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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담서원의 옥인동 새집 집들이 2014년 1월 10일
내 일정이 어떻게 튈 지 모르다 오늘 당일에서야
시간의 여력이 있음을 확인하고
거리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지인들에게 번개를 쏘아올렸다
열아홉 님들중에서 유일하게 한 분 낚았다
헌데 저녁 퇴근시간에 일이 쉬이 끝나지 못해 다음 기회로 미루고
혼자서 느긋하게 가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 댓글 142857(수촌)님의 막걸리 한잔 하자는
정담이 떠올라 오늘이 어떠시냐? 전화를 하였다
과천에서 바로 달려오시면 한 8시30분쯤 도착하시겠다 한다
생판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몇 편의 글내음을 반겨주며 찾아오신다는 말씀이
마음겹게 스며들어온다
사실 모임이 크든 작든 그 모임의 매력은
단 한 사람의 매력으로부터였고
머물러있게 하는 것 또한
단 한사람 그 향기로 인함이었다.
많은 인연의 조우와 기회도 한 몫 하겠지만
그 한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발걸음이 달라진다는 것
그렇게 호기심과 싱그러움을 한움쿰 베어물고 걷고있는데
여성분 한분이 사람들에게 통인시장이 어디쯤이냐고 묻고있었다.
어랏, 혹시 길담에 가시는 님이 아닐까?
혹시 길담서원에 가세요? 아. 그래요?
저도 길담에 갑니다.
함께 가시죠? 처음이신가 봅니다
행복한 약국 간판이 보이고
이제 길담마당이 보인다
몇분이 밖에서 서성이시는데
오잉, 이렇게 많을수가...
혼자 오게 된 것이 차라리 잘 되었군.
여기저기 신경 달 일 없이
아직은 익명의 섬이 갖는 자유로움으로 한켠에 스윽
책꽂이 진열장 아래 등받이없는 푹신한 긴의자에
자리를 차지하고 오고가는 길담을 바라본다
나이 지긋한 님들과 젊은이들의 사이에서
모자란 자리에 대한
서로의 따듯한 배려와 양보의 시선이 볼간지럽기도 하였으나
그냥 한자리 그대로 앉아서 얼굴 얼굴 들을 바라본다
드디어 서원지기소년 박성준님이 들어오시고
분위기를 정돈하여 길담의 집들이가 개회된다
김종철 선생님을 초정하며 나누었던 sns인사를 소개하시며
강연자가 맛들리게 강연할 수 있도록
위트와 촌철로 웃음과 환호를 이끌어내시고 있다.
禮記예기, "樂記篇악기편"에
“악(樂)은 같게 하는 것이며,
예(禮)는 다르게 하는 것이다
(樂者爲同, 禮者爲異).”
“같으면 사친하게 되고, 다르면 공경하게 된다.
악만 있으면 방종해지고, 예만 있으면 멀어진다.
성정을 합치시키고 용모를 꾸미는 것이
예와 악의 일이다
(同則相親, 異則相敬, 樂勝則流,
禮勝則離, 合情飾貌者, 禮樂之事也).”
“예로써 절제케 하고 악으로써 화합케 하며
정(政)으로써 이끌고 형(形)으로써 견제한다.
예․악․형․정이 널리 미치고
백성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면
왕도가 갖추어진 것이다
(禮節民心, 樂和民聲, 政以行之, 形以防之,
禮樂刑政四達而不悖, 則王道備矣).”
“훌륭한 음악은 천지와 화합한다
(大樂與天地同和).”
“악이란 천지의 화합이다(樂者, 天地之和也)
자연스럽게 귀를 열고 눈을 모아주는
한뼘의 겔러리와 서당이 있는 이 길담에서의
악기연주가 너무나 그윽하다
소로시 고전의 한대목을 으쓱 찾아보게한다
첼로는 장중하고
바이올린은 흐느낀다
애끓는듯 다정하게 돈독하게
끊어질듯 박수갈채 보낼냥이면 이어지고
숨 한번 쉼표에 정적
그리고 다시 은은하게 이어지는 선률
이렇게 가까이서
첼로와 바이올린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연주자가 우리네 님이라서 인가?
서양악기에서 우리 정서를 듣는다
짝짝 짝짝 짝 짝 짝 ~~~
끊임없이 박수가 이어지고 "앵콜" " 앵콜"~~~
서원지기소년의 해맑은 부추김에 다시 열렬히 박수
무대 한켠으로 사라지듯 들어갔던 두 님이
다시 나타나 앵콜곡을 켜다
오늘 안경(安警)
안경을 썼어요
형이 정확히 상에 맺혀들게
지적 이성적 클래식한 패션
사실을 그대로 내다보는 첨단의
맑고 투명한 진실에의 눈을...
당신도 안경을 써봐요
구리게 색안경 끼고 보지말고
나와같이 긍정의 창을 달아봐요
때가 어느 때인데 지금
언제까지 눈에 그림자만 칠한답니까?
아이쉐도우를 지우고
색안경을 벗고
있는 그대로 내 다 보는
맑고 투명 진 실의 안경
패 션하게 들여다 보아요
알량한 어제는 가라
과거 진 실의 역사란 것도
까짓꺼 오늘 성장이 평정하리라
지난것에 너무매여 다시 배곯치 않도록
내일을 아름답게 찬란하게 가치있게
오늘신뢰 심고가꾸는 무한긍정 꽃은
일제 자부심도 가져다 줄겁니다
자 색은 지우고
안경 그대로 보자구요
마이웨이 유어웨이 따로없는 모두의 길
한마음 한뜻 긍정의 지혜로
우리 하나된 통일 대박
뭐.라.구.요?
색이 입혀졌는 지
안 입혀졌는 지
내 안경을 내려놓고
함께 다시 살펴 보자구요?
아아, 아직도 여전히 당신은
좌정파천(坐井破天) 색안경을 끼고 있네요
어쩔 수 없나봐요
이 자리 지켜서서 멀리 내 다 보려면
외로워도 이 안경 없이는
아무것도 볼수없고 아무것도 할수없어요
- 2014. 1. 9. -
연주가 끝나고 본격적인 강연에 들어가기 전
오늘을 끄적였던 글을 떠올려본다.
이토록 무한긍정과 신뢰를 요구하는
파지티브한 시끄러운 세태에서
독야청청 네거티브한 녹색평론가 김종철 선생님은
과연 어떤 말씀을 해주실 것인가?
세사에 많이 지친듯한
하얗고 검은 회색빛 머리칼과
거칠고 쇤 피부와 음성에서
모두가 "예스"라 할 때 "NO"라고 줄기차게 외쳐왔던
당신의 이력이 비춰지고 있었다.
딱딱하고 건조하게 분명히 맺는
직설적 단문으로 운을 떼시는데
위트가 섞이니 전혀 딱딱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았다
새해 벽두에서 덕담을 기대하시는 듯 한데
저는 대단히 부정형이라 내 속의 얘기를 그대로 꺼내면
여러분이 좀 불편해지지 않을까?
지식인은 대부분 실패한 족속들이지요
공자도 그랬습니다.
벼슬에 오르려고 그렇게 돌아다니다가는
결국에 교육에 이르렀지요.
학이시습지 유붕이자원방래
인재를 모아 인재를 가르치고 ... ...
참 사람을 좋아했어요.
배운다는 것은 논다는 거예요.
서로 서로 장단을 받아가며 배움을 논다는 것
여기 길담에 오시는 여러분도 그렇지않나요?
따로 준비해 온 바는 없고 직접 여러분의 면모를 보면서
흘러나오는 대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내가 60이 넘으니 공자가 달리 보이더라 말입니다.
그래서 논어를 항상 끼고 있는데
논어 첫장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悅乎)아
헌데,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가?
근본적인 물음없이 습관적으로
선행되는 지식을 쫓으며
잉여의 정보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허덕인다
그럼에도 알고싶다는 갈증은 한계를 모르고
지구를 파헤치고 생명을 파헤치고
그러다 이제는
개발과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지구를 유린하고
생명을 유지한다면서 생명을 유린하고 있다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죽음은 없고, 단지 의술의 실패만 있을 뿐이다
고요한 귀처 안식을 잃어버리고
숫자연장에 내쳐 병동에 객사하고 있었다
壽命은 목숨을 끝간데없이
그냥 이어가려는 숫자 數命이 아니고,
삶과 죽음을 지키는 守命일진데...
맑은 삶은 품위있는 죽음과도 닿아있는 것이련만.
느림과 멈춤이라는 절제와 순환을 잃어버린
현대의 끝없이 질주하는 죽은문명을 어이해야하나?
아무도 내 일이라 하지않고
현대는 死物化
생명의 숨을 잃어버리는 문명
과학이란 물신숭배는 우리가 어찌할 새 없이
중독된 우상이 되어버렸고
정의는 자본에 먹히고 품위는 돈에 팔려서
영혼이 있는 생명까지도 분석한다고 분해하다가
사물화(事物化)시키고
경건과 신비를 잃어버린 채 자꾸
사물화(死物化)시켜선,
결국 사물화(私物化)하지 않는가?
태균의 암소 눈물을 보면
인간이 동물에게 무슨짓을 하는지
황우석 사태에서 교훈 하나 이끌어내지 못하고
니편 내편 갈라서서 전혀 당치도 않은
원천기술이 어쨌네 그것이
경쟁력을 얼마나 보장하며 국익의 선봉이 될거라는
배아줄기세포가 여성의 난자를 어떻게 난도질하는지
한국사회의 천박한 윤리의 반증일텐데도
생명의 존엄과 신비, 그 미지에의 모름
이 모를 권리를 박탈하는 앎
멈춤을 잃어버린 기호지세의 과학문명
그 끝을 모르고 굽힐 줄 모르는 앎의 오용과 남용
이 오만이 바로 현대문명의 암癌인것을 모른다
무지에 대한 존경심 그 지혜를 아는가?
불멸을 꿈을 꾸지 말아라
불멸을 꿈꾸었다면 그냥 꿈대로만 놔두어라
고갱의 죽기 전 대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너무 정답에 갈급해 목숨을 매다는데
그 정답을 알고 모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모른다는 것으로부터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겸허해야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은
자기 한계로부터
해야할 것과 하지말아야할 것을 살펴야 하고
근본적으로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어쩌면 가장 큰 삶의 토대는
경제적인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보다는
순환하는 에너지 구조에 있다
지금의 에너지구조는 단선적인
그냥 끝없는 소비의 구조다
근검 절약이 미덕이 아니고
건전한 소비가 미덕이라는 이 모순된 말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데...
화석에너지가 고갈하면 어찌할 건가?
핵융합이라는 에너지를 말하는데
그건 에너지의 치킨게임일 뿐이다
대안은 따로 없다 오로지
땅과 하늘과 함께 숨쉬며
더불어 함께 순환하는 에너지구조 외에는 답이 없다.
땅을 잃고 하늘을 잃고는 살아갈 수 없다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라는 말이
그저 옛말이 아니다
근본은 농업 녹지에 있다
하늘과 땅과 함께 숨쉬며 살아갈 길을
놓치말아야 한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9시 40분
이제 제 이야기를 마치고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기 왜 오셨어요?"
우리는 너무 실용적이고 공리적이기만 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푸쉬킨 찬양 연설 중에
수백만의 행복이 한사람의 희생으로부터라면
그 행복은 정당한가? 묻고있었다
현대국가는 기본적으로 약자에 대한 폭력을 기반으로 된 시스템이다
지식인이라면 이런 약자의 소리를 담아야 하련만
그런게없이 실험실에서 연구실에서 뒤죽박죽 악착같다
우리 사회는 덮어놓고 알려만 하고 그저 살려만 한다
책을 선정해달라시는데
오히려 신문 속에서...
차마 녹색평론을 내입으로 권하지는 못하겠고
누구에게 선택지를 맡기지 말고 스스로 찾아보시라
책방에서 스스로 책 고르며 좋은 책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행복했던가?
책만 보고는 좋은 인격자가 없는 것 같다
책 속에 길이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신문을 보라
책의 지식은 죽어있는 지식이라
행동하는 지식인이 없다 비겁하다
마지막으로 한 문장
"농촌 농민 농업에 관심을 가져달라~"
마지막 책에 대한 네거티브
그 부정형에서
예전 법정스님이 쓰셨던 글이 살아올라
옮겨놓으며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님의 강연 내용 맺겠습니다.
..소리없는 소리..
누가 찾아오지만 않으면
하루 종일 가야 나는 말할 일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새삼스럽게
외롭다거나 적적함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넉넉하고 천연스러울 뿐.
홀로 있으면 비로소 내 귀가 열리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듣는다.
새 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를 듣고
토끼나 노루가 푸석거리면서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꽃피는 소리를, 시드는 소리를, 지는 소리를,
그리고 때로는 세월이 고개를 넘으면서
한숨 쉬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므로 듣는다는 것은
곧 내면의 뜰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
말대꾸를 하고 난 후면 허전하기 이를데 없다.
목젖까지 찰랑찰랑 고였던 맑은 말들이
어디론지 새어버린 것 같기만 하다.
지난 여름에도 아랫절에 내려가
수련을 하는 학생들한테
서너 시간 지껄이고 났더니,
올라오는 길에는
몹시 허전해서 후회한 적이 있다.
소리내어 말하기보다는 듣는 일이
얼마나 현명한 태도인가를
거듭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미카엘 엔데의 동화 《모모》에는 이런 귀절이 나온다.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폐허가 되어버린 원형극장으로
고아 소녀인 모모를 찾아간다.
그들은 모든 것을 그 어린 소녀에게 털어놓는다.
다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줄 뿐인데,
방황하는 사람들은 정착을,
나약한 사람들은 용기를 갖게 되고,
불행한 사람과 억눌린 사람들은
신념과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자신에게 눈을 떴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되는 소리건
안된 소리건간에 쏟아버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남의 말에
차분히 귀 기울이려고는 하지 않는다.
다들 성이 급해서 듣고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른 아이 할 것없이 TV 앞에서처럼
얌전히 앉아 들을 줄을 모른다.
귀 기울여 듣느다는 것은
침묵(沈默)을 익힌다는 말이기도 하다.
침묵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자기 내면의 바다.
말은, 진실한 말은 내면의 바다에서 자란다.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하고
남의 말만을 열심히 흉내내는
오늘의 우리는 무엇인가.
다시 모모의 이야기. 별들이
(어떤 사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전하려면,
그것에 필요한 말이 우리 안에서 자라야 한다.
즉 기다림의 인내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씨앗처럼 기다리는 거야.
움이 돋아나기까지 땅 속에 묻혀 잠자는 씨앗처럼 」
현대인들은 기다릴 만한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시간을 적절하게
쓸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택시를 잡기 위해
줄지어 서 있으면서도
그 시간을 유효하게 쓰지 못하고
흘려버리기 일쑤다.
자기 생명의 순간들을 아무렇게나 흩어버린다.
그러면서도 입버릇처럼 「 시간이 없어서 」,
「 그럴 여가가 없어서 」라고 한다.
시간의 주재자 호라 박사가 모모에게 들려준 이야기.
「 시간은 참된 소유자를 떠나면
죽은 시간이 되고 말아.
왜냐면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이것이 참으로 자신의 시간일 때에만
그 시간은 생명을 갖게 되는 거란다 」
열린 귀는 들으리라.
한때 무성하던 것이 저버리고 만 이 가을의
텅 빈 들녘에서 끝없이 밀려드는
소리없는 소리를. 자기 시간의 꽃들을.
〈1977. 12〉..........
. ♧
法頂 隨想集(샘터社/1986年版)
... 『 서 있는 사람들 』중에서
통인동에서 옥인동으로 길담이 이어지며
한뼘씩 한뼘씩 더 넓어져 열리는 이 길담을 보고
기적과도 같은 힘을 느꼈습니다.
처음엔 과연 할 수 있을까?
의심도 없지는 않았는데...
한사람 한사람 의견을 내고 손을 내밀어
이렇게 새롭게 공간을 꾸미고 이루어냄에서
위대한 힘을 느꼈습니다.
노신이 그랬던가요?
자꾸 자꾸 걷고 걸으면 길이 된다고...
저에게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깨우는 하나의 큰 사건이자
인식을 새롭게 여는 큰 계기가 되는 역사였습니다.
노신의 말처럼 한뼘씩 한뼘씩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주고받고
한손 한손 서로의 손을 거들어 잡아주며
새시대를 열다보면
어두운 시대는 어느새 뒤안으로 사라져있을 것라고
김종철 선생님께 다 동의할 수는 없어도
우리 현 한국사회에 김종철 선생님의 목소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생명에 대한 경의와 신비, 그 聖스러움
우리가 너무 무심코 간과해버린 일들을 들추고 들려주시는
회초리가 이렇게 숨쉬고 있기에
이 한국사회가 희망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오늘 김종철 선생님 강연 말씀에
길담에 초청한 인연자로서 한가지를 더 말씀드리자면
한권의 책
책으로 열리는
한뼘의 새시대
이 힘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여러분, 책을 읽어라
읽고 또 읽어라
읽게 되면 반드시 쓰게된다
이렇게 인식이 한뼘씩 한뼘씩 넓혀지고 깨쳐지다 보면
글이 세계를 바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통인동에서 옥인동으로
공간이 넓어지니
마음의 작용이 달라지고 그 힘이 달라집니다
"서원"이라는 이름이 새롭게 들어옵니다
전통의 서원을 현대적 정의로 입혀서
새로운 문화코드를 열고싶어집니다
피아노도 있고
오늘같이 바이올린 첼로도 연주될 수 있는 공간
음악과 책읽기 이 서당 한켠에서는
새시대 한뼘의 겔러리가 공존하며
배움과 문화예술이 지식과 지혜가 함께 수유되는...
김종철 선생님은 76세라는 숫자를 말씀하시던데
제가 지금 75세예요. 딱 5년만 더 가지고 싶네요.
그러나 어떻게 될 지 장담할 수는 없어요
그런 제 나이예요
그 꼰대 아직도 거기있어?
그 말 듣기 전에는 소리없이 가야겠죠? 하하하
이렇게 입추의 여지없이 문전성시를 이루어주신
여러분의 열의에 참 감사하고도
더욱 힘을 내야겠다는 각오가 열립니다
이제 강연이 끝났는데요...
오늘 이게 끝이 아닙니다
시간이 넉넉하신 님들은 와인과 다과를 함께 즐기다 가시어요
자~아, ~~~
- 서원지기소년 맺음인사 -
한뼘 한뼘의 모자이크
울려나오는 정과 향
정성스러운 붓터치
글씨 이름 이름마다
소리 소리 맺혀
참 아름답고 따스합니다
비록 제 이름은 못 올렸으나
여러분이 한땀 한땀
이루어 낸 작품을
함께 감상하며 즐길 수 있음을...
나의 일일 수도 있는
우리가 이루어낸 일이라며
소유와 공유를 다 느껴보도록
길담을 지피며
자리를 열고 맞아주시는
길담의 벗들이여~
참 감사합니다
- 산울림 올림 -
길담에서 뒷풀이 자리가 이어질 새
그렇게 속으로만 인사드리고
난 드디어 수촌님을 만나
수촌님의 귀가 마지막 KTX시간에 줄달음쳐
막걸리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공부 필담에서
줄거리를 꿰뚫는 날카로운 필력을 먼저 만나
명철하고 논리적인 각진 님이 아니실까?
그 내포에 담긴 외연을 그렸더니
수더분하시고 포근하시고 두리둥실 참 넉넉한 인상이시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막잔은
정두루미님과도 함께 또 새로운 만남
짠~ 나누었다.
인연은
동기감응 同氣感應
만나질 사람은
이렇게
공간이 징검다리가 되어
마주하였습니다.
급할 것도
돌아갈 것도 없이
흐르는 그대로
순간 순간이 함께
시간 위에서
세월로 쌓일겁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샌가
만나질 사람은
만나야 할 사람으로
거기 여기
그렇게 깊어지겠지요
예기치않은 오늘
예정된 듯
참 즐거웠습니다.
돌아오는 전철에서
다 같은 공간인데 왜 여기 전철에선
길담에서의 그 공간미학을
못 느끼는가? 못 가꾸는가?
살풋 미소를 짓고 있었다.
- 2014. 1. 12. 산울림 dre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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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近者悅 遠者來
茗禪 調和
山響
강의를 들리는 대로 다 적을 수 없어
몇개의 단어키에 압축하여 기억을 펼쳤기에
저만의 함축과 추상이 많아졌을텐데...
훈장님, 함께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그 결에 다시 읽고 점검해 보니
태균의 암소 눈물이 아니라 '태기네 암소 눈물'이었네요.
아동문학가 권정생님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늘님"에 실린 글을
김종철선생님이 인용했었는데
제가 태균의 암소 눈물로 잘못 듣고말았네요.
'수의사가 인공수정을 위해 손으로
옆집 태기네 암소의 항문에 있는 똥을 모두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플라스틱 기구로 정액을 집어넣었다.
권 선생는 이런 모습을 보고
"그 짓을 당한 태기네 암소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