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허리부터 시작된 통증이 어깨 목까지 올라와 글쓰기도 힘든 상황이라서 스태프에게 카운터를 맡기고 잠자리에 들었어요. 염병, 이번엔 꿈에서 형제자매들이 나타나 나를 괴롭힙니다. 싸우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왜 내 기분이 언짢은 걸까요? 가끔은 나도 내 안의 내가 낯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에스더가 자기 안의 자신이 못마땅할 때가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어쩌면 니 안에도, 내 안에도, 타자가 있는 것일지도 몰라. am 5시 반에 밖으로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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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끝이라서 아직 치워지지 않은 쓰레기가 거슬렸고, 차이나타운을 지나면서 이 집은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헤겔의 <동일성> 강의를 듣고 가는데, 무슨 소린지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기에 슬슬 짜증이 났어요. 에라 밥이나 먹자! 수제비를 시켜 먹고 있는데 누가 아는 체를 합니다. "형님! 저 킹 타이에요(어쩐 일이야?) 지나가다가 뒷모습이 딱 형님 같아서 들어온 겁니다(아따, 니가 그래도 촉이 아직 있구나) 뒷모습만 봐도 포스가 그냥 딱 형님이 시 더리고요.(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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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썩 좋지가 않아 접대용 멘트를 날렸는데 가지 않고 자리에 앉네요. 자기네들 15개 업소 모두 가격을 올렸으니까 우리도 올려달라는 말 같습니다. "니가 가격 올려달라고 하면 내가 올려 줘야 하냐?" 헤겔의 <동일성>은 무엇인가? 어떤 것은 혼자서 ‘그것’이 되는 게 아니라, 자기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나’는 혼자 나가 아니라 타인과 부딪치면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모순> 세상은 모순이 생기면 그냥 망하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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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순 때문에 움직이고 변화합니다. <변증법> A와 A가 아닌 것이 충돌하면서 둘 다 이전과 다른 단계로 변합니다. 흔히 ‘정-반-합’이라고 배우지만, 헤겔의 실제 생각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역사성>진리와 인간은 완성품으로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형성됩니다. 그래서 헤겔 이후 철학자들은 헤겔을 피해 가기가 어렵습니다. 마르크스는 헤겔을 물질과 계급투쟁의 방향으로 뒤집었고, 키르케고르는 거대한 헤겔 체계에서 빠져나가는 <개인>을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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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변증법적 화해 자체를 의심했고, 하이데거는 헤겔이 완성했다고 여겨지는 서양 형이상학을 다시 문제 삼았습니다. 프랑스 현대철학의 들뢰즈와 데리다도 각각 <차이>를 통해 헤겔적 동일성과 변증법을 공격했습니다. 지젝과 바디우에 이르면 오히려 헤겔을 다시 불러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겁니다. 20~21세기 철학은 상당 부분 “헤겔이 맞는가, 틀리는가, 아니면 헤겔을 다르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싸움의 역사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이 <동일성과 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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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쉽게 말해 "다른 것을 만나야 내가 내가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여기서 반발합니다. "왜 차이를 결국 동일성 안으로 끌어들여야 하지? 차이는 그 자체로 차이일 수 없나?" 데리다도 비슷한 질문을 던집니다. "A와 B의 대립이 마지막에 하나의 더 높은 진리로 화해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지?" 반대로 지젝은 말합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모순과 균열이야말로 원래 헤겔의 핵심 아니냐?” 그래서 21세기 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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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을 버리겠다는 철학자조차 무엇을 버리는지 설명하려면 헤겔을 불러와야 합니다. 헤겔 이전에는 ‘세계가 무엇인가’를 물었다면, 헤겔 이후에는 ‘세계와 인간은 모순과 차이를 통해 어떻게 변화하고 만들어지는가’를 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헤겔 없이는 21세기 철학이 불가능하다"라는 말은 헤겔이 최종 정답이라는 뜻이 아니라, 현대철학이 싸우고 있는 링 자체를 헤겔이 상당 부분 만들어 놓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2.
나는 타자를 만나야 비로소 내가 되는가? 내 안의 못마땅한 나,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가족과 타인은 ‘진짜 나’를 방해하는 존재일까, 아니면 오히려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존재일까? 몸이 아프면 마음의 방어벽도 얇아지는 모양입니다. 허리에서 시작된 통증이 어깨와 목까지 올라오고, 잠을 청했는데 꿈속에서는 형제자매들이 나타나 괴롭힙니다. 싸운 것도 아닌데 잠에서 깨고 나니 기분이 언짢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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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 정말 꿈속의 형제자매들인가, 아니면 그들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내 안의 낯선 나’인가? 에스더가 “자기 안의 자신이 못마땅할 때가 있다”고 했다는 말은 그래서 철학적인 문장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나’를 하나의 단단한 덩어리처럼 생각합니다. 진짜 내가 있고, 타인은 그 바깥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헤겔에게 자아는 그렇게 고립된 섬이 아닙니다. 나는 타자와 관계하면서 비로소 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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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화나게 하고, 질투하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까지 나라는 존재를 드러내는 거울이 됩니다. 그러니 아침의 작은 사건들이 묘하게 헤겔적입니다. 치워지지 않은 쓰레기는 질서에 대한 내 감각을 건드리고, 부지런한 가게는 게으름과 부지런함에 대한 내 판단을 불러냅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헤겔 강의는 ‘나는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심지어 수제비를 먹다가 만난 킹 타이 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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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개 업소가 모두 가격을 올렸으니 형님도 올려달라.” 여기서 타인의 욕망이 내 결정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나는 묻습니다. "네가 올려달라고 하면 내가 올려줘야 하냐?” 이 한마디가 꽤 헤겔적입니다. 나는 타인의 요구를 통해 나의 입장을 확인하지만, 그렇다고 타인의 요구와 동일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타자는 나를 규정하지만 나를 완전히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관계 속에서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기 결정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자유의 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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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헤겔의 ‘동일성’을 단순히 “A=A”라고 이해하면 중요한 것을 놓칩니다. 헤겔이 흥미로운 이유는 동일성 내부에 이미 차이가 들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는 나다”라고 말할 때조차 그 ‘나’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아버지로서의 나와 장사하는 나, 꿈속의 나와 깨어 있는 나가 서로 부딪치며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동일성이란 차이를 제거한 순수한 하나가 아니라 차이를 통과하면서 유지되는 자기 자신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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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가끔 나도 내 안의 내가 낯설다”는 고백은 헤겔을 읽는 좋은 출발점입니다. 라캉식으로 가면 이 낯섦은 더 깊어지겠지만, 헤겔에게도 자아는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가 낯선 나를 만나고, 타인에게 부정당하고, 다시 나를 세우는 과정을 거치면서 주체가 형성됩니다. 나에게 타자는 제거해야 할 이물질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돌아오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길인 셈입니다. 바로 여기서 들뢰즈와 데리다가 헤겔에게 시비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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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차이가 결국 더 높은 동일성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차이를 차이 그대로 놓아두면 안 되느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젝은 헤겔을 변호합니다. 헤겔의 화해란 모든 갈등이 깨끗하게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화해할 수 없는 균열 자체가 나와 세계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읽습니다. 이렇게 보면 꿈속 형제자매와 현실의 킹 타이는 전혀 다른 인물이면서도 오늘 글에서는 같은 역할을 합니다. 둘 다 나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불편함 때문에 오히려 내가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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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디까지 양보할 것인지, 무엇만큼은 내가 결정하고 싶은지가 보입니다. 그래서 헤겔의 철학은 “모순을 없애라”는 철학이라기보다 <모순을 통과하라>는 철학에 가깝습니다. 나와 타인, 자유와 관계, 사랑과 미움, 인정과 거부 가운데 어느 한쪽을 지워버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충돌을 통과하면서 이전과 다른 내가 만들어집니다. 들뢰즈와 데리다가 헤겔을 공격하고, 지젝이 다시 헤겔을 불러내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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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모든 철학적 질문에 정답을 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나’와 ‘세계’ 자체를 움직이는 문제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새벽 5시 반, 몸은 아프고 꿈은 뒤숭숭하고 헤겔 강의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하루가 반드시 철학 공부에 실패한 하루인 것은 아닙니다. 책에서는 이해하지 못했던 헤겔을 거리에서 조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혼자서는 완성된 ‘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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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타자를 만나면서 내가 누구인지 드러납니다. 그리고 가장 낯선 타자는 어쩌면 내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서 끊임없이 “너는 정말 누구냐?”고 묻고 있는 또 하나의 나인지도 모른다" 헤겔을 다 이해하지 못해 짜증이 나 수제비를 먹으러 갔는데, 어쩌면 그날 헤겔은 강의실보다 꿈속의 형제자매와 수제비집에 먼저 와 있었던 셈입니다.
2026.8.19.wed.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