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소설 <그레이스>를 읽고
<그레이스>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마가렛 에트우드의 작품이다. 2019년 영국의 맨부커 상을 받은 그 작가의 책 세 권, <시녀이야기>, <증언들>, <그레이스>를 몰아서 읽었다. 세 권 모두 아주 두툼한 장편소설이지만 읽는 재미가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 소설 세 권 중 <그레이스>가 가장 흡입력이 좋았다. 소설 <그레이스>는 장편 역사 소설로 분류 된다. 작가는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을 재구성했다.
1843년 캐나다에서 충격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살인범으로 잡힌 실존인물 그레이스 마크스는 겨우 열여섯 살에 접어든 소녀였다. 소설 <그레이스>는 살인범으로 수감생활을 하는 실존인물 그레이스의 심리를 분석했다. 실존인물 그레이스는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고 살인범으로 법정에 선 후 30년을 수감생활을 한 후 무죄석방 되었다.
소설은 그레이스가 수감생활 한 지 15년 만에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투입된 정신과 의사 조던과 그레이스가 만나 상담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조던 박사는 기록하고, 그레이스는 자신의 인생전반을 이야기한다. 그레이스의 목소리를 통해 사건을 재구성하고 그녀의 어린 시절과 살인사건 당일의 잃어버린 기억을 줍기 식으로 진행된다.
예쁘고 강하고 똑똑한 그레이스는 책을 읽고 쓸 줄도 알았다.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과 광활한 개척지를 찾아 배를 탔을 때 겨우 열세 살이었다. 배를 타고 오는 동안 병들어 죽은 어머니를 바다에 수장한다. 그녀는 열세 살에 실질적 가장이었다. 캐나다에 도착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게으르고 무능하고 주정뱅이에 폭군이었다. 어린 그녀가 남의 집 하녀로 받는 월급을 빼앗아가는 남자였다.
그녀는 부잣집 하녀로 취직하고 언니 같고 엄마 같았던 메리 휘트니를 만난다. 메리 휘트니가 임신을 하고 의사에게 중절수술을 받고 죽자 충격을 받는다. 이중인격은 그때 형성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녀는 열다섯 살 즈음에 돈을 더 많이 준다는 말에 시골의 농장주 키니어 저택에 하녀로 들어간다. 그녀는 부지런하고 일솜씨가 좋았다. 키니어 나리는 그녀를 아꼈지만 그 집 가정부이자 안주인 역할을 했던 낸시 몽고메리와 앙숙이 된다. 그녀보다 먼저 입주한 남자일꾼 맥더모트와 농장 일을 도와주는 피리 부는 소년 제이미가 있다.
맥더모트는 낸시를 미워한다. 낸시에게 쫓겨날 입장에 처한 맥더모트는 그레이스에게 키니어 나리와 낸시를 죽이고 재물을 훔쳐 미국으로 도망가자고 꼬인다. 결국 맥더모트는 낸시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여행을 갔다 돌아온 키니어 나리도 죽여 지하실에 넣는다. 여기서 그레이스가 살인에 동조를 했느냐 안 했느냐가 법정 시비로 불거진다. 그레이스는 맥더모트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총을 맞고 기절했는데 그 다음 기억은 없다. 맥더모트는 법정에서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살인을 도왔다고 주장한다. 맥더모트는 교수형을 당했지만 그레이스는 종신형을 받는다. 그녀는 사건 당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히스테리를 일으켜 정신병원에 수감되기도 한다.
소설은 수감생활 30년 만에 무죄로 풀려나는 그레이스를 반긴 사람은 피리 부는 소년이다. 소년은 그녀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에 집을 마련하고 그녀가 석방되기를 기다린 것이다. 법정에서 그 소년이 한 말이 불이익을 초래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레이스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와 결혼한다. 그녀는 조던 박사에게 편지를 쓴다. 제이미가 자꾸만 살인사건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힘들다며 늦은 나이에 임신 가능성을 시사하며 소설은 끝난다.
그녀가 기절했다 깨어나는 순간 다른 영혼이 깃들었던 것일까? 정신과 의사의 말처럼 이중인격자일까? 맥더모트에게 살인을 사주한 것이 그녀일까? 꽃을 사랑하고, 자연을 좋아하는 열여섯 살 소녀가 어떻게 그런 잔인한 일을 벌일 수 있을까. 남에게 속을 내보이지 않는 그레이스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폭력을 보고 자랐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남몰래 저택의 주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질투심에 죽였을 수도 있다. 가능한 이야기일까. 열여섯 살은 어른의 입장에서 어릴 뿐이지 산전수전 다 겪은 하녀의 입장에서는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며칠 간 소설 <그레이스>에 푹 빠졌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무서운 십대라는 말을 떠올린다. 현대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십대들의 폭력과 거친 행보를 생각해 본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