불러서 전도합니다. 그 뜨거운 전도열, 그 동족애, 그 간절한 사랑----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저들에게 먼저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내 민족을 송사 하려는 것이 아니로라(19절)"------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유대사람들의 문제는 유대사람들끼리 해결하지 왜 로마사람들에게 상소 하겠는냐, 그것은 유대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 또 이렇게 상소해 가지고 로마에 와서 어떻게 한다는 것이냐, '유대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입니다. 이유도 없이 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라고 송사할 것이냐---이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정죄하려는 것도, 누구를 송사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내 민족을 송사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사람들은 나를 놓아주려고 하는데 유대사람들이 죽이겠다고 하니 마지못해서 로마에 상소한 것이오.
그래서 내가 여기가지 온 것입니다. 유대사람을 고소한다던가 유대사람의 잘못된 점을 설명하고 상소하고자 함이 아닙니다'하는 자기 변명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여기에 오게 된 이유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함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20절)." 이스라엘의 소망----이스라엘 민족이 강한 것은 소망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저들의 소망은 아주 대단합니다. 달리 여러 가지로 소망이 있겠습니다만 이스라엘의 소망은 메시야라고 하는 인격,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에 대한 소망입니다. 앞으로 다윗의 왕국과도 같은 그런 왕국, 태평시대, 세계를 지배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생각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의 중심은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여기에 온 소망과 믿음을 걸고 있습니다.
제임스 와트라고 하는 화가가 그린 '소망'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둥그런 지구 위에 한 예쁜 어린아이가 앉아서 바이올린을 켜는데, 아이가 입은 옷은 남루하고, 바이올린은 줄이 다 끊어지고 단 한 줄 남았어요. 그 한 줄에 활을 걸고 바이올린을 키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생각하게 합니까? 다 끊어지고 한 줄밖에 남지 않은 바이올린이지만 그 한 줄로 연주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 소망입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예수 메시야를 기다렸어요. 그러나 정작 예수가 오셨을 때에는 그 분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어요. 유대사람들의 확실한 종말론적 신앙이 왜 그렇게 비참해졌습니까?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메시야관(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관이 달라진 이유는 세속적 욕망에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했어요.
마음을 비우지 못했어요. 자기 지위와 세속적 욕망과 정치적 욕망, 여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메시야를 알아볼 수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게 됩니다. 누가복음 24장 21절에 보면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말입니다. 다른 사람 아닌 예수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저들은 너무도 실망이 커서 엠마오로 돌아갑니다.
이것도 메시야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왜 실망 했나요?-----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십자가 사건은 메시야관을 가름하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승리입니까, 패배입니까? 세속적인 메시야관을 가지고있는 사람은 '십자가는 완전히 실패입니다. 일껏 기대했는데 그 분이 죽어버렸어요. 이 나라를 독립시킬 줄 알았는데 실패했어요'하며 낙심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승리하셨고 성공하셨고 다 이루셨어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의 메시야관은 정치적이요, 세속적이요, 협소한 민족주의였어요. 한 마디로 말해서 영광의 메시야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주적이요 종말론적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메시야를 통해서 영광의 메시야가 되십니다. 고난의 메시야를 통해서----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 부활을 통해서 영광의, 만왕의 왕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왕은 단순한 유대나라 왕이 아닙니다. 왕 중 왕이요, 우주적인 왕이십니다. 그런고로 메시야에 대한 이해, 이것이 달라서 저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에 대해 실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바울은 그 예수를 전파하고 있어요. 그 예수가 바로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메시야관, 성서적 메시야관을 설명하는 것이 바울의 사명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인하여 내가 여기 왔습니다'라는 말씀의 뜻이 이제 분명해집니다. 예수를 메시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개념을 성서적으로 바르게 설명하다보니, 메시야관에 오해가 많고, 이해가 없는 사람들 때문에 내가 박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함입니다.
자, 바울이 이렇게 설명했더니 이 유대사람들의 반응이 아주 도도하고 지혜롭습니다. 바울의 말씀을 당장 받아들이지 않고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22절)"라고 대답합니다. "이 파에 대하여"---대단히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그 당시 유대사람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샤프라고 하는 사람이 쓴 「바울」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랍비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 연구를 많이 해서 꽤 큰 책을 썼습니다. 제가 그 책을 정독했는데 샤프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우리와는 꼭 반대 방향이다. 메시야를 잘못 생각해서 분파가 하나 생긴 것이다. 그 대표자가 바울이다.' 꼭 반대편에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들이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어서 예수를 안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저들은 '우리의 메시야를 잘못 생각한 사람들이 분파를 만들어서 기독교가 생겼다'라고 설명하고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예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바른 메시야관을 가지게 될 때에 비로소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전하기 위하여 온 생애를 다 바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오늘의 본문을 생각해봅시다. 바울은 지금 로마감옥에 있습니다. 그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합동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만이 나타났습니다. 바울로서는 오직 충성, 오직 믿음, 그리고 인내적인 헌신이 있어야 했습니다. 잘 참아야 했습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불평해서도, 당장 무슨 일이 되지 않는다고 조급해해서도 안됩니다. 믿고 꾸준히 기다리면서, 기회를 주시는 대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보세요. 넓은 관장에서 수백 수천 명을 모아놓고 전도하는 길은 열리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매일 만나면서 전도했어요.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답답하기 그지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시해주시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기회에,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법을 그는 온유 겸손하게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와 같은 선교열, 그와 같은 확실한 믿음, 그리고 그와 같은 겸손한 순종----이것이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