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힘드셨을까? 남들이 그렇게 생각했어도 저희 팬들은 아찌를
믿었어요,,, 이사하신거 넘 축하하고요(혹시나 아찌가 이글을 보실수도
있단 생각에....) 이제 고생끝!!!!!! 그쵸?
우리 다같이 축하해드려요~~~~~~~~
전영록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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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살 나이차 극복하고 결혼한
전영록·임주연 부부가 처음 털어놓는 결혼생활
“전처 사이의 두 딸을 키우며 우리 부부가 느꼈던 갈등과 사랑이야기”
80년대 오빠 부대의 ‘효시’를 이루며 최고의 가수로 활동했던 전영록. 지난 99년 2월 열여섯살 연하의 임주연씨와 재혼,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이들 부부가 처음으로 본지에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을 공개했다.
아직 ‘새 집’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경기도 용인의 한 아파트에 둥지를 튼 전영록· 임주연 부부는 요즘 새 집에서 나는 특유의 페인트 냄새조차도 향긋하게 느껴질 만큼 행복하다. 열여섯살이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한 이후 만 3년여 동안 다섯번에 걸쳐 전셋집을 전전하다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사날짜를 잡고 나니 설레고 기뻐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가족 모두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 되도록 꾸미고 싶은 욕심에 하루에도 몇번씩 아파트 도면을 펼쳐놓고 가구는 어떻게 배치하는 게 좋을지, 필요한 살림살이는 무엇이 있는지 목록을 만들어 계획을 세웠어요. 무엇보다도 두 아이와 남편의 방을 따로 마련해 줄 수 있어서 좋아요.”
“전세로 살 때는 예쁘게 꾸미고 싶어도 남의 집이라는 생각 때문에 필요한 살림살이만 갖춰놓고 살게 되더라”는 임씨는 “이제야 마음껏 솜씨를 발휘해 집안을 꾸밀 수 있다”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방이 다섯개나 된다는 넓은 집안(65평)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자 부부가 약속이나 한 듯 두 딸의 방문 앞에 섰다.
“재혼한 이후 열몇평의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해서 이곳으로 이사오기 전에는 경기도 분당의 32평 아파트에서 살았어요. 넓은 집으로 이사왔더니 아내도 아내지만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같아요. 여자아이들이라 방을 따로따로 마련해 주지 않았어요. 연년생이라 마음도 잘 통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 잠 잘 때만이라도 같이 대화를 나누고 자매간의 정을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전영록은 탤런트 이미영씨와 이혼에 합의할 때 재산의 전부랄 수 있는 잠실의 아파트를 이미영씨에게 넘겨주고 당시 초등학교 3, 4년인 두 딸을 데리고 열일곱 평짜리 아파트를 얻어 거의 ‘빈손’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재혼 후 다섯번에 걸쳐 전셋집 전전하다 처음으로 내 집 마련해
“계약금만 납입한 상태의 분양아파트를 약간의 웃돈을 주고 구입해서 3년여 동안 6번에 걸쳐 중도금을 납부하느라 허리띠를 졸라맸어요. 남편과 함께 가계부를 쓰는데 어느 날은 막 화가 나는 거예요. 별로 쓴 곳은 없는 것 같은데 돈이 술술 새나가는 것 같아서요. 살림하다보니 먹고사는 데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돈 들어가는 데가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어요.”
새 집으로 이사오면서 새로 구입한 가구는 두 딸의 침대와 책상, 소파와 식탁, 전영록의 방에 짜넣은 붙박이장이 전부라고 한다. 사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돈을 아끼기 위해 있는 가구를 최대한 살렸다는 것.
“커튼이나 침대보 등 각종 패브릭은 강남의 고속버스터미널 상가에서 맞춘 거예요. 터미널 상가에 가기 전에 먼저 인테리어 전문업체 매장을 둘러본 다음 우리 집의 분위기와 맞겠다 싶은 디자인과 원단을 메모해 뒀죠. 그런 다음에 터미널 상가에 가서 내가 원하는 디자인대로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그곳에서도 유명제품과 똑같은 원단을 쉽게 찾을 수 있거든요. 그렇게 하면 50% 정도는 싸게 구입할 수 있어요.”
살림꾼이 다된 임주연과 라이브 카페 등에서 노래를 부르며 80년대의 팬들과 만나는 게 즐겁다는 전영록은 처음에 인터뷰를 한사코 거절했었다. “잘 자라고 있는 두 아이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임주연씨와 재혼한 다음 그는 ‘사는 모습’을 일절 공개하지 않았다.
“두 딸이 한창 예민한 사춘기의 아이들이거든요. 어른들의 판단으로 이혼을 하게 되었지만 아이들이야 무슨 죄가 있나요. 이혼을 하면서 두 딸은 제가 키웠는데 저의 이혼을 두고 말들이 많았잖아요. 그런데 제가 재혼을 하면서 ‘아이들 때문에’ 욕도 참 많이 먹었어요. ‘전영록이 이미영과 이혼하면서 아이들까지 버렸다더라’는 소문이 떠돌았으니까요. 이혼과정과 아이들에 대한 숱한 인터뷰 요청에 말 한마디 하지 않았더니 그런 소문들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에요.”
전영록이 입을 다물고 젊은(?) 여자와 재혼하자 세상 사람들은 ‘것 봐라’란 듯이 수근대기 시작했고 라이브 카페 등에서 노래를 부를 때 “자식까지 버린 나쁜 놈”이라며 무대에 수박껍질을 던지는 손님도 있었다고 한다.
“무대에서 내려가 한마디 했죠. ‘난 자식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말 않고 살았더니 아주 몹쓸 사람 취급을 하더군요. 제가 바람을 피워서 이혼에 이르렀고 젊은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아이들까지 버린 피렴치한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오랜만에 만난 연예계 선배조차도 ‘야, 임마 너 그렇게 살면 못써’라고 충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소문은 아이들도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그런 소문 때문에 아이들이 받는 상처가 무척 컸으니까요.”
현재의 부인 임주연씨는 8년전부터 가수와 팬으로 알았던 사이. 전영록이 이혼하고 부산에서 가수로 활동하고 있을 때 임주연씨가 직접 부산까지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면서 결혼에 이르렀다. 그러나 결혼은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임씨의 부모가 열여섯살이라는 나이차는 제쳐두고라도 두 아이가 딸린 이혼남이라는 사실에 “결혼을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며 반대하다가 전영록을 만난 후에야 ‘믿을 만한 남자’라며 결혼을 허락했다고.
“이혼을 하면서 두 딸과 한 약속이 있었어요. ‘너희들이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둘째딸 우람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재혼을 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 아이들은 그런 아버지를 너그럽게 받아들이더라고요. 제가 이혼을 한 시기는 언론에 알려진 98년이 아니예요. 그보다 2년 전인 96년 초였죠. 만 3년 동안 두 딸들을 챙겨서 학교 보내고 집안살림까지 도맡아 하다가 재혼을 했는데 사람들은 이혼하자마자 재혼한 줄로 알고 있더군요.”
재혼한 이후에도 두 딸을 데리고 살았는데 늘 나쁜 소문에 휩싸여 지금의 아내가 받은 마음의 상처 또한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혼한 이후 부산에서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며 부산교통방송 MC 등을 보느라 서울과 부산을 오갈 때도 아이들 학교 보낼 시간에 맞추기 위해 밤새 고속도로를 달려 서울에 도착해 아이들을 챙겼다. 재혼한 이후 아내가 서울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다 부산에 내려왔다 가는 것을 보고 딸들을 팽개치고 ‘단둘이서만’ 산다고 쑥덕이는 사람들이 많아 부부의 마음고생이 심했다.
“큰딸과 아내의 나이 차이가 열세살이에요. 딸들에게는 새엄마지만 엄마라고 부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어요. 딸들도 엄마처럼 친구처럼 좋아하며 따르면서 세 여자가 똘똘 뭉쳐서 저를 ‘왕따’ 시키기도 해서 가끔 소외감을 느끼기기도 한다니까요(웃음).”
큰딸과 열세살 차이 나는 새엄마를 아이들은 ‘언니’라고 불러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던 큰딸 보람이는 올해 안양예고 1학년에 입학할 예정이다. “방학이지만 미술학원에 다니기 때문에 언니가 집에 없어요”라며 깜찍한 모습으로 ‘언니(새 엄마)’ 옆에 앉아 있는 우람이에게 “새엄마와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자 임씨가 “우린 참 껄끄러운 사인데…”라며 농담을 한다. 이에 질세라 우람이는 “껄끄럽긴 뭐가 껄끄러워요. 이렇게 사진 찍으면 되는데…”라고 응수하며 임씨의 목을 끌어안았다.
재혼한 남편의 전처 소생을 키운다는 것. 어쩌면 임씨의 표현대로 ‘껄끄러운’ 일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내 자식을 키우는 일보다 더 많이 힘들고 마음 쓰이는 일’이라는 사실에 딴지를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혼 초기에는 보람이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였어요. 내성적인 성격에다 삼촌들이 찾아와도 살짝 인사만 하고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을 만큼 낯을 많이 가렸던 아이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성격이 많이 변했어요. 곰살맞게 저에게 ‘언니, 언니’하면서 아주 잘 따르거든요. 제 고민이 있을 때 들어주기도 하고, 자기 고민이 있을 때 스스럼없이 털어놓기도 하니까요. 애들하고 싸우기도 많이 싸우죠. 공부하지 않으면 보통 엄마들처럼 잔소리도 늘어놓고요.”
아이들과 싸우는 일이라고 해봐야 하라는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게 전부이지만 ‘세 여인’간의 싸움에 전영록이 절대로 끼어 드는 법은 없다고 한다.
“어∼휴.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면서 의견 충돌을 빚는 정도가 무슨 싸움이에요. 그런데도 아내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닥달할 때도 많이 신경을 써요. ‘혹시나 아이들이 친엄마가 아니니까 이렇게 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그러는 거겠죠. 살다보면 아내라고 속상하는 일이 왜 없겠어요. 그래도 서른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잘 참고 견뎌요.”
임씨는 두 딸 외에도 보살펴야 할 사람이 또 있다. 다름 아닌 연로한 시부모(황해, 백설희)다. 두 사람 모두 몸이 불편해 병원 출입이 잦은 탓에 여느 때보다도 며느리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2년전 쯤에 시어머님이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다가 수술을 받았어요. 수술 전에는 바깥 외출도 하면서 그나마 움직이셨는데 수술 후에는 문 밖 출입도 삼간 채 집에만 계셔요. 시아버님은 얼마전에 혼수상태에 빠져서 돌아가시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깨어나셨어요.”
“아내가 병든 부모님을 병원에 모시고 다니면서 수발하느라 늘 고생이죠. 뭐”라고 아내 칭찬을 하자 임씨가 “고생이라뇨. 저야 뭐 며느리 된 도리를 할 뿐이고 고생은 남편이 하죠. 사실은 남편의 어깨가 무거워요”라며 효도의 공을 남편에게 돌렸다.
살면서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따뜻하게 건넨 적이 없어 미안하다”는 전영록은 4남 1녀 중 3남이다. 이혼 후 자신의 생활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도 부모의 생활비만큼은 꼬박꼬박 챙겨드렸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큰형이나 먹고 살기에 그만그만한 작은형과 막내동생 등이 부모의 생활비를 댈 형편이 안되자 혼자서 생활비와 병원비까지 도맡아 책임졌던 것.
“이혼한 이후 딸들과 먹고살기 힘들다고 부모님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고 지난 일을 회상하는 전영록은 딸들을 잘 키우고 부모님을 부양하기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밤무대에도 서고, 라이브 카페 등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일개미처럼 일했다고 한다.
“오빠(?)가 불평불만 없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을 보면서 저도 많이 배웠어요. ‘아무리 부모라지만 어떻게 싫은 소리 한마디 없이 묵묵히 부모님을 공경할까’하는 생각이 들곤 했으니까요. 제가 하는 일이라곤 시부모님모시고 병원에 왔다갔다하는 정도예요. 가끔씩 어머님이 ‘고맙구나. 너밖에 없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 말을 들으면 ‘더 잘해드리지 못해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어요.”
“새해 소망은 아내가 유산의 아픔을 딛고 임신하는 거예요”
임씨는 집에서 남편을 ‘오빠’라고 부른다고 한다. 인터뷰 중이라 조심스럽게 ‘남편’이라고 호칭하다가 불쑥 ‘오빠’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얼굴이 발그스레해지며 홍당무가 된다.
“저희 집의 호칭이 참 재미있죠. 딸아이들은 새엄마를 ‘언니’라 부르고, 아내는 저를 ‘오빠’라고 부르니…. 호칭만으로 따진다면 아이들과 아내 사이가 어떻게 되나 몰라요(웃음).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집안의 호칭이 통일될까 모르겠어요.”
“아이를 낳으면”이라는 말에 “혹시나 임신을 했느냐”고 묻자 전영록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99년 초 결혼했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아이는 안 낳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지만 그때마다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는 이들 부부는 사실 결혼한 이듬해 유산의 아픔을 겪었다.
“기다리던 임신이라 두 딸은 물론 온 가족이 좋아했는데 아내가 임신인 줄 알았으면서도 몸을 아끼지 않고 부모님 수발을 들더라고요. 임신 초기에 몸을 조심했어야 하는데…. 부모님이 많이 편찮으셔서 임신했다고 가만히 앉아서 ‘왕비’ 대접만 받고 있을 수 없었거든요. 부모님도 아이 소식을 많이 기다리셔서 무척 기뻐하셨는데 유산된 직후에 ‘유산했다’는 이야기는 차마 드리지 못했어요. 나중에 알게 되신 부모님이 몹시 마음 아파하셨어요.”
임신한 이후 임씨는 보람이에게 속엣말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날마다 입히고 먹이며 여느 집 딸보다 예쁘고 똑똑하게 키우고 싶어 노력하는 임씨지만 언젠가는 자라서 생모에게 가버리지 않을까 싶어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
“‘아빠가 나이도 많고, 너희들도 이 다음에 친엄마를 찾아 가버리고,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면 이 세상에는 나 혼자 남지 않겠니. 그래서 언니는 아이를 낳고 싶어’라고 말했더니 보람이가 그러대요. ‘언니, 우람이와 나, 그렇게 나쁜 아이들 아니예요. 아빠가 돌아가셔도 우리가 언니 버리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는데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얼마전에는 남편과 상의했어요. 아이들이 친엄마와 자연스럽게 연락하고 지낼 수 있도록 길을 터주자고요. 남편은 아이들이 친엄마와 연락하는 걸 썩 달갑게 여기지 않았거든요. 보람이에게 아직 휴대폰이 없는데 중학교 졸업선물로 휴대폰을 해줄 거예요. 천륜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전영록은 요즘 하루를 살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행복하다고 한다. 가족 모두가 행복하게 잘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행복의 대가는 아내의 사랑과 수고 때문에 얻어진 것이라고 아내에 대한 자랑을 살짝 늘어놓는다.
“아내나 저나 새해 소망은 아이를 낳는 거예요. 두 딸도 가끔씩 ‘아빠, 동생 안 만들어요?’라며 은근히 압력을 가하고 있거든요(웃음). 때가 되면 다 생기겠지요. 소망했던 대로 예쁜 집에 이사를 왔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지 않겠어요.”
“아이를 낳으면 지금보다 더 즐거운 마음으로 초대를 하겠다”는 이들 부부의 밝은 웃음이 한겨울의 차가운 바람 끝을 살살 녹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