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히틀러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렇다. 나는 히틀러라는 인간을 좋아한다.
그의 그 군중을 위압하는 설득력과 지휘력을 특히 좋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비판적으로 그의 모든점을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도 인간으로서의 결점이 있고, 이 시대의 사람들은 그 결점을 최악으로 평가해 그를 매몰차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그런 유태인 학살과 같은 잔인한 관점을 배제한다면 난 그와 필적할만치의 존경한 인물이 없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여기에 히틀러 만치는 아니여도 히틀러와는 색다르게 그분들의 정신 , 사상 , 성격등 모든것을 비판할 수 없이 좋아하는 2인물이 있다.
한분은 건축가이자 미술이가이자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이시자 소설가이신 이상 (본명 : 김해경) 선생이시고, 또 한분은 이 분앞에선 아무도 독립운동가라고 말을 내뱉을 수가 없는 우리나라 최고의 독립운동가이신 이육사(가명) 선생이시다.
김해경(이상)선생에 대해서 부터 언급해본다면.......
내가 어렸을 때 짧은 지식과 사고를 가지고 있어도 정말로 좋아하는 소설이 한가지 있었다. 무엇인가 제대로 알지못하면서도 무언가 깊이가 있는 소설 " 날개"
날개란 소설은 삼국지 다음으로 내가 제일 많이 읽었던 책이 아닌가싶다. (참고로 100번은 훨씬 넘은 듯하다.)
이상하게도 본 영화를 또 보는 사람들한테 반발을 하고, 보았던 tv 프로를 또 보는 사람을 이해 할수 없었던 나였지만, 책에 대한 견해는 그와 흡사한 듯 싶다.
그렇다. 이상의 소설 " 날개 " 그 소설을 그렇게 되풀이해서 보고 해설집 같은것도 보았지만 아직도 그 소설의 진가를 알 수가 없다. 대사까지 외울 정도로 그 책을 보왔건만 이상스럽게도 그 때 그 순간 작가가 왜 그 말을 썻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같은책을 되풀이해서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정말 몇십번을 넘게 읽다보면 진정한 작가의 진가를 알게 된다. 어느 구절은 왜 이런말을 썻는지 되뇌여보며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도 있는반면 책이 뚫어라 문구를 보아도 이상스러울 정도의
문장도 많이 있다. 이상의 소설이 특히 그러했으며 날개란 소설이 그러했다. 작품의 평은 일단 짧게 마치고 이상에 대해서 알아보면 내가 그를 그다지도 좋아한 이유는 그의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의 본질성이다.
깊이를 알 수 없기에 그의 친한 친구나 주변의 사람들까지 그가 어떤 인물임을 알 수가 없었다. 또한 시대의 정해진 규칙과 틀에 얽매여 사는 그런 것을 싫어한 그다. 정해진 규칙보다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여 진정한 규칙은 없다 라는 것을 개척한 그였기에 더욱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의 그런 성격은 다분히 작품에도 비추어져서 오감도에는 그 빛을 발했다. 그는 이미 작품 오감도를 비롯한 여러시에서 문장을 쓸 때의 뛰어쓰기의 규칙까지 망각하게된다. 그의 이 규칙을 거부하는 색다른 세계는 그 당시에 새로운 반항을 일으켜 시인들이나 독자들에게 심한 질타를 받게 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뀐 지금 이 시점에서 그의 그런 시와 소설은 재평가 받게 되는데.....
<오감도>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疾走)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적당하오.) //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 (1934)
다시 한번 오감도를 되뇌이시고 나름되로 평가해보시길......
藥水(약수)
바른대로 말이지 나는 약수보다도 약주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술 때문에 집을 망치고 해도 술 먹는 사람이면 후회하는 법이 없지만 병이 나으라고 약물을 먹었는데 낫지 않고 죽었다면 사람은 이 트집 저 트집 잡으려 듭니다.
우리 백부께서 몇 해 전에 뇌일혈로 작고 하셨는데 평소에 퍽 건강하셔서 피를 어쨌든지 내짐작으로 화인 한 되는 쏟았건만 일주일을 버티셨읍니다. 마지막에 돈과 약을 물 쓰듯 해도 오히려 구할 길이 없는지라 백부께서 나더러 약수를 길어 오라는 것입니다. 그때 친구 한 사람이 악박골 바로 넘어서 살았는데 그저 밥 국 김치 숭늉 모두가 약물로 뒤범벅이었건만 그의 가족들은 그리 튼튼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 먼저 해에는 그의 막내 누이를 폐환으로 잃어 버렸읍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은 미신이구나 하고 병을 들고 악박골로 가서 한 병 얻어 가지고 오는 길에 그 친구집에 들려서 내일은 우리 집에 초상이 날 것 같으니 사퇴 시간에 좀 들러달라고 그래 놓고 왔읍니다.
백부께서는 혼란된 의식 가운데서도 이 약물을 아마 한 종발이나 잡수셨던가 봅니다.
그리고 이튿날 낮에 운명하셨읍니다. 임종을 마치고 나는 뒷곁으로 가서 5월 속에서 잉잉
거리는 벌떼 파리떼를 보고 있었읍니다. 한물 진 작약꽃이 파리하나 가만히 졌읍니다.
익키! 하고 나는 가만히 깜짝 놀랬읍니다. 그래서 또 술이 시작입니다.
백부는 공연히 약물을 잡수시게 해서 그랬느니 마니 하고 자꾸 후회를 하시길래 나는 듣기 싫어서 자꾸 술을 먹었읍니다.
"세 분 손님 약주 잡수세욧."
소리에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그 목로집 마당을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어우러져서 서성거리는 맛이란 굴비나 암치를 먹어가면서 약물을 퍼먹고 급기야 체하여 배탈이 나고 그만두는 프라그마트즘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나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어떤 여자 앞에서 몸을 비비 꼬면서 '나는 당신 없이는 못 사는 몸이오' 하고 얼러 보았더니 얼른 그 여자가 내 아내가 되어버린 데는 실없이 깜짝 놀랬읍니다. 얘―이건 참 뗑이로구나 하고 3년이나 같이 살았는데 그 여자는 3년이나 같이 살아도 이 사람은 그저 세계에 제일 게으른 사람이라는 것 밖에는 모르고 그만둔 모양입니다.
게으르지 않으면 부지런히 술이나 먹으러 다니는 게 또 마음에 안 맞았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병이 나서 신애―로 앓으면서 나더러 약물을 떠오라길래 그것은 미신이라고 그랬더니 뾰구퉁 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가버린 것은 내가 약물을 안 길어다 주었대서 그런것 같은데 또 내가 <약주>만 밤낮 먹으러 다니는 것이 보기 싫어서 그런 것도 같고 하여간 나는 지금 세상이 시들해져서 그날 그날이 심심한데 술 따로 안주 따로 판다는 목로 조합결의가 아주 마음에 안 들어서 못 견디겠읍니다.
누가 술만 끊으면 내 위해 주마고 그러지만 세사에 약물 안 먹어도 사람이 살겠거니와 술 안 먹고는 못 사는 사람이 많은 것을 모르는 말입니다.
이상 선생의 약수 입니다.
이육사 선생을 언급하자면 정말 그 분의 일대기를 비추어보면 감탄의 연속이다. 오죽하면 일제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고 꼿꼿이 서서 세수를 하셔서 늘 옷을 적시셨을까.... 그 분의 일대기를 쭉 읽어보면서 울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여기서는 그 분의 여러점을 파악하기보다 구체적으로 내 개인적 사례를 예를 들고 싶다.
그 분께서 독립운동가로 대단히 활약하신점은 모든 사람이 알고있는 사실이다. 내가 그 분의 전기문을 읽었을 때 가장 통탄했던 점은 일제에 억압 받았을 때도 아니요, 그 분이 감옥에 잡혀 가셨을 때도 아니다.
제일 분해서 울고 책을 집어 던졌던 부분은 맨마지막 그분의 일대기를 보는 순간이였다. 1944년 이육사 사망 .....
이 짧은 그리 어찌도 그리 한이 맺히던지.....
우리나라의 광복은 1945년이다.
이육사 선생은 그 한많은 인생을 조국의 광복의 염원을 위해 투쟁하셨다. 다른 독립운동가와는 틀리게 적극적으로 일제에 굴하지 않고 투쟁하신 그 분께서 광복을 불과 1년 남겨두고 돌아가신걸 보고 정말 통한이 가득했다. 이런분 깨서 광복을 맞이하고 편안히 순교하셨어야 할텐데..... 과연 그분은 하늘나라에서 우리나라의 광복을 보았을까?
알 수 없는 인간만사 이다......
<이육사 일대기>
1904년(0세) 5월 18일(음 4.4)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당시 원촌동) 881번지에서 진성 이씨 이가호(李家鎬, 퇴계 이황의 13대손)와 허형(許 )의 딸인 허길(許吉)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 어릴 때 이름은 원록(源祿), 두 번째 이름이 원삼(源三), 자는 태경(台卿)
1909년(7세) 조부 치헌 이중직(痴軒 李中稙)에게서 소학 배우기 시작
1916년(12세) 조부 별세, 가세가 기울기 시작, 한문학 수학, 이 무렵 보문의숙에서 수학
1919년(15세) 도산공립보통학교(보문의숙을 공립으로 개편) 1회 졸업
1920년(16세) 안동시 녹전면 신평리 듬벌이로 이사, 부모를 비롯한 가족 모두 대구(남산동62번지)로 이사,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에게서 그림을 배움, 동생 원일(源一)은 글씨를 배워 일가를 이룸
1921년(17세) 영천군 화북면 오동(梧洞) 安庸洛의 딸 일양(一陽)과 결혼,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1921 설립)에서 수학(보습과 과정 - 1922년까지)
1923년(19세) 백학학원에서 교편 잡음(9개월 동안)
1924년(20세) 4월 학기에 맞추어 일본 유학
경찰기록 - 토교쇼오소쿠(東京正則)예비학교, 니뽄(日本)대학전문부,
검찰신문조서 - 킨죠우(錦城)고등예비학교 1년간 재학
1925년(21세) 1월에 귀국,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 이정기·조재만 등과 어울리며 베이징 나들이
1926년(22세) 베이징에서 수학, 광뚱성 광저우 쭝산대학(中山大學)에서 후학기 수학(이활李活 이름 사용)
1927년(23세) 쭝산대학에서 전학기 다니다가 여름에 귀국, '장진홍의거(10월 18일)'에 연루되어 구속됨
1929년(25세) 5월에 석방(12월에 무혐의로 종결). 중외일보 기자
1930년(26세) 1월 3일 첫 시(詩)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이활), 아들 동윤(東胤) 태어나다.(만 2세에 사망) 10월 《별건곤(別乾坤)》에 이활(李活),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 이름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 발표
1931년(27세) 1월에 '대구격문사건'으로 구속, 3월 석방, 잦은 만주 나들이. 3개월 머물다 연말에 귀국. 8월 조선일보사로 전근, 대구지국 근무.
1932년(28세) 베이징, 텐진에 머뭄. 상하이에서 뤼신(魯迅) 만남.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이동하고, 10월 10일에 난징 근교 탕산에서 문을 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학원(學員)으로 입교
1933년(29세) 4월 20일 1기생으로 졸업(26명), 졸업식에 연극 공연, 5월에 상하이로 이동, 7월에 서울로 잠입
1934년(30세) 4월에 {대중(大衆)} 창간호에 평문 [자연과학(自然科學)과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 게재, 3월 22일 군사간부학교 출신 드러나 구속됨(동기생이자 처남인 안병철이 자수한 후 졸업생 연이어 검거됨), 6월 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방(8월 기소유예 확정), 시사평론 다시 집필 시작.
1935년(31세) 정인보 댁에서 신석초 만나 친교,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다산문집(茶山文集)} 간행에 참여, 신조선사(新朝鮮社)의 {신조선(新朝鮮)} 편집에 참여, 본격적으로 시(詩) 발표.
1936년(32세) 7월 동해송도원(포항 소재)에서 휴양
1937년(33세) 서울 명륜동에서 거주, 평문 성격 바뀜(시사에서 문학으로)
1938년(34세) 신석초·최용·이명룡 등과 경주 여행, 가을에 신석초와 부여 관람, 11월 부친 회갑연
1939년(35세) 종암동 이사, [청포도(靑葡萄)] 발표
1940년(36세) 시 [절정], [광인의 태양] 등 발표
1941년(37세) 2월 딸 옥비(沃非) 나다. 폐질환으로 성모병원 입원, 부친상
1942년(38세) 2월 성모병원 퇴원, 모친과 백형 별세하여 원촌 큰집으로 귀향, 7월 신인사지(神印寺址, 옥룡암玉龍庵)에서 요양, 서울 수유리 거주
1943년(39세) 1월 신정에 석초에게 베이징행 밝힘, 한글 사용 규제 받자 한시(漢詩)만 발표. 4월에 베이징으로 감, 충칭과 옌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 세움.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 늦가을에 피검, 베이징으로 압송됨, 베이 징주재 일본총영사관경찰에 구금된 것으로 추정됨
1944년(40세) 1월 16일 새벽, 베이징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여)에 의해 시신 거두어져 장례 치러짐, 원창에게 유골 인계되어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1960년에 고향 원촌 뒷산으로 이장)
1945년 동생 원조가 유시(遺詩) [꽃], [曠野]이 소개됨
1946년 원조에 의해 {육사시집(陸史詩集)} 출판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