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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153. [역경의 열매] 정미경 (1-17) 가난한 첨전용사의 딸 검사에서 국회의원으로
20세까지도 친엄마로 안 새어머니 잠자리서 늘 같은 기도·같은 찬송을
서울 산동네 가난한 퇴역 군인의 딸이었던 정미경 의원. "설명할 수 없는 은사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2008년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때 많은 분들이 내게 물었다. "어떻게 공천을 받았나요?"
어떤 '줄'로 국회의원이 된 것이냐는 질문이다. 그럴 때마다 두 가지로 답을 한다. 하나님을 아는 분께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대답하고, 하나님을 모르시는 분께는 운명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설명할 더 이상의 말이 없다. 나를 정치로 이끄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가난했던 월남 참전용사의 딸인 나는 아버지를 위해서 고시공부를 했고 검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토록 원했던 검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 터졌다. 여성들을 위한 책을 한 권 썼는데 그 책의 내용 한 부분이 정치적으로 읽혀지는 바람에 고민 끝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세상 말로 우연히, 국회의원이 되었다. 검사시절 도움을 드렸던 분이 검사를 그만둔 나를 찾아와 국회의원하라며 사람을 소개했다. 처음에는 농담인줄 알았다. 그분 소개로 진짜 유력정치인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살았던 경기도 수원 권선구에 공천신청을 했다. 이미 권선구에는 10명 정도의 후보들이 한나라당 공천을 받기 위해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경쟁은 치열했다. 후보들을 압축하면서 마지막에 2명이 남았다. 나와 다른 남성 한 분을 여론조사로 정하는 것이었다. 그 남성 후보는 이미 수원에서 인지도가 상당히 높았다. 해보나 마나일 것 같았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그 남성을 제치고 여론조사에서 이겨 공천을 받게 된 것이다. 나는 정말 놀랐다. 도대체 주민들이 '검사 정미경'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 이유를 나중에야 알고 속으로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나를 제외한 예비후보 10여명 중 여성이 한명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예비후보 1번으로 제일 먼저 선거운동을 시작했고, 명함도 가장 많이 뿌렸다. 그렇게 열심히 한 그녀는 최종후보에 아깝게 떨어졌다. 그녀의 이름은 나와 이름이 같은 '미경'이었다. 미경이라는 이름 때문에 여론조사에서 그녀 덕을 보게 된 것이다. 내가 나타나기 전에 그녀가 내 대신 선거운동을 해준 격이었다.
만세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계획을 세우신다는 성경말씀을 고백하는 순간이었다. 그 증거가 선거운동 현장에서 드러났다. 공천 받고 선거운동을 하러 나갔을 때,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내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이고, 후보님 지난겨울에 딸 데리고 오셔서 그렇게 고생하시더니 공천 받아서 다행이네요" 나는 속으로 아들만 둘인데 하면서 온 몸으로 전율을 느꼈다.
늘 내가 후렴구처럼 되뇌는 말이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신다.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를 영광의 도구로 써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게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가르쳐주신 분은 어머니다. 어릴 때는 당연히 나는 모태신앙인줄 알았었다. 어머니는 잠자리에서 늘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셨다. 늘 똑같은 기도와 늘 똑같은 찬송가를 불러주셨다. 어머니는 나를 지켜줄 수 없노라고, 그래서 하나님께 나를 지켜달라고 기도하신다고 했다. 어렸던 나는 속으로 '그냥 엄마가 지켜준다고 하면 되지 왜 저렇게 자기는 지키지 못한다고 하는 걸까'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 이유를 스무 살 무렵에 알게 됐다. 나를 낳아주신 친어머니는 내가 기억할 수도 없는 나이에 내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내를 잃고 힘겹게 지내시다 친구의 여동생과 재혼했다. 그분이 지금의 어머니이다.
충남 논산 시골교회 장로님의 따님이었던 어머니는 그렇게 내 어머니가 되었고, 내게 하나님을 가르쳐주셨다. 아버지는 내 곁을 떠나셨지만, 어머니는 지금도 나와 같이 살면서 나와 내 아이들까지 돌봐주신다.
정리=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 [역경의 열매] 정미경 (1-15) 가난한 첨전용사의 딸 검사에서 국회의원으로
* [역경의 열매] 정미경 (2) 19대 국회 落選 아픔 치유해준 '큰목사님' 사건
* [역경의 열매] 정미경 (3) 정치인의 길 첫 덕목은 아버지께 배운 '긍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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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정미경 (17·끝) 대한민국·애국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약력=1965년생. 고려대 법학과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 여성 검사로 활약했다. 2008년 18대 국회의원(수원 권선)에 당선됐다. 19대에 무소속 출마해 탈락했으나 지난 7월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약력=1965년생. 고려대 법학과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 여성 검사로 활약했다. 2008년 18대 국회의원(수원 권선)에 당선됐다. 19대에 무소속 출마해 탈락했으나 지난 7월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역경의 열매] 정미경 (2) 19대 국회 落選 아픔 치유해준 '큰목사님' 사건
사기죄 몰린 목사님 부탁에 사건 변호 하나님, 기도와 찬양에 무죄 밝혀주셔
무고로 옥중에서 고생한 목회자가 신문지를 이용해 만든 십자가 형상. 무죄 판결을 받은 후 내게 준 선물이다.
2012년 봄, '뒤통수 맞았다'는 표현처럼 딱 그렇게 공천에서 배제됐다. 누구도 이유를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경선의 기회조차 없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고 주님께 물었다. 그리고 앞장서서 무소속 선거를 치르도록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순종하였다. 세상적으로 보면 정치생명을 거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하나님께 순종할 뿐이었다. 약 24%의 득표를 하고 떨어졌다. 무소속 24%는 기적과 같은 수치다. '아 살았구나' 하는 안도와 그저 감사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앞서 2008년 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접었던 변호사 사무실을 다시 내고 원래의 '호기심 정미경'으로 돌아갔다. 어떤 손님(의뢰인)이 오실까 기대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두 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가족처럼 열심히 선거운동을 해주셨던 개척교회 목사님이 나타나셨다. 그 형님이 목사님인데(큰목사님으로 호칭) 사기죄로 법정구속이 되셨다면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어떤 자가 세상물정 모르는 목사님께 접근, 헌금한다며 돈을 투자해 목사님 소유의 부동산을 취득하려 했으나 잘 안 되자 목사님을 사기죄로 고소한 사건이었다. 교회와 목회자를 세상 법으로 변호하는 일은 내 친정 피붙이를 변호하는 것 같아 너무 힘든 일이다. 그러나 당장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도 없어 전면에 서서 변호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큰목사님을 접견하러 갔다.
"목사님 법적으로는 제가 알아서 무죄를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목사님께서는 이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푸셔야 합니다. 전 잘 모르지만 분명히 주님이 듣고 싶어 하는 말씀이 계실 겁니다."
큰목사님은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교도관들이 목사님을 함부로 대할 것 같아 걱정이 되어 이런저런 생각 끝에 꾀를 내었다. "목사님 일어나셔요, 저를 위해서 축복기도를 해 주세요" 하면서 목사님의 손을 잡고 기도를 받았다. 유리박스로 되어 있는 접견실은 누가 무엇을 하는지 교도관들이 다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다른 변호사와 미결수용자들도 다 볼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하나님께서 그 순간 교도소 접견실에서 기도하도록 이끄신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하나님은 이 재판을 통해서 재판은 판사가 하는 것도 아니고, 검사가 하는 것도 아니고, 변호사가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오직 살아계신 주님께서 하심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셨다. 늘 그렇듯이 하나님은 나에게 구체적인 작전까지도 가르쳐주고 계셨다.
하나님은 구속되신 목사님께도, 밖에 있는 가족들에게도, 그리고 변호하는 내게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다 받으신 후 항소심 구속만기를 다 채우고 마지막 날 무죄판결을 주셨다. 내게는 새벽기도를 받으셨고 그 과정에서 이 재판을 위한 기도의 제목이 여호와 삼마(God is here, God is there)로 정하셨음도 알려주셨다. 큰목사님은 교도소에서 새벽예배를 시작으로 기도와 찬양을 했다고 한다. 같은 방에 6명의 수용자가 있었는데, 3명은 목사님과 함께했고, 나머지 2명은 목사님을 비웃었다고 한다. 우연찮게 목사님과 3명은 석방됐고 2명은 실형 선고를 받았다. 목사님은 그 방의 이름을 프란체스코교회로 정했고, 지금은 많은 수형자들이 그 방으로 배정받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큰목사님은 교도소에서 밥과 신문지, 휴지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수없이 많은 조형 작품을 만들었다. 나오실 때 그 작품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것을 가지고 나오셨다. 내게도 주셨다. 목사님이 무죄선고를 받자 교도소 안팎에서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하나님은 늘 주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역사하신다고 믿는다.
***[역경의 열매] 정미경 (3) 정치인의 길 첫 덕목은 아버지께 배운 '긍휼'
고엽제 환자로 고통받던 아버지의 기억… 법정·세상의 낮은 이들에 손 내밀게 해
정미경 의원이 한 행사장에서 장애인과 눈높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1996년경 내 나이 서른에 들어섰을 때 기적처럼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하시고 나를 끌어안았다. 대한민국 육군 대위로 월남전 참전용사였던 아버지. 군복을 벗고 세상에 나왔을 때 사업이라는 것을 시작하셨고 보기 좋게 실패하셨다. 아버지는 성공하고 싶어 했지만 늘 실패했고, 재기하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유일한 희망은 오로지 딸인 내가 판검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 소원이 이루어진 날 아버지가 내게 부탁을 하셨다. 아버지 고향에 함께 가자고….
아버지와의 여행은 썩 내키지 않았다. 알코올중독이신 아버지는 분명히 술을 엄청 드실 것이다. 오고가는 차 안에서 주정은 없으실까?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파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물 때문에 마음 약한 내가 또 지고 말았다. 내려갈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나를 데리고 가겠다는 아버지의 의지가 술을 며칠간 끊게 만들어서 내려가는 고속버스에선 별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고엽제 환자였던 아버지가 술 없이 며칠을 보낸다는 것은 엄청난 인내를 요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에서였다.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벌어졌다.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잔치가 벌어졌고, 며칠을 주무시지도 않고 술을 드신 아버지는 술 취한 남자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거지를 버스 안에서 보여주었다.
그때의 내 심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이 사람은 내 아버지가 아닙니다'라고 외쳐볼까, 아니지 기사아저씨에게 차를 세워 달라고 하자, 차라리 여기서 내려 걸어서 서울 가자 등 등. 하지만 상상은 상상으로만 끝났다.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 자신만을 탓할 뿐이었다. '아버질 믿은 내가 잘못이다'를 수없이 되뇌면서 쏟아지는 울음을 참아냈다. 미움, 한숨, 불쌍함, 측은함 등 모든 것이 섞여 원망으로 쌓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나는 검사에서 정치인이 됐다.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이리저리 다니다 보면 내게 '의원님 의원님' 하면서 잘해주는 분도 계시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술에 취해 욕하는 분들도 만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떠오른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보다는 덜하다'는 생각에 전혀 당황하지 않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하나님께서 이때마다 나를 깨닫게 하신다. '살려달라고 하는 소리다. 그들을 미워하지 말자. 긍휼히 여기고 기도해드리자.' 지금 마음 깊숙한 곳에 아버지가 계신다. 긍휼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읽으면서 무슨 마음인지 잘 몰랐었는데, 긍휼이 무엇인지 뜻이 잡힌다. 그런 날이면 하염없이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를 주셔서, 진짜 긍휼의 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로 인하여 얻었던 마음의 상처들, 그것은 내가 만들었던 상처이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세상적으로 표현하면 나쁜 것이 없다. 자기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고 나쁜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기의 의도를 내려놓고, 먼저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고 질문해야 한다. 그럼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과거에 검사로서 늘 사람을 조사하고, 구속하고, 석방하고, 처벌하고, 증거를 찾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수시로 물어봤다. '하나님 구속할까요, 하나님 석방할까요, 하나님 증거주세요, 하나님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면 그 안에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증거를 만드시는 하나님을, 주기도문의 위력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범죄자를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억울한 하나님의 사람을 구하라고 메시지를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난 꼼짝없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역경의 열매] 정미경 (4) 사랑의 하나님, 왜 제 생모를 데려가셨나요?
고대 법대 입학 후 분노·의문에 고통… 서른 넘어 "그것도 사랑…" 응답 주셔
지난 5월 수원 온사랑교회에서 권사 임직을 받는 정미경 의원.
1985년 재수해 고대 법대에 들어갔다. 합격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난 겨울여행에서 부산의 사촌언니 집에 들렀다가 진실을 알게 되었다. 사촌언니는 무심코 "미경아 너는 앞으로 잘될 거래. 너희 엄마 산소에 꽃이 핀대"라고 말하는 거였다. 순간 '이게 무슨 말인가. 엄마는 서울에 있는데….'
아버지는 내가 죽은 엄마, 즉 앞서 밝혔듯 내가 기억할 수 없는 나이에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신 엄마 이야기를 영원히 모르고 지나가기를 바랐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지금 엄마에게 잘해야 한다고, 엄마를 슬프게 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살면서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이 이해가 되었다. 왜 그렇게 아버지가 내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주셨는지, 매번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면 잠자고 있는 나를 깨워서 끌어안고 울었는지, 판검사가 돼야 한다고 왜 노래를 부르셨는지, 왜 운동장에 데리고 가서 큰 소리 지르라고 했는지 다 이해가 되었다.
당시 분노와 의문이 나를 짓눌렀다.
"하나님 왜 생모를 데려가셨나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불쌍한 우리 아빠에게서, 불쌍한 어린 남매에게서 엄마를 데려가시지 않았을 것인데, 하나님은 진짜 계신 건지요?"
대학시절 학교 가는 대신 새로 생긴 큰 서점 바닥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내 질문에 답을 해줄 거라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1년간 수없이 많은 책을 읽고 결론을 내렸다. 세상 책에는 답이 없고, 성경 안에 답이 있는데 문제는 그 성경이 진짜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작정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다 사실이어야 해요." 이때까지는 하나님을 머리로 이해하는 정도였다. 하나님은 성경책 속에만 계시는 것 같았다. 신앙적 방황은 생각보다 길었고, 내 인생은 뒤죽박죽이었다. 사법시험이 내게 멀어져만 갔다.
아버지는 방황하는 딸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슬픈 표정으로 "미경아, 네 마음 다 안다. 그래도 판검사가 되어주라"며 사정조로 말했다. 한편으로 아버지가 가엾고,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미웠기에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먹은 것과 달리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시험에 자꾸 떨어지다 보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같이 공부하던 선배 언니가 시험 운이 있는지 점쟁이에게 가서 물어보자고 했다.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결국 그 언니를 따라 점쟁이에게 갔는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2층 양옥집이었다. 괜히 왔다는 생각과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5분이 지나도 점쟁이가 나타나지 않아서 잘됐다 싶어 가려고 하니까 선배 언니가 알아보고 온다며 나를 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내 목덜미를 확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아,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하나님이 점쟁이 만나는 거 막으시는 거다.' 혼비백산해 계단을 뛰어내리면서 점집을 빠져나왔다. 그 다음 날 알게 된 결론은 이랬다. 그 점쟁이가 전화 한 통 받고 나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정신이 들어보니 어느 아파트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더라는 얘기였다. 나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하나님은 성경 밖에서도 계신다.' 이후 하나님을 깊이 알고 싶은 내 열망이 커져만 갔다. 하나님도 성경 밖에서 살아 움직이시고, 역사하고 계심을 내게 은밀한 가운데 보여주시고 응답해주셨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도 많은 시간이 흘렀을 때, 내 스무 살의 질문에 하나님이 답을 주셨다.
'엄마 잃은 내가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날 불쌍히 여기고, 어여쁘게 생각한 지금 엄마의 진실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이고, 그 사랑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정미경 (5) 고시촌 교회서 만난 하나님 '꿈·평안·합격'을…
계속되는 낙방에 신림동 고시원으로… 어느날 목사님 시편강독에 눈물이 왈칵
정미경 의원의 고려대 법대 졸업식 사진.
내게도 우울증이 찾아온 적이 있다. 사법시험에 계속 낙방하면서도 포기하지는 못하고, 한 번 더 한 번 더 하던 중 점집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희망으로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갔다. 그 당시 싼 가격의 고시원이란 베니어판으로 적당히 방을 만들어 옆방 학생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곳이었다. 몸 하나 누울 수 있는 공간에서 1주일 버티다 보니 공부는 거의 할 수 없었다. 잠도 오지 않고, 잡념만 생겼다. 밥맛도 잃었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 무조건 밖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밤에는 갈 데가 없어서 근처 교회로 들어가 장의자에 누워 밤을 새우기도 했다. 주일은 종일 그 교회에서 예배만 드리고 있었다. 어느 날 목사님의 시편강독 설교를 듣다가 눈물을 쏟았다.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목양실로 갔다. 목사님이 안수기도를 해주겠다고 했다. 엄마에게서 안수기도 함부로 받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던 터라 내키지 않았지만 이미 늦어 자포자기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목사님은 내 머리에 손을 대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눈을 감고 있는데, 눈앞에 자꾸 목사님의 큰 손이 내 머리 전체를 감싸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었다.
어느덧 마음이 안정되면서 고시원에서 공부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너무나 황홀한 꿈이었다. 내가 하늘을 날면서 지구를 한 바퀴 돌며 세계일주를 했다. 누군가 내 겨드랑이에 손을 대고 있었고, 안심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으면 휙 휙 소리가 내 귀에 들릴 정도였다. 파리의 에펠탑과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피라미드 등의 유명한 지형지물을 손으로 만지면서 날아다녔다. 신기한 것은 꿈에서도 꿈인 줄 안 것이다. 하나님께서 꿈으로라도 세계일주를 시켜주면서 나를 응원하고 있다는 믿음이 왔다. 잠에서 깨어 머리를 이불 속에 파묻고 울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를 수없이 반복하는 기도가 나왔다. 감사의 기도는 처음이었다.
1차 합격하고, 2차 시험을 본 후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다. 하루에도 합격일까 불합격일까를 하고 수없는 상상을 해야 했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ARS로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는 상상이 나를 괴롭혔다. 녹음되어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불합격'이라고 말하는 환청이 들릴 정도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일생일대의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지난번에 꿈에 나타나셔서 세계일주도 시켜주셨잖아요. 저는 불합격이라고 외치는 그 여자 목소리가 너무나 싫어요. 꿈으로 제가 합격했다는 것 미리 알려주세요." 그리고 단서를 달았다. "앞으로 이렇게 유치한 기도는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때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모른다. 합격 발표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몸이 말라갈 정도로 더 힘들어졌다. 기도를 했으니 꿈을 꾸기 위해 잠만 잤다. 그리고 합격하는 꿈을 꿨다. 기도의 응답이 내게도 일어났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 날이 왔다. 신림동 고시학원에 합격자 명단을 일찍 확보해서 붙여놓는다는 말을 듣고 집을 나서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나 해서 받았는데, 신림동에서 내 이름을 먼저 확인한 후배의 전화였다. 합격이라니! 그 순간 시간이 멈추는 듯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즉시 교회로 갔다. 나도 모르게 시작한 기도의 처음이 이랬다. "하나님, 그동안 제가 막말했던 것 용서해주세요."
살면서 죄 지은 것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나중에 보니 나는 회개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도 우리 곁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믿음이 내게도 생겼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내가 힘들 때마다 구하지 않아도 꿈을 꾸곤 한다. 2012년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낙선했을 때도 꿈을 꾸었다.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꿈이었다. "내가 언제 네 인생에서 기회를 놓친 적이 있느냐. 걱정하지 마라."
***[역경의 열매] 정미경 (6) "남편 주세요" 기도에 큰 바위 같은 5세 연하를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충성스런 후배' 하나님은 내게 딱 맞는이를 찍어주셔
자택 거실에서 담소를 나누는 이종업·정미경 부부. 법조인 커플이다.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 이 세상에 더는 바랄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사법연수원에 들어가자마자 결혼이라는 게 하고 싶어졌다. 나중에는 그 마음이 너무 간절해져 공부조차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내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내 마음에 든다 싶으면 '결혼을 했거나 아니면 여자가 있거나'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처지였다. 방법은 하나, 기도밖에는 없는데, 그 기도를 막는 장애물이 있었다. 전에 밝혔듯이 하나님께 합격의 꿈을 미리 꾸게 해 달라고 일생일대의 기도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 기도 끝에 내가 단서를 달았는데, 다시는 이렇게 유치한 기도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이다.
바로 이 단서가 문제였다. 그렇게 다짐해놓고 기도응답 받았는데 이제 와서 좋은 남자와 결혼시켜 달라는 기도를 또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성경을 이리저리 뒤적이면서 결혼에 대한 구절을 찾아보기도 했다. 아무튼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성경에는 되도록 결혼하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결혼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혼자서 잘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은 곧 흐려졌고 결혼하고 싶은 열망은 점점 더 세져갔다. 그 문제로 끙끙 앓고 있던 어느 주일예배에서였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되도록이면 기도를 길게 하지 마라. 짧게 해도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정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이다. 순조로움 주시옵소서 이렇게만 해도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였다. '아 바로 이거였구나' 깨닫고는 연수원의 남자들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먼저 맘에 드는 남자를 찍었다. 멀리서 그 남자를 바라보며 기도를 하였다. '순조로움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열심히 두 달 정도 기도했다. 그러나 그 남자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속으로 '내가 사람을 잘못본 거다. 저 남자는 아니었구나'라는 결론을 내리고 다른 남자를 찍었다. 또 그 남자를 향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심히 두 달 정도를 기도했건만 이번에도 반응은 오질 않았다. 이렇게 2년간 계속하여 남자를 찍고 기도하고, 안 되자 포기하기로 했다.
사법연수원 2년차 시험이 끝나는 날 저녁. 친하게 지내던 연수원 동기이자 5세 연하 고대 법대 후배 이종업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도서관 자리도 맡아주고, 모닝콜해서 깨워주고, 밥도 같이 먹어주고, 내 숙제도 대신 해주는 참 '충성스러운' 후배였다. 그는 충남 청양이 고향인데, 공부 잘해서 대전으로 유학 갔다고 했고, 어릴 때 축구공이 없어서 돼지 오줌보로 축구했다는 이야기를 태연하게 했었다. 겨울에 목장갑을 끼고, 형님의 낡은 작업복바지를 입고 다녀서 친구들이 군밤장수 왔다고 놀렸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었다. 속으로 "얘는 나보다 더 심하게 가난했구나"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대뜸 전화로 "누나, 아버지가 반대하세요." "니네 아버지가 뭘 반대하시는데?" "누나랑 결혼하는 거."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이 높아지면서 "니네 아버지가 나를 왜 반대하시냐고?" 이런! 순간 내가 미쳤나 보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음 날 만났다. 멋쩍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짐짓 화난 척하면서 아버지가 반대하시는 이유를 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도 물었다. 그렇게 내 남자가 나타났고 그와 결혼했다. 우리는 5년 연상연하 커플이었기에 고대에서도 사법연수원에서도 많은 화제를 뿌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 내가 가장 잘한 선택은 남편이다.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큰 바위 같은 사람이다. 항상 그와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걱정이 있어도 그와 이야기하면 걱정거리조차 아닌 것으로 바뀌어 버린다. 내게 딱 맞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내가 찍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찍은 사람으로 기도응답을 받았다.
***[역경의 열매] 정미경 (7) 검사 시절의 기도 "하나님, 증거를 주세요"
사탄의 꾀를 사탄을 통해 치시는 주님 어떤 사건이든 늘 등 뒤에서 지켜보셔
정미경 의원은 검사 시절에도 항상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사진은 서울 동부지검 검사시보 때 모습.
검찰에 있을 때 늘 했던 기도가 있다. "성경 안에서만 만나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아요. 저와 함께 뛰고 걷고 역사해주시는 하나님을 원해요." 딱 그 기도대로 난 하나님 은혜를 경험하는 검사였다.
지청 검사로 있던 어느 날. 출근시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남자의 큰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그날 소환한 남자였는데 일찍 와서 "왜 그 여자를 구속하지 않느냐"며 우리 수사관에게 고함을 치고 있었다. 그 남자에게 혐의를 두고 있던 나는 사건의 전말이 밝혀질 때까지 그의 무례함을 참아주기로 했다. 속으론 "하나님 증거 주세요"를 노래하듯 기도했다.
그 남자가 구속시키라며 난리를 친 여자는 그와 내연관계였던 A였다. A는 고교 졸업 후 경리사원으로 취직했다가 상사인 그를 만나게 되었다. 유부남이었던 그는 야유회 날, 그녀에게 접근해 술을 먹이고 여관으로 데려가 강간했다. 그리고 A는 영혼마저 그 남자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됐다.
그녀는 틈만 생기면 도망치고자 했다. 그것이 늘 불안했던 그 남자는 안전장치를 생각했다. 그녀 명의의 회사를 만들어 당좌수표를 발행했다. 1억원이 넘는 금액의 수표 한 장을 위조해 부도수표를 만들었고 그녀를 고발, 구속시켰다가 부도수표 회수를 통해 석방시킬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으려는 음모였다.
경찰에서는 그녀를 구속하겠다고 했다. 나는 기록상 미심쩍은 부분 때문에 일단 불구속 수사를 하기로 정하고 직접 수사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 남자의 새로운 애인임에도 A에게 유리한 진술을 했던 B여인을 부르기로 했다. B는 그 남자가 A를 구속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기 위해 무당에게 가서 상담을 할 때 우연히 만나 덫에 걸린 여자였다.
B는 무당에게서 그 남자와 A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무당은 그 남자에게 A를 구속시키려면 굿을 하라고 했고, 조상의 묘를 옮기면 더 좋다고 했다. B는 A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어 "그 남자가 널 잡아 가두려고 굿까지 하고 있으니 조심해"라고 말해주었다. B는 내가 여자임에도 검사라는 것을 수차례 확인한 후 나오겠다고 했다.
B가 처음 나를 보았을 때 뭔가 말할 듯 말 듯하면서 우물쭈물했다. 결론은 이렇다. 그 남자가 무당 말을 듣고 1000만원을 들여 굿을 했는데 무당이 "이상하다. 단발머리 여자가 나타나서 방해한다. 널 구속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당시 내가 단발머리였다.
그 남자가 고성을 지르던 날, 그 남자를 구속했다. 압수수색한 결과 그 남자가 친한 사채업자와 공모해 각종 문서와 수표를 위조해 왔던 복사기 등의 증거물을 찾아냈다. A의 17년간의 불행한 관계는 그렇게 끝났다.
시간이 지난 후 교도소에 있던 그 남자가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검사님, 처음 검사님을 본 날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제가 A를 구속시키려고 여러 작업을 한 건 이미 아시지요. 굿도 하고, 조상묘도 옮기고…. 그런데 무당이 단발머리 여자가 나타나서 그 여자 대신 오히려 제가 구속된다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무당하고도 대판 싸웠지요. 그동안 별짓 다 하면서 쓴 돈이 얼마인데요. 검사실에서 단발머리를 한 여검사를 만나게 되다니, 너무나 놀라서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습니다."
사탄의 꾀를 사탄을 통해 알게 하신 하나님이다. 그 남자는 법의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한편 검사가 된 후 생각지 못했던 고민이 생겼다. 누가 물어도 내가 그렇게 결정한 이유를 떳떳이 말해줄 수 있나. 과연 어디까지 증거를 찾아내고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내 잘못된 판단으로 다른 사람의 인생이 바뀐다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일 아닌가. 두려웠다. 진작 알았다면 쉽게 검사 한다고 말했을까.
그래서 기도했다. 답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답을 찾았다. '하나님이 언제나 등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였다.
***[역경의 열매] 정미경 (8) 선행이라도 오른손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죄 지은 피의자라도 도울 수 있다면 밤새워라도 만약의 '무죄' 밝혀줘야
국회의원 정미경. 검사시절 정시 퇴근은 사치였다.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많은 분들이 내게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좀 쑥스럽기는 하지만 질문을 받고 난 후 생각나는 사건이 있다.
초임 검사 시절, 늘 야근에 시달렸다. 새벽에 퇴근했다 새벽에 출근하는 사람이 나였다. 대낮에 출장 갔다가 '낮'의 모습이 이랬었구나 하고 속으로 웃은 적도 있었다. 검사가 이런 것이었나 하는 회의가 들 정도였다. 이러다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저녁식사 한 번 못하고 늙어버리겠구나 하는 걱정도 됐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묘안을 짜냈다. 한 달에 두세 번 '땡 퇴근'하는 날짜를 정해놓고 그날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일찍 퇴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도 일반인의 행복을 누리자며 큰 소리치고 만든 나름대로의 묘안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묘안은 결국 묘안으로 끝나버렸다.
'땡 퇴근' 하기로 정한 그날. 우리 검사실은 신나서 일찍 퇴근 준비하면서 콧노래를 부르고 기분 좋게 웃음꽃, 이야기꽃을 피웠다. 꼭 그럴 때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터진다더니 글쎄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기소중지되었던 피의자가 긴급 체포되어 우리 검사실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짜증이 몰려왔다. 꼭 이럴 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왜 하필 도주했던 피의자가 이 순간에 잡혀서 오는 거야. 속으로 투덜투덜댔다.
이럴 때 검사는 48시간 이내에 피의자를 구속할지, 불구속 석방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기록을 검토하면서 피의자신문을 통해 어차피 구속할 사안이라고 판단을 내릴 때는 문제가 없다. 그날 유치장에 구금시킨 후 그 다음 날 조사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불구속수사를 해도 충분하다고 판단했을 때가 문제이다. 5∼6시간 정도 조사하고 난 후 신원보증인을 불러 각서를 받는다. 그러니 피의자를 석방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판단했을 경우엔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날은 바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그런 경우였다. 우선 우리 계장님이 나에게 눈짓을 보낸다.
"안 돼요. 검사님, 제발 내일 조사하시지요. 오늘 약속 깨면 저는 아이들에게 나쁜 아빠 된다고요." 여직원도 마찬가지다.
"안 돼요. 검사님. 내일 조사하셔야 해요. 저 시집가야 해요."
사실상 도주했던 피의자를 유치장에 하룻밤 재우고 그 다음날 조사한다고 해서 법에 위반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검사가 그 순간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는지를 다른 사람이 알 수는 더더욱 없다. 또 그 판단이 옳다고 100% 장담도 못한다. 피의자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스스로도 도주했던 사람인지라 체포되어 유치장에 구금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내 등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피의자가 나라면 어떨까. 오늘 밤 안으로 조사해서 석방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안다면 당연 유치장에서 잠을 자고 싶지는 않겠지.
결국 나는 직원들의 눈초리를 피해가면서, 그 피의자를 5∼6시간 조사한 후 집으로 돌려보냈다. 결과적으로 땡 퇴근이 아니라 땡 자정퇴근이었다. 정작 그 피의자는 본인이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자기가 석방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아, 이거였구나. 결국 하나님이 아시면 그것으로 된다는 것이구나. 우리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살고 있는 것이구나. 그래서 도왔다고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 거구나. 그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 거였구나. 내가 모르는 가운데 나를 돕는 자가 많으면 성공할 수밖에 없다.
***[역경의 열매] 정미경 (9) 검사 시절 한때 '귀양'… 난중일기로 위로 받아
상사와 심각한 충돌로 사실상 좌천 내 등 뒤의 하나님 믿고 목소리 높여
지난 7·30 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선 직후 당직자들로부터 축하 꽃다발을 받은 정미경 의원.살다보면 세상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치명적 독이 될 수 있다. 내게는 유독 그런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더 기도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피조물이었다. 그래서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강함으로 붙들어달라고 기도했다.
늦게 결혼을 했는데 다행히도 바로 아이가 생겼다. 기뻤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를 괴롭히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무심코 내뱉는 "딸들은 엄마 팔자 따라 간다"는 말이었다. 그 말이 한번 귀에 꽂히자 아이를 낳다가 돌아가신 생모의 일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나도 엄마처럼 아이 낳다가 죽는 건 아닐까. 그 다음부터는 두려움이 나의 정신을 병들게 했다. 아무에게 털어놓고 말할 수도 없었다.
가장 믿는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남편은 진지하게 위로하다가 나중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드러내면서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또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냥 나온 말이 "하나님 살려 주세요"였다. 아이의 얼굴은 누구 닮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공부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훌륭한 사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정작 나오는 기도는 "살려달라"뿐이었다. 오로지 살려달라는 기도만 했다. "우리 두 사람을 꼭 살려주세요"라고 매달렸다. 이제 결혼해서 정말 행복한데 이렇게 좋은데, 아이 낳다가 죽는다면 너무 억울한 것 아니냐고 하면서 매달렸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출산의 순간이 왔다. 제왕절개 수술을 위해 마취를 하려는 순간 '아 이제는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천국은 가야 하는데 혹시 걸리는 게 있는지를 떠올리다가 밀린 십일조에서 걸려버렸다. 십일조만 아니면 천국 갈 것 같았다. 마음이 조급해지면서 안 되겠다 싶어 "하나님, 밀린 십일조는 남편에게 받으시고 저는 천국 가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취로 인해 의식을 잃었다.
누군가 나를 흔들면서 "그만 울라"는 소리에 깼다. 순간 "아이는요?"하고 물었다. "아이는 건강하고 예쁘다"는 소리에 그때부터 온 몸이 아픈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앞으론 십일조 잘해야지 다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올 수도 있는 사건이었지만 그때는 꽤 심각했다. 세상의 말로 우리가 약해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만드신다. 그래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검사 시절에 '귀양'을 간 적이 있다. 국민은 정의로운 검사를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검사가 정의로움을 실천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의 용기가 있어야 한다. 보통의 경우 검사가 자신의 상사와 의견이 다를 때 잘 상의해서 해결해간다. 그러나 어떤 검사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심각하게 상사와의 충돌이 생길 때도 있다. 내게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그때의 기준은 '내 등 뒤에 계신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였다. 차라리 검사를 그만두는 게 낫다고 판단이 되었고, 내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미움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을 내렸지만 결과는 좌천이나 다름없었다.
그 당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열심히 읽으면서 위로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이게 인간인거지, 이게 세상인심인거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거니까'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귀양 가는 나를 보고 많은 사람이 "정 검사는 끝났다(출세하기는 글렀다)"고 말했다. 그때 십일조 사건이 생각났다. 그리고 나에게 외쳐주었다. '세상이 내게 끝났다고 말하지만 이젠 더 이상 약해지지 않아. 하나님이 강하게 나를 붙드실 테니까. 그리고 다시 세워주실 거니까. 앞으로 실망하지도, 절망하지도, 걱정하지도 말자.' 몇 년 뒤 기적처럼 내게 기회가 왔다. 행정부처 파견이었다. '귀족검사'나 가는 코스였다. 언감생심 나 같은 사람은 꿈도 꿀 수 없는 '꽃보직'이었다. 내게 여성가족부 파견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이 얘기는 더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정미경 (10) '여자대통령 아닌 대통령을…' 필화로 검사직 사표
화는 복과 함께… 18대 국회의원 당선 그러나 19대 공천 탈락에 모두 등돌려
정미경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리더십에 관한 저서 '여자대통령이 아닌 대통령을 꿈꿔라'로 필화 사건을 겪는다.
여성가족부 파견이 결정된 후 여기저기서 '대통령 빽'인 것 같다고 수군거렸다. 전에 내게 "정 검사는 (조직생활에서) 끝났다"고 말했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 빽'이라고 말해 줄 수도 없고….
'여성가족부장관 법률자문관'이 파견 정식 명칭이었다. 여성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만드는 일을 법률적으로 돕는 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여성학 공부도 하게 되었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 적을 두고 제대로 하는 공부였다. 그들을 더 잘 돕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판단되었기에 열심히 했다.
주변에서 검사가 여성학을 공부한다며 신기해했다. 그러다가 책을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쓴 책이 '여자대통령 아닌 대통령을 꿈꿔라'였다.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여자, 남자라는 것을 잊고 오로지 자기가 하는 직역(職域)에 집중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검사면 검사지 왜 여검사라고 하는가, 나는 정미경 검사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검사에게는 때로는 여성적 자질이, 때로는 남성적 자질이 필요했다. 그렇게 때문에 그 검사라는 포지션에 초점을 맞추어 자기 자신을 계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여자검사가 아닌 검사가 되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이 출판되던 2007년도는 대통령선거가 있던 때라 "제목에 대통령이란 단어가 들어가지 않으면 책이 팔리지 않는다"는 출판사 직원의 제언에 따라 책 제목을 그렇게 정하게 됐다.
책이 출판되자 또 세상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리더의 한분으로 이름을 날리던 강금실 전직 법무부 장관을 분석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라고 쓴 부분이 문제가 됐다. 검찰 개혁한다며 검찰을 잘 모르는 판사 출신 여성을 검찰조직 수장으로 임명한 것은 애초부터 잘못한 인사였다. 시작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사였음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걸 지적한 나는 결국 사표를 내야 했다. 사람들은 이때도 내게 "끝났다"고 말했다. 속으론 '또 시작이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몇 개월 후 나는 대한민국 국회의원, 그것도 선거를 통해서 경기도 수원 권선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여기저기서 대통령이 공천준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아니라고 말하면 겸손한 정미경이라며 칭찬받았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또 하나님이 나를 세워주신 것이다.
2008년 4월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된 날은 수요일이었다. 오후에 교회에 갔다. 눈을 감고 묵상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입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에 놀랐다. "아무리 바빠도 아버지가 부르는 곳엔 꼭 가겠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여성이 부르는 곳엔 꼭 가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고시공부 할 때 다녔던 서울 신림동의 교회에서 법조인을 상대로 나의 하나님 이야기를 짧게 하게 됐다. 그 뒤로 간증을 하게 되었는데, 간증이 뭔지도 모르고 하나님 이야기를 신나게 했다.
하지만 2012년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게 "의원님 의원님" 하면서 잘 보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 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도망가는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대놓고 모욕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공천이란 게 그런 거였다.
정치판에선 이렇게 배신을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말을 한다. 누구는 이게 정치라고 말한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배신은 배신인 거다.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배신당한 예수님 생각에 괜히 눈물이 났다. 성경에 다 나타나지 않은 예수님 마음까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그때 무소속으로 선거에 나가서 떨어졌지만 그래도 내 곁에 함께 울어주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그들의 형편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 가정과 그들의 주변에 축복해주시고, 순조롭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래야 어려운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역경의 열매] 정미경 (11) 19대 무소속 낙선에 '고민 끝, 기도 시작' 결단
"정치생명 끝났다" 주위 수군거림에도 "다시 시작이다" 기도하며 때를 기다려
2012년 4월 무소속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정미경 당시 후보가 지역구인 경기도 수원 권선구에서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다.
무소속으로 어렵게 선거를 치를 때였다. "공천만 되면 당선인데…" 하면서 날 보고 우는 지지자분들이 계셨다. 그분들이 우는 거 보고 나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고마워서였다. 우는 나를 보고 또 다른 지지자들이 울었다. 그렇게 눈물이 전염됐다.
선거 유세 중 차에 올라타면 기도가 나왔다. 한데 "꼭 이기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가 나오지 않고 "하나님 하나님 제 눈물을 잊으시면 안 돼요. 분명히 저는 잊게 될 거예요. 그래도 하나님은 잊지 마세요"라는 기도가 나왔다. 돌이켜보면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보다 더 처절한 기도였던 것이다. 새벽기도에 가서는 "하나님 저 너무 힘들어요. 하나님 저와 동행하는 거 대신에 저 그냥 업어주세요"라고 말했다. 계속 업어 달라고 떼쓰듯이 기도했다.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은 자칫 다시는 정치를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모험이었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그런 걸 깊이 생각하고 무소속 출마 선거를 감행한 것은 아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음과 몸이 움직여 그렇게 한 것이다. 4년간 국회의원으로 너무 열심히 했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냥 어쩔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큰 그림을 그리며 등을 민다는 느낌이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사람들이 "(정치생명) 끝났다"고 수군거렸다. '끝났다'는 말 어디서 많이 들었던 소리라 "또 시작이구나" 싶었다. 세상의 나쁜 말을 염두에 두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것이라고 믿었고, 그때를 위해서 준비하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5만명 계획'을 세웠다. 5만명의 지지를 받으면 무소속 당선도 가능해 보였다. 성경도 열심히 읽었다. 구약을 이렇게 열심히 읽었던 적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셔서 했던 말씀을 읽고 또 읽었다. "내(하나님)가 나(하나님)를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 칠천 명을 남겨두었나니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모두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들이니라."
엘리야를 위하여 7000명을 남겨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하여 7000명을 남겨둔 것이다. 마치 내게 하시는 말씀 같았고, 하나님이 숨겨놓은 그 7000명이 지금 내 곁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혜로웠다. 혼자만이 비밀을 안 것처럼 행복했다.
내 주변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더 크게 쓰시려고 연단하시는 것"이라고 위로해주셨다. 그럴 때마다 자꾸 고민하게 되었다. '진정 이것이 연단일까' 하는 의구심도 생겼다. 살면서 우리가 가는 길에 꽃길만 있을까? 늪만 있을까? 높은 산만 있을까? 깊은 바다만 있을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꽃길도 있고, 늪도 있고, 높은 산도 있고, 깊은 바다도 있고, 넓은 평원도 있을 것이다. 가다보면 당연히 늪을 만나게 되고 늪이니까 빠지게 된다. 늪에서 잘 걸어 나오면 되는 것이지 굳이 왜 빠졌을까를 고민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시련이 다 연단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민 끝, 기도 시작' 하면서 즐겁게 기도했다. 낙선 후 사람들이 '인내의 시간'이라고 말할 때 나는 '휴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조급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내게 훈련시키시며 가르치신 결과물이었다. 조급해하지 말라. 하나님은 타이밍을 놓치시지 않는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즐겁게 때를 기다려라.
그러고 나서 변호사 일을 열심히 했다. 종합편성 채널 패널로 출연하여 정치와 사회 이슈를 분석했다. 나를 알아봐주시고 인정해주시는 분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럴수록 하나님이 어떻게 세워주실까 점점 기대감이 커져 갔다.
그리고 2년 만에 다시 기회가 왔고 지난 7·30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재선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말했다.
***[역경의 열매] 정미경 (12) 운동화 신고 뛴 18대 국회… 신앙 간증만 100회
월∼토요일은 온종일 국회로 지역구로… 주일엔 전국 다니며 주님의 메시지 전해
"나의 간증이 구원의 희망이 된다면…." 정미경 의원이 칼빈대에서 간증하는 장면.
2008년 4월 총선 선거일은 수요일이었다. 오후에 수요예배에 참석하느라 교회에 갔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그날 묵상 기도 중에 나도 모르게 입으로 '아무리 바빠도 아버지가 부르는 곳에 꼭 가겠습니다'라는 기도가 나왔다. 처음에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간증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언제나 하나님은 나로부터 받아내시고 싶으신 것을 어떡하든지 받아내시는 분이다. 18대 국회의원을 하면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운동화를 신고 뛰어다녔다. 국회로, 지역구로 정신없이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법안을 심사하고, 민원을 듣고, 해결하고, 지역구 예산을 챙겼다. 타고난 에너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리고 주일은 간증하러 전국을 다녔다. 도대체 쉴 시간이 없었다. 거절하지 못하는 내 성격 탓에 주일 4번까지 간증한 적도 있었다.
도대체 나는 왜 간증을 할까. 스스로에게 묻고, 하나님께도 물었다. 내 젊은 날, 정신적 방황이 심했을 때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웠고, 사람들 만나는 게 싫었다. 죽고 싶은 사람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만약 그때 누군가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말해주었다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죽고 싶다가도 내 이야기를 듣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는 간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자. 그래서 요청이 오면 거절하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작은 시골교회도 갔었고, 개척교회도 갔었다. 그렇게 간증한 횟수가 18대 국회의원 4년간 100회를 넘는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블로그에 쪽지 하나가 배달되었다. 보낸 사람은 생후 8개월 된 여아를 둔 29세 미혼모였다. 어릴 때는 교회를 다녔었는데 지금은 다니지 않는다는 것,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아이와 함께 죽으려고 했다가 우연히 내 간증을 듣게 되었고, 하나님이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갑자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혹시나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도 의원님처럼 만들어주실지 모른다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며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편지였다. 이상하게도 그 쪽지 편지를 읽으면서 내 가슴이 뛰었다. 답장해야 할 것 같았다. 아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기적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그러면 기적처럼 아기가 엄마에게 기적이 될 거라고 보냈다. 나도 모르게 '기적'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었다. 그녀에게서 다시 답장이 왔다. 놀라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고 하면서 아무리 검사님을 하셨다지만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꿰뚫어 보실 수 있냐고 하면서 자기 아이의 태명이 '기적'인 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내용이었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나를 향해서도, 간증을 계속하라는 주님의 메시지였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내가 정치인인데, 간증까지 하면서 한 종교를 너무 티내면 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충고했다. 그 충고에 대한 답변을 하나님께서 그녀를 통해 하신 것이다. '기어이 살라고, 죽지 말라고'. 이 말을 하려고 나는 간증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월남전에 참전하여 전투를 앞둔 어느 날, 함께 막사를 쓰던 미군이 죽어 그의 빈 침대를 바라보고 있다가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보며 기도했다고 한다. "나는 누구도 믿지 않아요, 나는 나만 믿어요. 그런데 오늘은 두려워요. 죽게 될까봐 두려워요. 만약 이곳(월남)에서 제가 죽는다면 조국에 두고 온 어린 딸은 어떡합니까.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나요.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제 목숨을 가져가신다면 대신 소원이 있습니다. 내 딸 미경이를 대한민국이 키워주세요."
아버지의 그 기도. 내가 미워할 수 없는 그 아버지로 만들었다. 내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나의 간증은 어쩌면 하늘의 아버지를 향한 혈육 아버지의 '오래된 기도'인지도 모른다.
***[역경의 열매] 정미경 (13) 교회 내 분쟁, 세상법 넘어 하나님이 직접 심판
지방 근무시 한 교회의 송사 맡아 거짓 진술서 쓴 권사 시력 잃는 벌을
18대 국회의원 시절 의원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정미경 의원.지방에서 근무할 때였다. 나름 그 지역의 큰 교회는 목사파와 장로파로 나뉘어 교인 간의 분쟁이 심했다. 교회 예배 중 폭행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급기야 고소·고발로 이어졌고, 그 건수가 수십 건에 달했다. 그 사건이 각 검사실로 배당되는 바람에 검사들이 모이면 그 사건들이 화제가 되었다.
이런 저런 말이 오고가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를 놓고 의견이 부분했다. 이럴 때 나는 한숨이 절로 났다. "아, 어찌할꼬…." 양쪽 다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면 하나님은 어느 쪽 편을 들어줄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놀랍게도 링컨이 해주었다. 남북전쟁 당시 재선에 성공한 링컨의 연설문에서 해답을 찾았다.
"남이나 북이나 모두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상대측에 불리하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남이 땀을 흘려 만든 빵을 억지로 빼앗는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가 심판받지 않기 위해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쪽 모두의 기도가 응답받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느 쪽의 기도도 충분한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나름의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 남이나 북이나 전쟁이라는 이 큰 벌이 빨리 지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50년간 노예들의 보답 없는 노동으로 쌓아온 모든 부가 소멸될 때까지 그리고 칼을 든 가해자가 채찍을 맞아 흘린 모든 핏방울을 보상할 때까지, 이 전쟁을 지속시키는 게 하나님의 의지라면, 3000년 전에 말해졌듯 주님의 심판은 전적으로 진실하고 마땅하다고 여겨야 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말고 자비를 베풉시다. 또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정의에 대한 굳은 확신으로 지금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끝내고, 이 나라의 상처를 꿰매며 전쟁에서 싸운 이들과 그 미망인,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노력합시다."
나도 조사를 시작했다. 참고인으로 소환된 여자 권사가 한쪽 편을 들기 위해 무조건 거짓말을 했다. 하도 거짓말을 하기에 그러면 하나님 앞에 맹세할 수 있느냐고 했고, 진술서도 작성할 수 있느냐고 했다. 속으로는 그녀가 '성경에는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찌 내게 이런 것을 쓰라고 하느냐' 이렇게 말하길 기대하면서….
그러나 그 권사는 순순히 하나님께 맹세코 거짓말이 아니라는 취지의 내용으로 진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며칠 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울면서 검사실로 기어 들어온 것이다.
이야기인 즉 이렇다. 그녀는 진술서를 작성하고 검사실에서 나간 후 집으로 돌아갔다. 교회일로 아내가 수사기관에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다 못한 남편이 소리를 질렀고, 말다툼하다 집에서 쫓겨나와 갈 데가 없어 교회로 갔다고 한다. 그러다가 새벽예배에 참석하여 기도하던 중 상대측에서 그녀를 둘러싸고 손가락질하면서 욕을 했다고 한다. 순간 그 권사가 앞이 안 보인다고 울부짖자 그들이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나중에는 놀라서 물러갔다고 한다.
권사는 주변사람들에게 사정하여 자신을 내게 데려다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 방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그녀도 그녀지만 나도 너무 놀라 울면서 잘못했다고 하는 그녀를 붙들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도 잘못했어요. 거짓말하는 것 뻔히 알면서 맹세하라는 진술서를 쓰게 했어요, 제 잘못입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이제 눈을 뜨게 해주세요. 고쳐주세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우리 여직원은 내부에서 걸려오는 직원들의 전화를 받을 때는 "우리 검사님 지금 부흥회하세요. 빨리 끊어요"라고 말했다. 어쩌면 고소인이나 피고소인이나 양측 모두 이 사건의 해결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세상의 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인지 모른다. 나또한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 결과는 전적으로 정의로운 하나님이 심판했음을 고백한다.
***[역경의 열매] 정미경 (14) 고무신 소녀, 성경퀴즈대회만 하면 늘 1등을
정미경 의원의 빛바랜 돌사진. 정 의원은 어린시절 단발머리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육성회비를 못 낼 만큼 가난했지만 공부만은 늘 1등이었다.주일학교에서 성경퀴즈대회를 하면 내가 늘 1등이었다. 집안 형편상 살 수 없었던 백설공주 그림이 있는 스프링 연습장이 부상이었다. 한데 그렇게 대회 1등을 해도 즐겁지 않았다. 어려운 집안 형편이 나를 우울하게 했다. 어디에 있어도, 무엇을 해도 즐겁지 않았다. 또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를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웠다. 교회에서 기도를 할 때도 구석에서 조용히 했다. 혹시 누가 들을까봐….
"하나님, 저는 나중에 커서 술 먹지 않는 남자랑 결혼할래요. 술 먹고 우는 남자는 더 싫어요."
그게 내 기도였다. 응답을 원해서 한 기도도 아니었다. 그저 힘드니까 한 기도였다. 나중에 결혼을 한 뒤 남편이 선천적으로 술을 먹지 못하고 먹으면, 온몸에 빨갛게 두드러기가 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주일학교에서 했던 내 기도가 떠올랐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초등학교 때 공부는 늘 1, 2등이었지만 육성회비를 제때 내지 못해서 앞에서 손들고 벌서던 아이가 나였다. 그 시절에도 몇몇을 빼고는 대부분 운동화 정도는 신고 다녔다. 나는 고무신을 신은 여자애였다. 비가 오면 철떡거리면서 신발이 벗겨지기 일쑤였다. 여지없이 남자애들이 뒤따라 다니면서 놀려댔다. 그래서 새벽에 학교에 갔고, 늦게 집으로 왔다. 교실 내 자리에서 웬만하면 일어나지 않고 책만 읽고 있었다. 되도록 내가 고무신 신고 걷는 모습을 남이 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작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책벌레가 되었다.
어둠이 깔린 뒤 고무신을 신고 땅바닥만 쳐다보며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린 내게도 참 서러웠다. 그래서 혼자 중얼거리며 기도했었다. "하나님, 저에게도 장미꽃이 피게 해주세요, 눈물로 장미꽃만 피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 울어 드릴게요." 서러워서 나온 기도였다. 그 당시 읽었던 책애 '눈물로 피운 장미꽃' 그런 표현이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운동화가 생겼을 때 내가 달리기를 그렇게 잘하는지 나도 놀랐었다. 고무신 생각이 나서인지 지금도 나는 운동화를 신으면 참 행복하다. 내가 검사가 되어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당당해지시는 모습을 보고 그 기도가 떠올랐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내 나이 스무 살 무렵, 주님께 대들며 질문했다. "불쌍한 그 남자(아버지)에게서 왜 그 여자(생모)를 데려가셨습니까." 아이 낳다가 죽은 생모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가 불쌍하고, 생모가 불쌍하고, 내가 불쌍해서 그랬다. 어린 남매를 두고 죽어가는 여자, 분명 살려달라고 기도했을 생모의 모습이 상상으로 그려졌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살려주었을 텐데….
그러나 하나님은 살려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미칠 것 같았다. 서울의 유명한 책방에서 1년간 책을 읽으며 답을 찾으려고 애쓴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포기했고 한동안 그 질문을 잊고 지냈다.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한 어느 날 우연히 톨스토이 작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을 읽다가 답을 찾았다. 나는 잊었는데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셨다.
천사가 있었다. 방금 여자 쌍둥이를 낳은 병든 여인을 데리고 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여인은 천사에게 남편은 며칠 전에 죽었으며, 자기까지 죽으면 이 아가들은 고아가 되고, 부모 없이 아이들은 살 수가 없으니 아이들이 혼자 설 수 있을 때까지만 살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홀로 돌아갔다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전까지는 하늘로 돌아오지 말라는 벌을 받는다. 여인은 하늘로 갔지만 천사는 세상에 남았다. 천사는 구두수선 일을 하면서 살던 중 고아가 된 그 여인의 쌍둥이가 이웃집 여자의 보살핌으로 잘 자라고 있음을 우연히 확인한다.
천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들이 자신만을 생각하고 걱정하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웃집 여자의 진실한 사랑. 하나님은 이런 분이셨다.
***[역경의 열매] 정미경 (15) 준비없이 뛰어든 선거 "하나님의 조직을 주세요"
2008년 "조직도 없이 어떻게?" 우려79세 시아버지도 선거운동 나서 승리
제18대 국회 국방위원으로 국정감사에 나선 정미경 의원.2008년 처음 정치를 시작하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조직이 있나요." 조직이 없다고 대답하면 바로 "조직도 없으면서 무슨 정치를 한다고 참…." 한심하다는 투였다. 하도 이 질문을 많이 받다 보니 정치하려면 정말 조직이 없으면 안 되는 거구나, 조직이 있어야 하는 거구나 했다.
그래서 또 기도하게 되었다. 조직을 달라고 주님께 매달렸다. "조직이 있어야 한대요. 하나님 조직을 주세요. 사람의 조직 말고 하나님의 조직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했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막상 선거에 뛰어드니 나 말고 내 대신 명함을 돌려줄 사람이 필요했다. 법적으로 나 이외에 한 사람 더 가능한데 직계존비속 또는 배우자만이 할 수 있다.
처음 정치한다고 할 때 남편은 진지한 얼굴로 "당신이 원하면 해야지. 그런데 나를 끼워 넣지는 말아줘"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남편은 처음부터 선거운동에서 제외시켰다. 친정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아직 어린 손자들을 보살피셔야 했다. 남은 분은 시아버지뿐이었다.
나는 이분을 늘 아버지라고 부른다. 언제나 내편이시고, 충남 청양에서 끊임없이 농사일에 매달리며 고향을 지키는 분이시다. 결혼하고 며느리인 나는 매일 안부 전화를 올리는데, 아들이 전화 한통 없자 급기야는 내게 "아무래도 종업(남편)이가 집 전화번호를 잊어버린 것 같다. 네가 좀 가르쳐주렴" 하신 분이다. 아버지는 직접화법 대신에 늘 '스리쿠션'으로 우리들을 혼내신다. 그런 아버지가 더 좋다.
내가 정치한다고 했을 때 친정 엄마와 남편은 못마땅해 했지만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좋은 일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어서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기회가 온다면 해야지" 하면서 나를 응원하셨다. 남편이 "왜 아버지는 늘 이사람 편이시냐. 남자인 네가 정치하지 왜 만날 여자가 나서냐. 왜 남들처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냐"고 농담을 할 때도 정색하시며 "너 같은 남자는 셌다"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다.
아버지는 걱정 말라며 직접 명함을 돌리셨다. 당시 79세였다. 전국에서 며느리 선거운동을 하신 시아버지는 우리 아버지가 유일하지 않을까? 아버지는 주민들을 만나면 "청양에서 왔시유. 우리 애기가 한나라당 정미경예유. 진짜 괜찮은 애예유. 믿으셔도 돼유" 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선거운동은 뜻하지 않는 조직을 만들어냈다. 며느리 선거운동 해주러 청양에서 시아버지가 올라오셨다고, 햇볕에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어르신이 며느리 선거운동 한다는 얘기가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그 '아버지'를 도와드려야 한다고 수원에 살고 있는 충청도분들이 자진해서 움직여주셨다.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조직이 만들어진 것이다.
젊은 날 결혼이 하고 싶어 내가 찍어 기도한 남자는 주시질 않고, 하나님이 찍은 남자 이종업을 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충청도 때문이었구나 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나는 잊었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조직을 달라는 내 기도에 응답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셨다.
그렇게 국회의원이 됐다. 그리고 이내 하나님께 합당한 첫 일이 주어졌다.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다.
우리 지역구에는 수원전투비행장이 있다. 18대 국회 후반기 국방위원회를 가기로 마음먹고 전반기에 야간 국방대학원을 다녔다. 여자라 군대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올까 제대로 준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010년 천안함 폭침사건, 연평도 포격사건이 터졌다. 국방부 장관이 교체되면서 청문회를 하게 되었다. 기도했다. 희생당한 우리의 아들들을 위해 지금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달라고 기도했다. 한데 그때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해병대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 역사(役事)의 예고였다.
***[역경의 열매] 정미경 (16) "해병대를 최강 부대로…" 독립법안 이끌어내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 현장에서 질의하는 정미경 의원.
해병대를 알게 된 후 해병대를 작고 강한 부대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려면 자긍심을 갖도록 해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믿었다. 해병대 독립, 38년 이전으로 돌아가서 독자성과 어느 정도의 권한을 갖게 해주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법안이 해병대독자성강화법안이었다. 국방부와 국방위원회의 대부분 의원이 반대했지만 나는 끈질기게 끌고 나갔다. 통일이 되면 중국과 일본이 우리가 해병대를 키우는 것에 대해 반대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때를 놓치면 영원히 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내가 검사 출신이라는 것도 가능하게 만드는 데 한몫했다. 법안심사를 직접 할 수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내가 생각해도 기적이었다. 이 기적에는 기도가 따르는 법. 나는 모르지만 그 누군가가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했을 것이다. 수많은 해병대원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을 것이다.
반대하는 육군 출신 의원들께는 "우리 아버지는 육군 소위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내 잃고 어린 남매를 조국에 두고 월남전에 참전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봐서라도 반대만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설득했다. 진심이 통했다. 나의 아버지는 졸업은 못했지만 공사 9기이기도 했고 육군 대위 출신이기 때문에 나는 공군가족이자 육군가족이다. 남자도 아닌 내가 해병대를 독립시킬 줄 누가 알았을까. 많은 해병대 예비역들이 내게 감사편지를 보내주었다. '죽는 그날까지 의원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순간 조직을 달라는 내 기도가 떠올랐다. 나는 잊었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그런 참 좋은 하나님께 나를 이끌어주신 분은 엄마다. 내 아이들까지 키우시는 엄마, 엄마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생모를 데려가시고 믿음의 엄마에게 날 맡긴 하나님의 뜻을 알기까지 참 많이 힘들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삶을 통해서 내게 가르치신 분은 하나님 그리고 엄마였다.
아버지는 죽음이 곁에 왔다고 느꼈을 때 이 땅에서 사랑했던 두 여자를 남기고 홀로 가는 것을 힘들어했다. 나에겐 엄마를 부탁한다며 "미경아, 너만 믿는다. 엄마는 천사다. 고생만 시키고…내 대신 네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엄마에겐 "여보, 미경이랑 같이 살아. 그래서 미경이 아이들 좀 키워줘. 안 그러면 검사 안 한다고 할 거야"라고 부탁했다.
어느 날 엄마에게 물었다. 우리가 어릴 때 도망가고 싶지 않았느냐고. 어떻게 그 가난과 아버지를 견뎠느냐고…. "네 눈동자 때문이었지. 네가 유독 '엄마 엄마' 하면서 그 큰 눈을 반짝이며 따라다녔지." 아, 나 때문이었구나. 아빠는 나 때문에 죽지 못했고, 엄마는 나 때문에 도망가지 못했다. 내가 두 사람을 함께 살도록 만든 희망이었구나. 엄마의 아빠, 즉 외할아버지는 충남 논산 성동에 작은 시골교회 장로님이었다. 큰 외삼촌은 침례교 이홍범 목사님이다. 작은 외삼촌은 서울 구로구 동광교회 이영범 목사님이다. 현재 친인척으로 목사님 숫자를 세면 20분이 넘는다고 한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바닷속으로 던져 놓으신 게다.
2008년 처음 국회의원 선거일 투표가 시작되기 전인 새벽 5시쯤, 작은 외삼촌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기도응답 받았다. 당선되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영광 올리자.' 속으로 아니 투표도 하기 전인데…결과는 당선이었다. 외삼촌은 처음부터 발 벗고 선거운동을 해주셨다. 수원에 아는 목사님들을 찾아내서 내가 조카라며 도와달라고 부탁하셨다. 외삼촌 교회 성도님들도 마찬가지로 내가 조카라며 수원의 아는 분들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음으로 양으로 수많은 친인척이 만들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수많은 사람의 조카가 돼 있었다. 순간적으로 조직, 그것도 하나님의 조직이 만들어졌다. 나는 그 기도를 잊었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셨다.
***[역경의 열매] 정미경 (17·끝) 대한민국·애국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국회 입성후 제헌국회 속기록 읽고 기도로 시작된 조국의 소중함 깨달아
18대 의원 시절 도쿄 주일본 한국문화원에 걸린 태극기 앞에선 정미경 의원. 이 태극기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있던 우리 동포들이 직접 손으로 만들어 지녔던 것이다.
처음 이 글을 시작했을 때부터 마치는 지금까지 주님의 인도하심대로 쓰고자했다. 처음부터 내 생각, 즉 집필의 순서와 계획 같은 것을 아예 생각하지 말자고 마음먹었었다. 그래서 나도 내가 어떤 글을 써낼지 궁금해했음을 고백한다. 이제 나는 나의 하나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검사를 했기에 직업병 같은 것이 있다. 증거 찾기가 그것이다. "대한민국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믿으십니까"라고 물으면 믿는 분들은 대부분 "아멘"하고 대답하신다. 그러나 "증거가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머뭇거리신다. 그 증거를 찾았다. 처음 국회로 왔을 때 제헌국회 속기록에서 발견했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국회 1차 회의가 열렸다. 이때 임시의장이 이승만 박사이다. 그분이 했던 말씀이 그대로 기록되어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윤영 의원 기도, 일동기립)
지금의 국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손으로 국회의원을 선출해서 제헌국회를 열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했기에 가능했던 일 아니었을까. 이윤영 의원은 목사님이었다고 한다. 기도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선림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그리고 기도는 이렇게 끝맺는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내가 어릴 때 연로하신 장로님들께서 하셨던 그 기도였다. 울컥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럼 그렇지 증거가 있었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또 두 번째 증거를 찾았다. 애국가의 가사는 안창호 선생이 지은 시라고 한다. 안창호 선생은 금식기도를 하면서 이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하고, 우리 민족의 단결을 기원하고, 민주주의를 기원하면서…그래서 원가사에 하나님이 보우하사가 나오는 것이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이면서 지휘자인 안익태 선생은 이 가사를 처음 듣고 '애국가는 내 손으로 작곡하고야 말리라'고 결심한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라고 믿으면서. 그는 어느 날 꿈결에 악상이 떠오르면서 잠에서 깬다. 그렇게 하여 애국가가 완성된다. 안익태 선생은 많은 사람에게 꿈으로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였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1948년 우리 정부가 만들어지고 애국가를 대한민국의 국가로 정식 채택하였을 때, 안익태 선생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다.
'사랑하는 나의 조국 우리 정부가 채택한 애국가는 본인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본인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우리 동포들에게 전달한 것뿐입니다. 이 아름다운 선물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일을 하렵니다.'
또 울컥했다. 그럼 그렇지. 하나님이 하셨다.
증거를 종합하면 '대한민국은 기도로 시작했고, 애국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로 귀결된다. 나라를 사랑한 수많은 선조들의 눈물과 기도가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나라, 하나님이 이끌어 가심을 믿기 때문이다. 통일 대한민국을 기대하면서 기도로서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