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問- 汝言見性이 若眞見性인댄
卽是聖人이라 應現神通變化하야
與人有殊어늘 何故로 今時修心之輩는 無有一人도 發現神通變化耶이까
問- 汝言見性이 若眞見性인댄 卽是聖人이라
|
問 汝言見性이 若眞見性인댄 卽是聖人이라
문 여언견성이 약진경성인댄 즉시성인이라
묻기를 스님께서 말한 견성이 참다운 견성이라고 할진대 성인이 아니요?
應現神通變化하야 與人有殊어늘 何故로 今時修心之輩는
응현신통변화하야 여인유수어늘 하고로 금시수심지배는
마땅히 신통변화를 보여서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야 할 터인에
어찌하여 요즈음 마음 공부하는 무리들은
無有一人도 發現神通變化耶이까
무유일인도 발현신통 변화야이까
한 사람도 신통 변화를 부리지 못합니까.
자기 눈에는 신통 변화를 하는것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신출귀몰 하는 신통의 변화를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는 질문에 엄청난 실수가 있는 것입니다.
견성하면 성인입니까? 이건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견성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눈을 다 감아보세요
제 목소리가 다 들리십니까?
여러분들 몸에 듣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귀가 듣는 것이 아니고 귀를 통해서 듣고 아는 것입니다
듣고 아는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그 마음은 언제부터 생겼는가
그 마음은 크기가 어떠한가
그 마음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그 마음의 색깔은 어떠한가
그 마음은 언제 생겼는가
그 마음은 지금 이렇게 분명 듣고 있는데
꿈도 없을 때는 인지 하지 못할 때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나를 인지하고 못합니다. 전신마취를 했습니다
그 때 지금 이 목소리를 듣고 아는 이 마음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의두요목에 꿈도 없이 아는 영지,
꿈도 없이 잠잘 때 아는 영지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가 어디가 있는가? 그것은 둘인가?
사이즈가 있는가? 있다면 사이즈는 얼마나 큰가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만법귀일(萬法歸一) 이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돌아가는 그것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이것은 법문으로 연결지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내 안에서 텅 빈 상태에서 관해야 하는 것입니다
관이라는 것은 관이불경입니다
보아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보이는 이면에 것을 보는 것을 관이라고 합니다
지금 제 목소리를 듣고 아는 그 마음이라는 것이 큰 가 작은가?
어떤 국한이 있는가?
사이즈가 있는가? 시작의 시점과 끝의 시점이 있는가?
깨끗한가? 부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이 따로 있는가?
그 마음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가?
생각하고 마음을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눈을 뜨세요
누가 대답하실 분 있으신가요? 이 자리를 알면 비로소 견성했다라고 합니다
즉, 삼계를 넘어선 분입니다
이 자리는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마탁하고 마탁하고 법문을 보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순서는
신(信) , 서원(誓願) <-> 불신(不信), 과욕(過慾)
이것을 아시기 위해서는 먼저 신과 서원이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이야기 하면 불신과 과욕이 있으면 이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생각으로 듣고 다녀도 결국은 삼계의 마음 세계에서 자기가 속은 줄도 모르고 속고
자기가 잘난 맛에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 제 목소리를 듣고 있는 마음에는 나가 없고 너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일 뿐입니다. 오직 절대 일 뿐입니다.
그 자리는 진공이라고 합니다, 공(空)이라고 합니다
공은 공인데 공이불공(空而不空)이라고 합니다 즉 공은 공인데 공이라고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학계에서는 지구가 텅 비어있는 줄 알았는데 먼지로 차 있다라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실려면 먼저 신을 세워야 합니다
불신으로 마음 같은 소리 하고 있네가 아닌 마음이 부처구나 그러면 부처가 뭐지?
나는 부처가 되어야 겠다라는 확실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알려줄 경전과 스승님을 닦아내고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욕심을 놓고 원력이 있어야 합니다
욕심에 잡혀 있으면, 즉 나라는 생각에 잡혀 있으면 그것이 아닙니다
신과 서원에 분발, 의심, 정성으로 공을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나태, 우치, 탐욕, 과욕으로 꼬십니다
하다가 사람이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는 못하겠다,
출가한 사람이나 해야지 그러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이것은 어렵죠
그러니깐 수학도 모르면 어렵고요 아는 건 정말 쉬운 것이 수학입니다 똑같은거 같습니다.
견성을 하면 목수가 먹줄과 잣대를 얻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거부장자가 깨달은 사람거 인줄 알고, 자기의 재산이 아닌 줄 알았다가 내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무아무불아(無我無不我)
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아까 여러분이 제 목소리를 듣고 있는 그 것이 어디에 가만히 있습니까?
나라는 뇌 속에 있습니까? 이것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커다라는 것이 있습니까 작은 것이 있습니까?
더럽나요? 깨끗하나요?
그것은 무아라고 합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무불아입니다. 하나인 것입니다
대소도 하나요 증감도 하나요, 청탁도 하나요
불구부정이라 하나요, 이 자리에는 생사도 없습니다
이것이 생겼다면 사이즈도 있을 수도 있고 색깔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없나요?
이것은 웃긴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색계의 착각 속에 살아요
분명히 생각하는 내가 있고 영혼이 있고, 실체가 있고,
부모로부터 몸 받을 때 기운을 받아 나오고, 나오고 나면 그것이 살아지겠지 하는 것입니다.
혼이라는 것은 3가지가 있습니다
생혼은 식물계에 있는 것입니다.
식물은 영기질로 말하면 영이 미약하고 기운이 있어서 쑥쑥 크고 질(바탕)이 있습니다
영혼이 있는 사람은 영기질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영이 있고 기운이 있고 질 바탕이 있는 것입니다.
호박 같은 경우 영이 미약합니다. 하지만 쑥쑥 큽니다. 즉, 바탕이 큽니다
사람은 영이 있습니다.
여기서 착각하는 것은 영이 있기 때문에 영의 실체가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사람은 각혼이 있습니다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누가 뭔 뜻인지 말해 보세요.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라고 했는데 불성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누가 대답해 보세요.
없는게 불성인가요?
개에게는 살아있다라면 생혼도 있습니다. 영혼이 있습니다. 각혼은 없습니다.
개의 몸에는 각혼이 없습니다. 다음 생에 사람 몸을 받으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소리는 불성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자 어떤 사람이 다시 물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있습니까? 그러면 어디에 있습니까?
허령(虛靈), 신명(神明), 지간
견성을 하면 견성 전에 허령이 있습니다.
사리연구를 잘하시면 문을 하다보면 깨달음이 옵니다.
여기에서 문이라는 것은 사경을 하고 헌배를 하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두 가지가 입니다. 배워서 채우고 비워서 생산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 하다 보면 이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첫째가 허령입니다. 허령이라는 것은 기독교에서 보면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원불교 수행의 단계에서 보면 기초 중의 기초입니다
마음이 맑으면 천지가 합일할 때가 있는데 아 이거구나 하실 때가 있습니다.
수양을 하다보면 이런 경지가 나옵니다.
무당 같은 경우,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잠시 기도하다가 맑아지면 해를 살짝 본 것입니다
그것이 허령입니다
세상에 허령을 가지고 견성을 하였다 하는 사람이 천지입니다
이런 사람은 큰 죄업에 빠지게 됩니다
그 다음이 신명(神明)입니다
신명이라는 것은 대소유무와 시비이해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견성을 합니다.
그 다음이 지간으로 이어지고 큰 깨달음인 대각으로 되는 것입니다
허령을 신통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대소유무와 시비를 신통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환골탈태를 하는 것을 신통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보조국사가 너무 고맙습니다
지금도 보조국사가 걱정하고 있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우리 나라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95%가 삼계의 신앙을 하고
삼계를 초월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조금 공부를 하면 신통이 나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수양을 하는 것입니다
큰 교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크고 목사가 잘생겼습니다.
목소리가 크고 감정의 세계에 호소하는 것이 삼계의 세계입니다.
제8장 옳은 것과 그른 것
答- 汝不得輕發狂言하라 不分邪正이 是爲迷倒之人이니 今時學道之人이 口談眞理호
대 心生退屈하야 返墮無分之失者는 皆汝所疑니 學道而不知先後하며 說理而不分本
末者는 是名邪見이요 不名修學이니 非唯自誤라 兼亦誤他니 其可不愼歟아
|
汝不得輕發狂言하라
여부득경발광언하라
너가 미친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 미친소리가 왜 미친 소리이냐하면
不分邪正이 是爲迷倒之人이니
불분사정이 시위미도지인이니
견과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마음이 어두워서 거꾸로 보이는 것입니다.
가치가 전도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실체가 있어서 나인줄 아는것이 전도된 것입니다.
4전도 - 상낙아정(常樂我淨)
보통사람들은 이 몸뚱아리가 안 죽을 거라는 착각하는 전도된 생각을 가집니다.
그 다음이 낙(樂)입니다. 음악을 듣고 선정을 취해서 느끼는 기쁨이 참 낙인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락이고 천상락입니다
천상락도 삼계의 세계입니다.
마음에는 좋다 나쁘다가 없습니다. 극락은 고와 낙을 초월한 자리입니다.
우리 마음의 실체는 좋고 나쁘고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아(我)입니다.
명예가 있는 나, 나이 몇 살 먹은 나, 누구의 아버지인 나, 누구의 딸이 나를 나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가 아닙니다
그 다음이 정(淨)입니다
우리가 깨끗한 줄 알고 예쁜 줄 압니다.
그러나 깨끗하다 말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된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참 실상은 참 마음은, 참 나는 나의 성품(性品)이다라는 것입니다.
참 마음은 항상하고, 참 낙이라는 것은 낙이라는 극락을 함께하고 있으며 그 성품을 참 나라고 하고 깨끗하고 말 것도 없는 불구부정의 세계가 바로 참 나다라는 것입니다.
今時學道之人이 口談眞理호대
금시학도지인이 구담진리호대
요즈음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입으로 진리를 말하지만
대종사님은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경전, 강연, 회화는 도도 아니고
도라는 것은 사람 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염불 좌선만 해야 하고
염불 좌선만 하다보면 건강이 나빠지면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 건강이 최고다라고 하는 것이
부당진리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 가운데에는 퇴굴심을 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 마음이 부처인 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返墮無分之失者는 皆汝所疑니
반타무분지실자는 개여소의니
도리어 분별하지 못하는 실수에 떨어지는 것이 모두 다 그대와 같은 의심 때문이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도 없는 것을 퇴굴심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에 가까이 할 생각도 없는 사람은 퇴굴심도 없는 것입니다
퇴굴심(退屈心) 을 내는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도라는 것은 너무 넓어서 나 같은 사람은 도를 얻기가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둘째는 도라는 것은 복도 많이 지어야 하고 불공을 잘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다보면 경계 통해서 아까워서 못 내고 , 아파서 못하고,
학식이 없어서 자기가 부족한 것을 찾는 것이 퇴굴심입니다.
세 번째가 전이난증이라고 해서 무지를 얻는 이것을 증득하기가 어렵다는 퇴굴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는 몸이 아파서 선을 못한다, 늦게 만나서 공부를 못한다는 것이 모두 다 퇴굴심입니다
이것을 묶다보면 경계 속에서 말하면 사람들은 큰 경계가 오면 역경난경이라고 해서
자빠지게 되고 못하겠다 하는 것이 퇴굴심입니다. 일이 잘 되고 나면 순경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가 공부도 잘하고 돈도 잘 내면 자기가 자기를 모시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입니다.
마음 닦는 사람은 공부 잘한다고 깨칠 것도 없고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다,
그렇지 못한 것이 퇴굴심이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에 나는 이생에는 이 정도만 하지 하는 것이 퇴굴심입니다
그 마음 속에는 나는 못하겠다라는 불신, 힘들다 하는 탐욕, 힘들어 지치다 아픈데 하는 나태심,
일이 생겨서 합리화하는 것 불신,탐욕 나태와 우치라고 합니다.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화요공부방도 똑같습니다. 자행자지 하는 것을 우치라고 합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마음자리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경계 자리에서 그 자리에 바탕해서
삼계 속아서 놀아나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學道而不知先後하며
학도이부지선후하며
도를 배우는 사람이 앞뒤를 모르고 선과 본이 정(正)입니다. 후와 말이 사입니다.
정을 하면 견성을 하면 신통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신통은 말변지사다라고 합니다
한때 대종사님께 “대종사님이 신통을 부린다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합니까?”
“모른다고 하여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물었습니다. “또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신통이 대단하다고 해라” “어떤 신통이 있다고 말할까요?” 라고 묻자,
보통 사람들은 자기 마음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데 우리 스승님은 자기의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까지도 모두 본다 대단한 신통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데,
그런데 우리 스승님은 우리 마음에 당신과 마음과 부처님 마음과 접붙이는데
어찌 큰 신통이 아니냐고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수심결 공부를 하니깐 보조국사의 깊은 뜻이 있겠지 하지만 다 똑같습니다.
종교 다른 것 아닙니다. 불교와 원불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제도와 시기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지는 것입니다.
과거 보조국사 말씀 하신 것이 지금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가 잘 되면 되겠죠
삼계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리 정치 경제가 발달하더라도 그
것은 오히려 더 탐욕만 조장할 뿐입니다.
한번은 대종사님이 지방에 갔습니다
가니깐 초가지붕위에다가 나래를 놓고 새끼줄로 눌러야 바람이 불어도 넘어가지 않는데,
이렇게만 해 놓으니깐 대종사님께서 새끼줄을 안 할거냐고 저녁에 바람 불면
이것이 헛것이 아니냐라고 묻자,
김남천 선생께서 이 지방에는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침에 보니깐 바람이 불어서 다 엎어져 버린 것이였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신통으로 미리 보고 미리 말씀하셨는데 제가 알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하자
대종사님께서 김남천을 또 혼냈습니다.
너는 당연하게 생각한 것을 말한건데 너는 왜 대도정법을 배울려고 하지 않고,
신기한 것만 보려고 하냐고 또 혼냈습니다
지금 종교가에 얼마나 많은 종교가 거기에 속고 있습니까?
불교에서는 견성과 성불로 속습니다.
견성과 성불은 몇 배 차이인 줄 아십니까?
견성 | 성불 |
10 | 900 |
견성을 하려면 10이라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성불이라는 것은 900이라는 에너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견성이 바로 성불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견성을 해서 점수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공을 들여야 합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죄가 많습니다.
견성만 하면 바로 성불을 하는 것처럼 신출귀몰하는 것처럼 재미로 쓰여져 있습니다.
그 재미 속에서 사람들이 사견에 빠지게 하고 신통에 빠지게 하는 것도 죄가 큰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픈 사람을 낫게 했는데 그것은 방편입니다.
신통은 도술입니다 술자를 씁니다.
해달의 도, 진리의 도자는 다릅니다.
훈타원님께서 정산종사님께 수양을 하다보니깐 이렇게 내가 없어져 버리고
이렇게 상쾌한 시분에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좋은데 왜 진묵대사가 어쨌다고 하고,
팔이 문드려져도 느낌이 없었다고 하는데 나는 왜 성성히 다 아냐고 물었습니다.
정산종사께서 그것은 오롯이 2달만 하면 된다, 근데 그것 해서 뭐할래?
감각이 무딘 도인 견성만하고 수양을 하지 않는 납도끼 같은 도인을 해서 뭐할래?
신통묘술이라는 것은 지엽입니다. 근본이 아닙니다
허령이라는 것도 약간의 신통인데 허령은 떳다 졌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신통이라는 것은 동정 간에 일심을 여의지 아니 하는 것이 신통이고,
그 일심이 육근작용을 하고, 덕을 생산하고 이것이 제대로 신통인 것입니다
제대로 신통은 삼학 공부, 마음을 깨쳐서 마음을 오롯하게 쓰는 것
그 쓰는 것이 내 마음만 편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일체 중생들에게 나의 실체를 그대로 나투어서 쓰는 것입니다. 은혜에 보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로소 신통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 음시대에는 신통 도술이 있었지만
앞으로 시대에는 영육을 쌍전하고 동정을 하나로 하고 중요해 지는 것입니다.
대종사님 당대에는 신통을 많이 냈습니다.
한번은 팔산님께서 훈장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대종사님을 깔보았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서당에 다니다 말았고,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깔 본 것입니다.
대종사님이 내가 부를테니 적어보소 하자, 막 적다가 정신을 못차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경전이 없었기 때문에 외워서 썼습니다
대종사님이 시대가 지나가면 이것만 외우고 있는 것이 정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태워버리고 하였습니다.
팔산님이 생각하자 아까워서 태운 척하고 돌에다가 묻었습니다.
대종사님이 다녀오자 “태웠는가?”하고 묻자 팔산님께서 “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종사님께서 “그것이 왜 돌밑에 있는가”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종사님은 앞으로는 신통묘술에 대한 기록을 모두 지워버리게 하였습니다.
진짜 도라는 것은 사람이 사람의 갈 길을 잘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잘 알아서 잘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일 필요한 것은 의식주인데, 소인배는 의식주만 구하고 산다
하지만 의식주가 잘 오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삼학이다라는 것입니다
정신의 수양, 사리의 연구, 작업의 취사라고 하고 견성 양성 솔성이고
이것을 계정이다라고 합니다 그것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식주만 쫒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인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인은 우리의 성품 자리를 알아서 그것에 따라서 행동하다 보면
의식주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대종사님께서 아직도 염불좌선을 해서 정력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좌선만 하다가 병이 걸리자 운동을 해서 낫자 운동이 최고라고 하는 사람은 사견에 집착하는 자고
나를 만났을 때 내 얼굴도 못본 사람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是名邪見이요
시명사견이다. 이것이 사견이다라고 하고
사견을 망견(妄見) 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망견된 견해입니다. 계룡산에 가면 얼마나 도꾼들이 많은 줄 모릅니다
처자식 내팽개치고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조금만 영통이 열리면 뭔가 된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천지입니다.
사견 중의 사견은 인과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제일 중한 업입니다.
그 다음은 삼계의 세계 속에서 살면서 삼계의 속에서 사는지도 모르는 세계,
견성을 하면 바로 신통이 나올거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모두 사견입니다.
不名修學이니 非唯自誤라 兼亦誤他니 其可不愼歟아
불명수학이니 비유자오라 겸역오타니 기가불신역아
이것은 도학을 배운다고 이름하지 않는다,
스스로만 그릇되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잘못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이것을 삼가지 않겠는가.
제9장 돈오 돈수되는 내역
夫入道多門이나 以要言之컨댄 不出頓悟漸修兩門耳니 雖曰頓悟頓修는 是最上根機의 得入也나 若推過去인댄 已是多生에 依悟而修하야 漸薰而來라가 至於今生에 聞卽發 悟하야 一時頓畢이 以實而論컨댄 是亦先悟後修之機也니 則而此頓漸兩門은 是千聖 軌轍也니라 則- 從上諸聖이 莫不先悟後修하야 因修乃證이니 所言神通變化는 依悟 而修하야 漸薰所現이요 非謂悟時에 卽發現也니라
夫入道多門이나 以要言之컨댄 不出頓悟漸修兩門耳니
부입도다문이나 이요언지컨댄 불출돈오점수양문이니
대개 도를 깨달아 실천하는 길이 많으나
요약하여 말하자면
돈오와 점수 이 두문을 벗어나지 않는다.
오늘 부터는 돈오와 점수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수행길은 결국 돈오와 점수입니다.
이 앞에 점오 돈수등 다양하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오 점수 하는 것이 서가모니 부처님이고, 대종사님이고 모두 돈오 점수 했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습니까?
돈오점수도 하셨고 돈오점수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는 입장에 따라서 다릅니다.
이것이 불가에 영생과 인과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돈오 점수는 영생을 통해서 계속 닦아 오는 것입니다.
복을 많이 지으면 복을 많이 받게 되는 것이고 지혜를 많이 닦았으면 지혜가 많은 것입니다.
돈오는 수 많은 점수 과정 중에서 해가 뜬지 모르게 밝아지는 것 같이, 나무를 툭 자르고 나면
나무가 바로 성장하게 됩니까? 나무가 하룻 밤 사이에 자라는 거 봤나요?
자기가 안 본 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 시간에 그 나무가 자라나는 것입니다.
수 많은 전생에 닦고 닦고 닦아서 깨달음으로 오기도 하고 밝음이 오기도 합니다
과거에 육조대사들은 바로 돈오점수입니다. 그 순간만 보면 돈오점수입니다.
아침에 바로 나무가 자라나 있다면 시간의 몰록이요 내용 전체의 몰록입니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한꺼번에 드는 것이 아니라, 근기가 따로 있어서 그런것이 아니라,
누구나가 마음이 다 갖추고 있는데 전생에 얼마나 닦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꺠달음도 천통망통이라고 합니다. 깨달음 그 순간에 있어서는 돈오라고 하지만,
수많은 깨달음과 수많은 닦음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점수가 뭐냐?
깨달았으면 바로 되는 것 아닙니까?
雖曰頓悟頓修는 是最上根機의 得入也나
수왈돈오돈수는 시최상근기의 득입야나
돈오돈수는 최상 근기가 들어가는 문이라고 하지만,
若推過去인댄 已是多生에 依悟而修하야 漸薰而來라가
약추과거인댄 이시다생에 의오이수하야 점훈이래라가
다생을 통해서 깨달음에 표준하여 닦아서 점점 길들여 오다가
至於今生에 聞卽發悟하야 一時頓畢이니
지어금생에 문즉발오하야 일시돈필이니
현생에 이르러 들음과 동시에 한때에 깨달음과 닦음을 마친 것이니
以實而論컨댄 是亦先悟後修之機也니
이심이논컨댄 시역선오후수지기야니
실상을 말하자면 이것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은 것이니라.
육조대사도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는 것을 듣고 16년간 보림 공부를 하였습니다
삼조 승찬스님도 30년간 보림하셨다고 합니다
달마대사도 9년간 보림하였다고 합니다
보림이라는 것은 아하!하고 그 다음에 계속 닦는 것입니다
則而此頓漸兩門은 是千聖軌轍也니라
즉이차돈점양문은 시천성궤철야라
돈오와 점수의 두 길은 모든 성인이 밟아 오신 궤도이라.
則- 從上諸聖이 莫不先悟後修하야 因修乃證이니
즉 종상제성이 막불선오후수아햐 인수내증이니
모든 성인들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았으며 이 닦음으로 인하여 증득한 것이니라.
순서가 선오(先悟), 후수(後修) 그 다음이 증(證)입니다.
선오라는 것이 견성입니다. 해오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안 좋은 말로 하면 보기 좋은 납도끼다라고 합니다
견성을 하면 속지는 않습니다. 견성을 하지 않은 사람은 항마위에 가기 어렵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평등하다는 것, 법문에 의지해서 하는 공부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점수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앞으로는 열 살 이면 깨친다라고 하였습니다
견성을 하는 것은 마치 이것이 난데, 거짓 나를 난 줄 알고 살았구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수가 성불입니다. 이것은 양성공부이고, 솔성공부입니다.
깨달음을 하기 위해서는 신과 서원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과 서원으로 신분의성을 하다보면 깨달음이 오게 되고
깨달음에 속지 않고 다시 삼계 속에 들어가게 되고 속지 않도록 자기 것을 회복해 가는 것입니다.
후수(後修)가 바로 훈련입니다
그 이전에는 법문에 의지하다가 훈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울을 놓고 보다가 거울에 먼지를 터는 것입니다
돈오는 거울에 있는 나를 보고 나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고
점수는 다시 거울을 닦아 내는 것입니다
똑같은 점수라도 돈오를 하고 나서 점수와 돈오를 하기 전에 점수는 다릅니다.
믿음에 의지해서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믿음에 의지하고 사견에 떨어지는 것은 돈오가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 순서를 말씀드리면 대종사님 표현에 의하자면,
먼저 신이 있다라는 것은 나는 돈을 벌 수 있다, 나는 반드시 벌수 있다라는 것이 신입니다
두 번째 오는 나는 이렇게 벌면 쓰겠구나라는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세 번째 수는 그 버는 방법을 알았으니깐 그 방법으로 노력해서 돈을 버는 것이고 이것이 수양인 것입니다
그러면 증, 돈을 잘 갖고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말하면 되나요?
마음으로 말하면 나무 씨앗을 보고 큰 나무가 될 거라는 것을 믿고
오(悟)는 씨앗이 튼 것을 말하고 수(修)는 그 나무가 쑥쑥 커나가고
증(證)이라는 것은 그 나무로 책상도 만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에서 불신해 버리고 선오는 무명, 미혹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후수에는 나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후수가 중요합니다. 나를 잡아 당기는 것이 있습니다
견성을 하였더라도 나를 잡아 당기는 것이 습관, 업력, 업장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무에 못을 박고 빼버리면 되는데,
그 나무가 삽니까? 그 나무에는 못을 빼더라도 그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내가 살아온 습관과 업력이 많이 남아서 아무리 견성을 하더라도 퇴굴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견성을 하고 나면 끝났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견성이라는 것은 대소유무의 기본을 아는 것입니다. 최소한 속지를 않는 것입니다
최소한 투자하는 것이 가짜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금광이 있는 줄을 알면 그 금광을 캐야지 집도 사고 자도아도 사는 것입니다
所言神通變化는 依悟而修하야 漸薰所現이요
소언신통변화는 의오이수하야 점훈소현이요
신통변화는 깨달음에 의하여 닦아서 익혀 나타나는 것이요
非謂悟時에 卽發現也니라
비위소시에 즉발현야니라
깨달은 즉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니라.
성불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불하고 남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불하고 나서도 정업은 면치 못합니다. 자기가 지은 업은 면하지 않습니다.
성불의 진짜는 제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불하고 나서는 자기의 마음만 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잊고 사는 나와 하나인 이 세상과 하나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중은 남는 것입니다.
대종사님 같은 양반은 왜 그렇게 병이 있으십니까? 하고 어떤 분이 물었습니다.
내가 알고는 업을 짓지 않았는데 중생을 제도하다보니깐 한대씩 억압을 가했더니
한대씩 억압을 가한 것이 나에게 병이 되어서 왔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병이 많은 사람들은 전생에 억압을 가하거나, 많이 죽였다거나,
무력을 많이 썼던 사람은 내생에 몸이 많이 안좋습니다.
정산종사님께서 업이 무서워서 복을 못짓는 거는 그것은 차라리 인과를 모르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질 문>
김명선: 견성이 노력이 10이면 성불이 900이라고 하는데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가 있나요?
본위가 뭐냐하면 견성은 한 마음자리가 맑아지면 보입니다. 사심이 없으면 그대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합일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의심을 가지고 계속 쫓아보면 순간 타파되는 것입니다.
설사 의심이 타파되어서 그 자리구나 하지만 내가 쌓아온 업력,
습관은 알아도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리막길을 내가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몸이 거꾸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에너지 엄청나게 소비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합장)
|
첫댓글 우와~! 정~말 재밌습니다. 뜨거운 열대야를 경험하는 이때...법문의 힘은,우거진 정글 그 산림 속을 제트기로 날아가는 시원함으로 옵니다. 오늘 아침도 기도엔 참석치못했으나, 냉수에 목욕하고 짧은 머리 빗어올립니다. 두루... 고~맙습니다^^
아 이연교우님! 그날 뒤에서 쉬지않고 타이핑하시는데 감사했고요~이렇게 멋진 후기 만들어주시니 또 감사드려요! 아 이쁜 이연교우님 다음생에 얼마나 더 마음과 몸도 이쁘실지 기대만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