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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삼하 1:1-10
1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2 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3 다윗이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니라
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5 다윗이 자기에게 알리는 청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6 그에게 알리는 청년이 이르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7 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8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9 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10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
삼하 1:1-10 / [사울의 전사 소식을 듣다] 사울이 블레셋 족속과 싸우다가 죽은 뒤였다. 다윗은 그동안에 아말렉 족속을 치고 시글락으로 돌아와서 이틀을 지냈다. 2) 그런데 사흘째 되던 날 사울의 진지에서 한 사람이 다윗을 찾아왔다. 그는 사울의 죽음을 슬퍼하는 표시로 자신의 옷을 갈기갈기 찢고 머리에는 흙을 끼얹은 채 다윗 앞에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였다. 3) 다윗이 그에게 `네가 어디서 오느냐?' 고 묻자 그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이스라엘 진지에서 싸우다가 블레셋 족속의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빠져 나왔습니다.' 4) 다윗이 재차 물었다. `전세가 어떻게 되었느냐? 어서 자세히 말하여라!' 그가 전하였다. `우리 이스라엘 군인들은 모두 패주하였으나 대부분 길보아산에서 전사하였고 사울과 요나단도 죽었습니다.' 5) 다윗은 사울의 전사 소식을 전한 그 젊은이에게 다시 물었다. `사울이 요나단과 함께 죽었다는데, 네가 어디서 그것을 알았느냐?' 6) 그가 설명하였다. `제가 우연히 길보아산으로 올라갔다가 사울이 자기의 창자루에 의지하고 간신히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에 블레셋 족속의 전차와 마병이 그를 향해 가까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7) 사울이 고개를 돌리다가 저를 보고서는 즉시 오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가가서 `임금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8) 그가 저에게 `네가 누구냐?' 하고 묻기에 `저는 아말렉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9) 그러자 그가 이렇게 명령하였습니다. `어서 내게 다가와 단번에 나를 죽여라! 몸은 이미 굳어서 말을 듣지 않으나 정신은 아직도 온전하여 고통만 더할 뿐이구나' 10) 제가 보기에도 그는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까이 가서 단번에 그를 쳐죽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저는 그의 머리에 썼던 금으로 된 왕관과 팔에 끼었던 팔찌를 빼 가지고 직접 내 주께 달려왔습니다. 여기에 있는 것을 받아 주십시오.' 단순히 시체의 유품을 도둑질한 그는 다윗에게 무슨 큰 상이라도 받을 줄 알았는지 온갖 거짓말을 꾸며 대어 다윗과 사울의 불화관계를 이용하려고 그릇된 기대를 품었다.
사울 왕이 전사한 사실을 다윗은 아말렉 사람을 통해 알게 됩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1) 사울 왕의 죽음으로 인해 다윗을 추격하던 대적이 사라졌습니다. 이는 사울 왕가의 몰락을 예고한 사무엘 선지자의 예언(삼상 15:28), 그리고 사울 왕을 살려준 후 여호와의 갚으심을 기대한 다윗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삼상 26:23). 사울 왕이 전사한 것과 대조적으로 다윗은 아말렉 사람을 쳐 죽이고 시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울 왕이 멸절하지 아니한 아말렉 족속을 다윗이 쳐 죽인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저자는 다윗이 사울 왕과 달리 여호와의 뜻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던 사실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란 구절은 마침내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의로운 왕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합니다.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2-4) 시글락에 돌아온 지 사흘째 되었지만 다윗은 아직 길보아 전투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사울의 진영에서 도망쳐 나온 한 사람이 다윗을 찾아와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당시 엎드려 절하는 행위는 백성이 군주에게 보이는 경의의 표시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유력한 왕으로 인지하고 최대의 경의를 표함으로써 모종의 이득을 취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친 것을 확인한 다윗은 즉시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내게 말하라’고 다그쳤습니다. 다윗은 길보아 전투의 상황에 대하여 몹시 궁금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다윗에게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 소식은 순간적으로 다윗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왕관과 팔의 고리(5-10)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다윗은 해방감을 느꼈을 법했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고 상황을 바로 파악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도망자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이 소식을 알게 되었는지 그는 캐물었습니다. 이에 도망자는 사건을 날조하여 다윗에게 보고합니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사울 왕이 아말렉 사람이라고 밝힌 자신에게 죽여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적군의 화살을 맞고 많은 피를 흘린 사울 왕은 할례 받지 못한 자들에게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결하였습니다(삼상 31:4). 아말렉 사람은 할례 받지 못한 자이기에 그의 말에 모순이 있었습니다. 아말렉 사람이 사실을 왜곡하고 사울 왕이 사용하던 왕관과 팔의 고리를 다윗에게 바친 것은 다윗의 호감을 사서 큰 이득을 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윗이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왕권을 상징하는 왕관과 팔의 고리를 보고 흥분하여 아말렉 사람에게 포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관심사는 권력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적 용 : 다윗의 첫 번째 관심사는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하나님의 뜻은 몇 번째 관심사입니까?
채근담에 복구자 비필고 개선자 사독조[伏久者 飛必高 開先者 謝獨早]라 했습니다. 빠른 진급이나 빠른 출세는 누구나 바라는 일이지만 조급해 하며 한탄할 것은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 포장한 말로 인하여 생명을 잃는 아말렉 사람이나 이성과의 사랑보다 더 남달랐던 요나단의 우정이나 철천지 원수 같았을 사울도 어느 순간 떠납니다. 너무 일찍 핀 인생의 꽃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더디 자라는 소나무처럼 여유롭게 살다보면 푸르른 내일이 기다릴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1:1
사울의 죽은 후라 - 사무엘상 . 하를 연결해 주는 의미 있는 구절이다(Cahen, Wordsworth). 랑게(Lange)는 이 문구가 2장에 나온 용례처럼(2:1, 그 후에) 단순히 내용의 흐름을 바꾸어 주는 보편적 형식으로서 사무엘상. 하와 구분점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구약 역사서 중 상당수가 '...가 죽은 후'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음을 보아(수 1:1;삿 1:1;왕하 1:1) 이 문구를 사무엘상 .하를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삼음은 적절하다. 더욱이 이 문구에 의해 내용면에서 폭군 사울 왕의 시대와 성군 다윗 왕의 시대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을 보아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사무엘상. 하가 히브리 성경에서는 한권으로 되었을지라도 이 문구를 기준으로 구분한 것은 매우 적절하며 또한 그 의미가 깊다.
다윗이...도륙하고 - 삼상 30:16-20의 사건을 가리킨다. 즉 앞서 다윗은 아기스와함께 출전(出戰)하느라 잠시 시글락을 비워 둔 적이 있다. 그때 아말렉족이 시글락을 침입, 다윗의 백성을 약탈하였는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다윗은 그 뒤를 추격, 아말렉족을 격파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였던 것이다.
시글락 - 브엘세바 북서쪽 19.2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원래 시므온 지파에게 배당 되었으나(수 19:5;대상 4:30) 사울 시대에는 블레셋의 지배하에 있었다. 한편 가드의 아기스 왕은 다윗이 사울에게 뒤쫓기고 있을 때 시글락(Ziklag)을 다윗에게 주어 외부의 적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꾀하기도 했었다(삼상 27:6;대상 12:1,20). 즉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이 가드로 도망와 아기스 왕과 군사적 관계를 맺고 이 곳을 얻었던것이다. 덕분에 다윗은 지금까지 이곳을 그의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세력을 확장하며 은거할수 있었다(삼상 27:8,9;30:26-30).
=====1:2
제 삼 일에 - 다윗이 아말렉 족을 추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시글락으로 돌아온 지(삼상 30:16-20) 제 사흘째 되던 날을 가리킨다.
사울의 진에서 나왔는데 - 사울과 그 휘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레셋군을 맞이하여 교전(交戰)하던 격전지(삼상 31:1-7)에서부터 도망쳐 나온 것을 가리킨다.
그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 이는 그 당시 근동 지방사람들이 자기의극한 슬픔을 표시하던 한 방법이다(수 7:6;삼상 4:12). 특히 그중에서도 자신의 옷을찢는 행위는 극도의 고통이나 번뇌에 사로잡혔을 때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나타내던 한표현법이다. 한편 그밖에도 고대 근동인들은 금식, 굵은 베옷을 입는것, 허리에 굵은베를 띠는 것 따위에 의해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곤 하였다(창 37:34;삼상 31:13;왕상21:27;시 35:13). 그러나 본절에 나오는 이 사람의 행위는 다음에 이어지는 그의 위증(僞證)에 비추어볼 때(5-10절) 전적으로 거짓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윗에게...엎드려 절하매 - 이는 곧 다윗을 자신의 주(主)로 인정하는 경외와 복종의 자세이다. 즉 이는 이제 죽은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차기(次期) 왕위에 오를자가 곧 다윗임을 인정하는 행위에 다름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땅에 두 활과 무릎이닿을 정도로 부복(俯伏)하는 행위는 당시 백성들이 자신의 군주나 지도자에게 최대의경의를 표하던 자세이기 때문이다( 14:4;19:18;창 42:6;삼상 24:8;왕상 18:7;왕하2:15).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도 인간적으로 씁쓸한 감정을 떨칠 수 없다.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도 사울 휘하에서 충성을 다하던 자가 사울이 죽자(1절) 얼른 다윗에게로 도망쳐 와 이처럼 새로운 충성을 표하니 그의 약삭빠름과 간특(奸慝)함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p.447).
=====1:3
이스라엘 진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 이와 같은 보고를 올리고 있는 이 아말렉 사람은 아마도 이스라엘 군대에 고용된 용병(傭兵)이었을 것이다(8,13절). 그러기에 그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패하고 사울마저 위기에 처하자(4-10절;삼상 31:1-6) 진영을 이탈, 잽싸게 도망쳐 나왔을 것이다.
=====1:4
일이 어떻게 되었느뇨 - 아말렉 사람의 보고에 대하여 다윗이 좀더 구체적인 전황(戰況)을 묻고 있는 장면이다. 즉 다윗은 이스라엘군이 어떠한 지경에까지 이르렀기에아말렉 용병이 다 도망쳐 나올 정도였는지 무척 궁금해한 것이다(Keil & Delitzsch).한편 이 같은 다윗의 물음은 과거 아벡 전투의 결과에 대하여 엘리 제사장이 초조한심정으로 묻던 질문과 꼭같다(삼상 4:16). 더군다나 이 두 경우 모두 1)이스라엘의 대전국(對戰國)이 블레셋이며 2)이스라엘군이 참패를 당한 점 3)그리고 그 결과 이스라엘에 새로운 지도자가 출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처럼 과거 아벡 전투결과, 엘리에서 사무엘로 통치권의 전황이 이루어졌듯(삼상 4, 7장) 이제 길보아 전투(삼상 31장) 결과, 사울에서 다윗에게로 통치권이 전환되게 된 사실(2:1-4)은 배후에서 역동적(dynamic)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즉 비록 인간의 역사는 실패로 끝나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는오히려 그 가운데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한 치의 차질도 없이 성취시켜 나가고 계시는것이다.
군사가...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 이미 삼상 31:1-7에서 자세히 언급된 상황이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대패(大敗)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울에게 주셨던예언(삼상 13:14;15:23,26,28;28:19)의 성취라는 의의를 지닌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1:5
사울과...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하였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다윗의 심정이 역설적으로 드러나있는 반문이다. 즉 다윗은 아말렉 사람에게 "네가 직접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목격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어찌 감히 네가 함부로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고 하느냐?"는 의미로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다윗의 위대한 신앙 인격을 엿볼 수 있다. 즉 그는 지금껏 자신을 박해하던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선 안도의 한숨을 쉬기는 커녕 오히려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그 아들 요나단이 전사한데 대하여 충격과 당혹감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1:6
소년 - 이에 해당하는 '나아르'(* )는 유년기에서 청년기에 이르기까지의 소년, 소녀, 청년, 처녀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용병(mercenary)으로 전투에 참여한 점으로 보아 여기서는 20세 전후의 청년을 가리키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기에 공동번역 및 대부분의 영역본(KJV, NIV, RSV)들은 이를 '젊은이'(young man)로 번역하고 있다.
내가 우연히...올라 보니 - 아말렉 소년의 거짓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사무엘상 마지막 장에 의하면 사울의 죽음을 목격한 자는 그의'병기 든 자'로서 처음부터 사울과 함께 길보아 전투에 참여했던 것으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삼상 31:1-6).
길보아산 - 이스르엘 골짜기(the valley of Jezreel)에 위치한 해발 497m의 석회암 구릉이다. 삼상 31:1 주석 참조.
사울이 자기 창을 의지하였고 - 혹자(Clericus)는 이를 사울이 창을 사용, 자살을 시도하려 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의지하다'에 해당하는 '솨안'(* )은 '기대다', '쉬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극도로 지친 사울이 땅에 꽂힌 자신의 창을 의지한 채 힘들게 겨우 서 있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봄이 낫다(Lange). 이는 당시 역경 중에 처해 있던 사울의 비참한 지경을 여실히 증거해 준다.
병거와 기병은 저를...따르는데 - 다시 한번 아말렉 소년의 거짓말이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병거(chariots)는 평지에서나 사용 가능한 도구이지 산에서는그 사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스라엘군이 블레셋군을 피해 길보아 산으로도망친 이유도 저들이 병거를 타고서 추격해 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삼상31:1). 그러자 그때 블레셋군은 병거나 기병대신 '활쏘는 자들'을 동원 이스라엘군을 추격했었다(삼상 31:3).
=====1:7,8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 사울의 죽음과 관련된 아말렉 소년의 보고(6-10절)가완전히 날조된 거짓 보고임을 드러내 주는 결정적 단서이다. 왜냐하면 할례받지 못한자들에 의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했던 사울(삼상 31:4)이 스스로의 신분을 '아말렉사람'이라고 밝힌 소년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9절)은 논리적 모순을드러내기 때문이다.
=====1:9
내가 고통에 들었나니 - 직역하면 '고통이 나를 붙잡았다'는 뜻이다. 여기서 '고통'에 해당하는 '솨바츠'(* )는 간혹 경련, 어지러움증, 현기증 따위를 의미하기도 한다(De Wette, Hesenius, Lange, Wycliffe, Pulpit Commentary). 그러나 전후 문맥을 보아 여기서는 뒤쫓아오는 적들을 도저히 피할 수 없다고 느낀데서 온 '공포'나'두려움'을 가리키는 듯하다(Matthew Henry). 이처럼 심령의 평안을 잃어 버리고 죽음의 공포나 인간적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 현상이다.
=====1:10
엎드러진 후에는 - 여기서 '엎드러지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에 해당하는 원어 '나팔'(* )은 '쓰러지다'는 뜻이다. 따라서 혹자는 이를 사울이 창에 엎드리어 자살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MatthewHenry). 그러나 대개의 학자들은 이를 사울이 블레셋에게 '패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Lange, 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그 곁에 서서 죽이고 - 이처럼 아말렉 소년은 자신이 사울의 부탁을 받고서 사울을 죽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삼상 31: 3, 4에는 사울이 블레셋군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자 절망하여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이같은 차이점에 대하여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1) 성경은 성령의 영감(靈感)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여러 자료들을모아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편집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라는 견해(Ewald). 2)사무엘상.하의 저자가 동일인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차이점이라는 견해(Wordsworth). 3)아말렉 소년이 다윗으로부터 상급을 받기 위해 사울이 자결한 사실을 숨긴 채 거짓증거했기 때문에 생긴 차이점이라는 견해(Lange) 등이다. 이 중 첫번째 견해는 성경영감설 자체를 부인하는 자유주의적 견해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두번째 견해는 사무엘상.하의 저자가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는그 내용을 서로 달리 진술할 수 없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세번째 견해는 지금껏 우리가 살펴온 바와 일치한다. 즉 사울의 죽음에 관한 아말렉소년의 보고는 처음부터 거짓으로 일관된 위증(僞證)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도 세번째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Brown, Fausset, Jamieson, Rust,R.H.Pfeiffer).
면류관 - 원어 '네제르'(* )는 일반적으로 '왕관'(crown)을 가리키는 말이다.그러나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선 사울이 이러한 왕관을 착용했을리는 만무하다. 아마이는 사울의 투구에 둘러 쳐져 있던 좁다란 금띠로서 왕권을 상징하던 것인 듯하다.
팔에 있는 고리 - 사울이 팔에 차고 있던 고리는 고대 근동의 군지휘관들이 흔히 지니고 있던 장신구 중의 하나이다(민 31:50). 오늘날 발굴된 앗수르의 조각물들에도 보면 손목과 팔에 고리를 찬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Lavard, Wycliffe).
< 설 교 >
원수에게 불행이 임할 때 나는
삼하 1:1-27 / 이일기목사
아주 오래 전부터 행복과 불행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 둘 사이에 불행은 힘이 세었으나 행복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여 늘 불행에게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힘이 약한 행복은 될 수 있는 한 불행을 멀리하려고 피해 다녔는데 그럴 때마다 불행은 어떻게든 찾아와서 같이 지내자고 합니다. 행복이 물을 마시면 이 불행도 따라서 물을 마시고, 행복이 누워있으면 불행도 그 옆에 같이 눕고, 행복이 밥을 먹으면 불행도 같이 밥을 먹고, 행복이 잠을 자면 불행도 꼭 그 옆에서만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견디다 못한 행복이 어느 날 불행을 아주 멀리 떠나려고 짐을 챙기자 옆에 있던 불행도 아무 말 없이 짐을 싸기 시작하는 겁니다. 마침내 참다못한 행복이 불행에게 물었습니다. 넌 왜 내가 하는 대로 계속 따라만 하는 거야? 난 정말 네가 싫은데 왜 내 옆에만 있는 거지? 그러자 불행은 슬픈 표정으로 말하기를 미안해 행복, 하지만 내가 이러는 건 너와 내가 한 몸이기 때문이어서 그래. 여태 너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때부터 네가 있는 곳에 내가 있고 내가 있는 곳에 네가 있었지 않니? 이 말에 행복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불행을 감싸 안고는 같이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행복과 불행이란 이렇게 해서 우리 모두에게 함께 공존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불행이 바로 나와 인간관계의 경쟁자 내지 원수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임하였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아마 일반적으로 잘 되었다 싶어 쾌재를 부를 것이며 십 년 묵은 체증이 떠난 것 같이 후련한 놀부 심보의 즐거움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고 십 년이나 따라 다녔던 사울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럴 때 나라면, 또 우리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지 다윗의 처신과 나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처신의 문제를 가지고 말씀을 생각하려 합니다.
1. 다윗은 원수가 당하는 불행을 즐기지 않고 가슴아프게 여겼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인격은 그의 원수를 대하는 데서 나타난다고 하죠. 특별히 자신의 경쟁자나 원수관계와 같은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처신하는 가를 보아 그 사람의 됨됨이를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11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12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은 자신과 원수 관계에 있는 사울왕이 죽었다고 할 때 어떻게 처신을 합니까? 대단한 안타까움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한 번 볼까요?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과연 다윗이 사울왕으로부터 지금까지 당한 고난의 현장들을 돌아 볼 때 이렇게 슬픔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의 고난의 일들을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형식적인 슬픔이었지 내심은 기뻐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다윗은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일이 기뻐할 일인가 아닌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러한 기도를 드렸지요.
시 109:04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다윗은 일찍부터 자신이 사울왕을 완벽하게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감히 자기 손을 들어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름부음 받은 자를 자기 손을 들어 치는 것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부하들은 빨리 죽이라고 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울왕을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이었기에 오히려 사울왕의 죽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슬퍼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같이 있던 사람들도 저녁까지 슬퍼하며 근심을 했다고 하는데 그들이 다 다윗과 같은 마음을 가져서 슬픔을 표현한 것은 아니겠지요. 오히려 내심 이제 자기들의 고생이 다 지나갔구나 하면서 좋아들 했을 것입니다. 다윗 수하의 사람들, 사실 사울왕의 위협으로 인해 얼마나 힘들고 지쳐 있습니까? 그러니 그 죽음의 소식은 빅 뉴스요 좋은 소식이었음에도 누구하나 그렇게 내색하지를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록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온갖 고난과 박해를 받았지만 그래도 좀 넓은 마음으로, 믿음의 눈으로 보면 얼마든지 감싸 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러한 슬픔의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체 남의 불행을 함부로 이야기하면서 다윗에게 보고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아말렉 사람입니다(14절).
10 저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 곁에 서서 죽이고 그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 왔나이다.
그는 다윗의 진심을 모르고 자기가 사울왕을 죽였노라고 자랑삼아 말하면서 그 증거로 사울왕의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까지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면 칭찬을 받고 상을 받을 줄로 생각한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는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다윗의 원수인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 원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면 크게 기뻐할 줄로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자기가 죽인 것이 아니었는데도 오직 상을 받기 위해서 다윗의 마음도 모르고 그렇게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사자인 다윗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그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하며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되 저녁까지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그 소식을 자랑스럽게 전한 아말렉 사람을 칭찬하고 상을 주기보다는 대신 죽이도록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 입으로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고 하였는데 이는 다윗의 슬픈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남의 불행을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의 원수가 죽었을 때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 조가(弔歌)까지 지어 불렀습니다. 그 조가가 여기 19~27절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보통 노래라면 기쁠 때 부르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 노래는 슬픈 노래입니다. 그것으로 사울과 요나단을 조상하고 그 노래를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도록 명했다고 했으니 우리는 이 노래를 통해서도 다윗의 진심을 알 수 있습니다.
17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18 명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헐뜯고, 핍박하고, 너무 힘들게 하고, 내 영혼을 넘어뜨리려 했던 원수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이 혹 불행을 만났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무척이나 후련하십니까? 예 물론 후련하실 것이고 기분도 좀 좋아서 정말 딱 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 성인군자이며 예수님입니까? 그러나 이럴 때 우리가 잘 처신을 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 축복해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 그들에게 승리하는 길 아닐까요?
롬 12:19-20 /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 다윗은 원수가 당하는 불행을 공동체의 입장에서 생각했습니다.
19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0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다윗에게 있어서 사울왕은 개인적으로는 원수지만 공동체적으로는 자기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왕이 쓰러지고 죽임을 당했으니 개인적으로는 다행한 일이겠지만 나라 전체적으로 볼 때는 아주 비통한 일입니다. 물론 나라를 믿음으로 경영하지 못하여 대단히 큰 위기를 초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사울하면 한 나라의 왕이 아닙니까? 그래서 다윗은 개인적인 감정으로 생각할 일을 뒤로 미룬 뒤 사울왕의 죽음을 국가적으로 이해하였는데 자신이 지어 부른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19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비록 자신을 죽이기 위해 끈질기게 따라 다녔던 사람이지만 그래도 그는 일국의 왕이 아니었습니까?
그 왕이 죽었으니 자기 개인으로는 시원한 일이요 기쁜 일일지 모르지만 나라로는 얼마나 비통한 일입니까? 나라의 영광이 쓰러진 것입니다.
또 이 사실을 블레셋 사람들이 알면 무척이나 좋아하고 기뻐할 일이겠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나라 전체의 큰 수치이며 어려움이기도 하기에 다윗은 20절에서 ‘가드에도 고하지 말고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여러 일들을 내 중심적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좋은 것일지라도 전체에게 안 좋은 것이라면 자기의 유익은 뒤로하여야 하며 개인적으로 안 좋아도 전체에 유익이 된다면 그것을 따라야만 합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목자와 조카 롯의 목자들이 목초지 문제로 자주 다툴 때 아브라함이 한 말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창 13:8-9 /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 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 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라함이 이렇게 기꺼이 양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앞 절 07절에 의하면 그들 중에 가나안 거민과 브리스 거민이 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땅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롯이 어떻게 하는가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도이면서도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는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서로 의가 상할 수도 있고, 때로는 분쟁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미워하는 사람, 많이 싫어하는 사람이 불행한 일을 만나는 경우를 볼 수도 있고요. 그러나 이 사람이 잘못되는 것이 결코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배를 탄 믿음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웃의 불행은 나의 불행 곧 우리 모두의 불행이 되는 줄을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잠 24:17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그래서 우리가 이웃의 불행을 공동체적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하며 그렇게 되면 우리가 남을 미워할 것도, 남의 불행을 기뻐할 것도 없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이웃뿐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와 선의의 경쟁을 하는데 있어서도 우리교회 성도가 혹 다른 교회로 가는 일이 있다고 해서 미워하거나 불행이 깃들기를 위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쓸데없이 다른 교회를 놓고 평가할 필요도 없고요. 특별히 염두에 둘 것은 교회 안에서 서로 의견이 충돌되고 다툼이 생길 때 이것은 우리끼리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 안의 문제나 어려운 일을 교회 밖의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면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들끼리 남의 불행을 기뻐하고 고소해 한다면 결국은 누구를 기쁘게 하는 일이 됩니까? 마귀만 기쁘게 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들 안에 있는 불행한 일들로 인하여 우리들끼리는 혹 분쟁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우리의 원수 마귀가 기뻐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자 하는 넓은 마음을 지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다윗은 원수가 당하는 그 불행 속에서도 장점만을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입장만 생각하면 사울왕의 죽음은 분명 기뻐할 일이지 슬퍼할 일은 결코 아닙니다만 그러나 공적인 입장에서 보면 사울왕에게도 장점이 있고, 칭찬할 점이 있고, 배울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19절과 23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19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3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저희는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19절에 보면 그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하고 용사라고도 하며 또 23절에 보면 사울과 요나단의 관계를 가리켜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관계라고 묘사하면서 또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사울왕의 장점을 칭찬한 말들로서 다윗은 사울왕을 아주 공평하게 아주 후하게 평가를 하는 셈이지요. 비록 자기의 원수요 자기를 죽이려고 오랫동안 집요하게 쫓아다녔던 악한 영에 씌운 사람이지만 그가 죽은 후에 그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하며 그의 용맹 그의 힘 그리고 그 부자의 아름다운 관계를 높이 평가합니다.
곧 다윗이 사울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사울왕의 업적을 존중하고 그의 명예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객관적인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은 눈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주관적인 눈으로 보면 나는 옳고 그 사람은 다 틀렸으나 그러나 객관적으로 그를 평가해보면 아무리 나쁜 사람도 그에게 좋은 점이 있고 단점 투성이인 것 같아도 그 속에 장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일지라도 그에게서 배울 것이 있는 것 아닐까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남을 깎아 내리려고만 하여 자기 기준의 잣대로 평가하고 맞지 않으면 다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말하는 것도 틀렸고, 밥 먹는 것도 틀렸고, 모든 것이 다 틀렸다고 하되 특별히 자기의 라이벌이든지 자기의 원수이면 무조건 혹평부터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면 달라야 하겠지요. 아무리 나에게 원수라고 해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잘 한 것은 잘 했다고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 나와 취향이 다른 사람이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칭찬할 것은 칭찬해야 합니다. 특별히 그가 어려움을 당했든지 불행한 처지에 빠져 있다면 더더욱 그러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을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州) 스트래트퍼드 출신의 군인이자 교육자인 로버트 리[Lee, Robert Edward, 1807. 1.19~1870.10.12] 장군이 있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의 뛰어난 남군 사령관이었는데 이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에게 어떤 동료 장교에 대해서 높이 평하는 말을 지나가던 장교가 우연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걸어가는 리 장군의 걸음을 막고 말했습니다. “장군님, 그 자는 당신의 원수가 아닙니까? 기회만 있으면 장군님을 헐뜯고 깎아 내리려고 하는 자에 대해서 어떻게 그런 좋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때 리 장군이 대답했습니다. “그거야 대통령이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가를 물으셨다면 그렇게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물으셨으니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로버트 리 장군의 인격의 위대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평할 때, 그의 좋은 점과 배울 점을 늘 생각한다고 하면 아무리 원수라도 불행을 기뻐하는 데까지 나가지는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잠 17:0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다윗이 그러한 마음의 소유자이었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 사울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제 2대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행 13:21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 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다윗시대의 출발
양인국목사 / 삼하 1:1-27
1. 오늘부터 사무엘하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사무엘상이 사사의 통치에서 왕정으로 바꾸어지는 과도기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면(B.C.1100-1010), 사무엘하는 다윗의 치세를 기록하고 있다. 다윗은 사울이 죽은 후에 유다의 왕이 되어(2:1-7)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세우는 일에 힘썼다. 다윗은 사울의 집을 선대하였고 또한 사울에게 속한 모든 지파를 자신의 통치권 아래로 이끌어 통일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제사장 엘리 시대에 블레셋에게 빼앗겨 오벧에돔의 집에 머물러 있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메어옴으로 예루살렘을 신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2:8-6:23).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의 집을 영영히 견고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언약의 말씀을 받고(7:1-29), 나라를 확장하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하여 블레셋을 비롯하여 주변의 대부분의 나라들을 정복하여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해 주심으로 다윗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전성기를 이루었다(8:1-10:19).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윗이 강성하게 되었을 때 그의 생애 가운데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하였다. 그는 충성스런 신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였고 또한 자신의 힘을 자랑하기 위하여 백성의 수를 계수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죄들은 당대에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또한 다윗의 집에 칼이 영영히 떠나지 않게 하였다(삼하12:10). 우리는 다윗의 이와 같은 생애를 통하여 죄로부터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이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야 할 길이라는 것을 교훈 받는다.
2. 다윗이 아말렉을 추격하여 사로잡혔던 가족과 탈취 당한 소유를 되찾아 시글락으로 돌아 온 후 삼일 째 되는 날, 사울의 진으로부터 온 한 소년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하고 사울과 요나단이 그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년이 전해 준 소식은 다음과 같았다.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1:4)” 사울은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요나단은 사울의 대를 이를 자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한 날에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윗에게 중요한 메시가 되었다. 물론 그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사울의 집을 폐하시고 다윗의 집을 일으켜 세워 주신 것이다.
특별히 사울의 죽음은 다윗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되었다. 왜냐하면 사울의 죽음은 다윗으로 하여금 쫓기는 삶의 마침을 의미하였기 때문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그 말씀의 성취에 대한 진일보(進一步)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울이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하여 다윗을 추격했지만 다윗은 그가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어떤 해도 가할 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사울의 추격은 다윗에게 피할 수도 없고 멈추게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윗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스런 문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울의 죽음은 다윗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고통스런 문제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었다. 물론 이런 날이 온 것은 다윗의 능력이나 수고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언급한 것처럼 다윗은 이와 같은 일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날이 온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행하신 일은 우리의 생애 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인 문제도 주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삶의 여정에서 어떤 문제에 직면해 있을지라도 자유할 것이고,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에게 절망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소망이 될 것이다. 여기 고통스런 문제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수고가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의미함으로 이것은 우리의 연약함과 수고로부터 자유를 의미하고, 기다림으로부터 오는 지침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실제로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기다림의 시간은 절망이 아니고 오히려 소망이 된다. 왜냐하면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더해 갈수록 하나님의 구원이 가까이 임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자유하다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고난의 장인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다윗의 삶을 통하여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다. 다윗은 언제나 믿음으로 살았다. 여기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본분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을 말한다. 다윗은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 그의 이와 같은 믿음의 삶은 사울에게 쫓길 때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이유로 자신이 고통을 받을지언정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을 것을 통하여 잘 드러나고 있다. 물론 그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을 떠날 때도 동일한 믿음을 보였다. 제사장 사독이 다윗을 따라 법궤를 옮기고자 하였지만 다윗은 법궤는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하고 법궤를 예루살렘이 그대로 모시도록 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하시면 그때 법궤를 뵐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다윗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된 자의 본분임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고난의 장인 세상에 사는 동안 믿음으로 사는 것이 본분임을 말해 준다.
또한 다윗은 고난의 장인 세상에 사는 동안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다. 여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이 취한 태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은 다윗에게 기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기 보다는 오히려 슬퍼하였고, 애가를 지어 백성들과 함께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가 어떻에 자신을 추격하는 자의 죽음에 대하여 이처럼 슬퍼할 수 있었을까? 다음의 말씀이 이 물음에 대하여 대답해 준다.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1:19)” 이 노래의 내용은 그들의 죽음을 블레셋에 알리지 말라고 권고하며 그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질 때 블레셋의 딸들이 개가(凱歌)를 부를까 염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다윗이 자신의 사적 감정이나 이익을 생각했더라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은 자신의 장래에 대한 보장이 되었기 때문에 기뻐할만한 소식이었겠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세우신 왕이 대적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을 슬퍼한 것이다. 이처럼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였다.
특별히 다윗은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보는 것을 잊지 않았고, 또한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실제로 다윗은 자신에게는 고통을 가져다 주는 사울이었지만 그와 그의 아들과의 관계는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관계였음을 말하였고 특별히 요나단은 자신의 생명을 지켜 준 자로서 그가 베푼 은혜를 잊지 않았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대대분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일을 그릇행하는 것으로 보고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사람도 행하는 모든 일이 악하거나 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한 사람을 평가할 때 잘한 것과 그릇 행한 것을 구분해야 할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을 이해관계라는 시각에서 평가한다면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들이 행하는 일들은 모두 옳은 것으로 보게 될 것이고, 자신에게 해를 주는 사람들이 행하는 일들은 모두 그릇 행하는 것으로 보게 되어 비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회에게 보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생명까지 취하려했던 사울에게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또한 베풀어 준 은혜를 잊지 않았다. 언급한 것처럼 다윗이 행한 이와 같은 일은 믿음의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사람들은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사람들을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자.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의 장인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비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고난의 장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이 되시므로 믿음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본분에 따라 살아야 한다. 여기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야 할 본분은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이 우리의 능력이나 수고에 의존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연약함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고, 우리의 능력의 유무나 크기로부터도 자유할 수 있다. 우리가 연약함과 수고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난의 장인 세상에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한 우리는 비로소 창조의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며 살 수 있다. 다윗의 삶을 돌아볼 때 그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난의 장인 세상에 사는 동안 때로는 고통스런 일들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살았다. 다윗이 이와 같이 살 때 하나님은 언제나 그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셨고, 때가 되었을 때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이것이야 말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는 말씀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다.
사울의 죽음을 알린 아말렉 사람의 죽음
이준원목사 / 삼하 1장 1~16절
하나님이 주신 아주 큰 축복의 통로이면서 동시에 마귀가 우리에게 저주와 고통을 가져다주는 주된 통로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의 통로이자 마귀가 주는 저주와 고통의 통로가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의 감정입니다.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아주 귀한 축복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고통과 저주의 통로입니다.
감정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조금 전만 해도 기분이 아주 좋아서 ‘너무 행복하다.’라고 하는데, 무슨 일만 벌어지면, 특히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 때문에 갑자기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낙심하고 실망하고 절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것을 더 넘어서 다른 주변 사람을 저주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감정이 지나치면 신앙생활을 할 때도 이것이 정말 성령 충만인지 감정 충만인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감정은 쓰임을 받습니다. 하지만 감정이 상하면 기분이 나빠서 천국도 가기 싫다고 하는 경우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감정은 분명히 축복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설교를 듣다가,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성경을 읽다가, 어떤 프로그램을 보다가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도 은혜를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미모를 보고 ‘참 은혜로운 얼굴이다.’라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뭔가 감정에 터치가 왔다는 겁니다. 감정이 건드려졌다는 겁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도 감정이 아주 좋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거기에도 감정을 통한 축복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나라를 누리는 역사는 분명히 감정적인 체험이기도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면 우리의 감정도 행복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감정은 위에 있다가도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다윗의 인생을 살펴보고 있는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감정대로 막 행동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겠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함에 있어 감히 하나님께 덤빌 수 없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주로 공격하는 통로가 바로 감정입니다. 우리의 감정을 살살 건드려서 폭발하게 만들던지 침울하게 만들어 우리가 잘못 나가게 하는 전략을 폅니다.
바로 그런 것을 다루는 내용이 <새로운 삶>입니다. <새로운 삶>을 안 하신 분들은 꼭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왜 이렇게 자주 폭발하나? 내가 왜 감정을 잘 못 다스리나?’ <새로운 삶>을 안 하셔서 그렇습니다. <새로운 삶>을 하시면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를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만큼 감정이 더 상할 수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감정이 상하면 상했지, 행복할 수 없는 조건을 다 갖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정을 아름답게 사용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볼 때, 16절까지만 읽었지만 1장 전체를 살펴보고 그 부분을 함께 나누어보겠습니다.
1.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보고 (1~10절)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1절)
사울이 죽은 후 사무엘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원래 하나의 책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울의 죽음을 기록한 1절은 사무엘상 31장을 요약합니다. 그리고 이것과 관계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울 왕의 시대는 가고 다윗 왕의 시대가 왔음을 보여줍니다.
사울이 죽었을 때 다윗은 아말렉과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아말렉과 싸워 이긴 후에 자신의 본거지인 시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렀다는 것은 다윗이 사울의 죽음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당시 사울이 죽었다고 하면 누구라도 의심할 만한 것은 다윗이 죽인 게 아니냐고 오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아님을 여기 기록해 놓았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2절)
당시 고대 근동 사람들은 죽음이나 패전과 같은 상황에 대해 극도의 슬픔을 표현할 때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썼습니다. 이 사람도 그렇게 했는데, 사실 이 아말렉 사람은 다윗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거짓으로 슬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진짜 슬퍼서가 아니라 그런 모습으로 나아가야 마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말렉 사람인 그가 이스라엘 왕의 죽음을 왜 이런 정도로 슬퍼하겠습니까?
“다윗이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니라.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다윗이 자기에게 알리는 청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3-5절)
길보아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참패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한 자리에서 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이 사람이 전해줍니다.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에게 알리는 청년이 이르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 (6-10절)
이 아말렉 사람은 사울이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전쟁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둘째, 자신이 당시 죽어가던 사울을 직접 죽였다고 고백합니다. 셋째, 사울의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가져와서 확실한 물적 증거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울의 죽음에 대한 아말렉 사람의 설명은 사무엘상 31장에서 사울이 어떻게 죽었는가에 대한 설명과 상당히 다릅니다. 길보아 산에는 블레셋의 병거나 기병이 산지라 갈 수 없었기 때문에 활 쏘는 자들이 이스라엘 군대를 추격했습니다(삼상 31:3).
사울은 자기가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인 블레셋 사람에게 죽임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스스로 자살을 선택했는데, 또 다른 이방인이고 또 이스라엘이 가증하게 여기는 아말렉 사람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삼상 31:4). 이쪽 이방인에게 죽임당하고 수치를 당하는 게 싫어서 스스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이방인인 아말렉 사람에게 자기를 죽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 아말렉 청년은 자기가 사울을 죽인 것처럼 거짓으로 보고한 겁니까? 사무엘상 31장을 보면,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블레셋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울도 블레셋 군대의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자 자신의 무기를 든 자에게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렵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무기 든 자가 너무 두려워서 차마 죽이지 못하니까, 사울은 자신의 칼을 뽑아 그 위에 엎드러져서 자결한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사울 왕국의 핵심은 ‘사람이 주인 된 나라’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의 주인이다.’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대리통치자로 왕을 세워주셨습니다.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셔서 그렇게 하신 것인데, 결국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나라가 아니라 사람이 주인인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울의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금방 타락해 버렸습니다.
그 나라의 리더인 사울은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맡겼어야 했는데,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라고 했어야 되는데, 스스로 자기가 자기 목숨을 처단하여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 나라의 속성을 말해줍니다. 철저히 자기가 중심인 나라, 철저히 자기가 중심인 인생이었습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장인 사무엘하 1장에 나오는 아말렉 청년은 자기가 사울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물론 사울이 요청해서 자기가 그랬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기가 죽여서 그 팔의 고리와 증거물을 가지고 다윗에게 온 거라고 주장합니다.
이 아말렉 청년은 정치적 흐름에 굉장히 민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차 이 나라의 힘이 누구의 손에 갈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사람들에게 와서 사울의 죽음을 알리고 그 죽음에 자신이 일조했다는 것을 슬쩍 덧붙여 다윗의 환심을 사려고 합니다.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사람은 굉장히 머리를 쓰고 있는 겁니다.
요즘 정치인들도 자기 유불리를 따져가며 하지 않습니까? 머리를 굴리는 게 대단합니다. 옛날에는 한국에 ‘3김 시대’라고 해서 소위 ‘정치 9단’이라고 하는 정치의 고수들이 있었는데, 다 돌아가시고 그 후 그 정도 되는 정치인은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정치적으로 머리를 돌리는 것이 남들은 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아말렉 청년도 나름대로 머리를 상당히 굴리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자기가 사울을 그렇게 죽였다고 말하는데, 다윗이 어떤 상태인지를 이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그동안 다윗이 사울 때문에 도망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다윗에게 와서 자기가 사울을 죽였다고 할 때 과연 이것이 자기에게 유리할 것인지 불리할 것인지를 따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두 가지를 다 생각하고 말한 겁니다.
먼저 ‘사울이 자기를 죽여달라고 해서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할 때, 그동안 사울이 다윗을 계속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다윗도 사울을 원수로 여겨 미워하고 있었다면, 이 소식을 들고 왔을 때 ‘너무 잘했다. 네가 사울을 죽였구나. 상을 내릴 것이다.’라고 할 것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여전히 사울에게 충성하는 신하라면, 사울의 사위이기도 하고 그 아들 요나단과는 아주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아직도 사울을 향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사울을 죽인 것은 내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사울 왕이 나에게 간청하며 너무 고통스러워서 자신의 목숨을 끊음으로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을 이루어주었다.’라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더라도 괜찮다고 계산한 겁니다.
이렇게 이 사람은 머리를 엄청나게 굴리며 여기에 온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비보를 가지고 온 청년의 거짓을 단번에 간파합니다. 그리고 그를 처단합니다.
2. 다윗의 판단 (11~16절)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11-12절)
다윗은 자신의 가장 강력한 적인 사울이 죽었음에도 전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강한 슬픔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사울을 개인적인 감정의 차원에서 대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슬픔은 사울을 향해서도 있지만 특히 요나단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패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이스라엘이 패했고 이스라엘 왕이 죽었으며 자신의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이 죽은 것에 대한 감정적, 개인적 슬픔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죽음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 죽었다는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졌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손상되었다는 것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사울이 죽었다면 다윗에게 어떤 상황입니까? 이제 완전히 유리해진 겁니다. 요즘에도 정치적으로 라이벌 정치인이 잘못되면 얼마나 쾌재를 부를 일입니까? 심지어 죽었다면 경쟁자가 없어졌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원수가 죽었고, 자기를 그토록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사울이 죽었으니 이제는 도망자 생활을 더 이상 안 해도 되고, 게다가 자기는 이미 사무엘이 기름 부어 세운 차기 왕 내정자입니다. 그러면 이제 자기 인생은 활짝 편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영광,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그 영광을 생각하면서 슬퍼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자기 개인의 감정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늘 생각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도 내 영광만 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의 그 아름다움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기도 제목을 한 번 보십시오. 나는 주로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전부 ‘나’, ‘나의’ 밖에 없으면 문제입니다.
당연히 나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내 자녀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배우자를 위해, 가족을 위해, 부모님을 위해, 시부모님을 위해, 장인 장모님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먼저는 교회 성도들, 목장 식구들, 교역자, 어린이들, 청소년들, 영어권 한국어권 청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저 내 인생, 내 가족, 내 교회밖에 모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딱 우리 교회만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은 최악의 죄인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눈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나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이 지역에 있는 이웃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기도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참 슬픈 말이 있습니다. 주변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면 다른 교회들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린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 교회로 오겠지.’ 그러나 그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어려움을 당한 이웃 교회와 지체들을 위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지역뿐 아니라 우리 교단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같은 경우에는 가정교회를 같이 하시는 분들과 사역원을 위해 기도하고,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미국 교회와 세계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우리가 스케일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그저 내 것밖에 모르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겠습니까?
지난번 <부모의 삶> 때 제가 예화를 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 아이가 축구팀에 들어가 축구를 합니다. 한 번은 게임을 하는데 자기 팀이 6대4로 졌습니다. 팀이 졌으니까 다들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아이가 해트트릭을 해서 3골을 넣었습니다. 바로 그때 신앙의 부모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야, 팀은 졌지만 너는 잘했으니까 됐어. 너만 잘하면 돼.’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전혀 좋지 않은 교육 방법이라는 겁니다.
팀 스포츠는 팀이 이겨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자기 혼자 잘한다고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세계 최고 선수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득점왕이나 MVP를 차지하고도 ‘우리 팀이 우승하지 못해서 이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감사는 하지만 별 의미는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부모로서도 ‘너만 잘하면 돼. 팀이 못해도 괜찮아. 너만 잘하면 돼.’라는 게 안 좋은 겁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태도를 길러줍니다. 물론 격려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너희 팀이 졌지만 너는 최선을 다했어.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것으로 감사하다.’라고는 해주어야 하지만, ‘팀이 이기건 지건, 하여간에 너만 잘하면 된다.’라는 것은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중심적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나밖에 모르는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13-14절)
아말렉은 야곱의 쌍둥이 형이자 이삭의 장자인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로부터 시작된 민족입니다. 유다 남부의 네게브 광야와 시나이 광야 지대에 정착해서 사는 민족이었습니다(창 36:12). 하나님은 아말렉을 영원히 벌하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그 이유는 아말렉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연약한 사람들, 즉 노약자와 여인들이 뒤에 쳐졌을 때 그들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신 25:17-18).
사울 왕은 바로 이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거역하여 폐위당하게 됩니다(삼상 15:23). 반면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아말렉을 멸망시킴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행하는 왕으로서 준비를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삼상 30:17).
“다윗이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그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 (15-16절)
사울을 죽인 일로 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말렉 사람은 오히려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실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개인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감히 그렇게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사람을 죽였다고 하니까 그래서 그를 처단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아말렉 청년을 심판함으로써 결국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완성합니다.
그런데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게 어떻게 감히 손을 댔느냐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까?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어떤 인위적인 조작이나 조종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없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지금 전투가 벌어졌던 길보아 산(중부)으로부터 다윗이 있던 시글락(남쪽)까지는 80마일이 넘는 먼 거리였습니다. 이 아말렉 사람은 그 먼 거리를 힘들게 달려와 다윗에게 사울의 죽음을 알려준 겁니다. 왜 그랬습니까? 당연히 보상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상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까 그 먼 거리를 신이나서 달려온 겁니다.
그는 시체들 가운데 값나가는 물건을 훔치기 위해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쟁터에 간 것인데, 사실 이 사람이 이스라엘 쪽에 속해 있었지만 싸우지 않고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 끝나고 뭔가를 얻으려 가보니까 우연히 사울이 죽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왕의 옷은 다르기 때문에 금방 눈에 띕니다. 그리고 사울이 왕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왕관과 팔의 고리를 얻은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상당한 재물을 얻은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값이 나가는 겁니까? 엄청난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왕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인데 그걸 얻었으니 얼마나 값진 겁니까? 이걸 들고 블레셋으로 갔으면 상을 많이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많은 상을 원했기 때문에 다윗에게로 갔습니다. 다윗에게 가면 더 큰 상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결국 사울 왕의 죽음을 통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지금 다른 사람들, 특히 왕이 죽임을 당한 비극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통해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잔꾀를 부리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다윗은 아말렉 사람을 즉각 처단함으로 왕을 죽인 자에 대한 복수와 함께 아말렉에 대한 심판을 완성했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아말렉 청년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다 죽임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돈이 엄청나게 많은 록펠러(Rockefeller)에게 기자가 물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돈이 얼마나 많아야 만족하겠습니까?” “Just a little bit more. 조금만 더.” 억만장자인데도 조금만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정말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의 위험도 감수하고 이렇게 먼 거리를 힘들게 달려오게 할 정도로 욕망은 대단합니다. 거짓말을 지어내고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뿌린 것도 재물을 더 얻기 위한 욕망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어서라도 자신의 부유함과 영광을 취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 아닙니까? 그러나 이러한 욕망의 끝은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상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남들은 어떻게 되든지 나만 잘되면 된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되든지 나만 잘살면 돼.’라고 하는 게 말이 됩니까? 나라가 망하면 자기도 망하는 건데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권력자들이 나라가 망할 때 도망을 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남들은 어떻든 나만 잘되는 것은 없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든 나만 잘하면 돼.’라고 할지 몰라도 그렇지 않습니다. 전체가 잘 나아가야 나도 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교회는 엉망인데 나 혼자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함께 신앙생활을 잘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교회가 잘 나아가는데 ‘나 혼자만 안 하겠다. 나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면 문제이지만, 교회는 잘되고 있지 않은데 나 혼자 잘하겠다고 해서는 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나’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 공동체가 누구입니까? 바로 옆에 있는 성도들, 형제자매들입니다.
3. 다윗의 활 노래 (17~27절)
사울은 다윗의 정적인데, 무엇보다 자기의 목숨을 노리고 쫓아다녔던 원수입니다. 반면, 요나단은 정말 깊은 사랑과 우정을 나눈 사랑하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사울을 위해서도 요나단을 위해서도 애가를 지어서 부릅니다. 그것을 ‘활 노래’라고 이름을 지어 부릅니다.
“이스라엘아, 우리의 지도자들이 산 위에서 죽었다. 가장 용감한 우리의 군인들이 언덕에서 쓰러졌다. 이 소식이 가드에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이 소식이 아스글론의 모든 거리에도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듣고서 기뻐할라.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딸들이 환호성을 올릴라.” (19-20절, 새번역)
첫째로, 죽임당한 이스라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슬픔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있습니다.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는 이제부터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고, 비도 내리지 아니할 것이다. 밭에서는 제물에 쓸 곡식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길보아의 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치욕을 당하였고, 사울의 방패가 녹슨 채로 버려졌기 때문이다. 원수들을 치고 적들을 무찌를 때에, 요나단의 활이 빗나간 일이 없고, 사울의 칼이 허공을 친 적이 없다.” (21-22절, 새번역)
둘째로, 여기서는 놀랍게도 사울의 용맹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용맹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슬퍼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살아 있을 때에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구나! 독수리보다도 더 재빠르고, 사자보다도 더 힘이 세더니! 이스라엘의 딸들아, 너희에게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입혀 주고, 너희의 옷에 금장식을 달아 주던, 사울을 애도하며 울어라!” (23-24절, 새번역)
셋째로, 사울과 요나단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솔직히 저 같으면 사울을 위해서 이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죽이려고 그렇게 쫓아다니던 원수인데 왜 사울을 위해서 노래합니까? 사랑하는 요나단만을 위해서 노래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둘 다 애도했습니다.
“아, 용사들이 전쟁에서 쓰러져 죽었구나! 요나단, 어쩌다가 산 위에서 죽어 있는가?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이 나를 그렇게도 아껴 주더니, 나를 끔찍이 아껴 주던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더 진한 것이었소. 어쩌다가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무기들이 버려져서, 쓸모없이 되었는가?” (25-27절, 새번역)
마지막으로, 요나단과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이 애가를 개역개정으로 보면,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오호라 두 용사가”라는 후렴구를 두 번 반복하면서 다윗의 슬픔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특히 이 부분이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 부분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가리켜 ‘내 형’이라고 부르는데, 나이에 대해서 자기가 더 어리고 요나단이 형이라는 게 아니라 요나단의 뛰어난 인격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합니다.
이러한 슬픈 상황 속에서 감정이 무너질 수도 있는데, 다윗은 감정을 잘 다스렸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사울이 죽었으니까 이제 내가 왕이 되고 좋다.’라고 하는 자기의 욕망이 아니라, 이렇게 슬퍼할 수 있는 그의 영성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늘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결국 높여주십니다. 그리고 고귀하게 사용해주십니다.
우리도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상황이 벌어지면서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번 주에도 살아갈 때, 아니 바로 오늘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사탄으로부터 감정을 건드리는 공격이 올 수 있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충만할 때 더 옵니다.
그것을 우리가 잘 분별하면서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나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정말 믿음의 사람, 참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서 고귀하게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울왕의 최후: 영광에서 비극으로
삼하 1:1-10
🌱 성경 속 인물들을 통해 배우는 삶의 교훈
성경은 우리에게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깊은 교훈을 전합니다.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의 이야기는 영광의 정점에서 비극적 최후로 끝난 한 인간의 여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사무엘하 1장 1-10절은 사울 왕의 마지막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사울의 인생을 "순종하는 사울", "죄에 빠진 사울", 그리고 "죽음으로 왕관을 빼앗긴 사울"이라는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며, 그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신학 및 종교 연구
💫 겸손하고 순종했던 초기의 사울,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
사울은 처음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되었을 때 겸손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9장에서 우리는 사울이 아버지의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헤매던 평범한 청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했으며,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삼상 9:2)
사울이 왕으로 선택되었을 때 그는 자신을 숨기며 "내가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요 나의 가족이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삼상 9:21)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겸손과 자기인식은 리더십의 중요한 자질입니다.
초기의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사무엘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지시를 따랐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암몬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사울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큰 승리를 이끌었습니다(삼상 11장). 이 시기의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는 신실한 지도자였습니다.
이렇게 순종적이고 겸손했던 사울의 모습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나 능력이 아닌, 겸손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더욱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 교만과 불순종으로 이어진 중간기, 서서히 무너져가는 사울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울의 순종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권력과 성공이 쌓이면서 그의 마음속에는 점차 교만이 자리 잡게 되었고, 이는 결정적인 불순종의 순간들로 이어졌습니다.
첫 번째 중대한 불순종은 사무엘상 1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정해진 시간에 오지 않자 참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는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며,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한 행동이었습니다. 이에 사무엘은 사울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삼상 13:13-14)종교 및 신앙
두 번째 중대한 불순종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두고 좋은 가축들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신의 판단을 앞세운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에 대해 강력하게 꾸짖으며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셨더니 ...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리셨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17, 23)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기에 사울의 인생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시선과 자신의 영광을 더 중요시했다는 점입니다. 사무엘상 15:30에서 사울은 "내가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청하건대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고"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회개보다는 체면을 더 중요시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기준과 세상의 가치를 더 중요시할 때, 우리의 영적 삶도 서서히 무너질 수 있습니다. 작은 불순종이 모여 결국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 시기와 분노에 사로잡힌 사울, 추락하는 왕의 영혼
사울의 영적 타락은 다윗이 등장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그와 함께 하시자, 사울은 극심한 시기심과 질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영성
사무엘상 18:7-8에서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자, 사울은 분노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에게 왕국 외에 무엇이 더 있으랴"라며 그날부터 다윗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사울은 여러 차례 다윗을 죽이려 시도했습니다. 자신의 딸 미갈을 미끼로 다윗을 위험에 빠뜨리려 했고, 창을 던져 그를 죽이려 했으며, 군대를 동원해 다윗을 추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사울에게는 이제 악령이 임하여 괴롭혔고(삼상 16:14), 그의 인격은 점점 더 비뚤어져 갔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사울이 점차 영적으로 타락해가는 모습입니다. 사무엘상 28장에서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지 못하자, 자신이 이전에 금지했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죽은 사무엘을 불러오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반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황폐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시기와 질투, 분노와 두려움이 한 사람의 영혼을 지배할 때, 결국 그 사람은 자신이 경멸하던 모습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울, 사무엘하 1:1-10의 기록
이제 사무엘하 1:1-10에 기록된 사울의 최후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울의 죽음 후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서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삼일 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삼하 1:1-2)
전쟁터에서 도망쳐온 이 아말렉 청년은 다윗에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있었던 일을 전합니다. 그는 사울의 죽음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사력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나 내가 고통 중에 있노라... 내가 그의 곁에 서서 그를 죽였으니 이는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그리고 내가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가져왔나이다"(삼하 1:9-10)
이 아말렉 청년의 이야기가 정확한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31장의 기록에 따르면, 사울은 전투에서 패배하자 자신의 무기 든 자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했으나, 그가 두려워하여 죽이지 않자 스스로 칼에 엎드러져 죽었다고 합니다. 어느 쪽이 정확한 기록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울의 최후가 비참했다는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한때 이스라엘의 영광이었던 첫 왕이 이렇게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시체를 벳산 성벽에 매달아 조롱했고, 그의 머리를 잘라 그들의 신전에 두었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왕이 이방인들에게 수치스럽게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사울의 생애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시작했지만, 불순종과 교만으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물리적으로만 죽은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이미 오래전에 죽어 있었습니다. 왕관과 권력을 사랑했지만, 결국 그것들은 모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 사울의 인생에서 배우는 우리의 교훈
사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반성과 교훈을 줍니다. 그의 인생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겸손의 중요성
사울은 처음에는 겸손했지만, 권력을 쥐게 되자 교만해졌습니다. 잠언 16:18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성공하고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순종의 가치
사울의 가장 큰 실패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무엘상 15:22에서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온전한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3. 시기와 질투의 위험성
다윗에 대한 사울의 시기심은 그를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시기는 "뼈의 썩음"(잠 14:30)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축복과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는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4. 권력과 지위의 일시성
사울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왕관과 권력은 결국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가치에 우리의 삶을 투자해야 합니다.
5. 회개와 변화의 기회
사울과는 달리, 다윗은 큰 죄를 지었을 때도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내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라고 간구합니다. 우리도 실패했을 때 진정한 회개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 마무리: 우리 삶에 적용하기
사울 왕의 이야기는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우리도 삶의 여정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겸손함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욕망과 교만을 따를 것인가? 사울처럼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좋지 않은 삶이 아니라, 끝까지 신실하게 달려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7-8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사울의 교훈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순종하는 삶을 통해 마지막까지 신실하게 달려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땅의 왕관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의의 면류관은 영원합니다. 사울의 이야기가 우리 모두에게 영적 경각심을 주고, 더욱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삶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삼하 1장 1~16절 조약돌묵상 / 행복한 순례자
오늘 본문은 사울의 죽음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으려는 한 아멜렉 병사가 결국 그 악한 행위로 인해 죽음을 초래하고 만다는 내용입니다. 사울의 진영에서 도망 나온 아멜렉 사람이 이스라엘의 패배를 알립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 소식에 다윗과 부하들은 저녁까지 울며 금식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죽인 죄로 아멜렉 병사를 죽입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의 패전 소식, 아멜렉 병사의 허위보고, 사울과 요나단을 애도하는 다윗, 처형당한 아멜렉 병사 등입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 다윗의 물음에 대답한 아멜렉 병사의 말로, 사울 왕이 있던 이스라엘 부대에서 탈영해 왔다는 보고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는 이스라엘 군대에 고용된 용병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을 위하여 많은 군인이 필요해 당시 나라마다 많은 용병을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패하자 재빨리 도망쳐 나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울 왕이 죽음을 알고 그 소유물을 탈취해서 나온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블레셋 군인들이 사울의 죽음을 발견하기 전에 그런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나이는 용병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아 약 20세 전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 사울왕의 전사를 보고한 아멜렉 병사의 말입니다. 그것부터 그의 말이 거짓임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병거와 기병은 평야에서 사용되는 것이지 산지에서는 그 사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길보아 산지로 진영을 옮긴 것은 그 때문으로, 산지 전투에서는 블레셋 군의 병거와 마병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블레셋은 보병과 궁병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추격하였던 것입니다. 사울 왕이 활 쏘는 자로 인하여 중상을 입은 것은 그 까닭입니다.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 사울 왕이 중상을 입고 아멜렉 사람인 자기에게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는 말입니다. 그의 말이 날조된 거짓말임이 확실히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 죽음을 당할 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아멜렉 사람이라고 분명히 밝힌 자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 할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 사울 왕의 생명이 회복될 수 없음을 알고 그를 죽여 왕관과 팔 고리를 갖고 왔다는 말입니다. 왕관은 아닐 것입니다. 전시에 금 면류관인 왕관을 착용하고 전쟁을 할 왕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투구에 둘러 쳐져 있던 금띠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리는 신뢰성이 있습니다. 당시 서남아시아의 군사 지휘관들이 흔히 지니고 있던 패물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앗시리아에서 발굴된 조각물을 보면 손목과 팔에 고리를 찬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유대 전설에 따르면 그 청년은 사울 왕의 목자장이었던 도엑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군복무 할 때 한 병사가 저희 부대로 전입해 들어 왔습니다. 그 병사는 원래 중화기 부대원입니다. 그러나 무거운 중화기가 싫어서 보병부대로 자원해 들어온 것입니다. 마침 그때는 부대가 새로운 임무를 맡고 확대되면서 혹독한 훈련 중이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병사는 고생이 심했습니다. 전입병의 서러움도 서러움이지만, 고된 훈련 때문입니다. 중화기는 무거워 이동 시 차량을 이용하지만 보병은 한결 같이 걷거나 뛰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필 한 여름이었습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케이스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판단이 늘 바른 것이 아닙니다. 아멜렉 병사는 그렇게 하면 다윗에게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다윗과 사울은 원수지간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빗나가고 말았으니, 돌아간 것은 상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아멜렉 족속은 약탈민족입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우연히 사울의 죽음을 보았는지는 모릅니다. 그렇다면 약탈 민족답게 사울의 물건을 도둑질 하면 되지, 왜 그런 계략을 꾸몄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판단이 극히 짧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희 부대로 전입해 온 병사처럼 말입니다.
정직하게 살면 좋겠습니다. 사물의 이치와 세상을 다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일을 꾸몄는데 오히려 불리하게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남의 약점이나 불행을 이용하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인간의 도리 상 그래서는 안 되고, 자칫 그런 불행을 고스란히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될 수 있으면 투명하게 살아야 합니다. 맑은 물에선 고기가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가시고기, 빙어 등은 맑은 물에서만 삽니다. 혼탁한 세상에 적당히 길들여진 사람이 자기 합리화 수단으로 사용하는 말이라고 봅니다.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고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뜻과 계획을 먼저 내세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의 뜻과 계획을 우리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짧은 생각과 소견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꾀를 내는 시간에 도리어 기도하는 것이 한결 좋습니다. 자신을 내려놓으므로 내 뜻과 계획이 아니라 하늘의 뜻과 계획을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김세영 목사 / 삼하 1:1-10
하나님 아버지 오늘 사무엘하가 사울이 죽은 후에로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묵상하며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때를 잘 기다릴 수 있도록 주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어제까지 에스라의 묵상을 마치고 오늘부터는 사무엘하의 말씀이 시작이 됩니다. 큐티인 제목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떤 때를 기다리고 계신가요? 어떤 분들은 수고하는 배우자와 보석 같은 자녀 등 고난이 끝날 때를 기다리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또 직장과 교제 입시, 육체와 정신의 질병이 나을 때를 기다리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 경제적 어려움이 언제 끝나는지 그 고난이 끝날 때도 좀 기다리게 되지만 좋은 일보다는 힘든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이 고난이 언제 끝날까를 간절하게 기다리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함께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려면
1. 나의 사울이 죽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나의 사울이 죽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사울이 죽은 후에 로 시작이 됩니다. 앞서 우리 다윗이 지나왔던 그동안의 인생을 잠시 살펴보면 양을 치던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기름 부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이 악령이 들자 다윗을 찾게 되고 다윗의 수금 연주를 통해서 악령이 떠나가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치지만 백성들에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의 노래를 통해서 사울로부터 그때부터 시기를 받게 되죠.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하고 10년이 넘도록 도망다니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다윗은 열다섯 광야를 지나 결국 블레셋 땅인 아기스를 거쳐서 시글락에서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과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간 시글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글락에 있을 때 블레셋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윗은 동족 이스라엘이 아닌 블레셋 편으로 전쟁으로 참가하여 갔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블레셋이 다윗을 의심하므로 전쟁에는 나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또 이스라엘 간의 동족 간의 전쟁은 피하게 하셨지만, 그 사이에 시글락에는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다윗의 두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을 포함한 시글락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다 잡혀가는 상황이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울에게 쫓겨 15광야를 갈 때와는 또 차원이 다른 자신의 가족들과 백성들이 사로잡혀 가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그런 고난 앞에 놓인 것입니다. 다윗을 찬양하고 칭송하고 그동안 다윗을 따랐던 백성들은 화가 나서 다윗을 돌로 치려 합니다. 다급해진 다윗은 땅을 치며 통곡하며 울다가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묻지 않고 갔던 시글락에서 드디어 다윗은 여호와께 묻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은 다윗은 아말렉을 도륙하고 그 전쟁에 나가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모두 배려해서 전리품을 다 같이 나누어주고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울이 죽은 것입니다. 사울은 이미 죽었지만 2절과 같이 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다윗 앞에 나옵니다. 3절에 보면 다윗이 어디에 왔느냐고 묻자 이스라엘 진영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의 전쟁이 궁금하던 다윗은 4절에 이 소식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사울도 죽고 아들 요나단도 죽었다고 전합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도망다닐 때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5광야를 지나고 내 가족과 백성들까지 사로잡혀가는 사건을 통해서 회개하고 나서 또 하나님께 묻자와 이르되를 통해서 전쟁을 치르고 전리품까지 나눠준 후에야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까지 사건을 통해서 자기 죄를 통해 자기 죄를 고백하며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반복하는 고난의 시간을 겪어내며 기다렸습니다. 다윗에게 사울은 다윗을 왕으로 만들고 자기 죄를 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든 내 손으로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어렵게 하는 이 사후를 처리하고 싶어 합니다. 하루 빨리 사울을 죽이고 싶고 그래서 나의 시대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저와 우리의 마음 가운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서운 사울이 있었기에 다윗은 회개를 하게 되었고 또 15 광야를 지나가면서 그 시간들 동안 나라를 다스리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이 죽은 후에야 다윗의 시대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2년 전 여름 당시 4학년이던 저희 첫째 아들의 뇌에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의 급격한 발달을 따라가지 못하여 저희 집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아들이 아내를 경찰에 신고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1대 왕 사울이었습니다. 그리고 2년이 흐르고 다윗이 등극을 해야 되는데 또 다른 두 번째 사울, 2대 사울이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둘째입니다. 몇 주 전부터 둘째가 첫째와는 또 다른 양상으로 온 가족을 15광야로 몰아넣기 시작했습니다.
딸의 뇌에도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가 급격히 발달하는지 본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자꾸 보여줍니다. 아들은 욕과 소리 지르는 것으로 나타났다면 딸은 소리 지름과 폭력으로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밖에서는 안 그러는 것 같은데, 대상은 저희 가족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는 타겟이 제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저렇게 장난으로 시작을 했다가 제가 팔을 붙잡고 때리지 못하게 제지를 하니까 수위가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사실 첫째 때는 그렇게 이제 아들이 행동을 하면 저는 윽박지르고 또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협박을 하면서 눌러서 그 상황을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주로 제가 없는 동안 집에 많은 사건이 터졌습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저희 집의 사울을 제 손으로 제가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결론은 저 대신 아내가 사로잡혀가는 경찰에 신고를 당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딸의 변한 모습에 아내가 저에게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당황스러워하면서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물어봤을 때 제가 예전에 부모 학교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사춘기 자녀는 부딪치면 안 되고 흘려보내야 한다. 그리고 가정에 소통이 되는 한 사람만 있으면 사춘기를 지나갈 수 있다. 아내에게 흘려보내야 한다라고 말은 했는데 저도 속으로는 이걸 어떻게 흘려보내지?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을 하다 보니 누군가 이 딸을 받아내야 되는데 저희 집을 봤을 때 그 역할이 제가 해야 되는 역할인 것들이 인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고 잠시 잠깐의 시간 동안 이런 이야기들과 생각을 하고 나서 딸이 계속해서 때리자 제가 맞아주기 시작했습니다.
또 이렇게 저렇게 저도 맞아주니까 딸이 힘이 빠지고 그러자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참 저도 신기한 경험을 한 게 아들이 난리 칠 때는 아들이 그렇게 못나게 보였는데 딸은 진짜 눈이 돌아가서 눈빛이 완전히 살벌해졌는데 그 모습이 이렇게 밉지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을 해보니 제가 딸을 어렸을 때부터 차별했던 제가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는 아들과 딸을 차별했습니다. 딸의 울음소리가 신경이 거슬린다고 또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차별을 했고 그게 또 심해져서 저는 이제 우울증 비슷한 게 와서 정신과까지 가서 약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이제 딸은 숙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 둘째는 그 모든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고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서 참 애를 많이 썼습니다. 저희 큰애와 막내가 난리를 쳐도 둘째는 항상 자기 할 일을 잘하고 그래서 항상 둘째에게는 특별히 무언가를 할 요청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딸에게는 틱과 비슷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신체 증상이 오게 되었습니다. 팔에 힘을 주고 꺾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원인을 알기 위해서 많은 대학병원들을 다니고 또 검사들도 받아봤지만 결국은 뇌와 신체에는 이상이 없다. 의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상담을 하고 여러 가지 검사를 한 끝에 아이에게 스트레스로 인한 강박과 불안이 원인이라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런 딸이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낸다고 이제 생각을 하니까 제 마음에 한편으로는 그 딸의 모습을 보면서 반가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저희 가정에 아까 1대 사울이 아들이라고 얘기를 했는데 사실 아들과 딸이 사울이 아니라 제가 사울입니다. 제가 회개가 안 되고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제 위주로 또 제 중심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아들과 딸이 수고하고 있는 것임을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딸의 사춘기는 딸이 아닌 제가 죽으라고 주신이는 사건임의 해석이 됩니다. 그러니 딸의 감정을 조금씩 받아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눈치를 잘 안 보는데요. 요즘에 제가 딸의 눈치를 저를 깨우시는 사건임이 인정이 됩니다.
그래서 저의 적용은 딸의 감정이 올라올 때 잘 받아주고 또 몸으로 잘 맞아주는 것이 저의 적용입니다.
적용 질문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하나님이 처리하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내 혈기로 먼저 관계를 끊어내거나 상황을 종결 지으려 하는 나의 사울은 누구입니까?
- 고난이 길어질 때 내 안에 사울을 죽이는 것보다 문제 해결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려면 첫째로, 나의 사울이 죽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2. 말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께서는 이 다윗과 같이 힘든 일을 마치고 이 전쟁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나를 힘들게 하던 사울이 죽었다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을 하실 것 같은가요? 저 같으면 드디어 사울이 죽었구나. 고난 끝 행복 시작이다를 외쳤을 것 같습니다. 이제 저희 가정에는 여전히 사울이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더 무서운 두 번째 사울보다 세 번째 사울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이제 다윗은 이 소식을 가지고 온 청년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다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의 소식을 가지고 온 이 아말렉 사람에게 물어보기 시작합니다. 왜 물어볼까요? 자신에게 너무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고 그냥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은 이 소식을 가져온 그 사람을 분별하라고 묻는 것입니다. 앞선 3절에서 다윗은 청년에게 어디서 왔는지 소속을 물어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스라엘 진영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 이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하라고 합니다. 다윗의 질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고 사울과 요나단도 죽었다고 다윗이 좋아할 것 같은 대답을 이 아말렉 청년이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5절에 또다시 질문을 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6절에서 10절까지 아말렉 청년이 쭉 그거에 맞는 대답을 합니다. 우연히 길보아산에 올랐다가 부상당한 사울을 만났고 자신을 불러서 자신이 아말렉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울이 자신을 죽여달라고 해서 왕관과 죽이고 나서 왕관과 그 고리를 가지고 주께 왔다는 아말렉 청년의 대답을 들으면서 다윗은 이 청년을 분별하였습니다. 이 엄청난 전쟁 가운데 우연히 산에 오른 것도 말이 되지 않고 그렇게 예배 중독자이며 끊임없이 블레셋과 싸우던 사울이 자신을 이방민족인 아말렉 사람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말할 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는 이스라엘 진영에서 왔다고 했지만, 결국 자기 입으로 자신이 아말렉 사람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 상황에서 이렇게 분별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도 사울의 수고를 통해서 수많은 전쟁과 도망 그리고 15광야를 거치는 고난을 겪었기에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단순히 질투해서 죽이고 도망가는 관계가 아닌 그 안에 심오한 영적 전쟁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없던 이 아말렉 청년은 그것을 알 수 없었고 단지 사울이 죽었으니 다윗이 좋아하겠구나 하면서 머물며 다윗이 좋아할 만한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고난 가운데 말씀을 듣고 나에게 허락하신 사울에 대해서 해석을 하게 되면 사람과 사건 환경에 대한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납니다. 지난 주일 말씀에도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끊임없이 세상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산당을 쌓고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음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에게는 오늘 다윗과 같이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나도 기다리던 나를 힘들게 하는 이 사울의 죽음 소식에 성도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끊임없이 묻고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QT는 Question Time의 약자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또 목장에 묻고 들을 때 내 안에 아말렉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 딸의 변연계 급성장의 시간을 잘 흘려보내야 되겠다는 적용을 한다고 했지만, 항상 그것이 저에게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안에도 이 아말렉 청년과 같이 내 손에 피 묻히지 않고 또 나의 유익만 구하려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주로 저희 딸의 감정이 급변하는 시기를 보면 시도 때도 없긴 하지만 주로 하루 일과가 마칠 때쯤입니다.
피곤하면 그것들이 확 몰려오는데요. 며칠 전에도 저녁을 먹고 자기 전에 설교 준비를 핑계로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데, 딸의 변신 모드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첫째와 막내 그리고 아내에게 본격적인 언어들이 나오고 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사실 제 마음 가운데는 못 들은 척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소리가 너무 컸습니다. 또 가서 맞을 생각을 하니까 약간 또 마음도 이렇게 편하지는 않고 어떻게 좀 피해갈까 생각을 했는데 딸이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엄마에게 몸에 힘이 안 빠지고 너무 짜증이 난다라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하던 일을 조금만 더 하면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는 마음과 지금 이 순간을 넘어가면 저희 가정에 더 큰 전쟁이 벌어질 것 같은데, 라며 생각이 들면서 고민만 하며 적용은 하지 않고 움직이진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첫째와 또 말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게 사춘기를 다 지나간 게 아니기 때문에 첫째와 둘째가 만나면 끊임없는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저희 집에는 끊임없이 제가 하는 역할은 첫째와 둘째를 분리시키는 역할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말싸움이 시작되는 것을 들으면서 속으로 또 시작이구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조금 전에 부부 목장을 마치면서 이 내용을 나누고 앞으로도 잘 막고 잘 흘려보내야 되겠다고 나누었던 것이 기억이 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선순위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 딸이라는 것들이 깨달아져서 하던 일을 멈추고 딸에게 갔습니다. 방에서 딸과 만난 손바닥을 들이밀며 때려 라고 말했더니, 이제 딸은 그 손바닥을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저희가 이제 권투할 때 이렇게 스파링 하는 것처럼 계속 그렇게 몇 번을 맞아주고 또 힘이 빠질 때까지 몇 분 동안 주문을 휘두르니까 체력이 좀 빠지니 마음이 진정이 되었는지 다행히 조금 후에 잠이 들었습니다. 끊임없이 이 말씀을 통해서 내가 문제이고 회개를 한다고 하지만 매일매일 그 상황이 오면 여전히 제 안에 아말렉 청년이 저에게 이것들을 어떻게 하면 피할까? 그래서 자녀를 당장 받아주기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제 안의 아말렉 청년이 저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마 말씀도 목장도 없었으면 저는 제 아내 이 아말렉 청년을 분별하지 못하고 또 딸을 밀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제 마음을 말씀과 목장에서 나누고 또 이렇게 듣고 나누니 아말렉 청년을 조금이나마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 가정뿐만이 아니라 각 가정에 사춘기 자녀를 두신 가족들과 또 그 외에도 사춘기뿐만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흘과 같은 지체 또 가족들 때문에 고난 가운데 있는 많은 성도님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들을 마주할 때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가 가장 궁금해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 답은 오늘 말씀의 제목과 같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때 사울이 죽는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나의 사울이 죽을 때까지 나에게 허락하신 열다섯 광야와 사로잡힘의 시간 가운데 회개하며 돌이키고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아말렉을 말씀과 공동체를 통해서 분별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때가 모든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임하게 되실 것입니다. 오늘은 주일입니다.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하는 사울이 있고 그 사울 때문에 예배의 자리에 나오게 되었다면 이미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때가 임한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담임 목사님께서 전해주시는 말씀으로 먼저 내 안에 아말렉을 분별하고 또 나에게 허락하신 사건과 환경을 분별하려 말씀으로 해석되시는 귀한 주일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또 대구와 광주에서 우리 담당 목사님들께서도 말씀을 전해주시는데 각 채플 유튜브로도 업로드가 됩니다. 오늘 QT를 하시는 데 더 많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이 들리고 돌이켜서 회개하시는 주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적용 질문 드립니다.
- 아말렉 청년처럼 내 유익을 위해서 상황을 왜곡하거나 타인의 불행을 나의 기회로 삼으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 오늘 내가 분별해야 할 내 아내 아말렉 청년은 무엇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여 내 손으로 사울을 죽이고자 하는 저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내 손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자녀들을 혈기로 눌렀던 제가 바로 사울임을 고백합니다. 자녀가 아니라 부모인 내가 사울임을 인정하며 우리 가정의 구속사의 계보가 이어질 수 있도록 자녀들을 잘 기다려줄 수 있고 잘 흘려보낼 수 있도록 주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나에게 허락하신 사울을 통해서 다윗이 다윗 되었던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사울이 우리의 거룩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붙여주신 귀한 존재임을 말씀으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울의 죽음의 소식에도 아말렉 청년을 분별했던 다윗과 같이 15광야의 고난을 통하여 분별할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시고 나의 유익과 옳고 그름이 아니라 구원의 가치관으로 구속사의 가치관으로 분별할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아말렉 청년과 같이 나의 유익 때문에 거짓을 말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 각자가 말씀으로 내 안에 아말렉 청년을 분별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들 공동체를 주님 기억하여 주시고 진행 중인 모든 양육 가운데 묻고 답하는 모든 과정 가운데 각자의 아말렉을 분별할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시고 준비 중인 국내외 띵급트립을 통하여서 주님과 함께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때를 잘 기다리며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주님 함께하여 주시고 참석하시고 준비하시는 모든 손길 가운데 주님의 은혜가 있을 수 있도록 주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오늘 말씀을 전하실 우리 담임 목사님을 주님이 붙들어 주시고 우리 목사님을 통해서 전해지는 말씀을 통해서 각자의 사울을 잘 해석하고 내 안에 아말렉을 분별하는 은혜가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담임 목사님 영육 간의 강건함으로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민족을 주님 불쌍히 여겨주시어 아말렉 청년과 같이 나의 유익처럼 보이게 하는 모든 동성애를 옹호하는 악법들을 주님 막아주시고 태아생명보호법이 하루빨리 적용될 수 있도록 주님 역사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제 지방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먼저 다윗과 같이 구속사적 가치관으로 잘 분별하여 투표할 수 있도록 주님 함께하여 주시고 이나라 가운데서 다윗과 같이 고난을 통해서 말씀이 들리고 분별의 영이 임한 그 한 사람이 세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주일입니다. 우리 예배에 나와 참석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께서 축복하여 주시고 말씀으로 삶이 해석되는 은혜가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다윗이 보는 세계관
삼하 1장 1-10절 / 우리교회
오늘 본문에 두 가지 죽음이 나옵니다. 하나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죽음과 다른 하나는 ‘할례없는 족속의 죽음’입니다. 사울왕의 죽음은 ‘기름부음의 받은 자’요, 아마렉 소년의 죽음은 ‘죽어야 될 자의 죽음’입니다. 즉 이 세상에는 죽지 말아야 할 자의 죽음이 있고 죽어 마땅한 자의 죽음으로 두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죽음’을 통해서 세상을 분별하시고 보십니다. 즉 “너희들이 얼마나 잘 났느냐”가 아니라 “너의 죽음은 어떤 성질의 죽음이냐”를 물으시는 겁니다. 사람이란 모두가 죽지 않기 위해 환장을 합니다. 매일같이 자신의 양심까지 속여가면서 사는 이유가 다 ‘조속히 안 죽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죽음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십니다. 마태복음 8:21-22에 보면,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숨이 끊어진 자를 두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숨이 끊어지지 않더라도’ 죽은 자로 봅니다. 정말 산 자가 되고 싶다면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지 아니하면 같이 죽은 자로 분류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인간을 두고 하나님은 ‘죽은 자’로 간주하시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갑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새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사람들의 힘도 아니요 참새 그것들의 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떨어지는 겁니다. 하물며 사람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 힘으로 생명이 유지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햇빛 주시고, 공기 주시고, 심장을 뛰게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고마워하지를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심하게 미워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교회마저 그러합니다. 오로지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노고를 칭찬하고 찬양해주기를 요청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도 같은 입장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음에 자부심을 갖고서 망하지 않고 패배하지 않는다고 장담했던 이스라엘이 왕도 죽고 패배하므로서 도대체 하나님이 함께 계심이 무슨 뜻인지 무색케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의 자리’에 대해서 백성들에게 그 확고한 위치성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누구든지 이 ‘하나님께 기름부음의 자리’를 훼손하는 자는 필히 저주받아도 마땅하다는 점을 확실하게 말해주는 조치를 취합니다. ‘기름부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살려주는 것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이 ‘기름부음 받은 자’의 존재 때문입니다.
이 자리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결코 ‘할례없는 민족’에게 패배당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패배하고 왕과 그 왕자가 전사한 것에 대해서 다윗은 대단히 비통해합니다. 그래서 이 사실이 ‘할례없는 민족’들에게 알려지기를 않기를 기도합니다. 사무엘하 1:20에 보면,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할례 받지 못한 자들에게 이스라엘이 패배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신 이 연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하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셔야 합니다. 로마서 5:6-10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경건치 않는자’, ‘죄인된 자’, ‘원수된 자’, 그리고 ‘진노하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게 되면, 자신이 이러한 용어에 해당되는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멀찍이 바라보게 되면 졸지에 자신은 경건한 자가 되고 남보다 덜 죄인이 되는 자요, 원수가 아니라 존경받고 사랑받는 관계요, 진노하심에서는 해당이 안된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십자가의 피가 다가오면 올수록, 심지어 그 십자가가 우리 안에 깊이 박히면 박힐수록 우리 자신이 경건치 못하고 죄인되고 원수되고 그리고 진노하심을 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할례받지 못한 자’들과 우리의 본성상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을 자생적으로 ‘죽은 자’로 여기지 아니하고 ‘산 자’로 여긴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나를 더 산 자가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받은 계시가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어느 골짜기에 해골이 가득 차 있는 계시입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바벨론 나라에 포로잡혀 가 있는 처량한 신세입니다. 왜 자신들이 남의 땅에서 고생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에스겔은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너희들이 우상을 숭배한 죄를 지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해골 무더기로 데려간 것은 바로 그 해골 무더기가 곧 인간 무더기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신을 볼 때는 마치 산 자로 여겨지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바짝 마른 해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묻습니다. “이 해골이 어떻게 살겠는가?” 즉 “이 해골은 지금 죽어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그들은 사람이 되어서 비로소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참모습입니다. 이를 때 하나님의 ‘기름부음’의 가치가 빛이 나는 겁니다. 즉 자신을 죽은 자로 보는 자만이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증거하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사는 참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산 자로 보지 말고 죽은 자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사울의 사망 소식을 접하는 다윗
김근중목사(창녕감리교회) / 삼하 1:1-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난 시간 사무엘하 강해 첫 번째 시간으로 “사무엘하의 전체 개요”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무엘하는 사무엘상에 이어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다윗에게 보고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영광과 치욕으로 점철된 다윗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의 즉위와 체제 확립’, ‘정복 사업’, 그리고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분기점으로 하여, ‘다윗의 범죄와 압살롬의 반란’, ‘회고기’ 등으로 다윗의 이스라엘 통치를 드라마틱하게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다윗의 왕국과 그의 통치는 여타 이방의 왕정체제와는 달리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여 통치하는 신정왕국이라는 측면에서 그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즉, 다윗의 왕국과 그의 통치는 장차 도래할 메시야 왕국과 메시야의 통치를 예표하는 그림자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더불어 “위대한 다윗 계약”을 체결하시고, 다윗을 통해 당신의 뜻을 구현해 나가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아울러 언약 공동체인 그의 왕국 이스라엘을 높이 드사 만방 앞에 당신의 주권성을 널리 드러내셨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무엘서는 결코 다윗이라고 하는 한 개인의 생애를 다룬 자서전적 역사서가 아닙니다.
즉, 사무엘서는 다윗이라고 하는 개인의 삶과 나아가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법도를 일깨워 주고, 나아가 장차 도래할 메시야 왕국을 대망케 하는 예언적 역사서로써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이 선출한” 사울 왕은 신체적으로는 준수하였으나 영적으로는 민감치 못했습니다.
실패의 연속으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하시고, 그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준비시키고, 때가 되어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놀라운 은혜와 권능으로 역사의 하나님으로써 계시와 봉사, 축복, 심판의 매개체로 군왕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서의 사건과 인물, 그리고 내용을 통하여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두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성취를 위해서는 우리의 인내와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의지가 필수적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오늘부터 약 3번에 걸쳐 영광과 치욕으로 점철된 다윗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기록하고 있는 사무엘하 제1장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무엘하 제1장은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곡”에 대한 내용으로 그 내용상 사무엘상 마지막 장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사무엘하 1장은 사울의 죽음을 근간으로 삼아 사건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무엘상의 마지막 장인 31장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의 세 아들이 전사하고, 사울마저 자결했다고 하는 비참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 장에는 소위 사울의 명령을 좇아 자신이 사울의 목숨을 끊어주었다고 주장하는 아말렉 사람이 등장합니다.
성공적인 아말렉 원정을 끝내고 시글락에 돌아온 다윗에게 이스라엘 군의 진지에서 도망쳐 온 한 아말렉 사람이 사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전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전해 듣고 기뻐하기는커녕 도리어 옷을 찢고, 슬퍼하며,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존중히 여기지 않은 아말렉 사람을 죽이도록 명령합니다.
그리고 나서 본 장에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의 애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본 장에서 자신을 그토록 핍박하던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기는커녕 도리어 크게 애통하는 다윗의 고매한 인격을 발견할 수 있으며, 특히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를 끝까지 존중하는 다윗의 뛰어난 신앙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사울의 사망 소식을 접하는 다윗”에 대한 기록입니다.
즉, 오늘 본문은 다윗이 앞서 시글락을 약탈했던 아말렉 족을 응징한 후 다시금 시글락에 돌아와 거주하고 있던 때를 배경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당시 다윗은 사울과 블레셋 간의 길보아 전투 상황에 대하여 대단히 궁금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때 이스라엘 진영에서부터 도망쳐 나온 한 아말렉 소년이 다윗에게 이르러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소식을 보고한 것입니다.
당시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의 맹주인 가드 왕 아기스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며, 아기스 왕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전쟁에 다윗을 참전케 하려 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이스라엘을 정복하는 전쟁에 부득불 참가하는 수치를 남기게 됩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블레셋 방백들의 경계심으로 인해 간신히 그 위기에서 벗어나 자신의 거주지인 시글락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시글락에 도착했을 때에는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완전히 섬멸하지 안 했던 아말렉 족속이 시글락을 불태우고, 여자들과 아이들을 사로잡아 가버린 후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다윗은 추종자들로 원망을 듣고 잠시 곤경에 처하게 되지만, 곧 용기를 얻어 아말렉을 추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그들을 크게 진멸하고, 여자들과 아이들 뿐 아니라 빼앗겼던 것을 모두 찾게 되었고, 시글락으로 되돌아와 전리품의 일부를 유다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전해들은 것은 아말렉 사람들을 도륙하고 다시 시글락에 돌아와서 이틀이 지나고 제3일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즉, 가드 왕 아기스를 중심으로 한 블레셋 연합군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전쟁 도중에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좀더 자세한 설명을 요하자 그는 자결한 사울을 자신이 죽였다고 거짓 보고를 합니다.
아마도 아말렉 소년이 이처럼 허위 보고한 까닭은 다윗이 이전에 사울로부터 무고하게 핍박받은 사실을 감안, 다윗으로부터 어떠한 상금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에게 사울의 죽음을 보고하는 아말렉 소년의 태도를 보십시오.
사울의 진에서 나온 소년의 모습은 “그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최고의 슬픔을 표시하는 모습인데, 사울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먼저 그는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너는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 다윗에게 “이스라엘 진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라고 대답함으로써 다윗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다윗은 무엇보다도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 결과가 궁금했기 때문에 “일이 어떻게 되었느뇨? 너는 내게 고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러자 그 소년은 절호의 기회를 만난 것처럼 “전쟁 중에서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중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라는 보고를 통하여 패전을 알리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라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이에 다윗은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진의를 모르는 소년은 삼상 31:3-6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조작된 내용의 보고를 합니다.
실제로는 사울이 자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보고하면서 “그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라고 자랑스럽게 덧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불의한 방법으로 이 세상을 살려한 소년의 삶의 방법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첫째, 소년이 취한 삶의 방법은 “불의한 상황 판단”이었습니다.
그렇게도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던 사울 왕이 죽었습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의 아말렉 소년은 그 광경을 우연히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과 다윗의 불편한 관계까지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소년은 생각하기를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하면 분명 다윗이 기뻐하리라 여겼습니다.
더 나아가 소년은 다윗으로부터 특별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그 판단이 바로 그를 죽음으로 이끈 그의 불의한 상황 판단이었습니다.
소년의 이같은 판단은 마치 한 달란트 받은 불의한 종의 판단과도 같고, 성령을 돈으로 살 수 있으리라 여겼던 시몬의 판단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세상을 불의하게 살려는 자는 상황 판단 자체가 벌써 불의하게 시작됩니다.
정직과 진실, 그리고 순리를 떠난 채, 갖은 수단과 모사로 상황을 돌파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죽음을 자초하는 불의한 상황 판단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본문에 기록된 아말렉 소년의 결과를 기억하여, 어떤 불의한 판단도 버려야 합니다.
둘째, 소년이 취한 삶의 방법은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입니다.
아말렉 소년은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을 다윗에게 보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31장 4절에 보면 사울 왕은 자결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탐욕과 아첨으로 인해 자신이 사울왕을 죽였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의한 삶의 모습은 거짓말하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모든 진실을 허물어 버리고 그 위에 거짓을 건축하여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 과정과 결과가 잘 될리가 없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그랬고, 베드로 앞에 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모습이 그러했음을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통하여 장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같이 거짓말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모습이 성도의 참 모습이며, 세상을 바르게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본문에 기록된 아말렉 소년의 말로를 기억하여 어떠한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소년이 취한 불의한 삶의 방법은 그의 “영적 무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본문의 아말렉 소년은 영적으로 전혀 무지한 자입니다.
소년은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누구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는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특별히 구별된 자의 영적 권위를 분명하게 인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말렉 소년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기에 감히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말하기에 이르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의한 자의 삶의 모습은 영적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마치 애굽의 바로 왕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들나귀 새끼 같으며, 재앙을 향해 오히려 나아가는 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 22:3)
따라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 무지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며, 불의한 삶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본문에 기록된 아말렉 소년의 말로를 기억하여, 영적 무지를 극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울의 죽음은 다윗에서 있어선 고달픈 망명 생활의 종료와 아울러 영광스러운 왕위의 획득을 의미하는 경사스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이를 기뻐하기는커녕 본문과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다윗의 신앙 인격의 발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이는 비록 사울이 자신의 원수이긴 하지만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란 사실을 중요시 여기는 다윗의 신앙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의 빛나는 신앙 인격이 있습니다.
즉, 비록 인간적인 실수나 허물이 있었던 다윗이지만 그는 사적인 이해 관계나 감정, 원한 등을 초월하여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노력했던 신앙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다윗을 왕으로 세우사 이제 이스라엘을 신정 왕국 체제로 확립시켜 나가시는데, 그 과정의 역사가 곧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은 성도는 이 세상의 불의한 판단과, 불의한 거짓말과, 영적 무지함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아말렉 소년의 태도는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존중하여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어도 죽이지 않았던 다윗과 전혀 다르게, 오직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태도이며, 왕위에 오를 다윗에게 아첨하여 공로를 인정받고자 하는 기회주의적인 태도입니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흐름이 아말렉 소년의 삶을 닮는다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이 시대에 진리와 정의가 무엇인지, 바른 삶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세상의 불의한 판단과 불의한 거짓말과 영적 무지함은 어리석은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종인 왕
삼하 1장 / 잡초
히브리 성경은 사무엘서가 상·하 두 권이 아닌 하나의 두루마리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사무엘하부터 다윗 왕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내용상 구별될 수 있는 지점이지만, 사무엘서 전체는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왕이심’을 증언합니다. 표면상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실상은 신정왕국의 통치를 대행하는 하나님의 종이었지요.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가 주변의 열강들과는 달리 하나님 나라로서의 특성을 잘 드러내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다윗이 이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 가는지 보겠습니다.
1절의 “사울의 죽은 후”라는 말은 드디어 쫓기는 삶이 끝나고 새 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도륙”하고 “시글락”에 머무른 사실을 구태여 언급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다윗이 함께 참여하지 않았으며, 사울의 죽음과 관계되지 않았다는 강력한 알리바이입니다. 그리고 이 알리바이는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으로 세움 받는 일에 매우 중요하지요. 또 한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점은 아말렉 진멸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지시하셨던 뜻이었다는 점입니다(삼상 15:3). 사울의 불순종으로 성취되지 못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루셨지요.
종종 우리네 삶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말렉의 침략을 허용하신 후 승리를 주신 일이 마치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해석될 때가 있지요. ‘왜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 왜 처음부터 막아주지 않으셨을까?’라는 의문으로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하나님의 지혜롭게 행하셨음을 감사하게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 속에 지내기도 하지요. 그럴 때에 성도가 가져야 할 자세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9)는 말씀을 겸허히 수용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로우심을 의심치 않고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시글락에 거한 지 “제삼일”에 사울의 진으로부터 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패배와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다윗에게 전했습니다(2). 자기의 공이 은근히 드러나도록 사실을 슬쩍 각색한 보고내용이지요. 해발 500미터 정도 되는 길보아 산에서 “병거와 기병”(6)을 운용하기란 어렵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사울을 “촉급히”(바짝) 따랐다면 최고의 전리품이 될 왕의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10)를 놓치지 않았겠지요. 이방인의 손에 죽지 않으려고 자결했던 사울이 “아말렉 사람”(8)임을 확인한 후 도움을 청했다는 것도 모순입니다. 이처럼 몇 가지 의혹은 있지만 이스라엘의 패배와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아말렉 소년이 면류관과 팔고리를 길보아 산에서 130km 정도 떨어진 시글락까지 가져왔을 때는 그만큼의 보상을 기대했겠지요. 차기 왕은 다윗이 될 것이라는 분석과 평생 다윗을 대적했던 사울의 죽음은 기쁜 소식이 될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했겠지요. 시대의 흐름과 권력의 향방을 잘 파악해서 적당한 시기에 소속을 바꾸어가며 출세를 꿈꾸는 그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전사 소식을 접한 다윗의 첫 번째 반응은 아말렉 소년의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다윗은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당한 사람처럼 “자기 옷을 잡아 찢”으며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11-12)했지요. 그러자 다윗의 사람들도 따라했습니다.
흔히 좋은 기회를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윗이 그일라 성에 갇혔을 때, 사울은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고 해석했지요(삼상 23:7). 반면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상황을, 여호와께서 손에 붙이시겠다고 하신 “그 날”로 해석했습니다(삼상 24:4). 자기 마음에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 이루어질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속단하기가 쉬움을 보여주지요. 다윗도 아말렉 소년이 가져온 왕관을 보면서 ‘이제 나를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되었나보다’라고 해석하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상황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예단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에 비추어 생각했습니다. 이것들과 충돌되는 일이면 아무리 좋은 기회와 환경이 주어져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할 줄 아는 다윗의 탁월함 여기에 있습니다. 기회나 환경이 마련되었다고 해서 쉽게 속단에 빠지지 않는 그를 보면, 왕좌에 집착하지 않았음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간절한 소원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일보다 ‘하나님의 종’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철저한 하나님의 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되면, 사울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면서 실상은 자기 권위로 백성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 됨을 알았나 봅니다.
원수일지라도 ‘죽음’ 자체는 기뻐할 요소가 전혀 아닙니다. 인간의 경험 중에 가장 큰 슬픔을 내 기쁨으로 삼는 일은 잔인하고 무정하여서 하나님의 종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태도지요. 성경은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잠 24:17-18)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출 23:4-5)라고 가르칩니다.
사울의 죽음에 대해 울며 금식한 후 다윗이 보인 두 번째 반응은 아말렉 소년을 처벌한 일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14)라고 정죄하고 “저를 죽이라”(15)고 판결했지요. 아말렉 소년이 죽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한 기회주의자였다면 용서할 수도 있었겠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하는 자를 묵과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그를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하는 죄에 해당하며, 그 죄에 대한 형벌은 사형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렸지요. 장차 이스라엘 왕이 될 사람이 보여준 첫 판결이었습니다.
아말렉 소년이 죽자 다윗은 다시 한 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16)고 했습니다. 아말렉 소년의 말이 사실이든 꾸며낸 말이든 그의 말에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존중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크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는데, 말을 보면 그 속에 어떤 존재가 있는 지 알 수 있지요. 비록 꾸며낸 말일지라도 아말렉 소년의 말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분명히 사울을 죽였을 사람임을 알려줍니다. 또한 꾸며내 보고라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을 기만한 행위이므로 이 또한 여호와의 권위를 멸시한 죄에 해당합니다.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권위를 최종 권위로 삼고 자신부터 복종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했기 때문에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들을 포기했었지요.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어렵게 돌아가며 모진 인고의 세월을 겪었습니다. 반면에 자신에게 큰 유익을 줄지라도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한 자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스릴 나라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존중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는 신정왕국의 통치자로서 합당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나라를 증시할 기관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 권위가 되는 것이 첫째 원칙이어야 하지요.
다윗의 세 번째 반응은 “활 노래”를 지어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게 한 일입니다(17). 12절에서 다윗이 울며 금식했었던 이유는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음 때문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여호와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족속에게 패배를 당하므로 비웃음거리가 되고 수치를 당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고 다시는 퇴색되지 않고 늘 하나님 백성 중에 존재하도록 역사적 교훈을 노래에 담았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의 첫머리는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19)로 시작됩니다.
“영광”(ybiC.h;, 하체비)이라는 단어는 수리아 역본에서는 ‘가젤 영양’(gazelle)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어떻게 번역되었던 다윗의 관심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가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에게 패배한 것은 “이스라엘의 치욕”이라는데 초점이 있습니다(삼상 17:26). 두 번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로 생각한 것이지요.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다윗은 백성들이 사울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 기간 중 이스라엘 백성이 누렸던 안정과 번영을 ‘감사’하게 합니다. 또한 일신의 평안보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왕좌에서 비켜섰던 요나단의 기이한 ‘사랑의 정신’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도 기이하지만, 사울에 대한 다윗의 칭송 역시 기이합니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이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 기이함 때문에 활 노래는 다윗의 고단수 정치 쇼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맛본 사람들은 오늘날도 기이한 사랑과 기이한 용서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그분의 기이한 사랑이 가슴 먹먹하게 채워져서,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성품이 표출하지요. 인간이란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깊이 깨닫고서 원수를 용서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의 속성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그분의 종이 되는 일이 첫 번째 일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