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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애통
삼하 1:11-16
11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12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13 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15 다윗이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그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16 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
삼하 1:11-16 /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비보를 듣자 즉시 자기 옷을 갈기갈기 찢고 슬퍼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와 함께 있던 부하들도 모두 옷을 찢으며 행동을 같이하였다. 12) 이리하여 그들은 사울과 요나단을 비롯하여 길보아 전쟁에서 전사한 이스라엘의 모든 군인들을 위하여 슬퍼하면서 저녁때까지 단식하고 울었다. 13) 그러고 나서 다윗은 사울의 전사 소식을 전한 그 젊은이에게 `너는 어느 가문의 출신이냐?'고 물었다. 그가 `저는 이스라엘 땅에 이주해 와서 사는 아말렉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14) 다윗은 그를 무섭게 책망하였다 `네가 어떻게 감히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살해할 수 있느냐?' 15) 다윗이 그 자리에서 부하 한 사람을 불러 이렇게 명령하였다. `그를 즉시 쳐죽여라!' 다윗의 부하가 젊은이를 치자 그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16) 그때에 다윗이 그 젊은이에게 이와같이 선언하였다. `네 죽음에 대하여 나는 전혀 허물이 없다. 네가 네 입으로 `여호와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을 제 손으로 죽였습니다.'라고 말할 때에 너는 이미 네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선포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듣고 애통하며, 사울 왕을 죽였다고 주장한 아말렉 사람을 처형합니다.
다윗의 애통(11-12)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큰 슬픔에 빠집니다. 옷을 찢는 행위는 근동 지방 사람들이 극한의 슬픔을 표시하던 방법이며(수 7:6; 삼상 4:12), 금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다는 것은 그가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리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사울 왕의 죽음으로 다윗은 지긋지긋한 도피생활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되었고, 앞으로는 발 뻗고 편하게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개인적인 이익이나 사사로운 감정보다도 이스라엘 공동체, 곧 하나님 나라 전체의 손실을 먼저 생각하고 슬퍼하였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사울 왕은 다윗의 목숨을 노리던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무리 원수의 죽음이라도 그것을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슬퍼하였습니다(잠 24:17).
아말렉 사람을 처형함(13-16) 다윗은 소식을 전한 청년이 아말렉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 그를 즉시 처형하였습니다. 그를 처형한 명분은 분명합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감히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이 죽였다는 것입니다. 지난 날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의 기회에서 그를 죽이지 않은 것(삼상 24, 26)은 바로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란 여호와께서 주권적으로 세우신 왕이라는 의미이며, 그런 기름 부음 받은 왕을 죽였다는 것은 다윗의 입장에서는 여호와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권위를 존중한 다윗으로서는 아말렉 사람을 처형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대하는가 하는 것은 다윗의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고, 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느냐 혹은 불순종하느냐 하는 것이 다윗의 판단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판단하고 결정할 때 과연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여기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적 용 : 개인의 일보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우선시하는 다윗의 모습에서 당신은 무엇을 느낍니까?
‘용기를 내어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폴 발레리.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는 어디서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큰 바위가 깎이고 깎이어 바윗덩이리가 되고, 돌이 되고, 돌멩이가 됩니다. 오늘의 당신은 아무 근거 없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당신의 생각한 대로 깎이고 다듬어져 현재에 이른 것입니다.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던 자의 죽음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죽음으로 받아들임도 수많은 고통과 환란 가운데에서도 하나님 위주로 생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깊은 믿음과 넓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 현재에서 미래의 모습을 만들기를 소원합니다.
호크마 주석
=====1:11
자기 옷을...찢으매 - 2절 주석 참조.
=====1:12
울며 금식하니라 - 금식 역시 극한 슬픔을 나타내던 한 방법이다. 2절 주석 참조.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슬픔은 지극히 신앙적인 것이었다는 의의를 지닌다. 왜냐하면다윗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슬퍼했기 때문이다. 1)그의 동포들이 살육당했기 때문이다. 2)그 중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 요나단도 있었기 때문이다. 3)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서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이 짐승 같은 이방인에게 짓밟혔기 때문이다. 4)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기름부음 받은 왕 사울이 이방인의 손에 의해죽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과거 사울은 하나님의 성호(聖號)로 기름 부음 받은, 즉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은 신정 국가의 왕이었다(삼상 10:17-24). 따라서 그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죽은 것은 곧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1)하나님의 언약이 파기됨. 2)사울과 그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권위가 떠남. 이러한 까닭에다윗은 사울에 대한 그의 사사로운 감정을 초월하여 진정으로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즉 다윗은 사울 왕국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아 이방인들에게서 조차능욕(凌辱)당한 사실을 못내 안타까와하며 슬퍼하였던 것이다.
=====1:13
나는...아들이니이다 - 이와 관련 매튜 헨리(Natthew Henry)는 한 유대인 전설을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곧 이 아말렉 소년이 사울의 마부였던 도엑(Doeg)의 아들이었다는 전설이다. 그에 따르면 사울은 자결하기 전에 자신의 면류관과 팔고리를 이 청년에게 건네 주면서 다윗에게 바치라고 명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일뿐 그 사실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외국인 - 이에 해당하는 원어 '게르'(* )는 이스라엘에 임시로 체류하는 타국인(* , 노크리)과는 달리 이스라엘에 정착하여 그 사회에 동화(同和)된 이방인을의미한다(출 22:21;23:9). 이들은 유대 후기에 완전한 시민들처럼 대우를 받았으며(겔47:22), 제 3의 십일조를 분배받는 특권을 누렸다(신 14:29). 또한 이들은 여호와 종교로 개종할 경우 이스라엘인과 다름없이 율법에 대한 책임이 있었으며, 동시에 율법의 보호를 받았다(출 12:48,49; 레 16:29; 17:8,15; 18:26; 19:34; 24:22; 25:6; 신 1:16; 10:18; 16:11). 뿐만 아니라, 이들은 법소송에서 위대하신 영주, 곧 하나님께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레 24:22). 그러나 이들은 이스라엘인과 같이 땅을 소유할 수는없었다. 이것은 분명 외국인이 갖는 불이익이었다. 때문에 아말렉 소년은 이러한 불리한 입지 조건으로 인해 다윗에게 아첨하려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Rust).
=====1:14,15
저를 죽이라 - 이처럼 다윗이 아말렉 소년을 죽인 이유는 단순히 그가 정치적인 차원에서 사울을 죽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대신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더 있었다. 1)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기름 부음받은 자를 죽인 것은 여호와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으며(삼상 24:11;31:4), 또한 신정 국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 받는 자의 왕권을 침해하는 행위였다. 2)아말렉 소년은 이스라엘에 귀화(歸化)한 자로서 이스라엘의 법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절 주석 참조. 즉 그는 적어도 이스라엘 사회가 귀화한 외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전심 전력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 보답하는 의미에서도 이스라엘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며 또한 그 왕에게 충성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사울을 살해하였으니 은혜를 악으로 갚은셈이다. 따라서 다윗이 그를 처단한 것은 하나님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는 행위인동시에, 여호와의 권위에 대적한 악을 제거한 공의로운 행위였다고 할 수있다. 즉 그는 이와 같이 공의로운 처단을 함으로써 은연중 신정 국가의 왕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1:16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영혼이 깃든 처소로까지 묘사되어 있다(창 9:4;레 3:17;17:11,14). 그러나 여기에서 피는최고의 형벌, 또는 죄에 대한 책임 등 처벌을 의미한다. 그리고 머리는 개인의 인격과육체, 생명 따위를 의미하는 대표 개념이다. 따라서 이 말은 '피를 흘린 그 책임이 바로 네 자신에게 있다'는 뜻이다. 즉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것이니"(창 9:6)라는 원리에 따라 다윗은 사울을 살해한 피의 대가를 아말렉 소년에게서 찾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 설 교 >
멋을 하는 사람
권오서목사 / 삼하 1:11-16
「영국 종교 개혁사」를 쓴 영국의 역사학자인 버네트에게는 집에서 포기한 방탕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아들이 평소와 달리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버네트는 아들에게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의 종교개혁사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한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말에 놀란 아버지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바로 제 자신을 개혁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영국의 유명한 법률가인 토머스 버네트(Thomas Burnette)입니다.(김인환, 예배 드리는 자녀가 성공한다. p.250)
그렇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기 전에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상황이나 조건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변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갈등이 있는 것 아닙니까? 누군가에 의해 상처받는 것도, 마음 아파하는 것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은 모두 내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다윗에게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아마도 이 순간 다윗을 추종하던 사람들은 드디어 모든 장애물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다윗이 왕위에 등극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슬퍼했습니다. 울며 금식했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요?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근 10년 동안 다윗을 쫓아다니며 괴롭힌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골칫거리였고, 누가 보아도 잘 된 일인데, 다윗은 슬퍼하고 그것도 모자라 울며 금식까지 했습니다.
여러분, 어떠한 생각이 드십니까? 다윗의 위대함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정말 멋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멋을 아는 사람”이라고 정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멋을 아는 사람일까요? 옷을 잘 입는 사람일까요? 분위기에 맞춰 잘 치장하는 사람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신앙생활의 멋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멋을 아는 사람은
1.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을 때, 사울 왕은 그를 죽이기 위해 군사 삼천을 동원하여 다윗을 추격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이 잠시 일을 보기 위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그곳에 다윗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사울이 들어오는 것을 본 다윗의 추종자들은 절호의 기회가 왔다면 사울 왕을 해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사무엘상 24장 6절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왜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서도 죽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엿볼 수 있습니까? 다윗이 매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입장만을 가지고 볼 때, 분명 사울은 자신의 적이 틀림없었습니다. 죽일만한 이유가 없었는데도 수차례 자신을 죽이려고 했지 않습니까? 도대체 자신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녀야만 하는가? - 몹시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 왕이 분명 자신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임에 틀림없었지만, 그를 두려워하기보다 오히려 긍휼히 여길 수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슬퍼할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과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축복해주기보다 헐뜯고 비판합니다. 은연중에 실패했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보다 ‘자신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성공입니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내 자신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다른 사람이 성공했을 때 축복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요? 나도 그만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공에 대해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공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생성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은 무엇입니까? 출세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많이 모으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 되는 것입니다. 무한한 권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서 안락하게 사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성공으로 알고 하루하루 분주하게 삽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것들이 진정한 성공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보는 성공은 세상의 눈으로 보는 성공과는 180도 다릅니다.
시편 73편은 아삽의 시입니다. 이 시편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는 신실한 아삽의 마음상태를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아삽은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질시하다가 실족할 뻔 하기까지 했습니다. 더욱이 아삽 자신은 끊임없는 고통 가운데 있는데 악인들은 쉽게 부를 늘려가기까지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의인 아삽은 고통스러워합니다. 반대로 악인은 부를 늘려가며 넉넉한 삶을 삽니다. 그렇다면 누가 성공한 사람입니까? 아삽입니까? 악행자들입니까? 아삽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은혜를 입습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까? 시편 73편 17절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그렇습니다. 아삽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감으로써 무엇이 참된 성공인지 깨달았습니다. 그가 깨달은 성공이란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것이 참된 성공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삽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25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26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
여러분, 이해할 수 없는 일 가운데 있으십니까? 하나님과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세요.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세요. 말씀을 읽더라도 겉핥기식으로 읽지 말고 깊이 묵상하며 읽으세요. 하나님과의 깊이 있는 만남을 경험하면, 물질이 없어도 넉넉할 수 있고, 슬픔 일을 겪어도 기뻐할 수 있으며,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분을 가까이해야 삶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짐으로써, 신앙생활을 멋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생활의 멋을 아는 사람은) 개인적인 입장보다는 공동체적인 입장으로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다윗에게 있어서 사울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적으로 볼 때 사울은 자기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사울의 죽음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정말 잘 된 일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공동체적으로 볼 때는 얼마나 큰 타격이고 충격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공동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만을 보아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노사갈등-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죽하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간혹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명분이 있는 파업을 한다면야 납득이 되고 지지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명분이 약할 때가 있습니다. 더욱이 요즘처럼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든 때에 파업을 해서 모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경우에는 지나치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협상의 목적이 다 죽자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서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줄 수 있어야 발전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담임목사가 힘들고 지치면 교인들에게도 영향이 미칩니다. 장로님이 처신을 못하면 장로님 개인으로써는 아무 문제도 없을 수 있지만, 교회 전체적으로 보면 큰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는 교인의 입장에서, 평신도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입장만 고수해서는 안 됩니다. 저 역시 춘천중앙교회 담임목사로써 늘 조심합니다.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담임목사인 내가 욕먹으면 교회가 욕먹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독 재임기간 동안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교단 일을 하다보면, 어떠한 일에 대해서는 교단 대표의 생각과 본인의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본인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대표의 생각과 의견에 힘을 실어줍다. 이유가 있습니다. 교단 대표가 하는 일이 잘 되어야 내가 잘 되는 것이고, 내가 잘 되어야 동부연회가 잘 되고 우리교회가 잘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교단 대표가 욕을 먹으면 감리교 전체가 욕을 먹는 것이고 본인이 욕을 먹는 것이고 우리 교회가 욕을 먹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동조하고 힘을 실어주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의롭지 못한 일이라면 분명하게 반대 입장을 말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다만, 의롭지 못한 일이 아니라면, 단순히 입장차이라면 얼마든지 수긍하고 힘을 줄어주는 것이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 몸입니다. 몸에는 여러 가지 지체들이 붙어 있습니다. 그 지체들 가운데 하나가 아프면 몸 전체가 그 아픔을 느낍니다. 손가락이 아프면 손가락만 아픔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몸의 일부분이 아파도 몸 전체가 아픕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만 아파보세요. 모두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내가 아파 병원에 입원해보세요. 평소 아내의 모습이 조금 못 마땅한 구석이 있다가도 아내가 없으면 집안 구석구석이 형편없어집니다. 설거지해야 할 그릇들이 싱크대를 가득매우고 음식쓰레기는 버리지 않아 악취가 나고, 빨랫감도 수북이 쌓여가고 정말 집이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무슨 가축우리 같이 변해갑니다. 그러면서 아내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결코 개인과 공동체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면, 개인도 망하고 공동체도 망합니다. 개인의 입장만을 내세우면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이 곧 나의 불행임을 아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 나의 어려움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어야 나도 잘 됩니다. 나라가 망하면 국민 개개인이 아무리 힘이 있어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교회가 자랑스러우면 나도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개인은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어야 하고, 공동체는 개인의 형편을 잘 살펴야 합니다. 서로 이해하는 풍토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용납하고 용서하며, 세워주는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성도간에 서로의 형편을 헤아리며 서로 Win-Win하는 춘천중앙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신앙생활을 멋을 아는 사람은) 객관성을 유지할 줄 압니다.
오늘 본문과 이어지는 1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이는 사울과 요나단을 죽음을 애통해하며 부른 다윗의 애가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을 가리켜서 뭐라고 합니까? “이스라엘의 영광”, “두 용사”라고 말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전임자를 폄하하는 발언을 할 때가 많습니다.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루트를 통해서 전임자가 잘못했던 것들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웁니다. 그런데 다윗을 보세요.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가리켜서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두 용사”라고 말합니다. 비록 사울이 하나님께 범죄했지만, 사울 왕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이스라엘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사울 왕과 요나단을 업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멋을 아는 사람은 객관성을 유지할 줄 압니다. 주관적인 입장에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객관적인 입장을 취할 줄 알아야 피해의식을 가지지 않고 희망찬 새 출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고 주관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가정해보세요. 사울 왕에게 쫓기다시피 한 과거의 삶에 연연하며 새로운 도약을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요? 상처 입은 사람은 상처가 치유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할 수 없어!’, ‘나에게는 희망이 없어!’, ‘과연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해낼 수 있을까?’-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어떤 사람들입니까? 상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회학에서 쓰는 용어 중에 N-Virus란 용어가 있습니다. 어느 사회나 국가가 오랜 세월 침체된 역사를 거듭하여 오다가 어떤 특정 지도자나 특정 그룹의 노력에 의하여 구성원들이 용기를 얻고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긴 세월의 침체기를 벗어나 도약의 기회를 잡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 그런 역할을 하는 지도자나 집단을 일컬어 ‘N-바이러스’를 지닌 사람, 혹은 집단이라 일컫습니다. N-Virus에서 “N”은 필요, 요구 등의 뜻을 지닌 Need의 약자로, 이 단어가 지닌 의미는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한결같이 “안 된다”, “할 수 없다”,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젖어 있을 때에 한 사람 혹은 한 그룹의 사람들이 나타나 “아니다. 된다”, “할 수 있다”, “희망이 있다”고 주장하며 삶으로 실천하여 할 수 있는 것을 다른 구성원들에게 보여 줍니다. 그러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젖어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 생각에 감염 되어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꾸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공동체가 오랜 세월 동안의 침체기를 벗어나 성장, 발전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 처음에 “하면 된다”는 생각을 퍼뜨린 사람을 일컬어 N-Virus를 지닌 사람이라 일컫습니다.(예화노트, 검색어 : 공동체, 제목 : 꼭 필요한 사람들)
바로, 이 N-Virus를 지닌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있는데, 객관적인 시각입니다. 현실을 직시할 뿐만 아니라, 꿈을 제시하며, 희망을 창출할 줄 압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는 보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주관적인 시각에 집착한 나머지 피해의식에 갇혀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사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능히 감당하기 힘든 일을 해냈다면 축복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흠집 잡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의 흠집을 찾으려는 사람은 결코 자신도 성장하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른 사람을 저주하면 그 저주가 나에게로 돌아오고, 축복하면 그 축복이 10배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결 론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말합니다. 정치계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교육계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종교계도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야말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일입니다. 내가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매사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아삽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 악인의 결국이 어떠한 지를 알게 되었다며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공동체적인 생각을 하세요. 자기입장에서만 생각하면 됩니다. 공동체가 성장해야 나의 성장이 의미가 있고, 국가가 안정을 취해야 개인의 안정이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가 평안하고 부흥해야 성도가 형통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관적인 생각인 우리를 피해의식에 가둘 우려가 있습니다.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 N-Virus를 지닌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공동체적인 생각을 하며, 객관성을 유지함으로써 신앙생활을 멋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의 눈물
삼하 1장 11~18절 / 이익환목사(욥바교회)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삼하 1:11-12)
슬픔은 환영 받는 감정이 아니다. 가뜩이나 우울한 일이 많은 현대인에게 슬픔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내게는 찾아 오지 않았으면 하는 감정이다. 그래서 슬픈 일이 생기면 다른 오락거리나 나를 자극하는 것을 찾아 그 슬픔을 잊어버리거나 그 슬픔에서 빨리 벗어나려 한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잘 슬퍼할 줄 모른다. 그러다 보니 남의 슬픔에 대해서도 냉담하거나 잘 공감하지 못한다. 그러나 슬퍼할 일은 널려있다. 같이 슬퍼해야 할 일도 많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큰 슬픔에 빠진다. 사울왕이 죽었기 때문이다. 자 그런데 좀 이상하다. 자기를 죽이려던 원수 사울이 죽었는데 슬퍼했다는 게 좀 이상하다. 다윗 개인적으로는 춤이라도 춰야 할만큼 기쁜 소식이었다. 사울이 죽음으로 그의 오랜 피난 생활이 끝나고 이제 왕이 되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슬퍼했다. 어떻게 다윗은 원수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삼상 28:4,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사울이 마주한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이었다. 가나안 해변에 머물러 있던 블레셋 족속들이 이스라엘의 중심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공격해 온 것이다. 사울은 다급했던 것 같다. 하나님께도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다.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통해 죽은 사무엘을 불러 대화한다. 사무엘은 이렇게 답해주었다. 삼상 28:1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내일 너와 네 아들 요나단이 죽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사울의 죽음은 예고된 죽음이었다.
삼상 31:1,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성경은 전투의 과정은 언급하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었다는 내용만 기록하고 있다. 어차피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예고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글락에 있었던 다윗은 한 아말렉 청년으로부터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청년은 죽어가는 사울의 요청으로 사울을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던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다윗에게로 가져온 것이다.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빈 왕관이 다윗 앞에 있었다. 아말렉 청년은 아마도 다윗이 좋아하며 자신에게 상이라도 줄 것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옷을 잡아 찢는다. 옷을 찢는 행동은 히브리어로 ‘크리야’다. 유대인들은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이 있을 때 그것을 가장 격렬하게 표현하는 행위로 옷을 찢는다. 다윗만 옷을 찢은 게 아니었다. 다윗과 함께 했던 약 600명의 사람들도 다 옷을 찢었다. 쫓겨 다니느라 옷도 많지 않았을 텐데 온 공동체가 옷을 찢으며 사울을 잃은 슬픔에 동참한 것이다.
삼하 1:11-12,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과 그의 공동체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 족속이 블레셋에 패배하며 많은 사람이 죽은 것 때문에도 슬퍼했다. 여기서 다윗의 눈물이 조금은 이해된다. 그는 사울과의 개인적인 애증을 넘어 국가적인 상실을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이어서 그 아말렉 청년을 꾸짖는다. 삼하 1:1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다윗에게 사울은 여전히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었다. 사울 때문에 다윗은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자를 죽이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했다. 사울이 자신에게 저질렀던 모든 악행보다 하나님이 그를 기름부어 세웠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는 사울이 죽고 나서 이런 시편을 남긴다.
시 18:1-3,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다윗은 절대주권이 하나님게 있음을 노래했다. 그는 원수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원수의 손에서 자신을 건지실 분이 하나님임을 신뢰했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고 완전히 행하고자 결심했다.
시 18:23-24,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다윗은 어쩌면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힘들게 지켜왔던 자신의 원칙과 그로 인하여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을 돌아보며 눈물 흘렸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는 사울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께만 피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만 그의 방패와 요새가 되시는 견고한 영혼이 되었다. 그는 아둘람 굴에서 하나님께 억울함을 토하며 숱한 눈물의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의 기도를 심었던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도 바울이 이런 권면을 한다. 롬 12:14, 17,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 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다윗은 자신의 삶에 원수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박해했던 사울왕을 위해 기도하며 축복했을 것이다. 자신이 오랜 시간 축복했던 사울이 죽었을 때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슬펐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옷을 찢고 눈물 흘리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금식했던 것이다.
원수를 위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영혼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사람의 반응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영혼이다. 그의 앞 길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이어지는 사무엘하 2장에서 다윗은 드디어 유대의 왕이 된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에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며 자신을 준비시킨 것이다.
우리 역시 살면서 나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만난다. 그럴 때 ‘복수는 나의 것’이 나의 삶의 목표가 되어선 안된다. 원수가 망하도록 저주하는 것도 나의 기도가 되어선 안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히려 원수를 위해서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견고한 영혼으로 빚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 되야 할 것이다.
지난 주 텔아비브 아즈리엘 몰에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49층 전망대에 오르자마자 아래로 보이는 텔아비브 전경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다. 웨일즈에서 오신 목사님께 텔아비브의 영적 상황들을 나누고자 동성애 퍼레이드가 20년째 시의 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목사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얘기를 나눴다. 사랑으로 그 여인을 받아주었을 때 결국 그 여인이 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텔아비브를 바라보면서 축복하는 기도를 하셨다. 그 나눔 이후 한가지 생각이 내 머리 속을 지나갔다. 그동안 나는 나의 사역에서 ‘내가 옳다’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주변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슬픔에 귀를 기울이는데 더 마음을 기울이지 못했음을 돌아보게 되었다. 49층 전망대에서 창밖을 다시 내려다 보았다. 더 사랑하고 더 축복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삼하 1:17-18,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다윗은 슬픈 노래를 지어 자신과 함께한 공동체뿐만이 아니라 전체 유다 족속에게 그 노래를 가르치도록 명령한다. 다윗은 이 노래에서 사울과 요나단을 칭송한다. 두 용사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들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였음을 기념한다. 다윗은 그들을 잃어버린 것이 우리 모두의 상실임을 노래했다. 상실을 슬퍼하는 시간을 통해 해결되지 않았던 묵은 상처들이 치유된다. 다윗 개인적으로도 슬픔을 노래함으로 사울을 통해 고통받았던 시간들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왕을 잃은 슬픔을 공유하면서 이스라엘은 이제 서로를 격려하며 새로운 다윗 왕조를 향해 일어설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슬픔은 숨겨야 하는 감정이 아니다. 눈물은 빨리 닦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애통할 때 위로하시기 원하신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함께 애통하며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우리 공동체가 되길 원한다. 우리 사회와 민족과 열방에 벌어지는 분쟁과 상실의 순간을 슬퍼하며 기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주님이 오시기까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눈물이 있는 곳에서 우리가 함께 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그리스도인의 리더십
삼하 1장 11~12절 / 김형준목사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리더십은 이처럼 영향력 있는 삶을 사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사람의 마음속에 감동을 주고,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결단을 하게 만드는 영향력을 얼마나 미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리더십이 있다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의 마음을 얻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진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말렉 사람은 다윗에게 잘 만 보이면 마음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다윗이 가장 필요로 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한 후, 거짓말로 “내가 당신의 원수를 내가 죽였습니다. 나에게 칭찬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거짓말은 다윗의 마음을 얻지 못합니다. 아말렉 사람은 다윗에게 칭찬받으리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다윗에게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기에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진실을 가지고 있지 않고는 절대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리더십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거짓은 얼마 가지 못합니다. 진실에 근거해야 사람의 마음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진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2.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적을 위해 울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1,12절을 보면 다윗은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음 앞에 애통하며 울고 있습니다. 나에게 고통을 주는 그 사람, 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정말 금식하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적인 사울을 위해 기꺼이 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나의 적을 위해,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될 때,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되고,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3.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상대방의 약점을 퍼뜨리지 말고, 오히려 강점을 말해야 합니다.
본문 20절 말씀에는 다윗이 사울의 죽었다는 소식을 전파하지 말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모습은 삼상 31장에 나오는 사울의 죽음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그의 시체를 성벽에 못박아 놓은 블레셋 사람들의 모습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오히려 다윗은 23절 말씀을 통해 볼 수 있듯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지녔던 장점을 노래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얻어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위해서는 상대방의 약점을 말하기보다 오히려 그의 강점을 말해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게 불리한 상황이 닥쳐와도 진실을 붙잡는 삶, 내게 해를 끼치는 적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삶, 상대방의 약점에는 침묵하고 오히려 장점을 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에 자신을 투자하며 나아갈 때 영향력 있는 좋은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올 한해 우리들의 가정과, 직장, 삶의 현장에서 이와 같이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향기로운 신앙 인격
삼하 1장 11~16절 / 박봉수목사
며칠 전 강의 차 장신대를 갔습니다. 아차산 길로 접어들었는데 갑자기 차 안으로 향기가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바로 아카시아 향기였습니다. 그 향기에 취해서 차를 길 가에 세웠습니다. 창문을 열고 가슴 가득 그 향기를 마셨습니다.
5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는 몰라도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피곤하던 몸도 개운해진 것 같았습니다. 상쾌한 마음으로 강의실로 들어갔습니다.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고 또 행복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소위 “아로마테라피”가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로마’는 좋은 향기를 뜻하고, “테라피”는 치료법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로마테라피라는 말은 향기로 우선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나아가 피로회복과 여러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는 일종의 대체의학의 한 요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카시아 향에 취해 잠시 차를 멈추고 있는 동안 제게 일종의 아로마테라피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향기가 저를 새롭게 한 것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한 마디를 주고받아도 백 마디를 주고받은 듯,
한 번을 만나도 십 년을 만난 듯한 사람.
일백 마디를 주고받아도 늘 처음의 푸른 마음을 주고받음 같이
10년을 만나도 처음 만났을 때의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늘 가까이 있는 듯
한 점의 기쁜 순간을 평생의 기쁨으로 이어갈 듯
그렇게 그렇게 푸른 가슴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들과 같이 숨쉬며 살아가는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사람의 향기 中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도 향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맡을 수 있는 향기 말입니다. 그런 향기를 맡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런 복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여러분이 그런 향기를 풍겨서 주변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아주 짙은 사람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다윗의 신앙인격에서 풍겨 나오는 짙은 사람의 향기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런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 중이었습니다. 사울 왕과 요나단이 직접 이 전쟁을 지휘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저 멀리 시글락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 도중에 사울 왕과 요나단이 전사를 하게 됩니다. 한 아멜렉 소년이 다윗에게 달려와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사울의 왕관과 팔찌를 보여주며 그간에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보고했습니다.
다윗이 그 소식을 듣고 옷을 찢으며 슬퍼했고, 이를 본 백성들도 함께 슬퍼하며 울고 또 금식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은 조가를 지어서 저들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다윗의 신앙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짙은 사람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1. 관용의 향기
다윗이 사울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왕의 시종이 되어 왕궁에 들어가게 되면서였습니다. 악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울 왕을 위해 주의 신에 감동된 다윗이 수금을 타서 악신을 쫓아내주었습니다. 처음에 좋은 관계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면서 이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골리앗을 물리치자 백성의 민심이 다윗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서서히 사울의 질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첫째 딸 메랍을 주기로 한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둘째 딸 미갈을 줄테니 블레셋 사람 백명의 양피를 가져오라 했습니다. 블레셋과 싸우다 죽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백 개 뿐 아니라 백 개를 더 가져왔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더욱 심각하게 정적으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할 수 없이 딸 미갈을 주어 사위로 삼았지만 사울은 다윗을 본격적으로 죽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여러 차례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로 음모를 꾸몄지만 번번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윗은 도피생활을 하게 됩니다. 10여 년간 다윗은 사울을 피해서 기나긴 유랑 도피생활을 고단하게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울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이제 고달픈 유랑 도피생활을 끝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될 수 있는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러면 보통 사람 같으면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자기 유랑 생활을 함께한 동지들과 잔치라도 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의 전사 소식을 듣자마자 옷을 찢고 슬퍼하며 울었고 금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사울은 다윗을 적으로 생각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적으로 생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십여 년 집요하게 뒤쫓고 있는 사울을 관용으로 보듬고 있었던 것입니다.
관용이라는 말은 불어로 똘레랑스(Tolerance)라 합니다. 타인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의 기본은 참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너그럽게 포용했습니다. 그리고 용서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참고 또 참아야 했습니다. 이런 다윗에게서 짙은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관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서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관용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 장왕이 어느 날 신하들과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잔치 중에 촛불이 꺼져 깜깜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어느 신하가 왕의 애첩의 귀를 잡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깜짝 놀란 애첩은 그 사람의 갓끈을 잡아뗀 후 무례한 짓을 한 자를 처벌해 달라고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이에 왕은 "오늘밤, 이 자리에 갓끈을 떼지 않은 사람에겐 벌을 내리겠다."고 명한 후, 불을 켜게 했답니다. 실수한 신하를 용서해 주기 위한 왕의 관용에서였습니다.
그 후 2년이 지나자, 초나라가 진 나라의 공격을 받아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적군을 물리치고 왕을 위기에서 구한 사람이 바로 그 신하였습니다. 그는 장왕의 관용에 감동되어 어느 때고 그 은혜를 갚고자 군사를 훈련시키며 준비를 해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관용이 필요합니다. 특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관용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우정의 향기
다윗과 요나단은 어떻게 보면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다윗은 새로운 왕감으로 부상하고 있는 차세대 지도자였고,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을 이어 왕이 될 왕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순수한 우정을 이어갔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진심으로 친구로 대했습니다. 삼상 19:1을 보면 다윗을 심히 기뻐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삼상 20:17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요나단이 자기 생명처럼 다윗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이 일로 사울이 요나단까지 죽이려고 창을 던지기까지 했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도록 다윗을 지켜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윗도 요나단을 진심으로 친구로 대했습니다. 정말 자기가 어려울 때 요나단에게 솔직하게 자기 심경을 털어놓았고, 모든 일을 의논했습니다. 삼상 20:41을 보면 요나단이 자기가 숨어있던 곳까지 와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정보를 알려주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요나단에게 세 번 절했고, 서로 부둥켜안고 정말 크게 울었습니다. 정말 힘들 때 다윗은 요나단을 의지했습니다.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조가를 지어 이렇게 애통해 했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상하 1:26) 다윗은 왕이 되자 요나단을 생각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자기 자식처럼 자기 상에서 함께 식사하게 했고, 15명의 종과 일군을 붙여주었고, 사울의 재산도 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요나단을 생각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우정에서 짙은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우정에 감동을 받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의 우정은 다음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상황을 뛰어넘었습니다.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과 다윗과는 정적 관계였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상황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은 우정을 맺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이런 상황을 뛰어넘어서 우정을 맺었습니다.
둘째, 이해타산을 뛰어넘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은 왕위를 놓고 쟁탈전을 벌여야 할 관계였습니다. 사울의 뒤를 이어 요나단은 왕이 될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도록 예정된 사람입니다. 왕의 자리는 하나입니다. 서로 이해타산으로 목숨 걸고 싸워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이런 이해타산을 뛰어넘어서 우정을 맺었습니다.
셋째, 시간을 뛰어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우정은 처음 만날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속될 수 없는 수많은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이어졌습니다. 요나단이 죽은 뒤에도 그 우정은 지속되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우정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이런 장벽들 때문입니다. 상황이라는 장벽, 이해타산이라는 장벽, 그리고 시간이라는 장벽입니다.
사랑하는 여려분! 우리에게 우정이 필요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변함없는 우정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다윗과 같은 우정의 사람들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3. 존중의 향기
본문을 보면 아말렉 소년이 다윗에게 사울의 전사 소식을 전했습니다. 왕관과 팔찌를 어렵게 가져왔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큰 상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자기의 공을 드러내기 위해서 없는 사실을 지어서 덧붙였습니다. 자기가 우연히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투 자리에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사울 왕이 블레셋 군사들이 몰려오고 있는 와중에 크게 다쳐서 자기에게 죽여 달라 청했다는 것입니다. 그 청을 받고 자기가 사울 왕을 죽였고 왕관과 팔찌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소년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이 자기의 공을 크게 사서 큰 상을 내릴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리가 있는 발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소년을 그 자리에서 당장 죽이라 했습니다. 그 이유는 14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종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이유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일이 있습니다. 삼상 24장을 보면 다윗에 엔게디 굴에서 혼자 잠자고 있던 사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겉옷만 베었습니다. 그리고 그 옷자락 벤 것만으로도 마음에 찔려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6절을 보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을 존중한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를 죽이러 온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기름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를 죽인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종의 하나님 대하듯 존중하는 모습 속에서 짙은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겸손히 하나님 사람들을 존중한 그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그 사람 저 깊은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드리워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세우신 주의 종들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을 기름 부어 세우셨습니다. 신약 시대 이후에는 하나님의 종들을 안수해서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들의 권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종들의 권위는 그들의 인격이나, 그들의 능력이나, 또 그들의 도덕적 의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주의 종들을 존중하되 그들을 보고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 때문에 그들을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역자들을 존중하시기 바랍니다. 장로님들, 안수집사님들, 권사님들 이분들도 안수를 받는 분들입니다. 이분들도 존중하셔야 합니다. 함부로 비난하고 함부로 공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가까운 친구 박정관 목사님이 지은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성도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보고 그것 때문에 존중한다는 고백입니다. 그의 외모나, 그의 조건이나, 그의 도덕적 윤리적 의나 결함 때문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를 존중할 수 있기 바랍니다. 허물이 있어도, 내 맘에 들지 않아도, 심지어 나와 입장이 달라도 그래서 나를 비난해도 그를 존중할 수 있기 바랍니다.
다윗에게는 짙은 향이 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하나님께서 그 향을 맡으셨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향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기쁨으로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향기가 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슬픔, 위선인가? 진정인가?
삼하 1장 11~16절 / 김진홍목사
‘소크레악사 힘’은 170만 명이 무참하게 살해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그 사건으로 인해 받은 고통과 그 고통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검은 색 제복에 붉은 색 스카프를 맨 소년병들이 아버지를 구덩이 앞에 무릎을 꿇게 했다.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괭이로 머리를 내리찍자 아버지가 소름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구덩이 안으로 굴러 떨어졌다. ‘마오’라는 사람이 나를 뒤에서 쳐서 아버지 위에 떨어뜨렸다. 내 남동생들과 누이 그리고 다른 집 아이들이 내 위에 굴러 떨어졌다. 그들이 떠나간 지 5분쯤 후에 나는 몸을 일으켜보았다. 가족들을 일일이 살펴보았지만 모두 죽어있었다. 마침내 나는 무덤 앞에서 절을 하고 가족에게 세 가지를 맹세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형제자매들. 내가 살아 있는 한 반드시 복수를 하겠어요. 그렇게 못하면 승려가 되겠어요. 그리고 이 두 가지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캄보디아를 떠나겠어요.’ (중략) 1984년 중반에 나는 타이 국경을 넘어 국경도시 아라냐프라텟 근처에 있는 난민수용소를 통해 89년 캐나다 토론토에 도착하여 선교단체인 ‘월드 비전’이 운영하는 시설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주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머릿속에 감옥을 만들어 내 가족을 죽인 살인범들을 그 안에 가두어 놓고 살고 있었다. 가족을 잃은 후 15년 동안 나는 매일처럼 그 감옥 안에서 살인범들을 도륙하고, 도끼로 찍고, 토막 내고, 두들겨 패는 상상을 하며 살았다. 캄보디아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캄보디아에서 제일 먼저 우리 가족을 죽인 마오를 만났다. 마오와 3시간을 함께 보낸 후 내가 그를 껴안으며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합니다.’ 나는 속으로 울었다. 나는 그동안 나를 억눌렀던 미움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됨을 느꼈다. 이제야 마음속에 기쁨이 찾아왔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이기에 이런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게 하는가?’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원수의 주검을 앞에 놓고 우는 또 다른 눈물을 봅니다.
다윗의 눈물입니다.
11-12절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의 눈물은 사울 왕에 대한 용서의 눈물이었을까요?
1. 다윗이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되다.
삼하 1장을 보면, 길보아 산에서 아말렉 소년이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을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쓰는 행동은 고대 근동 사람들이 극도의 슬픔을 표현할 때 하는 행동입니다.
다윗이 그에게 길보아산의 전투상황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스라엘의 패배를 전하면서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알려주었습니다.
4절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다윗은 재차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느냐?”
그랬더니 그 사람이 사울 왕의 죽음을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자결을 했지만 아직 목숨이 붙어있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그 사람에게 자기의 죽음을 도와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6절에 보면, “........내가 우연히 길보아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창에 기대고’
성경은 사울 왕의 마지막 모습을 ‘창에 기댄’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 창은 어떤 창입니까?
다윗을 질투한 나머지 그를 죽이려고 던졌던 창이 아닙니까?(삼상18:11)
여호와의 신이 떠난 후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려고 마지막까지 기댄 창이 아닙니까?(삼상22:6)
본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창’을 의지했던 한 인간이 그 창에 죽는 비극적인 모습을 그리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재물, 권력, 지식, 배경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말렉 사람은 사울 왕을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팔찌를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아멜렉 사람은 다윗과 사울 왕의 갈등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울 왕을 죽였다고 보고하면 어떤 큰 보상을 받으리라고 기대하고 다윗 앞에 온 것입니다.
2.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다윗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11-12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은 그 자신이 슬퍼할 뿐만 아니라 슬픔의 노래인 ‘활의 노래’(lament of the bow)를 지어 민족적인 차원에서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의 죽음을 애도하게 했습니다.
다윗은 슬픔의 노래에서 이렇게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삼하1:24절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삼하1:26절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그토록 쫓아다녔던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인간이라면 그래야만 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사울 왕은 누구였습니까?
원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 의하여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지금도 조국과 고향을 떠나 이방 땅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울 왕의 죽음은 기쁨이어야 했지요.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다윗의 반응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윗의 슬픔은 위선인가, 진정인가?’
‘혹시 사울을 따르는 사람들을 의식한 정치적인 제스처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다윗의 진정성이 느껴져요.
다윗이 진정으로 사울왕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것입니다.
진정성이 느껴져야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마음 문을 엽니다.
교회학교 교사들, 속회인도자들, 선교회 회장들, 사역자들은 잘 들으십시오.
진정성을 느끼도록 해야 복음사역에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진정성을 갖자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정성을 갖자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누구도 짧은 시간에 상대방의 진정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또 진정성을 갖자면 반복이 필요합니다.
아무도 한 차례의 사랑으로 진정성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되는 그 무엇을 통하여 상대방의 진정성을 파악합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의 이런 진정성이 느껴져요.
3. 어떻게 다윗은 원수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할 수 있었을까요?
한마디로, 그것은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가 있어요.
우리는 본문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14절을 읽어봅시다.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다윗이 사울왕의 죽음에 대하여 슬퍼한 것은 사울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으니까요.
사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엔게디 동굴에서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왔습니다.
그때 다윗이 한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삼상24:6절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두 번째는 십 광야에서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한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삼상26:11절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그 두 번의 기회에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이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기름부음’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란 표현은 구약에서 통틀어 11회 등장합니다.
렘애 4:20절을 제외하고 모두 사무엘서에만 나옵니다. (삼상24:6, 24:10, 26:9,11,16, 23, 삼하1 ;14,16, 19:21)
그만큼 이 표현은 사무엘서에서 중요합니다.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된 자’ 라는 뜻입니다.
그런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사람이 왈가불가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충성하다가 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목회자와의 관계를 잘못 설정할 때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생각 없이 목회자를 심판하려고 할 때 그것은 망하는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목회자에 대한 심판은 기름 부으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우리 교회에는 과거에도 그런 예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런 예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은 성경의 뜻이 그렇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니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10절에 보면, 아말렉 사람은 사울 왕을 죽이고,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온 두 가지 물건은 왕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왕관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네제르'인데 그 뜻은 ‘구별하다’입니다.
성경에서 나실인의 긴 머리카락은 구별된 사람을 나타내는 ‘네제르’였습니다.(민6:5)
제사장의 머리에 두른 패도 구별된 사람을 나타내는 ‘네제르’였습니다.(출29:6)
그리고 사울 왕이 쓴 왕관도 구별된 사람을 나타내는 ‘네제르’였습니다.
즉 사울 왕이 쓴 왕관은 단순히 왕의 신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구별한 사람이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다윗은 사울왕의 죽음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사건을 보니 다윗의 개인적인 감정은 눈 녹듯이 녹아졌습니다.
다윗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이 구별한 사람이 죽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울음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성경에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노예로 갖은 고생을 다 했습니다.
감옥살이까지 했습니다.
그러다가 애굽의 총리로 발탁되었습니다.
가뭄으로 인하여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형들이 식량을 구하려 요셉 앞에 나타났습니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자기를 팔았던 형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아니,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적어도, “내가 누군지 아시오? 당신들이 팔았던 당신들의 동생 요셉이요!”라고 일갈하고 얘기를 시작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요셉이 한 얘기를 들어보세요.
창45:4-5절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얼마나 놀랐겠어요?)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야곱의 아들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자기의 감정이나 이해관계로 그 사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으로 그 사건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들에 대한 원망, 미움은 설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요셉은 웁니다.
창45:14-15절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할렐루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관계를 풀어보세요.
까탈부리는 상사를 만났으면, “하나님이 내 까다로운 성격을 고치시려고 저 분을 만나게 하셨군.”라고 믿어보세요.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원망은 사라지고 감사를 고백하게 됩니다.
이기적인 이웃을 만났으면, “하나님이 내 이기적인 마음을 고치시려고 저 분을 만나게 하셨군. 하나님은 참 못 말려!”라고 믿어보세요.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투정은 사라지고 찬송이 나와요.
‘밥맛’으로 느껴지는 사람을 만났으면, “하나님이 ‘밥맛’인 내 성격을 고치시려고 저 사람을 붙여주셨군.”라고 믿어보세요.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감사하게 됩니다.
저가 본문을 묵상하면서 받은 메시지입니다.
‘모든 인간관계, 사건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받아들여라.’
복음성가-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달빛 사랑’이라고 합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빚진 자로서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반증에 다름이 아닙니다.
눅6:35-36절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감옥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기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용서는 감동의 삶으로 바꿔줍니다. 아멘
사울이 죽은 후에
삼하 1:1-16 / 우인택 목사
BC 200년 중엽에 지중해 연안국에 흩어져 사는 히브리어를 모르는 유대인들을 위해 유대인 학자 72명이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을 했는데, 그 성경을 ‘70인역’이라고 합니다. 그때, 한권으로 된 사무엘서를 상하권으로 나누었는데, 한글성경은 이를 토대로 성경을 분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성경도 사무엘상·하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 한권이었던 책이었으므로 사무엘상·하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상 31장의 사울의 사망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아말렉 청년의 사울 왕 사망 보고와 다윗의 아말렉 청년 처형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먼저 1절에 ‘사울이 죽은 후’라는 말로써 사무엘하를 시작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죽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히브리서 9:27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근거로 제시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 속에서 너무나도 확실하게 증명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아는 한,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숙명입니다.
그러나 지난 목요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죽음이라고 다 같은 죽음은 아닙니다. 죽음에도 ‘소망이 있는 죽음’이 있고, ‘소망이 없는 죽음’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는 죽음이란 죽음 후에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려 있는 죽음이고, 소망이 없는 죽음이란 자신의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울의 죽음은 소망이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계속해서 상고해 온 것처럼, 사울이 이처럼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은 그가 탐심에 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그러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상 9장에 의하면, 그는 본래 부모를 잘 섬기고, 자신을 작은 자라고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출되었을 당시에는 성령 충만한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삼상 10:9-13) 그런데 그와 같은 사울이 탐심으로 인해 타락하여 마침내는 하나님께 버림받고 불행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탐심에 미혹 당해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살찌고 좋은 가축을 남겨 자신의 몫으로 챙겼습니다(삼상 15:1-15). 왕권에 대한 탐심에 눈이 멀어 다윗을 시기하고, 제사장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등 점점 더 폭군으로 변해갔습니다(삼상 22장). 그리고 끝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습니다(삼상 28:7-9).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물론 그의 죽음은 영원한 형벌의 시작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사울의 멸망은 작은 탐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탐심으로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 반복하여 범죄함으로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까지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야고보서 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경고합니다.
세상에 탐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탐심을 가진 것을 회개하고 돌이키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한 대표적인 사람은 다윗입니다. 다윗도 사울 왕처럼 탐심 때문에 많은 어려움 앞에 섰었지만, 그는 깨닫는 즉시 회개하고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불신의 길에서 돌이켜 다시 믿음의 길에 우뚝 섰습니다.
우리도 탐심을 갖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탐심을 돌이켜 회개할 수는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떠한 탐심으로 인해 힘이 듭니까? 오늘, 하나님께 낱낱이 아룀으로 탐심을 극복하고 믿음의 선한 삶 위에 우뚝 서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2-4절에, 다윗은 사울의 죽음에 대하여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소식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로 인해 젊은 청춘을 도피 생활로 보내야 했습니다. 죽음 직전까지의 위기도 여러 번 당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 사울은 인생의 가장 큰 적이요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러한 사울을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악을 선으로 대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한 이유는 사울을 기름 부어 세우신 하나님의 주권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 힘으로 사울을 대적하지 않고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삼상 24:1-10, 26:6-12).
다윗은 힘이 없어서 사울을 피해 다닌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얼마든지 사울을 제거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울을 제거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두 번이나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원하기만 하였다면 사울을 제거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렇게 하였다면 이스라엘은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통일된 다윗왕국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지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유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이 늘 함께하시며 성령께서 권능으로 도우십니다. 그러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은 어떠한 것인지 돌아보고 온전히 순종하실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5절 이하의 말씀에는 다윗이 아말렉 청년을 처형한 사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말렉 청년이 처형당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사울을 죽였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말렉 청년은 다윗과 사울이 원수지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절에, 자신이 마치 전쟁터에서 싸우다 온 처럼 꾸미고, 원수를 자신이 대신 죽였으니 상을 달라고 다윗을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3절에서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했다”라고 말했다가, 6절에서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랐다”라고 모순된 말을 함으로써 이미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스스로 밝혔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했다”는 말은 이스라엘 군사로서 전쟁에 참여했다는 말이고,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랐다”는 말은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유품을 훔치는 도둑임을 밝힌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 우연히 올라가겠습니까?
그리고 10절에, 아말렉 청년은 사울의 유품을 다윗에게 전했습니다.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는 왕권을 상징하는 귀중품이었습니다. 금과 보석으로 꾸민 값진 것이었습니다. 전쟁 당시, 블레셋 군대는 길보아산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이긴 후 이튿날 사울의 갑옷과 머리를 베어 갔습니다(삼상 31:8-10). 그러므로 이 청년은 사울이 죽자 재빨리 가장 값나가는 물건을 훔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 비싼 귀중품들을 자신이 갖지 않고 다윗에게 가져왔겠습니까? 더 큰 상급을 얻어 큰 부자가 되려는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전쟁에서 큰 전공을 올린 자들에게 풍성한 상금과 땅을 주었습니다. 또, 자신이 습득한 전리품은 자신이 가질 수 있었습니다(창 14:21). 그러므로 아말렉 청년은 사울의 유품은 물론 다윗에게 받을 큰 상급을 기대하고 온 것입니다. 그는 사울이 다윗의 정적이었기에 그를 죽인 자기에게 엄청난 부가 상급으로 주어질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결국, 그는 거짓말과 탐심으로 인해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거짓말과 탐심은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사탄의 공격무기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거짓말을 삼가고 불의한 탐심을 경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거짓말과 탐심은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사탄의 공격무기임을 사울 왕과 아말렉 청년을 통해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에 탐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 탐심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지만, 탐심이 우리를 미혹할 때 다윗처럼 속히 회개하고 돌이키는 저희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자신의 연약함을 늘 기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월요일: 엄지손가락 기도, 번제의 삶> 엄지는 심장에서 가장 가깝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먼저,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나 자신, 그리고 가족, 형제,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못한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어떤 일인지, 내가 무엇을 하면 하나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실지 그것을 생각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번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다윗의 슬픔
삼하 1:11-16 / 오주환 목사(익산 예안교회)
1. 세 종류의 슬픔
사실 사울은 다윗을 괴롭히던 자였다. 죽이려고 한 자였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슬퍼한다.
다윗이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친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손상되는 것에 대한 슬픔 때문이었다. 기름부음 받은 자가 어이없게 죽게 된 것에 대한 슬픔이었다. 그리고 자기의 생명만큼이나 사랑했던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슬픔 때문이었다. 또한 자기 동족 이스라엘 족속에 대한 슬픔이기도 했었다. 결국 다윗의 이 모든 총체적인 슬픔은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된 것에 대한 슬픔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나라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때로는 슬퍼해야 한다. 대통령이 믿는 자로서 올바로 직무를 행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백성들이 사리 분별을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북한 지도자들의 미련하고 어리석은 행동들에 대해서 우리는 슬퍼하고 기도해야 한다.
2. 정확한 판결을 하는 다윗
다윗은 아말렉 소년이 전해다 준 노획물이나 그의 말에 혹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재차 묻고 확인한다. 이 소년은 이미 자기의 신분에 대해서 보고하였다(8절). 그런데도 다윗이 다시 묻는 이유는 사실에 대한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다. 그의 말을 분별하면서 다윗은 이 소년의 앞뒤 말이 맞질 않는 것을 발견했다. 또 감히 원수의 나라 백성이 공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도 진실성을 조사하고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때때로 교회를 비판하고, 지도자를 정죄하는 자가 하는 말이 꾸며낸 이야기인지, 충동질하는 말인지, 이간질하는 말인지, 교회를 무너뜨리는 말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말도 구분하지 못하고 따라가다가는 망신을 당하고 만다.
3. 심판당하는 아말렉 군사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해 강조한다. 즉 ‘하나님이 세운 종을 네가 어찌 감히 건드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결국 이 소년은 거짓 정보와 거짓공로를 내세우다가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우리는 아무리 개인적인 이익이 있다 할지라도, 우선 나에게 편하다 할지라도 거짓정보를 흘리거나 거짓말을 지어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이런 말을 들을 때 철저하게 구분할 수 있으며, 이런 자에게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울며 금식한 다윗
삼하 1:11-16 / 푸른교회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며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11-12절).
다윗이 이렇게 슬퍼하며 금식하여 운 것은 기름 부음을 받은 왕 사울과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고, 동족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 군대에 크게 당했다는 비보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 하였느냐 하고 ... 그를 죽이라 하여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14-15절).
유대인들의 전통은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 등을 세울 때 반드시 그 머리에 기름을 부음으로 그 직위와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아말렉 청년이 다윗의 환심을 사려고 사울의 죽음을 도왔다고 하자 다윗이 그 청년에게 사형을 내린 것입니다. 그동안 몇 차례 보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다윗이 감히 사울을 해치지 못한 건 사울이야말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 아말렉 청년에 대한 다윗의 심판이야말로 그로서는 너무도 지당한 처분이었습니다.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니라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16절).
세상 지혜란 일을 교묘하게 처리하고 감쪽 같이 남의 생명을 해치는 능력을 의미하지만 진정한 지혜란 상대가 가진 허를 꿰뚫어 보고 거짓과 불법을 처단하는 용단을 가리킵니다. 과거 사울은 <내 것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였지만 다윗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실제 수많은 근사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자신의 욕심을 그 안에 감추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참 지혜란 그런 길에서 우리의 발길을 확실히 돌려 무엇보다도 다정하고 따스한 가슴을 가지는 것이며 그 안에서 증오까지도 녹이고 새로운 삶의 꿈을 부화시키는 열정을 뜻하는 것입니가. 그리고 다윗처럼 그 길을 따르는 사람은 욕망과 본능을 충족시키는 인생이 아니라 자기에게 맡겨진 거룩한 사명을 깨닫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참다운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 가치의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적용>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니라>(16절)한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다윗이 <슬퍼하여 울며 금식>(12절)한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다윗이 왜 자기의 옷을 찢었을까요(11절)?
<기도>
주님, 다윗의 기름 부은 자에 대한 존중과 경외는 실로 놀라웠습니다. 그가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끝까지 보복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그 처분을 맡겼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서는 아말렉 청년까지도 처단했습니다. 저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자가 복됨을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기름 부은 자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께 맡기고 저희는 다만 그를 섬기며 저희의 도리를 다하게 하시옵소서.
날마다 솟는 샘물
QT 삼하 1:11~16 / 우리기쁨교회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삼하1:14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옷을 찢으며 애통하고, 스스로 사울을 죽였다고 하는 아말렉 청년을 처형한다.
공동체의 위기와 아픔 속에서 내가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은 어떠한가.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뿐 아니라 전쟁의 처참함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며 금식하고 애곡한다.
어제 폴란드 주재원으로 나갔다가 우크라이나 난민들의 아픔을 보고 선교사님을 도와 난민들을 섬기기 시작했던 분의 간증을 들었다. 난민들을 바라보는 그분의 시선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다.
그 시기에 우크라이나 전쟁과 난민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내게 든 생각은 우리의 안전이었다. 갑자기 나라와 가족을 잃고 엄청난 충격 가운데 살기 위해 어디로든 가야 했던 그들의 아픔은 내게 크게 와닿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진짜 크리스천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발동하지 않았을까? 내 안에 진짜 영혼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건가? 의구심이 들었다. 감정이 믿음은 아니지만 감정은 믿음을 따르는데, 내 옆에 잘 살고 있는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는 기도하면서 당장 하나님의 도움과 긍휼이 필요한 영혼들의 아픔에는 공감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 내가 그 마음에 공감하지 못함은 아마도 어떤 면에서 주님과의 연합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의 마음보다 인간의 이기심, 나 중심적인 생각과 마음이 내 안에 더 큰 것을 보게 된다.
이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자. 분명 나는 여전히 죄인이기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모시는 성도로서 당연한 상태는 아니다.
아말렉 청년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그는 적장의 병사요 외국인이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의 반응은 그 외국인을 질책하고 처형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이 세운 왕의 명예를 무시한 무지한 외국인 병사를 처형함으로, 다윗은 죽은 사울과 요나단, 나아가 나라의 큰 위기와 아픔을 마주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로하고 그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예를 지켰다.
나는 내 안에 하나님의 이름과 그 나라의 영광을 위해 무엇을 세우고 무엇을 죽여야 할까.
주님의 마음을 주시길, 주님의 영을 충만하게 부어 주시길, 영혼 사랑과 전도의 기름 부음을 주시길 기도한다. 또한 내 안에 내 스스로의 안위를 위하고 염려하는, 하나님을 배제한 자기 사랑을 대적한다. 나보다 하나님을 위할 때 진정 나를 위한 일이 됨을 경험으로 잘 배우고 알고 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할 때 하나님은 내게 그의 나라를 주시고, 그 나라는 내게 무엇보다 풍성한 생명과 삶을 준다.
더딜지라도 멈추지 말고 꿋꿋이 인도하시는 길로 따라가자. 여전히 못난 내 자신에 실망하며 낙심하지 말고, 내게 기름 부으시고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묵묵히 끝까지 나아가자. 오늘도 주시는 마음에 옆뒤 돌아보며 재지 말고 즉각 순종하기를 결단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