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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바울의 사역
행 28:23-31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29 (없음)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행 28:23-31 / 이렇게 해서 그들은 날짜를 정해 두었다가 그날이 되자 많은 사람이 바울의 집에 모였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모세의 다섯 책과 예언서를 통해 예시된 예수에 대하여 가르쳤다. 그의 설교는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24) 믿는 사람도 많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25) 그러나 여러 가지 의견으로 토론을 벌이며 돌아간 그들의 귀에는 바울이 한 마지막 말이 울려왔다. `성령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이 지당합니다. 26) ㄱ) `이 백성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너희가 듣기는 아무리 많이 듣더라도 깨달을 수는 없을 것이다. 너희가 끊임없이 보더라도 그 의미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ㄱ. 70인역 사6:9-10) 27)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귀를 막아 버려라. 눈을 아예 감겨 버려라.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깨달아 내게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여라. 그들이 고침받는 일이 없게 하여라' 28-29)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의 ㄴ)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졌으며 그들이 이 구원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ㄴ. 시66:3,67:2) 30) 바울은 셋집에서 만 2년을 지내며 찾아오는 사람을 친절히 맞아 31)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하였다.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로마에 가고자 했던 것은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 꼭 복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겠다는 명분으로 로마에 갑니다.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23-29)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기 위해서 날짜를 정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지런히 증거 하였습니다(23).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은 로마의 유대인들은 두 가지의 반응을 보입니다. 바울의 말을 믿는 사람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24).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청중들은 분열되고, 서로 맞지 않아서 흩어졌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바울은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증언합니다(사 6:9-10). 마음을 둔하게 하여 귀를 막고,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내용입니다(27).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다가 바벨론에게 망해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와 같이 조상의 완악함을 따라 유대인들도 바울이 전하는 말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달리 복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 청중에게 이 예언의 말씀을 전합니다(28).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30-31) 사도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자기의 숙소에서 2년을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빌립보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합니다. 바울은 순교하기까지 로마에서 자기의 마지막 생명을 주님의 교회를 위해 불태웁니다. 사도행전을 지탱하는 축이 되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는 말씀이 이어져 가는 역사를 사도행전은 담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님에 의해서 복음이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를 지나 로마까지 전해졌고, 오늘날 땅 끝까지 전파되고 있습니다. 1-7장은 베드로와 스데반에 의해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해졌고, 8-12장은 빌립과 베드로에 의해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13-28장은 바울에 의해 로마에까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사도행전은 아직 끝나지 않은 책입니다. 왜냐하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역사는 희생과 헌신 그리고 순교의 역사인 것 같습니다. 스데반 이후 모든 사도들, 그리고 최초 그리스인들, 속 사도들까지 거의 다 순교했기 때문입니다. 그 피가 우리들까지 내려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어 진 것입니다.
적용: 선교의 역사는 희생과 헌신 그리고 순교의 역사인 것 같습니다. 바울과 같은 순교적인 삶의 자세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남은 이야기를 써내려 가시겠습니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때 어렵고 할 말이 없다면 복음을 알고자 힘쓰며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하루 종일 전해도 시간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는 성경을 전체를 통해 예수님 안에 성취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전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누구에게든 성경을 통해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호크마 주석
=====28:23
일자를 정하고...많이 오니 - 본문의 상황은 22 절에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왔던 사람들이(17절) 바울에게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껴 더많은 사람들을 데려왔는지 아니면 처음 만났을때는 상견례(相見禮)만 하고 날짜를 따로 정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로 한것인지 분명치 않다. 하지만 후자일 가능성이많다. 하여튼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숙소에 모여왔고, 이렇게 하여 바울은 로마의 유대인에게 처음으로 복음올 전할 수 있는기회를 얻게 되었다. 혹자는 바울의 숙소를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처음부터 많았거니와 점차 더욱 늘어났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상당히 넓은 집을 얻었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Zahn). 하나님의 나라... 예수의 잎로 권하더라 -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하나님 나라와 예수로 요약하며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핵심적이고 정확 한 증거라고 할수 있다. 복음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다. 복음의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이며 그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현현되었고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확증되었으며 그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것이 기독교의선포이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바울이 먼저 증거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지상 사역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막 1 : 15) 당연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것이었다.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들이 기대해 왔던 유대 민족주의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통해 보여진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것이었다(요 18 :36 ; 고후3 : 17 ; 계 21 : 1). 다음으로 바울이 증거한 것은 예수에 관한 것이었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과 약속이 예수에게서 성취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기독교적 메시야관은 유대인들에게 낮선 것이었고 이해하기도 힘든 것이었으므로 그는단지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해시켜 설득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전하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돈'(* )이 '설복하다'는 뜻을 갖는단어라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28:24
믿는 사람...믿지 아니하는 사람 -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행한 바울의 증언은 노력에 비해 충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사람의 믿는 사람을 얻었다. 대체로 학자들은이때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본다(26, 27장). 유대인 동족(同族)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믿음을 갖게 하려는 바울의 노력이 극히 부분적으로만성공을 거두었던 경우는 본서에 여러 차례 기록된 바이며 (14 : 4 ; 17 : 4 ; 19 : 9)그것에 대해서 바울은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도 않았고 동족을 포기하지도 않았다(롬9-11 장).
=====28: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 -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로마의 유대인들사이에 의견이 갈리고 마침내는 집회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고 흩어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23 : 10에 있었던 유대인들 사이의 분쟁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 사 6 ; 9, 10의 인용으로, 이곳 외에도 신약에서 무려여섯 번이나 인용된 말씀이다(마 13 : 14, 15; 막 4:12 ; 눅 8 : 10; 요 12 : 40 ;롬 11 : 8). 본래 사 6 : 9, 10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바울은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의 본래적 핵심은 이스라엘백성을 향한 예언이었기 때문이다.
=====28:26,27
이 백성에게...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 70인 역의 사 6 :9, 10과 내용이 일치하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본래 이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실 때 그가 어떠한 말을 하여도백성들의 태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한 것이었다. 결국 이 말씀은,이스라엘 백성이 완악하여 이사야의 말을 청종(聽從)치 아니함으로써 마침내는 바벧론의 포로가 되는 것으로 성취되었다. 이제 바울은 그 말씀을 이사야 시대 백성의 후손들에게 적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함과 그에 따른 심판을 말하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이 구원의 복음을(24절) 거부하였기 때문에 그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28절).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바 있듯이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유대인들도구원에 참여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롬 11: 1-12).
=====28:28
구원을 이방인에게로...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 되었으나 그들이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구원은 이방인들에게 보내어졌다. 이것은 바울이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는 논리이며(13: 48 ; 18:6),자신의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22 : 18, 21). 유대인들은 '듣지 않을 것이나'(22: 18), 이방인들은 '들을 것이다'. 그 결과 유대인에게 주어져야 할 구원이 이방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본서에서는 복음이 이방인들 사이에퍼져 나가는 과정과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역하는 것이 평행을 이루면서 기록되고 있는데, 26-28절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결정적으로 확인되면서 하나의 결론부를 이루고 있다.
=====28:29
몇몇 유력한 사본에는 본절이 빠져있으나 (* , A, B, E 등), 어떤 서방 사본에는 "저가 이 말을 마칠 때에 유대인들이 서로 큰 논쟁을 하며 물러가더라" 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것은 후대의 삽입으로 추측된다.
=====28:30
온 이태 - 누가는 구원이 이방인 에게 확산됨을 선언하는 것으로 본서를 종결짓고있다. 그래서 로마에서의 바울의 생황을 간단하고도 대략적인 말로 묘사하고 있다(25-31절). 본절에 의하면 바울은 만 2년 동안 로마에 머물렀는데, 본문의 2년은 석방되기 이전 연금된 상태로 있었던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16절) 이것은 바울에 대한 재판이 2년 동안이나 열리지않고 연기되었거나, 판결이 지연(遲延)되었음을뜻한다. 유대인 고소자들은 재판의 승산이 없고 더구나 재판 과정에서 구체적인 증거없이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고소로 여겨질 때는 그에 대향 응징을 받아야 했던 로마법정의 절차가 두려워 법정 고소 만료일인 18개월이 지나도록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기때문에, 이후 결석(缺席) 재판으 로 진행되어 바울이 무죄 판결을 받아 석방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Ramsay, Bruce). 이 때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61년 중순부터 63년 까지의 기간이었을 것이다.
셋집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도마티'( * )는 '삯'을의미하는 '미스도스'(* )에서 온 말로 바울이 머문 집은 무료 교도소가 아니라, '세'(hire)를 내는 집이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이 집세를 어떻게 부담할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1)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돈으로 지불했다(Ramsay), (2) 장을 만드는 일을하며 번 돈으로 지불했다(Bruce), (3) 빌립보교회에서 현금을 보내주어지불할 수 있었다(빌4:18, Knowling) 등의 견해가 있으며 이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성을 갖는다.
영접하고. - 이에 해당하는 혤라어 '아페데케토(* )는 '아포데코마이( * )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바울을 찾는 사람들이 그치지 않고 계속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 때 찾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주종을이루었으리라고 추측된다(Wendt).
=====28:31
담대히...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 바울은 자기를 방문 하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여 복음 즉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쳤다(23절 주석참조). 그리고 로마 당국은 바울의 그러한 선교 행위를 방해 하지않았다. 누가는복음이 로마 당국의 방해을 받지않고 계속 전파 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Haenchen).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방해했던 반면(21 ;27-36; 23:1-15), 로마에서는 복음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전파되었다. 이것은 바울에게주어진 소명과 주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22:21 ;23 : 11). 당시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에서 복음이 성공적으로전파되기 시작 했으며, 누가는 본서를 매우 간략하게끝을 맺고 있지만, 마침내 복음은 로마와 전세계에 퍼져나가게 될 것을 내다보는 원대한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
< 설 교 >
사도행전적 비전
하용조 목사 / 행 28:23~31
최근에 저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한국에 들어와 불법 체류자가 되어 경범죄로 구치소에 갇혀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면회 오는 사람도, 영치금을 넣어주는 사람도 없이 외롭게 쓸쓸하게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이 찾아와 “목사님, 교회가 그들을 돌봐줘야 합니다. 교회가 찾아가 함께 교제를 나눈다면, 그들은 외국에서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게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과일 하나와 소액의 영치금이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위로가 될 것으로 봅니다. 상대방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용기를 주는 것이 바로 감동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감동
감동은 쾌락과 다른 것입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감동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순화시키고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감동입니다. 인간은 감동을 받으면 분노, 미움의 감정마저 풀게 됩니다. 강하게 내세우던 주장도 서서히 양보하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감동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7, 28장 말씀에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결박당한 채 간수의 호위를 받으며 배를 타고 로마로 향합니다. 도중에 갑자기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과 함께 행선하던 사람은 모두 276명이었습니다. 바울을 비롯해 그를 호위하는 간수도 있었고 상인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서운 광풍을 만나 해도 달도 별도 볼 수 없는 암흑의 상태에서 14일 동안 바다 위 배 안에서 지내게 됩니다.
아마 그들은 죽음과 같은 공포감으로 인해 질식한 상태였을 겁니다. 무서운 파도와 거센 비바람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모든 짐들을 바다에 던져버린 상태라 먹을 것도 하나 없이 절망적인 상태로 지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담대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련한 사공도 아니고 훈련된 군인도 아니었습니다. 곧 죄수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끌려가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가 바다 위에서 대작하는 광풍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도행전 27장 23절에서 25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어 봅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에게 감동 받은 사람들
광풍을 만나 엄청난 공포감 속에서 모두 혼비백산한 상황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자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함께 행선했던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안심할 것을 일러줍니다. 바울의 위로를 받은 사람들은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결국 배는 멜리데 섬에 닿았습니다. 선체는 파선 직전의 상태였지만 행선했던 사람들은 완전 초죽음 상태로 전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떨고 있었지만 바울에게 큰 감동을 받고 있었습니다.
멜리데 섬에 살고 있던 토인들은 죽음의 바다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을 환대해 주었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차서 불을 피워 주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한 뭇나무를 불에 넣자 독사가 튀어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토인들은 바울을 향해 살인자라고 했습니다. 풍랑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벌을 받아 결국 죽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이 붓거나 죽지도 않자 토인들은 마음을 바꿔 바울을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멜리데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가 바울의 일행들을 사흘이나 유숙하도록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들어가 안수하고 기도하자 토인의 아버지는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런 기적은 사도행전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세계 각 처에 나가 있는 선교사님들 사이에도 많이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고 여호수아 선교사님은 소아과 의사였습니다. 고 선교사님은 고막이 터져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들이 많은 지역에서 사역했습니다. 그에게는 부인과 중보기도 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통성 기도를 하고 나면 아이들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인은 자신의 남편이 이비인후과 의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세밀하게 진단할 수 없었지만, 소견대로 의술을 펴면 아이들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버블리오의 아버지를 낫게 해 주자, 그로 인해 토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감동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거센 광풍에서도 살아난 감동이 있습니다. 둘째는 뱀에 물려도 죽지 않는 감동과 안수로 병을 낫게 되는 감동이 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을 믿게 되는 감동이 있습니다.
광풍은 잠잠해지고 모든 정황은 정상 상태를 되찾았으며 다른 배를 얻어 타고 로마로 향하게 되었지만, 바울은 여전히 죄수라는 타이틀은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간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로마로 향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해 그곳에 있던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방문객들에게 간증도 하고 성경 말씀도 증거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의 줄거리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진정한 비전은 감동을 주는 것
진정한 비전이란 쾌락이 아니라 감동입니다. 감동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적 비전을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도행전적 비전이란 땅의 감동이 아니라 하늘의 감동이며, 순간적 감동이 아니라 영원한 감동인 것입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도착했지만 그에 대한 재판 일정은 잡히지 않습니다. 그는 형사범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신 구속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로 지내고 있습니다. 간수는 일정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바울에게 달리 제재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다소 여유를 자질 수 있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우거하는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날짜를 정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바울과 삶의 패턴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나라의 일로, 기업체의 업무로, 개인적인 목적으로 세계를 여행하면서 이상한 일을 경험합니다. 배, 비행기, 기차, 자동차 안에서 예기치 못한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에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저는 차를 타고 가다가 이장희 형제를 만나 길거리에서 영접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한 계획도 없이 그 분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중에 저는 열심히 사영리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성령님의 감동을 입고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안전을 위해 잠시 차를 세우게 하고 영접 기도를 한 후에 다시 운전하게 했습니다. 저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저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도착해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그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로마에서 일정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예기치 못하게 틈틈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만들어 갑니다.
감동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바울은 우거하던 집에서 방문객들을 상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가르치는 바울이나 배우는 사람들 모두 상당히 흥분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으로 접촉하게 되면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때로 밤을 지새우며 성경을 읽기도 하고, 때로 자다가 일어나 기도도 하게 됩니다. 그 현상은 어떤 분께서 만져 주시고 함께 해 주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억지로 예수님을 믿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습니다. 마지못해 찬송하고 설교 듣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불같은 심령이 되어 찬송하고 기도하며 성경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이런 흥분의 상태로 바울은 로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강론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르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둘,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구약 성경 전체 내용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 오경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항상 그것을 연구하는 자세를 견지합니다. 셋,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에 대해 세 가지 핵심 주제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주제로 하든지 설교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성경 말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를 포함해야 합니다.
흔히 설교를 통해 헛소리를 많이 합니다. 성경 말씀을 가르친다고 해 놓고 그 핵심이 오락가락하는 것도 보게 됩니다. TV 뉴스의 사설이나 신문 기사로 설교하면 안 됩니다. 설교는 수필이 아니며 명상은 더욱 아닙니다. 설교는 기쁜 소식이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전파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입니다.
바울과 방문객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씀을 가르치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들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나 선교사님만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설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성경 말씀을 이야기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면, 목사나 선교사라는 타이틀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적 비전입니다. 24절 말씀을 봅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세상에 복음이 전해졌다고 모든 사람들이 믿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매우 객관적인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한쪽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지만, 본문에선 복음을 전하자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곧 은혜이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요? 곧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로 믿는 것입니다. 잠도 못 자고 새벽부터 일어나 세수하고 단장한 후 교회에 오면 주차도 제대로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은혜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은혜이고 교회에 나오는 것도 은혜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믿지 못할 이유가 더 많습니다. 이성적으로 따진다면 못 믿을 게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그분의 크고 놀라운 은혜 때문입니다. 25~27절 말씀을 읽습니다.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고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떠올립니다. 25절에서 27절까지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자유 의지가 절묘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아시고 사도 바울과 같은 전도자를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깊은 뜻은 파송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이유도 복음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3절에서 15절까지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이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게 되는데, 믿지 않으면 어찌 구원이 있으며 보내지 않으면 어찌 전파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하는 사람을 파송하는 일입니다. 전도자는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듣는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그것까지 전도자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복음 전파가 ‘사도행전적 비전’
우리는 복음 전도자를 세상 끝까지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해야 합니다. 택함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그대로 믿지만 택함을 받지 않은 사람은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자꾸 두드려 봐야 합니다. 사람이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28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바울이 로마에 가지 않았더라면 로마에 있던 백성들은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믿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를 거쳐 서머나까지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듣지 못하면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죄인이냐 아니냐, 재판을 받느냐 못 받느냐, 수감 되느냐 마느냐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부탁하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의 발걸음이 곧 비전이었습니다. 우리가 병들고 수모를 받으며 병신이 되고 바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복음을 전파할 수만 있다면. 그 길로 걷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적 비전’입니다.
이번에 ACTS 29 헌금에 일만 명이 넘는 성도님들이 참여해 165억 원을 작정해 주셨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어려운 때에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강요한 것도 아니고 기도를 부탁했는데, 성도님들이 마음을 모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헌금으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선교센터를 건설하며 비전교회와 선교지교회 그리고 협력교회를 돕게 됩니다. 또 건강한 세상을 꿈꾸는 일에 헌금을 사용할 것입니다.
저는 ACTS 29 헌금을 통해 세 가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 비전은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도 뛰어넘는 것이 비전인 것입니다. 둘,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은 역경을 극복하려는 열정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셋, 개인의 힘보다 함께 하는 힘이 파급 효과가 더욱 크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남양주교회가 세워집니다. 또 경기도 동탄과 평택에 교회 설립이 준비 중입니다. 그리고 일본에 나고야교회, 중국 모처에 3개 교회, 미국 포틀랜드에 협력 교회가 설립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목사님들은 모두 그곳으로 가셔야 합니다. 가서 전하고 나눠줘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우리가 조금 적게 갖더라도 잘 훈련 받은 좋은 목사님들을 보내야 합니다. 그것이 비전이고 사도행전입니다. 성도님들의 마음에서 사도들의 행적들로 꿈틀대기를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속편의 주역이 되자
성흥모 목사 / 행 28:23~30
여러분의 아버지는 구원받았습니까? 여러분의 남편은 함께 천국에 함께 들어갈 수 있습니까? 우리 집안에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혹 없습니까?
우리는 오늘부터 한 주간 총력전도주간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선지자 에스겔이란 분을 만나게 됩니다. 에스겔이란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읽게 됩니다. 에스겔2장에서 하나님께서 “보내노라”는 말씀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고하라”는 말씀이 여러 차례 나오고 있습니다. 에스겔 3장에서는 에스겔을 민족의 파수꾼으로 세우신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고 있습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겔 3:18)라고 하셨습니다. “그 악인은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그 악인은 자신의 악한 행실 때문에 죽을 것이지만 그 사람의 죽은 책임은 내가 너에게 묻겠다.”라는 말입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그 사람의 죽은 책임은 내가 너에게 묻겠다.”라고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원문을 찾아보았는데, 분명히 “피 값을 네 손에서 찾겠다” 요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로 가기를 소원한 것은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6)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사도행전 속편의 주역이 되자”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예수님의 일생을 가지고 누가복음을 기록하였고,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사도들의 행전을 기록하였습니다.
신약성경의 모든 저자들이 한 책을 기록하고 마칠 때에는 분명히 마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록하였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를 마치는 사도바울은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의 여러 저자들은 한 책을 마친다는 분명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모든 성경들이 다 그렇습니다. 무슨 글을 쓰던지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고, 마지막으로 마치는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맺고 끊는 맛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분명히 마치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더 쓰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후에 장절을 나누었지만, 저자는 분명히 29장 30장을 쓰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저자는 분명히 끝맺고 있지 않습니다. 사건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저자인 누가는 바울의 생애에 대하여 마지막을 기록하지 않고, 한 가지 일에 전념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그대로 붓을 놓은 것 뿐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저자인 누가가 교회의 역사에 대하여 계속 기록하려고 하였다는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사도행전이란 복음의 확산을 기록하려는 것이기에 행28장의 사건으로도 충분히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는 말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도행전의 역사 치고는 너무나 아쉽게 끝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자인 누가가 제 3편을 기록하려고 했다는 말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에서 2년 동안 지내던 형편도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그 이후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의 행적도 행28장으로 끝나고 그 다음의 행적은 전설적인 이야기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바울의 공식적인 재판은 로마에 도착한 2년 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죄판결을 받아 석방되어 3-4년 더 활동하다가 재차 감옥에 투옥되었고, 사형 당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복음전도의 사명을 감당하고 좋은 일꾼을 배출하면서 칭찬받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가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요, 주님이 꿈꾸시고, 주님이 이루려고 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속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누구입니까? 여러분, 자신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에 와서 단 한번 살고 가야 하는데,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교회다운 교회, 가장 아름다운 교회에 속하여 진실하게 살다가 가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예수님을 가장 진실하게 믿다가 가야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고, 어떤 일도 감당하지만, 예수 잘 믿는 일이 아니라고 하면 그런 것은 관심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적인 속한 일들, 내가 안 해도 될 수 있는 일들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우리 주님이 기뻐하실 일만 찾아 힘써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 주님이 만족하시고, 우리 성령님이 기뻐 춤추시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적인 교회요, 주님이 세우신 교회인 것입니다.
저는 제 자랑이 아니라, 목사로서, 언제나 우리 영주교회만을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잠을 자면서도 우리 영주교회, 일어나면서도 우리 교회, 길을 가면서도 언제나 주님의 몸된 영주교회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상적인 교회를 만들 것인가?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와 같은 초대교회를 이룩할 것인가를 놓고 고심하고 있습니다.
교회만이 그것은 이 세상을 구원하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있다면 그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외에는 다른 방안이 없습니다. 국가 조직을 가지고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 사회의 교육을 가지고도 되지 않습니다. 법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교회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잘 깨닫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교회로서의 사명만 제대로 감당하면 우리 사회를 구원할 수 있고, 이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교회들이 속한 지역 사회로부터 모두다 칭찬을 듣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도 교회는 우리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교회만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아주 쉽고,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알아듣기 쉬운 복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에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2:21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요엘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요엘2:32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얼마나 쉬운 말씀입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시는 복음인데, 이것을 듣지 못하여 멸망당한다고 하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한 영혼이 귀하고, 소중한 것을 생각합니다. 온 천하보다도 귀한 영혼이라고 하면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많은 돈을 들여서라고 그를 초청하여 구원에 관한 말씀, 소망의 이유를 들려줄 수 있다면, 무엇이 아까울 것입니까? 다음 주일에 초청하시는 분들을 잘 영접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다만 여러분의 초청하시는 노력만 남아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끌려온 것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로마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하여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끌려왔습니다. 그는 12-22절 말씀에서 로마시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자기가 유대인으로 잡혀온 경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저자인 누가와 아리스다고 그 외 몇 분의 성도들이 함께 로마에 왔습니다.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끌려간 것이요, 저자인 누가는 지금 바울의 건강을 염려하여 유대인의 가이사랴에서부터 로마에까지 동행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에 살고 있는 유대인 대표들에게 자기가 유대인으로 로마에 잡혀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전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왔을 때에 그를 지키는 군인 한 사람이 매일같이 교대로 따로 붙어 있고, 사람들을 만나도록 허락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사흘 후에 유대인들 중에서 원로들을 청하여 자기가 유대인으로 잡혀온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20절의 말씀 때문에 바울은 로마에 잡혀 왔다고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여기서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곧 인류의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류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간절히 소원하고 갈망하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메시아의 소망입니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흑암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아를 보내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소망이요,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 되십니다. 바울은 본래 예수는 이단자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잡아들여 배교하게 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려고 핍박하였는데, 그 예수님에게 붙잡혀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쇠사슬에 매여 로마에까지 끌려 온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정말 쇠사슬에 매인 채로 끌려왔습니다. 바울은 즐거운 여행으로 로마에 온 것 아닙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곧 인류의 소망이 되십니다. 이 세상에 조금 잘 사는 것이 소망입니까? 이 세상에 명예를 가지는 것이 소망입니까? 이 세상에 잘 생긴 사람을 붙잡는 것이 소망입니까? 건강하면 우리가 영원히 건강할 것입니까? 진정한 소망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 예수뿐이십니다.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인류의 유일한 소망, 영원한 소망은 우리 구주 예수님뿐이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의 안보하심,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영광을 교회를 통하여 느낄 수 있었고,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가족이요,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 시대의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 우리의 희망이요,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8:23-31을 통하여 사도바울이 마지막까지 힘쓰던 일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였습니다. 찾아온 사람들을 권하였다는 말은 설득하였다는 말입니다. 혹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 믿지 않는다고 하여 영원히 믿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실망할 것이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한번 말씀을 들은 것을 가지고 믿음이 생기는 사람도 있고, 여러 번 들어야 믿음이 생기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본다고 하지만,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귀로 듣는 것이 둔하고, 보는 눈이 감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이방인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데,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질 줄 알았고, 그들 이방인들이 잘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2년 동안 바울은 셋집에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고,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사였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파송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그러면 바울만 파송을 받았고, 우리는 말씀만 받으라고 하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도 역시 파송된 자요,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하라고 보냄을 받은 사도들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생명은 예수였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가치관, 그의 목표, 그의 사는 목적, 그가 추구하는 사명 모두가 예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건드리기만 해도 예수님이 흘러 넘쳤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였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전파하였습니다.
로마에 오면 즉시 황제의 재판을 받게 하시지 않고, 황제의 친위대 뜰에 있는 한 셋집에서 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그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자기를 구금하고 있는 군인들, 자기의 손과 함께 묶여 있는 군인들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친위대의 군인들은 바울과 함께 사슬에 그 몸을 매고, 함께 하루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공인될 무렵에 어느 계층의 사람들이 많이 믿었느냐 하면 군인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친위대 군인들에게 많이 전도한 끝에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2년 동안 군인 전도할 수 있도록 재판을 연기해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바울은 2년씩이나 재판을 연기하면서 군인들에게 전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로마에 가보면 사도 바울이 마지막 갇혀 있었다는 감옥을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은 마메르티네 지하 감옥 (Carcere di Mamertino)인데, 아주 좁은 방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68년 6월 초순 경에 목베임을 받아 죽었습니다. 바울이 참수당한 곳에 세 우물의 교회가 세워져 있고, 그 예배당 안에는 석대라고 하여 바울의 목을 치기 위하여 목을 올려놓은 곳이 남아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참으로 멋진 책입니다. 왜냐하면 끝을 맺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이 없다는 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2년 동안 셋집에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에게서 성경을 배운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울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들을 사람들, 인류의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들은 사람들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죽었지만,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그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스승 바울은 죽었지만, 복음은 점점 더 확산되어서 전 로마를 국교로 만들고 전 유럽을 복음화 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는 죽었지만, 속 사도는 계속하여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은 끝을 맺지 못하고 붓을 놓았지만, 그 후에 계속하여 속사도를 통하여,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을 통하여 교회는 확산되고, 복음은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바울에게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전해듣고, 인류의 소망이 되시는 우리 주님을 믿고 고백한 사람들이 전해주고, 또 충성된 사람들이 전해주고, 그들은 바다를 건너고, 강을 건너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늘 우리 교회,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들려졌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산된 것입니다. 이제는 사도행전의 속편, 사도행전의 후편, 후서를 쓰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9장을 써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사도행전 후서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온 복음이 다시 다른 나라와 다른 지역,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확산되는 것이 사도행전29장이요, 사도행전의 후편을 쓰는 것입니다. 얼마나 재미있고, 성령의 역사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영주교회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위대한 일꾼들이 일어나고, 복음 전파에 목숨을 거는 젊은이들이 나타나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어나고, 우리 시대보다 훨씬 더 잘 믿는 이들이 이 전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인간의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요, 하나님의 교회요, 성령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유일한 약은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우리 교회는 사도행전적인 교회여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잉태된 교회, 주님의 교회요, 예수님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령충만한 교회,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소유를 나누고 도와주어 핍절한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선순위를 복음전도에 두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구원하고 이끌러가는 영적인 리더십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변의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파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어달라고 하셨는데, 이 세계의 땅 끝이 어디입니까? 내가 사는 집, 내가 활동하는 회사, 내가 몸담고 있는 기관, 사업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사는 우리의 현장이 땅 끝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의 열매를 따야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던 결과, 이제는 인도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귀한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을 계속 써 가는 교회
안효관 목사 / 행 28:23~31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쟁의 장본인이었던 독일은 굉장히 비참했다고 합니다. 패배한 전쟁에 너무 많은 것을 쏟아 부은 바람에 국민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작은 오두막집에서 여러 가족이 함께 살아야 했고, 수용소나 임시 막사에서 집단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독일 백성들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절망과 깊은 고통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콜로네(Cologne)라고 하는 도시에 있는 한 교회에서 교회창립 700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700주년이라는 참으로 뜻 깊은 역사를 맞이했지만, 그 교회당은 거의 방치된 폐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창문은 다 깨지고, 기둥은 기우뚱 해서 곧 넘어질 것만 같고, 지붕은 낡아 비가 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후 극심한 가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독일 국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쓰러져가는 그 예배당 건물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고, 700주년이라는 뜻 깊은 역사를 생각해 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교인이 쓰러져가는 그 교회의 창립 700주년을 기념하자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그 소문은 인근 마을을 퍼저나가더니 어느 새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700주년을 기념하는 그날, 폐허된 그 교회에는 3만 명의 독일 국민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700주년 기념예배가 시작되자 오랜 고통과 실망 속에서 눈물 흘리던 그들의 입술에서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힘차게 울려 퍼진 찬양과 함께 오랫동안 막혔던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700년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신들이 이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란 확신이 생겨났습니다. 그리하여 폐허가 되어 쓰러져가던 그 700년 된 교회는 다시금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복구하는 동안 절망에 빠져 있던 독일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감사가 되살아났고, 그 마음으로 ‘새롭게 독일을 건설하자’는 운동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집을 짓기 시작했고, 학교를 짓고, 공장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 도시는 위대한 기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뭔가를 시작하는 작은 믿음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기적은 창조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사도행전은 제목에서 밝혀주고 있는 것처럼, 초대교회 사도들이 복음을 들고 사역한 사역의 현장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도행전 전반부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역의 기록이라고 한다면 후반부는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한 사역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의 마지막 사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을 오늘 우리가 읽었는데, 읽으면서 우리는 성경의 다른 책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건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이지만 웬지 마지막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죽음으로 사도행전이 마무리된 것도 아니고, 사도행전의 기록을 마무리하겠다는 어떤 종결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무리하는 어떤 글귀도 없습니다.
사도행전이 종결 문장이 없이 끝났다고 하는 것은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의 사역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도 사실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또 사도 바울이 평생 그의 가슴에 품고 있었던 ‘당시 땅 끝이라고 알려진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싶다’는 그의 열망처럼, 정말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의 신앙적 의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유일한 역사서인 사도행전은 사도행전 28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28장이지만, 사도 바울 이후 복음을 위해서 사역한 사람들이 사도행전 29장을 계속 써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13절에 보면, 사도들의 이름이 하나 하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는 장면을 이야기하면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이름이 더 이상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그들의 이름이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느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사도행전에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사역에 충성했고, 신앙전승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대로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복음을 위해서 한 일이 하나도 없다면 그들이 순교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들 모두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그 많은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사역을 다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 중에서 몇 명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흔히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한 활동을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이지만, 사실은 사도들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도록 역하하신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에 ‘성령께서 역사하신 성령사역의 기록’이란 의미에서 ‘성령행전’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사도들, 그리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사역했던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대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목숨을 걸고 사역했습니다.
그 성령께서 사도 바울의 마음에도 임하여 감동시키셔서 세계의 중심인 로마를 거쳐 땅 끝인 스페인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열망을 주셨고, 그런 열망을 따라 살아가도록 사도 바울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이르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소 로마에 무척이나 가고 싶었지만 쉽게 그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대적하던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덮어씌운 죄목은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과 율법을 비방했다는 것과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감으로 거룩한 성전을 더렵혔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21:28) 그러나 사실 사도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비방한 적이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동족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심지어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로마서 9:3) 그런데 동족을 비방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비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단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을 가지고는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을 뿐입니다.
아무튼 그런 오해들로 인해서 사도 바울은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분위기는 사도 바울을 곧 죽일 기세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는 - 사도 바울을 죽이기 위한 40인의 결사대가 조직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로마 시민권을 사용하여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말합니다. 당시 로마 시민은 어떤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다고 생각되면 황제에게 고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재판이 일시 중지되고 로마에 가서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생명의 위협를 느낀 사도 바울은 로마 황제에게 고소했고,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서 미결수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오게 된 것입니다.
비록 죄수의 몸으로 오긴 했지만, 사도 바울은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죄수의 몸으로 행동에 제약을 받긴 하지만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30절에 의하면, 로마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자유가 허락된 셋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바로 앞인 16절부터 보면, 자기가 머물던 셋집으로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사도 바울이 가장 먼저 했던 것이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미결수입니다.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재판 결과에 따라서 자유의 몸으로 풀려나 복음을 전할 수도 있고, 구금되어 형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재판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결이 나도록 부죄를 입증하기 위한 변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재판에서 변론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의 관심은 하나 -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유의 몸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지금 형편에서 기회가 닿는 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 많은 유대인들이 날짜를 정하여 다시 사도 바울을 찾아왔고,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는 사람도 있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에 머물러 있는 2년 동안 자기 집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셋집에서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어떤 내용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본문 마지막절인 31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오늘 우리 교회는 창립 55주년을 맞았습니다. 창립기념주일을 맞아 우리는 다시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기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주셨는가’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게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이란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것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 우리를 위해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 십자가의 죽으심, 죽음 권세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것, 승천하신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언젠가 이 땅에 재림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것까지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에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고,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55년 전에 우리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당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예배당 건축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최고의 사역은 결코 아닙니다. 예배당 건축이 우리 교회의 목표가 아닙니다. 예배당은 도구일 뿐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한 도구, 복음을 전하기 위한 도구, 교제하고 지역을 섬기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 교회가 복음전도의 사명을 망각해 버린다면 우리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도구여야 합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초기지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된 사람들이어야 하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가는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위해서 부르시는 사람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좋은 가문에, 사회적인 지위도 좋고 배움도 많은 사람은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대부분 하나님과 동역했던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신, 그래서 사도로 세우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하시고 복음을 증거하게 하신 12명의 제자들은 모두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그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다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큰 역사를 이루어가셨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그리고 복음의 역사는 사도 바울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이 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에 있었습니다. 바나바가 없었다면 사도 바울도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그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의사 누가가 없었다면 사도 바울의 사도행전의 역사도 없었습니다. 선교여행에 동행했던 실라,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 생명을 바쳐 바울의 사역에 헌신했던 에바브라 디도, 사도 바울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도망처 온 노예였다가 사도 바울을 만나 신실한 동역자가 된 오네시모 등등. 그 이름을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헌신된 사람들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교회가 당한 환란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가장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이라는 것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일 수 있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로서의 사명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 바울을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이 시대에 진정으로 위대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예배당을 훌륭하게 지은 교회가 위대한 교회가 아닙니다.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인 교회가 위대한 교회일 수 없습니다. 진정 위대한 교회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사명을 잊지 않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복음을 거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교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위대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당을 잘 짓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의 숫자보다 몇 배, 몇 십배, 몇 백배 더 많은 성도가 모이는 교회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이 고난의 삶일지라도,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복음전도에 최선을 다할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위대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위대한 하나님의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들로 쓰임받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분명한 신앙고백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미국의 에이든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 목사님이 쓴 책 가운데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토저 목사님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를 아주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멈추게 한 세 가지의 덕목이 있다.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디선가, 이 사람들이 아닌 어떤 사람들을 축복해 주시리라고 믿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이 하나님의 일을 멈추게 한 세 가지 수면제이다.”
우리의 잘못된 신앙을 세 가지로 지적합니다. ‘지금 축복하신다’가 아니라, ‘언젠가 축복해 주실 거야’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그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오늘 내 삶의 현장인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서 축복해 주실거야’라는 믿음이고, 세 번째는 ‘바로 나’가 아닌 ‘어떤 누군가를 축복하실 거야’라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긴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로 여기에서 나에게 복을 주시고, 나를 통해서 역사하실 것이란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저 두리뭉실하게 ‘언젠가 축복하시겠지, 어디선가 축복하시겠지, 누군가는 축복을 받겠지’라고 생각합니다. 토저 목사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멈추게 하는 수면제라고 말합니다. 이건 분명 불신앙입니다. 신앙 같지만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께서 오늘 여기에서 나를 축복해 주실 것도 믿으십니까? 그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오늘 여기에 있는 바로 나를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신다는 사실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있는 누군가가를 쓰시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바로 나를 쓰시기 원하십니다. ‘언젠가는 쓰시겠지’가 아닙니다. 지금 내 모습 그대로를 쓰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찾으십니다. 복 주실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역에 동역할 일꾼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교회를 통해서 사도행전을 계속 써 나가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계속 써 나갈 오늘의 사도 바울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의 누가, 오늘의 디모데, 오늘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오늘의 오네시모를 찾고 계십니다.
어느 병원에서 한 환자에게 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이틀밖에 살지 못합니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데,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연락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환자가 의사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다른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정말 믿을만한 의사, 정말 신뢰가 가는 의사를 만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그렇게 외치고 있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당신 말고 진짜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싶다고 말입니다. 당신 교회 말고 다른 교회였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이건 비극입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신뢰받는 그리스도인, 세상에 신뢰를 주는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교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들이 사역하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요, 오늘 우리 시대가 간절히 찾는 교회입니다.
꿈꾸는 교회 춤추는 교회
사도행전 28:30-31 / 하용조 목사
올해 우리 교회의 비전은 ‘꿈꾸는 교회, 춤추는 교회’입니다. 저는 교회를 생각하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편, 세상에서 비난을 받는 교회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병들어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의 진정한 모습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고, 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진정한 교회를 ‘꿈꾸는 교회, 춤추는 교회’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존재하는가?
교회에 대해 몇 가지를 질문하고 싶습니다.
❶ 세상에 진정한 교회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진정한 교회는 사도행전 시대에도, 2,000여 년이 지나 다양한 욕구가 분출되는 오늘날에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❷ 교회가 이 시대의 진정한 희망이고 대안일까요? 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희망이고 대안입니다. 교회가 살면 세상이 살고, 교회가 죽으면 세상도 죽습니다.
교회가 많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아도 세상은 어둡고 복잡하기만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내용을 상실한 채 형식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연히 일어나야 교회를 다시 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살아있는 교회를 실현해야 합니다.
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교회가 대안이라고 믿습니다. 정치계에 몸담고 있는 성도는 많은 비난을 무릅쓰고 정치 현장에서 순교하겠다는 각오로 정직하게 정치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정치가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은 정직하고 투명하게 기업을 운영해야 합니다. 탈세하지 않고 노동력 착취하지 않으며 성실하게 사업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대학교 총장님, 교수님, 교장 및 교감 선생님 그리고 일선 학교의 선생님들이 계실 줄 압니다. 이런 분들로 인해 한국의 교육계와 학교가 크게 변화할 줄 믿습니다.
교회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대안이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권위주의를 버리며 물질 왕국을 만들지 않는다면, 세상의 빛이 되고 희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상적인 교회의 모형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교파나 교단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Kingdom Church)를 교회의 이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세상에 오신 것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이 세상에 온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의 특징
이제 사도행전의 교회를 살펴보면서 온누리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아보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열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성령으로 잉태한 교회
첫째, 성령으로 잉태해 성령 사역하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것처럼,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공동체요,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세례가 임한 것입니다.
성령의 경험이 없고, 성령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사도행전적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교인들이 많고 건물이 크다 해도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다면 사도행전적 교회가 아닙니다.
2) 서로 통용하는 예수 공동체 교회
둘째, 예수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장 42~47절 말씀을 읽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의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예배를 드리며,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극장이 아니고 헌금은 입장권이 아닙니다. 모두 함께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배우며, 찬양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교회입니다. 현대에서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사회, 예수님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3) 기적을 체험하는 교회
셋째,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3장 6~10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여서 희망도 미래도 없던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걷고 뛰었습니다. 영적 앉은뱅이, 영적 청각 장애, 영적 백치가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찬송하며 예배를 드림으로써, 날마다 뛰고 들으며 깨닫는 기적들이 교회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교회입니다.
4) 고난에도 복음을 전하는 교회
넷째, 고난 중에도 계속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4장 1~4절을 보겠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을 환영하지 않고 잡아다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리고 칼로 찌르거나 성전의 높은 꼭대기에서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고난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주십니다. 곧 ‘고난당하는 교회(Suffering Church)’인 것입니다. 교회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5) 재물을 나누는 교회
다섯째, 재물을 나눠 쓰는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 4장 32~35절 말씀을 봅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초대 교회는 물질에 대한 유혹을 초월했습니다. 교회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습니다. 배운 자도 있고 배우지 못한 자도 있습니다. 건강한 자도 있고 건강하지 못한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개인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물질을 초월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6) 정직, 순결, 거룩한 교회
여섯째, 정직과 순결과 거룩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5장 1~4절 말씀입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초대 교회에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땅을 팔아서 얼마를 감춘 후에 헌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헌금의 액수에 관심이 없습니다. 부부가 원해서 땅을 팔았고, 팔고 나서 받은 땅 값도 그 부부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부를 냈다’고 말해 하나님과 사람을 속인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교회가 정직과 순결, 거룩을 원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교회가 많은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는 게 아니라, 중심을 보고 취하십니다. 저는 온누리교회가 진실하고 정직하며 내적 성숙이 있는 사도행전적인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7)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교회
일곱째,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6장 3~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교회의 리더십은 한 사람이 독점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이 나눠 가집니다. 교회의 주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모두 조연에 불과합니다.
교회에서 사람이 영광을 받으면 죽은 교회가 되고 맙니다. 사람 중심의 교회가 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교회의 리더십은 나눠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시대를 이끌 수 있는 리더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8) 이방인을 품는 교회
여덟째, 이방인을 가슴에 품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0장 44~48절을 읽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로마의 군대 장관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세례를 줄 수 없다며 거부했다가 하나님께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런 후에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백인과 흑인, 동양인과 서양인,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이들은 모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1, 2, 3차 전도 여행을 통해 이방인들을 찾았습니다. 저는 한국이 복 받는 방법은 이 땅에 찾아온 이주 노동자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복을 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불법 체류 이주 노동자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많은 문제들이 있겠지만, 우리는 그들을 포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힘없고 약한 자를 찾고 소외된 자를 품어야 합니다.
9)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교회
아홉째,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3장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적인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가 선교지로 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이방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비전과 열정이 있습니다. 서울 시내는 우리의 선교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울의 선교사들입니다. 서울의 환경, 교통, 쓰레기 문제 등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바로 선교지입니다. 우리는 가정의 선교사이고 직장의 선교사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순교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8시간 일하라고 한다면 10시간 일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합니다. 수당을 주지 않아도 기쁜 마음으로 밤새워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선교사의 마음입니다. 서울시에 사는 사람들이 서울을 변화시키고, 대전에 사는 사람들은 대전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10)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교회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교회, 새로운 교회를 낳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8장 30~31절 말씀입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사도들의 행적은 끝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28장 끝 부분에 보면, 사도 바울은 2년 동안 셋집에서 성경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찾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서로 왕래해도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과 2년 동안 성경을 공부한 사람들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분명히 어딘가에 새로운 교회를 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 주님의 기적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9장을 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교회를 낳는 일은 2,000여 년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저는 온누리교회가 사도행전적인 교회의 열 가지 모습을 모두 갖추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교회를 꿈꾸며, 그로 인해 즐겁게 춤추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28장
행 28:30-31 / 박봉수 목사
지구의 자연현상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 가운데 하나가 화산활동입니다. 화산활동이란 지구의 내부 에너지가 지표로 분출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지구의 내부 에너지가 내부 물질을 녹여서 만들어낸 마그마에 실려서 지표면 밖으로 분출됩니다. 이 때 지각에 변화가 생기는데 그 분출되는 자리에 화산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마치 화산활동과 같은 놀라운 영적현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영적 에너지가 분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강림으로 이 땅에 그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변화의 한 복판에 교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 화산활동과 같은 영적 현상의 그 시작에 관한 기록입니다. 성령강림으로 인해 교회가 세워지고 이 땅에 복음의 역사가 시작될 때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그 초창기 이야기를 28장에 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28장으로 종결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 이후 계속되었고 오늘까지 쉬지 않고 계속되어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들은 사도행전 28장 이후를 계속 써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 대열에 서 있습니다. 지금 사도행전 29장을 써 가고 있는 것입니다.
화산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입니다. 지금도 지구 내부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지금도 뜨거운 마그마를 뿜어냅니다. 둘은 역사상 활동 기록이 남아있는 휴화산입니다. 활동했던 시기가 그렇게 멀지는 않지만 지금은 쉬고 있는 화산을 말합니다. 그리고 셋은 사화산입니다. 화산과 같은 모양은 있지만 가까운 과거에 활동한 흔적을 찾기 힘든 그래서 지금은 죽은 것과 같은 화산을 말합니다.
화산이 세 종류가 있듯이 교회도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활화산과 같은 교회입니다. 오늘도 뜨거운 마그마의 운동처럼 성령의 역사가 뜨겁게 나타나 수많은 영적 사건이 일어나는 교회입니다. 둘은 휴화산과 같은 교회입니다. 과거에 많은 활동이 있었지만 지금은 쉬고 있는 휴화산처럼 많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흔적은 있지만 지금은 잠자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셋은 사화산과 같은 교회입니다. 활동한 기록을 찾아볼 수없을 정도로 거의 활동이 정지된 사화산처럼 성령의 역사가 전설처럼 아득한 그래서 거의 성령의 역사가 소멸된 교회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29장을 써 내려갈 때 어떤 기록을 남길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우리 상도중앙교회는 활화산과 같은 교회로 기록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행여라도 휴화산과 같은 교회로 기록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절대로 사화산과 같은 교회로 기록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활화산과 같은 교회로 사도행전 29장을 써 내려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오심에 관한 예언으로 시작됩니다. 1:4-5을 보면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8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언 그대로 행 2장에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마치 화산 폭발 예고가 있은 뒤에 마그마가 지각을 뚫고 분출해서 엄청난 지각 변동이 일어나듯이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갖가지 상상할 수 없었던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기록의 핵심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성령이 임재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활화산과 같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를 두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교회적 차원
성령이 오시면 교회적으로 성령 주도적 역사가 나타납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 보겠습니다. 빌립이 전도할 때의 기록입니다. 8:29절에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8:39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안디옥 교회의 사역에 관한 기록입니다. 13:2절에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13:4절에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에 성령이 주도적으로 간섭하시고 역사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활화산과 같은 교회로 사도행전을 써 내려가려면 우선 성령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마치 풍향계가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부는 지 정확하게 읽어내는 것처럼 성령이 어떻게 인도하시는 지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저 사람들끼리 모여 회의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모아서 교회의 나아갈 바를 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휴화산과 같은 교회가 됩니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면 사화산과 같은 교회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2. 개인적 차원
성령이 오시면 개인적으로 성령 충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몇 가지 예를 찾아보겠습니다. 2:4을 보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고 되어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집사들이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주의 사역을 담당한 모든 사람들이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충만하다는 것은 가득 채워진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한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며느리가 10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었는데 10년 만에 아이를 갖게 됐답니다.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그 기쁨이 권사님의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한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갑자기 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슬픔이 충만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한 사람 안에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무엇인가가 그 사람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을 말합니다. 무엇인가가 그 사람의 존재를 강력하게 지배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이 심령에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그 사람의 심령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그 사람의 존재를 강력하게 지배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교회 봉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가 활화산과 같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사람들의 변화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성령이 오신 뒤에 사람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변화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이 두 가지입니다.
담대함
성령이 오신 뒤에 우선 사람들이 담대해 졌습니다. 원래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에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 때문에 떠나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박해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들에게 성령이 오시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담대하게 사람들 앞으로 나갔습니다.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옥에 갇히고 매를 맞았지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스데반처럼 순교를 당하게 되었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2:12-3을 보면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4:13을 보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6:15절을 보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그렇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사람들이 담대해 집니다. 두려움, 염려, 근심 걱정 다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담대한 사람들 그들이 활화산 같은 교회를 만들어갑니다.
하나됨
행 2장을 보면 성령이 오시자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옛날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을 흩으셨습니다. 하나 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모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오순절 사건으로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하나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한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빈부귀천, 남녀노소 모든 인간적인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하나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별히 2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나눔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마다 가진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쓰게 되었습니다. 자기 가진 것을 내어놓고 서로 나누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저들이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음과 마음 사이의 장벽이 다 무너졌습니다. 함께 모이기를 기뻐했습니다. 매일 모여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함께 말씀을 나누며 함께 기도하며 함께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사람들이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 대화가 단절되고, 마음이 갈라지고, 뿔뿔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서 대화가 시작됐습니다. 마음이 모아졌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진정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생각도 하나, 마음도 하나, 헌신도 하나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가 활화산과 같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셋째, 복음의 전진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성령이 오신 뒤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모두가 주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저들이 주님의 일꾼이 되어 한 일은 두 가지입니다.
나아감
마 28:19절 이하를 보면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는 명령입니다.
행 1:8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성령이 오시면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을 대로 성령이 오신 뒤에 초대교회 사역자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세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이 Outreach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추진합니다. 때로는 국내로 또 때로는 국외로 활발하게 나아갑니다. 우리 교회도 활발하게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 청년들이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강릉으로 나아갔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린이들에게 나아갔습니다. 제가 격려차 가보았습니다. 공원에 큰 이벤트 마당을 만들었습니다. 어디서 왔는데 수많은 아이들이 몰려왔습니다. 신나게 한 바탕 물놀이를 했습니다. 맛있는 간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가슴으로 전하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강릉 땅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8월에는 저 중국 땅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중국의 오지 감숙성에서 중국교회 최초로 여름성경학교를 개최하게 됩니다. 교사 강습회도 엽니다. 청년 수련회도 하게 됩니다. 그곳에 또한 놀라운 성령의 바람이 불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담장을 쳐놓고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끼리만 우리끼리만...” 곤란합니다. 아파트 단지로, 직장으로, 농어촌으로, 중국으로, 전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활화산과 같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증거함
행 1:8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오신 뒤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주된 목적은 바로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행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너무도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3:12절 이하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를 증거한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나아가서 병도 고쳐주고, 배고픈 문제도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외로운 사람 돌봐주어야 합니다. 사회의 구석구석 어두운 곳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예수의 증인이 되려 함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예수라는 이름입니다. 그 분을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저들이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의 능력으로 저들이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성도들이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위해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열심히 예수를 증거할 때 우리 교회는 활화산과 같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우리 교회가 창립된 지 48년이 되는 날입니다. 지금까지 활화산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앞으로 더욱 불타는 활화산처럼 뜨겁게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더욱 왕성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교회를 통해 복음이 더욱 전진해야 합니다.
문은 열렸다
엄기호 목사 / 행 28:30~31
근대올림픽 발상지인 아테네에서 108년 만에, 역대 최대인 202개국 1만 5천 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제28회 아테네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세계인의 화합과 평화를 지향하는 올림픽의 문이 그 발상지인 아테네에서 다시 열린 것입니다.
문이 열린다는 것은 구별된 공간과 공간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익숙한 공간에서 새로운 세계로 옮겨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장소를 이동하거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반드시 문을 통과해야 하듯이 우리 삶에도 우리가 통과해야 할 다양한 문이 준비되어 있으며 또 열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바울의 삶에는 어떤 문이 있었고 그는 어떤 문을 열었으며, 어떤 문을 통과했고, 닫힌 문을 어떻게 열었는지 그 비결을 함께 나누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통과해야 할 문
바울은 그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통과해야 할 문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항상 자신을 ‘그리스도 주 예수의 종’,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과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막문을 통과해야 했듯이 우리는 예수라는 문을 먼저 통과해야 합니다. 구약의 성막은 하나님께서 임재한 곳,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거하는 곳이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성막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막문을 통해야만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 자신을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바로 구약의 성막문을 말합니다.
이 성막문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만들어졌는데, 여기서 청색은 생명을 의미하는 색으로써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구원의 문임을 상징합니다. 자색은 왕권을 의미하는 색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분임을 상징하며, 홍색은 피를 의미하는 색으로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늘게 꼰 흰색 베실은 부활을 의미하는 색으로써 성결하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또한 구약의 성막문은 오직 하나의 문으로 크게 되어있었습니다. 하나의 문이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큰 문은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고 또한, 누구든지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도 들어와야 합니다. 유다 사람도, 사마리아 사람도, 땅 끝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들어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지만 우리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오직 하나의 문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의의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는 야웨의 문으로(시 118:19~20) 믿음의 티켓이 있어야 통과할 수 있는 문입니다.
외국을 가더라도 여권이 있어야 하고 비행기 티켓이 있어야 하며, 그 나라에 입국허가를 받은 비자기 필요하듯, 의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티켓 즉, 죄 사함의 티켓,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티켓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나그네 같은 이 세상에서 죄사함의 티켓, 믿음의 티켓을 가지고 의의 문을 통과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영원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비록 이 문이 지금 잠겼을 지라도 우리는 영원한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수고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문이 잠겼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의 문이 닫혀있을 때 그 이유를 하나님께 여쭤보기도 전에 문 앞에서 먼저 포기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곳곳마다 방해를 받으면서도 문 열기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이 잠겼든지, 열렸든지 환경과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자기가 열 수 있는 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열 수 있는 문은 복음의 문임을 발견했습니다(고전 2:2).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세계 복음화의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 로마에 가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문은 굳게 닫혀 영영 열리지 않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때 바울은 닫힌 문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열 수 있는 문들을 하나하나 열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비록 죄수의 몸이긴 해도 마침내 바울은 로마에 가는 문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바울은 맘대로 행동할 수 없는 죄인이었기에 오히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그의 앞에 열린 문을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지름길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역경을 이김으로 복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감옥도 선교의 전초기지로 사용했고, 광풍도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문이 닫혔을 때 닫힌 문으로 인해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면서, 오직 한 가지 사명만을 마음에 품고 그가 열 수 있는 문들을 열어나갔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 안에서 모든 문이 닫혀 있을 때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닫힌 문을 통해 자신이 열 수 있는 문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열어야 할 문
요즘 사람들은 서로 분리되어 문을 꼭꼭 닫고 삽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는 무관심 속에 살아갑니다. 나만 알고, 우리 가족만 아는 이기심과 무관심이 팽배한 세상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마음의 문조차 모두 닫고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맘, 긍휼히 여기는 맘이 모두 굳게 닫힌 맘속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무엇보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남편과 아내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청소년기가 되어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자녀와도 마음의 문을 열고 진솔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시어머니, 시누이와도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가정에 행복과 화목이 넘칠 것입니다.
또한, 이름도 모르고, 관심도, 왕래도 없었던 우리의 이웃에게 마음 문을 열고 먼저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베품의 문을 통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막힌 담을 허무는 화목제물로 오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서로 막힌 담을 허물고 분리된 관계를 회복하는 평화의 문, 화합의 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의 문을 열면 틀림없이 하늘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 문이 열리면 우리 인생이 변화됩니다.
바울은 2년간 셋집에 유하면서 그의 마음의 문, 거처하는 셋집의 문을 활짝 열고 찾아오는 사람을 모두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의 문, 축복의 문을 열어주고 그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의 집은 언제나 모두에게 열린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마음은 어떤 사람이든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는 활짝 열린 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만나는 문을 통과합시다. 그리고 닫힌 문 앞에서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고 또 다른 문을 두드려 봅시다. 최선의 방법이 막히면 차선의 방법을 활용해 자신이 열 수 있는 문을 찾아봅시다.
그래서 마침내 닫혀있던 문들, 기도 응답의 문, 축복의 문, 기적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축원합니다.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사는 비결을 아는가?
오정호 목사 / 행 28:30~31
시인 바이런(Byron)은 “세월은 마음에서 열정을 앗아가 버리고, 우리의 손과 발에서 기력을 탈취해간다”고 말했습니다. “청년시절의 하루는 짧고 한해는 길지만, 노년시절의 하루는 길고 한해는 짧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청년은 희망의 그림자를 가지고 살지만 노년은 회상의 그림자를 가슴에 담고 삽니다. 세월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다가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6)고 말씀합니다. 악한 세대에 사는 우리는 세월에 대한 삶의 원칙을 세워야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삶 속에서 이루며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재산의 대차대조표(貸借對照表)뿐만 아니라 사역의 대차대조표, 사랑의 대차대조표도 만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전편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주님을 만나서 회심했고 어떻게 주앞에 헌신하며 살았는지를 통해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사는 비결을 추적합시다.
1.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려면 시간관(時間觀)이 분명해야 합니다(30절a).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30절a). 온 이태는 이년을 꽉 채운 2년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기한까지 삽니다(전도서 3:1). 하나님이 부르시면 주 앞에 서지 않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직분도, 젊음의 때도 무한히 주신 게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관이 분명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의 시간관이 분명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되었습니다. 판결받기까지의 소송기간이 2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인 취급받으면서 소송을 하는 가운데서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2년이라는 세월을 마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적극적으로 바라보면서 이 시간들을 선용(善用)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선물로 주신 시간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자신에게 부여된 일정한 시간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計數)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 90:12) 라고 기도했습니다.
2.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려면 사랑의 관계로 사람을 얻어야합니다(30절b).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30절b). 사도바울은 2년 동안 셋집에 있으면서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유를 박탈당한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받아야 할 입장이었고 자존감도 깨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가려서 영접한 게 아니라 “다”영접했습니다(welcome). 예외없이 그에게 나오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믿음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모두를 따뜻한 맘으로 품었습니다.
바울의 삶에서 대인관계(對人關係)가 대단히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한해를 결산 할 때,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샀는지, 사람들의 관계가 얼마나 개선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가 더 소중합니다.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사람을 얻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린도전서 9:19). 사도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요, 산헤드린 공회원이요, 뛰어난 학식을 가진 자였지만 사람을 얻기 위해 즉,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종 되기를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올 한 해 동안 살아오면서 남편을 얻기 위해, 내 자녀를 얻기 위해, 이웃을 얻기 위해 얼마나 종된 모습을 가지고 가슴에서 우러나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했는지 되돌아봅시다. 우리주님은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얻고, 영혼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영혼을 얻기 위해서는 따뜻한 마음으로 영접을 해야 됩니다. 사람을 얻는 것은 우리 평생의 과제입니다.
오는 21일 주일에 교회개척 25년 사역을 마치시고 담임목사님에서 은퇴하시는 서울사랑의교회 옥한흠목사(玉漢欽)님은 저의 목회의 스승이시며, 멘토(mentor)이십니다. 목사님께서는 평신도를 깨워 소명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세우는 목회철학으로 초지일관 달려오셨고, 또한 한국교회 대형교회 목사님으로서 지도력이양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신 뒷모습이 이름다운 목사님이십니다.
지난번 목사님의 생신때에 정성을 담아 선물을 드렸습니다. 그 날 오후 전화가 왔습니다. 여러 말씀을 나눈 후 수화기를 놓기전에 저의 마음을 채워 담은 두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목사님, 사랑합니다.” “목사님,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이러한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런 삶이겠습니까!
3.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려면 직분의식(職分意識)이 분명해야 합니다(31절).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31절). 여기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다는 것은 설교(preaching)혹은 선포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쳤다는 것은 교육(teaching) 혹은 훈련했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은 하나님의 복음을 이 땅에 선포(Kerygma, 케리그마)하고 가르치는 것(Didache, 디다케)입니다. 교제(Koinonia, 코이노니아) 봉사(Diakonia/디아코니아)도 중요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과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도록 가르치는 훈련사역은 병행되어야 됩니다.
교회가 침묵하면, 사람들은 복음을 듣지 못합니다. 성도가 침묵하면,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침묵하면, 영적인 암흑이 온누리에 가득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을 뚫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때에 사람들은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시민권자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들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도성에 살지만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에 속한 사람이라는 자기정체성(自己正體性)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사도의 직분을 불같은 확신으로 실천했던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 교회, 직장,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지를 점검해 봅시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왜 성령께서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31절b)고 마지막에 기록하셨을까요? 만약 사도행전 29장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써야할 부분이 될 것입니다. 복음의 단절이 아니라 복음의 연속적인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일반 직장생활이나 우리의 생업에 관심을 가져야 될 뿐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임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세상 나라도 잘 다스리고 이끌기 위해서는 지도자 스스로가 반듯하게 서야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주님 앞에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사람들과 회복할 것은 회복하고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시간들을 아끼며 적극적으로 활용합시다.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여 사람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영접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사람과 영혼을 얻는 자들이 다 됩시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의식을 철저히 몸으로 녹여 내며 삽시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우리 교회, 직장, 내 삶의 현장에 희망의 빛을 환히 비춥시다. 기대감으로 설레게 하는 성탄의 계절, 은총의 계절에 의식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무장되어 천국의 삶을 오늘에 실현하며 살아갑시다.
나그네 인생에서 남는 것
휘감아 부는 바람 남기는 것 억새풀잎 환호하는 소리
나그네 인생 삶의 흔적 시간의 방에 찍힌 쏟아진 영혼의 자국
그리스도인 흘러가는 세월 속에 묻어내는 것 예수 향기 섬기는 땀 내음
세상사(世上事)는 영혼사(靈魂事)의 반영
자아가 만들면 인생졸작(人生拙作) 주님과 함께 만들면 인생걸작(人生傑作)
나그네 인생 남는 것 영원을 향하여 열린
믿음의 눈 간구의 입술 더불어 세워진 믿음의 역사(役事)
사랑의 수고(受苦) 소망의 인내(忍耐)
예수 사랑 교회 사랑 사람 사랑
사랑만이 찰라(刹那)를 영원(永遠)으로 이끌어 올리네
하나님 나라
행 28장 23~31절 / 오정호목사
옛날 프러시아 왕국의 왕 프레드릭 윌리엄이 어느날 수행원을 동반하지 않고서 평복차림으로 궁전밖의 정원을 산책할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웃으며 뛰어 노는 모습을 흡족한 미소로 바라보던 왕은 “애들아 내가 너희에게 문제를 낼텐데 알아 맞춰 보겠니?”라고 말했습니다. 윌리엄 왕은 한 손에 오렌지를 들고 물었습니다. “이 오렌지는 어느 왕국에 속한 것이냐?” 아이 중 하나가 “그것은 식물왕국에 속한 것입니다. 오렌지는 식물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답에 흡족한 왕은 이번에는 호주머니에서 금화를 하나 꺼내 똑같은 질문을 하자, 또 한 아이가 “그것은 광물왕국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 금화는 광물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왕은 기쁜 마음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왕국에 속하겠느냐?” 아이들은 서로 쳐다보며 잠시 고민을 하다가 그 중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저씨는 하나님 나라에 속합니다.” 이 대답을 듣는 순간 왕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왕은 그 아이를 끌어안고 “그렇구나, 참 잘 맞추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화려한 궁전에서 많은 신하들의 시중을 받아도 자기가 궁극적으로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알지못할 때 인생의 공허함과 절망을 맛볼 수 밖에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생애가 궁극적으로 하나님나라에 속한 것임을 확신할 때에 기쁨과 만족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몇가지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1. 땅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14절).
14절에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가 등장합니다. 로마는 지상의 왕국을 대표하리만큼 당시 세계최강의 대제국이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의 시민권은 대단한 자부심과 특권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로마의 영광과 특권은 ‘로마인’이라는 대명사로 나타났습니다(17,18절).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당시에 로마에 속한 로마인이 있었다면 이 지구상에는 지상에만 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상에 속한 사람들은 어느 누구나 그들의 출생과 부모의 신분에 따라 지상나라의 신분을 반드시 가집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인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재산을 모으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물론 물질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우선 순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물질이란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서 일시적으로 주어진 것이지 영원히 견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물질을 주시는 하나님께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미모 때문에, 또 어떤 이는 사회에서 주는 지위 때문에 그것에만 속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있는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지상의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속해있는 왕국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2.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23절).
바울은 그의 우거하는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담대히 증거하였습니다(23절).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증거할 수 있습니까?하늘나라에 속했다는 거룩한 소속감과 시민권을 가진 사람만이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증거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베냐민 지파이며 히브리인 중의 히비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더구나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정치적인 배경까지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사람이었습니다(빌립보서3:3-6절). 그는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로마인으로서 지상에 속한 나라의 권리를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상의 나라에만 속한 자들은 저들의 배만 채워지면 무슨 일이든지 하는 사람들이며 썩어질 땅의 일만 생각하기 때문에 마침내 멸망당할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빌립보서3:19-20절).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의 능력으로만 갈 수 있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 지상의 시민권자를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통로입니다(요5:39).
사도 바울을 구원한 복음의 능력은 우리도 동일하게 구원한 줄 확신합니다.
3.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이 땅에 속하여 삶을 살아갈지라도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소속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보조를 맞추어 살아간다면 믿음의 세속화와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대한 의식이 점점 희미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지상의 나라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보장된 사람과 현실에만 급급한 지상에 속한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지상에 속한 사람은 상황윤리와 세상의 유행과 시대의 물결에 휩쓸려 다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영혼의 아버지가 계시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 이미 주어져있으며 천국의 약속이 있다면 이 지상에 속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나라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사모하면서 믿는 도리와 책임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며 순례자의 삶을 살 았을 때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이 그들을 위해 마련되었습니다(히브리서11:15-16절). 영적인 실향민이 되지마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의식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4. 교회는 인류의 소망과 사회의 등불이 되어야합니다(17절).
사도바울은 개선장군의 모습이 아닌 죄수의 모습으로 로마에 끌려왔습니다(17절). 그러나이는 성령의 강림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진 후 복음이 온 유대와 이방 로마까지 어떻게 확산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사도행전1:8절).
바울은 죄수라는 제한된 환경 가운데에서도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합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로마의 유력자들을 청하여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담대히 전파했습니다(23,31절). 바울은 그의 동역자들과 함께 로마가 복음화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16절). 일개 죄수였던 바울이 대제국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겠다는 선전포고는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지만 결국 로마는 복음으로 정복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로마를 정복한 복음은 온 인류에게 구원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우리 새로남 교회와 한국교회가 복음 전파의 본연의 사명을 다할 때 온 인류와 이 사회에게 희망을 주는 생명의 터전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힘차게 전합시다. 믿음으로 복음의 씨를 뿌리면 반드시 거두게 될 날이 올 줄 믿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는 새로남 교회의 온 교우들이 됩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기쁨
행 28장 23~31절 / 이재철목사
♬ 심령이 가난한 자는 ♬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있네 위로를 받을 것이요
온유한자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겠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저희 배 부를 것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 받겠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네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자 천국이 저희 것이라
내게도 주소서 내가 복을 받기 원하네 오 내 주여 주소서
우리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또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무가치한 일을 하면서 나중에 후회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가치가 어디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가치는 누가 나를 어디에 써주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영원한 가치 있는 곳에 그를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는 이유는 가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실 때 우리의 가치는 올라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쓰려고 하십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를 구속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우리를 쓰시겠습니까? 우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쓰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잘 믿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인격적인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면서 그에게 인생에 대한 계획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복음화를 위해 로마로 보내졌습니다. 비록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아닌 죄수의 몸으로 왔지만 그로 인해 A.D.313년에 로마는 복음화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이 사는 집까지도 사용하셨습니다.(23절)
사도바울은 로마에서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고 전셋집이었습니다. 그는 집과 삶을 오픈하여 사람들을 영접하고 섬겼습니다.
이것은 가정교회 목장을 통해 우리도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집이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 가정교회를 시작할 때 두 가지 동기를 살펴봅시다.
㉠ “성경대로 해보자”라는 마음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성경대로 살면 고리타분해서 매이기에 딱 맞다 라고 생각합니다.
마 28:19절에서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대로 했더니 제자가 세워지고 영혼구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3년의 사역기간 중 2/3를 제자 삼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세워진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난 후 그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 “성도들이 행복하게 예수 믿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입니다.
※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얻는 기쁨
☞ 영혼구원의 기쁨
☞ 새 생명이 변화되고 자라나는 기쁨
☞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상 받는 기쁨
※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려니 주는 보너스
☞ 요리 솜씨
☞ 섬김의 리더십
◈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쓰시고, 내 가치가 높아지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요?
① 내게 없는 것 보다 남아있는 것을 사용하십시오. (23절)
사도바울은 지금 가택연금 상태입니다. 그 집은 자기 집도 아니고 셋집이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건강하지도 못했습니다. 불치병인 찌르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얼마든지 없는 것 가지고 핑계 댈 수 있었지만 없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남아있는 것을 사용하였습니다.
가택연금 된 상태에서도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찾았습니다. 이 기간동안 귀한 옥중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세서, 빌레몬서)를 썼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통해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손에 있는 작은 지팡이를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는 세무서원으로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돈을 다 나눠주고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 펜이었습니다. 그는 그 펜을 사용하여 마태복을을 썼습니다.
내게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지만 우리는 없는 것 보다 가진 것이 훨씬 많습니다. 기껏 없는 한두 가지 때문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불평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②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보다도 받아들이려는 사람에게 집중하십시오.(24절)
내가 얘기했을 때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받아들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며 낙심합니다.
한 길이 막혔다고 인생이 다 막힌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유대인들 때문에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이 열렸습니다.(28절)
축복으로의 부르심
행 28장 26절 / 문기태목사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창 12:1-4)
한 할머니가 집으로 가려고 골목에 들어섰을 때입니다. "같이 가 처녀" 하며 누가 뒤에서 부르는 게 아닌가? 이렇게 황당하고 기쁘고 설렐 때가 있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걷고 있는데 또 "같이가 처녀" 하는 게 아닌가?
후다닥 집에 온 할머니는 급하게 예쁘게 화장하고 옷도 갈아입고 다시 그 골목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같이가 처녀"를 외치던 아저씨에게 진지한 대화를 걸어볼 심산으로 보청기 볼륨을 좀 높이고 갔다가 기절할 뻔했습니다. 그 아저씨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갈치가 천 원~" "갈치가 천 원~"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아담을 부르시고 노아를 부르셨으며 모세를 부르시고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 세리 마태와 나다나엘 그리고 스데반을 죽인 사울이라는 청년을 부르시는등 수 많은 사람을 만나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반응한 사람들은 모두 새롭게 되었습니다. 대단히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도 부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한 기회를 놓치는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자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길로 이끄시고자 부르실뿐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고자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란땅에 살고 있는 75세나 된 할아버지를 하나님은 어떤 소용가치가 있어서 찾아오셔서 부르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밑도 끝도 없이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힐 곳으로 가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시고자 하나님없이 살아온 무미건조한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속으로 이끄시고자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출발을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나라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우리의 가치관으로 받아 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내 삶의 새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떠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전에 친숙해진 생활 습관을 떠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새 생활에 들어가려면 옛 생활, 옛 가치관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포기는 단순한 희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축복을 위한 떠남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 내가 준비한 땅이 있다고 하시면서 '내가 너로 커다란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천하 만민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을 갖게 됨으로 과거의 생활로부터 떠남은 축복을 위한 떠남입니다. 물론 떠날 때는 섭섭함이 있습니다. 때로 아픔도 있습니다. 또한 불안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떠남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축복을 위한 떠남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큰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준비한 축복된 새생활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겠습니까?
1. 복주시려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1)
창12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된 거예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 그것이 그의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이 듣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방송국에서 계속 전파를 보냅니다. 누군가 라디오를 가지고 주파수를 잘 맞추면 당장 소리가 들립니다. 뉴스도 들리고 음악도 들려요. 그러나 우리가 라디오가 없거나 있어도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주파수를 잘 맞추지 못하면 절대 들을 수 없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방법에 바르게 맞추지 못함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28장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이 백성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고 그리고 그 눈을 감았으니 보지 못하는 도다'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의심으로 가득하여 마음을 닫고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완고한 고집으로 처음부터 거부하는 자세로 있으면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잘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히브리서3장15절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라' 다시 말해서 우리가 열린 마음, 사모하고 기다리는 마음을 품고 준비만 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준비가 되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어린 소년 사무엘이 어느날 자려고 누웠는데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른 일어나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습니다.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나이다." "부르지 않았으니 가서 자거라." 누웠는데 또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재빨리 엘리제사장에게 달려 갔는데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번 째 부르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번에도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더니 엘리가 주께서 사무엘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이번에 또 음성이 들리거든 "주님, 말슴하십시오. 종이 듣겠습니다."하고 대답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게해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무대의 정면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오늘도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사람의 음성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사람에게 달려갑니다. 다행히 사무엘은 영적 감각을 소유한 엘리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음성임을 간파하고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듣는 방법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히 1:1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그것을 기록하셔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대부분 하나님은 이미 기록하여 주신 말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슴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슴하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면 기록된 말씀에 주의를 집중하셔야합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기도를 할때나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는중에 어떤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의심없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받아들이십시오. 그순간 하나님이 지금 나를 부르시고 계시구나! 하고 사무엘처럼 얼른 "말슴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겠습니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 들으면 인생이 달라져요. 그것이 새로운 출발이 될 수가 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안으로 옮겨가게 됩니다.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안으로 들어가 존귀하게 쓰임받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권능과 참 기쁨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저도 스무살 청년의 시기에 구원의 축복을 주시고자 다가온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기도원에서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직접 말슴하시는 것으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예수님의 희생이 이제까지는 세상 사람의 죄때문으로 알았는데 바로 나의 죄를 씻기 위해서 당하신 고난이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같지 않는 나같은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구원해주셨습니다. 고귀한 사명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시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출발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축복을 위한 떠남을 결행할 수가 있습니까? 먼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새롭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2,3)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면 왜 부르시는 것일까요? 대부분 복을 주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심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의 인생을 놀라웁고도 아름다운 인생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한 위대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존귀하게 쓰시고자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었기때문에 그에게 다가오셨고 부르신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2,3)"
당시에 아브라함은 75세였습니다. 꽃으로치면 다 시들어가는 가치도 없고 쓸모도 없는 시기입니다. 가문으로보나 집안으로 보나 특출한 것도 없습니다. 결혼은 했으나 자녀도 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큰 복을 약속하십니다. 무자식으로 살며 쓸쓸한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에게 복을 주셔서 위대하게, 유명하게 만들어주겠다고 하십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으로 복의 근원으로 삼아 땅의 있는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어마어마한 말슴을 들려 주십니다. 여러분이 아브라함이라면 믿어지겠습니까? 아마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에이 너무 황당한 것 말씀하지 마시고 그저 여생이나 건강하게 편안하게 살게 해주세요." 라고 햇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비전이 생겼어요. 꿈이 생겼어요. 하나님의 꿈이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시구나! 나를 아주 중요한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하는구나!'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짐을 싸서 그 땅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믿음으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11장 8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증거합니다. 여기에 강조된 단어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믿은 거예요. '그렇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향해서 이런 놀라운 준비를 하셨구나'하고 그것을 믿었습니다. 갈바를 알지 못햇으나 일단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상세히 보여주신 것이 아니지만 명확한 증거를 주신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중요해요.
히브리서4장2절에 보면 '들은 바 말씀이 유익 되지 못한 것은 들은 자가 믿음을 화합하지 아니함이라'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똑 같은 사람이 말씀을 들었어요. 그런데 한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큰 축복을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화합했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입니다. 황당한 말씀같이 보이지만 도무지 내게는 일어날 것 같지 않게 느껴지지만 내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놀라운 일이 내게 일어납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나를 향해서 큰 복과 놀라운 비전을 준비하셨군요. 감사합니다. 믿습니다." 하는 이 믿음이 우리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여러분 말씀 속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향한 그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새로운 삶의 출발이 됩니다. 축복을 위한 떠남의 출발인 것입니다. 결국에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좋은 축복이 여러분을 반갑게 맞아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복되게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아 누리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복주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4)
4절을 보면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 였더라' 하란을 떠날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얼마요? 칠십 오세. 아주 늦게 떠났어요. 뒤늦은 순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본래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우르를 떠나 가나안을 가려다가 하란에 와서 주저앉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하란을 떠난 것이 칠십 오세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다고 그러지만 우리의 믿음이 결코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복잡한 동기가 섞여 있어요. 우리의 믿음 속에 회의도 섞여 있습니다. 우리의 순종 속에도 불순종이 섞여 있습니다. 우리의 불완전한 믿음, 그리고 불완전한 순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이 결코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순종이 결코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믿음의 첫 걸음 그리고 순종의 첫 걸음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몰라요.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개인의 축복 즉 그는 위대한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 가정이 행복해지는 축복을, 그리고 그 가문에 자손대대로 복을 받는 축복을 그리고 민족이 존귀한 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순종으로 그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오시고 그 메시야를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축복의 삶은 아브라함의 불완전했던 한 걸음의 믿음, 한 걸음의 순종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 걸음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전구를 발명할 때 에디슨이 여러번의 실패끝에 드디어 전구발명을 성공했어요. 그러나 그 전구가 얼마나 희미한지 촛불을 밝혀야 볼 수가 있었답니다. 얼마나 재미있어요? 전구를 만들긴 만들었는데 촛불을 비춰 놓고 볼 수가 있었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첫 걸음이었어요. 그 첫 걸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처음 만들어 날렸을 때 그 비행기는 공중에 불과 12초를 머물다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첫 걸음, 그 첫 걸음이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위대한 걸음의 첫 걸음입니다. 불완전했지만 그 첫 걸음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을까요? 인류 역사사상 최초의 자동차는 1 시간에 2 마일을 갔대요. 1시간에 2마일. 그러니까 마차하고 가면 마차가 자동차보다 먼저 가요. 그래서 마차 타고 가는 마부들이 자동차를 비웃습니다. 내 마차나 타라고 차라리. 그러나 그렇게 출발했던 그 불완전한 자동차의 시운전의 첫 스텝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사랑하시는 여러분, 불완전해도 괜찮아요. 불완전하지만 우리의 믿음의 첫 걸음, 성장을 위한 양육받는 첫 걸음, 교회와 주님을 위한 봉사의 첫 걸음. 이 첫 걸음이란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두렵지만 용기를 내어 한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할 때 복이 임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첫 걸음을 떼어놓기는 했는데 즉각적으로 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아 의심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믿음에 비해 자신의 믿음이 너무나 작고 연약하여 자주 흔들리고 자신의 결심이 굳건하지 못해 쉽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좌절합니다. 실제로 결단하기는 했는데 얼마가지 않아 넘어지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사단의 유혹에 흔들리기도 하며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첫걸음을 떼어놓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 첫걸음이 있었기때문에 위대한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때로 더디게 느껴질 것입니다. 결단하고 기도생활을 시작했는데 금방 응답이 오지 않아 내 기도는 꽝이로구나! 하고 낙심이 될때도 있습니다. 전도했는데 열매가 맺히지 않아 나는 안되나보다 하고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다시 의심이 고개를 들고 확신이 생기지 않아 혹 택한 백성이 아니라 그런가 회의에 빠집니다.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큰 능력을 경험하며 크게 쓰임받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첫걸음을 내딛고 난 후에 곁길로 간적이 있습니다. 회의에 빠지고 의심한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해 거짓말하며 인간적인 방법으로 몸부림친 적도 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로하여금 믿음의 조상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첫 걸음, 순종의 첫 걸음을 떼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첫 걸음이 있기에 앞으로 잘 걸을 수 있습니다. 잘 달릴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조급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결코 실수하는 법이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길을 잘못든 것 같이 느껴질때도 있습니다.
제 아내는 지독한 길치입니다. 방향 감각이 영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운전을 하고 가면 "이상하다. 왜 이리로 가느냐고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은데 지금 잘못 가는 것이 아니냐?고 자꾸 묻습니다. 너무 그러니까 일일이 설명하기도 뭣해서 아무소리 없이 운전하여 가면 톨게이트가 나타납니다. 그러면 "어 맞게 왔네. 참 이상하네"하고 고개를 갸웃합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인생의 운전대를 맡겨드리고 자꾸만 '이 방향이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은데' 하고 조바심하지 마십시오. 전적으로 신뢰하고 무조건 순종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인도받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처럼 안전하게 비전의 성취에 이를 것입니다. 행복한 인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큰 축복을 받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믿음으로 응답하여 순종하며 첫 걸음을 떼어 놓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그 손을 잡고 따라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창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존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조용히 다가와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주저하지 말고 응답하며 따라가는 슬기롭고 용기있는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비전 매핑(완)
행 28장 30~31절 / 이동원목사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 모두는 기대하지 않은 실망스런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는 것입니다. 보는 관점만 바꿀수 있다면 실망도 희망으로, 불유쾌한 경험도 독특한 흥미로운 경험으로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최근 베스트셀러 중에 암과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난 서강대 영문학과 장영희 교수의 유고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장영희 교수는 미국 보스턴 미술관을 한국에서 온 여동생, 조카들과 함께 방문했던 경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행은 미술관 방문 기념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점잖게 생긴 중년 남자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침 그는 자신이 가진 카메라와 같은 모델을 갖고 있어서 부탁을 하자 쾌히 승낙을 했다고 합니다. ‘김치~~
예, 완벽합니다. 한번 만 더, 예~ 한번만 더 찍겠습니다.’ 아주 능숙하게 세 차례에 걸쳐 촬영을 마친 그 분에게 장 교수 일행은 감사를 하고 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며칠 후 필름을 현상해 본 장 교수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첫 번째 사진은 가족 모두의 머리를 짤라 놓았고, 두 번째 것은 동생의 발만 크게 확대해 놓았고, 세 번째 것은 가슴만 확대해 놓은 괴기한 사진이었다고 합니다. 처음 장 교수는 사진 찍은 사람의 인간성 자체에 대한 회의와 불쾌감으로 열이 뻗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옆에서 열심히 사진을 함께 들여다보던 장 교수의 초등학교 1학년 조카 건우라는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와, 이모! 이 사진들 짱 멋있다. 그때 그 미술관에서 본 추상화같다. 우리가 미술관앞에서 찍으니까 이렇게 찍어 주신 모양이지. 완전 예술품이다. 예술품!” 그리고 보니 자신을 방금전까지 불쾌하게 한 사진들이 전위 예술품으로 아니 샤갈의 그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관점의 전환>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관점을 갖게 되면 고난의 상황조차도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실현하기 위한 기회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도 여행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재판받게 된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선교적 관점에서 자신의 고난을 본 순간 그것이 오히려 놀라운 기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에게 이 모든 고난은 아직도 미완의 선교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행전/비전 매핑 설교의 마무리, 바울의 로마 입성 선교 경험을 통한 주님의 두 가지 특별한 섭리적 계획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복음의 문을 열어 주십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반드시 복음 전도의 기회의 문을 열어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둘중의 하나입니다. 그 열린 전도의 기회앞에 순종으로 응답하든가 이런 열린 문을 무시하고 살아가던가 말입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이 바로 쓰임받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쓰임받으려면 무엇보다 열린 문에 대한 민감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아~하나님이 나에게 문을 열어 주고 계시구나”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이것을 ‘성령 사역에 대한 민감성’이라고 불러왔습니다. 난 우리 모두가 이런 민감성을 갖고 일생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그런 우리의 신앙의 선배였습니다. 그는 비록 로마의 감옥에 매여 있었지만, 미결수로서 그것이 완전 감옥이 아닌 연금 상태에 처하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회인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본문 30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어디 머물렀다고 했습니까? ‘셋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가택 연금상태이었던 것입니다. 행28:23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날자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중요한 것은 그가 기회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열린 기회를 복음 전도의 기회로 최선을 다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믿었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다시 중요한 것은 바울을 통해 이제 로마가 복음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고 믿는 사
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로마에 하나님 나라의 지평이 넓혀져 갔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도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전도의 기회, 선교의 기회를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장 적절한 시기에 로마에 와서 열린 선교의 기회를 제대로 활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무리하게 로마행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도 유의할 필요도 있습니다. 문이 닫혀 있을 때에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는 전략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일단 기회가 주어지면 그 기회 앞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 가정에, 마을에, 직장이나 일터에 하나님이 열린 문을 주셨는가를 주목하십시오. 계3:8에 보면 주님은 소아시아 빌라델피아 교회를 칭찬하며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능력을 가지고 얼마나 전도하라는 선교하라는 명령에 순종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빌라델피아 성도들은 작은 능력밖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 작은 능력으로 열린 기회의 문에 순종의 응답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지평을 넓히시고 계십니다.
2. 시간의 선물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이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도록 주신 또 하나의 선물은 시간이었습니다. 본문 30절에 의하면 바울이 이 셋집에 머문 시간이 모두 2년이었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느냐구요? 대부분의 성경 학자들은 바울이 AD62년경에 로마에서 로마법을 위반한 특별한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가택 연금(AD60-62)에서 석방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 후 다시 체포될 때까지 약 4년 동안 최후의 전도 여행을 그레테, 에베소, 밀레도, 마게도냐, 고린도 지방을 여행하며 교회들을 굳게 하다가 다시 체포되어(AD66) AD67년 6월에 순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가장 선교의 열매가 컸던 때가 에베소 3년 사역과 로마의 가택 연금 2년의 기간이었다고 평가됩니다. 그리고 보면 로마의 가택 연금의 시간은 아주 특별한 섭리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본문 3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비록 몸은 쇠사슬에 매어있고 감시당하고 있었지만 복음은 거침없이 전파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복음화 아니 세계 복음화의 과업을 위해 하나님은 여기 로마에서의 아주 특별한 2년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인생을 정의하고 싶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삶의 길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인생의 평가는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 사는 동안 어떤 특권을 누렸는가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보람찬 시간을 보냈느냐가 가장 중요한 인생 평가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를 장영희 교수의 카메라 사진 찍기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장영희 교수는 이 사진 사건보다 더 큰 황당했던 자신의 인생 경험으로 뉴욕 주립 대학의 박사 논문 사건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2년간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그녀는 논문을 완성할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논문 최종본을 여행 트렁크에 넣은 채로 친구 집에 잠간 커피 마시러 갔다가 그 논문이 들어있는 트렁크를 도둑맞는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내 논문내 논문을 외치며 기절한 그녀는 닷새를 어둠속에서 지나다 다시 일어나 논문을 다시 쓰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년의 시간을 연장하며 마침내 논문을 완성하며 통과 받으면서 논문의 헌사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게 생명을 주신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께 이 논문을 바칩니다. 그리고 내 논문원고를 훔쳐가서 내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도둑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장을 다시 시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1년은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사도행전 강해를 마치면서 이런 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바친 인생이야 말로 투자할 가치가 있는 진정한 인생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 제목을 <사도행전 29장>이라고 했습니다. 왜 일까요?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마지막 구절을 가르쳐 학자들은 ‘오픈 엔딩’(open ending)이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났지만 여러분과 저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일터에서 이제 사도행전 29장을 기록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 우리의 사도행전 29장을 위해 이제 다시 우리의 주인되신 그분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인생을 그분에게 후회 없이 헌신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순종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동안 솔직히 헌신을 못하셨다구요? 순종을 못하셨다구요? 괜찮습니다.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합니다. 자, 다시 한번의 도전을 위하여 이제 헌신의 인생, 순종의 인생을 시작할 준비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장영희 교수는 그녀의 유작에서 자기 인생에서 가장 용기가 된 말이 <괜찮아>였다고 회상합니다. 어린 시절 몸이 불편하여 친구들의 놀이에 끼지 못해 서운했을 때 지나가던 깨엿장수가 미소지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괜찮아>! 2002년 월드컵 4강에서 졌을때 대한민국의 관중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괜찮아>! 혼자 끝까지 남아 골든벨에 도전하다가 마지막 문제를 풀지 못한 친구들에게도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그동안 우리가 비록 실패 투성이의 인생을 살았어도 아니 불순종의 인생을 살았어도 부끄러움의 인생을 살았어도 남은 인생 <사도행전29장>의 과업을 향해 다시 일어설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오늘 우리를 응원하실 것입니다. <괜찮아, 괜찮아>!
끝나지 않는 길
행 28장 23~31절 / 조약돌묵상
오늘 본문은 방문한 많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건만 믿는 사람도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 이사야 선지자의 말대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전해져 그들이 들을 것이라고 고백하는 바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한,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무려 2년간이나 바울이 복음을 전한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강론, 사람들의 두 가지 반응, 바울의 경고, 그치지 않는 복음 전파 등입니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였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 이유를 밝힌 말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아마도 당시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일찍이 이사야가 한 예언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사야 6: 9, 10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예언하신 말씀으로,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입니다. 완악하기 이를 데 없는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 그대로 강팍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가 바벨론에게 망해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조상의 완악함을 따라 후대 유대 백성들도 바울이 전하는 말을 거부합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백성들이 조상들처럼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복음을 거부한 관계로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2년 동안 미결수로 있었지만, 다행히 그 후 석방됩니다. 물론 그다음에 또 체포되지만, 석방된 기간동안 매우 자유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바울의 석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재판이 그토록 지연된 것은 유대인 고소자들이 당시 법정 고소 만료일인 18개월이 지나도록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고소자들이 재판에 이길 자신이 없고, 만약 지게 되면 무고죄의 응징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바울의 재판은 고소자의 불참으로 인한 결석재판으로 진행되어 무죄로 판결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 간 바울은 마음껏 복음을 전하니, 예루살렘에서도 내놓고 전하지 못한 복음을 당시 세계의 심장부에서 전한 것입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 사도행전의 마지막 말씀으로, 바울이 2년간 셋집에 살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국가 반란죄의 협의를 받고 고소된 상태로, 그가 갈 곳은 지하감옥 같은 곳입니다. 그러나 가택연금 정도로 그를 감시하는 군인도 1명뿐입니다. 거주처는 옥이 아니라 렌탈한 집입니다. 행동은 무척 자연스럽습니다. 방문한 많은 사람을 일일이 맞습니다. 그만한 선교센터가 없고, 그만한 전도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 모두 주님의 섭리입니다.
그가 금상첨화 2년 동안 그들에게 전한 것이 있으니, 바로 복음입니다. 이미 복음은 로마에 전해진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로마로 간 여러 가지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을 사도행전의 저자가 마지막 문장에서 밝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와 예수입니다. 곧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에 정통한 바울입니다. 그의 신학이 실은 기독교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그가 2년 동안 그리스도의 도를 가르쳤으니, 그것이 예수그리스도로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후 로마에 엄청난 박해가 가해집니다. 그러함에도 초대 교인들은 순교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를 떠난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에서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에필로그:
사도행전은 분명한 흐름이 있는 책입니다. 저자 누가는 그 흐름을 성령의 흐름으로 보고 모든 기사를 그것에 맞추어 기록합니다. 그 흐름을 한 문장으로 말한 것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입니다. 오순절 날 임한 성령님은 그 후 줄곧 주도권을 가지고 역사하십니다. 때마다 주연 배우는 바뀌지만, 감독은 여전히 성령님입니다. 우선 클로즈업된 인물이 베드로입니다. 요한과 더불어 베드로는 스승을 사형 판결한 산 헤드린에서 거침없이 주님을 증거합니다. 예루살렘이 발칵 뒤집힙니다. 성령께서 하신 것입니다.
빌립집사는 홀연히 나타나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땅끝의 전초전입니다. 그 후 한 사람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를 통해 사도행전의 흐름이 급 물결을 탑니다. 빌립집사를 통해 아프리카 대륙이 얼렸다면 사도 바울을 통해 아시아, 유럽 대륙이 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분수령에 스데반 집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순교를 통해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니, 선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인 것 같습니다. 스데반 이후 모든 사도들, 최초 그리스도인들, 속 사도들까지 거의 다 순교합니다. 그 피가 우리까지 내려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그 이후 이야기는 서신서에서 이어집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로마 감옥이야기로, 도대체 결론이 없습니다. 여백입니다. 독자를 위한 공간입니다. 사도 바울의 제자들이 기록하는 난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대상은 분명합니다. 바로 우리들이지요.
주님은 바울에게 사명을 주시곤 구체적인 계획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바울은 한 걸음 한 걸음 성령께 의지하여 앞으로 나갑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인도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사명을받고 예비된 길로 가고 있다고 봅니다. 바울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성령께 의지하여 나아가면 될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인도가 없을리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끝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를 통하여 그 인도가 계속된다는 암시입니다. 끝나지 않는 길입니다. 만약 성경이 재편집되는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속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우리들을 통하여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담대하게
행 28:23-31 / 김좌근목사
서론: 지난 주일에는 행 28:11-22을 본문으로해서 '로마에서의 바울'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멜리데에서 겨울을 보내고 드디어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로마로 가는 길에 압비오까지 마중나온 형제들을 보고 마음에 담대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복음전하는 사람을 격려해주는 것은 주님 앞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3일만에 지역의 유대인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자신의 형편을 설명하고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유대인 지도자들은 편견 없이 일단 바울을 말을 듣기 원했습니다. 어떤분들은 기독교에 대해 엉뚱한 편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일단 마음을 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행 28:23-31입니다. 이제 누가가 사도행전을 끝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는데 그 말을 듣는 사람들 중에 믿는 사람도 있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거기에 실망하지 않고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도 바울처럼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원하고 또 사도행전 전체에서 주는 교훈을 받기 원합니다.
1)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 (23-29): 23. 로마에 있는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바울에 대한 호기심이 있으니 날짜를 정해 놓고 바울이 사는 집에 많이 찾아 왔습니다. 전에는 여러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었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바울에게 찾아옵니다. 바울이 옥에 갇혀 있으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좋은 기회다 싶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을 가지고 예수님께 대해 증명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려 하면 어떤 곳에서든지 전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도 있고 미국에 오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24. 다 같은 바울의 말을 들어도 그 중에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요즘도 똑 같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같은 말씀을 들어도 믿는 사람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전파의 결과에 그리 신경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전하다보면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같은 설교를 들어도 자신의 마음상태에 따라 감동을 받을 수 있고 시험에 들 수 도 있습니다. 그래도 말씀은 계속 전해야 할 것입니다. 25.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돌아갈 때에 바울이 또 한마디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당신들에 대해 다 예언해 놓았습니다.”고 했습니다. 26. “이 백성이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2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우둔하게 만드시고, 귀는 둔하게 듣게 하시고, 그 눈을 감기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러한 저주를 내리신 까닭은 만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기까지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깨닫게 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사 6:9-13). 바울도 로마서11:7, 25을 통해,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차기까지 이스라엘 백성 중 얼마는 우둔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이 완악하게 된 것입니다. 28.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니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실 것이고 이방인은 그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29. 29절은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사본에 보시면 “바울이 이 말을 하니 유대인들이 그들 중에 격렬한 토의를 하며 헤어지니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자기들 끼리 싸운 것입니다. 이 단락을 통해 우리는 복음전하는 사람이 해야할 일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믿게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믿게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설교자도 자신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전하는 사람은 그저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때가 되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2) 담대하게 (30-31): 30. 바울은 2년간을 세집에 있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을 영접했습니다. 31. 그 2년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고 거침없이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끝입니다. 바울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담대함을 위해 기도도 부탁했습니다 (엡 6:19-20). 바울은 이 옥에서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신약 중에 나오는 4권의 서신도 썼습니다. 대략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가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쓴 서신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난 2009년 11월 8일 주일부터 사도행전을 강해했는데 잘 보셔서 아시겠지만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복음사역을 기록한 것인데 사실은 성령님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적이나 능력의 모든 역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능력이 뒤따릅니다. 시금치를 먹어보고 누가 그 시금치를 만들어왔는가를 아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또 누가의 헌신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 성장을 위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것입니다.
담대하고 거침없이 하나님 나라를 전하다!
행 28:16-31 / 더온누리교회
바울은 가택연금 형태로 갇히게 되었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로마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을 만나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바울은 두 번째 만난 회동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 나라를 강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사도행전의 시작이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친 것처럼 마지막도 바울이 사람들에게 예수와 하나님 나라를 “거침없이” 전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이처럼 사도행전의 마지막 단락은 로마에 있는 바울의 사역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누가’는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 사건의 결과와 바울과 로마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선포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말과 삶으로 선포해야 할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1.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만나다(16~28절).
드디어 바울이 긴 여정 끝에 로마에 도착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한 것은 로마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들을 만나 자신은 유대인들의 관습을 어긴 적이 없는데,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인들의 손에 죄수로 넘겨졌다고 말한다. 로마인들은 자기를 석방하려 했지만, 유대인들이 반대하여 자기가 직접 가이사에게 상소했다고 말한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그들을 회유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20절의 “이스라엘의 소망”은 메시아의 오심과 부활에 관한 소망을 가리킨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신실한 유대인 신자이기에 지금 로마의 죄수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유대 지도자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교는 로마가 합법적으로 인정한 종교였기 때문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에 대해서나 그를 고발한 사건에 대해 유대 지방으로부터 들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로마 당국자들의 손에 넘어간 이후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이 기소 건을 이길 확률이 거의 없기에 포기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었다. 로마와 유대의 지도자들은 바울의 말을 직접 듣기를 원하여 바울과 만날 날짜를 정했다. 그리고 그 정한 날에 더 많은 사람이 바울의 숙소로 찾아왔다. 이에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집중적으로 강론하며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가지고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했다. 이제껏 그가 아시아와 마게도냐의 디아스포라 회당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전했던 메시지와 동일하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가 말하는 오실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는 것과 하나님의 통치가 메시아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예수를 통해 온전하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면서 원래 성령이 이사야를 통해 그 조상들에게 하신 말씀이 이제는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들려진다고 했다. 26~27절에서 인용된 이사야의 말씀(사 6:9~10)은 사실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계속 거부하면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조차 상실하게 된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끝까지 거부할 것이라는 의미이기보다 때가 되면 그들의 마음도 바뀔 것임을 고대하고 있음(롬 11:25~32)을 간과하면 안 된다.
2. 복음이 로마에 “담대하고 거침없이” 전파되다(30~31절).
바울은 2년 동안 동일한 숙소에 머문다. 사람들이 바울의 숙소로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계속해서 전도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바울이 자유롭게 외부 출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바울은 이 상황을 디모데후서 2:9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누가의 사도행전은 이 2년간의 세월이 흐른 후의 이야기를 밝히지 않고 있다. 2년이 지난 후 바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이사 상소는 지연되었고 가택연금은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찾아오는 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며 보냈다. ‘누가’는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라고 증언한다. “담대하게 거침없이”로 번역된 부분을 다른 번역본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로 번역한다. 특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다고 강조한다. 사도행전은 서두에서 “하나님 나라(1:3 바실레이아 투 떼우)”로 시작하여 마지막 절인 31절에서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 투 떼우)로 마무리한다. 이는 사도행전의 핵심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나님의 통치”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열린 결말이다. 2년 이후 이동의 자유를 확보하며(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관련된 사건을 증거불충분으로 취하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흔히 알려진 5차 선교여행(스페인?-그레데-마게도냐-로마)의 역동적인 사역을 이어갔다. ‘누가’도 그 내용을 생생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기록을 생략한다. 의도는 분명하다. ‘누가’는 바울을 “영웅화”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의 죽음은 사도행전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를 통해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 지금도 그 성령께서 증인들을 통해 지속하고 계시는 구원의 사역이 그의 관심이다. 이런 추측으로 사도행전을 통해 누가가 담아내고자 했던 위대한 복음의 서사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에서 끝난다. 엄밀하게는 로마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도 로마의 어느 셋집에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바울을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금도 성령의 증인들을 통해 복음이 세계로 뻗어가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었다. 또 그 증인의 자리로 사도행전을 읽는 성도들이 들어오기를 원했을 것이다. 이 땅의 모든 교회는 바울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아 복음의 증인으로 오늘의 로마 셋집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이방 제국의 중심지 로마에 와서도 “먼저는 유대인에게요”라는 선교 원칙을 일관되게 고수하는 바울이다. 자신은 이스라엘의 소망, 즉 이방의 빛이 되어 열방이 복을 누리게 해야 하는 이스라엘의 사명을, 예수님을 통해 성취하신 일을 전했을 뿐, 자기 민족을 고발할 뜻도 없고 자신에게는 다른 아무 죄도 없다고 결백을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바울을 죽이려 했으나, 바울은 끊임없이 동족을 사랑했고 살길을 전했다. 끊임없는 죽음의 협박 앞에서 끊임없는 사랑을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드러냈다. -바울은 찾아오는 유대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위임 통치자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그를 통한 구속을 믿고 그의 통치에 복종할 때 누릴 수 있는 구원을 소개했다. 바울에게서 가택연금 중인 미결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를 통해 깨닫는다. 하나님 나라 복음 전도자들의 출신이나 학력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을 향한 불같은 열정과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대한 선명한 이해가 있는가이다. -유럽을 변화시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눈에도 띄지 않는 바울의 셋집에서 “담대하고 거침없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힘 있게 임하여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고 다스리는 초라한 셋집에서 인류 역사의 큰 축인 유럽의 문명사적 지도를 바꾸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시작되었다. 오늘 내가 성실하게 누리는 말씀 묵상에서 주님은 사도행전의 남은 부분을 가열차게 써나가실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바울을 안전하게 로마에 당도하게 하셨다(16절). 하나님의 뜻은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바울은 긴 기다림과 신뢰와 고난의 바다를 지나서 여기까지 이르렀다. 로마에 도착하는 것보다 중요했던 것은 바울에게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더욱 견고하게 다지는 것이었다. 나에게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속에서, 매 순간을 하나님의 신비를 맛보는 기회로 삼고 기다리며 신뢰해야 하겠다. *늘 그랬듯이 바울은 유대인들을 먼저 찾았다. 그리고 비록 자신이 죄수 신분이지만 부당한 고소를 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고소당한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 즉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 때문임을 분명하게 언급한다(17~22절). 자신을 신뢰할 수 있게 하여 복음을 잘 전하려고 하되, 결코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힘을 쏟지는 않았다.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 나라와 모세와 선지자의 글이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는지 강론한다(23~24절). 그것이 복음이다. 기다리고 소망하던 참된 해방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기를 바라던 대망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되었고, 그 나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 복된 소식이다. *유대인 중에는 믿는 이들도 있지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마음이 완악하고 영적인 눈과 귀가 어두워 믿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어디서든 반대하는 이가 있었듯이 로마도 예외가 아니었고,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돌아선다(24~28절). 그렇다 복음이 가는 길은 늘 반대가 기다린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증거해야 하리라. *2년 동안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바울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채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칠 수 있었다. 바울을 가둘 수는 있어도 복음은 가둘 수 없었다. 땅끝을 향한 복음 증거는 오늘 나의 순종을 통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담대하고 거침없는 하나님 나라 복음
행 28:23-31 / 대구 한마음교회(합신) 서은철 목사
더 많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바울의 셋집에 찾아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울이 강론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들었다. 그러나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아 그들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지게 되었다(24-25). 왜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때문이다(행 13:48).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복음을 믿지만, 그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은 믿지 못한다. 따라서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복음을 믿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요,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은혜에서 제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25), 복음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행 28:25). 그래서 바울은 700여 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말한 이사야 6:9-10 말씀을 인용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를 못해 귀가 막히고 눈이 감겨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그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과 행함으로 반응하지 못하면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자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까닭이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3:14-15). 그러므로 복음을 거부한다는 것은 죄인으로 계속 살아가고 싶다는 뜻이다. 복음을 거부한다는 것은 내 안의 욕망대로 계속 살아가고 싶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마음을 바꾸기는 싫다. 내 안의 욕망을 없애기도 싫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도, 못들은 척 한다. 삶을 바꾸지 않고 생각도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같은 사람들, 곧 말씀을 듣고도 못들은 척하고, 삶을 바꾸지도, 생각을 바꾸지도 않으려는 사람들을 향해 주 에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고 거침없이 가르쳤다(행 28:30-31). 믿음은 귀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서 순종하기 위해 스스로 주인 행세 하려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기까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편안하게 전하지 않고 ‘담대함’으로 전하였다. 무엇에 대한 ‘담대함’ 이었을까? 인간의 죄성에 대한 ‘담대함’ 이다. 변하지 않으려는, 기어코 자기 욕망을 이루고 말고자 하는 고집스러운 죄성에 대한 ‘담대함’이다.
모든 인간은 죄성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죄성에 찌든 삶에 익숙하게 살아가고 있다. 복음은 인간을, 그 그릇된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생명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불편함이 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그 불편함은 새로운 생명으로 전환되는 성장통과 같은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그 불편함은 복음에 대해 반발심을 촉발시키는 트리거가 되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유다. 자신은 그렇게 죽을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 조차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복음을 들을 때 예사롭게 듣는다. 나는 이미 복음을 알고 있고, 내가 구원받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바울은 더욱 더 복음을 담대하고 거침없이 전하였다.
‘거침없이’ 라는 말은 ‘방해없이’ 혹은 ‘자유로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본래 ‘거침’이 없으니 말씀이신 하나님께서는 흑암과 혼돈 속에서 당신의 말씀으로 ‘거침없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분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거침없이’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 그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거침없이’ 십자가에 올라가셨고, ‘거침없이’ 죽음을 깨뜨리고 사흘 만에 무덤에서 일어나셨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은 오늘 날 저와 여러분의 인생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와 ‘담대하게’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신다. 그 담대하고 거침없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누가의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침없이’ ‘담대하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믿는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사도행전 29장을 써내려 가야 한다는 것이다. 곧 우리를 거침없이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의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롬 12:1-2). 누가가 오늘 본문을 마지막 말씀으로 사도행전을 끝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거침없이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따라 살라. 사도행전을 28장으로 끝내지 말고 여러분 각자의 사도행전 29장을 써내려가 달라.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거침없이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을 살리시기 위해 죽음의 권세를 거침없이 깨드리셨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 사실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담대함으로 자신을 부인하며 육체의 소욕을 거침없이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죽을 때까지 전했다. 그 담대하고 거침없는 믿음의 선배들 덕분에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도 담대하고 거침없는 생명의 복음이 전해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생명의 대열에 서기 위해 우리도 담대하고 거침없이 복음 위에 굳게 서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