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 김가영은 이곳이 궁전이라고 생각했다. 흰 벽, 분홍빛 커튼과 베란다 쪽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침대 시트는 눈처럼 희었고 쿠션은 부드럽게 몸을 감싸고 있다. 그리고 이 맑고 신선한 공기. 김가영이 몸을 비틀어 옆쪽 벽을 보았다. 오전 7시 10분. 어젯밤 12시 반까지 베란다에서 술을 마시다가 제각기 방에 들어와 잔 것이다. 오늘 아침은 시간약속 하지 말고 끝까지 자보자고 윤성일과 합의한 터라 두어 시간 더 잘까 하고 눈을 감았다가 금방 다시 떴다. 이곳이 스위트룸이라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하룻밤 550불. 누워만 있기에는 너무 아깝다. 오후 1시가 체크아웃이니 그동안 방마다, 편의시절마다 흔적을 남길 테다. 윤성일 방만 빼고 화장실까지 다 사용해야지. 그래도 본전을 못 뽑는다.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난 김가영이 옷을 입고 응접실로 나왔다. 예상대로 응접실은 비었다. 어젯밤 폭탄주를 다섯 잔이나 마신 윤성일은 아직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응접실을 지나 문쪽 휴게실로 다가간 김가영이 화장실로 들어섰다. 제방에도 화장실이 있지만 이쪽도 써보려는 것이다. 화장실은 컸다. 안쪽에 사우나실과 샤워실. 그 옆쪽으로 나란히 러닝머신과 헬스용 자전거가 놓여졌다. 감탄한 김가영이 한숨을 뱉으면서 변기에 앉았다. 그렇구나, 스위트에는 헬스기구까지 갖춰졌구나. 더 탐험 해야겠다. 용무를 본 김가영이 자전거에 올라 폐달을 1백번 돌린 후에 화장실을 나왔다. 샤워는 제 방에서 하려는 것이다. 그쪽은 거울이 컸고 화장대까지 놓여졌다. 그때 문 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놀란 김가영이 몸을 돌렸다. 윤성일이 들어서고 있다. 아직 제 방에서 일어나지도 않을 줄만 알았던 터라 김가영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일찍 일어나 밖에 나갔다가 온 것이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오늘 둘러볼 데 알아보고 왔어.”
다가온 윤성일이 팸플릿을 내밀며 말했다.
“네가 계획을 세워봐.”
“오늘 다 어떻게 봐?”
“내일 오후까지 둘러보는거야. 우린 내일 오후 7시에 출발하는 호치민 행 특급 열차를 탄다.”
윤성일이 바지 주머니에서 티켓 두 장을 꺼내 다시 내밀었다.
“특실이야. 방으로 된 좌석에 침대가 두 개. 화장실도 딸렸지.”
“....”
“밤에 자고 일어나면 아침 8시에 호치민에 도착한다는구만.”
티켓을 받아든 김가영이 정색하고 윤성일을 보았다.
“이거 비싸지?”
“별로.”
그때 윤성일이 심호흡을 하고나서 말을 이었다.
“오늘밤 하루 여기서 더 잔다. 계산 끝내고 왔으니까 잔소리 마.”
그렇구나. 라운지에 차려진 스위트룸용 뷔페로 식사를 하면서 김가영이 생각한다. 지위가 높으면 옷차림이 어떻든 한수 접고 봐주는구나. 엄청나게 큰 새우, 먹다가 깨달았지만 바다가재를 먹으면서 김가영이 힐끗 앞에 앉은 윤성일을 보았다. 윤성일은 접시에 갈비구이, 밥, 초밥, 김치, 닭고기까지 산더미처럼 올려놓고 열심히 먹는다. 그릇에 시선을 집중한 채 한눈도 팔지 않는다. 윤성일도 허름한 티셔츠 차림이었고 김가영도 그렇다. 그래서 식당 앞에선 직원들이 둘을 보고는 의심이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가 스위트룸 키를 보여 주었더니 순식간에 왕과 왕비를 맞는 자세로 돌변했다. 지금도 김가영의 뒤쪽에 선 직원 하나는 손에 물병을 들고 물 잔이 비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때 윤성일이 머리를 들고 김가영을 보았다.
“아까 호텔 프런트에서 말야.”
김가영의 시선을 받은 윤성일이 말을 이었다.
“스위트에 투숙한 부부한테는 둘의 이름을 새긴 은반지를 선물로 준다는구나....”
“샘플을 보여주었는데 괜찮아. 프랑스 디자이너가 만들었대. 심플하면서도 세련되었어.”
“....”
“반지 안쪽에다 둘의 영문 이름을 박아서 주는 거야. 두 개를.”
다시 생선초밥을 집어 입에 넣은 윤성일이 씹어 삼키고 나서 말했다.
“해드릴 것이냐고 묻길래 오브코스 했지. 내가 미쳤니? 사양하게? 안 그래?”
하면서 시선을 주었으므로 김가영이 호흡을 고르고 나서 대답했다.
“당근이지.”
이곳은 미케 해변(My Kye Beach). 바닷가의 대형 파라솔 밑에 의자를 길게 펴고 누운 김가영이 바다를 본다. 햇살이 찬란하게 비치는 한낮이다. 지금 윤성일은 바다 안쪽으로 들어가 수영을 하는 중이었는데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서 보였다 안보였다 했다. 오전 11시 반,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드러난 팔과 얼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수영복을 사 입은 터라 하체는 거의 알몸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흰 타월로 덮여져 있다. 윤성일이 바닷가 가게에서 수영복을 골라주면서 정색하고 말했던 것이다.
“야. 수영복 입은 거하고 침대에서 벗은 거하고 분위기가 전혀 다르니까 내숭 떨지 마. 알았어?”
하더니 김가영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아이구, 몸매 끝내주네.”
해버렸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타월로 덮고 있는 것이다. 바닷가에는 서양인이 많았다. 이곳은 옛날 미군의 휴양지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백인 노인들은 모두 당시의 미군 병사들처럼 느껴졌다.
“내가 썬크림 발라줄까?”
뒤에서 목소리가 울렸으므로 김가영은 깜짝 놀랐다. 머리를 돌린 김가영은 썬크림을 들고 서있는 윤성일을 보았다. 바다에서 보이지 않더니 어느새 나와 가게에서 크림을 사온 것이다.
“아, 됐어.”
긴장한 김가영이 머리를 저었다.
“난 바를 필요 없어.”
“그늘에 있더라도 발라야 돼.”
“됐다니깐?”
그때 윤성일이 김가영이 덮고 있던 시트를 와락 걷었다. 그러자 수영복 차림인 김가영의 하반신이 다 드러났다.
“엄마.”
놀란 김가영이 무릎을 세우고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리 내! 빨랑!”
김가영이 소리치자 윤성일이 입맛을 다시고는 타월을 던졌다. 타월 뭉치가 김가영의 배에 떨어졌다.
“이거 정말 박물관에 가야 되는 애인가 봐.”
몸을 돌린 윤성일이 다시 들으라고 투덜거렸다.
“내가 창피하다, 야.”
오후 1시, 김가영이 머리를 돌려 옆을 보았다. 옆쪽 해변용 의자에 누운 윤성일은 깊게 잠이 들었다. 바다에서 실컷 놀다가 돌아오더니 그대로 곯아떨어진 것이다. 곯아떨어지기 전에 온몸에 다 골고루 썬크림을 바른 터라 피부가 번질거리고 있다. 김가영이 이제는 찬찬히 윤성일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힐끗거리기만 했던 것이다. 잘 빠진 몸매다. 무지막지한 근육질 몸매는 징그럽다. 윤성일의 몸은 적당히 근육이 붙은 날씬한 몸매다. 키는 1미터 85쯤 될까? 서양인보다도 큰 키다. 윤곽이 뚜렷한 사내다운 얼굴. 그래서 오히려 더 얄밉다. 저런 몸, 저런 얼굴의 남자를 여자들이 가만 두었 것 같은가? 그래, 어젯밤에 그렇게 말했지. 스치고 지난 여자들, 두어 번 만나서 좋아졌다가 제 갈 길을 간다고 했던가? 그럼 나도 그 대열에 들것인가? 김가영은 길게 숨을 뱉었다. 윤성일은 이제 낮게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다. 썬글라스를 쓰고 반듯이 누운 채 세상모르고 잔다. 두 다리를 주욱 뻗은 김가영이 이제는 자신의 발끝을 본다. 가지런한 발가락이 보기에 좋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지금도 이 남자와 함께 있는 자신이 꿈속에 있는 것만 같다.
윤성일이 실눈을 뜨고 김가영을 본다. 이제 김가영은 그 넝마 같은 타월을 치웠기 때문에 수영복만 입은 몸매가 다 드러났다. 아름답다. 싸구려 원피스형 수영복을 입었지만 미끈한 몸매는 눈이 부신다. 저 미끈한 하체. 단단하고 실팍한 허벅지와 쭉 뻗은 종아리, 그리고 가지런한 발가락, 제 입으로도 말했지만 남자의 손길을 한번도 받지 않은 몸이다. 윤성일은 가볍게 코 고는 소리를 내면서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조금 전에 잠에서 깨어나 김가영의 몸을 훑어보는 중이다. 짙은 썬글라스를 낀 터라 정탐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앞으로 얘하고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 될 것인가?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를 거쳤지만 이런 감정이 들기는 처음이다. 어젯밤에 그대로 보낸 것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왜 그랬을까? 하루 종일 틈만 나면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지만 모르겠다. 다만 같이 있는 순간이 좋았고 그래서 아끼고 싶었다는 것. 왜 아끼고 싶었는가하는 대목에 가서는 턱 막혔다. 그때 김가영이 힐끗 이쪽에 시선을 주더니 혼잣소리를 했다.
“아유 배고파.”
그 순간 윤성일은 상반신을 일으켰고 김가영이 소스라쳤다. 썬글라스를 벗으면서 윤성일이 김가영을 보았다.
“밤 먹으러 갈까?”
“형, 들었어?”
무릎을 반쯤 세웠다가 다시 펴면서 김가영이 묻자 윤성일이 두 팔을 뻗고 기지개를 켰다.
“금방 일어났어.”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바닷가의 해산물 식당에서 둘은 늦은 점심을 먹는다. 이곳은 고급 식당으로 가장 싼 음식이 10불이었지만 이제는 김가영도 놀라지도 말리지도 않는다. 둘은 바다가재와 굴, 게 요리를 시켰는데 맛이 있다. 김가영은 윤성일 몫인 게요리를 먹고 감탄한다.
“이런 요리가 있는지 몰랐어.”
“그렇구나.”
윤성일이 건성으로 맞장구를 쳤지만 김가영은 계속 진지하다.
“가격이 35불이나 한다는 게 좀 그렇지만 어쨌든 맛 값어치는 있어.”
“횡설수설.”
윤성일이 낮게 말했지만 김가영이 들었다.
“뭐가 횡설수설이야?”
“굴 더 시킬까?”
“내가 횡설수설했어?”
“국수가 있던데 국수 먹을래?”
그러자 눈을 흘긴 김가영이 굴 하나를 입에 넣고 씹었다. 이층 창가에 앉은 둘에게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곳 바람은 짠 냄새가 섞여졌고 매운맛이 느껴진다.
“내가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문득 김가영이 입을 열었는데 윤성일을 향한 눈동자의 초점이 멀어졌다. 윤성일은 김가영의 접시에 남은 바다가재 고깃점을 포크로 찍었다. 김가영이 제 접시를 앞으로 조금 밀면서 말을 잇는다.
“전기 기술자였는데 공사장에서 사고로 돌아가셨어.”
이제 윤성일은 정색한 채 머리만 끄덕였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그때부터 난 가난이란 것을 피부로 느꼈어. 남들보다 많이 가질 수 없다는 느낌, 아껴야만 한다는 생각.”
“....”
“맛있는 것, 좋은 것을 먹고 가질 수 없다는 슬픔. 형은 그런 것 느껴본 적 없어?”“왜 없어?”
김가영의 시선을 받은 윤성일이 심호흡을 했다.
“남들은 어머니가 다 있는데 난 없다는 슬픔, 열등감. 그따위들...”
“응? 어머니?”
눈을 크게 뜬 김가영이 묻자 윤성일은 헛기침을 했다.
“이 형은 중1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단다. 암으로.”
“....”
“그러니까 피차 하나씩 부족한 결손가정이다. 너하고 나하고.”
“....”
“좋은 방법이 있는데.”
눈썹을 좁힌 윤성일이 김가영을 노려보았다.
“네 엄마하고 우리 아버지를 결혼 시키는 것이 어떠냐?”“시끄러.”
이맛살을 찌푸린 김가영이 포도주병을 쥐었다. 25불짜리 포도주다. 제 잔에 포도주를 따르면서 김가영이 말했다.
“좀 진중해봐. 장난으로 돌리지 말고.”
“난 진중해.”
“형네는 어떻게 살아?”
“어떻게 살다니?”
“알바해서 여행경비 모았다고 했는데 몇 년이나 모아서 이렇게 쓰는 거야?”“널 만나서 어제부터 쓰는 것이라니깐 그러네. 딴 때는 거지같았어.”
“날 만났을 때도 1백 불 내고 1인실 들어갔잖아?”
“1백 불짜리 1인실이냐? 28불이지.”
“어쨌든.”
“난 그저 그렇게 살아. 보통이야.”
정색한 윤성일이 다시 심호흡을 하고나서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건물 관리소장이고 난 노가다로 1년 뛰고 나서 여행경비 만들었다. 됐냐?”
첫댓글 감사~
^^
잼나게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굿,,즐감,,,
즐감하고 갑니다 .
잘 읽고 갑니다^^
건물관리소장,,ㅎㅎ
즐감하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