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고 십자가에서 내 죄를 영원히 사하셨다라고 말하며, 영생은 거져 주는 선물이니까 말씀을 순종해서 살면 좋겠지만 그렇게 살지 못해도 상급만 없는 구원을 받으니까 안심하고 주여 주여 하며 주일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십일조 안 떼 먹으면 열배나 물질 축복으로 갚아주신다는 대단한 믿음? 으로 주일 성수까지 철저히 지키면서 입으로는 천국, 마음으로는 세상복 받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은데, 안타깝지만 이 들은 아무리 구원받았다, 확신을 말해도 불못으로 갈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수 없다.
행위 구원론자들이 복음을 왜곡하는 것에 대해 철저히 비판을 하고 있는 나 이지만 사실은 더 큰 문제는 복음의 깊은 의미를 모르고 말씀이 마음속에 자리 잡지 않고 머리 지식으로만 알고 영원히 구원받았다 하면서 기복신앙이나 신비주의에 빠져있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더 자신의 구원을 다시 돌아 봐야 할 급선무에 있는 사람들이다라는 것을 강조할 수 밖에 없다.
성경에는 구원을 받았다가 다시 잃어버리는 듯한 말씀이 상당히 많은 것은사실이다.
이러한 구절들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세상에 소망둔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행위 구원자들은 이런 구절이 나오면잽싸게 봐라! 구원얻은 자들이 타락하면 다시 버림받지 않는가? 하며 복음에 행위를 물타기 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만약에 구원얻고 나서 우리의 행위로 또 다시 구원이 좌우된다면 우리의 행위가 얼마큼 나빠질때 구원이 다시 취소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우리의 행위도 날씨처럼 변덕스럽다.
오늘 좋았다,내일 나빴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죄의 자백을 통해서 죄를 사함받는다는 것은 구원이 좌우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으로의 회복을 의미한다는 것이라고 예전 게시글을 통해 자세히 설명을 드린바가 있다.
또한 징계를 통해서 돌아오게 하시고 징계를 해도 돌아오지 않으면 육체의 죽음이라는 징계까지 받을 수 있다는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도 드린바 있다.(고전11:30)
만약에 구원받고 나서 또 다시 우리의 행위로 구원이 좌우된다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수십번 아니 매일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할 것이다.
그러면 막 살아도 구원받는다는 말인가? 라고 질문하실 분이 계실 것이다.
로마서 6 장 1,2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말씀처럼 정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구원받은 자라면 육신의 약함으로 잠시 세상에 빠져 살수는 있지만 고의로 막 사는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았지만 이 믿음도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받아 들이지 않은체 십자가 피만 외친다고 구원 받았음을 말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시간 아시길 바란다.
복음의 증거는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없이 말씀을 문자로만 나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아무리 감상적인 은혜의 찬송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고 간증을 해도 바른 진리의 말씀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지 않으면 지옥불만이 기다릴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는 상반된 구절이 많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구절만 나열해서 증거한다고 올바른 복음이 전해질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말씀을 여기저기 뽑아서 얼마든지 거짓된 복음을 만들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몇구절 뽑아 심오한 복음인 것 처럼 위장해서도 안된다.
성경말씀을 무조건 짝지기로 나열 하는 것이 아니라 특히 구원에 대한 한 말씀, 한 말씀, 문맥을 고려하며 해석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 해석의 정당성을 위해서 다른 구절의 말씀을 가져와 근거로 삼는 것이다
나도 말씀을 해석할때 다른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근거를 삼고 싶은데 구 세대라 휴대폰 조작이 힘들어 일일히 성구를 쓰려니 힘이 들어 성구 인용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사실 오늘 휴대폰 엡에서 오려 붙이기로 쉽게 성구를 인용할 수 있다는 말을 회원분한테 처음으로 들었다.
엇그제 말씀 구절로 밤에 잠도 못자고싸움을 했는데 일일히 쓰고 있는데 상대가 엄청 속도로 성구를 인용하는 걸 보고 저 분 글 쓰는 속도 엄청 빠르구나 하고 내심 부러워 했는데 이제 보니 그 이유를 알것 같다.
그날 성구 일일히 쓰느라 고생한 것 생각하면 가만 있을것 괜히 끼어 들었다는 후회감 마저 들었다.
그나 저나 오려 붙이는 방법을 전화를 통해 설명을 들었는데 그 분은 쉽고 간단하다고 말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알아들을수 없고 조작을 못할것 같아 성구 인용은 될수 있는 대로 글로써 꼭 필요한 것만 쓰고 오려붙이기 방법은 포기해야겠다는 결론을 짓게 되었다.
그리고 말씀을 문맥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주관적인 관점이 개입될수 밖에 없기 때문에 쌍방의 해석의 차이에 대해서는 어쩔수 없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이것이 그러한가 하는 마음으로 올바른 진리를 찾기를 간구하면 성령은 분별의 영이시기 때문에 그 마음에 성령의 역사가 임하여서 바른 진리를 분별할수가 있다.(행17:11)
이 글 내용이 어떤 특정인을 향한 것이라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란다.
오래전 부터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이제사 글로 쓸 뿐이다.
나는 나와 구원관이 다른 사람과 쟁론을 벌여도 그 사람을 미워하기는 커녕 인간적으로 더 가까워짐을 느낀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말씀의 싸움은 그 영과의 싸움이지 육체의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다.
이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서 내 경우는 그렇다는 것이다.
성경 모임을 같이하는 형제 회원님이 이 글을 읽고 계실 것이다.
그 분하고 서로 구원관이 완전히 상반되고 초창기에 교리적으로 엄청 싸웠다.
지금도 여전히 구원관이 다르고 서로 말씀 앞에서는 타협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가까이 산책 길에서 자주 만나는데 서로 정말 반갑게 만나며 말씀의 대화를 하며 가깝게 지낸다.
말씀의 관점이 다르다고 그 사람까지 미워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 인터넷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몆몆 목사들 설교를 들어 보면 부패한 한국 교회의 실상을 비판하면서 잘못된 회개니, 잘못된 구원이니 하면서 피 토하며 말씀을 전하는 것을 봤는데 그 내용이 그럴싸하면서도 교묘하게 복음을 가리우며 이신칭의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한 설교들이 난무하고 있다.
비록 한국교회가 타락했지만 교리까지 타락한 것이 아니다.
수 세대를 걸쳐 영적으로 장성한 믿음의 선배들이 성경을 깊이 상고하고 묵상한 결과 교리로 정립한 것이 이신 칭의의 교리이다.
캘빈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캘빈주의의 5대교리에 상당히 문제점이 있는 교리가 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이신칭의를 쉽고 안일한 단세포적 구원으로 잘못 이해한 목사들의 엉터리 설교로 인해 한국교회가 이렇게 장사꾼 세속화된 교회의 모습으로 변질된 것이다.
레위기 11장 7절 말씀처럼 굽은 있어도 새김질 못하는 혼합된 말씀 찌꺼기를 줏어 먹는 부정한 돼지 같은 신자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바른 구원의 복음을 잘 분별하여 먹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약 2:24의 “사람은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를 하면 될런지요?
좋은 질문 감사 드립니다
엡2:24에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
구원이 분명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로마서3장28절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믿음으로 된다 말씀하시고
로마서4장 2절도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1장 6절도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
더 많은 구절은 글 쓰기가 힘들어 생략합니다
야고보서2장24절과 위의 구절은 모순되어 보입니다.
모순되면 성경은 거짓이 되는 거죠
행함으로 의롭다함의 실례로 3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일일히 하려면 많은 지면이 필요하고 기회되면 게시글로 따로 올리겠습니다
간단히 하나만 실례로 말씀드리면 약2:14 형제 자매가 일용할 양식 없는데 주지 않으면 행함없는 믿음으로 자기를 구원 하겠냐 말씀하십니다
이 형제 자매가 이웃이나 교회신자를 말한다면 우리가 과연 이런 베푸는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길거리에 앉아 구걸하는 분들 오갈데 없는 노숙자들 데려와서 씻기고 먹여주고 하고 있습니까?
위 말씀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면 구원받은자로서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복음의 은혜를 입은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라 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누구한테 베풀고 안 베풀고에 따라 구원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 경우에도 지나가다 걸인한테 동냥할때도 있고 안 할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기준이 되는 겁니까?
죽기전까지 안하다가 죽을때 베풀면 구원이 통과 입니까?
우리 이웃 뿐만 아니라 교회안의 형제 자매에게도 똑 같이 해당됩니다
나머지 두가지 실례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행함의 뜻이 아닙니다
다른 해석으로 그 의미를 알수 있으나 너무 길어져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눈이오네
ㅎ ㅎ 반갑습니다
야고보서2장 3가지 실례중 한가지 실례
설명한것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나머지 2가지 실례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배고픈 형제 자매에게 빵을 주느냐? 안 주느냐애 따라 구원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으로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가까운 어려운 이웃에게도 베풀때도 있고 못 베풀때도 있습니다
교회 형제 자매 어려운 분에게 개인적으로 지속적으로 도와 줘야 구원얻을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알수있을 것이고 앞의 설명이 설득력이 있을겁니다
그리고 믿초용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하나님께서 구원얻은 초보신자에게 장성하게 하기위해 일부러 행함으로 구원얻는 것처럼 전 성경말씀을 썼다는 것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요?
말씀의 해석은 문맥과 의도에 따라 각각의 말씀을 근거를 가지고 설득력 있는 해석을 해야 합니다
문자로 할때 상징으로 교훈으로 예언으로 말씀의 의도에 따라 해야 하며 성령의 분별력으로 참과 거짓을 알수 있습니다
핵심은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지 그 어떤 것도 구원을 좌지우지 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눈이오네
그래서 말씀은 문맥을 봐야 한다는 겁니다
마태5장22절 라가는 어리석다라는 뜻입니다
20절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낮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말씀 하십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17절에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오셨다
즉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그 것을 믿는 자는 율법아래 있지 않고 믿음으로 난 의를 얻을 수 있다는 뜻 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은 율법보다 더한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형제에게 어리석다 한마디만 해도 지옥행이라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의 보다 더 낮다는 말씀은 완벽한 의를 가진자 만이 천국을 갈수 있는데 그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난 의만 가능하다는 복음을 미리 설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초용이니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말씀은 그때 그때 문맥과 의도에 따라 해석 되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빛글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다른 것은 전 성경 말씀을 믿초 교육용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눈이오네
ㅎ ㅎ 그래요 눈에오네님은 아주 아주 장성한 자 입니다!
@눈이오네
😃
@눈이오네 님들같은 교인 때매, 하나님이 성경을 해석하지 말라! 한거에요
전 세계 개신교단만 4만여개로 찢어지고 갈라진 것도 님들같이
성경을 지멋대로 해석하고 지 해석만 맞다며 싸우다 갈라선 거죠
구더기가 하나님뜻을 어찌 안다고,?
욥기 25 : 5,6,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구더기 같은 인생, 벌레 같은 사람이야 더 말할것이 있겠는가!
요한 22 : 18
누구든지... 이 말씀에 다른 것을 더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책에 기록된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입니다!
이사야 55 :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길은 너희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라!
전도서 8 :17,
하나님의 모든행사를 살펴보니 해아래서 하는일을 사람은능히 깨달을수없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못하나니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깨닫지 못하리로다!
로마서 11 :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판단은 헤아리지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 뜻은 높고 깊어서 아무리 지혜가 많은 구더기라도 알수없다고 저렇게 써있습니다.
@눈이오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감사함으로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은혜가 크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플러스 행위가 아니고요
@빛글 야고보서 2 : 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검불
좋은 구절 제시 하셨고 당연히 반론하시는것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동안 게시글에서 이 부분에 대한 글을 어느 정도 쓴게 있고 앞댓글 보시면 바울님이 같은 질문한게 있습니다
행함있는 믿음 3가지 실례중 일단 한가지 설명해 놓은 것이 바로앞 댓글에 있으니 읽어보시고 반론할것 있으면 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머지 2가지 실례는 글이 너무 길어져 기회되면 게시글로 올릴까 합니다
@빛글
예수께서,, 선행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데 더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요
마 25 : 46,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믿는자들도 선을 행하지 않은 자들은 영벌에 들어간다고 저렇게 증거해 주셨습니다.
한 가지 더…
어디까지 이뤄져야 구원받았다 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죄들의 용서 받음에 대한 확신, 거듭남, 성화….
바울님 사실 글로 표현 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표현하자면 먼저 하나님과 그리스도 죄 십자가 구속 재림 등 복음에 대한 기본 골격의 내용을 알아야 하고 그 지식이 마음으로 와야 합니다
복음의 말씀이 마음속에 체험적으로 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이 일부분이 아니라 완전히 죄로 부패되어 있는 모습을 체험으로 알아야 합니다
물론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아담안에서 죄인됨을 분명히 깨달아야 하고요
그리고 십자가로 가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고 그 피가 내 죄를 영원히 사했다는 것을 알아야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남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재림등 복음의 말씀이
받아들여지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깊이 체험적으로 믿어져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물은 말씀이고 복음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데 마음의 문을 열고 말씀을 들을때 성령께서 능력으로 말씀으로 큰 확신과 은혜와 구원의 기쁨과 감동을 주십니다
피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말씀이 마음에 체험으로 믿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체험적으로 마음에 감동으로 올때 내가 거듭났다는 것을
@빛글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사실 사이 사이 구체적인 내용이 빠진 것들이 많은데 글로서 다 말하기는 표현의 한계를 느끼네요
@빛글
이 체험이 나의 감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임으로서 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빛글
구원받았다는 것은 거듭남까지를 말하는 겁니다
최종적인 구원은 그리스도의 재림때 신령한 몸으로 부활 변화 되는 거고요
역시 구원에 관한 내용이라 그런지 댓글이 많이 달리는군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 이신칭의!
'구원'과 '의롭다 함'을 같은 개념으로 보시는 거죠?
댓글 질문가운데서도 나왔지만, 도대체 구원이란 무엇인가가 문제같습니다. 죄사함이냐, 거듭남이냐, 성화냐, 등등
그렇다면 성경은 구원을 어떻게 정의내리고 있을까요?
창19:19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성경에서 구원이란 단어가 가장 처음 등장하는 곳이 바로 창 19:19인데, 소돔 고모라 심판 가운데서 생명을 보존한 롯의 고백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생명을 보존받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왜, 어떻게 롯을 구원하셨습니까?
벧전 2: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롯은 의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있었습니다.(창18:23)
이처럼 믿음으로 의인이 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로 마지막 날 하나님의 불심판으로부터 생명을 보존받는 것이 구원 아니겠습니까?
어라면 님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근데 닠네임이 독특하군요
라면이면 라면이지 왜 어라면 입니까?
이 궁금증부터 해소하고 답 댓글 달겠습니다.
나의 성격이 얼마나 급한지 님은 잘 아실 것입니다
@빛글 제 닉네임은 어라면이 아니라 어라연입니다.
강원도 영월이 제 고향인데, 그곳에 있는 지명입니다. 어라연... 물고기가 너무 많아 물고기 비늘이 빛에 빛나는 연못이란 의미이라고나 할까요...
@어라연
아! 그렇군요 나이가 먹어가니 눈까지 침침해 잘 안 보이는 군요
어제 라면 끓여 먹으면서 왜 어라면일까 계속 생각했습니다
비닐 빛에 빛나는 연못 의미가 있는 독특하고 개성있는 닠네임 입니다
궁금증이 해소 됐으니 곧 답댓글 달겠습니다
기계치라 글씨 치는 것 늦으니 이해 바랍니다
@어라연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주심의 의미는 이미 영적으로 구원얻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불심판에서 구원 얻는 것은 물론이고 마지막날 신령한 몸으로 부활 또는 변화가 될 것입니다
@어라연
히브리서 9장 28절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