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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가복음 2장 1~5절
제목: 지붕으로 올라가라
예수님은 공생에 사역을 하시면서
가버나움에 작은 집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에
먹어야 되고, 쉼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들녘에서나 빈들에서나
산에서 기도하고 주무시는 것이 아니고선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셔서 마련해 놓은
거처에서 항상 쉼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수일 후에” 이 말은 무슨 뜻이냐?
“몇 일 만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1절에서 “다시”라는 말은
처음 왔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몇 일 만에 자신의 거처로
돌아 오셨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에 있던 사람들이
몇 일 만에 오신 예수님께서
집에 계신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1절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랍비들의 문서를 보면
예수님의 집이 큰집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제자들과 하룻밤을 쉴 수 있는
작으만한 집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언젠가 말씀을 드렸는데
이스라엘 전통 집은 창문이 없어요.
그 이유는 성막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막을 보면 창문이 없습니다.
문도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전통 가옥은
창문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문도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문을 하나만 두신 이유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영적인 문은
곧 예수그리스도 한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이 하나이기 때문에
그 크기가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통 가옥은
문은 하나인데 집의 사이즈보다
조금은 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여간 예수님이 집에 계신다는 소문이
동네방네 다 퍼져 버린 것이죠.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들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계속해서 그 집에 계신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이러한
관심을 보이겠습니까?
저도 부흥회 때문에 교회를
일주일에 한번이나 오니까
보고싶다는 분들이 꽤 있어요.
그런데 매일 제가 교회만 있으면
“우리 목사님 어디 안가시나?”
이러실거 아니예요.
몇일만에 오신거예요.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 들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내용을
본문 1절에서 설명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이때 이 소문이
어떤 한 사람에게도
들렸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네 사람이 중풍병자
즉,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이 계시는 가버나움 집으로
향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까
2절과 3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왔는지
문 앞에까지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는 거예요.
집은 좁고, 집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문 하나 밖에 없는데
그 방법마저 사람들이 가득 찬거예요.
2절 말씀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
이렇게까지 설명하는 이유는
문이 한 개다? 두 개다?
그리고 창문이 있다? 없다?
그렇기에 이 말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예수님이 계신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집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계셨습니다.
오늘 밤에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한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네 사람의 집에 왔을 때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보고도
절대 좌절과 실망과 낙심하지 않아요.
그들은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지붕을 선택합니다.
언젠가 이 설교를 하면서
지붕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지붕과는 좀 달라요.
당시에 지붕은 어떤 용도였느냐?
제가 아까 말씀을 드렸잖아요.
옷도, 집도 율법대로 만든다고요.
신명기 22장 8절을 보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난간을
만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집을 지을 때
굉장히 신경을 썼다는 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9장 25절
“그들이 산당에서 내려 성읍에 들어가서는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지붕에서 담화하고”
이때가 언제냐면? 잠깐만 설명할게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인 사울을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라고 할때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대화를 나눕니까?
지붕에서 대화를 해요.
그리고 그 다음절 봅니다.
“그들이 일찍이 일어날새 동틀 때쯤이라
사무엘이 지붕에서 사울을 불러 이르되 일어나라”
이 말씀의 뜻은 이런거예요.
사울엘과 사울이 지붕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사울은 내려가고
사무엘은 아침에 동이 틀무렵까지
지붕에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아침 해가 뜰때까지
사무엘은 무엇을 하였느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지붕은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소였습니다.
사무엘이 밤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난 다음에
사무엘일 지붕에서
사울을 부릅니다.
그리고 다음 성경구절을 봅니다.
열왕기하 23장 12절입니다.
“유다 여러 왕이 아하스의 다락 지붕에
세운 제단들과 므낫세가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세운 제단들을 왕이 다 헐고
거기서 빻아내려서 그것들의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 버리고”
이 말씀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면
지붕에다가 제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만들어 놓은 제단을 전부다
파기해 놓은 것입니다.
이사야 15장 3절 말씀
“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
지붕과 넓은 곳에서는 각기 애통하여 심히 울며”
그리고 마태복음 24장 17절 말씀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마지막 때에는 어디서 내려오지 말라구요?
지붕에서 내려오지 말라는 거예요.
세상일 때문에, 지붕에서 내려오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읽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 9절 말씀입니다.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베드로가 기도하기 위해
어디로 올라갑니까?
지붕으로 올라가잖아요.
그래서 고낼료에 대한
환상을 보는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이것을 쭉 우리가 통합해보면,
지붕이라는 곳은요? 기도하는 장소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장소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지붕입니다.
이 말은 바꿔서 말하면
지붕에 올라간 네 사람들은
평소에 지붕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평소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길이 막혔어도, 기도의 사람은 길이 열립니다.
오늘 본문은 이걸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들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이제 아시겠죠? 그들이 왜 지붕 위로 갔는지?
지붕은 기도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장소입니다.
이게 지붕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가지고 왔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지붕이었기 때문에 기도의 사람인
이 네 사람은 지붕 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행위를 보신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요.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지붕위로 올라 간 것도 믿음입니다.
즉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붕 위로 올라갔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자리에 와있고,
예배의 자리에 와 있다고 해서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닙니다.
내가 기도의 자리에 있고,
내가 예배의 자리에 있어서,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
솔직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아니라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보면요.
이 네 사람이 지붕 위로 올라가서
어떠한 행위를 합니까?
지붕을 뜯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줄에 매달아서
이 문제를 예수님 앞에
내린다는 것이죠.
지붕에 올라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기도의 자리에 있다고 해서
삶의 문제가 해결되는게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붕을 뜯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지붕을 뜯는 영적인 모습들을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지붕까지는 올라왔습니다.
기도의 자리까지 나왔습니다.
예배의 자리까지 나왔습니다.
자기가 들고 왔던 인생의 문제를 두고
그냥 도망가버리는 것입니다.
지붕을 뜯어서 문제를 내려야 하는데
단지 문제를 지붕 위에 올려놓고
그냥 내려가 버린다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보다 걸음이 빠르신
주님께서 다시 가져다 놓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세요?
저는 상담 할 때도 그렇고
누군가와 대화 할 때도 그렇지만
나에게 기도해 달라는 것이
정말 제일 좋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기도 제목을
다시 가져갔으면 할때가
종종 제게 있습니다.
무슨 뜻인 줄 알겠죠?
무거운 짐은 나에게만 맡겨 놓고
그리고 자기는 도망가는 거예요.
그냥 지붕 위에만 올려놓고요.
그러시면 안된다는 거예요.
가버나움은 언덕길이라고 했잖아요.
언덕길에 들것을 메고
이 병자를 데리고 왔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다.
그리고 지붕 위에까지 올라갔으니
얼마나 그들이 힘들었겠습니까?
여러분 이 자리 그냥 저절로 오는
그런 곳이 아니잖아요. 굉장히 힘들어요.
이 자리에 온 것도 훌륭합니다.
기도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훌륭해요.
하지만 여기 왔다는 것만으로
어떤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건 착각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말하는 거예요.
“예수님 제가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 여기다 놓고 갈게요.”
그리고 난 후에 내 삶의 자리로 내려가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더 빠르다는 거예요.
예수님 그 문제를 들고 얼른 쫒아와서
다시 자 삶의 자리에 내려놓으신다는 것이죠.
나는 분명 놓고 왔는데 돌아오면
그 문제가 다시 내 삶 한가운데 있어요.
예수님은 지금 네 사람의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자신에게 오고 있는 것을 아세요? 모르세요?
아신다는 거예요. 전지하신 하나님인데요.
이들이 들어올 수 없어서 지붕 위로 올라간 것도
예수님은 분명히 알고 계신다는 거예요.
우리의 바램은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예수님께서 그냥
“뻥”하고 해결해 주시길 원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지붕도 주님이 뚫어 주시길
원할 때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은 절대 뚫어주시지 않으세요.
지붕 위로 올라가야 하구요.
지붕을 뚫어야 하구요.
또 줄에 매달아 내려야 한다는 것이죠.
주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환자 하나가 들어오고 있어
그러니 거기 좀 비켜서 길을 터줘”
“지붕 까지 뜯을 필요가 무엇이니
그냥 내가 올라갈게”
이러 실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지붕을 올라가서
그리고 지붕을 뜯어서 그리고 줄에 매달아
그 문제를 내리기까지 그냥 기다리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말을 하잖아요.
기도는 우리가 하는 것이고
역사는 주님이 하시는 거라구요.
기도는 우리가 하고 역사는
주님이 하시는 거예요.
다니엘서 12장 18절을 보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
다니엘이 인생의 문제를 만났을 때
자기들의 친구를 찾아가서 함께 기도했지
그들에게 기도만 시키고 도망갔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요.
누가 나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
당신이 기도한 만큼
나도 주님께 기도하겠다고
이렇게 이야기 해줍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되세요?
나한테만 기도시키지 마세요.
제가 아무리 기도해도 안 부딪혀요.
그래서 왜 그럴까 보면요.
저쪽에서는 기도를 안하고 있는거예요.
여러분 두세사람이 모여
연합해서 기도할 때,
주님은 거기에 임한다고 하세요.
이것을 영적인 삼겹줄이라고 해요.
목사가 성도가 연합해서 기도할 때,
이럴 때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예요.
나는 죽기살기로 기도하고
성도님은 죽기살기로 잠자면요.
절대 역사는 일어나지 않아요.
이건 성경의 원리가 아니예요.
물론 주의 종들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여러분들이 기도를 안하고
기도의 짐을 내게 맡긴다는 개념이 아니예요.
어젯밤에 자기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달라는 분이 계셨어요.
그래서 정말 진땀나게 기도하고 있는데
자기는 그냥 10분 만에 가더라구요.
그래서 오늘 제가 통화했잖아요.
그래서 물었어요? 왜 그냥 가시냐고!
그랬더니 피곤해서 갔대요.
여러분 저도 피곤해요.
제가 말씀을 드렸잖아요.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왔다고
그리고 집회 인도한거예요.
여러분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면요?
지붕을 뜯어야 하는 거예요.
지붕 위에 올라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예요.
지붕을 뜯어야 하는 거예요.
믿음의 사람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길을 보아요.
보는 것만으로 절대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나아만 사건을 보세요.
사마리아 땅에만 가면
당신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듣잖아요.
그거 믿고 가잖아요.
만나서 고침을 받아요.
요단강에 몸을 담갔을 때
나아만이 고침을 받아요?
말에 내려서 몸을 담글 때
고침을 받잖아요.
만나면 되는 줄 알았어요.
만나서 알려주잖아요. 엘리사가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라구요.
우리에게 있는 함정이 이거예요.
“어~교회 오면 된다고 했는데
예배 드리면 된다고 했는데
기도의 자리에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그게 안되는 거예요.
왜요? 지붕을 뜯지 않았으니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문제를 가지고 왔잖아요.
예수님에게요. 그런데 사람들이 많으니까
도저히 그 사람들을 뚫고 갈 수가 없잖아요.
문이 하나 밖에 없고, 창문도 없는데
예수님 얼굴도 못보게 생겼어요.
기도해야 겠다는 감동을 받았는데
그래서 지붕위까지 올라갔어요.
그리고 지붕을 뜯어야 하는데
힘이 드니까 지붕을 안뜯고
그냥 병자를 놓고 가는거예요.
제가 종종 그런 말씀을 드리잖아요.
매일 기도를 오래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번 마음을 다잡고
기도를 오래 하자고 말하잖아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보면요.
이야~ 주님이 오려고 하시는데
그냥 가더라구요.
저는 그런거 많이 느껴요.
제가 어느 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8시부터 설교하고 9시 정도에 끝났을거예요.
그리고 그때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깜짝 놀란 것은요.
주님이 역사하기 시작하셨어요.
그런데 언제 역사하신지 아세요?
12시 5분에 역사하시더라구요.
기도한지 3시간 지나서요.
주님이 천천히 오시더라구요.
그런데 그 사이에 20면 남고
거의 다 집에 돌아갔어요.
그날 밤 보니까 주님이
뭔가를 주시려고 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그냥 갔어요.
지붕까지 올라온 것은 맞은데
그걸 못 받고 그냥 가버린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한번은 기도의
씨름을 해야 하는거예요.
매일 그러시지 않아요.
적어도 부흥회때만큼은
기도의 씨름을 한번 하자는 거예요.
“오늘 하루라도 기도 좀 하고 가야지”
“오늘 밤에 지붕을 한번 뜯어보자”
방언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간단합니다.
지붕을 뜯겠다는 마음으로
주님에게 매달리면 주십니다.
3시간이고, 4시간이고
기도하면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혼자 기도하기 힘드니까
영적인 지도자인 저를 세우셔서
여러분의 기도를 도와주고 말입니다.
전 어저께 그걸 느꼈어요.
오해하지 마시고 들어봐요.
어제 12시가지 기도하고 있는데
주님이 제게 그런 마음을 주더라구요.
“그만해라! 갔다” 보니까
기도부탁한 사람 아까 갔더라구요.
그리고 남아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마음을 주시더라구요.
어제 그 감동을 제가 느꼈어요.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이
지붕에 올라온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설교의 내용 너무나 잘 아시잖아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온 것은 좋아요.
예수님이 집에 왔다는 말을 듣고
동네 사람이 다 온 것은 또 아니예요.
제가 어떤 교회를 갔는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설교 마치고 광고하러 나오신거예요.
보통은 목사님들이 광고를 안하세요.
그냥 강사가 알아서 마무리를 하도록
기도를 하던지, 찬양을 하던지
그냥 맡겨 버리시거든요.
근데 그 교회 목사님은 나오신 거예요.
그리고 집회에 안나온 사람들을
하나하나 다 짚어가면서
성을 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뒤에 앉아서 혼자 속으로
“여기는 나온 사람들만 앉아 있는데”
제가요. 부흥집회를 할 때
누가 안나왔다는 말을 안하잖아요.
그래서 안하는 거예요.
나온 사람들이 기분 나쁠까봐!
제가 그때 어느 권사님의 마음을
딱 읽었는데 이랬어요. 그 눈빛이
“목사님 안나온 사람만 모아놓고
그런 이야기를 하세요”
예수님이 집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옵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집에 온 것만도
대단한 은혜라니까요.
하지만 나왔지만 기도를 안해요.
평소에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지붕에 올라갔지만 지붕을 안뜯어요.
그리고 지붕 위에 그 문제를 놓고 그냥 가요.
그러면 여러분이 차타기 전에
문제가 차 뒷자리에 있어요.
그리고 잘려고 누웠는데
근심과 걱정이 머리맡에 있어요.
그러면서 이상하다고 생각을 해요.
왜? 근심과 걱정이 그대로 있으니까요.
지붕을 뜯고 예수님에게 정확히
배달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나에게 돌아와요.
그렇기에 여러분 한번 정도는
지붕을 뜯는 기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을 드리잖아요.
저도 너무나 연약하다고요.
그러면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오늘 밤은 제대로 지붕 한번
뜯고 간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기도를 해요.
여러분 이런 결단이 있어야 해요.
부흥회 4일 다 왔다고
절대 만족하지 말라는 거예요.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붕 오르락 내리락 하느라?
근데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일기에 이렇게 쓰는 거예요.
“4일간 교회에서 부흥성회를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다 참석하였다.
그래서 너무 힘들었다. 끝”
여러분 이런거 말고 우리 일기에
이런 내용을 적어야 하는 거예요.
“부흥회 이틀째, 결단했다.
그리고 지붕을 뜯어 버렸다
주님이 임재하심을 경험했다”
어느 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하는데
어느 한분에게 성령님이 강력히 임하더라구요.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정말 강력하게 임재하시는 거예요.
하여간 그분이 목, 팔, 어깨,
여러군데가 불편했던 분인데
그날 다 나아버렸어요.
그분이 기도할 때, 몸이 낫는 것을
느끼시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냥 온몸으로 전율을 느끼셨던 거예요.
“아 이게 주님이 임재하시는 것이구나”
이것을 느꼈다는 거예요.
그분이 저에게 말씀하시는데
주님이 임재하신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이걸 처음 알았대요.
주님의 임재는 아무 때나 임하지 않아요.
물론 특별한 경우에는 오랜 시간 걸리지 않고
임하실 때가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죄성이 있기 때문에
절대 쉽게 임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오늘 밤 기도하는 것을 보니까
주님이 “내가 아니면 안되겠구나?”
이게 진정성 있게 느껴진다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이 만나 주시러 오시는 거예요.
그렇기에 오늘 밤
지붕을 뜯는 영성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매일 밤이 아니어도 오늘 밤만이라도
지뿡을 뜯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주님의 임재는요.
임재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세요.
이게 바로 주님의 임재하심이예요.
이번이 치유부흥 성회잖아요.
저는 이번 집회에 갈망하는 것이 있었어요.
그게 바로 주님의 임재하심이예요.
주님의 임재가 이번 부흥회가
제가 가지고 있는 뜨거운 마음이예요.
찬송 중에 임하시고, 예배 중에 임하시고
기도 중에 임하시옵소서.
설명할 수 없지만 예수님 만난
흔적이 있는 그런 부흥회
좋지 않습니까?
그럴려면 하루 날 잡으세요.
오늘을 잡던가? 내일을 잡던가?
그래서 지붕을 뜯어보자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삶에 강력이 임하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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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목사님
말씀에 힘을 얻어 다시 또 지붕에 올라갑니다.
오늘 함께 기도하였던 교회 성도님이 지붕을 뜯은것 같았어요.
4시간 기도후에.. 주님의 강력한 임재를 느끼셨다고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