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차세대 제품 출시를 앞둔 PC용 그래픽카드 시장은 그야말로 정신없다. 차기 제품에 대해 쏟아져 나오는 각종 루머는 소비자들이 관심을 갖는 IT 기기라면 다들 한 번쯤 겪는 통과의례나 다름없지만, 그래픽카드의 경우 단지 ‘카더라’성 루머에서 사실에 근접한 루머가 반복적으로 쏟아져나오면서 소비자들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지포스 900시리즈’로 그래픽카드 시장을 제패한 엔비디아와 신기술을 듬뿍 담은 차세대 ‘라데온’을 앞세워 반격에 나설 AMD가 정면 대결을 펼칠 전망이어서 하드웨어 마니아들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하지만 엔비디아와 AMD 양사 모두 중요한 정보는 비공개로 꽁꽁 묶어놓은 상황에서 업계를 통해 간간히 나오는 소식은 신제품을 기대하는 마니아들을 안달하게 만들고 있다.
제품이 정식 출시되어 진검 대결을 펼칠 전망인 6월을 앞두고 갈팡질팡 혼란에 빠진 차기 그래픽카드 시장을 점검해 보았다.
도전자 AMD, 차세대 제품은 300시리즈? 400시리즈?
엔비디아의 지포스900시리즈에 제대로 일격을 허용한 AMD는 현재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다. 그나마 ‘엔비디아 7: 3 AMD’ 정도였던 시장 점유율은 어느덧 8:2까지 벌어졌다. 특히 ‘지포스’의 입김이 강한 국내의 경우는 9:1 수준인 것으로 업계에선 추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AMD가 반격의 카드로 내세울 제품은 코드명 ‘피지(Fiji)’ 기반의 차세대 라데온 그래픽카드다. 현재까지 ‘피지’ 기반 차세대 라데온 그래픽카드는 새로운 제조공정 및 설계와 더불어 업계 최초로 HBM(High Bandwidth Memory)이 적용되며, 이변이 없는 한 6월 중으로 출시될 것이 거의 확실시된 상황이다.
▲라데온 R9 290 그래픽카드. AMD의 OEM 출시계획에 따르면 'R9 390'으로 리브랜딩되어 출시된다.
하지만 최근 AMD가 발표한 OEM 그래픽카드 신제품 라인업으로 인해 AMD의 차세대 그래픽카드의 예상 로드맵이 일대 혼란에 빠졌다. 당초 ‘피지’ 기반 차세대 그래픽카드 제품들은 3세대 제품을 뜻하는 300번대 모델명으로 나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난 6일 AMD의 발표에서는 OEM용 그래픽카드 제품들이 대거 300번대 모델명을 달고 나왔다.
더욱이 300번대 OEM 제품들이 일부 요소만 약간 수정한 200번대(2세대)의 리브랜딩 제품임이 드러난데다, 기존 R9 290/290X 모델이 차세대 제품을 달고 나올 전망이었던 ‘R9 390’으로 나오면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업계 일부에서는 ‘피지’ 기반 신제품이 확실한 구별을 위해 아예 400번대로 이름을 바꿔 출시될 가능성도 제시했지만, 여전히 300번대 이름을 달고 출시될 것이라는 정보도 혼재하고 있다. 정확한 모델명은 6월 초로 알려진 AMD의 정식 발표 전까지는 알 수 없게 됐다.
방어자 엔비디아, 견제구 ‘980Ti’는 신의 한수? 소비자 우롱?
지포스 900시리즈로 승기를 잡고 ‘타이탄 X’로 결정타를 날린 엔비디아쪽도 상황이 복잡하다. 일단 엔비디아 역시 AMD의 ‘피지’ 기반 차기작들을 견제할 제품으로 지포스 900시리즈의 신모델인 ‘GTX 980Ti’를 선보일 예정이다.
문제는 GTX 980Ti의 예상 스펙이다. 업계에선 당초 GTX 980Ti가 기존 980과 타이탄X 사이의 스펙을 가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정보로는 오히려 타이탄X과 동일한 기판과 코어 및 작동속도에 메모리 용량만 절반으로 줄인 제품이 유력하다.
단순히 메모리의 ‘용량’ 차이가 실질적인 성능 차이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는 것이 그래픽카드 업계의 정설이다. 때문에 GTX 980Ti가 타이탄X에서 메모리 용량만 줄인 제품으로 출시되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엔비디아의 플래그십급 그래픽카드인 '타이탄 X'. 신제품 '지포스 GTX 980Ti'는 타이탄X에 근접한 스펙과 성능으로 출시될 전망이다.(사진=엔비디아)
만약 GTX 980Ti가 소문대로 출시되면 이미 타이탄X를 구매한 소비자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기존에 ‘지포스’ 브랜드로 출시된 그래픽카드의 출고 가격이 100만원을 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지포스 GTX 980Ti의 가격은 대략 70만~90만원 사이에서 결정될 전망이다.
성능 차이가 10% 미만에 불과한, 거의 동일 성능의 그래픽카드가 국내 기준으로 최소 40만원 이상 저렴하게 출시되면 기존에 140만원에 달하는 가격으로 타이탄X 구매자들은 최소 40만원 이상의 손해를 보는 셈이다. 이는 자칫 기존 충성 고객을 우롱하는 모양새로 보이기 쉽다. 가뜩이나 타이탄X는 지난 3월 초 출시됐고 GTX 980Ti의 예정 출시일은 6월 초다. 시장 사수에는 성공해도 ‘민심’은 잃을 판이다.
반면 기존에 GTX 980과 타이탄X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대기수요자 입장에선 기존 980보다 조금 더 비싼 가격에 타이탄X급의 성능을 기대할 수 있는 GTX 980Ti는 그야말로 ‘신의 한수’나 다름 없는 제품이 될 수 있다.
차세대 그래픽카드를 놓고 벌어지는 지금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아이폰이나 갤럭시 시리즈 같은 인기 스마트폰의 출시를 앞둔 시장 분위기와 비슷하다. 혼란을 유발하는 각종 루머의 난립이 소비자들의 기대감을 더욱 높이기 위한 고도의 상술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결국 소비자들에게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다. 100% 확실하지 않은 루머에 부화뇌동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필요한 제품에 대해 소신을 갖고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이 최선책이다. 다행히 엔비디아와 AMD 양사의 신제품들은 모두 6월 내에 출시될 전망이다. 한 달만 기다리면 그래픽카드 업계와 소비자들의 혼란을 야기시켰던 모든 것들이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