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귀장날 묵장수
십이월이 중순 둘째 월요일이다. 겨울 날씨가 연일 봄날처럼 포근하더니 날이 밝아오는 아침 눈이 아닌 비가 내렸다. 베란다를 통해 드러난 창밖 정병산 산허리 걸쳐진 운무는 여름 장마철을 연상하게 했다. 이번 주 주간예보는 오늘내일에 이어 주중 목요일과 금요일도 비가 한 차례 더 내린다고 한다. 겨울에 내리는 눈비는 산불 예방에 도움을 주어 산림 관계자들은 반길 듯하다.
월요일은 도서관이 휴무라 우중에 집을 나서 찾아갈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비가 와도 우산을 받쳐 쓰면 반나절 산책 정도는 다녀올 코스로 몇 군데가 떠 올랐다. 아파트단지에서 멀지 않은 반송공원 숲길이 있다. 창원대학 캠퍼스나 도청 뜰에서 역세권 상가 물향기공원도 걸을 만하다. 창원천 천변 산책로를 따라 창원대로 용원지하도 지나 봉암 갯벌이 보이는 곳까지 진출해도 된다.
1일과 6일은 지귀상가 오일장이 서는 날이다. 비가 오면 장터 활기는 맥이 풀리긴 해도 장사꾼이나 장꾼이 있을 법도 하다. 지난번 지귀장날 내가 봐둔 묵장수가 생각났다. 장날이면 대구 공장에서 국내산 메밀로 쑨 묵을 떼어와 판다는 중년 사내였다. 오일장이 선 지귀 장터 풍경을 떠올리면서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외동반림로를 걸으니 메타스퀘어의 낙엽이 길바닥에 흩어 쌓였다.
퇴촌삼거리 쌈지공원에서 창원천 산책로로 드니 비가 내리는 날이라 행인이 드물었다. 창원천 냇바닥은 흰뺨검둥오리들이 먹이활동을 하느라 여념이 없고 그 곁에는 쇠백로 한 머리가 보초병처럼 서 있었다. 창원천 건너편 창이대로는 출근 시간대가 지나 그런지 오가는 차량이 많지 않았다. 가는 빗방울이 성글게 떨어져 우산을 접지 못하고 펼쳐 쓴 채 대동 아파트단지에 이르렀다.
창원천으로 나가면 산책로를 따라 명곡교차로에서 창원대로를 건너 봉암갯벌까지 내려가는데 도중 방향을 선회했다. 비가 오긴 했지만 오늘은 지귀장이 서는 날이다. 이를 감안 집을 나설 때 접시와 칼까지 준비해 묵을 산다면 어디쯤 우중 정자에 올라 잘라 먹을 생각이었다. 창이대로로 건너가 보도를 따라 걸어 지귀장터로 가자 천막이나 비닐로 빗물을 가린 난전이 펼쳐져 있었다.
장터 들머리는 채소 가게들이었는데 김장철이라 물건을 가득 진열해두어도 비가 와 그런지 오가는 손님은 없었다. 장터 골목으로 들어서자 생선이나 잡화를 팔던 노점 일부는 장사꾼이 나오질 않아 빈자리도 보였다. 묵을 팔던 난전으로 가보니 지난번 봤던 사내는 현장에 나와 전을 펼쳐 놓아 반가웠다. 묵을 2모 사면서 다른 날은 어디로 가느냐 여쭈니 경화 장날 철길에서 판다고 했다.
메밀묵이 든 봉지를 손에 들고 봉곡동 주택가를 지나 창원 컨트리클럽 입구 한들공원으로 갔다. 가늘게 내리던 빗줄기는 빗방울이 굵어져 세차졌다. 비가 와 인적이라곤 아무도 없는 쉼터에 배낭을 벗어 접시와 칼을 꺼내 가져간 메밀묵을 잘라 놓고 이웃한 아파트단지 사는 지기에 전화를 넣었더니 금방 나갈 수 있다고 했다. 곧이어 나타난 지기와 안부를 전하며 묵을 나눠 먹었다.
지기는 날이 썰렁하다며 따뜻한 국물로 점심을 들자고 해 공원에 인접한 식당을 찾아 김치찌개로 속을 데웠다. 술을 끊기 전엔 곡차나 맑은 술의 안주로 좋았을 묵이고 찌개였으나 술은 한 모금 하질 않았다. 느긋하게 식사하고 자리를 일어나 우중이라 지기가 차로 집까지 태워주려 했는데 나는 걸어서 가겠노라고 손사래를 젖고 주택지를 빠져 오전에 지나친 창원천 천변을 걸었다.
천변 산수유나무에 달린 빨간 열매에 보석 같은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문득 아까 장터 묵을 팔던 사내가 생각났다. “국내산 메밀 모아 가루를 빻았다오 / 체에다 전분 걸러 묵을 쑨 공장 찾아 / 거래처 단골로 정해 새벽길에 떼 왔소 // 상자째 트럭 실어 오일장 옮겨 가며 / 노점에 전을 펴는 육십대 서 씨 아재 / 겨울날 비 오던 장터 다 팔기나 했을까” ‘지귀장날 묵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