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동두천 두레마을에서는 농어촌교회와 도시개척교회의 사모들을 위한 수련회가 시작된다. 올해로 26회째로 열리는 이번 수련회에는 170여명의 사모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 3박 4일간 안식과 말씀, 놀이와 찬양의 시간을 가진다. 이 모임은 참석하는 자격이 있다. 전교인이 50명 이하여야 하고, 농촌이나 어촌에서 잠시 지내는 목회자가 아니라, 그곳에서 뼈를 묻을 작정을 하고 헌신하고 있는 목사의 부인이어야 한다.
이 모임은 인기가 대단하여 한 번 참석한 사모는 다음해의 수련회도 참석하기 위하여 일 년 내내 기다린다는 사모도 있다. 한국교회가 이만큼 부흥 발전한 것은 그간에 농촌에서, 개척지에서 개척자들이 농촌을 지키고, 섬에서 교회를 지키며 교인들을 길러 도시로 보내었기에 도시 교회들이 발전한 것이다. 그럼에도 도시 교회들은 농어촌의 교회들을 돌보는 일에 인색하다.
우리 부부가 26년 전부터 농어촌교회의 사모들을 위한 잔치를 열게 된 사연이 있다. 지금 34살 된 아들을 출산할 때로 그 사연이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내가 화성군 남양만 바닷가에서 농촌목회를 하던 시절이다. 아내에게 산기가 있음을 확인한 달로부터 출산비를 얼마씩 저축하여 산월이 되었을 때 15만원이 모아졌다. 아내에게 출산기가 있자 서울 광화문 부근의 한 산부인과에 입원하였다.
그런데 아내에겐 30대 중반의 첫 출산인지라 순산하지 못하고 제왕절개수술로 아이를 낳았다. 퇴원케 된 후 입원비를 물은즉 125만이라 하였다. 15만원 밖에 없는 나는 원장에게 시골목사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깎아주기를 사정하였더니 75만원만 내라 하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75만원이나 125만원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아내에게 퇴원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라 이르고는 서울시로 나가 모자라는 60만원을 구하러 다녔다. 무려 13집을 돌며 사정하여 나머지 돈을 구할 수 있었다. 그날 자존심이 상한 마음은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학생시절엔 난다 긴다 하던 처지였지만, 졸업 후 세월이 지나 옛 동창들을 만나 돈을 꿔 달라 할 때의 내 마음이 어떠하였겠는가! 그날 돈 구하러 서울 바닥을 온종일 돌면서 다짐하였다. 내가 사정이 좋아져서 여유가 생긴다면 다른 일은 못하여도 동료 농촌 목회자들의 가족을 돕는 일을 하겠노라 결심하였다. 그 후 7, 8년이 지나자 이름도 나게 되고, 남을 도울 힘도 다소 있게 되자 농어촌교회를 섬기는 동료 목회자들을 돕는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농어촌에서 가장 가난한 목회자들을 위한 잔치를 생각하여 준비하다 생각을 바꾸었다. 농어촌 교회에서 가장 고생하는 분들은 목사들이 아니라 그들의 내조자들인 사모들이란 생각에서 사모들을 위한 위로의 잔치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그 첫 시작이 26년 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