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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본명 | Jurgen Habermas | |
학력 |
입학년도 | 졸업년도 | 출신학교 및 전공 | |||
1954 | 본대학교 박사 | ||||
경력 |
경력기간 | 경력내역 | |||||
1964 | ~ | 프랑프르트대학 교수, 사회연구소장 | ||||
~ |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교수 | |||||
~ | 막스프랑크연구소 교수 | |||||
수상내역 |
수상연도 | 수상내역 | ||
2005 | 홀베어 상 | ||
2004 | 교토상 | ||
2001 | 독일출판협회 평화상 | ||
1980 | 아도르노상 | ||
프레미오 프린시페 데 아스투리아스상 | |||
도서작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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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작품 |
구분 | 분류 | 년도 | 상세내역 | ||||
저서 | 1976 | 사적 유물론의 재건을 위하여 |
출처:네이버 인물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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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aulkim.egloos.com/1705276
199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대를 정년퇴직하고 현재 명예교수로 강의를 계속하고 있는 위르겐 하버마스박사(66)는 전세계 지식인들에 의해 광 범한 존경을 받고 있는 최고의 석학이자 「사상계의 제왕」이다. 국내의 경우 철학 사회학 정치학 신문방송학등의 분야에서 하버마스와 관련된 연구자의 수가 1백명을 넘는다는 것은 그가 차지하는 이론적비중을 단 적으로 보여주는 수치이다.
1929년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난 하버마스는 25세때인 54년 논문 「절대자와 역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래 62년 교수취임논문 「공공영역의 구조변화」, 71년 「이론과 실천」, 73년 대표작「인식과 관심」, 81년 「의 사소통행위 이론」, 85년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등 흔히 사회철학으로 불리는 영역을 개척하는 저서 27권을 지난 30년간 거의 매년 발간하면 서 세계지성의 흐름을 주도해왔다.
하버마스는 동시에 20세기 최고의 논쟁가로도 불린다. 그가 관여했 던 대표적 논쟁만 손꼽아도 60년대 칼 포퍼와의 실증주의 논쟁, 가다 머와의 역사성 논쟁, 마르크스주의와의 논쟁, 70년대 니콜라스 루만과 의 사회체계 논쟁,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과의 국가론논쟁, 영미분석철 학자들과의 언어성격 논쟁, 80년대 프랑스철학자들과의 포스트모던 논 쟁 등이다. 이런 논쟁을 통해 그는 전후 세계지성의 주요흐름과 일정 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의 사상을 키워왔다. 이런 논쟁의 과정에 서 그가 일관되게 유지한 입장은대화에 의한 이성의 확립. 그래서 하 버마스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이성의 옹호자」로 자리매김된다.
그의 학문적 성가는 이미 73년 「인식과 관심」의 출간과 함께 전세 계적인 인정을받아 구미의 주요대학에서 초빙교수를 역임했고 84년 미 국학-예술원 명예회원과 94년 영국 학술원 외국회원으로 추대되기도했다.
하버마스는 파시즘의 등장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초등학교 시절 '나치 소년단'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는 파시즘의 몰락을 체험했으며 뉘른베르크의 재판으로 상징되는 그 당시 정치적 혼란과 2차 세계대전 뒤에 나온 강제 수용소와 대학살에 대한 기록영화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으면서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갖게 되었다. 1953년에 1935년 여름학기 강의록이었던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이 아무런 수정없이 간행되자 하이데거 철학에 영향받았던 하버마스는 철학과 정치가 분리될 수 없음을 깊이 자각하여 하이데거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의 철학이 1933년 이후에도 계속 나치즘의 정치이데올로기와 연루되었음을 폭로한다. 하이데거에 대한 대결의식은 이후에 가다머의 해석학에 대한 비판, 니체,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그리고 형이상학 비판 등으로 나타난다. 그는 괴팅겐, 본, 취리히 대학에서 철학, 문학, 역사학 뿐만 아니라 경제학, 심리학 등을 공부하면서 루카치를 통해 '청년 맑스'를 알게 되고 특히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읽고 충격적인 지적 감동을 받았다. 졸업 후 저널리스트로 잠깐 활동하다가 1956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아도르노의 조교가 되어 비판이론의 정통 계승자로서 길을 가기 시작하면서 사회학의 경험적 연구방법을 접하게 된다.1961년에 {학생과 정치-프랑크푸르트 학생들의 정치의식에 관한 사회학적 탐구}를 몇 동료들과 같이 출간하고 62년에는 교수자격취득 논문인 {공론영역의 구조변화}를 통해 경험적 연구와 이론적 탐구를 종합하는 통합적 연구자세를 보여준다. 하버마스는 63,64년 서독사회학회가 주관했던 '실증주의 논쟁'에 참여하여 실증주의를 비판하고 변증법과 비판이론을 옹호하면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의 실증주의 비판과 비판이론 옹호는 사회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버마스는 "인간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과 비참한 삶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해방에 대한 희망은 아직 그 힘을 상실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버마스는 서구의 다양한 사회운동 들의 분석을 통해 해방의 잠재력과 저항의 잠재력,퇴각의 잠재력을 구별하면서 여성운동 만이 가부장적 억압에 항거하는 투쟁과 도덕과 법률의 보편주의적 기본원리에 기반을 갖고 있는 부르조아적, 사회주의적 해방운동의 전통 속에 서 있는 공격적인 운동으로 파악한다. 저항운동과 퇴각운동은 의사소통의 구조를 갖는 행위영역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운동의 성격을 갖는다.
이론적으로 하버마스의 연구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신실용주의류의 상대주의(로티)와 전통 형이상학적 입장(헨리히)을 옹호하는 근본(절대)주의에 대해 반대한다. 또 정치적으로 그의 연구는 정통맑스주의,신보수주의 및 신급진주의 모두를 거부한다. 하버마스 연구의 이론적 강점은 여러 입장의 역량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섞일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상대주의와 절대주의의 대안들을 접합하고자 시도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 정치적 강점은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므로 많은 비판가들에 의해 비판을 받는다. 그는 항상 자신에 대한 비판을 '논쟁을 진전시키는 협동적 노력'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다양한 측면에서 관철시키고 있다.
하버마스는 스스로 "나는 하나의 관점으로부터 세계를 설명하는 전통적인 '철학자'의 모습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하버마스의 입장은 자신의 말처럼 하나의 관점으로 설명되지 않는 측면이 많은 것 같다.
여러 복잡한 사상들을 쉽게 도식화해서 평가하는 우리의 지적풍토와 관련해서 하나의 인용으로 끝마치겠다. "대사상가의 저작의 결점과 오류를 지적하기가 그것의 가치를 분명하고 충실하게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하버마스는 "인간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과 비참한 삶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해방에 대한 희망은 아직 그 힘을 상실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버마스는 서구의 다양한 사회운동 들의 분석을 통해 해방의 잠재력과 저항의 잠재력,퇴각의 잠재력을 구별하면서 여성운동 만이 가부장적 억압에 항거하는 투쟁과 도덕과 법률의 보편주의적 기본원리에 기반을 갖고 있는 부르조아적, 사회주의적 해방운동의 전통 속에 서 있는 공격적인 운동으로 파악한다. 저항운동과 퇴각운동은 의사소통의 구조를 갖는 행위영역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운동의 성격을 갖는다.
이론적으로 하버마스의 연구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신실용주의류의 상대주의(로티)와 전통 형이상학적 입장(헨리히)을 옹호하는 근본(절대)주의에 대해 반대한다. 또 정치적으로 그의 연구는 정통맑스주의,신보수주의 및 신급진주의 모두를 거부한다. 하버마스 연구의 이론적 강점은 여러 입장의 역량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섞일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상대주의와 절대주의의 대안들을 접합하고자 시도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 정치적 강점은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므로 많은 비판가들에 의해 비판을 받는다. 그는 항상 자신에 대한 비판을 '논쟁을 진전시키는 협동적 노력'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다양한 측면에서 관철시키고 있다.
하버마스는 스스로 "나는 하나의 관점으로부터 세계를 설명하는 전통적인 '철학자'의 모습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하버마스의 입장은 자신의 말처럼 하나의 관점으로 설명되지 않는 측면이 많은 것 같다.
여러 복잡한 사상들을 쉽게 도식화해서 평가하는 우리의 지적풍토와 관련해서 하나의 인용으로 끝마치겠다. "대사상가의 저작의 결점과 오류를 지적하기가 그것의 가치를 분명하고 충실하게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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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ong.nate.com/justinkim/26744718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론
시장에는 소비품이 넘치고 힘이 부치는 인간의 생계는 거의 국가가 책임져 주는 부유한 사회를 누군가 비판하고 나선다면 그것은 과연 온당한 일인가? 역사에 유례없는 고도복지사회를 이룬 독일에서 비판이론이 나왔다는 것은 라인강의 경제기적 못지 않은 사상기적이다.
그 사상적 역정의 초기에 하버마스는 인간이 누려야 할 <좋은 삶>의 이념 에 의거하여 서유럽 복지사회의 <부유한 삶>이 어떤 취약점을 가졌는지 분석 해 냈다. 서유럽 사회의 복지는 발전된 산업과 시장을 통한 엄청난 물질적 부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고도로 합리화된 국가관료기구의 정책능력에 기초 를 두고 있다. 배만 부르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냐는 입장에서 보면 이런 상 황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하버마스의 비판작업 이 시작된다.
산업 발전의 기초인 자연과학은 그것이 인식하고자 하는 자연을 <대상>으 로 놓고 그것을 <지배>하고자 하는 관심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 즉 아는 것이 힘이다. 현대의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은 자연과학의 합리적 방법을 인간 사회에 적용함으로써 그 구성원에게 부유한 삶을 선사할 여러 가지 정책수단 을 개발하여 적어도 서구에서는 자연과학에 버금가는 성과를 올렸다. 문제는 이런 성공 안에서 인간이 근본적으로 행정과 경영의 <정책적 대상>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조건 안에서 각 인간이 누리고자 하는 좋은 삶은 행정과 경영이 전략적으로 의도하는 범위를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이 범위를 벗어나 는 삶의 양식은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벗어나려는 그 순간부터 사회적 안정을 보장받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부유하다는 것은 더 이상의 좋은 삶을 조장하기보다는 저해하는 조건이 된다. 따라서 복지사회에서 인간은 인간으 로서 가능한 삶의 실현을 방해하는 새로운 차원의 억압조건에 맞부딪친다. 이 조건 안에서 인간은 가난하지는 않지만 <성숙>할 수 없다. 바로 여기에서 60년대 반체제 학생운동과 그 이후의 시민운동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흔적 을 남긴 저 유명한 <지배로부터--자유로운 구역!>이라는 정치적 구호가 등 장한다.
하지만 대학교수직을 포기하면서까지 그가 즉각적인 체제전복을 요구하는 행동파 학생들의 급진적 압력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삶에 대한 또 하나의 신념축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좋은 삶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올 바른 행위>를 담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는 행위자 혼자 아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직접 함께 하거나 아니면 그와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되는 다른 인간이 따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어떤 행위가 올 바르게 되려면 적어도 우선 그 행위의 뜻, 즉 행위자의 의사가 다른 인간, 나아가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인간에게 통해야 한다. 이런 것이 가능한 근거는 인간이 말을 통해 이런 뜻을 전달하거나 거부하면서 행위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면에서 아주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런 통찰이 하버마 스의 그 복잡한 의사소통행위론의 출발점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인간의 말이 단지 인간관계형성의 수단적 매체가 아니라 말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인간 행위의 척도를 <언제나 이미> 그 안에 담고 있는 규범체계라는 철학적 통찰이다. 어떤 말이든 말이려면 우선 그 말을 이 해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 내용은 참이라야 한다. 나아가 말해진 말은 말 하는 이가 성실하게 지키겠다는 태도를 확신시킬 수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 로 그 말을 하는 가운데 말이 오가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 어야 한다. 이런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말은 단지 말일 뿐 진정한 말이 아니 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론과 거기에 따라나오는 논변윤리학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누는 말 속에 <언제나 이미> 초월적으로 실현되어 있는 올바른 삶의 모습을 자각시키는 이론이다. 이런 근본적 견지에서 민주주의는 단지 권력을 규제하는 형식적 논리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오가는 말에 뿌리 를 두고 거기에서 합의되어 나온 시민의 정당한 보편적 요구를 전사회적으로 실현하는 실체적 절차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홍윤기/동국대교수-철학)
▲1957년생 ▲서울대 철학과 학사 및 석사,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철학과 교수 ▲저서 '변증법비판과 변증법구도'(학위논문), '철학의 개혁을 향하여'(공저), 논문 '사회질서와 사회능력'및 역서 '이론과 실천'(하버마스) 외 다수
[하버마스 누구?] 급진학생운동 비판
"나는 한국방문기간 내내 서구인들에게 완전히 열린 자세로 유보없이 배 우고자 하면서도 자긍심과 한데 어우러져 전적으로 자신들의 고유한 경험 과 전통의 지평으로부터 문화의 수용을 재음미하고 그로부터 다른 어떤 것 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96년4월 한국을 2주간 방문했던 위르겐 하버마스의 소감이다. 특히 그는 해인사를 방문하고나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마치 한 사람이 새긴 것 같은 대장경판을 만들어낸 한국인의 정신적 저력은 대단하다"고 했다.
사진설명 : 96년 4월 해인사 입구 서낭당을 찾은 하버마스 부부.
29년 6월18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나 55년 셸링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61년 그의 대표작중 하나인 '공공성의 구조변동'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했다. 이때부터 이미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이 되고자 했으나 아도르노교 수의 '비토권'행사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 그를 불러준 사람이 하이 델베르크대학의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였다.
현재 100살인 가다머는 지난 6월18일 칠순을 맞은 하버마스를 기념해 독일의 신문 쥐트도이체자이퉁에 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아직 교수자격논문을 쓰지 않았던 하버 마스를 교수진에 포함시키기 위해 철학학부와 교육부를 설득하는데 성공했 다.
이로써 철학과에서 특정한 학파의 견해가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고 우리들 모두의 진정한 학문적 공통점을 형성해갈 수 있었 다. 그러나 아쉽게도 하버마스는 너무 일찍 우리를 떠나 프랑크푸르트대학 에 호르크하이머의 후임으로 부임해갔다."
61년부터 64년까지 하이델베르크대에 있다가 프랑크푸르트대로 옮겨 철 학과 사회학을 강의하던 그는 학생운동의 급진화를 정면으로 비판하다가 운동권과 긴장이 조성되자 71년 교수직을 던졌다. 이후 10년동안 막스 플 랑크연구소를 만들어 독자적 학문세계를 구축하다가 83년 프랑크푸르트대 로 복귀했다.
그리고 94년 정년퇴임했다. 지금은 스타른베르크의 사저에 머물면서 저술작업과 강연활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여전히 민주주의 인권 법치 등의 문제와 관련한 논문들을 내고 있다. 그의 저서는 10여권이 국내에 번역돼 있고 그에 관한 국내학자들의 관심도 대단히 크다.
특히 사회학과 철학분야에서 두드러지는데 사회학에서는 한 상진정신문화연구원장을 비롯해 송호근(서울대) 박영도(서울대강사) 이홍 균(연세대), 철학에서는 이진우(계명대) 이상화(이화여대) 윤평중(한신대) 정호근(목포대) 이기현(방송개발원) 장춘익(한림대) 김재현(경남대) 권용 혁(울산대) 그리고 정치학에서는 이신행(연세대) 황태연(동국대) 등이 하버마스로 직간접적 영향을 받고 있는 학자군이다.
[논쟁가 하버마스] 현대사상 주요논쟁 참여
현대사상의 흐름에서 주요 고비마다 일어난 논쟁에 하버마스는 있었다. 그 런데 흔히 논쟁을 하면 상대방을 격파하는데 골몰하는 일반적 경우와 달리 하버마스의 경우 상대방의 장점은 미련없이 흡수하는 독특한 사상가다. 종종 그의 사상체계를 놓고 '종합적인가' '절충적인가'라는 논란이 발생하는 것도 그의 이같은 열린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가 관계한 첫 논쟁은 60년대말 독일에서 일어난 '실증주의 논쟁'이었다. 소위 칼 포퍼와 한스 알베르트로 대표되는 비판적 합리주의 진영과 아도르노 하버마스가 주도한 비판이론의 본산 프랑크푸르트학파 진영 간의 이론적 싸 움이었다. 포퍼진영은 "비판이론은 실질적으로 탐구하는 방법론이 아니라 말 장난"이라고 비판했고 하버마스는 포퍼에 대해 "실증에 매몰돼 비판정신을 상실했다"고 맞섰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이후 실증적 연구의 중요성은 받아 들였다.
이후 70년대에는 가다머와 '전통의 권위'를 둘러싼 논쟁을 벌였다. 모든 것은 전통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가다머의 주장에 대해 하버마스는 "전통에 담 겨있는 이데올로기까지 인정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역사주의 와 이성주의의 대립이 20세기에 재현된 셈인데 이 와중에 하버마스는 가다머 의 철학적 해석학의 강점은 수용하는 순발력을 발휘했다.
70년대후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자 이 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포스트모더니즘사상가들을 몰아서 비판하는 책 '현 대성의 철학적 담론'(문예출판사간)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니체에서 출 발해 하이데거를 거쳐 데리다, 바타이유, 푸코 등으로 확산돼간 포스트모더 니즘의 형성과정을 비판적으로 추적, 해부하며 "지금의 과제는 현대의 극복 이 아니라 현대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하버마스가 말하는 "'현대성' 은 미완의 기획"의 뜻이다.
현실사회주의와 하버마스의 사상도 직접 부딪치지는 않았지만 논쟁적 관계 였다. 60년대말 학생운동이 한창일 때 대학교수직을 버리면서까지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비판한 것은 상징적이다.
그밖에도 80년대에는 '독일의 탈코트 파슨즈'로 불릴 정도로 보수적인 사 회학자 니콜라스 루만과 논쟁을 벌이며 루만의 '체계'이론을 수용했다. 어떻 게 보면 그는 자신이 수용하고 싶은 사상을 가진 이론가들하고 논쟁을 벌였 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그가 겪었던 논쟁들을 통해 그의 사상의 전선을 살피는 것도 하버마스를 재미있게 읽는 방법 중 하나다.
출처 : Tong - justinKIM님의 | 생각의 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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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verthandi/90021986105 | |
하버마스와 루만의 쟁점별 시각차 정리
(1) 과학으로서의 사회학: 이 사회의 배후에 더욱 나은 사회가 있다는 계몽적 합리주의를 주장하는 하버마스는 사회를 계몽하는 도덕적인 책무를 사회학에 부과한다. 반면 루만에게 사회학이란 사회에 의한 사회의 재귀관찰이자 곧 재귀기술이다. 따라서 그 관찰이 앞선 관찰에 대한 나중의 관찰이라면 현대사회에 대해 알기 전까지는 도덕적인 판단이나 비판을 유보해야 한다.
(2) 체계: 하버마스의 소통적 사회이론에서는 사회 속에 체계(Systeme, 경제, 정치 등)와 생활세계(Lebenswelten, 개인영역, 문화, 여론)가 자리 잡는다. 반면, 루만의 체계이론에서는 사회들 자체가 곧 체계이며 그것들 안에서 결성되는 경제, 정치, 법, 행정, 과학, 문화, 종교, 예술, 매스미디어, 나아가 사랑과 섹스, 가족, 축구 등 다양한 분야가 사회체계 프로젝트의 대상이다.
(3) 커뮤니케이션: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행위이론](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1981)에서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개체가 합리적 이성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이해지향적 행위로 간주한다. 반면 루만은 하버마스가 말하는 바로 그 사회체계들을 성립시키는 요건이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모든 사회체계는 커뮤니케이션으로 구성되며, 그 밖의 사회적 연산작동은 없다는 것이다.
(4) 주체/반(反)인본주의: 개개의 인간은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행위한다고 보는 하버마스는 커뮤니케이션을 실행할 합리성의 주체를 상정한다. 하지만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실행하는 것은 오직 사회체계들뿐이다. 그래서 그의 이론은 종종 반(反)인본주의라고 비판받는다.
(5) 단위(통일성)/차이: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 행위개념에서는 사회저긴 공감의 상호이해를 겨냥한다. 반면 루만에게 커뮤니케이션이란 보내야 할 정보(Information)와 해독되어야 할 통보(Mitteilung) 사이의 차이를 공감기대의 과정에서 재귀관찰하는 이해(Verstehen)에 근거하여 성립한다. 이때 각 단계 사이에서는 직접 관찰될 수 없느 ㄴ블랙 박스가 놓여 있으며, 과학적 분석은 그 단계들 사이의 차이만 비교할 뿐이다.
# 루만이 던진 화두들 * 태초부터 존재한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이다. * 커뮤니케이션은 불확실하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한 무엇이다. * 커뮤니케이션에 얽혀 들어가면 영원의 낙원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사회체계들뿐이다. * 언어는 공동체의 여신이지만, 언어와 더불어 세계에 오류와 기만, 위선의 가능성이 개시된다. * 문자와 더불어 원격 커뮤니케이션이 개시된다. * 매스미디어는 오히려 현실을 생성하고 사회의 재귀관찰을 조종한다. * 신문과 텔레비젼은 세계의 선/악을 판정한다.
출처 : 사회체계이론 1(2007) / 루만 / 한길사 중 서두의 박여성(옮긴이)의 '사회학 이론에서 통섭담론으로' 부분에서 발췌(pp.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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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iloveu0416/40028659443
하버마스 (1929. 6. 18) 독일의 철학자·사회학자.
나치즘이 독일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그 영향력이 크지 않았던 조그마한 도시에서 유년기를 보낸 하버마스는 나치즘의 광폭성을 이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에서야 비로소 알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전후에 대학교육을 받은 세대로서 서유럽에 민주주의가 정착해 가는 과정을 일상생활 안에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지적 세계를 형성해 간 그는 서구에서 수세기에 걸쳐 이룩된 시민적인 입헌국가의 민주주의가 독일에 도입된 데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 점에서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 세대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가 자신의 입장을 세우는 데 있어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서유럽 사회의 전개 양상이다. 이 때 그는 한편으로는 루카치 그리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등의 저작을 접하면서 철학과 정치적인 입장을 분리해서 볼 수 없다는 견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1960년대 이후 안정을 되찾은 서유럽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을 긍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이것을 전면 부정하는 시도는 전망이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젊은 시절 하버마스는 해방적 비판이론을 옹호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그의 담론은 우아하고 세련되게 들린다. 비판의 칼날이 무뎌진 것일까, 아니면 성숙의 값이라고 할까. 그는 오늘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최고의 석학으로 꼽힌다.
다양한 분과학문을 넘나들면서 여러 저작을 통해 보여준 하버마스의 학문적 노력은 '비판적 사회이론'의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 하버마스는 주저인『의사소통 행위이론』에서도 자신의 이 저서가 비판적 사회이론의 확립을 위한 초석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어떤 메타이론이 아니라 그 비판적 척도를 현실속에서 입증하고자 노력하는 사회이론의 시작이다.
철학은 현재 인간의 삶의 기반이 무엇이며,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며 어떠한 보편적인 연관성을 갖는가를 과학적으로 탐구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시대비판을 도외시할 수 없고 철학은 시대비판이라는 지점에서 사회이론과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출발점으로 한다. 하버마스 역시 이 전통에 서서 "철저한 인식비판은 오로지 사회이론으로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하버마스 사회이론의 제목에는 '비판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개념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회이론을 세우려는 그의 시도의 중심축을 이룬다. 그가 의사소통 행위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에서 목적합리성 만큼 발전하지 못한 합리성의 다른 측면, 즉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마르크스와 초기 비판이론가들은 현실사회의 분석과 유토피아적 전망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그 이유는 사회합리화 과정을 분석하는 적절한 개념적 틀을 가지지 못한 까닭에 사회 합리화가 '목적 합리성만의 증대'로 선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 행위 개념은 하버마스의 행위론적 구분에서 등장하는 것인데 그의 행위구분이 가장 세련화 된 것은 1981년의 저작인『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이다. 하버마스의 행위론적 구분은 행위자의 행위 결합 방식을 기준으로 하는데 크게 사회적 행위와 비사회적 행위로 나누어지고 사회적 행위는 다시 전략적 행위와 의사소통 행위로 구분된다.
이 행위들을 성공지향, 이해지향적 행위라는 구분으로 나누면, 전략적 행위와 도구적 행위는 성공지향적 행위에, 의사소통행위는 이해지향적 행위에 속하게 된다. 전략적 행위는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목적을 수행하려는 행위이며, 의사소통행위는 참여자들의 행위계획이 상호이해의 실행들을 거쳐 조정되는 행위이다. 의사소통행위는 참여자가 자신들의 행위계획을 자기중심적 성과계산이 아니라 상호이해를 도출할 수 있는 조건을 바탕으로 해서 하는 행위인 것이다.
상호이해는 타당성 있는 동의를 목표로 하는 의사소통이다. 이는 실제적 동의를 야기하는 경험적인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에 의한 동기화를 토대로 참여자의 행위를 조정하는 쌍방의 확신과정을 의미한다. 의사소통행위의 결합이 담론인데 담론은 '합의'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얽힌 행위들을 연결할 때 행위당사자들이 충분히 수긍하고 동의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전략적 행위는 상대자의 결정에 대한 영향력 행사 즉, 발화결과를 목적으로 하지만 의사소통행위는 상대자에 대해 타당성 요구를 하면서 자신의 언어행위의 발화 수반력의 발휘만을 목적으로 한다. 모든 언어행위는 의사소통 상대자에 대한 타당성 요구를 내포하고 있으며 상대자는 이 요청을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의사소통의 배경으로서 생활세계가 있기 때문에 개개 의사소통행위는 타당성 요구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상호이해라는 것이 타당성 있는 동의를 목표로 하는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행위의 형식적 특성을 해명하면서 합리성의 개념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버마스가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시도한 작업은 상호이해가 최종목적으로서 인간언어에 내재한다는 것 즉, 담론에 내재하는 상호비판과 균등한 논증부담의 요구가 담론 당사자들에게 규범적 구속력을 가진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이를 통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사회화된 주체들이 공동적인 행위지향을 수용하고 창조적으로 계속 형성할 수 있는 일상적 실천의 영역(생활세계)을 확보한다. 그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일상생활의 의사소통적 실천에 전제되고 있는 합리성의 조건들을 연구하고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행위의 규범적 내용을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개념 속에 수용한다.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은 역사유물론에 대한 해석과 비판의 결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서 나타나는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론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념도 그 규범적 근거를 성찰하지 못함으로써 그 이념실현이 사적 소유가 폐지된 경제체제의 도입으로만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그는 노동에만 결정적 무게중심을 두고 상호작용의 차원을 드러내지 못해서 자유로운 생산자의 연합이라는 해방적 기획을 자연지배의 확대의 연속선상에 놓고 있다.
이러한 비판을 토대로 하버마스는 노동과 상호작용의 축으로 구성하는 역사유물론, 즉 사회진화론으로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을 재구성한다. 하버마스는 사회형태의 발전과정을 설명할 때 생산관계에 맞추어 사회관계 전체가 조직된다는 마르크스의 사회이론을 수정하여, 물질적 생산력의 증대 뿐 아니라 사회구성원 사이의 상호작용을 규정하는 합리적 발전과정과 제도화가 또 하나의 역사발전의 축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규범적 구조가 단순히 물질적 재생산과정의 발전노선을 따르지 않고 고유의 내적 역사를 갖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버마스는 지난 이십 여 년 동안 가장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회철학자이다. 그는 영미의 철학과 경험주의적 성과를 독일철학의 전통 안에 포괄하면서, 사회학, 심리학, 언어학, 정치학, 역사학 등의 연구를 통해 유럽사회에 대한 현실적 분석과 참여, 이론과 실천의 통합 시도, 정통 맑시즘 비판, 민주주의와 학생운동에 대한 논쟁, 실증주의 논쟁 ,해석학 논쟁, 체계이론 논쟁, 포스트모더니즘 논쟁, 신사회운동 논쟁, 시민사회 논쟁, 역사가 논쟁, 형이상학 논쟁 등 여러 논쟁 속에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이성'에 대한 신뢰를 확고하게 갖는 '계몽주의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사상의 흐름에서 주요 고비마다 일어난 논쟁에 하버마스가 있었다. 그런데 흔히 논쟁을 하면 상대방을 격파하는데 골몰하는 일반적 경우와 달리 하버마스의 경우 상대방의 장점은 미련없이 흡수하는 독특한 사상가다. 종종 그의 사상체계를 놓고 '종합적인가' '절충적인가'라는 논란이 발생하는 것도 그의 이같은 열린 태도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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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론’ | ||||
이성으로 무장한 과학은 신을 죽였고, 관료화된 사회체계는 개인을 죽였다. 현대인들은 신의 권위가 사라짐으로써 삶의 의미나 방향을 잃어버렸고, 개인의 권위가 사라짐으로써 삶의 자유를 잃어버렸다. 삶의 의미나 방향과 자유를 잃어버리고 향락과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된 현대인들의 병든 영혼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 고민한 철학자가 바로 위르겐 하버마스다.
<문제> 제시문 〈나〉~〈라〉를 바탕으로 합리성과 의사소통과 관련하여 제시문 〈가〉에 나타난 황우석 논문조작사건을 해석하고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 (1000자 내외) <제시문> 〈가〉 황우석 교수는 ‘(여성연구원) 난자제공 의혹’에 책임을 지고 모든 외부 공직을 사퇴키로 했다(2005·11·24). 황교수 지지자들은 “난자제공의혹을 제기한 MBC는 황교수를 음해하고 국익을 손상시켰다”면서 공개 사과와 문책을 요구했다. 또 PD수첩 광고기업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위협해 12개 광고주 가운데 11곳이 광고를 중단한다고 밝혔다(05·11·25).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은 “우리나라 줄기세포 연구성과가 2015년 33조원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05·11·29). 황교수팀의 한 여성 연구원은 자신의 실수로 일부 난자를 못 쓰게 만들자 자책감을 느껴 자신의 난자를 기증했다고 밝혔다(05·12·2). 황교수가 사이언스논문의 줄기세포사진에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다고 인정한 데는 생명과학전문 인터넷사이트 ‘브릭’의 끊임없는 문제 제기가 단초가 됐다(05·12·16). 서울대 조사위원회 발표에 이어 검찰 조사에서도 황교수팀이 수립했다고 주장한 ‘환자 맞춤형 체세포복제 배아줄기세포’는 발견되지 않았다(06·1·25). 황교수팀의 권XX 연구원이 황교수 지시로 시료를 조작했다고 진술했다(06·1·31). 검찰은 줄기세포조작은 김XX 연구원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지었다. 김연구원이 수정란 줄기세포를 섞어 심는 방법으로 환자 맞춤형 줄기세포가 성립된 것처럼 조작하게 된 것은 줄기세포 확립에 대한 심리적인 중압감 때문이었고 학자로서 성공하고 싶은 욕망에 섞어심기를 하게 됐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한편 황우석 교수는 정부지원 연구비와 민간지원금 등 모두 27억 8400만원을 횡령하고 난자를 제공받는 과정에서 모두 25명에게 3800만원에 이르는 금품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향신문 2006.5.12 〈나〉 베버는 서구 근대 사회의 진행 과정을 합리화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베버에게서 합리화는 두 가지 차원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문화적 합리화이다. 이 경우 합리화는 탈마술화, 즉 미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이성적인 사고가 확대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합리화이다. 이것은 주어진 목적에 가장 적합한 수단을 선택하는 경향의 확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자본주의 경제 구조와 관료적 근대 국가가 모두 이 합리화의 결과로 파악되고 있다. 고등학교 교과서 ‘사회·문화’ 〈다〉 베버는 문화적 합리화와 사회적 합리화가 초래하는 역설을 각각 의미상실과 자유상실로 파악한다. 자유상실은 사회가 합리화될수록 생활세계도 더욱 황폐화되고 관료화되면서 개인들이 자율적으로 판단할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을 뜻한다. 의미상실은 개인들이 올바른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는 힘이 점차 약화되는 현상을 뜻한다. 합리화는 개인들을 정신이 없는 전문인과 마음이 없는 향락인간으로 만든다. (…)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은 과학의 발전이 사회정의와 도덕을 진보시키고 인류의 행복을 증진해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20세기는 그러한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믿음인지를 보여주었다.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론2’ 〈라〉 이상적인 의사소통상황이 되려면 말하는 이는 참되고, 옳고, 진실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 현대인들은 경제체계와 정치체계 속에서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거짓말이나 그릇된 말이나 진실하지 못한 말이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 하지만 자기반성을 통해 왜곡된 모습을 자각하고 이상적인 모습을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왜곡된 의사소통상황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 어휘 다지기 이상적 의사소통상황=돈이나 권력에 의한 왜곡이나 억압이 없는, 의사소통규범을 지키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상황. 말하는 이들이 참되고 옳으며 진실하고 이해 가능한 말을 하는 상황이다. 하버마스는 이 이상적인 의사소통상황이야말로 이상사회를 만들 수 있는 이상적인 절차이자 토대라고 주장한다. <예시 답안> 황우석 논문조작사건은 학계뿐만 아니라 정치계, 경제계, 언론계, 시민사회가 관련된 총체적인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현대한국사회 전체의 문제점과 가능성을 진단할 수 있다. 제시문 〈나〉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미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문화적 합리화와 목적에 맞는 수단을 선택하는 사회적 합리화로 파악한다. 제시문 〈다〉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어버리는 의미상실과 자율적인 판단력을 잃어버리는 자유상실로 본다. 제시문 〈다〉는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틀을 바탕으로 제시문 〈가〉를 해석해 보자. 황우석 사건은 황우석 연구팀의 잘못(연구원 난자제공 및 난자매매, 실험조작, 논문조작)과 외부(학계, 정치계, 경제계, 언론계, 시민사회)의 반응으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현대사회의 특징이 서로 다른 영역 속에 드러난 예들이다. 그것들은 현대사회의 문화적 합리화와 사회적 합리화로 초래된 도구적 합리성의 결과들이다. 다시 말해 돈과 권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체계의 톱니바퀴에 갇혀 올바른 삶의 의미나 방향과 자율적인 판단력(비판력)을 잃어버리고 목적에 대한 아무런 반성이나 비판 없이 오로지 돈과 권력이라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한 결과들이다. 도구적 합리성은 개인이나 국가의 돈이나 권력이라는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일체의 규범(생명윤리나 실험윤리, 직업윤리 등)을 내팽개쳤다. 돈과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억압된 의사소통상황에서 거짓되고, 그릇되며 진실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말들이 오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건에서 현대한국사회의 문제점뿐만 아니라 희망 또한 찾을 수 있다. 문제를 제기하고 힘겹게 끌어간 일부 학자들과 언론의 모습에서 도구적 합리성뿐만 아니라 비판적 합리성이, 왜곡되고 억압된 의사소통뿐만이 아니라 비판적이고 합리적이며 민주적인 의사소통 또한 존재한다는 희망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이 비판적이고 합리적이며 민주적인 의사소통행위야말로 현대한국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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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
-생산패러다임에서 의사소통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중심으로-
저 자 명 : 박은미
발행사항 : 이화여대 1996/02
학위구분 : 학위논문(석사)
목 차
Ⅰ.서론
Ⅱ.생산패러다임(역사유물론)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
1.노동 개념에 대한 비판
2.역사유물론에 대한 비판
3.생산패러다임의 한계
Ⅲ.역사유물론의 재구성:
노동과 상호작용의 축으로 재구성하는 역사유물론
Ⅳ.의사소통패러다임으로의 전환
1.의사소통행위개념
2. 2층위의 사회이론:체계와 생활세계
3.패러다임 전환의 의미
Ⅴ.결론
논 문 개 요
하버마스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비판의 규범적 토대를 확보하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하버마스가 그동안 비판사회이론
의 자리에 있던 마르크스의 생산패러다임을 비판하면서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을 거쳐 의사소통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하버마스가 확보한 비판의 규범적 토대가 사회철학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생활세계의 물화와 생활세계의구조적 분화를 개념화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철학적 전제에 고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회합리화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지 못했다고 보고, 역사철학적 전제없이도 비판사회이론이 가능함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역사철학적 전제가 있어야 당위의 상태와 현재의 상태를 구별해주는 비판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하버마스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생산패러다임에 입각할 경우 모든 것이 물화된 사회에서는 비판의 척도가 어디서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
마르크스와는 달리 하버마스는 사회의 발전과정을 해방(저항)의 잠재력과 퇴각의 잠재력이 함께 풀려 나오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하버마스에서는 해방의 잠재력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실천을 행해야 한다. 이는 자율적인 공공성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으로 가능해진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를 물화과정이 단순한 반사작용으로만 등장하는 영역, 물화과정이 소수 독점경제와 권위주의적 국가기구에서부터 시작된 억압적인 통합현상으로 나타나는 영역으로 보지는 않는다. 생활세계의 합리화과정은 의사소통행위에 들어있던 잠재적 합리성이 풀려나오는 과정이라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사회를 체계와 생활세계로 범주적으로 구분하는 하버마스는 사회합리화에서 생겨나는 부정적인 문제를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내적 식민지화'로 명시함으로써 현대사회의 문제를 체계와 생활세계간의 경계설정문제로 파악하였다. 체계의 문제를 비판할 규범적 토대를 마련하지 못했던 마르크스에 비할 때 하버마스의 강점은 사회를 체계와 생활세계로 보는 2층위의 사회이론을 정립함으로써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에서 비판의 규범적 토대를 구축한다는 점이다. 토대의 영향력이 상부구조에 거의 결정적인 마르크스의 이론에서는 토대상의 변혁만이 시도될 수 있었지만 생활세계의 잠재력을 믿는 하버마스의 이론에서 우리는 저항의 잠재력의 이론적 토대를 확보하게 된다. 되어야 할 방향과 되기 쉬운 방향 사이의 각도줄이기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사회철학의 영역에서 이성비판이 이성의 부정으로 나아가는 시류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인 사회의 건설'에 대해 고심한다는 점에서 하버마스 작업의 의의가 있다.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
Ⅰ. 서 론
다양한 분과학문을 넘나들면서 여러 저작을 통해 보여준 하버마스의 학문적 노력은 '비판적 사회이론'의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 하버마스는 주저인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도 자신의 이 저서가 비판적 사회이론의 확립을 위한 초석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어떤 메타이론이 아니라 그 비판적 척도를 현실속에서 입증하고자 노력하는 사회이론의 시작이다" 본 논문은 "철학은 현재 인간의 삶의 기반이 무엇이며,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며 어떠한 보편적인 연관성을 갖는가를 과학적으로 탐구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시대비판을 도외시할 수 없고 철학은 시대비판이라는 지점에서 사회이론과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출발점으로 한다. 하버마스 역시 이 전통에 서서 "철저한 인식비판은 오로지 사회이론으로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하버마스 사회이론의 제목에는 '비판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사회현상의 기술에 그치지 않으려는 비판적 사회이론은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하고 행위이론상으로 구체화될 수 있어 야 하며 실천적 함축을 가져야 한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개념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회이론을 세우려는 그의 시도의 중심축을 이룬다. 그가 의사소통 행위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에서 목적합리성 만큼 발전하지 못한 합리성의 다른 측면, 즉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마르크스와 초기 비판이론가들은 현실사회의 분석과 유토피아적 전망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그 이유는 사회합리화과정을 분석하는 적절한 개념적 틀을 가지지 못한 까닭에 사회 합리화가 '목적합리성만의 증대'로 선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가 보기에는 사회의 합리화에는 목적합리성에 의한 합리화 외에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의한 합리화의 차원이 있다. 그런데 이 들은 합리성을 목적합리성으로만 생각하고 합리성의 또 하나의 측면인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차원을 개념화하지 못한 것이다.
의사소통 행위 개념은 하버마스의 행위론적 구분에서 등장하는 것인데 그의 행위구분이 가장 세련화된 것은 1981년의 저작인 >>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이다. 하버마스의 행위론적 구분은 행위자의 행위결합방식을 기준으로 하는데 크게 사회적 행위와 비사회적 행위(도구적 행위:하버마스의 구분에 따르면 노동이 여기에 속한다)로 나누어지고 사회적 행위는 다시 전략적 행위와 의사소통 행위로 구분된다. 이 행위들을 성공지향적/이해지향적 행위라는 구분으로 나누면, 전략적 행위와 도구적 행위는 성공지향적 행위에, 의사소통행위는 이해지향적 행위에 속하게 된다. 전략적 행위는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목적을 수행하려는 행위이며, 의사소통행위는 참여자들의 행위계획이 상호이해의 실행들을 거쳐 조정되는 행위이다. 의사소통행위는 참여자가 자신들의 행위계획을 자기중심적 성과계산이 아니라 상호이해를 도출할 수 있는 조건을 바탕으로 해서 하는 행위인 것이다. 상호이해는 타당성있는 동의를 목표로 하는 의사소통이다. 이는 실제적 동의를 야기하는 경험적인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에 의한 동기화를 토대로 참여자의 행위를 조정하는 쌍방의 확신과정을 의미한다.
의사소통행위의 결합이 담론인데 담론은 '합의'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얽힌 행위들을 연결할 때 행위당사자들이 충분히 수긍하고 동의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전략적 행위는 상대자의 결정에 대한 영향력 행사 즉, 발화결과를 목적으로 하지만 의사소통행위는 상대자에 대해 타당성 요구를 하면서 자신의 언어행위의 발화수반력의 발휘만을 목적으로 한다. 모든 언어행위는 의사소통 상대자에 대한 타당성 요구를 내포하고 있으며 상대자는 이 요청을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의사소통의 배경으로서 생활세계가 있기 때문에 개개 의사소통행위는 타당성 요구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상호이해라는 것이 타당성 있는 동의를 목표로 하는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행위의 형식적 특성을 해명하면서 합리성의 개념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버마스가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시도한 작업은 상호이해가 최종목적으로서 인간언어에 내재한다는 것 즉, 담론에 내재하는 상호비판과 균등한 논증부담의 요구가 담론 당사자들에게 규범적 구속력을 가진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이를 통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사회화된 주체들이 공동적인 행위지향을 수 하고 창조적으로 계속 형성할 수 있는 일상적 실천의 영역(생활세계)을 확보한다. 그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일상생활의 의사소통적 실천에 전제되고 있는 합리성의 조건들을 연구하고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행위의 규범적 내용을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개념 속에 수용한다.
그동안 의사소통행위에 대한 논의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있어 왔는데 정작 하버마스가 하고자 했던 작업인 비판적 사회이론에 대한 연구는 소홀했던 경향이 있다. 본 논문에서는 그동안의 학문적 축적을 바탕으로 철학의 영역에서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을 정리해보는 작업을 시도한다. 하버마스 사회이론은 마르크스의 생산패러다임의 사회이론에서 전환한 의사소통패러다임의 사회이론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여기서 생산패러다임이란 인간의 노동과 물질적 생산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로부터 인간의 삶과 사회 및 역사의 기본적인 전제와 조건 및 결과 나아가 기본적인 구성원리와 규제원리를 이끌어내려고 시도하는 이론적 틀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은 역사유물론에 대한 해석과 비판의 결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서 나타나는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론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을 중심으로 하버마스 비판적 사회이론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위하여 본 논문에서는 우선 하버마스 이전에 비판사회이론의 자리를 차지했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을 보고자 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는 역사객관주의를 피해나가야 하며 규범의 차원과 사실의 차원을 혼동하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피할 수 있는 '비판' 사회이론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는 규범적 기준을 적절히 해명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사실적 차원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틀에 넣어 설명하려고 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념도 그 규범적 근거를 성찰하지 못함으로써 그 이념실현이 사적 소유가 폐지된 경제체제의 도입으로만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그는 생산패러다임에서는 인류의 자기산출활동을 노동으로만 환원하기 때문에 이러한 여러가지 문제를 노정한 것이라고 본다. 노동에만 결정적 무게중심을 두고 상호작용의 차원을 드러내지 못해서 자유로운 생산자의 연합이라는 해방적 기획을 자연지배의 확대의 연속선상에 놓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토대로 하버마스는 노동과 상호작용의 축으로 구성하는 역사유물론, 즉 사회진화론으로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을 재구성한다. 하버마스는 사회형태의 발전과정을 설명할 때 생산관계에 맞추어 사회관계 전체가 조직된다는 마르크스의 사회이론을 수정하여, 물질적 생산력의 증대 뿐아니라 사회구성원 사이의 상호작용을 규정하는 합리적 발전과정과 제도화가 또 하나의 역사발전의 축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규범적 구조가 단순히 물질적 재생산과정의 발전노선을 따르지 않고 고유의 내적 역사를 갖고 있다고 확신한다.
마르크스에서와는 달리 하버마스에서는 세계상, 도덕관 및 정체성 형성에서 표현되는 합리성 구조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며, 문화적 전승과 제도변화에 내재하는 <발달논리>를 드러내주는 규범적 구조의 발전 유형이 문제된다. 규범구조의 발전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버마스는 생산력에 의해서만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규범구조의 차원에서의 발달이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왔던 경우를 통해 보여주기도 한다. 이와 같이 하버마스는 노동의 축으로만 역사발전과정을 설명하는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을 '사회진화론의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회진화론에서는 노동(도구적 행위)과 언어(상호작용, 의사소통행위)의 축으로 사회와 역사의 발전과정을 설명한다.
언어의 축을 도입하는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을 기반으로 하고 상호작용을 의사소통행위 개념으로 세련화함을 통해 하버마스는 2층 위의 사회분석에 도달하게 된다. 하버마스에게 사회는 행위관계의 그물망이다. 2층위의 사회이론이란 언어를 매개로 행위가 연결되는 생활세계와 돈과 권력의 비언어적 매체를 매개로 행위가 연결되는 체계로 사회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범주적인 것이어서 현실의 사회에서 체계와 생활세계를 뚜렷이 구분해낼 수 있지는 않은데 대체로 체계에는 행정체계와 경제체계가, 생활세계에는 문화적 재생산과정, 사회적 통합, 사회화과정이 해당된다. 하버마스의 체계/생활세계의 분석틀은 마르크스의 토대/상부구조의 분석틀과는 구분 기준이 다르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분석틀이 가지는 장점은 마르크스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후기자본주의의 가능성이 설명된다는 것이다.
사회의 발전과정을 물화의 전면화로만 파악하면 마르크스가 긍정적으로 보았던 자본주의의 생산력의 증대라는 긍정적인 계기가 묻히게 된다. 그러나 하버마스식으로 물화의 과정과 합리화의 과정을 동일시하지 않으면, 합리화의 장점을 취하면서도 물화를 비판할 수 있게 된다. 하버마스의 의도는 마르크스와 달리 사회분화 에 의한 사회합리화과정으로서의 체계발전의 장점을 손상시키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하버마스에서 사회문제는 체계가 생활세계를 내적으로 식민지화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는 주로 문화영역에서는 의미상실의 현상으로, 사회영역에서는 아노미 현상으로, 개인영역에서는 정신병리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물화, 소외의 문제를 생활세계에 체계가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는 문제 즉, 체계와 생활세계 사이의 관계문제, 경계설정문제로 개념화하면 물화의 발생과 정도는 "생활세계에서의 주체들이 활발한 의사소통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그럼으로써 체계논리의 침입에 저항하는 실천적 역량에 달려" 있게 된다.
이것이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서 하버마스가 보여주는 저항의 잠재력의 이론적 토대이다. 하버마스는 사회를 체계와 생활세계로 나누어 설명함으로써 생활세계의 잠재력에서 비판의 척도를 확보하는 것이다. 역사형이상학이라는 의미에서의 역사철학을 받아들이지 않는 하버마스는 이와 같이 인류의 역사를 소외의 역사로 파악하지 않고 해방의 잠재력과 퇴각의 잠재력이 함께 풀려나오는 이중의 과정으로 파악한다.
이상과 같이 본 논문에서는 '생산패러다임에서 의사소통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에 초점을 맞추어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르크스 생산패러다임의 기초를 이루는 개념이 노동 개념이므로 먼저 이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고(Ⅱ장1절), 마르크스 생산패러다임의 요체인 역사유물론에 대한 비판을 정리한 다음(Ⅱ장2절) 이러한 비판의 함축을 추출함으로써 패러다임 전환의 단초를 보고자 한다(Ⅱ장3절).
Ⅲ장에서는 이러한 비판을 토대로 하버마스가 노동과 상호작용의 축으로 재구성하는 사회진화론을 정리하겠다. 이미 여기서 의사소통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상당부분 암시된다. Ⅳ장에서는 의사소통 패러다임으로 전환된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을 살펴보겠다. 먼저 의사소통 행위개념을 정리하고(Ⅳ장1절), 의사소통 행위 개념을 기반으로 해서 사회를 체계와 생활세계로 분석하는 2층위 사회이론을 살핀 후(Ⅳ장2절)사회철학에서 하버마스의 패러다임 전환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Ⅳ장3절).
Ⅱ. 마르크스 역사유물론(생산패러다임)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은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의 토대가 된다. 하버마스의 마르크스 비판은 하버마스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데 그 이유는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서 나타나는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론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은 >>이론과 실천<<(1963), >>인식과 관심<<(1968),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과 기술<<(1968),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을 위하여<<(1976), >>의사소통행위이론<<(1981) 등의 여러 저작에서 나타난다. Ⅱ장에서는 실질적인 논의를 위하여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을 위하여<<에 나타나는 하버마스의 비판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우선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을 위하여<<에 나타나는 비판에 앞서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에 대한 하버마스의 초기비판을 먼저 살펴 보겠다(1절). 2절에서는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을 위하여<<에 나타나는 마르크스 생산 패러다임의 사회이론에 대한 비판을 보고 3절에서는 이러한 비판이 지니는 의미 즉, 생산패러다임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하는 하버마스의 의도를 정리해보겠다.
1.마르크스 노동 개념에 대한 비판
하버마스가 보기에 마르크스의 근본적인 약점은 노동이라는 범주로만 이론을 구축했기 때문에 상호작용의 영역과 도구적 행위의 영역을 충분히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마르크스 노동개념에 대한 하버마스의 가장 대표적인 비판이다.
"사회적 노동에 의한 유물론적 종합 개념은 인류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념들을 칸트에서부터 시작하는 사고의 움직임 안에서 체계적으로 수용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피히테에 의해 규정된 전환점에서, 마르크스는 칸트적 인식비판의 입장에 대한 헤겔의 반론의 의도를 받아들인다. 동시에 그는 인식론 자체의 기반을 잃게 하는 동일철학에 대해 투쟁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유물론의 철학적 기초도 인식의 철저한 현상학적 자기반성을 성립시키기에는, 그래서 실증주의적 인식론의 장애를 막기에는 불충분한 것임이 증명된다. 내재적으로 고찰해보면 그 이유를 나는 인류의 자기 산출활동을 노동으로 환원한 것에서 찾는다."
하버마스의 요지는 인간의 자기생산활동을 단지 노동으로만 환원시켰다는 것 즉 반성의 차원마저도 도구적 행위의 차원으로 환원시켰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생산의 차원에서의 지식이 아닌 반성적 차원에서의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지배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지배적인 의식이 가능한지를 설명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간략히 말하면 노동 개념으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으나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는 언어의 차원 즉, 상호작용의 차원에서의 설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노동 또는 목적합리적 행위는 경험에 근거한 기술적 규칙들과 선택된 전략들을 사용하여 주어진 조건 속에서 일정한 목적들을 실현하는 행위이다. 하버마스는 노동이라는 범주를 통해서 자연적 사회적 환경에 대한 기술적 지배의 문제들을 주제화하고 의사소통 또는 상호작용이라는 범주를 통해서 의사소통하는 개인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즉 도덕적 관계)의 문제를 주제화한다. 노동 개념을 이러한 범주적 구분하에서 파악하는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의 근본적 약점을 노동이라는 범주가 도구적 행위 개념에 경도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상호작용과 노동의 연관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적 실천이라는 특정화되지 못한 항목 아래.... 의사소통적 행위를 도구적 행위로 환원했다.
마르크스가 노동과 상호작용의 연관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떤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가?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은 단순히 목적합리적 행위의 차원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유적 본질의 대상화>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였기에 노동의 본래적 모습에 비추어 자본주의 현실에서의 소외된 노동을 비판할 수 있었다. 노동의 개념에는 반성의 차원이 이미 들어가 있고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의 차원도 내재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하버마스도 마르크스가 물질적 차원의 탐구에서 항상 노동과 상호작용을 포괄하는 사회적 실천을 고려한다는 점을 안다. 하버마스는 "물론 마르크스는 생산을 단지 고립적인 개인들의 도구적 행위로만 이해하지 않고 또한 여러 개인들의 <사회적 협업>이라고도 이해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글을 인용한다.
"이제 삶의 생산은, 다시 말해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재생산하고 생식을 통해 다른 삶을 생산해내는 일은 이미 이중의 관계로서 -한편으로는 자연적 관계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관계로서- 나타난다. 여기서 사회적이라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그리고 어떤 목적을 갖고 있든 간에, 여러 개인들이 협업한다는 의미에서이다. 따라서 특정한 생산양식 또는 산업의 단계는 언제나 협업의 일정한 양식 또는 사회적 단계와 결합되어 있고 이러한 협업의 양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생산력'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생산력의 양이 사회상태를 제약한다. 따라서 또한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언제나 산업의 역사나 교환과 관련하여서만 연구하고 다루어야만 한다."(MEW 제3권 S.21)
흔히들 생각하듯이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이 도구적 행위에 국한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다음의 이해가 더 적절하다. "하버마스의 입장에서는 마르크스가 마땅히 구분해야 할 노동과 상호작용 또는 도구적 행위와 의사소통적 행위 간의 범주적 구별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노동에만 결정적 무게중심을 두면서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그래서 그런 식의 문제인식이 해방에 대한 기술주의적 이해를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 문제"이라는 것이다. 문제의 발단은 마르크스가 해방 사회의 이념, 곧 인간의 참된 도덕적 완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충분한 노동의 실현을 통해서 가능하고 또 노동의 실현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다고 본 것에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유로운 생산자의 연합이라는 해방적 기획을 유적 본질의 대상화의 발전 즉 자연지배의 확대의 연속선상에 놓고 있다. 그런데 도구적 이성의 계속적인 성장이 어떻게 도덕적-실천적 이성의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지가 문제되는 것이다.
한편으로 마르크스.......는 사회적 합리화를 행위연관들의 도구적 전략적 합리성의 성장과 동일시한다. 다른 한편으로 .....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라는 개념 속에 ...... 그것에 비추어 경험적으로 기술되는 합리화과정을 평가할 포괄적인 사회적 합리성을 모호한 형태로나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포괄적 합리성 개념을 생산력......과 동일한 수준에서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규범적 차원을 문제삼고 있었으나 그러한 규범적 기준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규범적 차원이 지닌 독자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규범적 기준을 제대로 정당화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집단을 매개하는 것이 단순한 생산이 아니라는 것이며 마르크스에서 생산행위와 생산관계는 단지 동일한 과정의 상이한 계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교류에는 구성원들간의 재화배분문제에 있어서도 생산의 논리와는 다른 집단마다의 독특한 규범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와 집단의 관계를 규범적으로 규제하는 매개물은 문화적 전승(Kulturelle berlieferung)이다. 이 전승은 주체가 자신의 환경에서 자연과 자신을 해석하는 언어적 의사소통연관을 형성시킨다." 이러한 비판은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을 위하여<<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다음 절에서는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을 위하여<<에서 나타나는 비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여기에서는 노동개념에 대한 인류학적 성과를 근거로 하는 비판이 등장한다.
2.마르크스 역사유물론에 대한 비판
하버마스는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을 위하여<<에서 역사유물론의 <기본 개념들>과 <기본전제들>을 끌어들여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역사유물론의 가설들을 적용하는 데에서 제기되는 난점들을 설명한다. 하버마스는 우선 '사회적 노동'의 개념과 '유적 역사'의 개념, 그리고 역사유물론의 세가지 기본전제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사회적 노동이라는 개념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시켜주는 개념이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하버마스는 다음의 질문을 던진다. "사회적 노동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삶의 재생산 형식을 충분하게 특징짓는가?" 이 질문에 대해 충실히 생각해보기 위해 하버마스는 인간의 삶의 양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규정하고자 한다.
영장류로 부터 인간의 발전 즉, 인간화의 과정에 관한 인류학에서 나온 최근 정보에 따르면 이 인간화의 과정은 <유기적(자연적) 발전 메커니즘과 문화적 발전 메커니즘이 함께 작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한다. 뇌의 진화와 더불어 무리를 지어 수렵생활을 하던 호미니드(원인)의 능동적인 적응이 자연선택의 압력을 가했던 주위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진화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유기적 형식과 문화적 형식의 혼합으로 진행되는 과정은 호모사피엔스로 넘어가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사회적인 진화>의 과정으로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전의 사회문화적 단계를 영장류 단계와만 구분해서는 안되고 호미니드 단계와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의 사회적 노동 개념이 인간에게만 특유한 노동개념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회적 노동'개념은 동물과 (호미니드 단계의) 猿人을 구분시켜주는 개념이지 동물과 인간을 구별시켜주는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하버마스가 의도하는 것은 인간의 발달을 설명하는 데에는 상호작용 즉 언어의 차원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버마스가 사회적 노동개념의 긍정적 계기까지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하버마스는 노동과 분배를 사회적으로 규제하는 체계가 경제라고 하면서 마르크스는 삶을 재생산해내는 경제적 형식이야말로 인간의 발달단계를 특징짓는다고 보았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과 함께 하버마스는 <인간 삶의 재생산 형식>이라는 사회적 노동의 개념은 많은 함축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사회적 노동의 개념이 근대의 주관철학 또는 반성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들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한다. "개인은 그가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바로 그대로다.
따라서 그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그의 생산과 일치한다. 다시 말해 그가 무엇을 생산하는가 그리고 그가 어떻게 생산하는가와 일치한다." 이는 하버마스가 보기에는 인식하는 주체들을 자신안에 머물러 있는 수동적인 의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띤 현상론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또 한편으로 이를 자연에 대해 정신의 선차성을 주장하고 이해관계에 대해 이념의 선차성을 주장하는 이론적 실천적 관념론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본다. 하버마스는 또한 마르크스가 "인간의 본질은 결코 개인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그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라고 함으로써 행위주체를 고립된 단자로 전제하는 부르주아 사회과학의 방법론적 개체주의와 영국 프랑스 도덕철학의 실천적 개인주의에 대해 반대한다는 점도 지적한다.
하버마스는 마르크스가 인간을 고립된 단독자로 보지 않는 것을 타당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버마스는 마르크스 노동 개념의 긍정점은 취하고 인류학의 성과에 따른 개념의 정교화는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하버마스가 마르크스 노동개념을 비판하는 이유는 노동개념에 고착되어 노동개념으로만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태도를 유발시키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분명히 마르크스는 '노동'을 중심범주로 하지 않고 '사회적 노동'을 중심범주로 하였다. 노동과 사회적 노동의 차이는 중요하고도 크다. 그런데 하버마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회적이라하더라도 결국 노동이 중심범주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철학에서 이론사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강조된 것은 노동의 범주, 생산력의 범주였으며 경제결정론적인 측면이었다는 것이다.
노동개념에 대한 비판을 한 후 하버마스는 유적 역사라는 단어가 일차적으로는, '하나의 유일한 종의 영역에서의 자연적 진화는 사회화한 개인들 자신의 생산적 활동을 통해 진행된다'는 유물론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사회적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유지함으로써 자신들의 물질적 삶의 관계들을 산출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사회와 역사적 과정-사회와 더불어 개인도 함께 변화하는-을 생산해낸다는 점에 주목한다. 또, 하버마스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역사를 생산양식들의 불연속적 계기로서 이해하고 이 생산양식들을 발달논리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사회진화의 방향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타당하다는 것이다.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은 유적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열쇠를 제공한다.
<생산양식>은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상태와 사회적 교통, 즉 생산관계의 일정한 형식을 통해 규정되며..... 자연과정에 대한 가능한 지배의 정도를 규정한다. ....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주어진 단계에서 노동력과 이용가능한 생산수단들을 어떤 방식으로 결합시킬 것이지를 결정하는 제도 및 사회적 메커니즘이다. ..... 생산관계는 사회적 권력의 분배를 표현한다. ..... 역사유물론은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서로 독립적으로 변화한다고 보지 않는다.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서로 상응하고 유일한 수의 구조적으로 유비되는 발전 단계들을 산출하며 따라서 발달논리적으로 배열되는 일련의 생산양식들을 산출해내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 역사유물론은 .... 여섯 개의 생산양식이 사회진화의 보편적 단계들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 유적 역사의 개념에 대한 교조적 이해는 세계사의 과정이 <거대 주체의 일직선적, 필연적, 연속적, 상승적 발전>을 확인시켜준다고 보는 것이다. 유적 역사에 대한 이러한 모델은 역사객관주의이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을 교조적으로 해석하면 5개 또는 6개의 생산양식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는 지금까지의 세계사의 과정이 <거대 주체의 일직선적, 필연적, 연속적, 상승적 발전>을 확인시켜 준다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생각으로는 역사유물론은 진화를 수행하는 <유적 주체>를 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진화의 담당자는 오히려 개별사회와 그 사회에 통합되어 있는 행위주체들이라는 것이다. 자기산출적이고 상호주관적인 높은 수준의 집단정체성이 있을뿐이지 거대주체는 없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 집단정체성은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해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목적론적 해석, 역사객관주의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생산양식이라는 열쇠가 충분히 추상화된 열쇠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의 생각으로는 상호작용의 차원에서의 발전 즉, '규범구조의 발전'이라는 또 하나의 축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Ⅲ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유적 역사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유적 역사라는 개념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유물론의 두가지 기본전제인 토대-상부구조 정식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에 관해 논의한다. "물질적 삶의 생산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삶의 과정 일반을 제약한다." 이 토대-상부구조정식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경제주의적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그러한 경제주의적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마르크스는 한 사회가 새로운 발전수준으로 이행해가는 위기단계에만 토대에 대한 상부구조의 의존성을 적용시키고자 했다는 것을 밝힌다. 마르크스가 강조했던 것은 사회에 대한 어떤 존재론적인 이해가 아니라 경제구조가 사회진화에서 차지하는 주도적 역할이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진화적 혁신을 설명하기 위해서 준거로 삼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영역들을 구획해내려고 토대라는 개념을 끌어들였으며 결국 토대-상부구조 정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때그때 사회의 토대영역에서 생겨난 그와 같은 문제들은 단지 진화적 혁신을 통해서만 해결된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토대와 경제구조를 등치시키게 되면 토대영역은 언제나 경제체계와 일치한다는 견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나 그와 같은 일치는 단지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타당하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원시사회에서는 친족체계가, 문명사회에서는 지배체계가 진화적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노동을 근간으로 하는 경제체계가 역사의 모든 단계에서 진화적 우선권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버마스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화적 우선권을 경제에 정당하게 할당했다: 경제체계에서의 문제는 전체적으로 사회의 발달경로를 결정지었다. 그러나 이 (진화적)우선권은 우리로 하여금 경제와 국가기구간의 상보적인 관계를 ...토대-상부구조의 개념으로 재단하는 데에로 잘못 이끌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가 진화적 우선권을 갖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변증법은 <기술주의적 의미>로 오해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일정한 발달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현존하는 생산관계 또는 지금까지 생산력이 그 안에서 움직여왔던 소유관계와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 관계는 지금까지는 생산력의 발전형식이었지만 이제 생산력의 족쇄로 변하게 된다. 이 때 사회혁명의 시대가 등장한다." 즉, 생산기술이 단지 노동력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일정한 형식을 강제할 뿐만 아니라 또한 노동의 사회적 조직을 통해 그 기술에 적합한 생산관계까지도 강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보기에는 의사소통적 행위의 수준과 사회적 협업 속에 결합되어 있는 도구적 행위 및 전략적 행위의 수준을 분리시켜야만 한다. 경제주의적 기술주의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생산양식' 즉 '노동'이라는 축으로만 사회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위의 행위구분을 바탕으로 해서 노동과 상호작용의 축으로 역사유물론을 재구성한다. 재구성한 역사유물론의 내용은 다음 Ⅲ장에서 자세히 볼 것이다.
3.생산패러다임의 한계
이상의 비판을 정리하면,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주의를 역사철학적 환원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소외되지 않은 상태를 목적(Telos)으로 두고 기존의 역사를 소외, 물화의 상태로 파악하면서 물화된 현실의 계급투쟁에서 비판의 토대를 찾는다는 것은 역사철학적 환원주의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서 역사는 생산력의 발전과정으로 축소되고 그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목적합리성의 발전, 즉 도구적 이성의 발전에 국한되는데 도구적 이성 자체에서 어떤 교정능력을 발견해낼 수는 없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인 것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객관적 전제로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자체에서 고삐가 풀린(entfesselten) 생산력을 들었으며(nennen) 그가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과학적 기술적 진보, 노동력의 질 그리고 노동과정의 개선된 조직에 의한 생산성의 증가였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주체적 잠재력도 생산관계와 '모순'을 이루는 생산력에 포함시켰으며, 이 노동자의 주체적 잠재력은 (생산적인 활동에서 뿐만아니라) 비판적·혁명적 활동에서도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프롤레타리아의 자기해방의 객관적인 전제조건이라고 보았을 뿐아니라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의 자기해방의 본질적인 주관적 전제조건들도 함께 생산해 낼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현대 후기자본주의의 존속력으로 인해 그 힘을 잃었다. 더구나 하버마스가 보기에 현대사회에서의 갈등은 분배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갈등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형태의 갈등인 것이다. 현대의 갈등은 물질적 재생산의 분야에서 점화되는 것도 아니고 정당이나 단체를 통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므로, 즉 새로운 갈등은 분배의 문제에서 점화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형식의 문법(Gramatik von Lebensform)에서 점화되는 것이므로 마르크스의 생산패러다임은 그 설명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현실의 이러한 문제들을 논외로 하고 이론자체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마르크스의 생산패러다임은 기술주의적 의미로 오해되기 쉬워서 현실의 변화에 따라 이론의 위기가 논의되는 한계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헤겔의 영향에 의해)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통일은 정치경제학비판의 개념에 도입되어서 마르크스이론의 규범적 기초는 오늘날까지 모호한 채 남아 있다. 이러한 불명료성은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부분적으로는 회피되고 부분적으로는 은폐되었으나 본질적으로 해소되지는 못하였다."
마르크스 철학의 특징은 노동, 생산양식을 '사회의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로 본다는 것인데 하버마스는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을 위하여<<에서 생산양식은 충분히 연마되지 않은 열쇠라고 하였다. 마르크스에게 역사이해는 물질적 삶의 생산과 재생산에 대한 이해로 부터만 나오는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규정하는 자연적 관계(생산력의 측면)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생산관계의 측면)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산관계는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규정자이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교류형식이라는 개념은 일면적이지 않은 포괄적인 개념이지만 마르크스는 어떠한 교류형식도 생산을 매개로 해서만 가능하다고 봄으로써 교류형식이라는 개념의 포괄성을 축소시킨 것이다.
또,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상태에서의 실천에서 규범적 토대를 찾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마르크스 작업의 본래 의도는 해방사회가 자본주의 사회 자체의 동학과 위기의 논리속에 이미 어떻게 구조지워져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성립과 발전의 의미를 생산력의 발전과 공산주의를 위한 물적 토대의 마련이라는 차원에서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하버마스가 보기에는 너무 일면적인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론적 기획이 지닌 애초의 풍부함이 생산패러다임의 전략을 선택하면서 긴장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버마스의 생각으로는 자연사적 과정으로서의 역사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 사이의 범주적 심연을 의사소통의 차원을 도입해서 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하버마스의 마르크스 비판은 "마르크스는 인류의 역사를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의 발전이라는 두가지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행위를 너무나 단선적으로 생산의 관점에서 규정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사회와 자연사이의 신진대사 과정으로부터 과연 규범적 내용이 도출될 수 있는가에 하버마스는 의구심을 가지는 셈이다. 하버마스는 노동 또는 생산물의 산출이라는 생산패러다임적 활동유형이 언어능력과 행위능력이 있는 주체들의 다른 문화적 표현 형식 전체를 포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생산패러다임의 전략에서는 실천 개념이 '목적 합리성의 확장'으로 축소된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목적 합리성을 포함하는 포괄적 합리성인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개념화하는 전략으로 생산패러다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전략에 따른 비판적 사회이론은 Ⅳ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보면, 하버마스는 생산패러다임에서는 노동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상호작용을 충분히 설명하거나 드러내지는 못한다는 것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사회구성원들이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원할 수 있는 것과 공익의 관점에서 행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실천적으로 알아내고자 한다면, 변해야 하는 것은 바로 상호작용의 형식"이라고 한다. 하버마스는 마르크스가 연결시키지 못한 현대사회의 분석과 유토피아적 전망의 연결을 포괄적 합리성의 개념화 즉, 목적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범주적 구분을 통해서 성취하고자 한다.
Ⅲ. 역사유물론의 재구성 : 노동과 상호작용의 축으로 재구성하는 역사유물론
하버마스는 마르크스가 규범적 기준을 정당화해내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역사유물론의 재구성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본래 취지를 살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론의 재구성이라 함은 그 이론이 원래 내세웠던 목적에 더 잘 도달하기 위해 낱낱이 분석해서 다시 짜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이 障에서는 하버마스가 재구성하는 역사유물론의 내용을 살펴보겠다.
앞 장에서 보았듯이 사회적 노동을 통해 재생산을 하고 경제를 형성한다는 점에서는 인류 뿐만 아니라 猿人(호미니드)도 이미 영장류와 구분된다. 원인의 성장한 수컷들은 수렵집단을 이루고 있었는데 무기와 도구를 사용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분업적으로 협업하는 협업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노획물을 집단에서 분배하는 분배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영장류사회와 비교했을 때 원인사회가 새로운 것은 '협업의 전략적 형식과 분배의 규칙'이다. 그래서 노동의 범주는 영장류와 원인을 구분해주는 데에 적합한 범주이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인류를 특징지어주는 것은 <가족구조>이다. 사회적 노동이라는 토대로 전환한 원인사회에서도 <가족구조>는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부권의 확립을 통해 사회적 노동의 기능과 2세 양육의 기능을 통합시킬 수 있었고 수컷들의 수렵기능과 암컷들의 채집기능을 조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단지 수렵경제가 가족적 사회구조에 의해 보완될 때에만 우리는 호모사피엔스와 더불어 성립한 <인간적인> 삶의 재생산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원인들 사이의 동물적인 지위체계가 <언어>를 전제하는 사회적 규범의 체계에 의해 결정적으로 대체되었음을 보여준다. 동물적 지위체계는 그때그때 최고지위에 있는 자의 위협능력, 제재가능성에 근거하지만 사회적 역할체계는 규범화된 태도기대에 대한 상호주관적 인정에 근거한다. 이와 같이 역할행위구조는 사회적 노동의 구조와는 다른 새로운 발전단계를 나타낸다. 이를 통해 하버마스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의사소통행위의 규칙, 상호주관적으로 타당하고 儀式(Ritual)을 통해 보증되는 행위규범들은 도구적이거나 전략적인 행위의 규칙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과 사회적 노동과 육아는 種의 재생산에 대해 똑같이 중요하므로 <내적 자연과 외적 자연>을 통제하는 가족적 사회구조는 기본적이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조직된 수렵이라는 생산양식은 .... 체계문제를 <수컷들의 가족화>, 즉 족외혼에 기초한 <친족체계>를 도입함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었다." 역할행위구조, 가족적 사회구조는 언어를 통한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주장이다. "...인간적인 삶의 재생산 형식을 낳고 따라서 사회진화의 출발상태를 가능하게 하는 발전은 노동과 언어의 구조 속에서만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가정해도 좋다. <노동과 언어는 인간과 사회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생산관계는 생산수단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고 따라서 간접적으로 사회적 부의 분배를 규제하는 기능을 통해 규정된다. 하버마스가 보기에는 원시사회에서는 친족체계가 그와 같은 기능을 맡고 있었고 문명사회에서는 지배체계가 그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에서는 시장이 조절기능 말고도 또한 계급관계를 안정화시키는 기능까지 맡게 되자, 그 때에야 비로소 생산관계는 생산수단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고 사회적 부를 분배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서 등장하게 되었고 경제적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게다가 탈산업사회론은 진화적 우선성이 경제체계에서 교육 및 과학체계로 이행해가는 상황을 전망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핵심을 중심으로 생산관계가 結晶化하기kristallisieren 때문에 이 제도적 핵심은 <사회통합>의 일정한 형식을 규정한다. 사회통합은 가치와 규범에 대한 사회적 생활세계의 통일성에 대한 보장으로서 상호작용 구조와 관련된다.
앞 장에서 본 것처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을 기술주의적 의미로 생각하지 않으면 즉, 하버마스의 생각대로 의사소통적 행위의 수준과 목적합리적 행위의 수준을 분리시켜 생각하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기술적으로 유용한 지식과 조작적으로 유용한 지식의 자연발생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고 또 그러한 지식이 생산력으로 전화될 수 있도록 하는 내적 학습메커니즘이 있다.
㉡하나의 생산양식이 평형상태에 있을 수 있는 경우는 생산력의 발전상태와 생산관계 사이에 구조적인 상응관계가 성립할 때 뿐이다.
㉢내적으로 야기된 생산력의 발전은 이 두 질서 사이에서 구조적인 양립불가능성을 만들어낸다.
㉣그와 같은 양립불가능성은 주어진 생산양식에서 평형상태의 균열을 낳고 기존의 생산관계를 변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하버마스는 물론 이런 식의 이해방식에서도 다음과 같은 문제가 여전히 불분명한 채로 남는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진화적 혁신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발전메커니즘은 어디에서 성립하는가?
㉠에서 말하는 학습메커니즘은 잠재적인 인지능력의 성장을 설명하고 또한 아마도 그러한 능력이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기술과 전략으로 변화하는 과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내적 학습 메커니즘에 의해 규범구조의 발전, 생산력의 발달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러한 학습메커니즘은 생겨난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발전한 산업사회에서 생산력의 진보는 아주 세분화된 노동과정의 분화와 산업들 사이에서 노동조직의 분화를 낳는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의 사회화'에 구현되어 있는 잠재적인 인지능력은 부르주아 사회를 혁명으로 내모는 사회운동을 가능하게 할 도덕적 실천적 의식과는 아무런 구조적 유사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생산력의 진보는 [공산당 선언]이 주장하는 것처럼 '노동자의 고립 대신에 노동자의 혁명적 결속'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낡은 노동조직 대신에 새로운 노동조직을 산출할 뿐이다.
따라서 하버마스가 보기에 우리는 '생산력의 발전'을 생산관계의 변혁과 생산양식의 진화적 혁신을 자극할 뿐이지 산출해내지는 않는 문제산출 메커니즘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오히려 생산력의 발전이 진화의 결과인 경우 즉, 생산력의 발전이 진화적 도전을 유도할 수 없었던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버마스가 볼 때 생산양식은 사회의 발전수준을 구분해주는 적절한 개념이 되지 못한다.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은 사회의 발전수준에서 보편적인 것을 가려낼 만큼 충분히 추상적이지 못하다." 하버마스가 보기에는 조직원리의 개념으로 사회의 발전수준을 가늠하는 것이 적절하다.
조직원리는 발달논리적으로 재구성가능한 학습단계들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고 사회의 그때그때의 새로운 학습수준을 제도화하고 있는 혁신들이다. 한 사회의 조직원리는 가능성의 공간을 규정한다. 조직원리는 특히 어떤 구조안에서 제도체계의 변화가 가능한가를 규정하고, 현존하는 잠재적 생산력이 어느 정도까지 사회적으로 이용될 수 있으며 또 그 생산력이 어느 정도까지 새로운 생산력 발전을 자극할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
사회의 조직원리는 사회통합의 그때그때의 지배적인 형식을 규정하는 제도적 핵심을 통해 특징지을 수 있다. 이 제도적 핵심은 친족체계, 정치체계, 경제체계등이다. 조직원리의 개념을 통해서 하버마스는 사회구성체의 변화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면서 마르크스가 소홀히했던 상호작용의 차원에서의 발전, 즉 규범구조의 발전과정을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하버마스는 여기서 진화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진화를 방향을 가진 누적적 변화로 생각한다. 그리고 생물학적 진화는 환경에의 적응능력 즉, 생존능력으로 이루어지지만 사회진화는 사회의 문제해결능력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한 사회구성체에서 진화적 혁신을 통해서는 해결될 수 없는 체계문제가 사회의 토대영역에서 생겨나는데 이 체계문제는 새로운 사회통합의 수준이 확보되어야만 해결된다. 즉, "새로운 제도적 틀이 출현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때까지 해결되지 못했던 체계문제들이 축적되어 있는 잠재적 인지능력의 도움을 받아 처리되고 그로부터, 생산력의 증대가 결과한다resultiert." 생산력의 발전과 관련한 기술적으로 유용한 지식의 차원에서 뿐만아니라 상호작용의 구조와 관련한 도덕적/실천적 의식의 차원에서도 학습이 이루어지고 이로 인해 사회를 새로운 발전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즉, 하버마스는 새로운 형식의 사회통합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도구적 행위와 전략적 행위의 규칙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기술적으로 이용가능한 지식뿐 아니라 도덕적 실천적 종류의 지식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즉, 새로운 형식의 사회통합을 위해서는 외적 자연에 대해 우리의 통제를 확대시키는 것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의 구조들 속에 구현되어 있는 지식,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의 내적 자연(본성)에 대한 사회적 자율성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상호작용이라는 개념으로 언어의 차원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문화적 단계에서는 학습과정이 처음부터 언어적으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들이 지닌 경험의 객관성은 개인들 상호간의 이해과정의 상호주관성과 구조적으로 얽혀 있다."고 강조한다.
언어적으로 생산된 상호주관성 구조는 사회체계 및 인격체계에 모두 중요하다. 의사소통 행위 연결망으로서의 사회체계와 언어능력, 행위능력으로 특징지어지는 인격체계는 그 동일한 의식구조로서 행위갈등의 합의적 규제에서 드러나는 법과 도덕을 가지고 있다. 법과 도덕은 상호작용의 핵심영역을 규정한다. 상호주관적으로 공유되는 전승된 지식은 사회체계의 구성요소이지 개별적인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이 하버마스의 설명이다. 왜냐하면 개인은 사회화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개인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언어적으로 산출된 이해의 상호주관성이 사회문화적 학습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진화적 학습과정은 전적으로 사회에만 속할 수도 없고 또한 전적으로 개인에게만 속할 수도 없다. 아마도 개체발생적 학습과정의 주체는 인격체계일 것이다. 확실히 사회화된 주체만이 학습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체계도, 사회화된 주체들의 학습능력을 이용하여, 현존상태를 위협하는 조절문제들을 해결하기위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의 진화적 학습과정은 그 사회에 속하는 개인들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개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고립적인 단자들로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활세계의 상징적 구조에 적응함으로써 얻는다."
"인류는 생산력의 발전에 대해 결정적인 기술적으로 유용한 지식의 차원에서 뿐만아니라 또한 상호작용의 구조에 대해 결정적인 도덕적 실천적 의식의 차원에서도 학습한다. 의사소통행위의 규칙들은 아마 도구적 행위와 전략적 행위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에 반작용하면서도 발전하겠지만 그러나 그럴 경우라 하더라도 그 규칙들은 고유한 논리를 따르고 있다."
"생산력은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지식을 구현하고 있는데 그러한 지식은 인지적 구조의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다. 제도적인 틀과 갈등규제메커니즘은 실천적 지식을 구현하고 있는데, 그러한 지식은 상호작용의 구조들과 도덕적 의식의 형식들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세계상은 인지적, 언어적, 도덕적-실천적 의식형태들에 의해 규정되는 고도의 복합적 구조물이다.....상호작용구조의 발전단계들과 기술적으로 이용가능한 지식의 진보를 매개하는 것은 세계상의 진화이다."
이상으로 본 바와 같이 노동의 차원에서의 발전은 생산력의 발전이고, 상호작용의 차원에서의 발전은 규범구조의 발전이다. 규범구조는 사회의 갈등규제메커니즘, 정체성 형성에서의 합리성 구조를 말한다. 하버마스는 이 규범구조가 고유한 내적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바로 이 점이 마르크스와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부분이다. 마르크스도 생산관계라는 개념으로 규범구조의 측면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생산관계를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규범구조의 고유한 내적 역사를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마르크스는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막을 때에는 생산관계에서의 변혁이 발생한다고 하였지만 생산력이 생산관계의 발전을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생산력 우선성에 경도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규범구조에 우선성을 부여한다.
결국 노동과 상호작용의 구분이 인류의 자기형성과정을 기술적 발전과정과 제도적 문화적 발전과정의 이중적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행위의 범주적 구분은 행위 합리화의 두 측면도 구별가능하게 해준다. 인지적-도구적 지식의 차원에서의 학습과정 뿐만 아니라 도덕적-실천적 지식의 차원에서의 학습과정이 있는 것처럼 생산력에서만이 아니라 사회통합의 형식에서도 행위합리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조직원리의 도입으로 인해 확립된 새로운 사회통합의 수준이 인지적-도구적 지식을 산출해낸다고 함으로써 도덕적-실천적 의식 영역에서의 학습이 생산력의 발전을 가져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사회진화에서 더 높은 통합수준은 관습적 단계 및 탈관습적 단계의 도덕의식을 구현하는 법제도들이 형성되기 전에는 확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규범구조의 발전에 따르는 새로운 사회적 조직원리는 새로운 사회통합의 형식을 의미하기 때문에, 규범적 구조의 발전은 사회진화의 견인차(Schrittmacher)이다. 새로운 사회통합형식은 현존 생산력의 개선, 새로운 생산력의 산출, 사회복잡성의 증대를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하버마스에게서는 모든 진화적 전진이 더 높은 단계의 합리화구조가 구현되는 제도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합리화의 제도적 구현을 통해 진화과정을 설명할 때 중요한 것은 행위지향 내용의 결속이 아니라 <행위합리화의 구조적 가능성>이다. 생활세계에 구현된 집단적으로 공유된 의식구조는 잠재적 학습과정의 구조적 조건이다.
그런데 (새로운 학습수준의 제도화로 이루어지는) 사회구성체의 변화과정은 발전인가? 합리화의 진전이라는 측면에서 하버마스는 발전이라고 대답하지만 이것이 곧 '모든 문제의 해결'을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구성체가 이행한 후에도 새로운 문제는 계속 생긴다. 이를 하버마스는 "새로운 학습수준이 단지 확대된 선택폭을 의미할 뿐만아니라 또한 동시에 새로운 문제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문제해결능력을 획득함과 동시에 새로운 문제상황을 의식하게 된다>는데 진보의 변증법이 있다는 것이다. "사회진화적 학습과정 자체는 모든 발전단계에서 새로운 부족의 차원, 새로운 역사적 필요를 의미하는 새로운 원천을 발생시킨다"
그래서 하버마스의 설명에 따르면, 산업자본주의 시대에는 경제적 가치가 부족의 원천으로 의식되며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경험 때문에 사회운동이 생겨나고, 또 그 사회운동을 진정시킬 욕구충족전략에 대해 국가는 고민하게 된다. 하버마스는 탈근대사회가 지식체계나 교육체계의 우위에 의해 특징지워지게 되면 <사회체계가 어떻게 내적 자연과의 자기조절적 교환을 이룰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어 동기와 의미의 창출이 주요과제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내적 자연에 대한 사회적 통합을 위해 참여의 원칙이 부각되고 아노미의 위험때문에 동기의 통제와 관련된 새로운 행정이 요구될 것이라고 한다. 하버마스가 이러한 전망을 밝히는 것은 계급지배의 경제적 형식 보다 사회구조적으로 닻을 내린 채 미세하게 작동하는 사회적 권력행사의 유형이 더 문제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하버마스는 미래의 계급지배 형식에서는 부르주아적 사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지국가적 교육체계에 의해 지배가 굴절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의 하버마스의 논의를 볼 때, 마르크스는 규범구조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이데올로기로 파악한 데 반하여 하버마스는 규범구조의 독자성에 주목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마르크스는 진화적으로 중요한 학습과정을 생산력에 촛점을 맞추어 다루었지만 하버마스가 보기에는 도덕적 통찰, 실천적 지식, 의사소통행위와 행위갈등의 규제의 차원에서도 학습과정이 일어나며 그 결과 사회적 통합의 더 성숙한 형식과 생산관계에 학습과정이 반영되어 새로운 생산력의 도입이 가능해진다.
마르크스의 생산 패러다임은 하버마스가 보기에 매우 제한된 의미에서만 사회통합과 새로운 사회질서의 가능성을 보여줄 뿐이다.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이렇게 된 이유를 하버마스는 마르크스가 노동의 범주로만 역사발전과정을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버마스가 보기에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은 삶을 재생산해내는 경제적 형식으로 인간의 발전 단계를 특징지었기 때문에 사회진화론의 부분이론에 해당한다
Ⅳ.의사소통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하버마스에게 사회는 행위의 그물망이므로 사회질서의 조건은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상호작용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행위조정의 메커니즘이 된다. 하버마스는 행위조정의 메커니즘에 '동의 Einverst ndnis'와 '영향발휘 Einflu nahme'가 있다고 본다. '동의'를 행위조정 메커니즘으로 하는 의사소통행위가 가능함을 보여줌으로써 이성적 사회질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하버마스의 의도이다. 의사소통행위가 가능하다는 것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되고 이는 사회를 체계와 생활세계로 범주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동의'를 행위조정의 메커니즘으로 하는 사회의 측면이 생활세계이고 '영향발휘'를 행위조정의 메커니즘으로 하는 사회의 측면이 체계이다. 사회의 진화 즉, 사회의 발전과정은 체계의 합리성이 증대하고 생활세계의 합리성이 증대함에 따라 체계와 생활세계가 분화해가는 과정이다. 생활세계에서의 필요가 체계의 합리화를 가져오지만 그 합리화의 정도가 지나쳐서 고삐 풀린 체계의 명령이 생활세계를 도구화하고 생활세계의 잠재적 의사소통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이 장에서는 사회를 체계와 생활세계로 개념화함으로써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새롭게 진단하는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을 t살펴보고자 한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개념을 기반으로 해서 체계와 생활세계의 2층위 사회이론을 내놓는다. 그러므로 1절에서는 의사소통행위개념을 정리하고 2절에서는 이를 기반으로 해서 2층위 사회이론을 살펴본 후 3절에서는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이 갖는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하버마스 사회이론의 강점과 한계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1.의사소통 행위 개념
하버마스에게 특징적인 것은 언어적 의사소통으로부터 행위조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동의'가 행위조정 메커니즘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언어에 어떻게 그런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선 하버마스는 상호이해가 최종목적으로서 인간언어에 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상호이해는 동의를 합리적으로 동기지운다. 동의는 비판가능한 타당성요구들을 상호주관적으로 인정하는 과정에서 합리적으로 동기지워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언어행위는 상대방이 비판가능한 타당성요구에 대해 그렇다 또는 아니다라고 반응함으로써 그 안에 포함된 제의를 받아들일 때 언어행위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타당성 요구를 전제하지 않고 상호작용을 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상호작용은 본래적 상호작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당성에 대한 상호비판을 통하여 동의 즉 합의를 지향하게 되는데 이러한 지향성은 언어적 의사소통의 실행적 전제라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행위구분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러한 하버마스의 생각을 살펴보도록 하자.
비판적 사회이론 기획의 출발점은 행위구분이다. 사회적 행위는 성공을 지향하느냐, 상호이해를 지향하느냐에 따라 전략적 상호작용과 의사소통행위로 나뉜다. 한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계획을 실현하는 경우, 환경세계에 대해서 객관화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직접적으로 자기행위의 결과를 의도할 때 즉 성공을 지향할 때에만 행위자는 영향을 끼치는 등의 개입을 시도할 수 있다. 이는 전략적 상호작용이다. 반면에 서로가 그때그때의 행위계획을 일치시켜 조정하고 동의에 도달한다는 조건하에서만 행위계획을 완수하는 상호작용 참여자들은 화자이자 청자로서 타당성요구에 입각한 수행적 태도를 취해야만 하고 주어진 상황과 그 상호간에 이해에 도달해야만 한다. 이러한 행위를 의사소통행위라고 한다. 여기서 수행적 태도란 '그렇다'라고 할 경우에 그렇다라고 인정한 행위를 수행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행위구분을 통해 하버마스가 의도하는 것은 의사소통행위를 개념화하는 것이고 궁극엔 상호이해과정의 보편적 구조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경우 밝혀내야 하는 것은 언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또 언제 그들과 상호이해할 수 있는가를 직관적으로 구별할 수 있으며 나아가 언제 상호이해의 시도가 실패하게 되는지를 아는 (언어)능력있는 화자(kompetenter Sprecher)의 前이론적 지식이다. 능력있는 화자들이 이러한 구별을 하는 데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표준[Standards]들을 명시화할 수 있다면, 상호이해의 개념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호이해[Verst ndigung]'라는 용어는 논의를 통해 상호이해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역동적 과정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상호이해과정은 어떤 언표의 내용에 대한 강제 등과는 무관하게 합리적으로 유발된 찬동의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동의를 목표로 한다. 결국 상호이해는 언어능력과 행위능력을 갖춘 주체들 사이의 결합과정(Einigung)이다. 행위결합과정이 있어야 행위조정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버마스에게는 어떤 언명에 대해 동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 발화내용을 상호주관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버마스는 <동의>를 이루는 앎을 <공통의> 앎이라고 본다. 공통의 앎은 상호작용의 연결의 중요한 구성부분이 될 때 행위조정의 기능을 맡을 수 있다. 믿음과 결부되어 있는 가능한 근거들에 의해 경우에 따라서는 한 참여자가 다른 참여자의 이해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상호주관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믿음은 상호작용 참여자들을 결합시킬 수 있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한 참여자가 다른 참여자에게서 (사정에 따라서는) 속임수의 도움으로 유도해내는 믿음은 이러한 결합효과를 가질 수 없다. 상호간의 구속성은 상호주관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믿음으로부터만 성립하는 것이다.
이해과정은 한 참여자의 동의를 얻어내고자 하면서 동시에 그에게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즉 그에게 인과적인 어떤 것을 야기시키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참여자의 관점에서 동의는 외경심 때문에 생겨날 수도 없고, 도구적으로든 행위상황에 대한 직접적 개입을 통해서든 또는 전략적으로 상대방의 태도에 대해 성공을 계산하면서 영향을 끼침으로써든 한 참여자가 다른 참여자에게 강요할 수도 없다. 아마도 동의가 객관적으로 강제되거나 유도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외적인 영향, 향응, 위협, 제안, 기만등을 통해 분명하게 성취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주관적으로는 동의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성취된 것은 행위조정 효과를 상실하고 만다. 그런 식으로 동의를 해주었던 사람이 그 동의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외적으로 영향을 끼침으로써 성립한 것임을 알아차리자마자 그 동의는 공통의 믿음이라는 성격을 잃어버린다.
성공지향적 태도는 한 행위자와 다른 행위자를 분리시키지만 이해지향적 태도는 상호작용 참여자들을 서로 의존하게 한다. 언어를 성공지향적으로 사용하는 전략적 상호작용의 경우, 행위자에게 상대방은 자신의 행위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이나 제약이기 때문에 참여자들의 행위가 연결되지 않고 분리된다는 것이다.그러나 언어를 이해지향적으로 사용하는 의사소통행위의 경우, 참여자들은 상대방의 '그렇다/아니다'의 태도에 의존하므로 참여자들의 행위는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이다. 즉, 동의는 공동의 신념에 근거한 것이므로 행위조정의 힘을 갖는다는 것이다. 동의하면 동의한 명제의 내용을 행위로 옮긴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략적 상호작용은 화폐나 권력이라는 매체에 의해 매개되는 상호작용으로서 동의에 입각한 행위조정의 힘을 가지지 못한다. 물론 전략적 상호작용도 언어적으로 매개된다. 그러나 이때의 언어는 일종의 매체일 뿐이다. 그래서 언어 본래의 힘 즉, 상호이해를 통해 행위를 조정하는 힘을 가지지 못한다. 즉, 전략적 상호작용에서의 성공지향적 언어사용은 의사소통 참여자들이 어떤 것에 대해 상호간에 도달할 수 있는, 언어 자체 안에 놓여져 있는 동의라는 목적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전략적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화폐나 권력의 매체는 코드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화폐라는 코드는 타자가 자아의 교환제의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거부하는가 하는 방식으로, 어떤 소유물을 획득하는가 아니면 획득을 포기하는가 하는 방식으로, 타자의 가능한 입장을 도식화한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는 교환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제의를 통해, 의사소통 행위에서 처럼 상호간에 기꺼이 협력하겠다는 태도를 전제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서로 조정한다. 오히려 행위자에게 기대되고 있는 것은 행위상황에 대해 객관화하는 태도와 행위결과에 대한 합리적인 지향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 개념을 발화적 (언어)행위lokution re Akte/발화수반적 (언어)행위illokution re Akte/발화결과적 (언어)행위perlokution re Akte의 구분을 바탕으로해서 설명한다.
①발화적 행위를 통해 화자는 사태를 표현한다.
②발화수반적 행위를 통해 화자는 무엇을 말함으로써 하나의 행위를 수행한다.
③발화결과적 행위를 통해 화자는 청자에게서 어떤 효과를 달성한다.
발화수반력은 의사소통행위와 관련되고 발화결과적 효과는 전략적 행위와 관련된다. 발화수반력은 '~~~ 을 주장하다' '~~~ 을 설명하다' '~~~ 을 명령하다' '~~~ 을 경고하다' '~~~ 을 고백하다' 등의 수행동사가 제기하는 힘이다.
언어를 언어 자체의 의미의 전달만을 의도하여 사용하는 것이 발화수반력의 발휘만을 의도하는 의사소통 행위의 경우이고 발화자가 상대방에게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에서 즉, 발화한 이후의 상대방의 행위조정을 목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발화결과를 의도하는 전략적 상호작용의 경우이다. 모든 참여자들이 자신들의 언어행위와 함께 발화수반력의 발휘만을 추구하는 언어매개적 상호작용이 바로 의사소통행위이다. 이와 반대로 참여자중 한명 이상이 자신의 언어행위와 함께 상대방에 대해 발화결과적 효과를 획득하려고 하는 상호작용은 전략적 상호작용이다. "의사소통행위는 전략적 상호작용에 비교할 때 모든 참여자들이 그때그때 개별적으로 추구하는 행위계획들의 의견일치적 조정(einvernehmlich Koordinierung)을 한다는 원칙(Grundlage)하에서 발화수반적 목적(Ziel)을 유보조건없이 추구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결국 발화수반적 행위에서는 말해진 것의 의미가 본질적인 것이지만 발화결과적 행위에서는 행위자의 의향이 본질적이다. 즉, 발화수반력은 말해진 것의 의미자체에서 드러나지만 발화결과적 효과는 언어행위의 내용자체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발화결과적 효과는 화자가 성공지향적으로 행위하면서 언어행위들을 도구화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발화수반력은 의사소통 참여자들이 세계내의 어떤 것에 대해 상호이해하는 상호인격적 관계들의 지평위에서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즉, 발화결과적 행위처럼 세계에 개입해서 어떤 의도한 효과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외적인(extramundan) 것으로서 의사소통 참여자들이 속해 있으면서 참여자들의 상호이해과정의 배경을 이루는 생활세계내에 등장한다,
하버마스가 견지하는 물음은 '언어행위는 어디에서 행위조정의 힘을 갖게 되는가이다. "우리가 한 언어행위를 이해하는 것은 무엇이 그 언어행위를 수용가능하게 하는가를 알 때이다." 이 조건은 동의 즉, 언어적 요구의 상호주관적 승인에 대한 조건이다. 언어행위의 조정작용을 충족시키는 조건하에서 화자는 사용된 언어적 표현이 문법적으로 올바르고 언어행위 유형적으로 요구되는 맥락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된다면 언어행위에 내포된 제안을 수용하도록 동기지어진다고 한다. 즉 언어행위에 비판가능한 타당성요구가 전제되기 때문에 언어행위의 수용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해도달을 지향하는 의사소통은 당사자들간의 상호주관적 상호성에 근거를 둔 <동의Einverst ndnis>를 끌어내야만 한다. 모든 타당성요구가 항상 의식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언어행위는 암묵적으로라도 그러한 타당성요구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논점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의사소통의 불일치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건간에 보편적 타당성요구들은 인간의 언어구조 그 자체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문제되는 상황이 일상적 의사소통이건 이론적/과학적 담론이든 실천적 담론이든 간에 <가능한 의사소통의 일반적 구조>안에는 언제나 이미 그와 같은 타당성요구들이 전제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행위에는 합리적으로 동기지우는 타당성요구의 힘이 모든 경우에서 나타난다. 거기서 발화수반력은 타당성요구를 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화자는 언어행위와 함께 비판가능한 타당성요구를 제시한다.
타당성요구는 내적으로 근거와 관련되고 발화수반력에 합리적으로 동기부여하는 힘을 준다. 단지 비판가능한 타당성 요구를 결부시키는 언어행위만이 (외적인 힘과 무관하게) 이해도달에 결부된 언어적 의사소통의 타당성이라는 기초에 의해 청자로 하여금 언어행위의 내용을 수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언어행위작용이 행위조정의 메커니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행위조정의 힘을 가진 의사소통행위는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 상호이해의 매개체로서의 언어행위는 ⓐ개인 상호간의 관계의 산출(Herstellung)이나 갱신(Erneuerung)에 기여한다. 거기서 화자는 객관적 사실의 총체인 객관적 세계의 무엇인가와 관계한다. ⓑ상태나 사건에 대한 기술(Darstellung)이나 전제에 기여한다. 거기서 화자는 존재하는 사태 세계에서의 무엇인가와 관계한다. 여기서 상태나 사건은 사회적인 것이다. 화자는 정당하게 규제된 상호관계의 총체로서의 사회적 세계에서의 무엇인가와 관계하는 것이다. ⓒ체험의 현현, 즉 자기표현에 기여한다. 거기서 화자는 자신이 특별히 접근가능한 주관적 세계에서의 무엇인가와 관계한다. 의사소통행위는 객관적/사회적/주관적 세계와 관계하는 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행위자들은 확인적(사실기술적:konstantive)/규범적/표현적 문장을 통해 재현되는 세계와 관계 맺고 있다. 하버마스는 행위자가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세계연관을 언어적으로 장악하는 동시에 그 세계연관을 '이해'라고 하는 협동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목적을 위해 동원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버마스는 임의적인 언어행위를 Mp로 표현하고(이때 M은 발화수반력 구성부분이고 p는 명제적구성부분이다) ①M(k)를 인지적 언어사용으로, ②M(r)을 규제적 언어사용으로, ③M(e)를 표현적 언어사용으로 표시해봄으로써 언어행위의 기본태도에 따라 화자가 어떤 의미로 명제적 구성부분을 항상 해석하는지를 분명히 할 수 있다고 한다.
①유형M(k)p의 타당한 표명에서 p는객관세계에 존재하는 사태를,
②유형M(r)p의 타당한 표명에서 p는 사회적 세계에서 합리적으로 승인된 행위를,
③유형M(e)p의 타당한 표명에서 p는 화자의 내부세계에 덧붙여지는 주관적 체험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인지적 언어사용을 기반으로 하는 행위가 확인적 행위이고, 규제적 언어사용을 기반으로 하는 행위가 규범규제적 행위이며 표현적 언어사용을 기반으로 하는 행위가 표현적(연출적:dramatiguisch) 행위이다.
전략적 행위(상호작용)와 확인적(사실기술적) 행위는 객관적 세계와, 규범규제적 행위는 사회적 세계와, 표현적(연출적) 행위는 주관적 세계와 관련을 맺는다. 전략적 상호작용은 객관적 세계와 두 가지 방식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행위자는 존재하는 사태를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바라는 사태가 실현되도록 할 수 있다. 확인적 행위는 존재하는 사태인 객관적 세계에 대해 언표하는 방식으로 객관적 세계와 관계맺을 수 있다. 규범규제적 행위의 경우에는 사회적 세계에 대해 행위자가 상호간에 정당하게 규제된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행위자들로서, 그리고 동시에 역할수행적 주체로서 관계맺는다. 표현적(연출적) 행위의 경우엔 행위자가 관중들 앞에서 자기자신에 대해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주관적 세계와 관계 맺는다.
규범규제적 행위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행위를 수행하는 사회집단의 구성원과 연관되어 있다. 규범은 사회적 집단안에 존재하는 동의를 표현하므로 일정한 규범을 공유하고 있는 한 집단의 모든 구성원은 일정한 상황에서는 그들이 그때그때 요구되는 행위를 수행하거나 거부하거나 할 것이라는 것을 서로 기대할 수 있다. 규범은 규범 수용자들이 규범을 타당한 것으로 또는 정당한 것으로 승인할 때 존재하게 되는 것이고 이 때 규범으로서의 사회적 타당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규범준수는 어떤 일반화된 행위기대를 충족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행위기대라는 것은 그 집단의 구성원들이 어떤 행위를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규범적 의미를 갖는다. 표현적 행위의 경우 주관적 체험을 정신적인 상태나 내적인 에피소드로 이해하면 주관적인 체험을 객관세계의 실제 구성요소와 똑같이 취급하는 셈이 된다.
표현할 능력을 갖고 있는 주체가 소망이나 감정 따위를 갖고 있다'거나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관찰가능한 대상이 연장이나 무게나 색 또는 그것들과 비슷한 속성들을 갖고 있다거나 소유하고 있다거나 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한 행위자가 소망이나 느낌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이러한 체험을 임의로 관중들 앞에서 표현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그것도 이 관중들이 표현된 소망이나 느낌을 그 관중들이 믿기만 한다면, 주관적인 어떤 것으로서 그 행위자에게 귀속시키게끔 표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표현적(연출적) 행위는 서로서로가 관객과 행위자가 되어 스스로를 표현하는 상호작용 참여자들과 연관되어 있다. "(표현적(연출적)) 행위자는 자신의 주관성을 다소간 의도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관객들 사이에서 자신에 대한 일정한 상像, 말하자면 인상을 불러 일으킨다. 모든 행위자는 자신의 고유한 의도, 사상, 태도, 소망, 감정등의 영역, 다시 말해 단지 자신만이 접근할 수 있는 고유한 특권을 지닌 그러한 영역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게 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표현적(연출적) 행위에서 참여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그때그때의 고유한 주관성에 대해 상호적인 접근을 통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상호작용을 조절한다." 존재하는 사태가 참인 명제들을 통해서 재현되고, 타당한 규범이 정당화된 당위명제를 통해서 재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관적인 것은 진지하게 표현된 체험명제를 통해서 재현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확인적 행위에서는 사실 확인을 하기 때문에 명제내용에 대한 공통적 이해가 요구된다. 규범규제적 행위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규범적인 집단적 동의의 현실화에 대한 이해가 문제되고 또, 표현적(연출적) 행위에서는 관객과 연관된 자기연출에 대한 이해가 문제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행위이론의 과제는상호작용 참여자들이 자신들의 그때그때의 행위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동의의 조건들을 명료히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버마스가 명료화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확인적 행위는 합의의 산출을 요구하고, 규범규제적 행위는 참여자들 사이에서의 가치합의를 전제하고, 표현적(연출적) 행위는 인상적으로 무대위에 등장한 연기자와 관객들 사이에서의 합의적 관계에 근거한다.
의사소통 행위의 개념은 이와 같이 행위자를 객관적/사회적/주관적 세계 안에서 어떤 것과 관계를 맺으면서,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거부될 수도 있는 상호적인 타당성요구들을 제기하고 있는 화자이자 동시에 청자로서 고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행위자는 객관적/사회적/주관적 세계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해 더이상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고 세계속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자신의 표현을, 다른 사람이 그 표현의 타당성으로 거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비추어 상대화한다(relativieren). 상호작용 참여자들이 상호제기한 타당성요구들을 상호주관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이해는 행위조정 메커니즘으로 기능한다. 이해를 지향하고 있는 행위자는 다음의 세가지 타당성요구를 암묵적으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진리성[Wahrheit]:이루어진 언명이 참되어야 한다는 요구(명제 내용의 존재 전제가 실제로 충족된다는 주장)
-정당성[Richtigkeit]:의도된 행위가 하나의 타당한 규범적 맥락과 관련하여 올바라야 한다는 요구(그 행위가 충족시켜야만 하는 규범적 맥락이 그 자체로서 정당하다는 주장)
-진정성[Wahrhaftigkeit]:개진된 화자의 의도가 표현된 그대로이어야 한다는 화자는 언명이나 존재명제의 참됨(진리성), 정당하게 규제된 행위와 그 규범적 맥락의 올바름(정당성), 주관적 체험 전달의 진정성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타당성요구를 통해 동의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러나 타당성 자체가 동의를 합리적으로 동기지우는 것은 아니다. 언어행위가 동의를 합리적으로 동기지우는 힘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말해진 것의 타당성 때문이라기 보다는 화자가 필요하다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조정효과를 지닌 보장(koordinationswirksamen Gew hr)때문이다. 화자는 그의 보장을, 진리성의 타당성요구나 정당성의 타당성요구의 경우에는 '담화적으로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그리고 진정성의 타당성 요구에는 '일관된 태도'를 통해 입증한다. 청자가 화자가 제공한 보장을 신뢰하면 이미 언표된 것의 의미에 포함되어 있는 상호작용을 연결하는 구속력이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본 바와 같이 의사소통행위는 전략적 상호작용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의사소통행위는 관련되어 있는 행위자들의 행위가 성공이라는 자기중심적인 계산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해에 도달하려는 행위들을 통하여 조화되는 것이다. 의사소통행위의 경우 상호작용 참여자들은 자신들의 행위계획을 의사소통적으로 도달된 동의라는 조건을 기반으로 수행한다. 이해에 도달하려는 행위는 '인간언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목적'이며 이해란 필연적으로 화자의 '타당성요구'를 청자가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화자가 비판가능한 타당성 요구와 언어행위를 연결짓게 되는, 그러한 언어행위들만이 청자를 움직여서 외부의 압력과는 상관없이 제안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타당성을 묻는 언어적 형식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해를 지향하는 의사소통이 갖고 있는 타당성이라는 토대덕분에 화자는 비판가능한 타당성요구들을 입증할 수 있다고 보장함으로써 청자로 하여금 그가 제공하는 언어행위를 받아들이게끔 하고 따라서 상호작용을 계속하기 위한 연결을 보장하는 결합효과[Verkoppelungseffekt]를 낳을 수 있다. "물론,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한도 안에서만 보면, 발화수반적 구속효과[illokution re Bindungseffekte]가 경험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의사소통적 행위가 광범위한 배경적 합의를 보장해주는 생활세계적 맥락안에 파묻혀(eingebettet) 있기 때문이다." 생활세계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 행위관련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의 한 측면이다. 사회의 다른 측면은 화폐와 권력으로 행위가 매개되는 체계이다. 체계와 생활세계의 2층위 사회이론은 다음 절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하버마스가 의사소통행위의 가능성을 통해 보이고자 하는 것은 포괄적 합리성인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가능성이다. 하버마스에게 합리성은 언어능력 있고 행위능력 있는 주체의 성질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합리성은 언어를 말할 수 있고 행위할 수 있는 주체가 지식을 획득하고 사용하는 방법과 관계한다. 지식과 합리성은 밀접한 관계하에 있으므로 어떤 언표[u erung]의 합리성은 언표속에 체현된 지식의 확실성에 의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언표의 합리성을 비판가능성[Kritisierbarkeit]과 정초가능성[Begr ndungsf higkeit]으로 생각한다. 즉, 언표의 근거를 물으면서 정초지울 것을 요구할 수 있고 비판가능하다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이해지향적 태도에 따른 언표의 경우엔 타당성요구에 따라 비판될 수 있고 성공지향적 태도에 따른 언표의 경우엔 그 언표가 원래의 의도를 실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될 수 있다.
이렇게 합리성의 개념을 새로이 확립함으로써 하버마스는 목적 합리성을 포괄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개념화할 수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효율성을 합리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목적 합리성만을 합리성으로 생각하는 편협한 태도이다. 이는 또 과학만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보기에는 도덕과 예술에도 그 나름의 고유한 논리가 있으며 합리적 구조가 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도덕/예술의 세가지 차원의 합리적 구조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세 측면이다. 즉 현대는 과학/도덕/예술로 분화되면서 인지적-도구적 합리성, 도덕적-실천적 합리성, 미학적-표현적 합리성의 세가지 차원을 발전시켜왔는데 생산 패러다임에서는 실천 개념을 인지적-도구적 합리성에 국한시키고 말았다고 할 수 있겠다.
효율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규범과 관련하여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도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고, 자신의 감정등을 제대로 표현하고 그로부터 실천적 결론을 도출하고 그 감정에 따른 일관된 태도를 취하면서 표현된 것에 대한 비판을 받을 수 있는 것도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략적 상호작용의 경우엔 명제적 지식의 도구적 사용이 합리성안에 내재해 있는 목표로 나타나고, 의사소통행위의 경우엔 명제적 지식을 통한 상호이해가 합리성안에 내재해 있는 목표로 나타난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언어행위에 보편적인 타당성요구와 관계하면서 논의[논증:Argumentation]을 통해서 확보된다. 논의는 말[Rede]의 유형인데 논의에서 참여자는 논쟁이 되는 타당성요구를 주제화하며 타당성요구를 논의로써 해결하거나 비판하고자 시도한다. 이론적 담론[Diskurs]은 인지적 도구적 영역에서 진리성의 타당성요구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들에 대해 논의한다. 실천적 담론은 규범적 정당성에 대한 타당성요구가 주제화되는 논의의 형식이다. 표현적 미학적 영역에서는 논의의 형식을 충족시킬 수 없으므로 미학적 비판이 시도된다. 미학적 비판의 경우엔 그 가치기준의 적합성과 가치평가적 언어표현일반의 적합성이 주제로 부상하게 된다. 문화적으로 수립된 가치기준들인 미학적 비판의 근거들은 작품의 진정성을 명백히 하므로 미학적 비판은 가치표준을 승인하는 합리적 동기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버마스는 언어적으로 매개된 상호작용의 순수유형으로서 사회적 행위가 상이한 종류의 지식을 구체화하는 양태를 조명한다. 다음의 도표는 이러한 행위합리성의 양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표 1>행위합리성 양태
+---------------+------------------+-----------+----------------+
| 행위유형 |구체화된 지식유형 | 논의형태 |전래된 지식전형 |
+---------------+------------------+-----------+----------------+
| 목적론적행위: |기술적,전략적으로 |이론적 담론| 기술/전략술 |
| 도구적,전략적 | 유용한 지식 | | |
+---------------+------------------+-----------+----------------+
|확인적 언어행위 | 경험적 이론적지식|이론적 담론 | 이 론 |
| (대화) | | | |
+---------------+------------------+-----------+----------------+
| 규범적으로 |윤리적 실천적 지식 |실천적 담론|법적 윤리적 표상 |
| 규제된 행위 | | | |
+---------------+------------------+-----------+----------------+
| 표현적 행위 | 미적 실천적 지식 |치유적이고 | 예술작품 |
| | |미학적 비판| |
+---------------+------------------+-----------+----------------+
의사소통행위에서 발견될 수 있는 행위합리성의 양태는 목적합리성을 포괄하는 다양한 형태의 합리성이다. 하버마스는 우리가 합리성을 목적합리성에만 국한시켜 생각하였기 때문에 인류의 발전과정을 합리성의 발전과정으로 올바르게 볼 수 없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목적합리성을 합리성의 대표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자본주의 원리의 보편화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한 측면인 인지적-도구적 합리성만이 선택적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개념화함으로써 이러한 선택성을 비판하는 것이다. 의사소통행위에서 발견될 수 있는 행위합리성의 양태는 사회적 합리화의 과정을 더 이상 목적합리적 행위의 제도화라는 선택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완전한 범위에서 고찰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완전히 포괄적으로 발현된다면 사회문제가 많이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가능하게 하는 이해지향적 행위에서 결정적인 것은 참여자들이 공동으로 정의내린 행위상황 속에서 의견일치를 통해 자신들의 계획을 실현한다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행위 상황에 대한 공통적 정의가 중요하다. 행위자는 생활세계를 이해지향적 행위의 원천으로서 배후에 간직하고 있다. 생활세계는 하버마스가 범주적으로 구분하는 사회의 한 측면이다. 다음에서는 의사소통행위개념을 기반으로 해서 구축한 2층위 사회이론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체계와 생활세계: 2층위의 사회이론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행위의 배경으로 생활세계 개념을 도입한다. 행위자는 행위의 창안자Initiator이자 사회의 문화적 전승, 사회화과정, 학습과정의 산물Produkt이라는 이중적 지위를 갖고 있다. 행위자는 배후에 있는 자신의 생활세계라는 배경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상호주관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생활세계를 전제해야 상호작용의 참여자들이 조정력있는 언어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상호작용 참여자들은 서로의 상황에 대해 서로 이해하는 가운데, 그들이 이용하면서 동시에 <새롭게 하는> 하나의 문화적 전승 속에 서 있다[문화적 전승]. 상호작용 참여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비판가능한 타당성요구들의 상호주관적인 인정을 통해 조정할 때, 그들은 사회적 집단들에 대한 소속감에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그 집단들의 통합을 <강화해준다>[사회적 통합]. 청소년들은 온전한 능력을 갖추고 행위하는 준거인들과의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사회집단의 가치지향을 내면화하고 일반화된 행위능력을 <획득>한다[사회화]." 생활세계의 구조적 핵심 즉, 문화, 사회, 퍼스낼리티는 상징적 재생산 과정을 통해 가능해지고 다시 또, 상징적 재생산과정은 의사소통행위에 의해 가능해진다. 생활세계의 상징적 재생산과정은 순환과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생활세계는 행위상황을 경계짓고 따라서 주제화할 수 없는 <이해과정의 지평형성적 맥락>으로 나타난다. 한 텍스트의 의미는 생활세계적 배경전제라는 지위를 갖는 선이해를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설명이다.
의사소통적 행위자들은 그 생활세계와 직관적으로 너무나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그 생활세계를 문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조금도 없을 만큼 생활세계는 자명성이라는 양상에서 나타난다. 생활세계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의식'되지 않는다. .... 생활세계는 또한 어떤 상황에서 생겨난 이해의 필요를 합의가능한 해석을 통해 충족시키기 위해 의사소통 참여자들이 길어올릴 수 있는 논증 berzeugung의 저수지이기도 하다. <원천>으로서의 생활세계는 이해의 과정에 대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가 생활세계를 <해석의 원천 Interpretationsressource>이라고 고찰할 수 있는 한, 우리는 그 생활세계를, 문화적 전승의 형태로 재생산되는 언어적으로 조직화된 배경전제들의 저장물Vorrat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 전승된 배경적 앎은 그러한 앎의 도움으로 산출되는 의사소통적 표현에 대해 어느 정도는 선험적transzendental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앎은 의사소통 참여자들이 객관적/사회적/주관적 세계 사이의 연관을 이미 내용적으로 해석하면서 존재하게끔 해준다.
그러므로 일상적인 의사소통적 실천에서는 조금이라도 알려지지 않은 상황은 없게 된다. 새로운 상황이라는 것도 언제나 이미 익숙해져 있는 문화적 앎의 저장물로 건설된 하나의 생활세계로부터 출현하는 것이다. 의사소통적 행위자는 자신들의 이해과정의 매체인 언어에 대해 초월적인 입장(extramundane Stellung)을 취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활세계에 대해서도 외부의 입장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생활세계를 떠나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하버마스는 한 언어행위의 상황적 의미는 그 언어행위의 명제적 구성요소가 지니고 있는 단어적 의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과 관련되는데 단어적인 의미는 상황맥락과 생활세계적 배경에 의해 보충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주의를 도입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특수한 삶의 형식들이 단지 가족유사성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삶의 형식들 속에는 보편적인 생활세계적 하부구조(Infrastruktur)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활세계란 현실행위에서(im aktuellen Handeln) 문제없는 것으로 전제된공통적인 배경지식을 말한다. .... 사회적 합리화란 목적합리적 행위의 확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의사소통적 행위 영역이 목적합리적 행위의 하부체계로 변형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담화[Rede]의 타당성에 근거하는 합리성의 잠재력이 바로 사회적 합리성의 준거점을 형성한다. 이러한 합리성의 잠재력은 결코 부동적인 것일 수 없다. 합리성의 잠재력은 세계상의 지식을 합리화하는 정도에 따라 다양한 수준에서 작동될 수 있다. ... 생활세계가 .... 의사소통적으로 추구된 상호이해를 통해서 조정되는 상호행위를 허락하는 만큼 생활세계도 마찬가지로 합리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상의 지식에는 법과 도덕이 있다. 하버마스는 앞 장에서 본 바와 같이 법과 도덕에 합리적 구조가 있음을 강조한다. 사회는 행위조정이라는 근본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동안 인류는 행위조정이 안되는 갈등상황을 도덕과 법을 통해 극복해왔다고 보는 것이다. 법은 가장 추상화된 규범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추상화과정이 합리화과정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규범으로 정립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합의하는 가치를 일반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치일반화[Wertgeneralsierung]란 행위자에게 제도적으로 요구되는 가치지향이 진화의 과정 (즉, 사회발전의 과정-필자)에서 점점 더 보편화되고 일반화하는 경향을 말한다.
동기와 가치의 일반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의사소통행위는 그 만큼 더 구체적이고 전통적인 규범에 기초한 행위유형들로부터 분리된다. 이러한 분리와 함께 사회통합의 부담이 종교적으로 닻을 내린 합의(원시시대에는 종교가 사회통합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필자)로부터 점점 더 언어적인 합의형성과정으로 옮겨진다. 행위조정이 이해 메커니즘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해지향적 행위의 일반적 구조가 점점 더 순수한 형태로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가치일반화는 의사소통행위 안에 내재하는 잠재적 합리성이 해방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이미 이러한 사실에서부터 우리는 가치일반화가 근거하고 있는 법과 도덕의 발전이 생활세계의 합리화의 한 측면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치일반화는 탈언어화된 행위조정매체에 의한 목적합리적 하부 체계가 발생과 궤를 같이 한다. "점증하는 행위조정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언어적 의사소통이 이용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사소통의 낭비와 불일치의 위험을 줄이기 위한 부담경감 메커니즘[Entlastungsmechanism]이 이용된다." 부담경감 메커니즘은 의사소통의 매체를 탈언어화하여 제도화한 것을 말한다. 경제체계와 행정체계에서는 돈과 권력의 매체가 행위조정의 메커니즘으로서의 언어를 대체한다. 화폐와 권력은 부르주아 사법과 공법을 통해 생활세계에서 제도화된다. "상호이해지향적인 행위가 규범적인 맥락으로부터 점점 더 자립성을 획득하게 됨에 따라 점점 더 강력하게 언어 이해의 메커니즘(즉, 동의라는 행위조정기제-필자)을 요구하게 되는데, 결국에는 그러한 요구가 지나쳐서 그 메커니즘이 탈언어적 의사소통의 매체(즉, 화폐와 권력-필자)들로 대체된다." 이 조정매체들은 가치합의로 나아가는 통합에서 사회적 행위를 매체에 의해 조정되는 목적합리성으로 전환시킨다.
행위조정이 언어로부터 탈언어화된 조정매체들로 옮겨진다는 것은 상호작용이 생활세계의 맥락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체계가 조정매체의 제도화를 통해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를 체계가 생활세계에 닻을 내리고 있다고 표현한다. "매체들에 의해 분화되는 사회의 하부체계들은 체계의 환경세계로 밀려난 생활세계에 대해 스스로를 독립적으로 만들 수 있다. 따라서 행위가 (탈언어화된)조정매체들로 옮겨졌다는 사실은 생활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의사소통의 낭비와 불일치에 대한 구제이자 동시에.... <생활세계의 기술화[Technisierung der Lebenswelt]>로서 나타난다." 생활세계의 필요에 의해 등장한 체계가 생활세계의 기술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이는 생활세계의 행위지향이 체계의 논리에 의해 침식되는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로 연결된다. 생활세계의 기술화는 조정매체의 논리가 생활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체계와 생활세계가 분리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체계통합과 사회통합이 분리된다는 것이다. 체계통합은 행위자들의 행위가 기능연관을 통해 즉, 탈언어적 매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통합이고 사회적 통합은 행위자들에 의해 의도되고 산출되는 것으로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언어에 의해 이루어지는 통합이다. 분화의 정도가 미미하던 단계의 사회에서는 사회통합의 메커니즘과 얽혀있던 체계의 연관들이 근대사회에 들어서 체계와 생활세계가 분리되면 자립적인 구조로 사물화된다. 목적합리적 행위의 하부체계들은 제2의 자연으로 생활세계 구성원들에게 등장한다.
이에 반해 의사소통적으로 일반화된 형식들은 상호작용을 공유된 문화적 지식, 타당한 규범들, 동기형성과정이 지닌 생활세계적 맥락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다. 이들 언어적 조정매체는 언어적 합의형성의 수단들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사소통적 행위는 기능적으로 작용하는 <이해>의 측면에서 보면 문화적 앎의 전승과 혁신에 기여한다. <행위조정>의 측면에서는 사회통합과 유대의 산출에 기여한다. <사회화>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적인 정체성의 형성에 기여한다. 생활세계의 상징적 구조는 타당한 지식을 영속적으로 만들고 집단유대를 안정화시키며 사려분별있는 행위자를 성장시키는 가운데 재생산된다. 재생산과정은 새로운 상황을 생활세계의 현존하는 상황에 문화적 전승의 의미와 내용이 지닌 <의미론적>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통합된 <사회적 공간>의 차원에서, 서로 계기하는 세대들의 <역사적> 시간에서 연결시킨다. 이는 각각 문화적 재생산, 사회통합, 사회화의 과정인데 이 과정에는 생활세계의 <구조적 구성요소들>인 문화, 사회, 퍼스낼리티가 상응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문화는 의사소통 참여자들로 하여금 세계속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서로 이해에 도달함으로써 해석을 내릴 수 있도록 해주는 지식의 저장물이다. 사회는 의사소통 참여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사회적 집단에 대한 소속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해주고 따라서 유대를 보장하게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정당한 질서이다. 퍼스낼리티는 한 주체로 하여금 언어능력과 행위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해주며, 따라서 이해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고, 거기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능력이다.
이 문화, 사회, 퍼스낼리티를 재생산시켜주는 매체는 바로 일상적인 의사소통적 실천의 연결망안에 엮어져 있는 상호작용인 것이다. 이 재생산과정은 생활세계의 상징적 재생산 구조와 관계를 맺는다. 다음은 생활세계의 구조적 성분의 유지를 위하여 재생산과정이 기여하는 사항을 도표화한 것이다.
<표 2>생활세계의 구조적 성분의 유지를 위하여 재생산과정이 기여하는 사항
+--------------+-------------+------------------+---------------+
| | 문 화 | 사 회 | 퍼스낼리티 |
+--------------+-------------+------------------+---------------+
| |합의에 적합한 | |교육상 효율적인|
| 문화적 재생산 |해석적 도식 | 정 당 성 |행위규범 : |
| |(타당한 지식) | |교육의 목적 |
+--------------+-------------+------------------+---------------+
| 사회적 통합 | 의 무 |정당하게 질서화된 | 사회적 소속감 |
| | |인간 상호관계 | |
+--------------+-------------+------------------+---------------+
| 사 회 화 | 해석적 수행 |규범과 일치하는 |상호작용능력 |
| | |행위를 하려는 동기 |(개인적 정체성) |
+--------------+-------------+------------------+---------------+
하버마스에 따르면, 생활세계의 구조분화를 합리화로 기술하는 경우, 체계와 생활세계의 상호간섭이 갖는 역설적 본성을 분명히 볼 수 있고 사회병리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다. 합리화된 생활세계가 하부체계의 성립과정과 성장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러한 하부체계의 자립적인 명령들이 다시 생활세계 자체에 파괴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역설적이다. 일상언어의 부담을 코드화된 행위조정메커니즘이 덜어주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의사소통행위와 생활세계의 맥락과의 결합의 힘이 약화되는 것이다. 체계의 강제는 가능한 상호이해의 상호주관성의 형식을 점령해버리는 구조적 폭력이다.
이러한 구조적 폭력은 의사소통에 체계적인 제한을 가하게 된다. 즉, 생활세계가 합리화됨에 따라 체계가 생활세계의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 가능해졌고 이러한 체계의 부담경감(Entlastung)이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하부구조의 과잉부담(berlastung)으로 변화되어버렸다는 것이 현대의 파라독스이다. 자본주의 성장의 위기가 행정체계를 통해 처리되고 정치영역을 통해 생활세계로 이전되는 것이다. 이 과잉부담은 생활세계의 병리현상으로 나타난다. 체계통합의 문제가 사회통합의 위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생활세계의 물질적 재생산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체계이므로 물질적 재생산에 발생하는 장애는 체계불균형으로 나타난다. 체계불균형은 직접적으로 체계의 위기로 나타나든지 생활세계에 병리현상을 야기한다. 선진자본주의사회에서는 체계불균형이 시장기능에의 신뢰와 국가개입주의라는 상반되는 정책사이에서 나타난다. 관료적 사회주의에서는 계획통제와 분산화 사이와 투자지향적 경제계획과 소비지향적 경제계획 사이에서 생겨난다. 체계불균형은 기존의 체계로는 기존의 사회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 이러한 체계불균형은 경제와 국가의 수행능력이 사회의 요구수준에 현저하게 미치지 못할 때 조종위기로 된다. 체계불균형이 생활세계에서 갈등과 저항의 반작용을 불러일으킴으로 해서 생활세계의 상징적 재생산을 저해할 때에 '위기'로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위기를 직접 겪는 것은 문화/사회/퍼스낼리티의 생활세계의 구성부분들이다. 다음은 재생산의 장애가 생길 때 나타나는 위기현상을 도표화한 것이다.
<표 3>재생산의 장애가 생길 때 나타나는 위기현상들(병리현상)
+--------------+---------------+-------------+-------------+--------+
|구조적 | | | | 평가의 |
|구성요소 | 문 화 | 사 회 | 퍼스낼리티 | |
|상징적 | | | | 차 원 |
|재생산의 영역 | | | | |
+--------------+---------------+-------------+-------------+--------+
| 문화적 재생산 | 의미상실 |정당성의 상실|지향의 위기와 | 지식의 |
| | | |교육의 위기 | 합리성 |
+--------------+---------------+-------------+-------------+--------+
| 사회적 통합 |집단적 정체감의 | 아노미 | 소 외 |구성원의|
| |불확실화 | | |연대감 |
+--------------+---------------+-------------+-------------+--------+
| 사 회 화 | 전통의 파괴 | 동기의 상실 | 정신병리 |개인의 |
| | (단절) | | |책임능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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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의 조종위기를 생활세계의 여러 자원들로 배상함으로써 억제할 때 '생활세계의 병리현상'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사회의 아노미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 문화와 퍼스낼리티의 영역을 훼손하는 대가를 치르는데 그로 인해 제도적 질서를 유지하는데에 긴요한 정당성과 동기들이 안전하게 보호된다.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문화와 개인이 침해당하게 되는 것이다. 즉, 아노미 현상 대신에 소외현상과 집단적 정체감이 불확실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현상의 근원이 생활세계의 내적 식민화에 있다고 보며 이러한 현상들을 의사소통의 일상적 프락시스가 물화되는 과정이라고 특징지웠다. "내적 식민화.. 란 경제 및 국가라는 하위체계가 자본주의 성장에 따라 더욱 복잡해지고, 생활세계의 상징적 재생산에 더욱 깊숙히 침입하는 것을 말한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노동의 소외와 정치참여의 배제로부터 발생하는 긴장이 경제적인 재화나 국가활동의 형태로 보상되는후기자본주의사회에서 문제되는 것은 취업자와 소비자의 행위영역, 국가 시민의 행위영역, 국가관료기구가 상대하는 민원출원자(Klient)의 행위영역이 금전화되고 관료화된다는 데에 있다. 생활세계의 영역이 금전화, 관료화된다는 것은 체계에 의해 생활세계가 식민지화된다는 것이다. 이는 "문화적 재생산, 사회적 통합, 사회화등 (생활세계의) 중심영역이 경제성장의 소용돌이에 무방비상태가 되어 결국 법제화에 휩쓸려 가는" 문제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가치,규범,상호이해과정 등을 통한 사회적 통합에 기능상 필연적으로 의지하는 생활영역을, 이 영역이 경제및 행정이라는 하위체계로 추락하여 조정매체로서의 법을 통해, 생활영역에 역기능적인 하나의 사회화 원리로 변모하는 것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내는 일이다." 합리화된 생활세계에서는 체계의 요구가 의사소통의 구조와 충돌한다.
하버마스는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내적 식민지화'라는 이러한 문제를 자율적인 공공성[ ffentlichkeit]의 영역을 통해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공성의 영역이란 체계와 생활세계의 접점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자율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한 영역을 말한다. 공공성의 영역, 즉 공론영역에서는 여론과 의사형성이 제도화된다. "스스로 조직된 공론영역들은 권력과 지성적 자기제한의 영리한 결합을 발전시켜야 한다. ... 공론영역들의 강점은 오직 점진적으로 합리화된 생활세계의 자원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 그 사실은 특히 문화, 즉 학문과 철학의 세계해명적, 자기해명적 잠재력애 해당되며 엄격하게 보편주의적인 법사상과 도덕사상이 가지고 있는 계몽의 잠재력에 대해서도 타당하고, 심미적 현대의 급진적 내용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타당하다. 오늘날 사회적 운동들이 문화혁명적 특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공론영역을 활용하는 것은 대중매체에 의해 가능해진다.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는 의사소통 매체의 두가지 반대유형을 구분함으로써 대중매체가 이중적인 잠재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대중매체는 의사소통의 보편화된 형식에 속한다. 문자, 출판, 전자매체들에 의해 언어행위는 시공간의 제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의사소통행위에도 제한이 줄어들게 되었다. 대중매체는 의사소통의 과정을 시간적 공간적인 제한으로부터 해방시켜주며 즉, 의사소통의 과정을 전세계적으로 확대시키며 공공성(ffentlichkeit)이 형성되게끔 한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매체의 공공성이 의사소통의 가능한 여러 지평에 위계서열을 부과하여 조종하며 동시에 모든 제한을 제거한다고 본다.
그는 매체의 공공성의 이러한 양면성에서 양면적 잠재력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대중매체에는 의사소통의 흐름을 중앙집중화된 네트워크 속에서 중앙부에서 주변부로, 상부에서 하부로 일방적인 통로를 통해 보낼 때에 사회적 통제의 효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권위주의적 잠재력(퇴각의 잠재력)이 있다. 그렇지만 의사소통의 구조 자체에 해방의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권위주의적 잠재력만 발휘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판단능력이 있는 행위자들의 저항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가 사회화에 대하여 갖는 중요성에 대한 시사와 대중매체와 대중문화의 양면적인 잠재력에 대한 언급은 사적 영역과 공공성[ ffentlichkeit]을 합리화된 생활세계의 조명 속에서 보여준다." 문화적 현대성이 갖는 합리성을 경제체계, 행정체계의 존립,유지의 합리성과 동일시할 경우(체계와 생활세계를 구분하지 않는 경우), 즉 생활세계의 합리화가 사회체계의 복잡성의 증대와 구별되지 않는 경우에는 저항운동의 정신이 흐려지게(verdunkelen) 된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유대성의 사회통합적 힘은 체계통합적 조정수단인 화폐와 권력에 대항하여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은 하버마스의 일관된 주장이다.
"생활세계의 병리현상들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경향(Tendenzen)과 반대경향(Gegentendenzen)에 대한 선입견없는 연구가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한창 육성되던 시기에 뚜렷이 나타났던 계급간의 갈등이 사회복지국가적 민주주의에서는 제도적으로 조정되고, 그와 더불어 정지되었다고 해서 곧 저항의 잠재력이 통틀어 정지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항의 잠재력은 이제 종래와 다른 대열의 갈등에서 생성된다. 생활세계의 식민화에 대한 테제가 타당한 것이라면, 그 테제에서 갈등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바로 그 곳에서 저항의 잠재력이 생성된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생각은 독일의 현실적인 사회운동을 종합해서 고려하여 정리된 것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저항운동은 의사소통의 구조를 갖는 행위영역을 지키기 위하여 행위영역이 형식적으로 조직되는 것을 '억제'하고자 하는 데에 그 목표를 둔다고 한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식민화>에 대한 항거로 볼 수 있는 사회운동으로 청소년운동과 대안 운동을 든다. 그 구체적인 경우로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들고 있는 것은 녹색당문제, 과잉복잡성의 문제, 의사소통 내부구조의 과잉부담문제등이다. 녹색당문제는 환경문제이고 과잉복잡성의 문제는 핵문제, 군사력의 문제, 전체주의적 정보화의 위협문제등 개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과잉부담감을 일으키는 문제이다. 과잉복잡성의 문제의 경우에 일어나는 저항을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에 강요되는 추상화에 항거하는 저항이라고 특징지운다. "그 추상화는 아주 분화된 생활세계에서 조차 그 생활세계가 갖는, 감각적으로 구심점을 이루는 공간적, 사회적, 시간적 '복잡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생활세계 내에서 처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의사소통 내부구조의 과잉부담 문제는 문화적으로 빈곤해지고 일방적으로 합리화된 일상의 프락시스의 박탈현상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스러움의 문제이다. 이들 새로운 갈등은 체계와 생활세계가 접선하는 곳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새로운 갈등은 ..... 문화적 재생산의 분야, 사회통합의 분야, 사회화의 분야에서 생겨난다. 그 새로운 갈등은 하부제도적인 저항의 형태로 반출되며(ausgetragen) 어떤 경우에든 의회외적인 저항의 형태로 반출된다. 의사소통의 구조를 갖는 행위영역의 물화는 근본적인 결함속에서 반영되는데, 그 물화는 화폐매체나 권력매체를 통해서는 만회할 수 없다. 여기서는 사회복지국가가 베풀어주는 보상(Entsch digung)이 우선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위협받고 있는 생활방식(Lebensweisen)을 방어하고 회복하는 일, 또는 변혁된 생활방식을 관철하는 일이 우선 중요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새로운 갈등은 '분배의 문제'에서 점화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형태의 문법에 대한 질문에서 점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항하여 "대안으로서 제기되는 프락시스는 직업상의 업무가 이윤의존적으로 도구화되는 것에 반대하며, 노동력이 시장의존적으로 동원되는 것에 반대하고, 경쟁과 업적에 대한 압박이 국민학교에까지 연장되는 것에 반대한다." 그리고 행정수요자인 국민이 관공서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도 개방적이며 참여를 유발하는 것으로서 기능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하버마스는 체계의 자기동학을 제한하기 위하여 생활세계 자체에서부터 산출 발전시키는 반제도들에서 해방의 계기를 본다. 그 이유는 "반제도들이 형식적으로 조직된 행위영역의 한 부분을 탈분화시키고 조종매체에 의해 점유되는 것으로부터 막아주며 이렇게해서 '해방된 영역'을 대등한 관계 속에서 행위를 수행케 하는 의사소통의 기제에로 되돌려 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제도의 확립은 공공성에서 가능해진다. 하버마스는 자신의 이러한 기대가 혹시 비현실적일지라도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하버마스는 우리가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부분은 공공성 뿐이라고 생각하는 셈이다.
3.패러다임 전환의 의미
하버마스 스스로 밝히고 있는 바대로 "의사소통행위이론은 낡은 비판이론이 아직도 얽매여 있던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근거가 없게 된 역사철학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생산력이 하나의 객관적으로 폭파시키는 힘을 계발시킨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버마스는 이를 역사철학적 전제에 고착되어있다고 표현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가 태생적으로 고착되어 있던 역사철학적 전제는 원시사회-계급사회-무계급사회로의 역사발전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리라는 전제이다. 그리고 이 역사철학적 전제는 하버마스가 보기에는 헤겔의 목적론적 역사철학의 유물론적 표현에 그치는 경향을 보여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은 '역사적 상황 자체가 성숙하게 되면 다다르는 가능성을 의식화시키는 것'에 국한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판은 시대가 역사적으로 그때그때마다 갖는 규범에 스스로를 내맡길 수밖에 없다. 즉, 비판의 규범적 기초가 없는 것이다.
역사를 합리화와 물화의 이중과정으로 보고 물화의 과정만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와 갈라지는 부분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체계의 모순을 생활세계내의 갈등으로 번역해냄으로써 이론적 성과를 거두었다. 마르크스의 비판의 기준은 구체노동이 살아움직이는 생활세계인 셈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생활세계는 따지고 보면 완전히 물화된 사회였던 것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전통 이후의 단계에서 문화, 사회, 퍼스낼리티의 분리가 근대사회로 성장해가고 그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 따르는 고통은 개인화의 과정으로 간주되지 물화의 과정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개인화의 과정 마저도 물화의 과정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합리화와 물화의 동시적 진행과정하에 있다. 사회의 분화발전과정은 생활세계와 체계의 합리화 과정이다. 이는 의사소통행위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이성의 잠재력이 점차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이다. "생활세계의 합리화과정은 의사소통행위 속에 있는 잠재적 합리성이 실현되는 과정이다." 생활세계의 합리화과정을 밝혀냄으로 해서 하버마스는 자기파괴의 위협을 받고 있는, 그리고 비판의 규범적 척도를 확보하기 위해 보존되어야 할 현대성의 규범적 내용을 역사철학의 도움없이 설명할 수 있다.
현대성의 규범적 내용이란 현대성에는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합리성과 같은 긍정적 측면과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라는 부정적 측면이 함께 들어 있어서 스스로에 대한 자기비판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하버마스는 현대성에 규범적 내용이 있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마르크스나 1세대 비판이론가들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하버마스가 생각하는 마르크스의 한계는 현실 사회의 분석과 유토피아의 기획을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하여 비판의 규범적 기초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해내지 못한 것이며 1세대 비판이론가들의 한계는 비판의 규범적 기초를 찾지 못하고 비관주의에 빠져 버린 것이다.
합리화의 문제를 이성의 도구적 성격에서 찾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경우엔 계몽을 가능하게 한 이성, 즉 도구적 이성에서 비판의 토대를 찾아야 하는 아포리에 부딪쳤다. 자유로운 사회의 설에 계몽적 이성이 필요한데 그 계몽적 이성이 낳은 문제를 비판하다가 이성 자체에 대한 회의로 빠져버렸던 것이다. 더구나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가 그 자율성을 상실하고 대중문화의 저질화된 형태속에서 경제적 행정적 톱니바퀴 속으로 동화되어 버렸다는 분석은 그들을 비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게 하였다. 그렇게 되면 비판적 사고마저 물화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도구적 이성비판으로 아포리에 빠진 데 반하여 하버마스는 기능주의 이성비판으로 비판의 규범적 토대를 확보한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은 기능주의 이성 비판으로 도구적 이성 비판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기능주의 이성은 목적합리성만을 이성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편협한 이성이다. 기능주의 이성을 비판하는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는 생활세계를 물화과정이 단순한 반사작용으로만 등장하는 영역으로 보지 않는다. 즉, 생활세계를 물화과정이 소수독점경제와 권위주의적 국가기구에서부터 시작된 억압적인 통합현상으로 나타나는 영역으로 보지 않는다. 소외를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내적 식민지화'로 파악하면 물화의 정도가 "노동력이 상품이 되는 사회에서는 불가피하다는 식으로 파악됨으로써 체적으로 그 정도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는 외개념과는 달리 생활세계에서 언어적 의사소통이 손상된 정도에 따라 구체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래서 물화의 문제는 의사소통을 통하여 체계의 논리가 생활세계에 침입하는 데에 저항하는 실천적 역량이 있으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된다. 체계와 생활세계의 2층위 사회 이론에서 물화의 문제가 체계와 생활세계사이의 관계정립의 문제, 경계설정의 문제로 되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본 것처럼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화과정에서 해방(저항)의 잠재력과 퇴각의 잠재력이 함께 풀려나온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해방의 잠재력, 저항의 잠재력은 오늘날과 같이 국가의 역할이 증대된 상황에서는 생활세계에서 감지된 문제를 정치적 여론화과정을 거쳐 정책에 반영시키는 것으로 육화된다. 하버마스는 민주주의의 긍정적인 힘을 믿는다. 하버마스는 자본주의의 체계명령을 조정하는 것은 '여론영역의 힘'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전략을하버마스 스스로 급진민주주의 기획이라고 칭한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의사소통행위이론을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는 자신의 비판적 사회이론이 비판적인 이유는 "이 사회가 문화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학습의 잠재력을 끝까지 유용하게 다 쓰지 않고 걷잡을 수 없이 증대하여 가는 잡성(사회의 분화과정-필자)에 스스로를 내맡겨버렸다는 사실"을 파악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현대성의 규범적 내용을 보존하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문화가 현대성 속에서 스스로의 합리성의 구조를 산출해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마르크스가 문화의 역할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현대과학, 실증적 법률, 윤리학, 자율화된 예술과 제도화된 예술비판등을 통해 과학, 도덕, 예술이 전문가 문화 즉, 분화된 합리성의 결정체로 발전해왔음을 알 수 있다. 러나 이 분화된 합리성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는 포괄적 합리성의 세 면이므로 그 통일성을 놓치면 안된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현실주의적이며 참여적인 예술과 더불어 전위예술에 의해 가능케 된 풍부한 형태를 유지하면서 다시금 인식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들이 예술에서 차도 바람직한 역할을 할 있게끔 된다. 이는 마치 철저하게 분화되어 나온 이성의 동인들이 그러한 반대운동(Gegenbewegungen)들 속에서 하나의 통일성(Einheit)을 암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때 통일성은 세계상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단지 전문가 문화의 이면에서 물화되지 않은 의사소통의 일상적 실천 속에서만 다시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의사소통의 일상적 실천 즉, 물화되지 않은 공공성의 영역에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잠재력에서 통일성의 확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2층위 사회이론으로 생활세계를 개념화할 수 있었기에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이다. 하버마스는 자신의 비판적 사회이론이 체계와 생활세계의 관련성을 올바로 파악해서 현대성의 긍정적 측면을 밝힌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의 생산패러다임은 (하버마스의 용어로는) 체계가 일으키는 문제에만 주목하였기 때문에 생활세계에 있는 저항의 잠재력을 보지 못한 것이다. 마르크스 뿐만아니라 현대사회를 분석하고자 시도하는 여러 연구 입장들은 대부분 체계와 생활세계를 충분히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사회를 체계로만 바라보면 사회적 리화가 갖는 파라독스를 해명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체계이론의 입장에서 볼 때 사회는 체계의 복잡성증대로만 파악되기 때문이다. 즉, 체계이론은 생활세계를 단지 익명적으로 조절되는 다양한 하부체계들의 하나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체계이론은 사회통합적 성과와 체계통합적 성과를 기능적인 등가물로 다루면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는 기준을 없애버리는데 그러한 기준이 없으면 합리화된 생활세계를 희생함으로써 성취된 복잡성의 증대와 관련해서 생활세계의 희생이 희생으로 규정될 수 없게 된다. 체계복잡성은 전통적인 생활형태를 휩쓸어싸버릴 뿐만 아니라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하부구조까지도 침범하는데 체계이론으로서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체계와 생활세계의 분화를 보지 못하고 현재상태를 체계가 일으키는 문제 즉, 소외, 물화의 상태에 있다고 파악하면 비판의 규범적 척도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자기증식이 체계와의 연계에서 빚어내는 인과관계를 신적 총체성으로 파악하였다. 그 결과 체계이론적으로 서술할 있는 모든 것들을 일제히 살아있는 노동의 물화과정으로서 판독해야 한다는 ..... 요구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자본주의적 경제체계에서 계급관계가 새롭게 편성되었을 뿐만아니라 체계분화가 매우 진보된 수준까지 진척되었음을 정당하게 인식한다면, 그와 같은 무리한 요구를 더이상 할 수 없게 된다." 사회를 체계와 생활세계로 보는 하버마스의 관점에서 물화는 '의사소통적 하부구조를 병리적으로 기형화시키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자립적인 하위체계의 요구가 생활세계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며, 금전화와 관료화라는 방법을 통하여 강제적으로 의사소통행위를 형식적으로 조직화된 행위영역에 동화시키는 것이 물화인 것이다. 이와 같은 '체계의 확장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하버마스가 제안하는 것은 체계와 생활세계간의 교류관계에 체계의 침입을 막는 저지선을 구축하고 감지장치를 설치함으로써 생활세계의 관심사들이 보존되고 생활세계의 욕구들이 제도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 이론의 강점은 마르크스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자본주의의 지속, 즉 후기자본주의의 존속가능성이 하버마스의 이론으로는 설명된다는 점이다. 임노동과 자본의 관계로 요약되는 초기자본주의 사회에는 정치경제학비판이 유효할 수 있지만 국가가 경제체계에 개입하며 노사간의 정치적 타협으로 노동-자본간의 모순이 완전히 은폐되어 버리는 즉, 계급타협으로 계급이 더이상 유의미 하지 않게 된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마르크스의 생산패러다임이 설명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하버마스는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할 수 있는 틀거리로 체계와 생활세계의 2층위 사회이론을 내놓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취업자와 고용주,행정수헤자와 시민의 네가지 역할을 축으로 하는 사회이다. 그런데 하버마스의 입장에서 볼 때 마르크스는 노동자-자본가 즉, 취업자-고용주라는 역할에 국한해서만 사회를 분석한 셈이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는 체계의 명령이 자유와 정의를 보장한다는 공동체의 근본규범들과 근본적으로 조화될 수 없음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법칙들은 부르주아적 이상을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계급구조를 유지하는 잠재적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관점에서 보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세계를 사회문화적 상부구조로 평가절하하면서 사회주의 사회에 들어서야 비로소 체계가 생활세계에 씌워 놓은 마법적인 힘이 분쇄될 수 있고 상부구조의 토대의존성이 해소될 수 있다고 본 셈이다.
그러나 하버마스에서는 체계 자체의 작동원리의 힘은 그냥 인정해버리는 문제점도 간과할 수 없다. 하버마스의 개념화에 따르면 체계의 문제는 생활세계를 침식하는 문제일 따름이다. 결국 개인의 행위지향이 체계의도에 의해 묵살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면 행위지향에 이미 체계논리가 깊이 뿌리 박혀 있어서 체계와 무관한 행위지향이 가능하지 않다면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생활세계가 이미 침식될대로 침식되어서 공동화되어 버렸다면 하버마스가 말하는 저항의 잠재력은 발휘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생활세계가 푸코가 말하는 원형감옥이지 않은가 하는 문제제기가 가 능하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생활세계의 개념에 따른다면, 생활세계의 저항력이 그러한 완전한 식민화를 가능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또, 체계자체를 거부하지 않는 하버마스의 이론에서는 체계의 문제가 항상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버마스의 해결책으로는 생활세계에서 이러한 문제를 방어해내는 것에만 치중하게 된다. 그래서 하버마스의 해결책은 너무나 수동적이고 방어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류는 체계의 합리화가 가져다주는 편리함 즉, 의사소통을 위한 비용의 최소화라는 장점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하버마스의 해결책이 소극적이라고 하더라도 실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Ⅴ.결 론
사회철학의 주된 관심사는 되기 쉬운 방향과 되어야 할 방향 사이의 '각도줄이기' 문제이다. 이는 결국 이성을 사회에 실현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이성적인 사회건설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고 이성비판이 이성부정으로 나아가는 시류속에서도 '이성적인사회의 건설'이라는 기획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버마스를 주목하게 된다. 하버마스는 도전받는 현대성을 옹호하는 철학자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이론가인 것이다.
현대는 과학, 도덕, 예술을 발전시킴으로써 합리화의 진전을 이룬 시대이다. 현대 사회는 전체성에 의한 파악이 불가능하게 분화된 사회이면서 분화로 인한 합리화라는 긍정적 계기를 가진 사회이다. 현대의 특성은 '분화'인 동시에 '분화에 의한 발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를 이해할 때 분화에 의한 물화에만 주목하면 비판의 규범적 토대를 확보할 수 없다. 또, 분화의 병리현상에만 주목하고 그 병리현상을 야기시키는 것이 이성이라 해서 이성자체를 포기하는 태도로는 현대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하버마스는 비판되어야 하는 것은 이성의 특수한 국면의 지나친 팽창 즉, 특정한 형태의 합리성의 확대이지 이성 그자체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버마스가 비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목적합리성이며,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포괄적 합리성인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다.
현대의 특성은 분화로 인한 병리현상 및 분화에 의한 발전인데 이 발전의 계기를 보지 않고 병리현상만을 주목하다보면 이성의 포기나 부정으로 나아가서 그 발전의 성과마저 놓치게 된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 분화의 발전적 계기를 포착하지 못하면 녹색주의의 방식대로 현대의 발전의 성과 자체를 포기하고 원시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게 되는데 하버마스는 이를 타당하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 사회의 분화는 피해야만 하거나 배척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의 분화로 축적된 인간의 능력을 이성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그가 스스로 설정하는 과제이다.
현실사회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하버마스는 그러한 다원성이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분화된 계기임을 주장한다. 이렇게 사회 합리화에 긍정적인 계기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즉, 현대성의 규범적 내용을 밝히기 위해, 그리고 초기 자본주의와는 그 성격이 다른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사회에 대한 생산패러다임의 분석에서 의사소통 패러다임의 분석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패러다임 전환을 하면 현대의 병리현상을 비판할 수 있는 규범적 척도를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의사소통 패러다임에서는 병리현상을 생활세계의 상징적 재생산과정의 물화로 개념화하고, 생활세계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병리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이론적으로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에서 저항의 잠재력을 확보한다. 또, 합리화의 과정에서 의사소통적 이성의 잠재력이 전개되는 동시에 왜곡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진화과정을 물화의 과정인 동시에 합리화의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의사소통적 이성의 잠재력이 사회분화과정에서 왜곡되기도 하고 전개되기도 하는 양면성이 있으므로 그 해방의 잠재력을 확대시켜야 한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결론이다.
그는 현대의 다원성을 이성의 분화된 계기들로 보아야만 진정한 의미의 이성비판과 시대비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질적인 시대비판이 가능하려면 역사의 발전에 의해 축적된 잠재력을 이성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목표와 방법을 마련하기 위하여 생활세계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보는 셈이다. 즉, 해방의 가능성은 생활세계의 합리화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같이 생활세계를 체계의 문제가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영역으로만 생각하면 이론적인 비판의 규범적 토대는 확보되지 않는다. 또, 녹색주의와 같이 생활세계의 합리화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전면적 물화를 극복할 방법은 모색될 수 없을 것이다.
하버마스는 사회를 구성하고 역사를 이루어온 인류가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합리성의 힘을 믿는 철학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도 생활세계에서 찾을 수 있는 저항의 잠재력은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물화의 문제를 극복하고 이성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정교한 개념틀로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를 분석한 마르크스의 이론도 인류의 축적된 합리성의 힘에 의한 가능한 것이었다. 자기 손과 발을 묶는 우매한 행위를 하는 듯이 보이는 현대의 인류도 인류 자체의 합리성의 잠재력이 소진되어서가 아니라 소수 위정자의 왜곡된 욕구때문에 자기파괴적인 행로를 걷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현대를 사는 우리는 자율적인 공공성의 확보로 인류의 행로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 인류의 행로에 평형추를 놓으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정보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탈현대의 현실에서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에게 미래의 정보화사회는 사실 두려움의 대상이다. 정보화를 가져오는 첨단과학기술은 사회구성원 전체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소수 자본가의 통제를 받고 있다. 과학기술에 대해 이성이 그 통제력을 상실한 것은 사실 오래된 일이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대중매체의 양면적 잠재력에서 공공성의 확보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정보화사회에서 컴퓨터 통신은 대중 매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독재의 횡포가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 널리 알려지고 개별국가의 정보통제도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서 와해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이제는 국가의 보안통제라는 것이 사실상 의미가 없게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면을 본다면 하버마스가 생각하는 대중매체의 저항의 잠재력이 긍정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하버마스가 생각하는 공공성에 의한 저항의 잠재력이 정보통제권을 자본가가 가지는 상황에서도 확보될 수 있는지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정보 통신공간에서 체계의 명령과 요구는 더욱더 유연하게 생활세계를 침범해 들어올 위험이 있다. 이러한 측면에 대해서는 정보화사회를 사는 우리가 더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하버마스가 생각하는 공공성과 현실의 공공성이 동일하지 않다는 비판은 하버마스에게는 적절하지 않다. 하버마스는 공공성의 의미와 역할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자 노력한 철학자이다. 하버마스 사회철학의시사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자율적인 공공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사회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궁극목표가 인간의 자율과 책임에 기반한 올바른 사회질서, 이성적인 사회의 건설에 있다면 그 결과로서 나타난 사회이론은 현실의 사회질서에 대한 비판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하버마스는 이론적 작업과 정치적 논설에서 공공성[ffentlichkeit] 형성기제, 시민사회론, 국가 정당성에 관한 논의로 실천의 문제에 관심을 둔다. 자본주의적 경제논리와 국가의 행정작용이 과다하게 팽창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팽창에 대항하여 이성적 사회질서를 지향하는 정치적 실천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한다는 것은 하버마스 사회철학의 공헌이다. 현대사회에서의 물화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고 실천을 지향하는 이론적 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의 작업은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 논문에서는 생산패러다임과 대비시켜서 하버마스의 사회철학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필자는 하버마스의 이론적 작업을 "마르크스의 의도의 잔여(Reste)를 구출하려는 시도"의 하나로 생각한다. 또, 하버마스는 "사적 유물론의 근본전제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경제적 기능주의"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하버마스는 역사유물론의 재구성 단계를 거치면서 이러한 의도를 드러냈고 의사소통 패러다임의 사회이론에서도 이 의도를 놓지 않는다. 다만 사회에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은 근원철학적 전제에 고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근원철학과 상대주의의 양극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이러한 생각의 근거를 충분히 밝히지 못하였다. 이는 필자가 앞으로 해나가야 할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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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의 합리성과 교육
Ⅰ. 머리말
Jurgen Habermas(1929-)는 서구 계몽주의의 전통을 계승한 독일의 지성계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인문사회과학분야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서 그의 명성은 개별국가와 대륙의 경계를 넘어 그야말로 세계적인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는 논리의 일관성과 사상의 풍부성에서 세계의 존경받는 지식인이기도 하다.
하버마스는 우리에게 이제 낯선 이름이 아니다. 1994년《교수신문》이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저명한 교수 18명에 실시한 '세계석학 선정'에서 최다득표(12표)했을 정도로 친숙하다. 특히 1996년 봄(4. 27 - 5. 12)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경향 각지에서 다양한 주제로 강연과 워크숍을 주도한 바 있다. 한국방문 동안 그가 행했던 강의와 토론, 인터뷰와 신문보도 그리고 뒷이야기를 모은『현대성의 새로운 지평』에서 편찬자 한상진은 그때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르겐 하버마스 교수는 67세의 나이에 1996년 4월말부터 2주간을 한국에 체류하면서 실로 많은 일을 했습니다. 7개의 다른 주제로 강의를 했을 뿐 아니라 하루 온종일의 워크숍을 주도했으며, 포항제철, 해인사, 광주 망월동 묘지 등에서 상념에 사로잡혔고, 서울과 대구, 광주에서 수많은 지식인과 만나 대화를 나눈 후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라 하더라도 그만큼 많은 일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의 건강이 부럽고 무엇보다 왕성한 지식욕, 타문화에 대한 감수성, 지식인으로서의 소명의식과 앙가주망이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것 같습니다.1>
하버마스의 사상을 관통하는 핵심은 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그는 인간해방과 정의로운 사회건설을 위하여 비판적 사고활동이 갖는 잠재력에 주목한다. '어떤 불신과 불리한 조건에서도 사회통합을 향한 합리적 토론은 포기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한다. 합리적 이성에 바탕을 둔 대화를 통하여 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이성적 낙관주의를 견지하고 있다. 김창호 기자와의 서면 회견에서 하버마스는 이성에 대한 자신의 신뢰의 근거를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는 이성이 역사 속에서 반드시 관철된다고 믿는 헤겔류의 역사철학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온갖 저항과 미몽에도 보다 나은 것으로 향한 방향 전환이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나는 물론 이성적 낙관주의자입니다. '불균형적 발전'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적어도 우리가 이성의 빛줄기(閃光)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는다면 지성인으로서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시민들을 행동하도록 유도할 수는 없습니다. 이성은 항상 의사소통적 일상실천 속에서 빛을 발하게 마련입니다. 일상적인 행위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원칙적으로' 속이고 기만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제나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묘한 책략이 개입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에 근거해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우리들의 행위․의견, 그리고 기대들을 뒷받침할 수 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우리의 잘못을 통찰할 수 있는데 이것이 일상적 실천에 뿌리박은 의사소통적 이성입니다. 이런 이성은 논증과 공개적인 토론에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2>
교육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지만, 하버마스는 교육학자가 아니다. 하버마스는 인간의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으로 이성을 확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그의 사상은 의사소통행위이론 또는 담론이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 그는 프랑크푸르트대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합리성에 기초한 보편주의적 이념을 전파하고 있다.
합리성은 교육활동의 기본 원리 가운데 하나이다. 합리성 외에도 도덕성, 자율성, 창조성 등의 원리도 있다. 그렇지만 다른 원리들을 정당화하는 토대라는 점에서 합리성이야말로 교육규범의 핵심이다. 따라서 교육이란 무엇보다도 합리성에 토대하여 계획되고 수행되고 평가되는 규범적 사회활동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합리성의 개념화 작업은 교육철학의 중요한 과제이다. 교육이론과 실천을 바르게 안내하고 교육적 판단의 준거로 사용할 만한 합리성의 원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버마스가 제시한 합리성 원리에 주목하게 된다. 하버마스의 합리성은 보편적이고 규범적인 토대 위에서 확립된 것이므로 교육적 원리로서 적용할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3>
합리성을 중심으로 한 하버마스의 아이디어들은 1980년대 이후 교육학적 관점에서 자주 적용되고 검토되어 왔다.4> <Dissertation Abstract International>를 살펴보면, 교육분야에서 하버마스의 이론을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이 1978년부터 1988년까지 14편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합리성을 교육철학적으로 검토한 필자의 논문(1991년)은 우리나라에서 하버마스를 연구하여 취득한 최초의 박사학위논문이었다.
이 글은 하버마스의 이론체계에서 근본이 되는 합리성을 규명하고 이를 교육적으로 해석하여 합리적 교육이론과 실천을 위한 함의를 제시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째, 하버마스의 사상적 배경으로서 생애와 학문적 활동을 알아본다. 둘째,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토대를 확립하기 위해 시도한 인식론적 검토와 실천철학적 접근을 고찰한다. 셋째, 그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원리가 지닌 교육적 의미와 가치를 논의한다.
주1) Habermas / 한상진, 현대성의 새로운 지평, 나남출판사, 1996, 13-14쪽.
주2) 중앙일보(1996. 4. 28).
주3) Hirst, 1983, 28쪽.
주4) <Educational Theory>, <Philosophy of Education>, <Educational Researcher>, <Cambridge Journal of Education>, <Harvard Educational Review>, <Studies in Art Education>, <Journal of Curriculum Theorizing> 등의 학술지.
Ⅱ. 생애와 학문활동
하버마스는 1929년 6월 18일 서부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나 굼머스바흐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곳 상공회의소 소장으로 일했다. 하버마스는 2차 대전 이후 대학교육을 받은 전후 세대에 속한다. 1949년부터 괴팅겐대학, 쮜리히대학, 본대학 등에서 철학․역사학․독일문학․경제학․심리학을 수학했다.
1954년 본대학에서「절대자와 역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956년까지 자유기고가로서 활동했다. 1955년 우테 베셀회프트(Ute Wesselhoeft)와 결혼했다. 1956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회조사연구소에서 아도르노(T. W. Adorno: 1903-1969)의 조교로서 비판이론을 계승하게 된다.
독일연구협회(DFG)로부터 교수 자격논문의 작성을 위한 장학금(1959-1961년)을 받았고, 1961년「공개성의 구조변화」라는 논문으로 마부르크대학에서 교수자격을 획득하고 사강사로 있다가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철학과 조교수로 취임했다. 1964년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 - 1973)의 후임으로 철학과 사회학 교수로 취임했다.
이로써 그는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등이 이끌었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60년대말 학생운동이 독일 사회를 휩쓸 당시 그는 이 운동의 이론적 지주였다. "얼치기 마르크스가 되기보다 하버마스에게 배우라"는 구호가 등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급진 학생운동을 '좌익 파시즘'으로 규정하자, 과격한 학생들은 반(反)하버마스 유인물을 뿌리고 수업중인 스승 아도르노에게 테러를 가하는 사태가 생겼다. 결국 이들과 논쟁을 끝으로 1971년 프랑크푸르트 대학 교수직을 버렸다.
1971년 슈탄베르크에 막스 플랑크연구소(과학 기술 세계의 생활조건을 탐구하는 연구소)를 창설하고, 이곳의 소장으로 지낸 시기(1971년-1982년)는 '언어학적 전회(轉回)'로 명명된 그의 연구가 꽃핀 시절이었다.5> 1973년 슈타가르트시가 수여하는 헤겔상을, 1976년 프로이트상을, 1980년 프랑크푸르트시가 수여하는 아도르노상을, 그리고 1995년에는 야스퍼스상을 수상했다.
1981년에는《Praxis International》이라는 저널을 창간하여 참여 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합리성의 논리적인 토대를 개발했다. 1983년 다시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사회학 철학교수로 돌아왔다. 이와 함께 뮌헨에 있는 심리학 연구를 위한 막스 플랑크 연구소 객원 연구원으로 취임했다. 1989년 함부르크대학에서 시작하여 국내외의 유수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6>
1993년 정년 퇴임한 하버마스는 현재 프랑크푸르트대학의 명예교수, 미국, 유럽, 벨그라드 학술회원, 영국과학원의 멤버로서 세계각처로부터의 초청 강의를 하면서, 합리성에 기초한 보편주의적 이념을 전파하고 있다. 현재 뮌헨 근처 슈탄베르크에서 부인 우테와 함께 살고 있는데, 딸 레베카는 역사학자이다.
하버마스의 저서와 논문은 하나 하나가 문제작이다. 그는 '책상에 앉아서 글 쓰는 것이 취미'라고 말할 정도로 학문적 연구와 저술에 왕성한 의욕을 보여 주었다. 그는 지난 40여년 동안 인문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주요 쟁점을 대상으로 정력적인 학술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만큼 다작에 논쟁을 즐기는 학자도 없다. 청년시절 하이데거와의 논쟁(1953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전후 독일 안팎의 주요 논쟁에서 위르겐 하버마스의 이름이 빠지는 법이 없었다. 포퍼 및 알베르트와의 실증주의 논쟁, 가다머와의 역사성 논쟁, 급진 좌파와의 대학정책 논쟁, 니클라스 루만과의 사회체제 논쟁, 네오 맑시스트들과의 국가론 논쟁, 영미 계통 분석철학자들과의 언어성격 논쟁, 보수 역사학자들과의 역사가 논쟁, 프랑스 철학자들과의 포스트모던 논쟁 등. …… 논전들에서 그는 항상 대세를 가르고 나가는 주역이었다. 동시에 상대방의 입장을 적절히 수용, 자신의 이론의 폭을 넓히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7>
이미 1984년 Suhrkamp 출판사에 의해 하버마스 전집 15권이 출간된바 있다. 주목받은 저서들을 발간된 순서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절대자와 역사, 1954』,『학생과 정치, 1961』,『공론 영역의 구조변환, 1962』,『이론과 실천, 1963』,『사회과학의 논리, 1967』,『이데올로기로서의 기술과 과학, 1968』,『인식과 관심, 1968』,『독일 사회학의 실증주의 논쟁, 1969』,『저항운동과 대학개혁, 1969』,『철학적․정치적 프로필, 1971』,『후기 자본주의의 정당성 문제, 1973』,『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을 위하여, 1976』,『의사소통과 사회진화, 1979』,『의사소통 행위이론, 1981』두 권,『도덕의식과 의사소통행위, 1983』,『의사소통 행위이론의 예비적 연구와 보충, 1984』,『현대성에 대한 철학적 담론, 1985』『새로운 불투명성, 1985』,『자율성과 결속력, 1986』,『일종의 손해청산, 1987』,『탈 형이상학적 사유, 1988』,『절차로서 국민 주권, 1989』,『만회하는 혁명, 1990』,『사실성과 타당성, 1992』등 30권이 넘는다.8>
주5) 김창희, "전후 서구지식인 사회의 길라잡이", 현대성의 새로운 지평, 1996, 339쪽.
주6) Walter Reese-Sch fer / 선우현, 하버마스 - 철학과 사회이론, 거름, 1998, 210-213쪽.
주7) 한상진, 338쪽.
주8) Walter Reese-Sch fer, 1998, 192-207 및 선우현, 1996, 252쪽.
Ⅲ.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구성논리
1. 성립조건
⑴ 목적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
목적합리성의 한계: 합리성 이론마다 거의 공통적으로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주관적 합리성과 객관적 합리성, 형식적 합리성과 실질적 합리성, 과학적 합리성과 도덕적 합리성 목적합리성과 가치합리성 등으로 주장들이 서로 대립된다. 예를 들면 Weber의 경우 과학적 합리성 또는 목적합리성에 치우쳐 있다.9>
그에게 있어 행동의 합리화란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묵인하는 것'을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 사려 깊게 정세에 적응하는 것'으로 대체하는 일을 가리킨다.10> 심사숙고하여 계획되고 수행된다는 의미로 합리적 행동은 '목적합리적 행동'과 '가치합리적 행동'을 포함한다. 특히 그는 수단과 목적의 관점에서 행동의 가능한 결과를 의식적으로 숙고하여 행동하는 인간의 지성적 경향을 가리켜 '목적합리적'이라 하고, 어떤 행동 고유의 정당성이나 본질적 가치에 관한 의식적인 신념을 전제하는 '가치합리적'인 것보다 우선시했다.11> 하버마스는 이와 달리 목적합리성의 한계를 규명하고자 했다.
〈인간행동 분류표〉
위의 표12>에서 목적합리적 행동은 도구적 행동과 전략적 행동이다. 행동상황으로 전략적 행동은 '사회적 맥락'에, 도구적 행동은 '비사회적 맥락'에 관련되며, 전자는 '합리적 선택의 규칙'이고 후자는 '기술적 규칙'으로 구분된다.13> 또한 사회적 행동을 '성공지향적 행동'과 '이해도달지향적 행동'으로 나눌 경우, 성공지향적 행동은 목적합리적 행동이다.14> 따라서 '목적합리적 행동'이란 전략적 행동(사회적 상황에서)과 도구적 행동(비사회적 상황에서)의 차원에서 성공을 지향하는 방식의 행동을 말한다.
베버에 따르면, 합리화란 (1)도구적 행동준거가 생활영역에 침투되고 기술화가 이루어지는 것과 (2)합리적인 결정 아래 있는 사회영역이 확장되는 것을 말한다.15> 이러한 사회합리화란 무엇보다도 과학기술의 합리화와 제도화를 가리킨다. 하버마스는 자연의 통제와 그 결과로 풍요를 가져온 과학기술에 의한 합리화가 인간이 자유를 실현할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해방을 실현하는 필요조건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과학 기술적 합리성을 합리성 개념 그 자체로 환원하는 것은 단호하게 거한다. 목적합리성은 단지 제한된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하버마스가 목적합리성에 한계를 설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목적합리성의 추구(예컨대 생산력의 향상)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껏해야 '좋은 삶'에 이바지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둘째로 목적합리성의 추구는 이른바 '합리화의 역설'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마르쿠제가 '기술적 이성의 개념 자체는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다'16>는 말로 주장한 바 있거니와, 오늘날 목적합리적 행동양식이 우리의 삶의 영역으로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 도구적 이성이 만연되고 기술관료적 지배가 확대되는 가운데 규범적 의사소통의 영역인 생활세계가 목적합리적 행동체계에 암암리에 침식되어 가는 경향이 합리화의 역설이다. 이런 현상은 결국 과학 기술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구된 합리화가 만들어 낸 사회적 위기로 간주된다.17> 하버마스는 '도구적 합리성의 자율화' 또는 '생활세계의 내적 식민지화'18>라고 부르기도 했다. 과학기술의 합리화가 생활세계를 합리화하는 것이 아닌 만큼 목적합리성은 더 이상 합리성 자체로 환원되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목적합리성의 가치가 규범적 생활세계의 상호주관적 차원에서 확보되는 합리성(의사소통적 합리성)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우선성: 합리성은 원칙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립된 범주들을 포함하여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독립된 범주는 (1)목적합리적 행동체계와 (2)사회문화적 생활세계19>를 가리킨다. 하버마스가 개념화한 합리성의 구조는 '목적합리적 행동'의 확대와 '의사소통적 행동'의 확장 모두를 포함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논증하려는 바는 후자의 근본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자의 한계를 규명하는 데 있다.
의사소통적 행동이란 '관련 당사자들의 행동이 성공을 위한 자기중심적인 계산이 아닌 이해도달지향적 행동을 통해서 조정되는 행동'이다.20> 의사소통적 행동에서 달성하려는 합리성은 행동하고 담화하는 주체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목적합리성과 구별된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목적합리성보다 우선시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훌륭하고 참된 삶'(good and true life)21>의 규범이 존중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적 합리성 이론을 제시한 것은 이러한 삶의 본질을 밝히고 그 실현방안을 수립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목적합리적 행동보다 의사소통적 행동이 합리성의 본래적 의미에 보다 적합한 것으로 이해한다. 의사소통적 행동과 달리 목적합리적 행동에 있어서 규범적 타당성은 보류되는 경향이 있으며 실재로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버마스가 행동유형을 분석한 것은 전략적 행동을 대화적 논의의 수준에서 문제삼을 수 있도록 제도화함으로써 규범적 타당성과 진리를 회복하려는 데 뜻이 있었다.
둘째로 사회진보를 위한 비판과 계몽의 과정으로서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개념화는 생활세계의 합리화를 위한 비판과 반성을 회복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대화공동체를 실현하려는 노력의 성과이다. 이와 달리 과학과 기술은 현실의 그릇된 적법성을 밝히고 비인간적 억압을 드러내는 '비판적 표준'으로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로서 '옹호적 표준'의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다.22> 옹호적 표준으로서 과학적 합리성은 비판적 표준을 약화시키고 사회체계 안에서 기껏해야 조정의 기능만 한다. 즉 과학과 기술은 계몽과 해방의 열쇄로 활용되기보다도 오히려 부당한 사회지배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행사하고 있다. 과학 기술의 표준에 토대한 목적합리성으로부터는 자기반성과 비판을 통한 계몽과 사회해방의 실현을 충분히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주9) H. Putnam, Reason, Truth and History(London: Cambridge University, 1984), 175쪽.
주10) R. Brubaker / 나재민, 합리성의 한계, 법문사, 1985, 46쪽.
주11) 같은 책, 64쪽.
주12) Habermas, Communication and the Evolution of Society(Boston: Beacon Press, 1979), 40쪽 및 209쪽,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Ⅰ- Reason and the Rationalization of Society(Boston: Beacon Press, 1984), 285쪽 및 333쪽 참조.
주13) R. Roderick, Habermas and the Foundations of Critical Theory(Hong Kong: Macmillan Publishers Ltd., 1986), 109쪽.
주14) Habermas, 1984, 286-295쪽.
주15) Habermas, 1971, 81쪽.
주16) 같은 책, 82쪽.
주17) Habermas, 1979, 128쪽.
주18) Habermas,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Ⅱ(Frankfurt: Suhrkamp, 1981), 452쪽.
주19) '생활세계'란 유럽학문의 위기를 지적한 강연에서 후설이 한 말이다. 이 어휘는 상호주관적 경험의 세계가 자연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환원되는 데 대한 처방이다. 또한 과학적 반성이전 이미 인간이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세계로서, 과학이론적으로 해명될 수 없는 순수 주관의 고유한 영역이다: E. Husserl, The Crisis of European Sciences and Transcendental Phenomenology(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0), part Ⅲ 참조.
주20) Habermas, 1984, 285쪽.
주21) McCathy, 1984, 273쪽.
주22) Habermas, 1971, 83쪽.
⑵ 보편타당성과 이상적 담화상황
타당성 주장의 합리성: 논리학에서 '타당성'은 '정확한 연역논증에서 확보되는 논증의 속성'이다. 전제가 참일 때 결론도 참이 되는 논증은 타당한 논증이 된다.23> 하버마스에 있어서 타당성이란 형식논리의 논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사소통에 의해 도달되는 이해와 합의에 근거하는 합리성의 개념적 조건이다. 합리성을 확보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어떤 명제와 판단에 대하여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증거를 올바르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태도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권위, 전통 또는 무력행사 등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비판과 논의를 통해 대립된 주장을 정당화해야 한다. 의견이 불일치하고 갈등하는 일상생활에서 논의와 토의를 실행함이야말로 '호소의 법정'이 되어야 한다.24> 논거나 이유 제시에 의해 어떤 주장을 옹호하며 그 타당성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이야말로 말과 행동의 합리성을 확립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 된다. 타당성의 주장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전제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타당성 주장에는 네 가지 형태가 있다. ① 이해가능성, ② 진리성 및 효율성, ③ 정당성, ④ 진솔성이 그것이다. '이해가능성'은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때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를 알기 위해서 제기하는 타당성이다. '진리성'이란 말한 내용은 이해하지만 그것이 참(사실)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경우 주제로 삼는 타당성이다. 그리고 '효율성'이란 주어진 상황에서 행동계획 및 행동규칙이 어떤 목적을 이루는 데 적절한지를 다루는 타당성주장이다. '정당성'이란 어떤 행동과 언명이 규범적으로 적법한지 상호 검토할 때 요구되는 타당성이다. '진솔성'이란 말하는 사람의 발언이 진지하지 못할 때 그의 성실성을 문제삼는 타당성 주장이다.25>
충분한 의사소통을 위해 실재 영역과 인지적으로 연결하여 타당성 주장들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말을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주변세계, 다른 주체들, 우리 자신의 의도 느낌 바램 등 각각 범주가 다른 보편적 실재와 관련을 맺는다. 하버마스는 이들을 ① 언어 ② 외적 자연세계 ③ 사회세계 ④ 내면세계 등 네 가지로 구분했다.26> 이들은 각각 다음과 같이 타당성 주장에 내재적으로 연결된다고 본 것이다. 첫째로 의사소통과정에서 말의 의미가 명료하지 않다면 관련된 '언어체계' 안에서 '이해가능성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둘째로 객체적 세계 즉 '외적인 자연세계'를 대상으로 삼아 명제의 '진리성' 또는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의 '효율성'에 대한 어떤 주장이 정당하게 옹호되고 비판될 수 있는지 검토되어야 한다. 셋째로 '사회적 생활세계'의 차원에서 어떤 행동과 담화가 적절한지 또는 그 맥락 자체가 적법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지를 문제삼아야 한다. 넷째로 '내면세계'라는 실재와 상관하여 어떤 발언이라도 당사자의 주체적 경험의 정직하고 진솔한 표현이어야 한다는 요청을 할 수 있다.
사실상 모든 의사소통의 전제는 말하는 자가 듣는 자의 승인 내지 거부 가능한 '보편타당성 주장'을 옹호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27> 타당성 주장들은 비판되고 수용되거나 거부될 수 있지만 상호주관적 이유나 논리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합리적이다.
이상적 담화상황의 설정: 모든 담화는 진정한 합의에의 이념을 지향하고 있는 바, 하버마스는 우리의 합의라 합리적 합의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을 '이상적 담화상황'이라고 부른다. 이상적 담화상황은 ① 강제에 의하지 않고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전략개발을 위한 '무제약적 토론', ② 불가침의 극단적인 개별화 아래에서 이루어지면서도 적절한 친밀성이 발휘되는 '온전한 자기표현', ③ 보편적 이해 주장과 규범의 보편화를 가능하게 하는 '기대의 충만'28>이라는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합리적 합의는 논의에 의한 토론적 정당화 과정을 거친다. 토론에 참가한다는 것은 행동에 제약 사항이 없어야 하고 '보다 나은 논증'이란 비강제적인 힘에 의해 의견일치를 이루려는 자발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 동기를 배제함을 뜻한다. 이 경우 토론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이 포함된다. ① 진정한 토론은 의견일치 즉 합리적 합의를 목적으로 한다. ② 합리적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③ 참된 합의와 거짓된 합의는 구분된다. ④ 오직 합리적 합의만이 진리 주장과 규범을 객관적인 것으로 근거 짓는 데 도움을 준다.29> 이런 전제들은 담화의 구조(또는 목적 자체)에 이미 붙박여 있는 것이며, 이 전제 없이는 합리적 의사소통은 결코 성립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상적 담화상황은 분명히 현실적으로 경험하기 어려운 하나의 '반사실적'인 가정이다. 이런 상황의 구현은 토의의 가능성 내지 자유롭고 정의로운 합리적 사회실현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요소들에 대해 현실적으로 무력할 수 있다.30> 또한 이 모델이 합리적 합의의 조건에 과도한 요구를 함으로써 도리어 타당성과 합의의 달성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31> 하버마스는 언어와 이성의 힘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으며, 실제의 대화과정은 이상적 담화상황에 있지 않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범적 이상은 의사소통의 실제에서 충분히 유효하게 작용될 수 있으며,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을 비판할 수 있는 척도로 사용될 수 있다.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의 논리 즉 이상적 담화상황의 이념은 왜곡된 의사소통의 구조를 확인하고 벗어나게 하는 궁극적 준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왜곡된 의사소통이란 (Freud가 분석하듯이) 신경증적이거나 (Marx의 분석에서처럼)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된 담화를 가리킨다.32>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이상적 담화상황을 구성할 수 있는 만큼 우리는 진리, 정의, 자유 등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의사소통의 규범적 조건인 이상적 담화상황은 무기력한 허구가 아니라 '이상적 삶의 형식적 조건'33>으로서 가치와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우리는 합리적 의사소통과정에서 이상적 담화상황을 당연히 기대해야 할 것이고 또한 기대된 정도만큼 합리적 합의의 달성에 효과를 거둘 것이다.
주23) W. Salmon, Logic, 1973, 18-19쪽.
주24) Habermas, 1984, 17-18쪽.
주25) 같은 책, 8-23쪽.
주26) Habermas, 1979, 68쪽.
주27) 같은 책, 2쪽.
주28) Habermas, Toward a Theory of Communicative Competence, 1970, 370-372쪽.
주29) Roderick, 82쪽.
주30) D. Held, Introduction to Critical Theory(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0), 396쪽.
주31) Roderick, 86쪽.
주32) Habermas, "On Systematically Distorted Communication", 1970, 205-218쪽.
주33) R. Gibson / 이지헌, 비판이론과 교육(1989), 62쪽.
2. 인식론적 토대
⑴ 인식관심의 성격과 유형
인식론적 반성: 하버마스가 개념화한 관심은 철학사적 토대 위에서 재구성된 것이다. 그것은 특히 인식론적 반성을 위한 준거로서 중요성을 지닌다. 하버마스는 관심의 개념을 '인식 자체의 의미와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34> 즉 인식비판의 길잡이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식 비판이야말로 인식론의 본래적 지위임을 확신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관심은 '인식관심'으로 표현된 것이다.
관심의 개념화는 과학주의적 인식태도의 부당성을 지적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해된다. 하버마스는 관념론과 유물론에 대한 인식론적 검토를 통하여 칸트의 인식비판이 헤겔과 마르크스에 의해 소멸되기 시작해서 결국 실증주의적 과학철학의 지배와 더불어 인식의 비판적 차원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특히 인식론을 과학적 방법론에 국한지움으로써 인식일반에 관한 인식주체의 비판적인 접근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인식론적 견지에서 과학의 기능과 의미 자체를 문제 삼는 그 어떤 시도도 기대 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서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엄밀한 인식이란 이름 아래서 인식 자체가 지닌 의미는 도리어 비합리적으로 되고 말았다'.35> 즉 과학적 인식론은 인식주체의 역할과 자기활동에 대한 인식자의 반성과 통찰이 갖는 잠재력을 점점 더 위축시켰다는 말이다. 또한 실증적 과학철학의 옹호자들은 오직 과학적인 인식이야말로 주관적 가치판단 또는 관심으로부터 순수하게 독립된 타당한 것으로 믿는다. 하버마스는 인식관심의 개념을 정립함으로써 그들의 신념이 극복되어야 할 '환상'임을 지적한다. 즉 그는 '세계가 기술적으로 법칙적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는 사실들의 총체로서 제시된다'고 보는 객관주의적 인식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함을 논증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접근은 결국 사실들이 구성되는 과정을 감춘 체 '인식이 생활세계에서 나오는 관심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지각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점은 '우리의 인식은 우리의 관심에 의존한다'라는 명제로 제시되고 있다. 하버마스의 관심은 '인식구성적 관심', '인식주도적 관심'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인식관심은 심리학, 지식사회학 또는 좁은 의미의 이데올로기비판 그 어느 것과도 무관하다. 왜냐하면 관심은 불변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관심은 구체적 충동을 지닌 잠재태의 생물학적 유전에 기인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관심은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심은 노동과 언어에 의존하면서 사회 문화적 삶의 현실에 내재하는 지상명령에 근거하고 있다. …… 관심은 인식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거해야 하는 인식의 조정장치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관심은 실재를 객체화하고 그것에 의해 경험의 기원에 접근할 수 있는 측면을 결정한다. 관심은 말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하여금 객관성을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경험가능성에 대한 필요조건이다.36>
이상에서 보듯이 관심은 인간학적 토대를 가진다. 관심은 '인류의 가능한 재생산과 자기형성의 일정한 기본 조건에 관계하는 근본 정향'이다. 관심은 우리의 노동과 언어생활의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다. 또한 하버마스의 인식론에서 관심은 실재를 선험적으로 규명하고 평가하는 구체적인 '관점'으로서 인식을 구성하는 역할의 담당자이다. 이는 학문적 탐구를 체계적으로 주도하는 '인식전략'이기도 하다.37> 여기에는 기술적 통제력을 확장시키는 정보를 얻으려는 관심, 어떤 행동이 공적인 전통에 비추어 적절한지를 해석하려는 관심, 실체화된 권력의 지배로부터 의식을 해방시키는 분석에의 관심 등이 포함된다.38> 이들은 차례대로 '기술적 관심', '실천적 관심', '해방적 관심'으로 개념화된다. 인식관심의 범주와 영역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그 논의를 미루고 이제 그 일반적 특성을 살펴본다.
관심의 준선험성: 우리의 인식을 산출하는 관심은 준 선험적이다.39> 여기서 '준 선험적'이란 인식가능성의 조건인 관심이 선험적 구성과 경험적 구성을 분리하거나 그 가운데 하나로 다른 것을 환원시키는 인식론적 얼개로써는 적절히 파악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원래 인식이 주체의 구성활동의 산물이란 견지에서 인식을 주도하는 관심은 마땅히 선험적인 지위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인식관심의 준선험성은 전통적 의미의 선험성과 분명히 구별된다. 왜냐하면 비역사적인 선험적 주체 안에서는 인식이 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능한 인식과 경험의 구성을 위한 선조건을 제공하는 선험적 주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식을 구성하는 주체는 역사적인 인간이다. 그리고 인식을 구성하는 조건 또한 역사적이고 물질적이다. 따라서 올바른 인식론은 그 논리적 구조를 선험적 의식이 아니라 경험적 조건 위에 세워야 하며 선험적 자아가 아닌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주체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식관심은 경험적 구성 논리만으로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비록 관심이 발생학적으로 경험적 생활연관에 뿌리박은 인간의 의식구조에 의거해 있지만 인식과 인간주체의 자기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범주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 또한 관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식관심이 생활을 지향하고 자연적 역사적 과정에 근거하는 한 경험적이나 인식자체의 성립 가능성의 논리를 포함하는 한 선험적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관심은 경험적이거나 선험적 범주 어느 하나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하버마스는 관심의 속성을 준 선험적인 것이라 한 것이다.
인식관심의 유형: 하버마스는 인간의 근본정향으로서 관심은 세 가지 독자적인 범주로 구분한다. 기술적 통제력을 확장시키는 정보를 얻으려는 관심, 공적인 전통에 비추어 적절한 행동을 해석하려는 관심, 실체화된 권력의 지배로부터 의식을 해방시키는 분석에의 관심이 여기에 포함된다.40> 각각 기술적 관심(technical interest), 실천적 관심(practical interest), 해방적 관심(emancipatory interest)으로 불려진다. 자연과학(경험 분석적 과학), 문화과학(정신적, 역사 해석적 과학), 비판과학은 이 각각의 관심들에 따라 구성된 것이다.
이들 가운데 기술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은 기본적으로 노동과 언어라는 인간생활의 불변적 구조에 기반을 둔 것이다. 이와 달리 해방적 관심은 이 구조가 왜곡된 정도에 따라서 전개된다. 하버마스는 이를 가리켜 해방관심의 '파생적 지위'라고 불렀다.41> 불변적이 아닌 파생적인 지위를 가진데 불과하지만 해방관심은 오히려 다른 관심들 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해방관심이 합리적인 근거는 다음 절로 미루고 여기서는 기술관심과 실천관심의 한계를 밝힌다.
기술적 관심과 경험과학의 한계는 이 관심에 환원할 수 없는 인식의 범주인 상호작용과 문화전승의 차원을 은폐함에 있다.42> 그러나 이같은 지적이 기술적 인식관심의 유용성과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경험과학의 범주적 한계에 대한 자기반성이 요청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실천적 인식관심과 문화과학의 한계는 의사소통의 보존과 의미 이해의 확장을 사회적 맥락과 언어공동체 안에서만 하려는 데 있다. 그 결과 문화 과학적 관심은 언어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상대주의적 경향을 드러내기도 한다.43> 기술적 관심도 실천적 관심도 인식을 구성하는 하나의 범주에 불과할 뿐 유일하고 절대적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실천관심의 인식범주를 확립한 딜타이(Dilthey)나 기술관심의 아이디어를 명료화한 퍼스(Peirce)도 결국 '과학주의적 자기오해'를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44> 이같은 과학주의적 인식론은 인식 자체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하지 않고 있으며 인식과 관심의 조화와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지평에 대한 전망을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함을 보여준다.
주34) Held, 1972, 68쪽.
주35) Habermas, 1972, 68-69쪽.
주36) Habermas, 1973, 8-9쪽.
주37) Habermas, 1968, 242쪽.
주38) Habermas, 1972, 314쪽
주39) Habermas, 1963, 16쪽.
주40) Habermas, 1972, 314쪽.
주41) Habermas, "A Postscript to Knowledge and Human Interests", 1973, 371쪽.
주42) Habermas, 1972, 26쪽.
주43) Held, 1980, 316쪽.
주44) McCarthy, 1984, 56쪽.
⑵ 해방적 인식관심의 합리성
해방적 인식관심: 하버마스는 사상사적으로 접근을 통해 해방적 관심의 개념을 형성했다. 그가 개념화한 해방관심은 계몽(Kant), 자율성의 실천(Fichte), 비판에 의한 독단적 생활의 타파(Hegel), 사회적 실천이성(Marx), 실체화된 권력과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Freud) 등의 이념을 재구성한 것이다. 여기서 기본 방향은 관념론과 유물론, 과학주의와 환원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합리성의 논리를 확립하는 일이다. 해방적 관심은 그 본질에 있어서 이성의 힘을 사용하려는 의지이다.45>
해방관심이 어떤 면에서 기술관심과 실천관심보다 우선되는가? 관심이 '해방적'이라 말하는 까닭은 그것이 지향하는 바가 소외된 노동과 이데올로기적으로 감금된 의사소통으로부터 인간의 자유로운 해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술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의 함축된 의미는 해방(소외되지 않는 노동과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위한 조건의 마련에 있다.46> 달리 말하면 기술관심과 실천관심은 오직 해방관심과의 연관 속에서만 합리성(자기 주장)의 확보가 가능하다. 이런 이유에서 해방적 관심이 다른 두 관심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해방관심에 우선시되는 인식관심론의 함축된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로 관심과 인식의 통일(타당한 관심 또는 인식)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식 주체의 자율적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인식의 타당성은 자발적인 반성과 자유로운 비판에 의해 확보된다. 어떤 관심과 의견이라도 무시되거나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로 타당한 인식의 산출을 위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열린 마음이란 진리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고 사리에 맞게 공정한 태도로써 자신과 타인의 주장을 증거에 입각하여 검정하고 논증하고 개정하려는 자발성을 가리킨다.47> 셋째로 타당한 인식을 구성하려면 인식주체들 사이에 자유롭고 평등한 대화가 요청된다. 비록 자원이 심각할 정도로 부족하고 불평등한 권력의 현실 안에서도 토론과 대화를 통하여 진리와 가치에 도달하려는 비전과 열정이 요청된다. 이와 같이 하버마스의 관심론은 자율성, 개방성, 평등성의 원리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원리들은 결국 대화적 합리성으로 압축된다.
자기반성의 합리성: 하버마스에 따르면, 합리성은 자기반성에 의해 확립된다. 자기반성이야말로 합리성의 관건이다. 그리고 자기반성을 지향하는 해방관심에 의해 인식과 관심,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이 통일될 수 있다. 자기반성은 다음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비판'(실천적 계몽, 상황적 반성, 비판적 자기반성)과 '합리적 재구성'(이론적 계몽, 보편적 반성, 선험적 자기반성)48>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의미를 포함한다.
(a) '비판'은 그 사이비객관성을 폭로되어야 할 대상의 표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재구성'은 처음부터 주체의 의식적 창출물인 명제, 행동, 인지적 통찰 등과 같은 '객관적' 자료에 토대를 둔다.
(b) '비판'은 특정한 대상(구체적으로 말해서 자아, 집단, 동일성의 특정한 자기형성과정)에 집중한다. 그러나 '재구성'은 그 사용능력을 획득한 주체가 따를 수 있는 익명의 규칙체계를 이해하려 한다.
(c) '비판'은 실천적 결과를 거두기 위해 무의식적 요소들을 의식하는 능력으로 특징 지울 수 있다. 그러나 '재구성'은 정확한 노하우를 즉 실천적 결과를 포함함이 없이 그 규칙의 사용능력을 가질 때 획득하는 직관적 지식을 설명한다.49>
비판과 재구성으로 의미를 구분한 것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과학에 대한 그릇된 과학주의적 자기 이해나 선험철학의 독단을 논파할 수 있는 타당한 인식의 조건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 하버마스는 이론과 실천의 반성적 형식 안에서 합리적 대화를 회복하는 논리를 개발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이와 같이 비판과 재구성을 포함하여 개념화한 자기반성의 논리는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아펠(Apel)은 하버마스가 서로 다른 관심인 이론적 반성과 실천적 참여를 동일시한 것을 문제삼았다. 뵐러(B hler)는 하버마스가 실천을 이론의 선험적 조건 안에 근거 지운 것은 범주오류임을 지적했다.50> 이들의 반박은 결국 하버마스가 실천적 해방과 이론적 계몽을 직접적으로 연결함으로서 이론과 실천의 두 측면 모두 공정하게 다루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보편적 조건에 대한 선험적 반성을 통한 이론적 계몽(합리적 재구성)이 특정한 주체의 자기형성적 과정에 대한 실천적 반성을 통한 상황적 계몽(비판)과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말이다. 하버마스는 합리적 재구성과 실천적 계몽이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주장은 옳지만, 이들 모두 해방에의 이성관심을 통해 자기반성의 두 가지 의미를 하나로 모은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 바 있다.51> 하버마스가 자기반성에 수렴되는 해방관심을 제시한 것은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변증법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하버마스의 인식관심론은 세 가지 관심을 포함하는 것이지만 그 초점이 해방관심에 있다. 여기서 해방관심이야말로 기술관심과 실천관심을 능가하는 타당하고 자율적인 즉 합리적인 근거를 갖는다는 그의 논증을 수용할 만하다. 그것은 자기반성에 의해서 인식과 관심의 통일을 이루는 점에서 과학주의와 환원주의가 범하게 되는 인식의 오류를 벗어나는 전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하버마스의 합리성은 개방성과 포괄성을 요건으로 한다. 여기서 개방성은 텅 빈 마음도 아니며 어떤 관점이라도 수용하는 관대성과 다른 것이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고 사리에 맞게 공정한 태도로써 자신과 타인의 주장을 증거에 입각하여 검증하고 논증하고 개정하려는 자발성이다.52> 그리고 포괄성이란 이런 개방성을 토대로 하여 재구성되는 하버마스의 합리성이론은 규범적 근거와 경험적 증거, 이론적 계몽과 실천적 계몽, 기술적 관심과 실천적 관심 그리고 해방적 관심을 종합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주45) 같은 책, 76쪽.
주46) Bernstein, 1978, 198쪽.
주47) Soltis, 1984, 9쪽.
주48) McCarthy, 1984, 99-100쪽.
주49) Habermas, "A Postscript to Knowledge and Human Interests", 1973, 378쪽.
주50) McCarthy, 96-99쪽.
주51) Habermas, "A Postscript to Knowledge and Human Interests", 1973, 377-380쪽.
주52) J. F. Soltis, "On the Nature of Educational Research"(1984), 9쪽.
3. 실천절학적 정당화
⑴ 실천에 대한 사상사적 조명
고전적 실천학의 관점: '실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프락시스(praxis)이다. 프락시스는 현대철학에서 다양하게 이해되지만,53> 그리스인들에게는 보통 폴리스 안에서의 도덕적 정치적 활동만을 가리켰다. 고전적 정치학에 포함된 프락시스관의 계승과 거부는 오늘날 사회철학에 있어서도 여전히 중요한 논쟁의 대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버마스는 프락시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적 전제를 검토한 바 있다. 하버마스가 파악하기로 이 고전적 프락시스가 갖는 일반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선을 목적으로 삼는 윤리적 활동이다.54>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의 과제는 이와 같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통해서 선을 증진시키는 방법에 관한 지식의 추구에 있었다. 물론 현대 기술사회에서 실천이 이러한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충분히 있겠지만, 그리스인들이 사용한 프락시스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도덕적 활동만을 가리켰다.
둘째로 공동체의 윤리를 실현하려는 정치적 활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락시스를 정치와 윤리의 연관성 가운데서 수행하는 인간활동으로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폴리스는 시민의 덕과 결부되어 있고, 정치만이 공동체를 위한 윤리적 실천으로서의 프락시스로 인도할 수 있게 된다.55>
셋째로 신중성 또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로 이어지는 활동이다.56>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실천적 지혜는 프락시스의 불가결한 측면이며 지적으로 탁월한 덕이다. 그리고 실천적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phronimos)은 자신의 실천상황의 특수성을 그 상황의 윤리적 중요성에 비추어서 일관되게 행동하는 인간이다. 따라서 고전적 프락시스가 해낼 수 있는 것은 상황에 대한 이러한 신중한 사려성 즉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는 일이다.57>
그러면 이러한 특징을 포함하는 고전적 실천관은 어떠한 난점과 한계를 지녔는가? 하버마스가 지적하기로, 윤리성, 정치성, 신중성을 지향하는 실천관에서 규범성이 견지되는 점은 정당하지만, 올바름이나 탁월함의 덕목을 신중한 사려에 의해서만 확보하려는 접근은 그 타당성이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여전히 봉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정치상황에서도 필연적으로 실천되어야 하고 동시에 객관적으로 가능한 행동을 어떻게 얼마만큼 밝혀낼 수 있는가?"58> 하버마스가 던지는 이 물음이 함의하는 바는, 고전적 실천학은 실천적 지혜와 직결시키면서 프락시스에 대한 엄밀한 인식의 가능성을 포기함으로써 이른바 '과학성의 결여'59>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하버마스는 고전적 실천관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고 적절한 개념화를 위한 접근으로 근대정치학의 실천관을 고찰로 나아갔다.
근대 사회철학의 관점: 근대의 정치학 및 사회철학에서 프락시스는 고전적 실천학의 프락시스와 용어 이상의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개념상의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홉즈(Thomas Hobbes)에게는 프락시스의 전통적 의미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실천의 문제를 규범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기술적인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홉즈에 앞서 마키아벨리(Niccol Machiavelli)와 모어(Thomas More)의 관점에서도 발견되고 있다.60>
근대적 프락시스는 하버마스가 보기에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 활동이다. 첫째로 윤리적 필연성과 의미상 분리되었다. 예를 들면 마키아벨리는 주저하지 않고, "군주는 …… 선하다고 인정받는 데 필요한 행위 준칙을 모두 지킬 수 없다. 자기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신의, 자비, 인정, 종교를 저버리는 일도 불가피하다"61>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러한 단언은 정치권력은 그의 관점이 시민들의 도덕적 생활에 근거하여 가치가 입증된다고 본 고전적 프락시스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나타낸다. 모어 또한 근본적으로 프락시스의 규범적 특성문제에는 소홀함을 보여 준다. 그는 사유재산과 더불어 나타난 지배와 착취의 사회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기술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이와 같이 사회철학의 과제가 마키아벨리와 같이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정치적 기술에 두거나 모어처럼 기아를 종식시키는 사회적 조직에 놓이게 됨으로써 정치와 윤리는 분리되기 시작해서 프락시스는 더 이상 선하고 바른 삶이란 윤리적 규정에 구속받지 않게 된 것이다.
둘째로 '기술자의 확실성'을 지향한다.62> 마키아벨리와 모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 안에서 독립된 범주로 구별되었던 실천(praxis)과 기술(techne) 사이의 장벽을 제거하고 실천적 지혜의 영역에 기술자적 확실성을 부여하였다.『군주론』과『유토피아』의 주된 인식관심은 '제작 양식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입각해 있다.63> 특히 마키아벨리는 그때까지 사려와 신중성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않은 프락시스의 영역에 장인적 기술(techne)을 도입하여 권력을 확보하고 유지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시도는 실용적 차원에 묶여서 이론적 수준의 기술적 엄밀성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학적 엄밀성을 갖고 시계가 시간을 지배하듯이 인간행위를 지배할 수 있는 정치제도를 고안할 수 있도록 프락시스를 과학적 이론으로 근거지우려 한 것은 홉즈였다. 그는 '오직 과학만이 힘을 준다'는 베이컨(Francis Bacon)의 격률에 충실하면서 갈릴레오(Galilei Galileo)가 자연의 운동을 탐색하는 방식으로 사회관계의 메카니즘을 탐구하려 했다.64>
그러나 이러한 근대 사회철학자들의 접근은 한계를 지닌다. 프락시스에 대한 과학 기술적 접근은 통제(Verf gen)와 행동(Handeln)의 의미를 구별하지 못한 사고의 소산이기 때문이다.65> "그들은 진리에만 관심을 쏟은 나머지 건전한 상식을 키울 수 없었으며 개연성을 배제해 버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은 다른 사람들 역시 그 진리를 수용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66> 하버마스와 비코(Vico)의 지적은 프락시스에 대한 근대사회철학자들의 기술적 해석이 의사소통과 합의를 지향하는 규범성에 무관심한 데 그 난점이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주53) 김태오, 1991, 40쪽.
주54) Aristoteles, 1955, I, 1094a.
주55) Habermas, Theory and Practice, 1973, 47쪽.
주56) Aristoteles, Ⅵ. 1144a-d 참조.
주57) Habermas, Theory and Practice, 1973, 42쪽.
주58) 같은 책, 44쪽.
주59) 같은 책, 3쪽.
주60) 마키아벨리의 Principe와 모어의 Utopia는 같은 해(1516년) 출간되었다.
주61) N. Machiavelli, 1952, 102-103쪽(Habermas, Theory and Practice, 1973, 54쪽 재인용).
주62) Habermas, 1963, 66쪽.
주63) H. Arendt, Vita Activa(Stuttgart: 1960), 293쪽(Habermas, 1973C, 60쪽에서 재인용).
주64) 같은 책, 70쪽.
주65) 하버마스의 이론 체계에 있어서 '행동'은 '의사소통적 행동'을 가리키며 그 일차적 의미는 규범적 타당성에 있다. 이와 달리 행동에 비해 '통제'는 효율성, 경제성과 같은 목적합리성을 추구 하는 것으로 규범성이 약한 것이다. 즉 그것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원리에 따라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자와 후자는 실천과 기술에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된다(Habermas, 1963, 79쪽).
주66) G. B. Vico, 1948, 35ff(Habermas, Theory and Practice, 1973, 74쪽 재인용).
⑵ 실천에 대한 의사소통적 재구성
프락시스에 대한 이상과 같은 사상사적 검토는 하버마스에 있어 '의사소통적 실천'67>을 개념화하기 위한 예비작업이었다. 프락시스에 대한 '고전적 이해'는 물론이고 '근대적 접근'도 역시 부분적으로만 타당한 것이다. 전자가 엄밀한 인식의 가능성을 포기하듯이 후자 또한 과학적 확실성과 기술적 통제력에 초점을 두면서 프락시스의 규범적인 의미를 간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사소통적 실천은 고전적 정치학에서의 '과학성의 결여'와 근대 사회철학에서의 '규범성의 무시'라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학문적 노력에서 재구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규범성과 과학성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먼저 규범성을 살펴보자. 모든 언어행위에서는 이해도달이라는 개념이 내재해 있고,68> 이해도달을 지향하는 사회적 행동은 기본적으로 규범적인 것이다. 상호이해를 통한 이성적 합의야말로 도구적 전략적 행동에서 기대할 수 없는 실천적 방향성을 갖는다. 이처럼 의사소통적 실천은 규범적 타당성과 진리성을 회복하는 데 일차적인 관심을 가진 인간행동이다. 이와 달리 목적달성을 위한 효율성에 관심을 쏟는 인간행동에서는 규범적 타당성문제는 소홀하게 되기 쉽다. 이런 견지에서 모든 행동은 규범규제적인 의사소통적 행동의 원리 즉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지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69> 하버마스는 사회적 행동과 언어 자체에 내재해 있는 규범적 기준을 실천의 토대로 삼았다.
이어서 의사소통적 실천의 과학성 또는 엄밀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의사소통적 실천의 엄밀성은 '논의의 이론'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다. 논의란 '참여자들 사이에 서로 경쟁적으로 제기된 타당성 주장들을 문제삼아 논증을 통해 입증하거나 비판하는 담화유형'을 가리킨다. 이 경우 논증의 힘을 측정하고 담화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지닌 합리성 여부를 판단하는 준거는 토론의 참여자들이 주어진 맥락에서 확신과 수락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의 건전성이다. '좋은 이유나 근거들이 제시되는 행동 안에서 표현된 담화하고 행동하는 주체들의 성향'이 바로 합리성의 의미이다.70> 그가 자신의 합리성을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 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논의에는 다섯 가지 형식이 있다.71> '이론적 담론', '실천적 담론', '심미적 비판', '치료적 비판', '설명적 담론'이 그것이다. 심미적 비평과 치료적 비판은 내면적 세계에 관련되고, 다른 세 가지 형식은 차례대로 외적 자연세계, 사회세계, 언어라는 보편적 실재에 연결된다. 특히 실천적 담론은 '규범적인 정당성 주장이 주제화되는 논의의 형식'이다.72> 규범적 갈등이 있는 상황에서 관련 당사자들이 자신의 편파성이나 즉각적 관심사에 굴복하지 않고 이를 도덕적 관점에서 판단하고 합의에 의해 해결하려는 강력한 전제에서 담화할 때 비로소 실천적 담론은 시작된다. 때로는 상대적 맥락의 규범에 비추어서 행동을 정당화할 수도 있지만, 실천적 논의는 보편화가능한 관심을 지향하는 도덕적 관점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73> 하버마스는 이와 같이 실천의 규범문제를 담론에 의해 합리적으로 설명되는 인지적 차원으로 개방시킴으로써 프락시스의 엄밀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경우의 방법론적 엄밀성이란 자연과학적 방법이 지향하는 경험적 객관성과 다르다. 여기서의 엄밀성은 사회과학적 또는 비판과학적 엄밀성으로서 '비판가능성'과 '근거제시'의 원리에 따라 확보되는 논의적으로 보편타당성 내지 객관성이다.74>
프락시스의 엄밀성을 요청하는 논의적 담화는 세 가지 측면을 갖는다. 첫째로 '더 나은 논증의 힘'을 제외한 그 어떤 동기도 배제하는 이상적 담화상황을 전제한다. 둘째로 참여자들은 상호작용의 규칙 안에서 규범적으로 규제를 받는다. 셋째로 필요가 있을 경우 언제라도 타당성 주장은 변형되고 제한을 받는다.75>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접근되는 프락시스의 엄밀성은 상호주관적으로 합의한다는 의미에서의 규범성과 양립 가능한 것이다.
주67) Habermas, 1981 I, 27쪽.
주68) L.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trans by G. E. M. Anscombe, Oxford: Basil Blackwell, 1978), 146쪽.
주69) Habermas, 1979, 117-118쪽.
주70) Habermas, 1984, 22쪽.
주71) 같은 책, 23쪽
주72) 같은 책, 19.
주73) Habermas, 1975, partⅢ.
주74) Habermas, 1984, 16-18쪽.
주75) 같은 책, 25-26쪽.
⑶ 실천의 지향
사회합리화: 의사소통적 프락시스의 구체적인 지향점 하나는『합리적 사회를 향하여』란 하버마스의 저서의 제목에서 찾을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사회는 세 부분의 체계로써 구성되는 데, 여기에는 ① 외적 자연 즉 인간환경 이외의 물리적 자원, ② 특정한 사회가 접촉하는 또 다른 사회체계, ③ 내적 자연 즉 사회구성원들의 유기적 기초가 포함된다.76> 그리고 사회는 생산력의 발전, 체계자율성의 증대, 규범구조의 변화의 차원에서 진화한다. 세 가치 차원에서 사회합리화가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적 자연이 사회체계와 연관을 맺는 것은 생산력에 의해서이지만, 내적 자연은 규범구조에 의해서 사회체계와 연결된다. 바꾸어 말해 사회체계는 외적 자연에 대해서는 기술적인 규칙을 따르는 도구적 행동(노동)에 의해 결합되는 반면, 내적 자연에 대해서는 타당한 규범에 규제되는 상호작용(의사소통)에 의해 유지된다.77>
그러므로 실천의 목적으로서 사회합리화란 과제는 결국 사회적 조정메커니즘의 기능적 효율성과 의사소통공동체의 규범성의 두 측면으로 압축된다. 효율성의 증대란 측면에서의 합리화는 전형적으로 과학기술이나 경제와 같은 사회의 하위체계에서 구체화된 목적합리적 행동방식에서 쉽게 발견된다.78> 이런 과학 기술적 합리화가 생산력의 향상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사회체계의 합리화를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을 생활세계의 합리화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의사소통적 생활세계야말로 사회합리화의 실천을 위한 근본적 범주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의 실천 안에서 사회합리화의 의미를 찾는다. 의사소통은 '상호주관성'의 구조 내에서 수행된다. 생활세계의 수준에서 이 상호주관성의 구조는 한편으로 언행주체의 주관성을 다른 한편으로 보편성(인식의 객관성과 규범의 정당성)을 요청하면서 사회생활을 구성하는 공동성을 확보한다.79> 이러한 의사소통의 구조 자체 안에 이미 '진리, 자유, 정의의 실현이 가능한 삶의 형식에 대한 예상'이 내재해 있다.80> 이런 견지에서 하버마스는 대화적 이성(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사회합리화를 지향하는 실천의 관건으로 본 것이다.
자아자율성의 발달: 사회를 합리화하는 열쇠는 사회성원들의 합리적인 능력과 자질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상호작용의 능력을 발휘하는 자율적 자아의 발달이란 견지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자아발달의 논리적 토대를 확립하기 위해 그는 여러 이론을 검토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콜버거(Lawrence Kohlberg)의 도덕의식발달 모델이야말로 자아발달논리의 형식적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인정했다.81> 콜버거는 합리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도덕의식과 그 판단력발달의 계열화한 공헌이 있다. 도덕적 자아발달을 수준별로 (Ⅰ) 관습이전, (Ⅱ) 관습, (Ⅲ) 관습이후로 구분하고, (Ⅰ)을 ① 처벌과 복종지향과 ② 도구적 쾌락주의, (Ⅱ)를 ① 착한 소년지향과 ② 법과 질서지향, (Ⅲ)을 ① 계약법지향과 ② 보편 윤리적 원리 지향의 6단계로 정식화했다.82>
그런데 도덕의식은 콜버거가 말하듯이 '도덕적으로 적절한' 행동의 갈등 아래서 내려진 판단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도덕적으로 적절함'이 무엇인가를 의사소통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도덕적으로 적절하다'는 말은 행동갈등에서 '합리적으로 해결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 도덕적으로 적절한 행동갈등에 직면하여 이 갈등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방어하지 않고 충분히 '상호작용을 유지하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선량한' 자질을 가진 것이다. 따라서 행동갈등을 도덕적으로 해결하는 일은 '담론의 방식으로서 의사소통적 행동' 즉 '이해도달적인 행동'을 지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83> 콜버거의 도덕발달단계이론은 실증적으로 뒷받침될 수 있는 일반적인 행동이론의 틀 안에서 훌륭하게 제시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상호작용 또는 의사소통적 실천의 논리로써 입증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콜버거의 불완전한 단계도식을 의사소통적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도덕적 자아발달의 단계를 제시했다. 그에 의해 체계화된 자율적 도덕성 발달이론은 콜버거의 6단계에서 한 단계 더한 7단계이다.84> 하버마스가 주장하기를 콜버거는 '질적 차이'가 분명하게 존재하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7단계를 6단계로부터 변별하지 못했다. 여기서 질적인 차이란 문제시된 규범들의 일반화가능성을 독백적으로 검토하는 것(6단계)이 그 보편적 타당성주장을 담론을 통해 공동체적으로 정당화하는 것(7단계)의 수준과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변별되는 수준차에 의해 확립된 제 7단계는 공동체적 합의를 통해서 욕구를 보편화해서 포섭하는 사회 윤리적 단계이다. 이와 달리 콜버거의 6단계는 선의지로 충만된 자기충족적 개인들에게만 타당할 수 있는 칸트적인 형식적 의무윤리의 단계이다. 이러한 형식적 의무윤리와 구별되는 7단계를 하버마스는 '보편적 담화윤리' 단계라 불렀다.85> 그가 믿기로 개인적 의무윤리로부터 보편적 담화윤리단계로 나아가는 능력발달에서 참다운 자아자율성이 실현될 수 있다. 자아발달의 방향에서는 단계별로 보다 증대된 자율화, 반성화, 보편화가 확인 가능하다. 의사소통적 상호작용능력의 관점에서 콜버거의 모델을 재구성한 그의 7단계 자아발달도식이란 결국 자유롭고 평등하며 정의로운 사회건설을 위한 실천적 틀이다. 이 틀에 따라 그는 사회 합리화를 위한 담론의 제도화가 중요함을 역설했다. 사회합리화는 우선적으로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실천의 측면에서 논의되어야 하며 자아발달도 또한 이 노선에서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76) Habermas, Legitimation Crisis(Boston: Beacon Press, 1975), 9쪽.
주77) Held, 293쪽.
주78) Roderick, 10쪽.
주79) 같은 책, 10쪽.
주80) Held, 1980, 256쪽.
주81) Habermas, 1979, 73-78쪽.
주82) L. Kohlberg, 김민남(역), 도덕발달의 철학(서울: 교육과학사, 1985), 490-494쪽.
주83) Habermas, 1979, 78쪽.
주84) 같은 책, 83-89쪽.
주85) 같은 책, 90쪽.
Ⅳ.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교육철학적 논의
1. 합리적 교육패러다임
⑴ 충분하지 못한 교육패러다임
경험과학적 패러다임: 교육실제와 연구에서 사용되는 상호모순적이기도 한 언어와 논리들간의 상관성을 바르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일관된 개념틀을 형성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이 일은 교육철학의 중심과제인 만큼, 어떤 교육패러다임이라도 교육실천과 연구에 이바지하는 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만을 지적하는 데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 본성에 있어서 교육은 총체적인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만이 상이한 교육목적과 방법론에 대해 개방과 관용의 정신을 발휘하며 연구자들 또는 실천가들 사이의 합리적인 상호지원, 이해, 대화, 비판을 가능하게 한다.
교육패러다임은 교육철학적 탐구의 중심개념이다.86> '패러다임(paradigm)'의 개념화는 쿤(Thomas Kuhn)의 '과학적 패러다임(scientific paradigms)'에서 성립된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은 합리성의 사회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패러다임은 어떤 과학공동체의 성원들이 공유한 것이며, 역으로 하나의 과학공동체는 어떤 패러다임을 공유한 사람들로써 이루어진다".87> 교육패러다임은 교육공동체에서 성원들이 공유한 특정한 인지적 사고틀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교육에 관한 지식을 창출하려는 교육패러다임 마다 상이한 전제조건과 방법론을 가진다.
실증주의적 경험론의 언어와 논리가 오늘날의 교육이론과 실천을 좌우하고 있다. 많은 교육실천가와 연구자들이 경험과학적 패러다임에 경도되어 있다. 한 연구 조사에 의하면,88>『예술교육연구』저널의 절반 이상의 편수가 경험적으로 연구된 논문이다. 교육연구자들 뿐만 아니라, 현직교사들에게 널리 퍼져있는 교육적 경향도 역시 경험분석적 패러다임에 관련된다.89> 그러나 경험과학의 언어에서도 실제로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경험과학적 교육연구의 논리 또한 통일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육현상 자체가 다양하고, 연구자들마다 경험과학의 적절한 형식이나 과학적 방법의 본질에 대한 관점이 상이하기 때문이다.90> 따라서 경험과학적 공동체 안에서의 이러한 내적 불일치와 논쟁은 이것이 하나의 통일된 객관적 인식 도달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을 나타낸다.
인식의 자기반성이라는 차원에서 경험과학적 패러다임은 한계가 있다. 앞서 보았듯이, 경험분석적 과학은 인간의 근본정향의 하나인 객관화된 과정을 통제하려는 기술적 인식관심에 의해 구성된다. 경험과학적 지식은 가능한 지식의 여러 형식들 가운데 오직 하나에 불과하며, 과학과 지식을 동일시함은 잘못이다.91> 경험과학적 견지에서의 과학과 다른, 과학(예컨대, 역사해석적 과학이나 비판과학 등)의 의미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실증적 교육패러다임에서 볼 수 있는 구체적 의미보다 더 넓은 영역의 '탐구' 또는 '연구'의 개념이다.92> 이 경우 과학은 연구내용이라기 보다 탐구방법에 관련된다. 하버마스가 과학의 의미를 이같이 규정하는 것은 경험과학적 패러다임과 기술적 관심의 논리적 한계를 비판하고자 함이다.
어떤 사회에서나 기술적으로 이용 가능한 지식을 전달 생산하고 산업적 효율성의 제고를 지향하는 경험과학적 교육패러다임의 중요성은 결코 감소될 수 없다. 만약 교육탐구와 실천의 목적이 교육세계에 관한 예언적 지식과 그 기술적 이용가능성에 있다면 경험 분석적 패러다임은 적절성을 가지게 된다.93> 여기서 학습자는 전형적으로 과학적 정보의 수용자이다. 그리고 교사는 산업사회에 필요한 행동능력의 기능적 훈련자의 역할을 수행한다.94> 학교는 사회적 노동체계안에서 담당해야 할 과제를 부여받는다.95>
경험과학적 교육패러다임에는 두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첫째로 이 패러다임의 객관성은 스스로 주장하는 만큼 확실한 것이 아니다. 관찰결과들을 경험론자들이 주관의 개입 없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것이라 믿고, 즉각적 명증성을 부여하는 것은 '객관주의적 환상'에 불과하다.96> 경험과학적 교육패러다임에서 사용하는 기본 진술들은 사실 자체의 단순한 표상이기 보다는 실험자의 조작의 성패를 나타낸 것이다. 더욱이 경험과학적 실재는 기술적 인식관심에 의해 구성된다. 따라서 경험과학적 교육패러다임의 객관성은 자명하기보다 타당성을 새롭게 주제화해야 하는 개방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둘째로 경험과학적 패러다임은 교육의 본질적 차원인 상호작용과 규범성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존재의 외적 조건을 목적합리적으로 통제하려는 일반적 인식전략과 관점에서는 의사소통적 실천에서 확보되는 규범적 행동을 기대하기 어렵다. 교육은 사회적 실천적 인간활동이며 오직 경험과학적(객관적, 가치중립적) 개념으로서만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교육은 주관적, 상호주관적, 규범적, 비판적 차원 등의 다양한 접근을 필요로 한다.97> 따라서, 교육과정에서 학생은 물론 교사 또한 상호주관적 의사소통 가운데 성장하는 인격적 주체들이라는 점에서, 경험과학적 패러다임의 객관주의적이고 가치배제적인 정향은 교육에의 적용상 한계가 있다.
해석학적 패러다임: 경험과학적 교육패러다임이 교육실천과 탐구에 있어 부적절함과 한계가 있으므로 '패러다임 전환'이 불가피하다. 교육세계를 인식하는 이론적 틀을 변경시켜, 교육적 언어와 논리에서의 위기감과 불일치를 해결해야 한다. 경험과학의 개념과 방법만으로 과학적 활동의 조건 자체인 상호작용과 언어적 실재를 충분히 밝힐 수는 없다.98> 교육은 의사소통적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경험과학적 패러다임으로부터 대안적 패러다임으로 전환이 불가피하다.
이 대안적 패러다임을 하버마스는 딜타이의 문화과학(역사해석적 과학)에서 찾았다. 딜타이의 해석학적 패러다임은 경험과학의 논리와 언어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이 패러다임은 과학적 방법의 통제 범위을 넘어서는 종류의 진리에 대한 경험을 탐구하는 데 초점을 모았다.99> 철학, 예술 및 역사 자체의 경험에 대한 진리는 과학적 방법에 의해 검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은 경험과학적 접근과 동시에 해석학적 차원의 탐구와 실천을 요망한다. 경험과학적 탐구조차도 교육의 상호주관적으로 공유된 언어, 신념, 규범 등을 당연시해야만 유의미한 교육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100> 해석학적 공동체의 모든 교육자들은 자신을 기술자가 '예'예술가'로 인식한다. 해석학적 정향의 교육실천가와 탐구자들은 참여자들 모두의 관점에서 교육적 생활세계에 접근하려고 한다. 실제로 교육의 목적, 과정, 결과는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일차적으로 주관적 의미를 가진다. 교수와 학습의 성립조건도 또한 교육의 취지를 상호주관적으로 수용하고 참여하는 데 있다. 따라서 해석학적 패러다임은 교육을 사회문화적 역사적 맥락에서 참여자들에 의해 실행되는 보편적 인간활동으로서 교육에 접근한다.
인식론의 철저한 반성을 위해 하버마스는 해석학적 패러다임을 비판적으로 고찰했다. 해석학적 패러다임의 방법론적 얼게와 그 타당성의 가능한 의미를 검토하면서, 그는 해석학적 탐구정향을 상호이해의 보존과 확장을 위해 실재를 규명하려는 '실천적 인식관심'으로 파악했다.101> 이것은 딜타이의 해석학도 결국 과학의 자기반성의 수준에는 미달한다는 지적이다. 해석학적 패러다임 역시 경험과학과 마찬가지로, 인식과 관심의 통일에의 전망을 좌절시키는 '과학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교육탐구와 실천에 있어 해석학적 패러다임의 가치는 부정될 수 없다. 해석적 패러다임에서처럼 교육이란 이해에 목적을 두고 있는 대화 또는 게임으로 간주된다.102> 교수와 학습과정의 중심은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고, 가르치고, 토론하는 일이다. 교육활동은 그 의미를 상호주관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참여자를 필요로 한다. 사회화된 인간으로의 성장은 본질적으로 문화적 역사적 맥락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견지에서 텍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대화의 교육모형과 실천에 정향된 해석학적 패러다임은 가치와 적절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도 다음과 같은 난점이 있다. 첫째로 교육과 교육학의 상대주의화를 해소할 수 있는 장치를 충분히 마련하지 못했다. 지적 도덕적 원칙이 개인과 사회의 기호문제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103> 해석학적 지식은 주로 전승된 의미에 국한되고, 해석자 자신의 선이해에 제한 받기 때문에 상대주의의 소지가 있다. 해석학적 교육공동체에서 교사의 임무는 학생들을 텍스트와 전통에 입문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입문이 전통의 근저에 놓여 있는 합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이 패러다임은 전통적 기준과 인문학적 고전을 중시하고, 산업문명과 현대성에 소극적 태도를 견지하는 보수주의 또는 언어주의의 교육과정에 기울기 쉽다.
둘째로 언어와 사회제도의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통한 교육의 심층적 규범성을 확보하기 어렵다.104> 언어는 사회적 삶의 조건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감출 수도 있다.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 안에서 당연시되는 교육적 규범에 비추어서 교육적 성과나 방법이 바람직하고 좋은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표층적 규범수준을 넘지 못한다. 이렇게 볼 때 해석학적 패러다임은 분명 한계를 갖진 것이다.
주86) H. Pearse, "Brother, Can You Spare a Paradigm?", Studies in Art Education (24:3, 1983), 158쪽.
주87) T. S. Kuhn, The St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176쪽.
주88) Pearse, 159쪽.
주89) 같은 책, 162쪽.
주90) J. F. Soltis, "On the Nature of Educational Research", Educational Researcher(13:10, 1984), 6쪽.
주91) Habermas, 1972, 4쪽.
주92) W. H. Schubert, Curriculum - Perspective, Paradigm and Possibility(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 1986), 180쪽.
주93) Pearse, 159쪽.
주94) Lapp, 9쪽.
주95) Habermas, 1971, 1-4쪽.
주96) Habermas, 1972, 308-309쪽.
주97) Soltis, 5쪽.
주98) Held, 1980, 307쪽.
주99) H. G. Gadamer, Truth and Method(New York: Seabury Press, 1980), ⅶ쪽.
주100) Soltis, 5-7쪽.
주101) Habermas, 1972, 311쪽.
주102) G. F. Kneller, Movement of Thought in Modern Education(New York: John Wiley and Sons, 1984), 68쪽.
주103) 같은 책, 119쪽.
주104) Soltis, 9쪽.
⑵ 비판적 교육패러다임
비판적 패러다임: 하버마스의 인식관심론은 경험과학(Ⅰ), 해석학(Ⅱ), 비판과학(Ⅲ)을 포함한 삼원론적 패러다임이다. 그의 패러다임에서 Ⅱ와 Ⅲ의 경계선은Ⅰ과 Ⅱ 또는 Ⅲ과 Ⅰ에서 보다 덜 선명하며, Ⅱ로부터 Ⅲ으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비약이 필요치 않다.105> 패러다임 Ⅲ과 Ⅱ는 모두 교육연구와 실천에서 규범 차원이야말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본질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다. 그러나 Ⅱ와 Ⅲ은 규범의 표층(상대성)과 심층(보편성)의 수준 차이에서 구분된다. 비판적 패러다임은 무엇보다도 교육과 사회생활의 역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계기와 그 영향력을 심층적으로 규명하는데 특징이 있다.
하버마스와 노선을 같이하는 비판이론가 공동체가 존재한다.106> 이들은 사회, 정치, 교육현상에 대한 탈 가치적 접근을 '신화'로 규정짓고, 현행의 지배적 규범과 교육활동을 비판적으로 탐색하려 한다. 교육제도와 실천을 탈 신화화하기 위하여 해방관심에 초점을 두고, 집합적 의식과 비판적 자각을 촉구한다.107> 교육비판이론가들은 교육이 본래 좋은 것이며 사회의 모순과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는 생각은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로서 허구적인 것임을 폭로하고 그 해결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비록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은 이들처럼 교육문제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지만, 그의 비판과 자기반성의 논리는 교육적 과정에 시사하는 바 크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교육실천에서 권위주의적 접근을 배격하고 개방된 토론과 자유로운 참여 기회를 확장하자는 것이다.
산업적 효율성에 필요한 지식의 생산과 전달을 위한 '공장으로서 합리화된'108> 오늘날의 대학은, 인문적 교양을 추구하는 탈 정치화된 상아탑으로서의 전통적 대학에 못지 않게, 이데올로기적으로 역할을 담당하고 민주공동체의 건설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대학에서 기술적으로 이용 가능한 지식의 생산 및 전달에 치중하는 산업적 기능을 넘어서 직업적 실천윤리, 문화 전통, 정치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또는 과학의 실천적 적용과 진보를 위해, 민주적 의사결정의 과정으로서 비판적 논의가 필수적이다.109> 무반성적으로 당연시되는 대학의 기능으로부터 그리고 실천에서 벗어난 과학적 논리가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을 이루기 위해 자기반성(이론적, 실천적 계몽)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자기반성은 그의 비판적 패러다임의 중심개념인 성숙성(자율성과 책임) 또는 이성에의 관심에 의해 주도된다.110>
하버마스에 따르면 학문의 진보와 자기반성은 내적으로 연결된다.111> 비판적 패러다임에서는 과학의 이론적 토대와 방법론에 관한 '메타 이론적 논의'112> 통해 과학 자체의 발전은 물론 과학적 지식의 실천적 적용을 정당화한다. 과학이 자기반성하는 과정 가운데 철학하는 힘이 작용하며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이 통합된다. 예를 들면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 의해 의학자가(역사가에 의해 사회학자가, 언어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해 철학자가) 과학의 이론적 가정과 방법론적 한계를 새롭게 인식할 때, 비로소 학문의 진보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나는 사회학과 정신분석학을 연구한 의학자가 심리형성에 대한 가정환경의 영향력을 검토함으로써 의학에서의 어떤 생물학적 기본가정을 반성하게 되었을 때, 이를 철학적 계몽이라고 간주한다. 사회학자가 역사학자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사회학적인 일반가설을 역사적 자료에 적용하여 과거의 역사들이 이론면에서 불가피하게 강조하였던 특질을 깨닫는 한편 더 나아가 방법론적으로 억압된 보편과 개별과의 관계를 반성하게 되는 것도 철학적 계몽이라고 간주한다. 또한 철학자가 문법규칙의 학습에 대한 최근의 언어심리학연구로부터 언어행위 및 언어와 외부 조건과의 인과적인 연결성을 파악하고 이렇게 하여 단순한 의미이해의 방법적인 한계를 반성하게 되는 것도 철학적 계몽이라고 간주한다.113>
이러한 이론적 계몽은 학제간적인 연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학의 자기반성의 결과이다. 이러한 자기반성 안에서 여러 과학은 고유한 자체의 전제를 비판적으로 깨달을 수 있음은 물론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보존하게 된다. 과학적 지식을 교육적으로 적용하려면 과학의 전제와 그것의 실천에 대한 관계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논의하는 자기반성이 요망된다. 자기반성이란 민주적 의사결정을 위한 토론의 형식을 존중하는 '공적 담론의 원리'114> 안에서 확보가능한 합리성을 추구하는 일이다.
삼원적 패러다임의 적절성: 교육문제의 이해와 해결을 위해 패러다임적 접근은 도움을 준다. 그러나 모든 패러다임이 교육적으로 적당한 것은 아니다. 교육과 교육연구를 위한 언어와 논리는 패러다임들마다 독특하고 상호모순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에서, 메타인식론적으로 교육패러다임들의 한계를 보여 주고 이들을 재구성하여 하나의 교육패러다임을 확립하려는 노력도 발견된다. 그 예를 크론바흐와 서피115>의 구분(결정정향적 탐구와 결론정향적 탐구)에 근거해서 '실천적 교육탐구'와 '인식적 교육탐구' 두 유형으로 된 하나의 교육 패러다임을 제시한, 폽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116>
그러나, 교육과 교육학의 패러다임에 있어 이와 같은 구별(인식론적 탐구와 실천적 탐구)은 적절하지 못한 것이다. 이 구분은 교육의 본성에 대해서는 물론 실천적 탐구의 의미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은 인간의 보편적이며 기본적인 사회활동이고, 교육연구는 '교육이라는 실천적 활동을 연구하는 실천', 다시 말해서 교육실천을 위한 이론적 탐구이다. 따라서 교육과 교육적 탐구에서 '실천'이야말로 본질적 중요성을 지닌다.117> 실천은 통상 행동일반에 관련된 규범적 의미로 사용되며, 교육의 맥락에서 규범의 '표층적 수준'과 '심층적 수준'은 교육의 실천과 연구에서 지향하는 바가 결코 동일하지 않다. 표층적 수준은 특정한 사회문화적 가치의 수용을, 심층적 수준은 그런 가치를 반성적으로 검토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이데올로기의 지배로부터 개인과 사회의 해방을 각각 교육적 판단의 준거로 삼는다.118> 따라서 실천적 교육패러다임은 다시 사회적 맥락의 차원과 보편적 규범의 관점에서 구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볼 때 이원적 교육패러다임의 한계는 자명하다.
이런 견지에서 경험적, 해석적, 비판적 차원이 망라된 교육패러다임은 적절성을 보여준다. 훌륭한 사회정치이론이란 동시에 경험적(객관적), 해석적(주관적 또는 상호주관적), 규범비판적(이데올로기의 인식과 행동적 가치결정에 관련된)이다. 사회적 기본활동인 교육과 교육연구도 삼차원성은 필수적이다. 교육연구와 실천은 경험적, 해석적, 비판적 접근을 포괄한 만큼 적절성을 부여받게 된다. 먼저 교육활동은 경험적 연구를 통하여 인과적이고 상관적인 규칙성이 규명되고 실행의 효율성이 측정되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주관적 또는 상호주관적 차원의 탐구와 실천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육참여자와 연구자들은 교육의 이데올로기맥락을 충분히 규범비판적으로 탐색하고 평가하여야 한다.119>
이렇게 세 가지 패러다임적 틀로 구성되는 교육패러다임의 언어와 논리를 처음으로 제공한 사람은 하버마스(1968)였다.120> 최근에 와서 하버마스의 삼원적 패러다임이 적절한 것이라는 사실이 여러 교육학자들에 의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121> 그러면 하버마스의 삼차원적 교육패러다임이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첫째로 교육에 대한 보다 적절한 이해와 접근을 위해서는 포괄적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하나의 지배적 패러다임에만 의존할 경우 교육과 교육연구는 보수주의, 독단주의, 또는 지적 정체성을 벗어나기 어렵다.122> 둘째로 진정한 교육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해 성원들은 자기반성과 개방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삼차원적 패러다임은 무엇보다 권위주의적 접근과 독단적 주장을 배격한다. 개방된 토론과 자유로운 참여기회의 확장과 제도화를 추구해야 한다.123> 이 패러다임을 따르는 교육실천가와 연구가라면, 마땅히 수준 높은 교육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서로의 관점과 활동을 적극적으로 고찰하고, 가능한 다양한 증거에 입각하여 판단을 내리며, 서로의 선의지와 지성을 인정하는 개방된 태도로 나아갈 것이다.
주106) 수정주의교육사가(Katz, Green, Spring), 신교육사회학자(Young, Eggleston, Keddie), 커리큘럼 재개념주의자(Mcdonald, Pinar, Huebner) 등이 여기에 속한다.
주107) Soltis, 6쪽.
주108) Habermas, 1971, 4쪽.
주109) 같은 책, 9쪽.
주110) Habermas, 1972, 310-311쪽.
주111) Habermas, 1971, 9쪽.
주112) '규범적 진술이 기술적 진술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고 한 흄(Hume)의 주장은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과학적 탐구를 단지 그것이 발생한 논리적 조건 아래서만 판단해야 할 필요 는 없다고 하버마스는 생각한다. 과학의 진보는 메타 이론적 논의를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에서는 분석적 틀의 유용성, 탐구전략의 편리성, 탐색방법의 선택, 조 작적 정의의 가정 등에 관해 토론이 전개될 수 있다. 이때 전개되는 비판적 사고와 반성은 결국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통일을 가능하게 한다(Habermas, 1972, 6-7쪽).
주113) Habermas, 1971, 8쪽.
주114) 같은 책, 7쪽.
주115) Cronbach L. & Suppes A., Research for Tomorrow's School(1971).
주116) J. A. Popp, "Paradigms in Educational Inquiry", Educational Theory(25:1, 1975), 28쪽.
주117) 같은 책, 29쪽.
주118) Soltis, 9쪽.
주119) 같은 책, 8-9쪽.
주120) T. Aoki, Curriculum Evaluation in a New Key(Vancouver: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1978), 2쪽.
주121) 김태오, 1991, 72쪽.
주122) Ashton, 13쪽 또는 Pinar, 7쪽.
주123) Gibson, 88-90쪽.
2. 합리적 교육실천
⑴ 교육실천의 의미
실천철학과 교육철학: 교육에서 '실천'의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다. 그것은 어떤 능력을 획득하기 위해 행한 활동으로 파악될 수도 있고 그 능력이 완전히 획득되었음을 입증하는 활동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천의 개념이 이론과 관련되어 규정될 경우는 보다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카124>는 이 경우 구분되는 세 가지 실천관이 지닌 각각의 교육실천적 난점을 논의하고 올바른 접근방법을 제시한 바 있다. '이론과 대립된 실천', '이론부하적 실천', '이론선행적 실천'을 고찰했다. 이들 가운데 하나만을 강조하고 그 밖의 것들을 배제한다면 교육실천에 대한 설명이 불완전하고 일방적인 것이 되고 만다. 모두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아울러 교육실천 또는 실천의 준거 및 속성을 올바르게 파악하려면 사상사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접근은 일찍이 하버마스에 의해『이론과 실천, 1963』에서 시도된 바 있다.
교육철학은 '무엇이 철학인가? 라는 물음에서 출발하기보다 '실천이란 무엇인가?'를 밝히려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125> 하버마스의 프락시스관은 교육철학의 성격을 규정하는 새로운 전망을 제공한다. 그의 의사소통적 실천의 개념과 논리는 하나의 훌륭한 참조틀로 사용될 수 있다. 오늘날 윤리적으로 계몽된 행동은 과학 기술적 합리성에 밀려 주변적이 되고 전체적으로 말소될 위기 상황에서 올바른 실천의 개념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다.
교육실천의 규범성과 과학성: 교육은 사회적 역사적 맥락 안에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의 과정인 교육은 본질적으로 규범적 인간 양성해야 한다. 교육실천에 있어서 규범 문제는 두 가지 다른 수준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표층 수준의 규범적 고려사항은 통상 우리가 당연하다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주어진 맥락에 비추어서 교육의 성과가 바람직한지 여부와 도덕적으로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데 필요하다. 이데올로기적 의식에 대한 심층수준은 …… 규범적 고려에서 잘 나타나지 않지만, 무비판적인 의식과 특정한 역사안에서의 사회적 존재로서 음미하지 않는 삶으로부터 우리 자신과 동료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필수적이다.126>
의사소통 능력발달의 기초가 논리적으로 규범적 가치와 전통에 입문하는 데 있다. 교육실천은 규범적 완성을 위한 규범적 원리를 가진다. 교사의 가르침은 학생의 바람직하고 올바른 방향으로의 발달을 전제하며, 교과 선택, 교육절차, 교육방법은 물론 교육의 결과 또한 실천적 판단의 표준에 따라서 윤리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127> 입문으로의 교육모형은 피터즈에 의해 강력히 주장된 바 있다. 하버마스의 심층 규범은 이 모형을 넘어선 것이다.
하버마스가 제시한 의사소통의 상호주관성은 상호성과 달리 규범적 개념이다. 굴드너(Alvin Gouldner, 1960)는 상호성이 규범이라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상호적 관계도 구분되어야 한다. 즉 쌍방이 비교 가능한 상황에서 동일한 일(X=Y)을 하거나 기대할 수 있는 '완전한' 상호성은 일방이 X를 타방이 Y를 각각 기대하는 '불완전한' 상호성( 예컨대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의 경우)과 다른 것이다. 따라서 상호성은 상호작용적 인식에 종속되므로 규범적이 아니다. 의사소통의 일반구조에 자리잡은 상호주관성이야말로 규범적인 것이다.128> 상호주관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정의로운 인간 관계는 물론 올바른 인식과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호주관성의 규범에 입각한 교육실천에서 교육공동체의 성원들은 상호존중과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상호주관적 인간관계 안에서 교사는 더 이상 학생에 대해 권위주의적으로 군림하는 지적 엘리뜨가 아니다. 따라서 '양편 모두 가르침을 주고받는 의식이 없으면 없을수록 교육이 더욱 잘 된다'129>는 표현의 의미와 학생들의 교사나 교사의 학생들이 아니라 '학생으로서 교사'나 '교사로서의 학생들'130>이라는 전망을 우리는 하버마스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말하고 의도하고 전제하는 모든 것은 의사소통적 실천 안에서 타당성 주장( 객관세계 ↔ 진리성, 생활세계 ↔ 규범성, 내면세계 ↔ 진솔성, 언어 ↔ 이해가능성)에 개방되어 있다.131> 규범적 주장들이 경쟁, 비판, 방어, 개정될 수 있다는 관점이야말로 합리성의 이념에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비판 가능한 타당성주장에 대해 상호주관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나 근거제시의 가능성은 이해도달을 지향하는 의사소통적 실천의 관건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른 교육실천은 비판적이고 독자적인 사고를 고무하여 자율성을 함양하는 교육모델에 연결된다. 이 모델은 교사가 가치 있는 지식체계를 전달하기 위하여 토론과 합의 형성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할 수 없는 교육현실에서 불가능하거나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132> 그러나 자율성을 존중하는 교육실천이란 전망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참다운 의미에서 과학성은 경험과학적 객관성을 넘어 선다. 비판과학에서 말하는 과학성은 올바른 인식을 위한 방법적 엄밀성과 상응한다. 프락시스 또한 방법적으로 엄밀하게 인식될 때 비로소 보편 타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실천의 엄밀성을 '논의이론'을 통해 입증하고자 했다. 그는 의사소통적 논의를 실천함에 있어 '이상적 담화상황'을 전제한다. 이 경우 상호주관적 또는 보편적으로 조리 있는 논증을 위하여 진리와 규범을 협동적으로 탐색하는 힘 다시 말해서 '더 나은 논증의 힘'을 제외한 그 어떤 동기도 배제하고자 했다.133> 보편타당성을 지향하여 교수와 학습의 내용을 검토하는 과정은 합리적 교육실천에 필수적이다. 타당한 이유의 구속력에 대한 가르침과 배움의 추구 및 수용이 합리적 교수와 학습의 조건이다.
주124) W. Carr, "What is Educational Practice?", Journal of Educational Philosophy(21:2, 1987), 164-166쪽.
주125) 같은 책, 1987, 173쪽.
주126) Soltis, 9쪽.
주127) 같은 책, 8쪽.
주128) Habermas, 1979, 88쪽.
주129) J. Dewey, Democracy and Education(New York: The Free Press, 1966), 160쪽.
주130) P. Freire, Pedagogy of the Oppressed(New York: Herder and Herder, 1970). 53쪽.
주131) Habermas, 1984, x-xi쪽.
주132) Kneller, 177쪽.
주133) Habermas, 1984, 25-26쪽.
⑵ 교육실천의 목적
자율성의 발달: 비판이론가들( Horkheimer, Fromm, Adorno, Marcuse 등)이 그랬듯이 하버마스 또한 자율적 자아와 해방된 사회 건설의 논리적 토대를 개발하고자 했다. 자아발달에 대한 심리학적 기본개념을 개괄하면서 그는 자율성의 증대를 자아발달의 방향으로 이해했다.134> 행동하는 주체는 (Ⅰ) 자연적 동일성 → (Ⅱ) 역할동일성 → (Ⅲ) 자아동일성이라는 단계적 과정을 거치면서 자율성을 신장시킨다. 이러한 자아발달은 역할수행에서의 규범, 동기 및 행동자의 지각 수준과 관련해서 설명이 가능하다.135> 자아자율성은 자아동일성의 수준에 놓여 있다. 자아동일성이란 타인의 시각에 상응하여 '내적 동일성과 계속성을 유지하는 능력'으로서 '축적된 자신감'을 가리킨다.136> 성숙된 자율성은 '사회화'에 의해 생산되어 '개성화'의 방향으로 발달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의사소통적 능력이다.137> 자아자율성안에서 행동하고 담화하는 주체는 자발적인 의지로 정의와 평등의 이념을 실현한다. 보편적 담론윤리의 수준( 7단계)은 책임감 있는 행동주체로서의 자율적 인간에 대한 신뢰이다.
자율성의 이념은 교육실천적 과제이다. 이는 진보주의자나 전통주의자나 공통적이다.138> 다만 자율성에 관한 이해와 접근방법에서 두 입장은 다르다. 예컨대 피터즈는 교양교육을 통하여 사회적 합리성으로 입문을 중시하는 맥락에서 '도덕적 자율성'을 지향한다면,139> 니일은 심리적 억압으로부터 해방이란 측면에서 '개인적 자율성'을 강조하고 있다.140> 이들 모두의 논증은 건전하지만 하버마스의 담론적 자율성이 교육실천에 있어 보다 더 적절하다. 그의 자율성 개념은 개인과 사회, 논리와 심리 등 이원론적 대립을 변증법적으로 지향한 것이다. 의사소통적 담론과정은 '비판가능성'과 '근거제시'의 원리에 따라 수용 또는 거부된다.
사회합리화: 하버마스에 있어서 사회발전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은 '기술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이다.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것 보다 규범구조의 발달을 가져오는 것이 사회합리화의 근본이 된다. 기술주의는 '객관적 과정에 대한 과학적으로 합리화된 통제'를 지향한 것이라면, 민주주의는 '일반적이고 공적인 의사소통에 대한 제도상의 형식'을 추구하는 것이다.141> 하버마스는 이들이 수렴한다는 낙관주의도 서로 배타적이라는 비관적 주장도 수용하지 않는다. 참여민주주의로써 기술주의를 포섭하는 전망과 방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는 기술적 통제력을 시민들의 합의의 영역 안으로 가져오는 일이었다. 이러한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그는 상호작용능력의 증진이란 교육실천적 문제로 나아간다. 이는 민주공동체의 건설을 위해 듀이가 역설한 의사소통적 과정이 지닌 교육적 의미와 상응한다.142>
사회합리화를 위한 교육실천적 목적은 단순히 상호작용능력의 증대에만 그치지 않는다. 심층 규범적 차원에서 다시 말해 보편타당성과 비판가능성에 의해 합리성을 향한 철저한 자세로 교육현실을 개선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교육실천의 문제에 대해 기술주의적 권위주의적 접근을 배제하고, 공동체의 성원간의 개방된 토론과 자유로운 참여를 통하여 제도화된 편견과 이데올로기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성숙성(자율성과 책임)이 추구되어야 한다.143> 이런 능력은 토의의 제도화와 그 실천 과정에서 발휘되고 획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수용될 때 비로소 교수와 학습의 내용은 그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성원들의 의사소통능력 발달을 통한 사회합리화의 방안이 때로는 급진적인 강경 노선에 있는 교육실천가들의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비판은 도리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근거한 교육론이 흔히 잘못 이해되는 것처럼 결코 과격한 실천론이 아님을 반증해 주는 예가 된다.
주134) Habermas, 1979, 74쪽.
주135) 자아발달의 단계(같은 책, 83쪽 및 87쪽 참조)
규범
동기
행동자
I. 자연적 동일성
행동기대를 이해하고 따른다.
행동의도를 표현하고 채운다.
구체적 행동 및 행동자를 인식한다.
II.역할 동일성
반성적 행동기대를 이해하고 따른다.
당위와 욕망(의무와 취향)을 구분한다.
행동과 규범(개별주체와 역할 당담자)을 구분한다.
III.자아 동일성
반성적 규범을 이해하고 적용한다.
타율성과 자율성을 구분한다.
특정한 규범과 일반적 규범(개별자아와 일반자아)을 구별한다.
(자율적)
(반성화)
(추상화 및 변별화)
(일반화)
주136) E. H. Erickson, Identity - Youth and Crisis(New York: W. W. Norton and Co.,1968), 211쪽 또는 Identity and Life Cycle(New York, 1959), 101쪽.
주137) Habermas, 1979, 83쪽.
주138) D. Carr, "Education and the Promotion of Human Freedom", Educational Philosophy and Theory(14, 1982), 37쪽.
주139) Peters, "Freedom and the Development of the Free Man"(1975) 또는 Ethics and Education(1966).
주140) A. S. Neill, Summerhill, 1996.
주141) Habermas, 1971, 57-60쪽.
주142) Dewey, 1966, 4-5쪽.
주143) Habermas, 1973C, 262쪽.
3. 교육적 적용
⑴ 의사소통적 교육이론
교육이론과 과학이론: 교육이론은 교육현상에 대한 체계적 설명과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명제 법칙 원리 추론 등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교육문제를 공통관심사로 하여 다양한 학문과 접근방법으로 조직된다. 그러므로 교육이론은 단일한 지식체계로 제시되기 어렵다. 더욱이 교육실천에 충분히 적용할 수 있기 위해서 교육이론은 심리학, 철학, 정치학, 사회학 등 학문간의 계속적인 대화에 의해 재조직되어야 한다. 교육이론은 과학적 지식, 규범적 지식, 논리적 지식 등을 포함해야 한다.144> 경험적 주장을 포함하는 만큼 경험적 사실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하고, 가치판단을 포함하는 한 규범적 평가를 받아야 하며, 논증적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만큼 내적 정합성이 검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육이론에 있어서 합리성의 문제는 흔히 교육적 판단의 기준을 어디에( 과학성 또는 규범성) 둘 것인가를 둘러싼 대립에서 발견된다. 객관적 과학성과 실천적 규범성은 교육이론에서 과연 양립 불가능한 것인가? 사실상 교육현상에 관한 설명, 예측, 통제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교육이론도 자연과학과 같은 이론의 범주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교육이론이 과학적으로 발견된 지식에 토대를 두고 과학적 사고와 논리에 근거할수록 그만큼 더 이론적 정당성을 확보할 것이다. 오코너가 교육이론을 형성하는 일이 합리적 활동인 한 그것은 과학에서 요구되는 형태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 였다. 그는 과학적 기준에 의한 설명적 기능을 교육이론의 발전척도를 삼는다. 단순한 기술적 이론체계, 실제적이 아닌 개념구성, 확인 불가능한 권고와 규칙 체계 등은 이론으로서 그 가치가 저하된다.145>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교육문제는 과학적 방법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을 만한 것도 이야기할 만한 것도 못되는 낭비적인 것'이다.146>
오코너의 주장에 대한 허스트의 반론에 의하면, 교육에 관한 논의는 실증적( 경험적, 과학적) 측면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147> 교육이론은 서로 상이한 근거를 지닌 문제들을 다시 말해 과학적인 사실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보다 일반적인 가치판단에 관련되는 도덕적 실천문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실천이론에 속하는 교육이론은 성격상 순수하게 이론적 구조에서 시작하는 과학이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148> 과학이론과 교육이론을 동일선상에서 볼 수 없다. 브레커 또한 교육이론은 과학이론이자 동시에 실천이론임을 논증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과학적 이론'은 기술, 설명, 예언을 바탕으로 하며 '실천적 이론'은 이해, 비판, 전망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는 이들 모두를 포괄하는 교육이론을 두고 '해방적 교육이론'이라고 부른다.149>
하버마스는 과학적 합리성의 효율성 주장을 합리성의 일반의 의미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한다. 과학성을 넘어선 실천적 규범성의 요청이 보다 중요한 조건으로 여긴다. 그러나 교육실천이 가치평가적이고 규범적이라 하더라도 과학이론과 상호 배타적인 것이라 보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교육이론은 '의사소통적 교육이론'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해방적(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론은 지식과 가치에 동시에 토대를 둔 사회 정치적 교육프로그램을 산출하기 위해 경험적 관심과 가치적 관심을 제휴한 합리적 교육모델을 새롭게 만들려는 시도이다. 이와 같이 브레크와 허스트와 하버마스 사이에는 동일한 논점이 있다. 그것은 타당한 교육이론이란 과학적으로 접근되는 이론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교육이론은 단순히 교육목적을 달성하는 데 관련된 수단의 효율성을 평가하는 원리로서 과학적 설명과 예측 그리고 통제가능성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교육의 목적 내지 가치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원리에 관한 실천문제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교육이론은 과학성과 실천성에 근거한 것이다.
하버마스의 언어와 논리에 입각한 합리적 교육론은 교육이론을 하나의 특정한 이론으로 환원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여기서 과학주의적 교육론은 합리적 교육이론의 기본조건을 결여한 것이 된다. 합리적 교육이론으로 정당화하려면 규범적 생활세계에 이어지는 실천이론을 과학이론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배제하기보다는 다른 종류의 근거를 가진 것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합리적 교육이론은 반드시 좁게 과학적인 개념틀에 한정될 수 없는 넓은 의미의 포괄적인 교육이론이어야 한다. 이는 합리적 교육이론의 성립조건이 어떤 하나의 근거가 아닌 다원적 근거를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의사소통적 교육이론에서는 경험적 근거와 규범적 이유가 모두 고려된다.
합리적 교육목적: 합리성은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목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교육적 가치이다. 교육목적으로서 합리성의 가치를 반박하는 논증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150> 그러나 합리성 또는 비판적 사고력을 교육의 목적으로 제시한 많은 학자들의 논리( 예컨대 Hirst, Peters, Dearden, 1972 또는 Siegel, 1988)에 더욱 수긍이 간다. 그 개념이 다양하고 불일치함에도 불구하고 합리성은 교육의 목적으로 수용할만한 근거는 충분하다. 그렇다면 하버마스의 합리성을 교육목적에 적용한다면 어떤 의미로 이해될 것인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내재적 교육목적을 지향한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외재적 목적, 가치 중립적 목적, 내재적 목적으로 구분될 수 있다. 내재적 교육목적은 교육의 개념에 붙박여 있는 가치의 실현하는 일이다. 즉 그것은 '교육이란 활동이 따라야할 내적 기준'이며 교육의 의미 안에 이미 놓여 있는 것이다.151> 내재적 교육 목적 이외의 다른 목적에서는 교육의 논리와 의미를 심각하게 문제시하지 않는다. 외재적 또는 가치 중립적 목적 교육을 통하여 달성하려는 즉 교육활동 밖의 목적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고 선택된 수단으로서 교육의 효율성을 제고하려 한다.
하버마스의 합리성은 자유롭고 정의로운 의사소통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토론의 잠재력에 의해 개인의 발달과 사회의 진보가 달성하려는 것이다. 대화와 토론의 과정에서 진정한 교육력이 작용하게 된다는 생각이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지향은 분명히 가치중립성을 벗어나 있다. 여기서는 경제성과 효율성을 합리적 가치로 일반화하려는 과학주의적 합리성은 오류로 평가된다. 이 말은 수단목적합리성의 외재적 가치가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라는 의미와 다르다. 가치 중립적 실증주의나 공리적 합리성에 제한된 가치를 부여하며 이해도달적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우선적 가치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의 합리성은 '내재적 교육목적'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성원들의 '훌륭하고 참된 삶'152>을 살아 갈 수 있는 의사소통공동체를 지향한 것이다.
둘째로 하버마스의 합리성은 행위하고 담화하는 주체들 사이의 의사소통능력의 발달을 목적 삼는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식 등의 상호작용능력을 가리킨다. 이러한 능력으로서 합리성(이성)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측면의 이성적 능력과 구별되는 것이다.
① 논리적으로 추리하고 논증하는 능력
② 본질이나 현실을 그대로 직관할 수 있는 능력
③ 선악과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
④ 계시와 신앙과는 대조적인 자연적이며 보편적인 능력
⑤ 육체, 물질, 감각과 관계없는 순수한 정신적인 능력
⑥ 전체를 체계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 153>
이것들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측면에서 이성을 규정하지 못했다. 공통적으로 개인적 사고능력 수준에서 이성을 파악한 것이다. 이와 달리 하버마스는 사회적 상호행동능력의 차원에서 성취해야 할 이성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진리주장과 규범에 대한 합리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이성적 능력의 개발은 의사소통공동체내에서의 자유롭고 평등한 대화를 통한 자아의 발달을 의미한다. 자아발달은 ( 내적 자연의) 주관성과 비주관성( 외적 자연의 객관성, 사회체계의 규범성, 언어의 간주관성)의 차원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 자아발달은 또한 인지능력, 담화능력, 행동능력의 개발을 지향한다.154> 발달의 방향은 보편성, 자율성, 자기반성으로 요약된다. 자아발달은 행동갈등의 상황에서 합리적 해결을 위한 상호작용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도덕성을 포함하고 있다. 하버마스의 교육목적은 이처럼 의사소통능력의 증진에로 초점이 모인다. 이 경우 '교육받은 사람'이란 대화적 합리성에 헌신할 수 있는 인간이다. 그는 '상호주관적인 증거에 의해 지지되는 바를 따르려는 열정'155>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주144) V. C. Morris, Philosophy and American School(Boston: Houghton Mifflin Co., 1976), 25쪽.
주145) D. J. O'Connor, An Introduction to the Phliosophy(Lodon: R K P, 1975), 77-78쪽.
주146) D. J. O'Connor and G. Langford, New Essays in the Philosophy(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73), 64-65쪽.
주147) P. H. Hirst, "Educational Theory", The Study of Education(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66), 39쪽.
주148) Hirst, 54쪽.
주149) R. L. Brecque, "Restructuring Education", Philosophy of Education(1985), 462-468쪽. 여기서 그는 하버마스의 합리성이론이 '비판을 지향하는 실천이론'으로 규정하고 있다.
주150) L. A. Reid, Philosophy and Education(London: Heinemann, 1962), 53쪽.
주151) 이홍우, 교육의 목적과 난점(서울: 교육과학사, 1984), 25쪽.
주152) '훌륭하고 참된 삶'(good and true life)은 진리와 선의 구현을 생활목적으로 삼는다. 이런 목적은 편리성, 효율성, 생산성 등의 공리적인 가치들을 포함하지만 이들에 환원될 수 없는 것 이다.
주153) 손봉호, "이성적 인간관", 철학적 인간학(서울: 정신문화연구원, 1985), 225-241쪽.
주154) Habermas, 1979, 100쪽.
주155) 이홍우, 교육과정탐구(서울: 박영사, 1983), 177쪽.
⑵ 합리적 교수 및 학습
비교화적 교수: 합리적인 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보다 나은' 학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준거가 확립되어야 한다.156> '보다 나은' 교육실천이란 '교화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요청으로 제시될 수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는 '강요가 아닌 이유를 통해 가르쳐야 한다'는 원리로 표현 가능하다.157> 이런 맥락에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비교화적(합리적) 교수와 학습의 준거로 적용 가능한 것으로 판단된다. 보다 나은 논증으로 의견일치에 도달하려는 자발성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교수와 학습에서 교화를 피해야 한다는 주장은 교육의 역사에서 근래의 일이다. 교화를 비난조로 의미 해석한 것은 대체로 20세기 초엽인데, 이것은 교육에 있어 민주주의와 아동중심사상의 영향이다.158> 교화에 대한 설명은 대체로 ① 교사의 의도, ② 교수방법, ③ 교조적 내용의 세 가지 각도로 접근된다. 세 가지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본 클라이니히는 ④'결과의 준거'를 보태었다.159> 그에 의하면 교화란 '합리적 사정에 개방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어떤 관점을 지니게 되는' 교육의 결과이다. 그러나 영이 평가하기로, 결과의 준거를 제시한 클라이니히의 조처는 교화의 소재를 의사소통적 행동의 수준에서 독백적 정신분야로 돌리는 잘못을 범한 것이 있다.160> 이 평가가 시사하는 바는 합리적 사정으로의 개방에 관한 판단이 사회적 상호작용의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견지에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준거는 교화문제의 해결에 있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하버마스는 사회적 행동을 목적지향적인 전략적 행동과 이해달성지향적인 의사소통적 행동으로 구분하고 목적합리성은 비판 가능한 타당성주장이 주제화되는 대화적 이성에 의해 검토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취한다.161> 이 관점을 적용하면서 비교화적 교수를 위해서는 대화적 토론이 합리적 인식형성에 결정적 역할이 인정되는 의사소통의 형식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적 교수와 학습'의 개념을 향한 것이다. 이런 개념으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은 듀이 이래로 합리적 교수의 굵은 흐름을 형성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 안에서 교수는 '합리적 대화'와 다르지 않다.162> 여기서 교사는 가르치는 동안 학생들의 자유로운 비평과 일반적 비판의 대상이 됨은 당연하다. 그리고 담화행동으로서 교수의 수용과 이해는 결국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는 수신자로서 학생의 자발성에 놓여 있다.163> 이러한 자발적 이해달성이 존중되는 조건으로서 하버마스는 이상적 담화상황을 제시한 것이다. 이상적 담화상황은 합리적 교수와 학습을 위한 준거로서 활용될 수 있다.
반성적 학습: 하버마스의 반성적 학습의 개념에는 합리적 교수와 학습의 기본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다음은 합리적 교수와 학습과 관련하여 무반성적 학습과 반성적 학습에 관한 그의 견해이다.
무반성적 학습은 이론적 실천적 타당성주장들이 토의에 의한 고려 없이 소박하게 인정되거나 거부되는 행동맥락에서 수행된다. 반성적 학습은 토의를 통하여 수행되는데, 우리는 그러한 토의에서 문제시되고 있거나 제도화된 의심에 의해서 문제가 된 실천적 타당성 주장들을 주제화하여 논증에 토대 하여 이 주장들을 구체화하거나 기각한다.164>
여기서 '무반성적인 학습에서 반성적 학습으로 나아가는 일'이 바로 학습의 수준 향상이 된다. 반성적 학습은 이상적 담화상황을 향한 대화적 이성이 실천되는 학습양식이다. 이상적 담화상황이란 말 그대로 그것은 또한 실제로 경험하기 어려운 즉 반사실적 학습상황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오늘날 전형적인 학습상황은 이런 의미의 반성적 학습상황과 거리가 멀다. 어떤 경험적 연구가 밝히듯이,165> 교사질문 / 학생대답 / 교사반응으로 이어지는 '교수교환'이 이루어지는 학급 안에서 학생들은 수동적이고 비반성적인 학습을 한다. 학습자가 자발적으로 수업내용을 논의적으로 검토하는 경우는 드물다. 증거를 찾고 논리를 따지고 개괄하고 추론하고 가설을 세우는 작업이 오직 교사가 주도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반성적(합리적) 학습이 낮은 정도로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교수교환은 교화적 왜곡을 초래하기 쉬운 조건이다. 학급에서 교사의 반응만이 적절한 것이 무엇인지 그 방향을 지시하는 규정적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학생들은 교사의 사고와 행동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교사들은 결코 나쁜 취지를 갖고 있지 않고, 교조적 내용을 가르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학생 자신의 이유에서가 아니라 학생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화적이다. 이 경우 학생들은 타당한 이유의 구속력에의 잠재력을 개발할 수 없다.
하버마스의 합리적 교수와 학습은 학습자의 자발성과 자유를 중시한다. 교사의 일방적 지시와 지배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아동중심적이다. 그러나 상호주관적인 이유의 구속력과 논증력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아동중심의 교수학습 방식과는 다르다. 아동중심성을 넘어 선 것이다. 교사와 학생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참여하는 가운데 타당한 이유의 구속력에 의해서 이해와 합의에 도달하는 교수와 학습을 추진하기 때문이다. 학습하는 능력은 타당한 근거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달된다. 학습이란 '근거제시의 개념과 맞물리는 것'166>이다. 그러므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리론은 합리적 교수와 학습의 원리로서 적절성을 가진다. 그것은 특히 교사와 학생 모두가 적극적이고 합리적 반응(토론)의 과정이 중요시되는 절차와 방법을 학습조건으로 삼는 것이다.
주156) J. Kleineing, Philosophical Issues in Education(London: Groom Helm, 1982), 28쪽.
주157) R. E. Young, "Critical Teaching and Learning"(1988), 52쪽.
주158) M. A. Raywid, "The Discovery and Rejection of Indoctrination", Educational Theory(30:1, 1980), 2-3쪽.
주159) Kleinig, 1982, 13-17쪽.
주160) Young, 1988, 53쪽.
주161) Roderick, 1986, 109쪽.
주162) I. Sheffler, Conditions of Knowledge(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2-13쪽.
주163) Young, 1988, 50쪽.
주164) Habermas, 1975, 15쪽.
주165) Young, 1988, 56쪽.
주166) Habermas, 1984, 18쪽.
Ⅴ. 맺음말
교육이론과 실천의 다양한 접근은 교육적 합리성의 관점을 달리한다. 교육적 합리성을 결정하기 위한 통약적 의미에서의 합리성을 구성하는 일이 교육의 개념화에 절실히 요망된다. 그러나 철학적 정당화와 사회적 적법화에 의한 타당한 합리성의 언어와 논리를 찾아내기 어렵다. 비록 체계화된 합리성이론이 없지는 않지만, 과학과 윤리, 개인과 사회, 이론과 실천의 합리성 문제에서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은 이론을 접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여기서 하버마스 사상의 중심개념인 '의사소통적 합리성' 원리는 비판, 논증 그리고 전망의 수준에서 사상사적 검토를 거쳐 재구성된 합리성이기 때문에 탐구할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하버마스가 제시한 합리성은 '목적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포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체계는 기본적으로 전자의 한계를 지적하고 후자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데 초점이 모아진다. 목적합리성은 두 가지 난점이 있다. 첫째로 성공지향적 행동체계 안에서 추구되는 과학기술적 효율성이 결국 선하고 참된 삶을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같은 지적은 목적합리적 행동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로 목적합리적 행동이 이른바 '합리화의 역설'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은 목적합리성이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으면서 그릇된 현실조차 옹호하는 표준으로 작용하여 규범적 생활세계를 침해하는 데서 볼 수 있다. 목적합리적 행동은 이와 같이 한계를 갖는 반면에 의사소통적 행동은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목적합리성에 비해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두 가지 근거에서 우월하다. 첫째로 상호주관적 이해와 합의를 중시하는 의사소통적 행동은 규범적 요청을 충족시킨다. 즉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참여자들은 자유, 평등, 정의 등 규범성을 서로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둘째로 지식에 대한 자기반성을 촉구하고 사회지배의 적법성을 문제삼는다. 이 점에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진리와 규범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다. 이와 같은 규범성과 비판가능성이란 견지에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목적합리성에 비해 적절한 것이 된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성립조건은 보편타당성과 이상적 담화상황이다. 보편타당성에는 이해가능성, 진리성과 효율성, 정당성, 진솔성이 포함된다. 이들은 각각 언어, 외적 세계, 생활 세계, 내면 세계로 구분되는 보편적 실재와 상관되어 인지론적으로 주제화된다. 의사소통과정에서 문제시된 타당성주장을 이와 같이 해결하려는 시도는 합리적인 접근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상적 담화상황은 현실 세계에 존재한다기보다 합의를 위한 이념으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화의 목적과 의미 그 자체가 내재적으로 지향하는 것이며, 왜곡된 의사소통을 비판하고 말과 행동의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는 표준적 조건으로 설정한 것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인식론과 사회철학의 토대 위에서 확립하였다. 그는 이른바 인식관심론은 통해 관념론과 유물론, 과학주의 등의 합리성이 지닌 한계를 넘어선 합리성의 개념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하버마스의 인식론은 '우리의 인식은 우리의 관심에 의존한다'는 명제로 압축된다. 인식은 기술적 인식관심, 실천적 인식관심, 해방적 인식관심에 의해 구성됨을 규명한 그는 해방적 인식관심을 중심으로 인식비판으로서 인식론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한다. 합리성을 과학주의적 합리성으로, 인식론을 과학철학으로 환원하려는 입장을 논박했다. 이와 달리 해방적 인식관심은 자기반성의 인식론적 철저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다른 관심에 비해 합리성( 인식의 자율성과 타당성)을 확보한다.
하버마스의 합리성의 사회철학적 정당화는 의사소통적 실천(프락시스)론에서 발견된다. 그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향한 실천은 규범성과 엄밀성(보편 타당성)을 동시에 충족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의사소통적 실천은 고전적 정치학과 근대사회철학의 실천관을 변증법적으로 재구성된 개념이다. 다시 말해 윤리성을 확보하지만 엄밀한 인식가능성을 포기한 고전적 정치학과 인식의 엄밀성을 추구하면서 규범적 요소를 경시한 근대 사회철학의 실천관을 지양한 것이다.
교육의 패러다임적 이해는 합리적 교육이론의 설명과 실천에 이바지 할 것이다. 하버마스의 인식론에 근거할 경우 교육패러다임은 다음과 같이 유형화된다. 첫째 '경험과학적 교육패러다임'이다. 이는 오늘날 교육연구와 실천을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기술적 지식의 생산과 그 효율적 전수 등을 목적 삼을 경우 적합하다. 그러나 경험과학적 객관주의와 과학적 환원주의를 자명한 것으로 보면서 교육과 교육 실천의 본질인 규범성을 간과하거나 배제하는 경향이 있기에 합리적 교육패러다임으로서 충분하지 못하다. 둘째 '해석학적 패러다임'이다. 이것은 전통에 입문하기 위한 텍스트의 이해와 토론교육에서 적절하다. 그러나 표층적 교육규범 수준에 불과하며 상대주의, 보수주의, 언어주의가 지닌 한계가 있다. 셋째 '비판적 교육패러다임'이다. 이것은 앞의 두 패러다임과 달리 규범성과 심층적 수준에서 구성된 교육적 합리성의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권위주의적 교육을 배격하고 자유로운 토론과 자기반성의 잠재력을 통해 학문(과학)의 진보와 계몽을 지향하는 전망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구체적 대안과 실체적 내용의 제시에 있어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넷째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토대한 교육패러다임이다. 이것은 비판적 교육패러다임 중심으로 경험과학적, 해석학적 교육패러다임을 종합한 것이다. 교육 연구와 실천에서 삼차원적 교육패러다임의 설정은 유일한 패러다임이란 존재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교육과 교육연구는 다차원적으로 접근되어야 한다. 교육공동체 성원들의 자기반성과 개방적 태도( 의사소통)가 존재하는 만큼 합리적이 될 수 있다.
교육실천은 의사소통적이어야 한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실천의 개념은 사회적 규범성은 물론 인식론적 엄밀성을 바탕으로 '의사소통적 실천'을 개념화한 바 있다. 이런 견지에서 그의 실천 개념은 '실천철학으로서 교육철학'을 재정립하는데 도움을 준다. 의사소통적 실천교육은 교육의 이데올로기적 맥락에 대한 비판과 자율적 인간형성과 해방된 사회의 건설을 지향한다. 자아발달과 사회합리화의 실현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교육실천적 방향이다. 사회합리화를 위한 교육은 사회통합과 통제보다 참여와 합의의 존중이다. 교육적 효율성의 제고가 아니라 교육에 의한 상호의사소통능력의 증대를 목적 삼는다. 보편 타당한 이유의 구속력에 의해 교수와 학습의 합리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하버마스의 합리성이 교육이론과 실천에 주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교육이론의 합리성은 경험적 이유와 규범적 근거를 변증법적으로 통합에 있다. 둘째로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공리적 효율성 보다 '훌륭하고 참된 생활'의 실천에 우선성을 둔다. 이런 견지에서 내재적 교육을 지향한다. 교육목적으로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상호주관적 근거를 추구하는 대화능력의 발달을 추구한다. 셋째로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비교화적 교수와 학습을 요청한다. 교사와 학생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반성과 토론을 통하여 타당한 이유의 구속력에 의해 자유롭게 진리와 규범을 수용 또는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하버마스의 이론은 체계적으로 정연하며 포괄적이다. 그러나 몇 가지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로 이론이 대단히 난해한 전문적인 용어와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로 인간행동의 정서적 동기와 욕구 같은 감정적 측면을 경시하고 있다. 셋째로 대화과정에서 자기반성의 힘을 과대하게 평가한다. 그리고 하버마스의 합리성 원리를 교육문제에 적용함에 있어서 난점도 없지 않다. 첫째로 교육과정에서 비지적인 측면에 관한 충분한 고려가 부족하다. 교육적 합리성의 지향이 조화로운 전인적 발달을 저해할 수 있다. 둘째로 하버마스의 교육모델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가치, 지식, 기술, 태도에의 입문과 사회적 적응을 강조하는 교육과 상충하기 쉽다. 셋째로 교육의 생산성 또는 효율성과 같은 비규범적인 교육적 가치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넷째로 대화와 자기반성의 원리에 근거한 합리적 교육은 고등교육과 성인교육 이외의 교육단계에서는 그 가치가 저하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교육에서 합리성을 확보하고 평가하기 위한 원리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본다. 대체로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원리는 교육적 대화 또는 대화교육을 근본으로 하는 소크라테스의 교육이념과 방법의 중요성을 새롭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다만 교육과정에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의 제시가 절실히 요청된다. 교육실제에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개발을 프로그램의 개발이 과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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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 이론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체계와 생활세계에 대한 논의를 통해 공론영역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해명을 한다. 하버마스의 체계-생활세계 패러다임에 의하면, 근대화 결과로 경제와 정치체계는 화폐와 권력이라는 조정매체의 제도화를 통하여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되었다. 즉, 자본주의적 근대화라는 체계요구의 '선택적'압력 속에서 자본주의적 경제와 근대적 관리국가의 확장은 사실상 일면적이고 왜곡된 그리고 위기를 내포한 사회적 합리화인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를 가져왔다.
후기 자본주의의 체계위기는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라는 사회병리적 현상으로 대체된다. 이처럼 생활세계의 병리화 현상에 의하여 체계위기가 대체되는 것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이 병리현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한편에서는 체계가 생활세계의 일상실천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형태를 취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지식생산의 제도화가 낳은 전문가 문화가 생활세계의 문화적 빈곤을 초래한다.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이러한 강제적인 병합현상, 즉 목적 합리성의 과도한 발달로 인해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압도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는 정치적 수준에서 공론영역의 비판적 잠재력이 약화되고 소멸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버마스에 의하면 이러한 생활세계의 식민지와 과정이 그대로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세계의 고유한 논리와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잠재력에 의해 저항에 부딪힌다. 즉 그는 생활세계의 의사소통행위에 내재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잠재력이 실현되는 '정치적 공론영역'을 유지하고 활성화시킴으로써 체계(자본주의)의 고유논리를 생활세계(민주주의)적 요구에 의해 통제하는 해방적 잠재력이 생활세계 자체에 있다고 본다. 즉 공론영역은 대중 매체 독점체들과 사회적 권력집단들에 의한 의식적 조작과 무의식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전면적으로 장악되거나 조종되지 않는다. 이러한 권력 조작적 및 이데올로기적 통제에 맞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는 저항 잠재력을 토대로 시민사회와 정치조직들이 연대를 통해 기존의 공론영역을 활성화시킨다면 해방적 가능성을 어느 정도 실현시킬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능성의 실현 정도는 경험적인 문제로서 이는 곧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민주주의를 실현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 의사소통적 합리성
체계의 위협으로부터 생활세계와 공론영역의 저항과 해방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 곧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행위는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행해진 것이기에, 그 행동에 대해서 그것이 과연 합리적으로 행해진 것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할 수 있는 판단기준을 가지게 된다. 즉 하나의 행위는 그것이 실현시키고자 한 목적을 실제로 달성하며, 그 목적달성에 유효한 행위이면 합리적인 것이 된다. 이런 행위를 한 마디로 '목적합리적 행위'라고 부른다. 그 행위의 관련대상이 객체, 즉 자연이나 사물일 경우 그 행위를 '도구적 행위'라고 부르고, 관련대상이 주체, 즉 다른 인간일 경우 그 행위를 '전략적 행위'라고 부른다.
그러나 전략적 행위 역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세계 안에 나의 목적달성에 유용한 어떤 작용을 일으키게끔 유도하는 행위를 의미하므로, 전략적 행위 역시 간접적인 도구적 행위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목적합리적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그러한 노동의 행위를 통한 자연지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에는 이와 같이 성취를 지향하는 수단적 내지 전략적 행위뿐만이 아니라 순수하게 이해를 지향하는 행위들도 있다. 즉 세계에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어떤 작용을 미치려 하는 대상적 관계에 앞서, 서로의 사유 내지 행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해지향의 행위가 있는데, 이를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행위'라고 부른다. 의사소통적 행위란 서로 대화하는 행위를 의미하며, 이 대화를 통해 발화자와 청취자가 상호이해라는 인격적 관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을 뜻한다.
도구적 행위에 있어서 행위주체가 대상을 관찰하고 기술하는 개별적 인식주체라면, 의사소통적 행위에 있어서의 행위주체는 서로간에 이해의 상호작용을 갖게 되는 상호 주관적 주체가 된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인간의 언어행위의 가장 기본적 지향이 상호이해 내지 의사소통이라는 것, 이 의사소통을 통해 인간은 대상적 관계에서 벗어나 상호관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사소통의 가능근거는 무엇인가? 의사소통이 성공적으로 행해지기 위해서(이해가능하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즉 이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행위참여자들이 서로의 발화에 대해 그것이 참이고 진실하며 타당하고 이해가능한 말이라는 것을 가정 혹은 요구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한다.
첫댓글 내용 소개)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1926- ) 소개---->생애--->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론 (오고가는 말 속에 진리가 있다)--->급진학생비판--->하버마스 사상소개--->하버마스와 루만의 쟁점별 시각차 정리--->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론’--->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 (생산패러다임에서 의사소통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중심으로)---->하버마스의 합리성과 교육 ---->보편타당성과 이상적 담화상황 --->인식론적 토대 --->해방적 인식관심의 합리성 --->실천에 대한 의사소통적 재구성 --->의사 소통적 교육이론--->하버마스 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