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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석에서 자주 하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잘난’ 사람이 참 좋다. 아니 ‘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표현이 오해가 적을 성 싶다. ‘잘난 척’과의 경계를 위함이다. 진정 잘하는 사람은 티를 내지 않아도 알아주게 마련이고 십중팔구 익은 벼 마냥 겸손하다.
여하튼, 말과 겉치레가 능한 이는 여럿이나 ‘잘하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가수가 노래 부르기를 버거워하고 배우라는 명칭을 단 사람이 연기를 못하는 세상이다. 학자들은 연구에 게으르고 다수를 이끌겠다는 사람은 제 길조차 찾지 못하는 판국이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떳떳하다. 그러니 진짜를 만나면 반가운 것이다.
축구를 잘하는 축구선수를 만났다. 중의적으로 사용되는 ‘선수’의 의미가 솜씨가 뛰어난 사람(善手)이든 여럿 중에서 대표로 뽑힌 사람(選手)이든 결국 잘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축구 잘하는 축구선수’라는 문장은 일정부분 모순이다. 그럼에도 이런 표현을 쓴 것은, 그만큼 ‘선수’ 찾기가 힘들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소개할 젊은 선수와의 만남이 무척이나 반갑고 달가웠다. ‘잘 한다’는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일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결코 괜한 칭찬이 아니고 객관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외려 덜 받고 있다는 생각이 강할 정도. 82년생이니 아직 만개하지도 않은 꽃이나 이미 향기가 예사롭지 않은, 영리한 미드필더 김두현을 만났다. 판단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잘하고, 더 잘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선수다.
미래를 위한 선택
성남일화의 노랑 저지를 입고 필드를 누비는 김두현의 모습이 아직은 어색하다. 2001년 프로에 데뷔한 이래 김두현은 줄곧 수원삼성의 푸른색 날개를 달고 있었고 성남 이적이 결정된 것이 6월8일의 일이니 아직 눈에 익은 모습은 아니다.
이적 발표 당시 김두현은 독일월드컵 최종예선을 위해 쿠웨이트 땅에 있었다. 성남이 피스컵을 앞두고 전력보강에 박차를 가하던 시점이었고 수면 아래서 ‘김두현 이적설’이 꾸준히 새어나오긴 했으나 갑작스런 발표는 꽤나 놀라운 뉴스로 다가왔다.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저 역시 (이적을)생각하고 있었기에 크게 당황하진 않았습니다. 당연히 어색하긴 했지만 어차피 적응하기 마련이니까요.” 이적 당시를 떠올리는 김두현의 표정과 대답은 담담했다.
밖에서 상황을 지켜본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운 결정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많았다. K리그 구단 가운데 규모나 지원, 인적자원 등에서 최상급이라고 평가되는 수원을 떠난다는 게 선수입장에서 그리 반갑지는 않았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하지만 김두현의 견해는 달랐다. “평생을 수원에서 뛰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품고 있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저를 더 대우해주고 여건이 보다 좋은 클럽에서 활동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극과 변화도 필요했고... 결국 제 미래를 위해 결정한 것이죠.” 솔직히 물었다.
김남일, 김대의, 송종국 등 수원에 걸출한 미드필더 자원들이 넘쳐나서 입지가 좁아든 것 아니냐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다. “결코, 자리를 빼앗겼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경쟁에서는 누구와 견줘도 자신 있고요. 말씀드렸듯 저를 더 필요로 하는 곳, 제가 더 성장할 수 있는 팀을 선택한 것입니다.”
‘토토’하기 힘든 K리그
다소 평가가 이른 감 있으나 김두현이 가세한 후 성남은 달라졌다. 비록 3전 전패로 피스컵을 마감했으나 아인트호벤, 리용 등 세계적인 클럽들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던 성남의 모습은 기대 이상이란 평가를 끌어냈다.
후기리그에서도 성남은 한층 짜임새 있는 모습으로 변모했다. 울산에서 적을 옮긴 윙백 박진섭과 2004년 K리그 득점왕 모따의 가세 등 플러스 요인이 여럿 있으나 새로운 조타수로 자리한 김두현에게 향하는 시선이 보다 많다. “제가 합류한 뒤 좋아졌다는 평가를 받으면 당연히 고맙고 기쁘죠. 하지만 지금까지는 저보단 동료들이 잘 해준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받는 칭찬은 나중으로 미뤄서 듣겠습니다.” 일단, 올 시즌 김두현의 목표는 성남의 우승이다.
이적생 입장에서, 대표팀 주전경쟁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기에 K리그 정상이란 굉장히 매력적인 열매일 것이다. 성남의 전기리그 성적이 썩 좋지 않았기에 통합승점보다는 후기리그 우승으로 4팀이 겨루는 PO에 진출해야 하지만 현재의 분위기를 살핀다면 딱히 어두운 전망은 아니다. 관건은 보다 복잡해진, 점치기 힘든 K리그의 판도다. 김두현의 표현이 참 재미있다. “K리그는 토토하기가 어렵잖아요.” 무슨 이야기일까? ‘스포츠 토토’라는, 축구를 비롯해 각종 경기의 승패 및 스코어를 맞추는 복권을 언급한 것이다. 토토에 당첨되기 어렵다는 표현으로 예상키 힘든 K리그의 혼전양상을 설명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이 팀은 반드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경기가 어렵고, 저 팀은 쉽지 않겠다 싶었는데 오히려 수월한 경기가 나오고... 다른 나라 리그를 보면 강팀과 약팀의 구분이 어느 정도 확실한데 K리그는 그렇지 않아요. (팀 전력의)기복이 심해서 그런 것 같아요.” 승패를 예측하기 어려운 축구판의 ‘변수’ 보다는 경기력의 편차가 심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겠다.
때문에 ‘기복이 심해서’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 있다. 잘할 때와 못할 때의 차이가 너무도 큰, 선수들 컨디션에 크게 좌우되는 K리그 클럽들의 전반적인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절반의 역사에 불과한 J리그의 수준에도 밀리고 있다는 평가가 심심치 않은 K리그 현실과 나아가 시나브로 뒷걸음치고 있는 한국대표팀의 현실을 감안하면 주의 깊게 생각해볼 문제다.
꼴찌는 예견된 일?
‘인터뷰를 진행한 날짜가 9월7일이다. 바로 다음날인 8일은 중도하차한 본프레레 前대표팀 감독이 네덜란드로 출국하던 날이었다. 대표팀 일원으로 활약하는 김두현이기에 이에 대한 질문을 배제할 수 없었다. 물론, 편한 화두는 아니다.
김두현 역시, “떠나는 사람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는 것”이라며 조심스런 입장을 취했으나 ‘할 말’에 있어서는 뚜렷하게 의사를 피력했다. “전술을 비롯한 지도력에 대해서는 제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신임을 주지 못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 적었고 이것이 쌓이다 보니 불만이 많아졌죠.” 사실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지휘하는 수장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부대의 사기와 전투력은 불 보듯 뻔한 것이다.
김두현은 “어려서부터 축구만 했던 선수들이기에 어느 정도의 감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프레레 감독님과 생활하면서 점점 ‘아... 저 감독님과 독일월드컵에 간다면 정말 걱정이다’라는 생각까지 찾아 들더군요. 이미 상당부분 어긋난 것”이라는 속내를 털어놨다. 더욱 놀라운 것은 ‘특정 누군가가 아니라 선수단 전체에 감돌고 있던 정황’이라는 부연이다. 2무1패라는 성적으로 최하위에 그친 동아시아 대회를 앞두고도 그랬단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아무리 우리가 출전하는 경기지만 1승을 거두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넋두리가 선수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고 하니 내부의 곪음이 꽤나 심했다는 방증이다.
“어차피 지난 일이지만 (전임)쿠엘류 감독님 부임 당시에는 적어도 이런 분위기는 없었거든요. 우리가 잘못해서 결과가 좋지 않다는 반성이 있을지언정 감독님을 향한 불만이나 불신은 없었습니다. 정말 신사였는데... (아시안컵까지라는)계약기간도 남았는데 왜 중도에 경질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두 사람과 직접 생활했던 대표선수의 말이다.
명성이나 실제 지도력에서 앞선다는 평가를 받던 쿠엘류를 팽하고 결과적으로 그에 미치지 못한 후임자를 선택했다가 더 큰 실패를 초래케 했던 관계자들은 반드시 각성해야 할 것이다.
진짜 명장이 필요하다
“(박)지성이 형과 (이)영표 형을 보면 부럽죠. 정말 예전과는 다른 기운이 느껴져요. 선배들이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히딩크 감독님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대표팀 전력강화는 물론이고 향후 해외진출 등 선수들의 성장을 위해서도 소위 ‘명장’을 영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진정으로 한국축구의 발전을 위한다면 명감독 영입에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합니다.
일단, 대표팀의 좋은 성적을 이끌 수 있는 적임자를 찾는다는 게 가장 큰 주안점이겠죠.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말고 향후 (감독)본인이 직접 호출하든 다른 곳에 추천하든, 선수들의 해외진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입지를 갖췄는지도 고려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들어보자. “히딩크 감독님을 통했던 영표 형 지성이 형의 경우처럼, 유럽리그에 진출한다는 것은 선수로서 한층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고 이런 선수들이 계속 쌓인다면 결국 한국대표팀 전체의 업그레이드로 이어질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틀리지 않다. ‘거시적,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축구의 발전’을 위한다면 선행되어야 할 투자에 인색해서는 곤란하단 말이다. 새로운 사령탑으로 결정된, 유로2004에서 네덜란드 대표팀의 4강을 이끌었던 아드보카트의 선임을 지켜본 김두현과 대표선수들의 반응은 어떨지 자못 궁금해진다. ”
공평하다면 문제없다
필요할 때는 장문의 답변도 조리 있었고 오해의 소지가 있을법할 질문에는 중언부언 없이 간결체로 대답하는 모습이 참 깔끔하고 똑 소리 났다. 필드에서 보여주는 군더더기 없는 플레이마냥 인터뷰도 그랬다. 농담을 섞을 줄 알았고 상대를 배려할 줄도 알았다.
그래서 장시간 진행된 인터뷰와 사진촬영이 내내 즐거웠던 것이다. 역시, ‘잘하는’ 사람이 좋다. “믿음을 주는 플레이어가 되고 싶습니다. 왜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저 선수가 나오면, 저 선수와 함께 플레이하면 ‘이길 수 있다’라는 기운이 전달되는 선수. 바로 그런 선수가 되고 싶어요.” 상당한 포부다. 이토록 원대한 꿈을 품은 선수는 처음이었다. 막연히 ‘빅 리거’를 꿈꾸는 게 대부분인 반면 보다 근본적인 성장을 생각하고 있었다.
맞물려 질문을 던졌다. 지금 상황에서 본인이 말한 ‘믿음 가는 선수’에 근접한 국내선수는 누구일까. “아무래도 지금은 지성이 형이라고 생각해요.” 역시 그랬다. 누군가는 김두현을 가리켜 불운하다고 말한다.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Utd.라는 거함에 탑승한 박지성과 포지션이 가장 유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과 1년 선배인 까닭에 향후 지속적인 경쟁이 불가피하다.
김두현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박지성과 겹치는)포지션에 대한 질문은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전 신경 쓰지 않아요. 일단 미드필드 진영에서는 어디서든 자신 있습니다. 누구와 경쟁해도 제가 낫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요. 해외파라는 이름값 등 앞선 이력을 배제하고 공평하게 평가하는 기회가 제공된다면, 자신 있습니다. 선발은 분명 감독님의 몫입니다. 백지의 전제 하에서 저와 다른 선수를 비교했을 때 제가 부족해서 발탁되지 못한다면 전 100% 수긍할 것입니다. 부족하다면 더 노력해야죠. 하지만, 자신 있습니다.”
독일에 ‘올인’
스스로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다고 말한다. 때문에 딱히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쉬 사라지지 않는 고민이 있다. 바로 군대 문제다. 지난해 아테네올림픽에서 8강에 그치며 메달획득 시 주어지는 면제특혜를 놓쳤다.
이제 와일드카드가 아니라면 올림픽을 통한 기회(23세 이하)는 없다. 만 27살이 되는 2009년까지 입대 연기가 가능하기에 결국 내년 독일월드컵이 마지막이자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다. “독일에 올인(All-In)할 생각입니다. 군대문제도 그렇고 제가 생각하는 유럽진출을 위해서도 내년이 마지막이라 생각합니다.” 내년의 성패는 결국 올해의 플레이에 달렸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새로운 감독의 신임을 얻어 대표팀에 뿌리내리려면 당연히 첫 인상이 좋아야겠고 그렇기 때문에 올 시즌 K리그에서의 활약이 중요하다는 현명한 다짐이다. “군 문제가 해결돼야 제가 원하는 스페인 땅을 밟을 수 있잖아요. 독일월드컵은 제 축구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겁니다.” 자연스럽게 지향하는 무대가 밝혀졌다.
어려서부터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를 동경했는데 주변의 상황이 구미를 더 당기고 있단다. “잉글랜드는 이미 다른 사람(박지성, 이영표)에 의해서 정복됐잖아요. 이탈리아 세리에A는 스타일이 다른 것 같고... 스페인이 목표입니다. 게다가...” ‘게다가’ 이후의 말 줄임은 이천수(울산)를 의식한 발언임을 감지했다.
‘과거 이천수는 실패했는데 김두현은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라는 질문에 묘한 웃음과 함께 자신감 섞인 긍정의 뜻을 표한다. 이럴 땐 영락없이, 매서운 포부를 지닌 ‘프로’의 모습이다. 매섭고 다부졌다. 지금껏 ‘잘했고’ 앞으로도 ‘잘할 것’이라 의심치 않는 김두현과의 만남. 쾌청하기 그지없던 그날의 하늘만큼이나 기분 좋았던 기억이다. 아마도 이 기운이 상당히 오래도록 지속될 것 같다.
역시 잘하는 사람이 좋다. 잘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과 그들의 프로다움이 참 좋다. ‘믿음을 주는 플레이어’와 엘도라도 ‘프리메라리가’의 성공기를 위해 정진하는 흔치않은 ‘선수’ 김두현의 성장이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그를 향한 이런 믿음이 변치 않기를 더불어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