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아버지는 외동아들이시고,위로 누님이신, 저에겐 큰고모님 한 분,아래로 여동생이신 작은 고모님이 계셨습니다.단 두 분뿐인 고모님의 성품은 극과 극처럼 서로 너무나 달랐습니다.
큰고모님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출가 하셨지만, 집안 경조사때나 또는 남편인 고모부님과의 관계가 불편하시면 아이들 데리고 친정인 우리 집으로 오시곤 해서 비교적 자주 뵙는 편이었습니다.
저보다 10살 연상인 작은 고모님은 제가 국민학교 6학년 겨울방학중에,결혼하실 때까지 함께 생활해서 더 각별하게 정이 들었습니다. 작은 고모님에게 저는 첫 조카였으므로 아주 많은 사랑을 해주셨습니다.반대로 큰고모님은 저보다 두 살 위인 고종사촌언니와 저를 곧 잘 비교하시며 덕담의 반대되는 말씀을 서슴없이 하시곤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큰고모님과 우리 엄마는 똑같이 1남4녀를 두셨는데,첫딸,아들,다음에 딸 셋을 연달아 낳으신 것, 그 차례까지 같았습니다.부잣집 아들로 가족부양의 책임감이 전혀 없는 고모부님과의 불화로 다섯 아이들 앞세우고 친정으로 와서는 고모부가 데리러 오실 때까지 며칠이고 우리 집에서 머무셨습니다.
우리 가족만 해도 10명인 대가족의 집안일을 하시기에 버거운 살림살이에 큰고모님 가족까지 돌보시는 엄마의 고충이 얼마나 무거웠을지는 그 당시엔 철이 없어 몰랐습니다.
저와는 정반대 성격인,사촌언니의 왈가닥 기질이 재미있고 좋아서 엄마의 힘드심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친정이라고 큰고모님은 안방에 앉아서 일이라곤 하나도 하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택도 없는 일이겠지만,그 당시는 하늘 같은 손위 시누이대접 하시느라고 엄마는 한마디 불평도 못하시고 그 많은 식구들 치닥거리에 잠시도 쉬실 틈조차 없었습니다.
엄마는 육체적인 고단함도 큰 문제였지만,큰고모님의 검증되지 않은 팔자타령엔 많이 불쾌하셨던 것 같았습니다.그러나 일절 내색은 하지 못하셨지요.왈가닥 기질의 고종사촌 언니는 나중에 남편복이 많을 거라고 확신하시면서,꼼내이(얌전함이 지나치다는 뜻)라고 저를 칭하시면서,저런 애는 남편복이 지지리도 없는 법이라고, 또 손재주가 많으면 가난하게 산다고도 하셨지요.그 것도 한두 번이 아닌 심심하시면 이 이야기를 꺼내셨지요.
하도 여러 번 그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린 나이의 저도 어느새 각인되디시피 그 이야기가 사실인양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사촌언니는 외가인 우리 집에 오면,얼마나 시끄럽게 떠들며 소란스러운지,할머님께서 언니 별명을 '말광대' 또는 '얼룩광대'라고 지어주셨을 정도였습니다. 토요일에 우리 집에 오면 월요일은 학교 결석을 하면서도 집에 안가고 버텼습니다.이런 식으로 공부를 했으니 지원한, 대구 제일여자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불합격되어,자기네 집이 있는 지방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나마도 공부는 뒷전이고 늘 놀기에 바빴습니다.
책임감 없는 큰고모부님과의 불화로 별거에 들어간 큰고모님 역시 자녀들 교육에는 관심이 없으셨고,자신의 몸 편하신 것을 최상의 목표로 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이런 상황이니 다섯 자녀들은 한창 공부할 나이에 각각 그 들의 삼촌댁과 고모댁으로 맡겨졌고,결국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큰고모님은 결혼생활의 파경을 항상 할아버지께 돌리시며 원망을 일삼으셨습니다.
지방에서는 유지로 소문난 집에 시집 가셨는데도,계속 불만을 토로하며 친정 나들이가 잦으셨지요.
'왜 싫다는 사람에게 보내서 날 이런 고생을 시키는가?'
'여자는 시집 가면 그날부터 고생이란다.'
'너같은 꼼내이는 신랑복이 없어 못살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결혼에 대한 환상은 일찌감치 깨졌고,결혼 적령기가 되어서도 결혼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깊은 상처와 혼란을 주었습니다.
큰고모님과는 반대로 어려운 집으로 시집 가신 작은 고모님은 지혜롭게 인내하시면서 잘 사시고 계셨습니다.이런 작은 고모님께 남편과 헤어지라고,희망이 없는데 살면 뭐하냐며 아픈 가슴에 더 큰 상처를 주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셨다고,나중에 작은 고모님은 지난 세월을 돌아보시며,언니의 말을 안듣길 잘했다고 하셨습니다.
큰고모님이 우리 엄마에게 충고하시는 말씀은 정말로 가관이었습니다.
"자네, 저 소용없는 딸들 공부 시키느라고 고생할 거 없네,그저 내 몸 편한 것이 제일이라네."
나이로 봐서도 더 사신 큰고모님이 손아래 올케에게 조언이라고 하시는 말씀이 참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그저 묵묵히 듣고만 계셨습니다.
엄마는 큰고모님의 생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셨습니다.
불타는 향학열을 여자라는 이유로 상급학교 진학을 못하게 된 설움과 안타까움을 대물림 시키지 않게 하시려고 온갖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딸 넷은 다 대학교육을 마칠 수 있었고,바로 아래 여동생은 의과대학 6년을 마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동생은 가정교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엄마를 도우려고 애를 썼고,저도 장학금을 타야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엄마를 도울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린시절 잘 살고, 못 살것이라고 확신에 찬 고모님의 미래예측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글세요,잘 살고 못사는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겠지만,세속적인 잣대로 본다면 우리 엄마의 완승이 분명해 보입니다.어린 자녀들을 끝까지 거두지 못한 죄책감으로 큰고모님의 노후는 자녀들 집을 전전하시며 떳떳하지 못한 불편한 생활을 하시다가 하늘나라로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고통없는 하늘나라에서 잘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첫댓글 선배님의 글이 우리 친구 옥희의 추억도 함께 있어 끝까지 잘 읽었어요 추석 잘 보냈어요?
숙희아우님,반가워요.하게 생각됩니다.
나도 옥희 동기라서 각
추석 잘 보내고 이젠 여유롭게 컴앞에 앉았어요.
안타까운 고모님이셨네요. 윗분이 덕담할 줄을 모르면 조금은 모자라는 분이십니다. 보편적으로 아래 월케에게는 마음으로라도 베푸는 것인데 시누이 시집을 많이 겪은 나는 동생내가 곱게 느껴지던데, 남 탓 하면서 무책임한 어머니가 어찌 효도를 받겠어요. 살면서 보니 인과응보란 말이 맞는 말이더라구요.
성격도나고,이기적이라 그 고모님을 좋아하는 이가 없었어요.
특히 할아버지께서는 고모님을 많이 싫어하셨지요.
부잣집에 시집 보냈는데도 계속 아버지탓이라고 원망을 하니 누가 좋아 하시겠어요.
우리 할아버지는 외손자 외손녀까지 싫어 하셔서,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어린 딸 둘을 우리 집에다 맡기려고 하자 할아버지께서 안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신 일도 있었답니다.
인과응보란 말씀이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집집마다 이런 비슷한 사연이 좀 있지않나요?
너무나 훌륭하게 살아오신 선배님 어머님께 정말 수고 많으셨다고 절이아도 올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성인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녀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큰고모님이셨지요.
전형적인 시누이노릇을 하며 여러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셨지요.
음식솜씨와 바느질,자수까지 솜씨로 치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만큼 솜씨가 좋으셨다는데,
마음씀씀이는 영 다르셨지요.
우리 엄마가 속이 참 많이 상하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옛날 법도대로 불평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지요.
제 기억으로 위장병이라며 늘 환약을 드시던 일도 이런 일과 무관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 고생 많이 하신 어머님은 참을 忍자로 福과 德을 배로 얻으셨읍니다. 예전에는 이런 시누이가 꼭 하나씩 끼어 있었어요. 그런데 심상 못된 시누이가 잘 되는 꼴 못 봤어요.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처럼, 복을 받기 위해서는 그만큼 좋은 일을 쌓아야 하지요.
못된 짓을 하면 또 그만큼 불이익을 받아야 할 것이구요.
성격이 활달하고 사교적인 사람이 맹추같이 얌전하기만 한 사람보단 잘 산다는건 맞는말 같아요.하지만 대책없이 제멋데로인 사람과는 다르겠지요.성격이 운명을 만든다 싶어요.결국 완승하신 옥덕님 어머니의 인내가 값집니다.
엄마의 인내와 희생으로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겠지요.
만약 저라면 엄마처럼 못했을 것 같아요.
큰고모님 성품이 그러하셨다니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이지만 딱한 생각이 듭니다.
살아생전에 당신이 얼마나 불편하셨을까요.
유나신 성품이라 다들 비호감이었지요.
남에게 불편함을 주는 당사자는 더 불편하실텐데도,고치시지 못하는 건 천성 때문일까요
흠흠~~저도 학교다닐때 늘 비교당하는 친구가 있었어요....이모의 질녀...경북여고에서 만났지요 ㅎㅎ
이모부님이 항상 자기질녀가 저 보다 공부 잘한다고 ...에고 그러고 보니 그친구는 이대, 나는 효대 갔으니..
저희는 완패 했네요...ㅋㅋ
그 당시 이대는 부잣집 아이들이 가던 대학이었지요.
아니면 부모님이 너무 완고 하셔서 아예 서울로 유학을 못 갔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