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제도
삼상8:4-9
(삼상 8: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삼상 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삼상 8: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삼상 8: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삼상 8: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삼상 8: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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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 인생이 고생하는 것보다
더 비싼 대가를 치뤘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지도 않는 구원조차
그저 눈에 쥐어지는 불로소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공로는 생각나지 않고
항상 마음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자신의 고생담과 영웅담은
신주단지같이 간직하고 입니다.
주구장창 같은소리 또하고
온종일 옛날에는 뭐했냐는둥
종일 같은 소리 뿐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왕을 구하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사는 것이 힘이 들어서
그러합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던 것입니다.
질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것을
사람들은 자꾸 양적으로
해결 지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수 없음을 드러내주지 않기 때문에
선호하게 됩니다.
만약에 다른 질적 세계가 주어진다면
자신의 허점이 드러날 것입니다.
자신이 술취해서 옥탑방옆 마루에서
고래고래 지르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늘의 장엄함과 별의 찬란함을
평소에는 모르고 있다가
기분이 엎되니까
자기집으로 끌고오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평소에 그들은 자기 집에서
밤 하늘을 보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색다른 쾌감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의 허점을 감추는 식으로
움직입니다.
자신이 지적당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기대하는 성공이
곧 신의 축복이라고 여기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효과가 없다고 여기는 그 순간부터
인간들은 다른 방도를 찾게 됩니다.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부터
양적인 ‘결핍’을 경험했습니다.
곧 모자람이
인간 눈에는 에덴동산의 시절과 비교되는
지상의 시절로 보일 것입니다.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이 질적으로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고,
단지 궁핍과 모자람과 여유 없음으로 인해
한탄하면서 무조건적으로
그 궁핍에서 빠져나오기만 하면 된다
고 여깁니다.
뱀을 피하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 되면
더 큰일입니다.
사람들이 왕을 구하는 것은
왕에게 충성함이 아닙니다.
자신이 노고를
왕에게 떠넘기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동화를 좋아합니다.
동화의 특징에는
힘든 일을 그만한다는데 있습니다.
백수가 밤새 컴퓨터 게임하고
새벽 늦게 잠을 자다가
정오 쯤 되어 일어나보면,
벌써 어머니는 아침밥과 집안 청소를
다 해놓으시고
바람같이 일터로 빠져나가 버리십니다.
신데렐라의 일대기는
노동 있는 생활에서
노동 없는 생활로 변모했다는데 있습니다.
얼굴에 재를 묻히고 다닌다고 해서
신데렐라입니다.
심청이도 결국 왕비가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환상을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품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건반을 누르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피아노 선율이
피아노에서 저절로 흘러나오기를
바라는 겁니다.
다 불로소득을 취득하고 싶어서입니다.
일반서민들이 수고도없이
일확한천금을 노리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통하면 사람들에게 기쁨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불법을 도모하게 되고
있지도않은 사실을 있는것처럼
호도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만 불법을 도모하는자가 아니라
타인들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따라서 왕이 변변치 못하면,
달리 말해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으면
왕은 좌불안석이 됩니다.
심판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이처럼 왕이란
자기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왕 본인의 입장에서도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한 왕이지
백성을 위한 왕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왕이라는 자리는
왕의 인격이나 인물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서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버려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일단 왕이 된 자는
백성들을 위하여 희생할 의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왕 본인도
죄인 중의 괴수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백성이 왕을 이용하는 것처럼
왕도 백성들을 이용하려 합니다.
참된 왕이신 하나님은
그동안 자기 밖에 모르는 백성들을 위하여
숱한 희생을 해오셨습니다.
사사나 선지자들을 보내서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시켰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러한 모습의 왕은
자신들이 기대한 왕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격하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은 자신의 환상과 상상을
신봉합니다.
노동이 있는 시절에서
노동 없이도 사는 시절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결과도 대가없이
진행되는 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 왕을 이용하려 하다가
도리어 왕이라는 직위에
노예로 전락되어 버리는 것이
어리석은 백성들의 형편입니다.
자신의 힘든 일은 왕에게 떠넘기려고 하다가
도리어 왕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서
자신의 것을 몽땅 빼앗기는 신세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애초에 백성들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버리게 되는 겁니다.
왕은 인간 각개인의 내막을
구체화시키는 모델이 됩니다.
왕이 왜 그 모양이냐고 탄식하지 전에
먼저 왕을 찾은 자기 자신들의 내면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신의 힘든 것을 대신해 줄
이용물을 찾습니다.
어느 사회든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인들은 교회에 대해서 고대하고 있는
이상형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바른 모습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주신
희생과 기적을 체험하고
감사하는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용서로만 출현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기적입니다.
이 기적만으로 하나님은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는
기적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애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 대가와 애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교인수가 얼마 되지 않더라도
결코 감사가 줄어들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마저
인간의 힘으로 유지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기대치를 버리고
하나님의 기대치가 이루어지는 현장으로서
교회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짜 교회에서는
교인들의 욕망이 춤추게 됩니다.
그들 내부에 자리잡은 욕망이
충족되는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는
더욱더 그 교인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자신을 왕으로 행세합니다.
쉽게 말해서 모든 것을 빼앗는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설교를 하고
어떤 행정을 해도
목사의 권위로 모아지는
설교와 행정을 하게 됩니다.
교회를 자기 사유화 만들어버립니다.
그들은 이것을 교회라고 우깁니다.
그 교회 안에서는
모두 다 자기들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희생보다
자신들의 희생을 부각시킵니다.
바로 이런 교회를 하나님이 허락하므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 속에서
어떤 희생을 하게 되느냐를
보여주고자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