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내내 공중파와 종편을 점령했던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이 한편의 잘 짜여진
역할극이었음이 밝혀졌다.
뉴스타파가 입수한 기자회견 사전각본은 이날 12명의 기자가 던진 질문과 대통령의
답변이 토씨하나 틀리지 않은 연기였음을 보여준다.
중간중간의 추임새와 추가질문까지도 사전에 기획된 대본을 따른 것이라고 하니
청와대의 꼼꼼한 기획력에 박수를 보내야겠다.
뉴스타파 - 박근혜의 애완견과 '코드예산' (2014.1.10)
신년기자회견을 빙자한 이 기막힌 역할극에 많은 사람들이 개탄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21세기는 바야흐로 만능엔터네이너의 시대다.
이제 가수와 연기자는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이고, 개그맨과 연기자, 아나운서와 연기자의
벽도 무너진지 오래다.
국정원과 악플러의 경계가 사라지고 경찰과 사설용역의 경계마저 사라진 이 융합의
시대에 기자들이 연기좀 한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 게다가 '기자'와 '(연)기자'는 한끝차이
사촌지간이 아닌가. 본연의 역할에서 벗어나 연기라는 새로운 장르에 발을 내디딘
그들의 '겸업정신'은 고용시장유연화라는 정부여당의 시책에도 부합한다.
나는 그날 데뷔한 연기꿈나무들의 도전정신을 높이 사는 바이다.
이 역사적이고 범국가적인 쇼를 감상하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다람쥐주인의 방>에서 조촐한 시상식을 마련했다.
대통령 신년기자회견 연기대상 어워드
1. <남우조연상> 채널A 박민혁 기자
열연중인 박민혁 기자. 안방극장에서 만나길 기대한다.
대통령에게 질문을 던진 12명의 (연)기자 중 군계일학의 연기력을 뽐낸 기자가 한명
있었다. 4번째 질문자로 마이크를 잡은 채널A 박민혁 기자는 개각에 관한 평범한 질문을
하나 던진 뒤 "짧게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라며 두번째 질문을 이어갔다.
"대통령님께 사생활을 묻는게 실례지만, 퇴근 후 관저생활에 대해 국민들이 매우 궁금해
합니다. 대통령님은 퇴근 후 관저에서 도대체 무얼 하시나요?"
물론 이 오글오글한 질문 역시 대본의 설정에 따른 진행이었지만 마치 예정에 없던
돌발적인 질문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의 표정과 어조에는 자연스러움이 뭍어났다.
게다가 이 애드립대마왕은 "(퇴근 후 주로 보고서를 보신다는) 그런 건 국민들이 너무나
잘 알고 계시니까 다른 답변 부탁드립니다"라는 대본에도 없는 아부멘트를 구사하며
발군의 연기센스를 발휘했다.
이 흡족한 질문에 대통령은 표정관리를 포기했고 덕분에 국민들은 새해 벽두부터
대통령의 얼굴에서 함박웃음을 볼 수 있었다.
이분은 기자보다는 연기자의 길을 가는 것이 좋아 보인다.
연기에 대한 끼와 열정을 볼 때 그가 기자생활을 고집하는 것은 재능낭비다.
게다가 박 기자의 '겸업정신'은 2년전 신문방송 겸업을 선언한 채널A의 경영철학과도 맞아
떨어진다. 그를 하루빨리 뉴스가 아닌 안방극장에서 볼 수 있길 기대한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아닌가.
2. <여우조연상>
안타깝게도 이 부문은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이날 대통령에게 '송곳같은' 질문세례를 퍼부었던 12명의 기자 중 여기자는 한명도 없었다.
인간세계의 일반적인 남녀성비는 5:5정도지만 이날 무대에서 (진행을 맡았던 이정현 홍보
수석까지 포함) 마이크를 잡았던 조연들의 성비는 13:0이었다.
아마도 여성대통령 혼자 남성기자들을 12:1로 상대하시는걸 감안하여 그렇게 맞춘 듯 같다.
과연 박근혜 정부다운 균형감각이다.
3. <웃음보따리상>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
배꼽도둑 이정현 홍보수석
박민혁 기자의 주옥같은 질문에 대해 대통령이 답변을 마치자 진행을 보던 이정현
홍보수석은 뜬금없는 개그포를 날려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희망이와 새롬이는 관저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진돗개 이름입니다"
개이름으로 사람을 웃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타고난 개그감으로 볼 때 그는
정극보다는 희극에 어울리는 배우라 해야겠다. 여기서 이 수석의 지나간 개그 한마디.
"농담하나 할까요? 저 내시 아닙니다. 하하하"
4. <각본상> 청와대 홍보수석실
역시 극에는 각본이 중요하다. 이날의 각본은 훌륭했다. ‘벌꿀’과 ‘꿀벌'이나 '이산화탄소'와
'이산화가스' 같이 자주 헷갈릴만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했고,
'국민'이란 말을 26회, '경제'란 말을 24회 동어반복하여 국민들의 '이지리스닝'을 도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홍보수석실은 이렇게 훌륭한 각본을 짜놓고서도 그것을 자신들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며 겸양을 떨었다.
질문지 상단에 '홍보수석실'이라는 표기가 선명함에도 그들은 "경위를 파악중이다"라며
오리발 연기를 선보였다. 아마도 극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쇼가 끝났음을 아직 모르는
듯하다.
5. <연기대상>, <겸손상> - 박근혜 대통령
국민 앞에 연신 고개를 숙이는 겸손함
예상했겠지만 영예의 대상 수상자는 주연 여배우 박근혜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잦은 해외연설로 갈고 닦은 무대장악력을 바탕으로 길고 긴 대본을 무리없이
소화하며 농익은 연기를 선보였다. 그녀의 연기 중 압권은 국민 앞에 연신 고개를 숙이던
장면이었다.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이 끝날 때마다 어김없이 고개를 숙인 채 준비된 대본을 응시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했던가.
만인지상의 지위에서도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일 줄 아는 박근혜 대통령이야말로 겸손의
표상이다. 이에 본 블로그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연기대상>과 함께 <겸손상>을 동시에
수여한다.
혹자는 대통령이 프롬프터로 대본을 봤다며 그분의 컨닝정신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모름지기 동방예의지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이다.
프롬프터가 뭔지 모르시는 어르신들의 눈에 고개숙인 대통령은 그저 '익은 벼'일 뿐이다.
6. <공로상> TV조선
CSI를 방불케하는 TV조선의 취재력
<공로상>은 특유의 굽신저널리즘에 입각한 분석기사로 이날의 쇼를 빛나게 한 TV조선
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기자회견 음성분석'이라는 전무후무한 취재기법을 활용하여 대통령의 연기력을
측정했다.
마치 스카우터로 손오공의 전투력을 측정하듯. 안방시청자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그들의 과학취재기법이 과연 어디까지 진화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화려했던 이날의 쇼에도 한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은 장소였다. 기자회견이 열렸던 청와대 춘추관은 이 발랄한 역할극을 연출하기
에는 분위기가 너무 딱딱하고 무거웠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청와대는 더 나은 무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KBS에서 개콘의 무대를 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국민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기에 제격인 무대가 아닌가.
내년 연두기자회견에는 또 어떤 연기꿈나무들이 우리의 배꼽을 도둑질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퍼온 글 출처 : 데일리 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