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작가 페북24.10.22》
시민단체가 저를 고발했네요. 그들의 신성한 무엇인가를 모욕했다는 거겠죠. 어제 고발당해도 오늘 할 말은 하겠지만, 새삼 2018년에 쓴 글이 오늘을 예견한 것만 같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한국문단에 대해 첨언합니다. 꼼꼼 읽어주시고 이번을 계기로, 문학과 소설이 얼마나 대중을 선동하기 좋은 도구인지, 좀 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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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문단의 현실에 대해 조금 더 첨언할까 한다. 한국문단을 이해하려면 사르트르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사상가이자 소설가, 프랑스 최고 지성으로 알려진 그는 사실, 모택동 기관지 <인민의 대의>, 프랑스 극좌파 일간지 <해방>의 주간을 맡기도 했던 맹렬한 공산주의자였다. 그의 사상적 스승으로 알려진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마르크시스트로서 '진보적 폭력', 즉 미래 건설을 위해 필요한 폭력은 용인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던 사람이었다. 사르트르는 그의 사상을 더 강력하게 계승하여 “공산주의는 인간의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며 공산주의야말로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하려는 유일한 운동”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이념은 참여문학, 즉 "문학이란 사회의 변혁을 가져오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실천으로 모아진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자는 개XX.”라고 했던 사르트르가 변혁해야 한다는 사회의 최종 모델이 공산주의 사회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사르트르는 "6.25전쟁은 미국의 사주를 받은 한국의 도발로 일어난 전쟁이다."라고 주장했다.
한국문단의 실천적 뿌리는 바로 사르트르의 ‘참여문학’ 정신이다. 문학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그들 나름의 책임감 아래 한국문학은 이미 오래전에 삶에 대한 진실한 성찰과 보편적 가치 구현, 인간 정신이 추구해야 할 초월적 가치를 제시해야 하는 문학의 참된 역할을 저버렸다. 대신 세상에 내던져진 채 상처만 받는 나약한 개인, 사회를 구성하는 개체로서 피해자로만 존재하는 개인을 강조하고, 자유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부정, 경제 발전의 기적을 독재 정권의 부산물로 폄하하며, 친일을 최대 악으로, 북한은 최대 선으로, 과학의 발전과 자유시장경제는 현대인을 소외시키는 절대 악으로 규정해오고 있다. 사회에 대한 불평불만과 파괴되어 간다고 믿게 만든 세상에 대한 공포와 분노로 가득 채운 문학을 통해 역사와 진실 왜곡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더 나은 미래, 즉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함이다.
작가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러한 의도를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문단과 출판 권력이 지원, 육성하는 작품은 이러한 방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작가는 자연스럽게 동일한 주제를 가진 작품을 생산해 내는 시스템 위에 올라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을 반증하는 것 중 하나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출간한 창비의 세계문학 전집 발간사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존엄과 개성이 매몰되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물질만능과 승자독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면서 현대사회는 더 황폐해지고 삶의 질은 크게 훼손되었다. 경제성장만이 최고의 선으로 인정되고 상업주의에 물든 문화 소비가 삶을 지배할수록 문학은 점점 더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다. 삶의 본질을 성찰하는 문학의 자리가 위축되는 세계에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할 것 없이 모두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창비 세계 문학 발간사. 중에서
그러니 이토록 불행한 현실을 어찌하겠는가, 하는 화두를 (머리가 말랑말랑한 청소년) 독자에게 던지는 것이다. 그러니 책 읽는 지성인들이여, 자본주의와 경제성장을 부정하라. 상업주의와 문화 소비는 천박한 것이나 가지지 못한 자여, 부자를 저주하고 너의 불행에 분노하라,는 선동으로 해석한다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이쯤 되고 보면 문단이 작품뿐 아니라 작가들을 각종 언론에 내세워 발언하게 하고 광장과 촛불을 적극 지지, 참여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물론 그러한 주장과 행위에 대한 정당성은, 사르트르의 참여문학 정신과 메를로퐁티의 폭력 인용에 기반한다.
공산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참여문학 정신에 깊이 발 담그고 있는 현재의 문학 권력은 스스로를 정화할 수 없다. 그러니 뜻있는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나야 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러려면 지혜로운 독자가 한국문단이 다시 시작하도록 기회와 힘을 주셔야 한다. 사회 공동체 속의 불행한 개체가 아닌, 자기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개인을 그린 작품을, 그러한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키워주셔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이쪽도 저쪽도 아닌 작가들만이라도 더 이상 정치 권력의 노예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우치고 거짓을 거짓이다, 외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될지 모른다. 작가가 작품 속에 개인의 구원을 그릴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마침내 문학이 문학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어야 작가가 살고, 바른 작가 정신이 깨어나야 문학이 살고 독자가 산다. 그러지 않고는 더 이상 자유 대한민국은 없다. 먹고살기 바쁜데, 정치는 개판이고 경제는 기울어가는데 한가하게 무슨 문학 타령? 이렇게 외면해서는 결코 안 된다. 문학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며, 정신과 영혼 세계에 씨앗을 심는 일이고 30년을 바라보고 그 뿌리를 가꾸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TMTU를 통해 개인의 각성을 이루어야 한다고, 그것이 문학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사르트르를 말한 김에, 모순덩어리 공산주의자 사르트르에 대한 대표적 사례를 소개한다. 그는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목되었는데 노벨문학상은 부르주아 잔치라며 폼 나게 수상을 거절했다. 실은 라이벌이었던 카뮈가 이미 57년에 43세의 젊은 나이에 수상한 것이 배 아파서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무튼 더 웃긴 건 10년 뒤 형편이 어려웠는지 변호사 통해서 그때 폼 잡고 안 받았던 상금을 좀 줄 수 없겠느냐고 타진했다가 단번에 거절당했다. (2018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