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궁이에 불을 피우다가 눈물 콧물 깨나 흘려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이 글의 전말을 개략 이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아궁이에 불을 잘 피우려면, 먼저 불씨를 지필 적에는 땔감들을 모아 피워야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단번에 피울 수가 있지만, 불씨가 살아 있고 그것을 다른 땔감 전체에 옮겨 붙일 적에는, 땔감 간격을 오히려 서로 어느 정도 띄워놓아야 아궁이에 불을 잘 지필 수 있다.
그 간격은 불씨 재료의 크기에 정비례하게 하여, 각 재료가 피워내는 불길의 끝이 서로 마주 닿을락말락하는 간격 사이로 공기가 통할 정도의 거리를 유지시켜 띄워주는 것이 가장 유리할 것이다. 이 간격을 위배하여 땔감의 간격을 너무 가까이 붙여두거나 필요 이상 너무 멀리 띄워두면 그 땔감들은 서로 비명을 지르며 극렬하게 연기를 피워낸다. 그리하는 데도 그대로 둔다면 그 불씨는 필경 꺼진다.
사람의 간격도 그러하다. 서로 상충하는 마음을 상쇄할 숨구멍이 없으면, 그 사람들의 사이는 아궁이불과도 같이 불협화음의 비명을 지르며 연기를 피워내다가 꺼진다. 글 쓰는 일은 어떠한가? 그것도 공간이 있어야 한다. 상충하는 여러 생각들을 적당한 선에서 행과 단을 구분해야 그 생각들이 정리가 되고 제대로 숨을 쉬며, 교란하던 비명들이 공명으로 바뀌어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아궁이에 불을 피우는 일과 사람 사귀는 일과 글 쓰는 일은 결국 같은 일이다. 지속적으로 그것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행위를 할 일이다. 너무 들끓지도 너무 침잠하지도 말고, 각개의 질료나 마음들이 가진 각기 다른 파장을 가졌다는 것을 이해하고, 각기 다른 변이를 하는 것을 관찰하여 그에 맞는 적정한 간격을 측정해 내고 유지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다음 수순은 실패일 뿐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컨대, 아궁이에 불을 피우는 일에 연기 없이 피울 수 있는 방법이 없듯이, 인간사나 글 쓰는 일에 괴리 없는 일도 없으리라. 그리고 적어도 그런 일에 눈물 콧물 흘리지 않고 그런 일의 전말을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으리라. 무엇을 아무리 조심하거나 벼라별 수를 다 동원하여 어떤 안위를 도모한들, 우리들이 태어나 늙어가는 이 일이 기필코 병들어 죽는 길을 택하듯이.
그런 일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연장시키기 위한 조심이나 안위를 도모하는 일이 오히려 옳지 못한 일이라고 할 것이며, 아궁이에 불을 피우는 일, 사람 사귀는 일, 글 쓰는 일 같은 우리 의지 범위 안에 놓여 그 의지에 따라 변화 가능한 일에 전심전력해야 할 근본 이유라고 할 것이다. 아궁이에 불을 피우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오묘한 일이다.- 音 최소리 '격외선당(格外仙堂)'
첫댓글 코흘리고 다닐 때부터 부엌에는 크고작은 무쇠솥이 세개... 아궁이도 세개...
외양간옆 헛간에 대박 큰 쇠죽끓이는 가마솥, 솔잎부터 장작까지 불피우는 건 선수인데, 나머지 두가지는 영 젬병이라...
안타까운 사연이군요.
나머지 두 개의 솥에 지금의 입맛을 좌우하는 원초적 미각이란 것이 탄생했을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