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놓은 구두에도 표정이 있다. 작고 하찮게 생각하는 신발에도 주인의 삶의 방식이나 철학이 고스란히 배어 있음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첫 대면일수록 인상은 참으로 중요하다. 첫인상이라면 흔히들 얼굴이나 옷차람일 떠올린다. 얼굴이나 옷차림이 의도된 것이라면 땅바닥에 붙어 옷에 가려진 채, 무심해질 수 있는 차림새는 신발인 셈이다. 그것으로 나는 사람들의 습관이나 개성, 성품까지도 미루어 짐작 해본다. 남편의 구두 때문에 우리 집에는 며칠째 한랭전선이다. 싸움의 발단은 남편이 구두 뒤축을 꺾어 신는데서 비롯되었다. 올바르게 착용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벗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 딱 남편의 유들유들한 성격을 닮았다. 모질지 않는 유순한 심성 때문에 오늘날 한 이불을 덮는 식구가 되었지만 남편의 그 매력이 가끔은 단점이 되기도 했다. 바깥일만큼은 무 썰듯 완벽하게 처리했으면 좋으련만 철두철미하게 처신하지 못하고 느슨한 탓에 크고 작은 말다툼의 단초가 되었다. 큰 마음 먹고 산 비싼 구두도 몇 해 신고나면 볼품없는 중고품으로 전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꺾어 신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더군다나 양복차림에 꺾어 신은 구두란 스스로 품위와 인격을 깎아내리는 행위다. 바가지도 긁어보지만 남편의 습관도 살아온 세월만큼 견고하기만 하다. 그때마다 깜빡 잊었다는 핑계로 위기만 모면할 뿐, 개선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양보할 마음이 추호도 없다. 그의 허허실실 작전에 휘말려 유야무야 넘긴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아가 치밀어 통제력을 상실한 나는 잔소리보다 강도 높은 묵비권을 앞세워 시위 중이다. 남편은 단지 구두만 꺾어 신었을 테지만 아내의 마음도 덩달아 구겨진다는 사실을 알까? 쌀뒤주 바닥이 드러날지언정 가장의 매무새만큼은 번듯하게 차려주고 싶은 것이 여자의 마음이고 자존심이다. 그런 심중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습관을 고치지 않는 것은 정면대결이나 다름없다. 처음부터 구두를 꺾어 신는 엉성한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부부의 연도 희박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 데에는 남편의 지나친 일 욕심이 연유했다. 서너 해전이었다. 남들은 투잡(two-job)도 힘들다는데 남편은 꽃가게에 조경공사, 그것도 부족해 갑작스레 인수한 식당까지 일을 벌여 놓았다. 세 군데나 뛰어다녀야 하니 그의 일과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다람쥐 쳇바퀴였다. 꼭두새벽에 출근하고 첫새벽에 퇴근하는 고단한 일상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아내 몰래 친구의 식당을 덜컥 인수받은 일은 괜히 서운했다. 사전준비 없이 뛰어든 식당업은 결국 남편 발에 맞지 않는 불편한 구두였다. 공사현장, 사무실, 가게로 뛰어다니며 하루 두어 번은 흙 묻은 작업화와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가게로 돌아와 구두나 편한 신발로 갈아 신고 뒤꿈치를 편히 앉힐 사이도 없이 식탁으로, 주방으로, 카운터로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자신감에 찼던 탄탄한 계획들이 고된 일과탓에 서서히 꼬여만 갔다. 식당운영이 신발 갈아 신듯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님을 시간이 흐를수록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의지만 앞섰을 뿐, 남편의 체력은 그렇지를 못했다. 아마도 마음은 바쁘고 몸은 따르지 않았던 그즈음에 신발을 구겨 신는 버릇이 그에게 생긴 듯했다. 피곤한 주인장에겐 손님을 감동시킬만한 서비스정신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주변식당에서 경쟁하듯 보다 나은 서비스로 손님의 마음을 잡는 동안 남편의 가게는 점점 한산해졌다. 그의 체력도 한계에 부딪혔는지 조용한 날은 가게서 졸기 일쑤였고 일찍 문들 닫는 날도 잦아졌다. 결국 힘겨웠던 가게를 처분하면서 남편은 아쉬움보단 오히려 홀가분해 했다. 가게를 넘기고 모든 일상이 제자리로 돌아왔건만 한번 굳어버린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다. 원인이 사라지면 결과도 변하리라 여겼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내가 더욱 화가 치민 것도 바로 며칠 전 식당에서였다. 친구네와 우리 가족이 모여 오랜만에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도, 이야기도 거의 끝날 무렵 내가 화장실로 갈 때였다. 식당에서 여벌로 준비해둔 실내화로 화장실을 가려는 찰나, 화장실에서 방금 나온듯한 남자 손님의 발에 낯익은 구두가 신겨져 있었다. 왜 남의 구두를 신었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 말은 목에 가시처럼 걸려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얼른 신발을 거두어 신발장에 넣으며 쓰린 마음을 삭혀야만 했다. 내가 봐도 허술한데 남의 눈엔들 오죽했을까? 신발은 육신과 인격을 담는 그릇이다. 스스로 자기 그릇을 홀대하는데 타인이 그것을 소중히 여길 리 만무하다. 비록 헌 구두일지언정 깨끗하게 손질된 신발은 타인도 함부로 짓밟지 못하는 법이다. 신발 없이 기나긴 인생여정을 완주할 순 없다. 신발도 사람과의 인연이 다하면 언젠가 버려지겠지만 육신을 담고 있는 한 몸의 일부분이다. 여자가 아기를 배태하면 가장 먼저 신발부터 준비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당히 한몫을 감당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삶의 한가운데서 마음의 고삐가 느슨해졌을 때, 사람들은 신발 끈을 다시 묶으며 재도약을 다짐한다. 끝내 헝클어진 삶을 풀지 못하고 스스로 짐을 내려놓는 사람은 마지막으로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기도 한다. 신발은 생각보다 우리의 삶에 훨씬 깊이 연관되었음이 분명하다. 언젠가 작은 아이도 제 아버지처럼 운동화를 꺾어 신다가 나한테 아주 혼난 적이 있었다. 한 가족이기에 윗사람의 습관이 때로는 좋고 나쁨의 판단 없이 그대로 아이들에게 답습되거나 내리 유전된다. 심지어 '밉다, 밉다'하면서 배우는 것이 가족 간의 허물 아니던가? "내가 다시는 당신 구두 사나봐라." 퇴근한 남편에게 묵비권을 대신해 엄포를 놓았다. 남편은 대답대신 새로 사온 구두약과 구둣솔을 신발장 위에 주섬주섬 꺼내 놓는다. 그가 욕실로 들어간 사이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꺽인 허리 같았던 뒤축이 오늘은 억지로 편 듯 꼿꼿이 세워져 있다. 겨우 구두 한 귀퉁이 펴졌을 뿐인데 단정한 모범생처럼 보이는 것은 삶의 또 다른 착시현상인가.
(정경자 님의 수필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