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면 아무리 많아도 불편함이 없다 그러나 찡한 모서리 하나 없이 추억이 될 수 있을까 추억은 눈치밥처럼 자주 목에 메이지만 늘 사랑과 한 몸이다 삶이 주검 같고 주검이 삶 같은 날들 불쑥불쑥 찾아오면 싸느랗게 식은 손 따뜻이 잡아주며 두런두런 둘러앉아 둘레가 되는
추억은 그 많은 모서리 상처 다 녹인다 추억은 둥글다
*그 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박인식
어느 집에선가 개 짖는 소리 멀리서 나고 가까운 산에서는 삭정이 몇 부러지는 소리 들렸지만
눈 내리는 소릴 들었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눈 위에 내린 달빛이 살쾡이 눈빛처럼 차가운 밤 이었다
부엉이도 울지 않아서 어둠이 더 깊은 밤이었다
뒤 덥힌 눈 속에 입김도 얼어붙은 이른 새벽
지난 밤 두어 사람의 발자국 따라 무언가를 실은 수레바퀴가 언덕을 넘어 갔고
아랫마을 농협 조합장 댁에 더부살이 하던, 어디서 떠다니다 와 사는지도 모르는 행랑채
할아범이 며칠 째 시름시름 앓았는데 그 아침 이후 보이지 않을 뿐 이었다
*살모사와 동침
박대진
입동 무렵 오천원을 달라는 어린아이 꼬드겨 삼천원을 주고 산 살모사 한 마리 그만 양파자루를 탈출하여 장롱 틈으로 숨어들었다
아뿔사 중탕집 마누라는 아이고 어쩌나 동동 발구르다 속 상해서 술 한잔 마셨는데 비얌 생각은 까맣게 잊고 방에 들어 자리를 폈고
새벽녘 목마름에 잠을 깨며 소스라쳐 장롱 틈에 비얌 대가리를 보았는데 술태배기 남편은 나오면 잡지, 나오면 잡게, 잠만 잘 자더라나
다음날은 뇌물사건 뉴스를 보며 망할 놈들 망할 놈들. 하루 종일 혀를 차다가 비얌 대가리는 가물가물 잊었는데
어느 날 변기 속 제 똥보고 화들짝 놀라서는 남편을 들복다가 지쳐서는 겨우내 배앓이를 하게 되었지
봄바람 살살 옷깃 여는 어느 날 들창으로 볕 들이는 방 가운데 똥 또아리 틀어 앉은 그 놈을 빗자루로 녹신 나게 두들겨 패고는 버리기 아까워 폭 고아서 잠만 자는 그치에게 먹였다나
“아 그날부터 배앓이가 싹 낳았다"고 오는 손님 가는 손님에게 호들갑을 떨어대네
*산을 바라본다
이홍천
산을 바라본다
등굽은 산은 또 한해의
노을을 맞는다
목숨을 담보로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들
황혼이 지는 둥지에서
두 손을 모은다
언제 비켜설 수 있을까
엮인 매듭 언제 풀고
자유스러울 수 있을까
붉은 빛 가슴에 남기고
나지막한 산야는 홀로
돌아 눕는다
*어스름
심정자
‘어스름’ 이 말 속에는
“밥 먹어라“
나를 불러들이는 어머니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 목소리 계속 따라와
내 아이들 불러 세웠다
이제 이웃의 발소리에
대문 밖 가로등을 켜는
‘어스름’
삼라만상 귀 기울이며
오늘의 이야기 들어주고 있다
*성산포 바닷길
김석기
널판지 위에 서 있다
바닷물 출렁인다
파도여 너에게 나를 맡긴다
심장이 요동친다
수평선이 웃는다
모두 바다에 떠 있다
파도가 친구처럼 올라와 앉는다
덥석 낚시 바늘에 입 맞춘다
바닷고기 하늘로 치솟다
여인의 가슴 더듬는다
금새 함빡꽃으로 변한다
그대와 함께 환호한다
한 사내 뱃전에 누워 꿈꾼다
또 다른 사내 바다에 낚시줄 내린다
성산포 바닷길 응시한다
*女心1
-눈 내리는 날
유희정
가벼운 몸, 가볍지 않은 마음 담고 방황하는
그대 덧없는 그림자 찾아
하늘과 땅 사이
둥지하나 마련해 사랑하는 이 혼을 불러들여
밥 짖고 빨래하고 아이 낳아 기르다
가을도 오기 전에 목이 시린 초록 이파리
습관처럼 살거나 돌아서거나
그런 사랑 말고
막달라 마리아가 제 뜨거운 피의 굴래 벗어던지고
영혼 속에 스며들 듯
영원 속에 스며들 듯
보아도, 보아도 보고 싶은 마음 하얗게 쏟아지는
하늘과 땅 사이
먼 곳에 있는 사람 영혼만 불러다
지상의 끝을 넘어 천상에서도 그대
사랑하고 싶다
*강이 있는 풍경
서정혜
가파르게
다가드는 이 길 어딘가
굽어지는 길목
있었지
문득
명주실처럼 투명하게 풀려 나오는
겨울 들판
조금은
무심히 조금은 모르는 척
어둠 감긴다
다시 바람 불고 다시
흔들리다
돌아드는 깊이
초침(秒針)과 시침(時針) 사이
흐느끼듯 천천히
낙엽
쌓
인
다
*기도
까닭없이 먼
이름없는 것들
저녘빛 붉은언덕
사냥 몰이꾼처럼
소리쳐 오른다
밤을 새워 옷깃을 세워
부질없이 뒤척이다가
머리맡 빈 들녘
푸른 이파리 풀어 놓는다
이불속 깊은 울음이어도
먹구름 속 덩치 큰 천둥이어도
작은 떨림으로
등걸개비 시루 올린다
隱者여
이 너른 세상
이 거치른 세상에
떡 한시루 쪘습니다
그대가 구원해야 할 피접골 용사들
말발굽 몰아쳐 신명나게
살찬 물고기 가마솥 바람
한 탕 춤추게 하세요
저무는 기슭 고함소리
진저리치게 숨가쁜 혈로
그만, 숨고르게 하세요
隱者여
*캐비닛 정리
이성운
빽빽하게 뒤집힌 권권이 서리처럼 두른 먼지, 휘발하는 매직 향처럼 돌돌 말린 기억의 이름표들, 영혼의 편린을 떨어 페이지 없는 기억 훑어 나간다.
미루다 흩어져버린 人生 시방서 한 장 나비처럼 펄럭일 때 퀭한 무늬 가시랭이 풀 풀, 요 네모난 위선만큼도 채우지 못한 지난날의 노란 여백
얼마나 큰 허구렁 박제되어 있는가, 구겨버리자, 해묵은 위선과 흠 모조리 태워버리자, 푸른 미소처럼 번진 새벽, 눌러 붙은 삶의 卷 卷을 移關한다.
*잿물
박영길
시루 바닥에
고운 광목 깔아
재 꼭꼭 눌러
물 부면 노오란
잿물 똑 똑
콩깍지 태운 잿물 광목 빨래
찰벼짚 태운 잿물 명주 빨래
초가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은 천연비누
세수 하고
머리감고
멋 부리던 옛 아낙
자연과 사람이
지금도 마음 안엔
깨끗한 그 시절
숨쉬며 살든 그리움으로 가득 일렁인다
*하얀 그림자
박성락
통트는 햇살 아래
흐트러진 마음 가다듬고
정지된 모습으로 긴 그림자 위에
서 있는 나
봄 향기 머금은 역동의 생명들
간밤에 내린 서리 얼 아린 시련으로
햇살 속에 숨는데
영혼과 삶의 향기
움직일 수 없는
또 하나 나의 하얀 그림자
살포시 보았네
빛과 나
나와 그림자
부동의 자세로 태양을 향할 때
보이지 않은 그 그림자
영원 영원히 그윽한 향기
가슴 속에 흐르리
*에돌다
최정희
독한 술 한 잔 생각난다 거리낌 없던 하늘이 웅얼웅얼
젖은 짐 등에 지고 허공을 캐는 네발나비를 만나
땅에 발붙이지 못한 영혼 안녕을 묻고
뼛속까지 고요해 손가락 들이밀 때마다
징징 울 것 같은 물 속 들여다 본다
까르르 까르르 바람의 길을 가던 가랑잎 깊은 명상에 들어있고
화살나무 붉은 화살촉 날릴 때
허수영감 춤사위 흉내 내며 고추좀잠자리 갈댓잎 골똘하고
벌건 대낮 내걸린 주홍연등에
까치는 부리를 씻는다
졸음 덕지덕지한 까까머리
큰스님 기침소리 다랑치 건너듯
해독되지 않는 세상 다 빨려 들어간 쑥부쟁이 꽃잎처럼
잃어버린 제 몸 찾아 산천에 스며들어
별 일 속에 별일 없이 계절의 간극을 건너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