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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설집 리뷰
고통받은 인간들에 대한 연민과 이해
──김지수 소설집 『누가 강으로 떠났는가』
김성달
1.
나는 이글을 쓰기 위해 근작에 나온 소설들의 여러 다양한 풍경을 살피다 만난 소설가 김지수의 네 번째 소설집 『누가 강으로 떠났는가』를 정말로 아끼며 읽었다. 1986년 『한국문학』 신인상과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삼성문예상을 수상하고 세 권의 작품집과 『문명왕후 김문희』를 비롯한 여러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한 작가의 이름이 의외로 문단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이상하지만, 제1회 한국소설가협회상 수상으로 이제야 작가의 진면목에 대한 문단의 주목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누가 강으로 떠났는가』에는 모두 8편의 단편이 실렸다. 하나 같이, 좋은 단편이 지닌 구성의 단단한 짜임새, 흡인력 있는 문장, 살아있는 인물형상을 유기적으로 잘 엮고 있다. 자극적이거나 기이하거나 끔찍하거나 몽롱하거나 잔혹하거나 기교 없는 정념이 난무하는 현 우리소설의 현장에서 김지수의 이번 작품집이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김지수는 이번 소설집을 통해 다음과 같은 자기 목소리를 분명히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믿는 존재가 아니지요, 누구나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2.
「글뤽아우프」는 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의 소설이다. 1970년대 파독 간호사였던 나는 가난한 집안의 가장이어서 간호사로 벌어들인 돈을 모두 고국에 보내는 궁핍한 이국 생활을 하면서 파독 광부였던 한 남자와 결혼을 한다. 고국에서 이미 정규대학을 마친 남자는 광부계약기간이 끝나고 공부를 더 했고 나는 간호사 일을 하면서 딸을 낳았다. 공부를 끝낸 남자는 먼저 고국으로 돌아가 모교에 조교수로 취업했다는 소식을 알려왔지만 그의 적은 보수로는 식구 모두가 함께 있을 집을 구할 수 없어 나와 딸의 귀국이 미루어졌다. 한참동안 소식이 없던 남자는 어느 날 불쑥 나타나 청혼 할 때와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이혼하자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 교수가 된 남자는 재혼을 했고 내가 혼자서 키운 딸은 결혼을 해서 선교활동을 하는 남편을 따라 외국으로 나갔다. 생의 절반을 이국땅에서 보낸 나는 귀국을 했지만 이미 암에 걸려 생존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평상시에는 각자 이기적으로 살다가 비상시에는 가족으로 사는 것인데 김지수 소설속의 가족은 정반대이다. 그래서 혼자 눈물을 삼키거나 침묵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승부가 뻔한 싸움을 끈질기게 이어가고 있다. 그 누구도 가족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가족이 가족이고자 하는 의지를 간단하게 승복시킬 수 없다. 그래서 ‘나’의 아래와 같은 말이 진정성으로 살갑게 다가온다.
돌이켜보면 내게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막장 같았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같은 막막함 속에서 잠시 방심하거나 실수하면 어느 쇳덩이가 뒤통수를 후려칠지도 모를 것 같은 불안과 고통의 나날이었다. 외로움에 버무린 끼니를 때우고 눈물의 새우잠을 자며 곡괭이로 갱 벽을 후벼 파듯 완강한 삶의 순간들을 살아내었다. 그러나 열심히 살았고 이제 비로소 밝고 눈부신 천상으로 떠나는 때가 이른 것이다.
표제작인 「누가 강으로 떠났는가」는 주머니에 돌을 가득 담고 강으로 들어간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직장에서 정년퇴임한 이후 재취업한 회사의 분식회계에 책임감을 견디지 못한 남편이 이민을 앞두고 자살을 한다. 혼자 남겨진 지윤은 “외로움을 먹고 외로움을 마시며 외로움을 두르고 소금에 절어지듯 외로움에 절어 그렇게 오래도록 살다가 마침내 어느 음습한 산골짜기에 다친 새처럼 꼬부라져 흩날리는 바람에 삭아 가리라.” 하며 날마다 서럽게 울부짖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른 지윤이 이민을 앞두고 지친 심신을 쉬기 위해 바닷가 모텔을 찾는다. 그곳에서 지윤은 모텔 막일을 하는 소녀를 만났다. 고아인 소녀는 비행기를 타고 해외입양을 갈 뻔했지만 그때마다 울고 토하고 아파서 결국 해외입양을 가지 못했다. 소녀가 이민을 앞둔 지윤에게 “저요, 전 잘 모르지만…… 어디서 사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어떻게 사는 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라고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하며 헤어지는 지윤에게 노란 조생귤 한 알을 내민다. 공항으로 가던 도중 남편이 타스마니아로 이민을 결정하고 죽은 것은 지윤의 첫사랑 형민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윤은 공항에서 발길을 돌리며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낸다.
꺼내보니 얼마 전에 소녀가 내밀었던 귤 한 알이었다. 샛노란 빛깔이 작은 햇빛 덩이처럼 환하고 밝았다. 돌덩이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건 19세기 불운한 여자로 족할지도 모른다. 그만한 용기라면 캄캄한 어느 땅인들 걸어가지 못하랴 싶었다.
이 작품은 반짝반짝 빛나는 상징들이 많이 매설되어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자갈과 귤,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고아와 아이를 못 가지는 지윤,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과 남편의 자살, 이 모든 것이 절망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작가가 섬세하게 매설해 놓은 상징적인 장치이다. 이 장치들은 사소하지만 악력 있는 직접성을 만들어 독자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다. 그래서 형민이와 헤어져 혼자 돌아오는 지윤의 버스 옆자리에 앉아 “사람을 떠나보낸 외로움을 치유하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랍니다.”라고 위로하던 자살한 남편의 울림이 새삼스럽게 크게 다가온다.
「무인도」는 깊은 울림을 주는 문제작이다.
저녁 여덟 시가 넘어 공인중개사 사무실 문을 닫으려고 할 때 찾아온 피곤하고 지쳐보이는 목소리의 여자가 빈방을 찾는다. 진우가 아내와 신혼살림을 시작했던 방을 여자에게 보여주자,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공간이 깊고…… 아득하네요.
진우는 그제야 여자를 진중하게 바라보았다. 단정하면서도 어진 영혼의 한 구석이 느슨히 해이된 듯한, 안으로 형편없이 허물어져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범접하기 어렵게 매듭이 단단해 보이는 여자였다. 벽을 등지고 검은 느낌표처럼 반듯하게 서 있는 모습이 그녀 자체가 마치 하나의 암호 같았다. 그러고 보면 진우에게 여자는 항상 해독이 불가능한 암호였고 비밀스런 아이디였다.
왜냐하면? 어느 날 말없이 집을 나간 아내가 십여 개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진우는 아내와 살던 방의 가재도구를 매형이 교통사고로 죽은 후 혼자 살고있는 누이 집으로 옮기고 피곤하거나 혼자있고 싶으면 비어있는 그 방에 들어가 쉬거나 잠을 잤다. 방을 보고 가계약금을 건네고 간 여자는 며칠 동안 연락이 없었고 그 사이 진우는 퇴근 후 그 빈 방에 들어가 가끔 아내와 섹스를 하던 초록 장의자에 누워 잠이 든다.
애매모호한 잠속에서 무언가 기척을 느꼈던 것도 같다. 꿈결인 듯싶게 누군가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그가 그 부드럽고 따뜻한 물체를 반사적으로 보듬어 안았다. (…중략…) 새벽 어스름 속에 눈을 떴을 때 빈 방에 그가 홀로 누워있었다. (…중략…) 지난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이방에서 홀로 깨어났던 많은 날들처럼 그는 여전히 혼자였고 쓸쓸하고 외로웠다. (…중략…) 장의자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키던 그의 눈에 문득 색다른 물체가 눈에 띄었다. 그는 의자 바로 밑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것을 주워서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자주색 공단에 자잘한 분홍 꽃무늬를 입히고 나란히 다섯 개의 장식용 큐빅을 박은 새끼손가락 크기의 머리핀이었다.
머리핀을 호주머니에 넣고 방을 나온 진우는 해장국을 먹고 난 뒤 사무실로 출근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하루 종일 시외버스 터미널 앞에서 서성거린다. 며칠 전 친구가 집 나간 아내를 버스터미널에서 보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튿날 진우는 사무실을 찾아온 투자단을 이끌고 전라도 남단 해남에 도착해 배를 빌려 들어간 섬 곳곳에서 우물을 찾아 파헤쳐진 커다란 구덩이들이 흉터처럼 남아있는 것을 본다.
손님들이 섬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진우는 구덩이 안을 하릴없이 들여다보았다. 구덩이는 어둡고 깊었다. 헛헛하고 아득했다. 진우는 비어있는 자신의 방을 떠올렸다. 아내가 그 방에서 찾은 것은 어떤 형태의 물이었을까. 근원적인 생의 외로움을 윤기 있게 하는 어떤 것.
투자단을 이끌고 돌아온 진우는 새벽 한 시가 넘어 방을 보러왔던 여자가 버스터미널을 빠져나오는 것을 본다. 여자는 이제 그 방이 필요하지 않고 사실 그 방을 몰래 며칠 동안 사용했으니 가계약금은 돌려줄 필요가 없다고 한다. 진우는 그 여자를 앞에 두고 “당신은 왜 집을 나왔느냐”, “도대체 당신 같은 부류는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느냐.”고 묻지 못한다. 이 질척이는 밤보다 더 깊고 무겁고 어두운 허랑한 존재의 덩어리 앞에 진우는 말문이 막힐 뿐이었다. 진우가 내민 머리핀을 진지하게 쳐다보는 여자를 보며 진우는 무인도를 떠올린다.
여자의 길게 늘어뜨린 어깨와 머리칼에서 무언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오래 전부터 익숙했던 것 같은 자유로운 영혼의 향기가 났다. 샘이 솟지 않는 우물과 해당화가 함께 피어있던 먼 섬의 냄새가 났다. 말라붙은 젖가슴과 더운 밥통의 냄새도 났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흐르던 끝없는 안개와 어딘가에 쳐박혀있을 누런 서류봉투의 냄새도 났다. 혼자 치른 몽정과 초록 장의자의 냄새도 났다. 오래도록 빈 방, 누구나 가슴에 하나씩 안고 있는 무인도의 냄새가 났다.
이 소설은 ‘빈방’을 통해 현대인이 누구나 가슴에 하나씩 안고 있는 ‘공란’의 무게를 상징한 작품이다. 현대인이 가지는 완전무결해보이고 강력해 보이는 가족의 상징 질서인 방이 어느 날 갑자기 무인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소설은 그래서 문제작이다. 이 작품은 이번 소설집 중에서 유일하게 무언가에 들려있는 작품이다. 즉 빈방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존재감 자체는 들려있는 무게이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무게이며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보여줄 수도 없고 아무도 그들의 실제 삶을 들여다 볼 생각을 하지 않는 가슴속 ‘공란’을 가진 현대인에 대한 통렬한 풍자인 것이다.
「봄볕」은 시이모의 장례식을 통해 인간관계와 혈연이 무엇인가를 새삼스럽게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오백만 원을 주고 데려온 “짧고 굵은 다리에 두꺼운 겹주름이 뒤룩뒤룩 덮은 시푸르뎅뎅한 얼굴로 풀죽은 오랑우탄” 같은 큰 동서가 제사떡이라고 만든 수수팥떡은 묘한 여운을 주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기실 그 수수팥떡이란 돌아가신 시이모가 가장 즐겨먹던 떡이었던 것이다.
「더 없이 낮고 쓸쓸한」은 그야말로 쓸쓸한 이야기이다. 실직을 앞둔 소민은 언니의 성화에 못이겨 선을 보러 나가 서른여덟에 무직이고 낚시를 자주 다니는 남자를 만난다. 박물관에 근무하느냐고 묻는 남자에게 소민은 “곁에 있는 것들이야 이미 다 죽어버린 것들이니까 살아 움직이는 고기들보다야 훨씬 다루기 편해요.”라고 대답한다.
비정상적인 저혈압에 시달리며 대학의 자연사 박물관에 근무하는 소민은 벌써부터 감원 대상자로 찍혀 늘 불안했다. 선을 본 이튿날 박물관을 불쑥 찾아온 남자는 혼자 안으로 들어간 후 한참동안 기다려도 나오지 않기에 열쇠를 쥐고 나온 소민이 안을 기웃거린다. “남자는 수리부엉이와 흰곰 박제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래서 그도 마치 하나의 전시품 같았다. 약간 마르고 지치고 보잘것없이 늙어가는 고등 동물처럼.” 박물관에서 나와 곱창집에 소민과 마주 앉아 소주를 마시고 헤어진 남자는 얼음낚시터에서 실종되었다.
삶과 죽음의 공간이 허물어진 박물관에서, 삶이 죽음에 가깝고 죽음도 삶에 멀지 않은 곳,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지만 그 혼돈의 공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딱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현실 속에서 잘 녹여내고 있다.
「시를 쓰는 여자」는 고등학교 때 전학 왔던 마른 체구에 짙은 눈빛을 가진 가발여학생에 관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잘 만든 작품이다. 소문은 수많은 질문과 호기심을 낳는다. 소문 앞에 붙들린 이름은 사실관계에 무관하게 함부로 더렵혀지고 속수무책으로 유통되고 소비된다. 그것은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다룬다는 것이고 그런 태도는 누군가의 삶을 죽음으로 이끌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작가는 적절한 알레고리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패랭이 꽃 한송이」는 파산한 부부의 이야기가 밑자락에 깔린 생명에 대한 아름다운 절창이다. 하루아침에 살고 있던 아파트를 잃고 산간접경 지역의 조그만 촌락 산자락에 엎드려 있는 낡은 집. 조그마한 쪽마루가 달린 문간방에서 영문도 모른 채 떨며 지내는 순지는 육손인 남편 집안의 내력 때문에 아이를 두 번이나 낙태시킨 여자이다. 하지만 돌아갈 집을 잃은 상실감과 지붕이 벗겨지고 트럭이 네 바퀴를 번쩍 들어올릴 태풍 속에서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생명의 아름다움을 감지한다.
그러나 주변은 괴괴한 어둠만 고여 있을 뿐 어떤 자취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창문으로 쏟아져 나오는 불빛에 풀더미 사이로 창백하게 피어있는 작은 꽃송이들이 보였다. 그것은 어두운 창문 밖 검은 하늘에 비치던 별들처럼, 절망 속의 희미한 기대나 소망처럼 아주 생경스러운 아름다움이었다.
이 작품은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부도와 태풍이라는 현실 속에서도 삶에 드러나는 아주 작은 희망에 관한 집요한 묘사를 하고 있다. 모든 절망이 세상에 대한 종지부를 찍는 게 아니라 그 절망의 순간순간마다 작고 소박하게 다가오는 생명의 기운을 감지하며 결국 패랭이꽃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란성 쌍둥이 이야기를 다룬 「이것은 끝이 없는 노래라네」는 아픈 몸으로 학원 강사를 하며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고, 이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산인 집을 팔아 호주 이민을 갔다 사기꾼에 속아 불법체류자로 추방당해 와 있는 쌍둥이 동생을 돌보는 은재의 이야기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한테서 쌍둥이 남동생 운세를 빼앗아갔다며 학대를 받으며 살아온 고단한 인생이다. 그런데다 악성종양이 점령하고 있는 환자의 몸으로 집 나간 치매 걸린 어머니를 기다리며 “어머니, 지금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가 그나마 가족이란 이름으로 함께 살아왔던 날들이 너무 비루하고 참담해요.”라는 독백을 통해 미움이 인내나 희생보다 훨씬 깊은 감정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3.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지수의 작품 전체를 한결같이 관통하는 것은 ‘누구나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야 할 사람’이다. 이 소설은 그러한 감정, 가치, 의미에 대한 문장들로 넘쳐난다. 작가는 자기의 리얼리티를 쓴다. 그러면 김지수의 이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고통에서 놓여나지 못한 사람들에 관한 관심이다. 억울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두려운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고단한 사람들이 리얼리티가 되어 김지수의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힘이 되고 있다.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적인 관계가 아닌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이해와 연민에 기인하고 있다. 특히 이 소설에서 나타난 고통 받는 여성에 대한 각별한 작가의 시선은 가슴에 와 닿는 절절한 문장과 상징적인 이미지로 적절히 조합되어 가뜩이나 버거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좋은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김성달 / 1964년 경북 영덕 에서 태어났으며 『한국문학』과 『삶이 보이는 창』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환풍기와 달』이 있고 현재 『문학사계』 편집주간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