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에 대해서 상반된 두사람의 논리 정말 가슴깊게 새겨둘 필요가 있더군요...
'아프락사스에 속지말자'라는 제목으로 <데미안>에 나오는 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알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 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Der Vogel kaempft sich aus dem Ei. Das Ei ist die Welt. Wer geboren werden will,
muss eine Welt zerstoeren. Der Vogel fliegt zu Gott. Der Gott heisst Abraxas.)
그 분이 이 유명한 귀절을 해석하는 가운데 몇 가지 우리의 흥미를 끄는 대목이 나옵니다.
(1) 소위 '세계고전' 가운데 가장 거품이 많은 것이 <데미안>"이라는 이야기,
(2) 독일이 뒤늦게 세계 열강에 합류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를 다 차지하고 있어서 "기존의 식민지 체계를 부수어야할" 필요가 있었고 거기에는 "알을 깨는 아픔'이 수반된다" 는 이야기,
(3) 그래서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이 알의 비유를 들어 "독일은 알에서 깨어나려고 한다. 알은 구체제이다. 독일이 태어나기 위해
서는 영국과 프랑스를 깨뜨려야 한다. 독일은 세계제패를 위해 날아가려 한다. 그렇게 건설된 것은 독일 제국이다"는 이야기,
(4) 그리고 "<데미안>은 철학 소설"이 아니며, "전쟁을 부추기는 참전 소설에 불과"하다는 이야기,
(5) 이런 식으로 파시스트들의 농간에 놀아나 참전문학을 쓴 사람들은 어느 시기에나 있었는데 헤세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는 이야기,
(6) 그러나 헤세가 다른 삼류 작가들과 비교해 뛰어난 점이 있다면 그들처럼 전쟁에 참가하자는 메세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현학적인 문체를 이용해 철학 소설처럼 겉치장하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이야기,
(7) 독일 병사들이 전쟁에서 죽어 가면서 가슴에 <데미안>을 품고 죽은 것은 그들이 이책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데미안>을 읽고 흥분하여 불나방처럼 전쟁터에 뛰어들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
(8) 그런데도 우리 나라 독자들이 <데미안> 을 무슨 위대한 고전처럼 숭배하는 것은 '서구 문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무조건 대단한 것으로 받아 들이는 우리의 문화 사대주의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지요.
자,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그 동안 헤세 사랑방에서 나눈 은밀한 이야기가 사방팔방에 퍼져서 사랑방에 마실 (이웃에 놀러다닌다는 뜻의 경기도 사투리) 온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우선 <데미안>이 세계 고전 가운데 가장 거품이 많다는데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어떤 여대생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는요, 거품이 있는게 좋아요. 빨래 할 때도 거품이 잘 나는 세제를 사용하구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는 '비엔나 커피'인데요, 커피 위에 거품이 떠 있어서 보기도 황홀하고 먹을 때도 아까워서 못 먹을 지경이예요. 그런데 <데미안>에 거품이 있다구요? 처음 듣는 애기군요. 그렇다면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하겠네요. 저는 거품을 좋아하니까요." 이 아가씨는 거품 찬양론자이군요. 경제학을 한다는 한 남학생은 우리 나라 경제는 거품 때문에 망했다고 열을 내더군요. 그래서 IMF 사태도 왔고, 취직도 안된다고 말하더군요. 그 학생은 "저는 거품 애기만 나오면 지긋지긋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거품 얘기만 해도 서로 생각이 다릅니다. <데미안>이 거품이 많은 작품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거품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문제만큼 판단하기 어려운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저는 <데미안>이 세계 고전에 속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또 이 작품에 거품이 있다,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거품이 있다면 어떤 점이 거품인지 헤세 연구 30년을 해도 이해가 안 갑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작품이 청소년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중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럼 왜 이 작품이 청소년들의 사랑을 받고 또 필독 도서라고 추천되고 많이 읽힐까요? 단지 비엔나 커피 같이 거품이 있을 것 같아서 일까요? 아니면 학교에서 선생님이나 선배가 읽어 보라고 해서 많이 읽힐까요?
그 다음 흥미 있는 이야기는 "알을 깬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인 것 같습니다. 그분은 알을 깬다는 것이 독일이 굳어진 식민지 점유체제를 깨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미 식민지를 다 차지하고 있는 영국이나 프랑스를 쳐부수어야한다는 거죠. 이 부분은 헤세에 대해서 잘 모르고 비판력이 없는 일반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어떤 학생은 그분의 해박한 세계사 지식에 대해서 경탄했고 또 데미안을 그런 역사적인 일과 연결시켜 해석해 낸데 대해서 "아!, 정말 그렇게도 볼 수 있구나. 그전에 몰랐던 것을 알았다. 역시 문학 작품은 새로운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구나!"하고 자뭇 흥분된 투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나이 많은 여성 헤세 애호가는 "헤세를 순수하게 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끌어다 해석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분명히 저의 입장을 밝혀야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헤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실 이런 저런 주장에 대해서 이리 저리 끌려 다닐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왜 자기의 생각이 옳은지 정확한 논거를 토대로 주장을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헤세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사랑방을 이끌어 가는 사람으로서 헤세 독자들이 헤세를 잘못 이해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은 큰 죄악이라고 생각하고, 또 헤세 연구를 한 사람의 의무는 헤세를 올바르게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헤세 학자들 간에도 어떤 문제에 대해서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헤세가 기독교적이냐 아니면 비기독교적이냐 하는 문제, 헤세가 은둔주의적인 작가냐 아니면 현실참여적인 작가냐 하는 문제 등 수 없이 많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학문적 근거와 이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이 옳고 옳지 않다고 쉽사리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합니다. 그 분의 역사적인 사실 언급은 모두 사실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독일은 내부 정치적인 분제로 중앙집권체제가 늦어져서 일찍부터 외부의 세계로 눈을 돌린 영국이나 프랑스에게 식민지를 빼앗기게 되었고 후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강대국이 되었을 때, 독일이 세계를 지배하는데 이 식민지의 필요성이 어느 때 보다도 더 절실하게 요청되었기 때문입니다. 1884년 <독일 식민 협회 Gesellschaft fuer deutsche Kolonisation>와 1898년의 <독일 함대 연합 Der Deutsche Flottenverein>등이 결성 되었습니다. 1893년 부터는 사실 상인과 몇 몇 대학교수들에 의해 식민지 확보 문제의 당위성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 때부터 의회에서는 공공연하게 독일이 세계사에 있어서 늘 그늘진 곳에 있지 말고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양지 바른 곳 Platz an der Sonne"을 차지하여야 하고 독일이 '이 세상의 소금 Salz der Erde" 역활을 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헤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 역사도 이해해야 하겠지만 , 무엇보다도 헤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의 이런 주장은 <데미안>이 참전 소설이라는 잘못된 판단에서부터 시작 된 것입니다. 첫 단추를 잘 못 낀 결과라고 봅니다. 그래서 결과는 어마어마한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간 것입니다. 헤세는 철두철미하게 반전주의자입니다. 그는 그의 삶이 시작할 때부터 그의 삶이 끝날 때까지 독일의 어느 작가보다도 시종 일관 반전주의자였습니다.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사실 노벨평화상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평화주의적인 세계가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데미안>이 나오기전 헤세는 국가주의나 반유태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평론을 썼고 그로 인해 그는 "조국 없는 놈"이라든지 "품 속에 품고 있는 뱀"이라든지 "자기 둥지를 더럽힌 새"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데미안>도 헤세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지 못하고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그의 부인 니논이 유태인이기 때문에 그는 또 한번 정치적인 독일과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헤세가 참전을 독려하는, 그리고 독일이 세계의 패권을 잡아야 한다는 소설을 썼을까요?
그 다음 또 관심을 끄는 이야기는 "서구 문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무조건 대단한 것으로 받아 들이는 우리의 문화 사대주의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는 그 분의 주장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독서를 한다면 그 것은 바람직한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사대주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는 오히려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청바지에 팝 음악에 햄버거에 사족을 못쓸지언정 그들의 정신적 지배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자기 표현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다시 헤세 이야기로 돌아가서, 헤세 자신이 외국, 그러니까 서양 문물을 부지불식간에 높이 떠 받들고 그로 인한 영향을 주는 작가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헤세는 "벽안의 동양인"이라든지 "아시아적 수동성의 신봉자"라든지 "노형"이라고 불릴만큼 동양을 좋아하고 그의 생애동안 동양의 철학과 정신을 흠모해 왔으며, 어떻게 하면 타들어 가고 있는 화약고 같은 유럽을 동양정신을 통하여 치유할까 고심한 작가입니다. 그가 쓴 <싯다르타>, <동방여행>, <클링조르의 마지막 여름>, <유리알 유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작품에서 그는 동양정신을 서양의 독자들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데미안>에도 일본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촌 빌헬름 군데르트는 유명한 동양학자이고 어머니 역시 인도 태생입니다. 헤세와 사대주의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알을 깨고 나온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 알은 정치적인 알이 아닙니다. 알을 깨는 행위는 우리 청소년들이 언젠가는 한번 시도해야 할 고통스러운, 그러나 꼭 필요한, 자기 실현이나 자기 완성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행위입니다. 알 껍질은 어린 생명을 위해 처음에는 깨져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영양분이 그 속에 들어 있고, 추위와 목마름을 막아 주는 어머니 뱃 속 같은 포근한 안식처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어머니 자궁 속에 있을 수 없듯이, 자아 실현을 위해서는 그의 부모, 선생, 그리고 모든 관습까지도 깨고 스스로 일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 징클레어는 아무리 부모의 사랑과 밝은 세계 속에 산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세계를 깨고 자기의 세계를 가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것입니다. <데미안>이라는 작품은 알 속에 있는 싱클레어로 하여금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데미안이나, 베아트리체나 에바 부인이 도와주는 내용을 담은 소설입니다. 이런 내용이 청소년들이 가장 고뇌하는 내용이고 절실한 내용이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목마르게 읽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또 그렇게 때문에 이미 그런 과정을 겪은 선배나 선생님들께서 권하는 이유입니다.
아프락사스에는 속아도 되지만, 또 사실 아프락사스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지만, " 아프락사스에 속지 말자"라는 그 분의 그럴듯한 괴변에는 속아서는 안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