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극로
십이월 둘째 일요일이다. 새벽녘 잠을 깨 박동욱이 쓴 ‘처음 만나는 한시, 마흔여섯 가지 즐거움’을 읽었다. 국문학 학위를 취득한 저자는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주제를 발굴 연구하는 한문학자로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이 책에서 우리나라 한시를 마흔여섯 가지 소재별로 나누어 누구든 이해 쉽도록 풀어 선인의 품격 있는 정신세계와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아침 식후는 도서관 문이 열린 시간에 맞춰 교육단지로 향했다. 공공도서관은 월요일이 휴관이라 일요일은 정시에 문을 열었다. 2층 열람실로 올라 내 지정석이 되다시피 한 창가의 자리를 차지했다. 집에서 못다 읽은 한시 해설서를 펼쳐 계속 읽었는데 자연사와 인간사에 대한 다양한 작품을 접했다. 여름 무더위 극성을 부린 모기나 외설스러운 성애와 처첩 갈등도 글감이 되었다.
그곳 도서관은 주말 이틀은 젊은 부모들이 어린 자녀와 동행해 글을 읽는 모습에서 우리나라 미래가 듬직했다. 다 읽은 한시 해설서는 사서에게 반납하고 신간 코너에서 이전부터 읽으려고 벼른 ‘이극로 전집 1,2,3,4권’ 가운데 남한 편 2권과 북한 편 4권을 골라 열람석으로 왔다. 한글학자이며 독립운동을 했던 이극로는 내 고향 의령이 낳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우뚝한 인물이다.
이극로 전집을 엮은 조준희는 조부가 함경도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로 국내외 발품 팔아 자료를 수집한 역작이었다. 이극로는 지정면 두곡리 농부 집안 6남 2녀의 막내아들로 열여섯 살 야밤에 집을 뛰쳐나가 마산 창신학교에서 수학하고 서울로 올라가, 이후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과 상해와 시베리아를 거쳐 고학으로 독일 베를린 종합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마산 창신학교 시절부터 변변한 후견인이 없이 어렵게 생활했으며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군관학교에 잠시 적을 두기도 했다. 20대 젊은 나이 상해로 이동해 공부하다가 뜻한 바 있어 시베리아를 거쳐 베를린 종합대학에서 중국의 생사 산업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 현지 대학에 조선어과를 개설해 강의하고 런던과 북미 대륙을 거쳐 지구를 한 바퀴 돌아 1920년대 후반 환국했다.
나라 밖에서 우리 말과 글에 많은 관심을 가져 베를린대학에서는 철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면서도 한글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아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했다. 이역만리 독일 대학에 조선어과를 개설해 강의했을 정도였으니 그 열정과 학문적 성취는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귀국한 이후 조선어학회 한글 편찬 사업을 주도하다 독립운동 혐의로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좌우 이념 혼란스러운 정국 소용돌이 속에 1948년 봄 평양에서 열린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는 실패하고 남한만 총선거를 거친 단독 정부를 수립했다. 그때 이극로는 김구와 함께 남측을 대표해 평양을 방문했다가 내려오지 않고 북에 잔류하면서 김일성 공산 정권 수립 시 국무위원으로 국어 어문 정책의 기틀을 다지고 고위직을 지내다 사후 평양 애국 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이극로 전집 남한과 북한 편에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노력 분투한 결과물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타국에서 고생은 말할 나위 없고 해방 전 어려운 여건 속에 학문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북에 머물면서도 한글에 대해 해박하고 논리 정연한 연구 결과물을 내놓았더랬다. 남북 어디서나 이극로가 남긴 글은 조국애가 넘쳤고 고향 의령 지정 두곡리에 대한 향수를 엿볼 수 있었다.
이극로 전집에서 ‘말모이’ 영화가 떠올랐다. 오후는 독립기념관 관장을 지낸 김삼웅이 쓴 ‘다산 정약용 평전’을 읽다 도서관을 나섰다. “신문물 밀려오던 구한말 개화 여명 / 열여섯 듬실 소년 큰 뜻을 펼치려고 / 야밤에 집 뛰쳐나간 창신학교 배움길 // 서울로 만주 상해 독일서 박사 학위 / 귀국해 한글 연구 해방 후 이념 달라 / 열사릉 잠든 혼백도 잊지 않을 고향길” ‘듬실 소년’ 23.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