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주 노예되어 어느 때 해탈 하랴. / 금오 스님
괴롭고 괴롭다.
고해(苦海) 중에 빠진 몸이여!
화택(火宅) 중에 타는 마음이여!
괴롭고 뜨겁구나.
천하의 인류가 끝내는 어디로 가는가.
세상만사를 살펴봐도 모두 허망하고 괴로울 뿐이다.
백천 가지 고통 중에도 유독 생사의 괴로움이 제일 크구나.
천하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생명을 앗아가니,
이렇게 생명을 앗아가는 손찌검은 사람이냐 귀신이냐.
아니면 짐승이냐 총이냐 칼이냐.
도대체 알아낼 수 없구나.
알아만 낸다면 칼이라 하더라도 무찌르고
총이라 하더라도 뭉개어 분함을 갚을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자취 없이 와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천하의 목숨을 앗아가니 매우 두렵구나.
옛날부터 내려오면서 뛰어난 영웅 열사들이
그 얼마나 자취 없는 칼날에 죽음을 당해야 했던고.
마냥 천하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요, 짐승도 아니요, 총도 아니요, 칼도 아니다.
자기 심성을 매각(昧却)한 죽음이며,
무명업식(無明業識)의 귀신이 앗아간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생사에 뛰어난 것은 사람의 성품이며, 이치”라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볼진대,
자기 자성을 매각한 죽음이요, 이치를 등진 죽음이 분명하다.
지혜 있는 대장부는 이러한 죽음을 보고
가슴이 멍하고 정신이 아찔하여 이 몸이 나의 몸인가 아닌가,
죽었는 가 살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죽음은 육신의 형용과 기식(氣息)이 죽는 것이 아니라
법신을 등지고 육신을 의지한 죽음이다.
이 육신은 죄업신(罪業身)이며 대환(大患)을 가진 몸이다.
그리고 이 몸은 무상하여 속히 썩어지나니,
썩지 않는 견고한 몸을 구해야 한다.
고인(古人)도 “나에게 큰 근심이 있으니 나의 몸이로다.
만일 나의 몸만 없다면 무슨 근심이 있으리요”라고 말했다.
이처럼 형체를 가진 몸은 불안전하여 생.노.병.사의 괴로움과
굶주리고 추위에 떨어야 하는 열뇌(熱惱)의 괴로움과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인 애별리고(愛別離苦),
증오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 원증회고(怨憎會苦),
구하려고 애쓰지만 얻지 못하는 괴로움인 구부득고(求不得苦) 등
팔고(八苦)를 비롯해 백천 가지 괴로움 속에서
수없이 죽음을 되풀이 해 오지 않았는가.
범부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육신으로 자신을 삼기 때문에
무상살귀(無常殺鬼)의 칼날에 죽음을 수미산처럼 받지만,
성현은 법신을 깨쳐 무량한 묘리로써
나고 죽는 바다에 빠진 중생을 제도하기에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화엄경〉에서 말씀하시되 “불법을 믿는 것은 마치 두 손과도 같다.
보배가 있는 곳을 발견하고 그 보배를 갖고 가고 싶은데,
손이 없다면 마음껏 가져 갈 수가 없다.
불법에 들어가는데도 믿음이란 마음의 손이 없으면
불법에 들어올 수가 없다”고 했다.
또 옛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에게 도가 없는 것은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과 같아서 나아갈 수 없나니,
군자는 그렇기 때문에 도가 없는 사람과는 같이 살지 않는다.”고 했다.
얼마나 믿음과 도를 강조한 말인가를
깊이 생각해 큰 신심을 내기 바란다.
도를 성취한 옛 사람들은 생사의 큰 우환을 막기 위해
무섭게 공부를 하거나, 먹고 자는 것도
모두 잊어버린 채 끊임없이 정진했다.
오늘의 청법대중(請法大衆)도
고인들의 이러한 발자취를 모범삼아 생사의 근본을 관찰할 지니라.
생사의 거래(去來)에서 자유로웠는가.
아니다.
세상에 나올 때 나의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라
무명(無明)의 아버지에 의해 세상에 나왔으며,
죽을 때도 마찬가지로 업력(業力)이라는 귀신에 의해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나와도 즐거울 것이 없으며,
죽어도 즐거울 것이 없느니, 괴롭고 괴로움이다.
고해에 빠진 중생은 대명천지 밝은 곳에서도
법로(法路)를 잃어버리고 업식이 망망한 사생육도(四生六途)에
윤회하여 업망(業網)을 벗어나기가 어렵구나.
더욱이 밤낮으로 먹고 입는 의식주의 노예가 돼
탐심만 치성하는 데 어느 때에 해탈을 하랴.
목숨이 끝나 안광(眼光)이 땅에 떨어지는 때를 당하여
손이 떨리고 발이 휘청거려 어디로 갈 것인지 가누지를 못한다.
삼도(三途)와 팔난(八難)을 모두 스스로 지었건만
도안(道眼)이 밝지 못해 알지 못하며, 천만가지가 부자유스럽고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크게 깨친 이에게 어찌 이런 부자유스런 괴로움이 있을 소냐.
원컨대 모든 대중은 잘 들으라.
삼계는 마음으로 주(主)가 됐으니, 그 주인을 찾으라.
마음을 관(觀)하는 이는 해탈을 얻지만,
그렇지 못하는 이는 죽고 낳는 세상에 빠지리라.
착한 대중들아! 만류(萬類) 중에 얻기 어려운 사람의 몸을 얻어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으니,
이 때를 놓치지 말고 자주 점검하여 속히 자신 속에 있는 불성을 볼지니라.
부처를 찾는 생각마저 가셨을 때
불신과 여래는 소연히 비친다.
사람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목전에 그대로의 얼굴이라네.
-〈금오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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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 스님 (1896~1968)
1896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금오(金烏) 태전(太田)스님은
1911년 3월15일 금강산 마하연에서 도암(道庵)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23 예천 보덕사 보월스님 회상으로 들어가 2년간 수행했으며,
30세 때는 정혜사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고,
보월스님의 법제자임을 인정받았다.
1935년 직지사를 시작으로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
쌍계사 칠불선원, 동화사, 선학원 등 전국 사찰에서 조실을 지내며
후학들을 지도했다.
정화불사 때에는 전국비구승대회 준비위원회 추진위원장으로
승단재건에 참여했고, 1958년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며
승풍진작에 힘썼다.
1961년 캄보디아에서 열린 제6차 세계불교도대회에 참석해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스님은
1968년 충남 보은 법주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73세, 법랍 57세.
스님과 관련된 유명한 수행일화가 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눈 밝은 스승’을 만나야 한다고
강조했던 스님은 선지식을 찾아 만주까지 가
수월스님 밑에서 1여 년간 수행했다.
스님은 또 하심을 쌓기 위해 거지생활을 택하기도 했다.
서울, 전주 등에서 움막을 짓고 2년간 거지행세를 하며
두타행을 실천했던 스님은 ‘움막 스님’이란 별호를 갖게 됐다.
[출처] 나홀로 절로 / |작성자 성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