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김규식 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만주 왕청현에 설립한 사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북로군정서 대대장으로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고려혁명군 총사령관으로 무장활동을 전개한 김규식(金奎植, 1882.1.15~1931.3.23)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1882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대한제국의 장교로서 부위(오늘날 중위)로 근무하다 1907년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 당하자 만주로의 망명을 결심하였다.
1912년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북로군정서에서 중대장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독립전쟁을 이끌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1920년 왕청현 십리평의 군사간부양성학교인 사관양성소를 통해 배출된 졸업생 대다수가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였고 선생 또한 북로군성서 대대장으로 참전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앞장섰다. 이후 선생은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의 총사령에 추대되어 군대의 지휘를 책임지게 되었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에 크게 패한 일본은 한국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이에 이듬해 3월 대부분의 독립군이 이만을 거쳐 러시아 자유시(알렉쎄호스크)로 이동하였고 러시아령지역의 조선인 빨치산 부대와 통합하여 대한의용군(사할린의용군)을 조직하였다. 선생은 홍범도, 이청천 등과 함께 대한의용군 참모부원으로 선발되어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대한의용군의 활동은 물거품이 되었다.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22년 목릉현에서 김좌진, 이범석 등과 함께 재기를 모색하였고 이후 동만주 지역으로 거점을 옮겨 고려혁명군의 총사령, 대한군정서 총사령으로 선출되어 군대의 지휘 책임을 맡았다.
1925년 3월 대한군정서를 중심으로 북만지역 등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단체들은 목릉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신민부를 결성하였다.
선생은 연수현 태평촌에 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신민부 민정파의 정당조직인 고려국민당의 군사부위원이 되어 한인의 자치를 통해 독립운동 역량을 확보해 나갔으며, 1930년 한국독립당 중앙위원회가 북만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을 끌어 모으는 과정에서도 부위원장의 한사람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왕성하게 전개되었던 선생의 독립투쟁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31년 3월경 한족자치연합회의 본부가 있던 주하현 하동농장에서 지청천, 신숙 등과 만나 장래운동을 협의하던 중 자신들의 기반을 위협한다고 판단한 백운봉, 최호 등의 습격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선생의 나이 52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