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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4년 2월 7일 토요정례법회 ○
☆ 정산종사법어 '무본편'으로 각 단별 단법회가 있었습니다.
★ 김제원 교무님 설법
7일간 잘 생활하시다 오셨죠?
원불교 생활은 무슨 생활이죠? 불법시생활이죠.
그런데 그것이 잘 안되죠.
오늘 단회시간이죠.
오늘 단회 내용은 무본편이죠.
나는 원불교를 만나서 교전을 볼 때 제일 다가온 부분이 첫째가 요훈품. 짧고 좋더라.
그러다 정산종사법어를 보니 법훈편이 좋더라. 그러다가 볼수록 좋은 것이 무본편이더라.
나는 무본편을 좋아하는 사람은 원불교 생활의 맛을 빨리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 본다.
무본편이 왜 좋은가?
우리가 토요일 이 시간에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근본을 생각하고, 추구하고 그것을 알고자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에 그리 하다고 보는데 맞는가?
사람의 인생을 보면 어떤 사람은 초반에 출발해서 쭉 상승직선을 그리는 사람이 있죠. 상근기죠.
태어날 때도 예뻐, 지혜롭고 슬기로워, 주위 인연도 좋아, 이런 사람도 있다.
그런데 다 그러지만은 않죠.
머리는 좋은데 인물이 좀 박하다던가. 인물이 좋은데 키가 좀 작던가. 좀 괜찮은 데 집이 좀 가난하다거나.
다 좋은데 인연이 좀 약하다던가.
세세생생 우리가 복이 많고 적음은 무엇에 따라 있는가?
복덕을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 즉 불공을 잘했느냐 못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가난하고 고 부자고 그런 것이다.
불공에 따라서 즉 내가 주위 인연에 은혜를 나투었느냐, 내가 얼마나 영원한 것에 공을 들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은 달라진다.
태어날 때 정말 평등하다면, 기독교 사상 논리의 약점이 그것이다.
왜 사랑이 가득한데 죄악을 만들었느냐.
빈약한 논리이다.
평등하다고 하는데 태어날 때부터 누구는 공주, 왕자 소리를 듣고 누구는 태어나자마자 버림을 당하기도 하는가.
한 집안에서 똑같은 자식인데도 그 가운데에도 인물도 지혜도 성격도 각각이다.
왜 그런가? 부모가 이번에 큰 녀석은 성격 나쁘게 나와라. 둘째 녀석은 좋게 나와라 그렇게 빌었겠는가? 그렇지 않다.
부모님은 철저하게 자식을 위해 온갖 정성을 들이지만 나온 녀석들은 각각이라.
그렇지 않은가? 유전이나 성격이 닮기도 하지만, 우리 길원이와 길운이도 한 자매면서도 생김새도 성격도 다르다.
예를 들었지만 여러분들 형제만 해도 다를 것이다.
같은 부모 밑에서 다른 건 나온 시기가 다를 뿐인데, 같은 공장에서 나왔다. 제조일자만 다를 뿐. 그런데 왜 다른가?
그것은 알고 보면 전생에 복덕을 불공을 어떻게 지었냐 따라 다른 것이다.
그런데 출발에서는 다를 수가 있다. 이 다른 기본이 엄청나게 다르다. 씨앗이 어떤 씨앗이냐에 따라 다르다.
내가 일본에 가서 쌀을 사서 밥을 지어먹었는데, 무척 맛있었다.
왜? 일본은 종자를 계속 개량해 나가다보니 너무 맛있다.
농부가 똑같이 공력을 들여도 종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종자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유형의 종자와 무형의 종자로 나눌 수 있다.
유형의 종자는 여러분들의 조상들이다. 여러분들 뿌리가 있다.
할아버지가 키가 크니 여러분들이 크다.
무형의 종자는 성품과 마음 이 두 가지로 다시 나뉜다.
성품은 다 똑같다. 평등하다.
기독교에서는 이 성품이 다르다. 오직 하나님만이 서품이 훌륭하고 일반인들은 다 죄인들이다.
그러나 불교사상은 그렇지 않다. 성품은 원래 다 원만구족하고 평등하다.
남녀 구별은 물론 지우의 차별도 없으며 이미 지혜가 다 갖춰져 있다.
비행기가 하늘로 뚝 뜨면 밑에 구름이 있을 뿐, 그 위는 깨끗하다. 구름 한 점 없다.
구름이 중간에 있을 뿐이다.
성품은 마치 비행기가 위에 뚝 떠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람마다 마음은 다르다.
고약한 사람도 있고, 부드러운 사람도 있고, 적극적인 사람도 있으며 소극적인 사람도 있다.
활달한 사람도 있고, 칙칙한 사람도 있듯 다양하다.
그래서 이 무형의 마음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성품은 깨쳐야 하고, 마음은 공부해야 한다. 길들여야 한다.
이것이 다르다.
마음은 길들여야 한다. 공부를 해서 잘 챙겨야 한다.
성품은 깨쳐야 한다.
어떤 사람은 첫 출발이 좋다.
좋은 집에서 태어나 학벌도 좋고 다 좋은데 갈수록 갈수록 나이가 먹으면서 하강곡선을 그린다. 이런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징그럽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인물도 박하고 학벌도 약한데
예를 들어 지난 화요공부방 때 오신 이종규님을 보자.
키도 작다. 가난한 형편에 학업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상황이 암담한데 이 사람이 노력의 노력을 거듭해 연봉이 2억이다. 퇴직했음에도 월 천만원의 수입이 들어온다.
이것이 무엇인가? 달라진 것이다.
우리는 전체를 봐야 한다.
시작이 시작이 아니다. 현세가 있다면 그 밑에 전세가 있다.
전세가 있기 때문에 현세에 차별이 있는 것이다.
전생에 자기가 지은 바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설사 초반에 달랐다 할지라도 중간에 그 사람이 어떻게 공을 들이냐에 따라 팍팍 달라진다.
초반에 약자와 강자의 관계가 시간이 흘러 만나 확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이는 마음 났다가 사라졌다 다시 났다가 사라졌다.
일생을 마칠 때 올라가면 다행이지만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우리 인생길도 굴곡이 있다. 그 안에 복불복이 있고, 재앙도 있고 좋을 데도 있으며 안좋을 데도 있다.
하지만 차이가 나는 근본은 무엇이냐. 그 사람이 얼마나 불공을 잘 했느냐 안했느냐 이다.
첫째, 어디다 불공이냐. 나한테 불공이다.
세상에 아무리 평양감사 자리를 주더라도 자기의 지혜와 역량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철저한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이다. 오히려 재앙이 덮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불공을 잘해서 자기 역량을 잘 준비해 온 사람은 평양감사도 부족하다.
독일에 가보니 정치 문화가 대단하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이장을 잘하면 면장을 하고, 면장을 잘하면 군수를 하고, 군수를 잘하면 지사를 하고,
지사를 잘하면 국회의원을 하고 장관을 하며 장관 속에서 다시 대통령이 나온다. 그 문화가 아주 잘 되어있다.
어느 사람이 툭 튀어나와서 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지도력을 인정 받아서 더 큰 지도자의 위치를 차지한다.
독일은 과거에 유태인을 학살하고 했지만 자신들의 행동을 다 사진으로 찍어 전시해 놓고
마지막에 ‘우리는 다시 이런 실수를 하지 않는다. 이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라고 써놓았다.
독일 초등학생들이 그것을 보고 다 적고 있다. 왜, 자기들이 실수한 것을 오픈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일본 관광객들이 보이지 않더라. 일본 정부에서 못가도록 막아뒀다고 한다.
독일은 철저히 반성하고 참외하는데 그 쪽은 숨기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현재의 위치가 어디냐는 중요하지만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그래서 무본편은 무엇이냐,
설사 지금 내가 늦고, 약자인 거 같더라도 강자의 마음에 교만이 있거나 강자의 마음에 근본을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따라 잡힐 것이다.
현재 약자여도 정말 근본, 뿌리를 놓지 않는다면 된다.
도로 다닐 때 보면 플라타너스 나무가 많죠.
아스팔트가 다 깔아져서 작은 구멍 속에서 나무가 자라는데도 잘 자란다.
물이 땅 속에 들어가야지만 살텐데,
가뭄이 들면 나무 뿌리가 땅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그래서 폭풍이 칠 때 넘어지지 않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걸 볼 줄 알아야 한다. 가뭄이 은혜가 되는 것이다.
태풍이 바다에 내리치니깐 바다에 산소 공급이 되어 플랑크톤 등의 많은 생명들이 자라난다.
우리가 한 때 아무리 좋은 것이 있더라도 그 좋은 것 안에는 독소가 있다.
한약을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사실 진짜 좋은 것은 밥에 다 들어있다.
그런데 왜 약을 쓰느냐. 약이 진짜 좋아서가 아니라 약은 한 구석에 있는 것이다.
중앙에서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을 반대편을 써서 중앙으로 오게 만드는 것이다.
약이지만 독이 들어서 약이 되는 것이다.
내가 현재 잘나간다고 교만할 것 없고, 원망할 필요도 없다.
교만하면 복도 재앙이 되고, 재앙 속에서도 마음만 잘 쓰면 그것이 복이된다.
그것이 새옹지마고 인생이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근본을 안다는 것은,
근본을 아는 사람은 상향 곡선을 그릴 것이다.
가까이 예를 들어봅시다.
법(法)과 밥(食)이 있습니다.
법은 무형이고, 밥은 유형이죠.
법문에 나오죠? 무본편에.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선(先)/후(後)
본(本)/말(末)
이것은 사회 경영학에서도 하는 소리고 역대 성자들이 다 주장했던 소리다.
갈수록 좋다고 하는 것은 선후와 본말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보통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 선후를 먼저 본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본말이다.
일 속에서는 선후고 이치 속에서는 본말이다.
즉, 당장 배고파서 죽게 생겼으면 밥이 중요하죠.
배고플 때는 밥은 선일 뿐이다. 본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법이 본이요, 밥이 말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극한 상황 일 때는 밥이 먼저일 뿐이죠.
배고프지 않는 상황에서는 법이 근본이다. 이걸 알아야 한다.
그런데 웃긴 것이 무엇이냐면 밥은 눈에 보이고 당장 효과가 나타난다.
이번 결혼식에 느낀 것이 정말 많다.
여러분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진리적 가치관을 가지냐,
아니면 유형의 현실적 가치관을 가지냐에 따라서 부러울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조소거리가 될 수도 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는가?
어떤 하나를 바라볼 때 부러워하느냐 불쌍해 생각되느냐는 그 사람의 직업,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일반 사람은 결혼할 때 호텔에서 빠방하게 비싼 밥으로 엄청나게 준비해서 그것이 박수받죠?
그런데 서가모니 부처는 왕 자리도 던지고, 당신 처자식도 던지고 보리수나무에 있었는가.
그것은 바로 무엇을 바라보냐는 눈이다.
우리 원광대 송천은 총장님이라고 계셨는데 주산종사님 아드님이시다.
그 분이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신다. 한복입고 걸어 다니셨다.
일반인이 생각할 때 총장님이라면 에쿠스를 몰아야지 최소한 체어맨을 해야지...
그게 일반인들의 가치관이다.
그건 뭐냐, 생각해 보세요.
돈이 있는데 그 돈을 어떻게 쓰는냐,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
전화를 하는데 누구한테 하느냐.
그건 바로 그 사람의 안목,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친구를 찾고 돈을 거기에 쓸 것이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사다 책을 볼 것이고,
훈련을 좋아하는 사람은 훈련을 기다렸다는 듯이 악착같이 갈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본과 말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것이다.
대(大) : 불생불멸(不生不滅)
소(小) : 일생(一生)
유무(有無) : 생사(生死)
사람이 아까 말만 보는사람은 일생만 본다. 눈에 보이는 한 생밖에 못본다.
죽으면 끝이니 살아 있을 때 잘 먹고 잘 놀자.
그런데 한 생각 더하는 사람은 ‘어 죽네,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친구도 죽고 죽는구나’ 라고 생각한다.
교무를 하다 보니 어느 날은 출생했다고, 어느 날은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온다.
생과 사가 하루에 몇 번씩 이루어지고 있다.
어제 교통사고 6명 사망. 또 산부인과 가면 계속 태어난다.
생사의 길이는 불과 얼마 안된다.
사철가 끝부분에 나오죠? 먹고 입고 자고 노는 시간을 다 빼면 40년도 안되는 인생이다.
그럼 뭐를 또 볼 줄 알아야 하느냐.
육신의 위엄은 일생이 있고 생로병사가 있지만 그러나 무형의 성품이라는 것은 불생불멸이다.
우리가 근본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대소유무 전체를 보는 것이다.
근본의 전체를 못 보는 사람은 그냥 먹고 사는 것만 보인다.
‘교무님, 요즘 세상이 얼마나 바쁜데. 생존경쟁이 얼마나 치열한 지 아십니까.’
이렇게 내가 혼나기도 한다.
유형의 육신의 세계만 보고 살면 거기에 떨어지게 되어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들어가서 마음의 세계. 더 들어가 정신의 세계. 더 들어가 성품의 근본의 세계는 어떠 하느냐.
그 세계는 불생불멸이다.
성품의 세계는 무형무취라. 생도 없고 멸도 없고 본래자리다.
영원한 나요. 이것을 아는 사람은 근본을 찾아갈 줄 알고 지킬 줄 알고 쓸 줄 안다.
한 때 아무리 명예가 있고, 부가 있으며 인물이 좋아도 때가 되면 다 늙고, 사업도 흥망성쇠가 있으며 돌아간다.
그렇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근본이 있으니 그것은 참 나다.
그것이 바로 불생불멸의 성품자리다. 이것을 깨쳐야 한다.
우리가 현실을 살다보면 눈에 안보이기 때문에 남같다.
가까이 느껴지는 것은 육신이다.
그래서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말하는 건강은 육신의 건강이다.
내가 말하는 건강은 정신의 건강이다.
육신의 의식주와 정신의 의식주가 있다.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는 정신의 의식주라고 한다.
정신수양이 가장 중요하다.
본과 말을 바라보는 시각이 현상을 놓고 보면 육신의 의식주는 옷을 입는 것이고, 차를 사고, 집을 사고, 취직을 하는 것 이다.
하지만 정신의 의식주를 놓고 살면 회사에 취직해도 정신이 썩고.
현실의 부모관계는 없으면 고아이지만, 정신의 부모가 없으면 영생의 고아다.
이런 근본을 알지 못한다.
정신의 의식주를 잘하면 육신의 의식주는 따라오게 마련이다.
병원에 왜가요?
병의 대부분은 잘못된 식습관, 게으름과 나태, 상식이 없고 무식함, 온전한 정신을 지킬 줄을 몰라.
정신의 의식주가 있으면 알아서 집도 장만되며 차도 장만되고 건강도 거기에 다 들어있다.
몸 아픈 것도 전생에 다른 생명을 많이 죽이거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거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이생에서도 몸이 많이 아프다.
설사 이 생에 몸을 비슷하게 받았어도 지혜가 있고 정신의 수양력이 있고
즉시 시행하는 실행력이 있다면 그 사람의 건강은 갈수록 좋아진다.
어쩌면 삼대력의 추진력도 그건 그 사람의 정신의 수양력, 취사력, 연구력이라고 생각한다.
왜, 정신의 수양력, 사리 연구력, 취사력이 없으면 건강 버리게 된다.
머리가 똘똘한데 건강이 나쁜 사람은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일의 이치를 몰라 다른 사람을 시킬 줄을 모르는 것이다.
지식경제부 차관이 차관 되자마자 일주일만에 죽었다.
내가 판단할 때는 병이 있었는데 몰랐든가 아니면 차관 되서 잘해보려고 열심히 했겠죠. 그것도 욕심이죠.
차관해서 잘하면 장관 될 수 있잖아요. 거기에 건강 상식도 없으니 죽는 것이다. 그거에 대한 건강에 대한 상식도 부족하다.
우리가 법회를 보는 것은 법을 구하는 것이고, 법을 구하는 것은 밥이 저절로 오는 것이다.
반대로 법을 구하지 않으면 밥이 멀어지고 힘들게 산다.
그래서 죽을 때 되면 처참해지죠.
갑자기 부산으로 이사가면 영어 잘하고, 잘 사나요?
평상시 법에 대한 마음이 없이 죽을 때 마음을 챙기면 법이 구해집니까?
사실은 나이 먹고 준비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돈은 언제 구하죠? 벌 때 모아놔야 한다. 그러듯이 우리가 언제 공부해야 하는가?
우리가 젊을 때 정신이 맑을 때 구해야한다. 젊을 때 삼대력을 구해놓고 그것을 일생을 놓고 풀어가야 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선후가 바뀌어서 지금은 직장 잡아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가정을 돌보고 아이를 키워야 하니까 일이 우선이고
법은 일단 뒤로 하고 나이 먹고 하겠다. 그렇게 선후 순서가 바뀌면 죽을 때 처참해진다.
무본편은 이러한 근본과 본말에 대해서 기본적인 가래를 내주신 법문이다.
여러분들이 법회 보시는 것도, 무본편을 좋아하시는 것도 근본을 사랑하고 근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일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에 당장 교당 밖에 나가면 육신의 의식주를 잘 갖춘 사람이 부럽죠.
정신의 의식주를 갖춘 교무님 말 보다는 직장의 상사가 더,
교무님 약속은 어겨도 직장의 상사 약속은 더 잘 지킨다.
그것은 바로 주종이 바뀐 가치관의 문제다. 관의 문제다.
관이라는 것은 어떤 관점이다. 그 관점이 어디에 더 주안점을 두느냐.
한번 생각을 해보시는 계기가 됐음 좋겠다.
일생관을 갖고 사는 사람과 영생관을 갖고 사는 사람의 태도와 에너지 차이는 정말 크게 차이 날 것이다.
☆ 질문과 답변
Q. 박원허 교우님 :
교무님 말씀 듣고 고민이 하나 있어서 질문 드린다.
저희집 같은 경우는 종교가 없다가 제가 교당에 다니면서 여기서 배운 것을 얘기 할 때가 있다.
부모님 같은 경우는 이미 자식 다 키우시고 여유를 갖고 사시니깐 어머니 같은 경우는 좌선을 하고 헌배를 하면 좋아하시는데,
아버지 같은 경우는 그런거 별로 안좋아하시며,일생 한번을 살면 되지 하신다.
어떻게 불공을 드려야 할 지 궁금하다.
A. 교무님 :
살아계셨을 때는 신심을 못 내시더니 이산법사님 어머니께서 돌아 가셨을 때
정산종사님이 ‘너희 부모님이 이 법과 인연이 안되시니 내가 돌아가셨지만 법명을 따로 지어주겠다.’
그래서 인연을 짓게하고 천도재를 모셔라 하셨다고 한다.
살아계실 때 최대한 부모님이 이 법과 인연이 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어떤 사람이 비를 피하려고 길을 가다가 처마 밑에 섰는데
생전 불법과 인연이 없었는데 주인집 독경소리를 딱 듣고 죽었는데 그 들은 독경 소리 인연으로
다음 생에 진급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듯이 힘이 닿는 대로 불공이 들어가야 한다.
평상시에 부모님을 위해서 심고를 올리거나 기도를 한다.
아까 현실만 보는 사람은 기도 절대 안한다. 무엇이 되냐고 한다.
그것은 몰라서 하는 소리다.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도 해드리고 부모님 이름으로 복도 지어 드리면 된다.
화곡교당 교도 한 분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 천도재 3-4번을 드렸다.
왜, 당신 부모님이 이 법에 인연이 안 되셨기에 내생이라도 인연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따로 재비로 큰 돈을 드리곤 했다.
그것이 바로 인연의 소치를 알기 때문에 스스로 하는 것이다.
제가 법문을 하고 나서 느낀 것이 육신의 의식주는 헛된 것이냐.
이것을 무시하면 불교와 똑같다.
그것이 아니라 정신의 의식주를 잘해서 육신의 의식주를 활용해서 쓰자.
첫댓글 선.후.본.말. 유념하겠습니다 ^^
말에 말씀이 틀림이 없으시니...서둘러야겠습니다~~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