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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수업은 데이비드 호킨스 선생님의 놓아버림으로부터 알게되었다.
놓아버림과 함께
기적수업이 앞으로 펼쳐질 암요양병원의 핵심치료가 되기를
그리고 내 영적 인생의 지침이 되기를!!
존 먼디. 추미란 옮김.
1965년 컬럼비아 대학의 의학심리학 교수 '헬렌 슈크만"은 노트에 생각을 기록하다가 "이것은 기적수업이다라고 말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7년 동안 하는 말을 받아적으며 "용서"의 개념을 중심으로 669쪽짜리 "기적수업 텍스트"를 완성했다. 거기에 365일 가르침으로 구성된 학생용 워크북과 교사용 매뉴얼 그리고 두권의 "기도의 노래", "심리치료" 소책자를 집필했는데, 이를 모두 통털어 "기적수업"이라고 하며, 총 약 50만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18개 언어로 번역, 200만부가 팔리며 현대 영성의 교과서로 자리잡은 "기적수업"은 방대한 분량과 난해한 내용으로 현재까지도 활발히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존 먼디는 1973년 "기적수업"의 대서자 "헬렌 슈크만"을 만났다. 헬렌은 존에게 "기적수업"을 소개해주었고, 1980년 건강에 이상이 생길때까지 그의 안내자가 되어주었다. 뜻을 이어받은 저자는 "기적수업"의 가르침을 더 깊고 실제적으로 전파하는데 힘써왔다. 1967년부터 2009년까지 대학에서 철학과 종교를 가르쳤으며, 아홉권의 책을 썼다. 기독교 목사로 활동하면서 기적수업의 내용을 연구해왔고, 종교를 뛰어넘는 통찰과 실천을 기반으로 전세계를 두루 다니며 수천회의 강연을 해왔다. 2001년 암투병중에도 기적수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존 먼디 박사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단지 이렇게 하라.
가만히 있으며 그대는 무엇이며
신은 무엇인지에 대한 모든 생각,
그대가 세상에 대해 배운 모든 개념, 그리고
그대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모든 이미지를 내려놓아라.
그대의 마음에서 진리나 거짓,
혹은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판단,
부끄러워하는 모든 생각을 비워내라.
아무것도 붙들고 있지마라.
과거가 가르쳐 준 어떤 생각이나
누군가로부터 배운 적이 있는 믿음 하나도 가져오지 마라.
이 세상을 잊고, 이 수업도 잊고, 온전히 빈손으로 그대의 신께 오라"
기적수업 안내서
기적수업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에고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을 깨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기적수업을 따르는 삶이란 다름 아닌 자신에 대한 비난을 멈추는 삶이며, 그 때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분노, 비낭에서 벗어나게 되는 삶을 뜻한다. 이 책의 저자 존 먼디는 "기적수업" 속 주요문장들을 원뜻에 충실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동시에, 유머러스한 일화를 덧붙여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또 기적수업의 가르침을 어떻게 일상에 적용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실천사례를 보여주어 독자들의 변화를 이끈다.
1부. 기적수업이란 무엇인가?
1. 분명 다른 길이 있다. 기적수업이 쓰여진 과정
"좋은 교사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하고 가르침을 통해 그 생각을 강화한다"
기적수업은 내가 아는 가장 심오하고 지혜롭고 온전한 책이다. 독학이 가능한 텍스트 일뿐만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정교하며 사랑의 표현이 생생하고 풍부하다는 저에서 영적으로 매우 독특한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많은 사람이 성경이래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간주할 정도이니 충분히 현대 영성저적의 고전이라 할만 하다.
20-21세기 문헌인 기적수업은 간결하면서 박학하다. 기적수업을 통해 우리는 이른바 에고와 육체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영억에서 완전히 벗어나 온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기적수업은 또한 본질적인 면에서 실용서라할 수 있다. 우리가 마음의 어리석은 간계들을 버리고 모든 왜곡된 틀을 치유하며 원래의 정신상태를 되찾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기적수업은 신뢰, 정직, 아량, 온화, 기쁨, 용인, 관대, 인내, 충직, 도량 등의 계발을 돕는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읽어보라. 어디서나 그대라는 단어가 나올 것이다. 기적수업은 그대를 위해 쓰여졌다. 오랜 타향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 오랫동안 잊고 지낸 옛 친구를 만날때의 느낌이 들 것이다. 기적수업은 당신이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 당신의 진정한 자아를 만나게 해줄 것이다.
혁명적인 철학은 사태의 뿌리로부터 건드린다.
기적수업의 철학은 사고의 총체적 전환을 요구하기 때문에 혁명적이다. 기적수업에 따르면 우리는 실재를 환상으로, 환상을 실재로 지각하며 과거에 매달리는 퇴행적 지각을 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밖에서 나를 찾는 일을 멈추고 그 인식을 180도 바꿀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에고의 관점에서 벗어나 온전히 새로운 빛 속에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려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할 뿐 지금 이미 온전하게 영(sprit)의 영역에서 보고 있다. 혁명적이라는 말은 뿌리를 건드리다는 뜻이다. 기적수업은 우리를 가장 기본적인 문제, 즉 에고를 위해 내려지는 마음의 결정들이라는 핵심적인 문제로 곧장 데리고 간다.
바로 여기에서 그리고 오로지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퇴행적이며 거꾸로 뒤집힌 잘못된 지각을 바로잡고 '다시 한번 선택하여" 고향으로 가는 길을 찾아나설 수 있다.
기적수업을 따르는 삶이란
더이상 우리 자신을 탓하지 않는 삶이고,
그리하여 저절로 타인도 탓하지 않게 되는 삶이다.
판단, 분노, 비난에서 벗어난 삶, 이것은 죄책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난 삶이다. 기적수업의 목적은 평화와 행복이다. 기적수업은 우리모두를 곧장 천국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보라. 금방 와! 누가 이런 책을 썼을까? 하고 궁금해질 것이다. 기적수업은 진리의 아름답고 명백한 반영이다. 귀가 있다면 분명히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한 마음에 단순함이란 아주 어려운 것이다"
기적수업은 쉽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을 굳이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 내용은 간단하고 솔직하며 단도직입적이다. 그것은 돌려말하지 않는다. 진리는 진리일 뿐이다. 진리는 간단하다. 진리가 간단하지 않아 보이는 것은 우리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대단히 난해하다. 진리는 일관성이 있고,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신(사랑)과 에고(두려움)에 똑같이 충성하려다가 그 사이의 벼랑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그대가 배운 가르침들은 과잉 학습 후 고착되었기에
무거운 커튼처럼 떠올라 간단하고 명백한 것을 가린다"
기적수업이 간단하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난해하고 더 거부하기 쉽다. 우리가 기적수업의 가르침을 듣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동안 철저히 에고의 가르침만 받아왔고, 에고의 목소리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합리적이고 온전한 또 다른 목소리가 있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항하는 청소년이 그렇듯 우리는 모두 권위의 문제를 갖고 있다. 우리가 만든 자아와 그 자아에 딸려오기 마련인, 우리가 만들어 온 세상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누가 듣고 싶어하겠는가? 기적수업을 따르는 삶이란 너와 내가 분리 독립된 자아라는 생각을 철저히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고 싶은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그대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은 그대의 집이 아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대는 이 말이 진실임을 알고 있다"
당신의 생각을 조종하려는 독재자, 폭군, 학대자가 있다고 잠시 상상해보자.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가 에고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의 정신을 통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에고의 유혹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우리 정신의 배후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럴수는 없어. 네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실재가 아니야. 분명 다른 길이 있을거야.
'다른 길이 있다고 믿는 것이 에고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생각이다.
바로 거기에 에고가 참나가 아님을 인식할 수 있는 힌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기적수업은 어떻게 쓰였나?
기적수업은 뉴욕 컬럼비아 의과대학 의학심리학 교수였던 헬렌 슈크만 박사와 윌리엄 테트포드 박사가 1965년 처음 집필하기 시작했다. 둘사이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경쟁과 내분에 지칠대로 지친 빌이 어느날 헬렌에게 말했다. 분명 다른 길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전세계적으로 많은 병원, 학교, 사업장, 교회, 가족들과 함게 일했는데, 그 모두를 힘들게 했던 중상모략과 싸움, 에고 게임없이도 함께 잘사는 다른 길이 분명 있을 거라는 뜻의 말이었다. 뜻밖에도 헬렌도 빌을 보며 말했다. 맞아요. 그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저도 돕겠어요.
헬렌이 방어하고 싶은 마음을 기꺼이 놓아버린 바로 그 순간, 치유를 위한 공동의 장 하나가 마련되었다. 헬렌과 빌이 마음을 모아 치유를 결심했을때, 기적수업을 위한 씨앗 하나가 비옥한 땅을 발견하였고 마침내 그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얼마후인 1965년 10월 21일, 자신의 생각을 노트에 적어가던 헬렌은 돌연 "이것이 기적수업이다"라는 음성을 들었다. 당신이 시인이어서 머리속에서 시구를 듣거나 당신이 작곡가여서 악보를 듣기 시작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그것은 자동기술적인 글쓰기, 즉 무언가가 헬렌의 손을 조종하여 억지로 글을 쓰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헬렌의 내면속에 있는 목소리가 그녀에게 말하기 시작한 것과도 같았다. 헬렌은 언제라도 그 받아쓰기를 멈출 수 있었다.
전화를 받거나 다른 일을 보고 다시 돌아와서도 애초에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는 듯 계속 이어서 쓸 수 있었다. 헬렌은 간단히 "자신의 일을 접고, 사랑(기적수업)이 흘러들어오게 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1972년 9월 기적수업을 완성할때까지 헬렌은 7년 동안 받아쓰기를 계속했다. 기적수업이라는 669쪽짜리 텍스트는 그 가르침을 설명해준다. 그리고 기적수업에는 그 연습을 위해 365일의 가르침으로 구성된 학생용 워크북과 92쪽 분량의 교사용 매뉴얼도 있다. 헬렌은 또한 같은 목소리로부터 "기도의 노래"와 "심리치료 : 목적, 과정 그리고 연습"이라는 두개의 소책자도 전해 들어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 기적수업은 약 50만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기적수업은 1976년 6월 22일에 출간되었고, 지금까지 200만부가 넘게 팔렸다. 18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현재도 몇개의 다른 언어로 번역중이다. 영어 판본 다음으로 스페인어 판본이 가장 많이 팔렸다. 기적수업의 특징 중 하나는 매일 훈련할 수 있도록 일일 가르침으로 구성된 독특한 365일 워크북이 있다는 점이다. 워크북은 세상을 에고중심으로 보는 습관을 깨는데 도움을 주려는 취지에서 고안되었다.
전체수업과정에서 지켜야할 유일한 규칙은 하루에 한가지 가르침 이상은 연습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하루이상 연습하고 싶은 가르침이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끈기다.
1973년 나는 영적경계협회가 후원한 회의에서 나의 책 "죽음 배우기'에 기초해 신비주의에 대한 발제를 했는데, 헬렌과 빌이 그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그들을 소개받았다. 당시 내가 들은 이야기라고는 헬렌이 고무적인 책 한권을 쓰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1975년 나는 초월심리학협회 뉴스레터에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를 하나 실었다. 당시 나는 심리학과 영성의 관계에 관한 논문을 쓰던 중이었는데, 심리치료와 영성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만나 몇가지 문제를 논의하고 싶었다. 그 공고를 읽은 빌이 우리의 첫만남을 기억해 냈고, 헬렌에게 지금은 간단하게 심리치료 소책자라고 불리는, 어떤 책의 집필을 끝낼 기회인것 같다고 말했다. 헬렌은 그 소책자를 훨씬 전부터 쓰고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그 완성이 요원한 것처럼 보였다.
빌의 생각에 동의한 헬렌이 1974년 4월 나에게 전화를 해 도와줄 수 있을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헬렌의 심중이 어땠는지는 나로서는 전혀 가늠할 수 없었지만 빌 베네딕트 그로셜 사제, 케네스 왑닉 박사와 함께 뉴욕 이스트 17번가에 있는 케네스의 작은 스튜디오 아파트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당시 나는 박사과정을 밟는 학생이자 대학강사였고 웨스트 19번가에 있는 일반신학교에서살던 목사였다. 켄의 작은 스튜디오는 그때까지 내가 본 가장 검소한 아파트였다. 전자제품은 물론 그 비슷한 것도 없었다. 타자기 하나와 책 몇권, 찬물을 끓일 주전자, 수건, 칫솔같은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있었다.
켄의 침대겸용 소파에 앉은 헬렌은 어떻게 기적수업이 존재하게 되었고, 기적수업이 그 네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 말해주었다. 1971년 나는 배낭을 메고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구루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다양한 철학사조에 심취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대부분 나에게 그저 무언가에 대한 갈증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그날 만나게 된 미래의 나의 동료들이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갈증이 해소될 것같지는 않았다. 그날밤 나는 숙소로 돌아오면서 어쩌면 방금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벌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일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수 없었다.
그후 켄이 신학교로 나를 찾아왔고 나는 켄이 뉴욕시, 웨스트체스터, 오렌지카운티에서 하던 강의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켄은 그때부터 오랜 세월동안 나에게 멋진 형으로 남아주었다. 헬렌은 그 후 나를 어미새처럼 품어주면서 힘들때마다 안내자가 되어주었다. 나는 헬렌을 주디 휘트슨의 집이나 켑 왑닉의 아파트에서 만났고 원하면 언제든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헬렌은 언제나 내가 처한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고 적절한 길을 제시해 주었다. 나는 여자관계때문에 자주 힘들곤 했는데, 그럴때마다 그녀는 내가 감정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감리교와의 관계도 애매모호한 상태였다. 목사가 소명처럼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 일을 그만두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헬렌은 계속 지금은 아니야, 나중에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어라고 말해주었고, 16년 후 나는 목사직을 그만두었다.
기적수업의 목소리와 언어
기적수업을 읽으면 그 속에 들어있는 목소리가 보통 사람의 목소리가 아님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기적수업은 분명 에고가 쓴 것이 아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보자. 기적수업은 과거나 미래에 관한 것이 아니며, 세속적인 문제에 대한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속셈이 없다. 내면의 평화를 구하는 우리를 도와 우리만의 위대한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다. 기적수업은 그 주장이 뚜렷하고, 믿음과 이해와 연민으로 가득하다. 논증을 통해 진리를 찾는 철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적으로 일관되지만 기적수업에는 그러한 논증이 없다. 신의 실존에 대한 증명도 없다. 단지 존재의 진리를 상기시킬 뿐이다. 기적수업의 목소리는 예수의 목소리나 성령의 목소리, 또는 최고의 상태에 있는 당신의 목소리 일수도 있다. 그 목소리는 당신의 자아거나 나의 자아거나, 우리의 자아거나 신이거나 그리스도이다. 그 목소리는 치유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그 마음은 곧 올바른 마음일때의 우리 모두이다.
'그분께서 그대에게 말씀하실 때,
그대가 듣는 것은 그대의 음성이다"
기적수업은 신의 자녀 모두를 신의 아들이라 부른다. 이 세상에는 두개의 성이 가능하지만 사실 그 사이에 구별은 없다. 온전한 것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전체 또는 더 나은 존재로서의 인류, 전체로서의 영 sprit을 말하는 중이다. 나는 신이 나를 창조한 그대로이다. 신의 아들은 고통받지 않도록 창조되었다. 그리고 내가 신의 아들이다와 같은 문장을 읽을때 신의 딸 혹은 자녀라고 말하는 것이 더 편하다면 그렇게 바꾸어 읽어도 된다. 기적수업의 목적은 우리가 내면의 자아(그리스도)와 만나도록 돕는 것이다.
... 말은 상징의 상징에 지나지 않음을 잊지 말자. 따라서 말은 실재로부터 두번 격리된다"
오직 진실만이 진실하다.
기적수업은 누구나 배울수 있는 일종의 보편적인 커리큘럼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심오하고 지혜로운 영적 가르침과 함께 가는 독특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적수업은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것이 어떻게 새로울 수 있겠는가? 세상의 모든 신비주의자, 영적스승, 성자, 현자들이 전 역사를 통해 지각 너머의 것을 말해왔다.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전통이 오래된 철학들 즉 "불이일원론"을 말하는 인도의 베단타 철학, 불교, 영지주의, 기독교, 신비주의, 수피즘, 독일의 이상주의, 미국의 초월주의, 합일사상, 기독교의 신사고 운동, 릴리저스 사이언스, 크리스천 사이언스, 그외 수천가지 철학적 형태속에서 우리는 기적수업의 주제와 노래와 설명을 발견한다.
"신비주의의 꽃이 인도에서 피어나든 중국에서 피어나든 페르시아에서 피어나든 라인강에서 피어나든 그 열매는 하나이다"
기적수업은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계급에 기반을 둔 공동체 조직이 아니며, 전도나 포교를 말하지도 않는다. 기적수업은 세상을 향해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성찰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하고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야 한다. 전도하려면 내가 옳고 당신은 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기적수업의 말이 당신의 내면으로 들어온다면 다른 사람들도 당신을 통해 그 가르침의 효과를 눈으로 확인할 것이고, 그렇게 당신으로부터 세상이 조용히 그리고 실질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혁명이 아니라 영성이 드러나야 변화가 생긴다. 기적수업은 말 그대로 영적인 공부를 위한 책이다. 종교 조직에 속해 있다면 당신은 그 조직의 꼭대기와 밑바닥, 중간에 있는 사람들을 볼것이다. 그리고 에고 게임이나 권력다툼도 볼 것이다. 기적수업은 탁월한 자습서이다. 어디에 소속될 필요없이 기적수업만으로 공부를 끝마칠 수 있다. 여기서 공부란 관계의 치유를 위한 공부지만 사람들과 관계속에서 기적수업을 실천하는 삶을 뜻하기도 한다.
한 친구가 금주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을때, 누군가가 그 모임때문에 술마시기가 대단히 힘들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하나. 그 모임에 집중하면 금주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기적수업에 집중해보자. 그럼 에고를 정말로 망쳐놓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 깨달음을 원한다.
2. 내면은 제정신
이기성, 고독, 광기
덴마크에서 낡은 헛간의 높은 서까래에서 살았던 거미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어느 날 거미는 작정하고 기둥쪽으로 내려갔는데, 그곳에 파리가 많고 사냥도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곳에 아예 터를 잡고 편하게 살 수 있도록 거미줄을 쳤다. 그러던 어느날 거미는 문득 처음 서까래에서 내려올때 만들었던 거미줄을 보고 그것이 더이상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거미줄을 끊어버렸고, 즉시 그 기둥에 쳐 놓은 거미의 보금자리 전체가 파괴되어 버렸다.
우리는 얇은 줄 하나로 영원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나왔고 그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누군가 언젠가는 깨어난다. 모든 것이 결국에는 원천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 세상에와서 세상에 매료된 우리는 그 원천을 잃어버렸다. 우리를 영원과 연결해주는 그 줄을 보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줄을 잘라버린다. 그리고 그 모든 광기가 시작된다.
"열린 눈으로 그대의 세상을 보면 그대가 정신이상 상태에 빠져들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 그대는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않으며, 마치 우주에서 홀로인 양 실재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신께서 그대를 부르시건만 듣지 못하니, 자신의 음성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시야에 그리스도의 비전은 없으니, 홀로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1) 나의 최고 관심사는 "나자신"
솔직해지자. 우리는 우리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우리 자신을 제일 걱정한다. 2010년 3월 1일자 사이언스 뉴스에 실린, 재난이 터졌을때 반응하는 양상에 대한 한 연구에 따르면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우리의 첫번째 반응양상은 항상 이기성이 그 바탕임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에고의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이 그렇고 "우리, 나, 에고'가 있어왔던 지난 역사 내내 그러했다. 우리 자신을 가장 먼저 그리고 최대한 돌보다 보니 에고의 사고라는 전체 시스템이 생겨났다. 이는 우리가 절대 이타적일 수 없다거나 사랑에 대한 생각이나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이타적이면서 사랑을 생각하고 실천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가장 우선시 하는것은 여전히 나의 안위이고 아픔이고 고통이다. 나는 나의 몸매와 욕구충족, 사회적 지위, 재정상태, 인간관계 등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2) 전 우주에서 나는 혼자이다.
"에고는 완전히 스스로 존재한다는 마음의 믿음이다"
수십억의 인구가 지구와 함께 살지만 우리는 소외감을 느낀다. 고등학교 때 나는 첫사랑에 빠져있었다. 아낌없이 사랑을 주던 가족이 있었고 내가 자랐던 자연과 농장을 사랑했지만,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완전히 새로웠고 확실히 달랐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매혹적이고 위대한 사랑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안에서 녹고 합쳐져 하나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다가 큰 시련이 찾아왔다. 우리는 어렸으며 나는 대학을 마칠때까지 결혼을 미루고 싶었다. 하지만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어머니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싶었던 그녀는 내가 대학에서 공부하느라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작심하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채 멀리 도망가 버렸다. 나의 고통은 이루 말로다 표현할수 없었다. 그것은 철저한 절망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버렸고, 앞으로 절대 더이상의 사랑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여기저기 운전하고 다니면서 울부짖으며 주먹으로 운전대를 쳐댔다. 큰 소리로 신을 저주했다. "이 세상에 나 혼자이다. 이 넓은 우주에 나 혼자뿐이다"라고 생각했다.
3) 우리는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
"이곳은 정신이상의 세상이다. 그 정신이상의 정도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그대 지각의 영역 어디에나 그 정신이상에 관여했으며 그대에게 그대의 꿈은 거룩하다. 그것이 신께서 그 꿈을 품은 그대의 내면에 성령을 주신 까닭이다"
그날 비행기 두대가 세계무역센터 건물들로 돌진하는 것을 처음 보았을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위 인용문의 첫 두문장이었다. "이곳은 정신이상의 세상이다. 그 정신이상의 정도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이세상은 멋진 경험도 많이 제공한다. 그 중에서 최고는 내면에서 뿜어져 나와 서로에게 번져 나가는 사랑의 느낌일 것이다. 우리는 꽃, 새, 산, 바다, 예술품 등 사랑스러운 것들에 주목한다. 우리의 귀는 음악, 아이들의 웃음소리, 고양이가 야옹하고 우는 소리, 개짓는 소리, 사랑하는 사람의 달콤함 목소리를 들으며 행복을 맛본다. 그리고 입술과 혀로 맛있은 음식을 음미하고 귀여운 동물과 따뜻한 담요를 좋아하며, 무엇보다 서로에게 손을 뻐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육안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진정한 전체성을 기억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다.
"왜냐하면 실재를 통제하려는 정신나간 욕망을 버리고 기억할 것을 택한 마음안에서만 신에 대한 기억이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틀어 인류는 줄곧 서로 싸워왔다. 대부분의 역사는 부족이 부족을 죽이고, 제국이 제국을 착취하고, 계급이 계급을 억누르고 나라가 나라를 정복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19세기 초월론자 랄프 왈도 에머슨은 "빌어먹을 일의 연속이 역사이다"라고 했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은 "역사란 인류의 범죄와 우둔함과 불행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
"광범위한 깨어남 혹은 재탄생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대들이 투사 혹은 그릇된 창조를 계속하는 한 그런 재탄생은 불가능하다"
... 전 역사에서 우리는 오해와 광기, 불행을 본다. 지속적인 만족감이나 신의 축복이 가득한 평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만족이나 평화만으로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온전히 새로운 비전 하나
그 모든 암울함에도 불구하고 이 망상으로 가득한 세상을 초월하는 자신이 존재함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다 알게 된다면 어떨까? 죄채감, 수치심 혹은 두려움과 상실의 문제로 고통당하고 있는 에고가 당신이 아님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거대한 에고들의 집단에 의해 만들어졌고, 수백만년 동안 두려움이라는 심리적 메커니즘속에서 발전한 합의된 세상, 즉 하나의 생각임을 당신이 알게 된다면 어떨까? 심술궂은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 인간의 짐단적 절망이 계기가 되어 하나로 꿰어 진 생각의 세상이라고 말이다.
그 모든 것을 알지만 동시에 우리는 육체와 시공간이라는 함정속에 빠져 있다고 느낀다. 우리가 그 미로를 빠져나가 육체와 에고를 넘어 본래 우리의 집, 진정한 자아, 진실한 존재의 상태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아무런 지도나 네비게이션도 없다면 어떨까? 그 모든 것을 언젠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알 수 있다면 어떨가? 그런 깨달음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그 속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기적수업의 목적이고 약속이다. 진지하게 기적수업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그 모든 것을 깨달았다고 혹은 알아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내면이 제정신이고 밖은 제정신이 아니다"
폭풍의 눈은 진실로 고요하며 그 밖은 혼란 그 자체이다. 중심을 내면에 둘때 우리는 평화롭다. 화를 내서 밖으로 감정을 투사할때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기적수업은 아무리 대단한 추구라도 그것이 바깥을 향한 것이라면 거기에는 평화가 없다고 단언한다. 내면이 평화로운 사람만이 건강하다. 사변적 전통을 겸비한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어떤 장소를 말해왔다. 하지만 천국은 죽어 잠들어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께어나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아침에 일어날때 우리는 밤사이 어디에도 가지 않았음을 안다. 단지 꿈을 꾸며 침대에 누워있었을 뿐이다. 깨어남은 과거에 꿈을 꾸었음을 의미한다. 깨어남은 천국을 떠난 적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천국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가 천국이며 다른 곳은 없다.
지금이 천국이지 다른 때는 없다"
행복을 만드는 주재료는 자유이다. 자유는 늘 무언가로부터 자유이다. 우리는 빈곤과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중독으로부터의 자유, 불안과 두려움, 숨막히는 관계, 정치적 독재 등등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기적수업을 따르는 삶이란 아이러니하게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고 찾는 삶이다. 그것은 곧 착각으로부터의 자유, 우리가 에고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실재가 아닌 무언가로부터의 자유이다.
"미래에 다가올 행복에 만족하지 마라.
미래의 행복은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그대는 더 나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
지금 자유로울 수 있는 요인들이 그대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단지 이렇게 하라. 가만히 있으며 그대는 무엇이며 신은 무엇인지에 대한 모든 생각, 그대가 세상에 대해 배운 모든 개념, 그리고 그대 자신에 대해 갖고 잇는 모든 이미지를 내려놓아라. 그대의 마음에서 진리나 거짓, 혹은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판단, 부끄러워하는 모든 생각을 비워내라. 아무것도 붙들고 있지마라. 과거가 가르쳐 준 어떤 생각이나 누군가로부터 배운 적이 있는 믿음 하나도 가져오지 마라. 이 세상을 잊고, 이 수업도 잊고, 온전히 빈손으로 그대의 신께 오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