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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70대의 이해
1) 서언
집권 후반기인 1970년대는 베트남의 공산화를 계기로 미국의 한반도정책의 변화와 박정희 대통령의 독자노선이 충돌하여 1960년대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1960년대는 미국이 한국의 안보를 책임지고 박정희정부는 파탄지경에 놓인 한국경제를 재건하는데 몰두하였으나, 197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경제가 비약적인 성장궤도에 들어선 반면에 베트남의 공산화와 괌선언에서 보여준 미국의 한반도전략의 변화로 인해 박정희정부는 국방자주화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의 충돌을 야기했으며, 결국 박정희대통령의 10월유신과 국방자주화로 대표되는 안보지상주의는 변화된 동아시아의 정세에 대해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는 워싱턴의 정가와 긴장관계를 초래하고 말았다. 즉, 북한의 군사적 도발과 베트남의 공산화, 북한의 인민민주의 혁명전략, 그리고 미국의 대한국(對韓國) 무시전략 같은 여러 악재들로 인해 곤란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60년대의 북한의 군사도발과 70년대의 베트남 공산화와 미국의 전략수정은 박정희 대통령으로 하여금 미국과의 공조를 의심하게 하였으며, 이는 한국정부의 국제적 고립으로 이어졌다. 또 1970년에 들어와서 북한은 남한 내의반정부세력을 선동하고 포섭하여 남한을 흡수하겠다는 <인민민주주의 통일>을 지향했으며 박정희대통령은 김영삼씨 등을 제외한 남한 내의대부분의 반정부세력을 북한의 김일성 정권과 내통하거나 김일성을 추종하는 세력으로 인식하였다.
2) 베트남의 공산화와 북한의 남한 흡수전략
1970년대에 북한정권은 베트콩에 의한 남베트남의 공산화와 남한의 경제적, 군사적 발전에 영향을 받아 1960년대의 무력도발정책을 대신하여 남한 내의 친북세력이나 반정부세력을 포섭하여 남한자체를 공산화시키는 <인민민주주의 혁명(민중혁명, 통일전선전술)>을 도모하였다. 서기 1967년에 시작된 ‘박정희’의 제 2기 정부에 대한 ‘김일성’의 대응방법은 <무력을 통한 위협>과 <남한내의 반정부 세력 활용>이라는 두 가지였다. ‘박정희’정부가 미국과 공고한 안보동맹의 틀에서 경제발전에 매진하던 1960년대에 김일성의 평양정권은 ‘김창봉’ ‘허봉학’ 같은 대남 강경파들이 득세하여 남한에 특수군을 침투시켜 한국정부와 한국민들을 혼란에 빠트리려 했던 시기였으며, 4대군사노선과 주체사상(主體思想)으로 무장한 1970년대에는 10월유신으로 자유를 제한당한 한국인들이 격렬한 반정부 투쟁을 벌이자 그들을 포섭하여 ‘박정희’정부를 붕괴시킨다는 이른바 <인민민주주의 통일>을 시도한 시기였다. 북한의 정치교리서에 의하면 인민민주주의(人民民主主義)는 자본주의의 발달 정도가 낮은 국가에서 의회제도와 복수정당을 인정하면서 공산당을 중심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시행한다는 공산주의 체제를 의미한다. 인민민주주의 체제아래에서는 반 제국주의, 반 봉건주의를 추구하면서 민주주의 혁명단계에서 노동계급이 사회를 정치적으로 지배하되, 제국주의 잔당들과 봉건적 잔재가 남아있는 세력에 대하여는 독재를 실시하고 일반 인민대중에게는 민주주의를 실시해야한다고 한다.
1969년에 이르러 ‘김일성’은 한국에 대한 무력도발 실패의 모든 책임을 민족보위상인 ‘김창봉’일당에게 전가하여 제거하고, 연대급 이상에 정치위원을 파견하여 군부의 모험주의를 단속하였으며, 노동당이 주축이 되어 남한 내에 ‘김일성’추종세력을 지원, 양성하여 남한 스스로 공산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전략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박정희’대통령은 1970년대를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이 최고조에 이르는 시기로 판단하여 경제 전문가인 ‘김정렴’을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하여 그에게 경제정책을 맡기고 자신은 대북 억지력을 갖는 수준의 자주국방을 구상하는데 전념하였으나, 이것은 미국의 극동 방위전략과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과의 갈등을 야기하고 이로 인해 박정희대통령의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게 되었다.
1975년 4월 30일에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이 공산군 수중에 넘어가고 마침내 월남이 공산화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5월13일에 긴급조치 9호를 발표하여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찬반논의를 금지시켰다. 인도차이나의 공산화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감회는 다음과 같다. 『1976년 4월1일. 1년전 오늘 크메르 공화국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항복하고 프놈펜이 함락된 날이다. 작년 이맘때 국내정세를 회고하고 감개무량할 뿐이다. 조국을 사수하겠다는 의지가 박약하고 국난을 당하고도 국민이 단결할 줄 모르고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이익보다도 자기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고 위기에 처해서 국론을 통일하고 국민을 결속시킬 수 있는 지도자를 갖지 못한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는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1976년 4월 24일. 작금 지상(紙上)과 방송을 통하여 공산화된 크메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대량 학살보도가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크메르 루즈가 정권을 잡은 지 1년간에 크메르 인구의 약 1할에 가까운 50∼60만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이다. 6·25를 통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잔인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우리들이기에 크메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천인공노할 이 참상을 누구보다도 더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의분을 금할 수 없다. 크메르의 참상을 들으면서 나의 머리에서 문득 떠오르고 잊혀 지지 않는 일은 작년 이 무렵 크메르가 적화되자 서울에 와 있던 크메르 대사관 직원들 소식이 궁금하기만 하다. 대사와 기타 몇몇 고급 직원들은 미국 등지로 이민을 갔다. 그 밖에 하급직원들은 본국이 공산화 되었더래도 자기들 부모형제와 친척들이 있는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귀국할 여비가 없어서 우리 정부에서 여비를 도와주고 여러가지 편의를 봐주었다. 그후 그들이 방콕을 경유하여 본국으로 귀국차 떠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돌아간 그들이 지금 무사할까? 무사하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무자비한 만행이 있을 줄이야 그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1976년 4월 29일. 내일은 1년전 월남공화국이 공산주의자들 앞에 굴복하고 패망한 날이다. 나는 작년 바로 오늘 오전에 우리 국민들에게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조국수호에 전국민이 일치단결하고 총궐기하자고 호소한 바 있다. 충무공이 말씀하신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라는 격언을 인용하였다. 수도 서울을 전시민이 사수하자고 호소했다. 대통령도 최후까지 서울 시민과 같이 남아서 사수할 것을 서약했다. 비장한 각오로서 조국과 운명을 같이할 것을 호소하고 천지신명에게 서약했었다. 특별담화가 나간 바로 다음날인 내일(30일) 월남공화국 패망의 비보를 들은 것이다. 지난 1년간 우리는 총력안보체제를 구축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왔다. 국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단결의 힘은 조국을 수호하고 겨레의 생존을 보호하는 굳건한 원동력이 되었다. 호전광 북괴(好戰狂 北傀)도 감히 발을 하지 못했다. 뭉치고 단결된 민족의 힘만이 적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고 조국과 나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재인식하게 되었다. 북괴는 지금도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그 구실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 내부의 튼튼하고도 강인한 체제와 우리의 저력만이 침략자들의 무모한 불장난을 미연에 저지 할 수 있을 것이다.』
3) 박정희대통령의 총력안보정책과 국내외의 역풍.
베트남의 공산화와 캄보디아 공산정권의 학살에서 충격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적으로는 유신체제를 구축하고, 군사적으로는 핵무기를 개발하며, 경제적으로는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의 자유 베트남 포기와 전쟁 불개입을 선언한 괌 선언에서 보여준 미국의 의심스러운 안보공약 때문에 더욱 강화되어갔다.
1974년 8월 15일에 발생한 조총련 소속의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 여사의 피살은 영부인의 서거이상의 의미가 있다. 육영수여사의 피격서거는 내향적이고 사색적인 성향을 지닌 박정희 대통령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정치적 판단력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으로 인해 냉철한 지도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정권에 대한 필요이상의 증오심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지 한 달 후에 공화당의 최영철 의원이 문세광 사건과 관련하여 주일대사관직원들에게 “대통령이 전에는 부드러웠는데 그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한 말이나, 다음해 8월 15일에 쓴 박정희 대통령의 일기에서도 그의 슬픔과 좌절감,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직감할 수 있다.『작년 이날 09시45분경 아래층 집무실에 오렌지색 한복차림으로 내려온 당신과 같이 식장으로 향하였다. 그것이 당신이 청와대를 생전에 마지막 하직하는 길이었다. 작년의 오늘은 나의 일생 중 가장 긴 하루요 가장 괴롭고도 슬픈 하루였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허탈에 빠진 그날이었다. 모든 것이 다 귀찮고 나의 심신에서 모든 용기와 의욕을 잃어버린 그날이었다. 그로부터 일년이란 세월이 벌써 흘렀다. 지난 일년 남모르게 수없이 많이 혼자 울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야에 묻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몇 번이고 일어났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정신적 타격과 실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내와 인내로써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용기를 되찾기에 안간힘을 다 썼다.』
유신체제는 “국내적으로 정국을 안정시키고 국민역량을 극대화하여 독자적인 역량으로 공산주의자들과 대항하겠다”는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한 위기정부의 한 형태였으나, 그 방법이 공산주의자에 대한 강력한 억압과 반정부 운동에 대한 공세적 대응의 노정이었기 때문에 파쇼독재라는 비난에 직면하고 말았다. 그럴수록 노회한 김일성은 평화주의자로 위장하면서 남한의 반정부 투쟁을 고무하면서 대학가를 거점삼아 자신의 지지자를 확장해나갔다. 설상가상으로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없게 된 미국은 김일성추종자와 좌파에 대한 과도한 탄압을 빌미삼아 박정희 대통령을 압박하면서 한반도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976년에 집권한 카터대통령은 주한미군과 핵을 빼가겠다고 공언하는가 하면, 미국의 대한 (對韓)정책을 전환시키기 위해 벌인 미국의회에 대한 로비를 코리아게이트로 변질시켜 박정희 정부를 비방하는데 이용하였다. 물론 모든 미국인들이 카터 정부의 공세에 동조한 것은 아니다. 주한 미군사령관들은 대체로 한국과 박대통령 처지를 이해하고 지지하였다.
그런 정황은 박정희 대통령의 일기에서도 나타난다. 『1979년 6월3일(일) 흐림. 다가오는 7월초 본국으로 전임하는 유엔군사령관 베시 대장 송별. 골프대회를 뉴 관악칸추리에서 개최하다. 미8군의 장성급 7명과 아측에서 각군참모총장 및 국방장관, 청와대 등 12명 계 20명이 참가, 미측에서는 출장중인 미태평양사령부 해군사의 쿠건 중장도 합류하여14홀을 돌고 저녁에는 경호실 식당에서 만찬을 같이 하다. 베시장군은 역대 유엔군 사령관 중에서도 특히 한국을 깊이 이해하고 한국민을 좋아하는 친한적(親韓的) 장군이었다. 그는 카터 대통령의 미 지상군 철수계획에 대하여 강력한 반대의견을 가진 장군이었으나 금번 미 육군참모총장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주한 미 지상군 철수정책에 대하여 카터대통령과 의견을 달리하는 까닭에 참모차장으로 전임돼 간다고 한다. 주견(主見)과 소신이 뚜렷한 훌륭한 장군이었다. 장군의 건강과 대성을 기원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반정부 세력과 국제사회의 인권공세에 대해서는 “국민소득이 2천 달러가 넘어야 본격적으로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할 수 있으며, 1980년대에 가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만 기다려 달라.”라는 논리로 대응하고, 카터정부의 주한미군 철수공세에 맞서 포드 대통령재임당시에 중단했던 핵무기 개발을 국가 생존권 차원에서 다시 추진하였다. 국가안보와 정치민주화라는 화두가 평행선을 달리며 대립하면서 1970년대 말의 한국정치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3. 박정희대통령의 죽음
10월유신과 육영수 여사의 시해, 정치민주화운동은 사색적인 박정희대통령을 고립무원으로 만들었다.베트콩으로 인해 야기된 남베트남의 안보 위협에서 교훈을 얻어 안보역량을 극대화하여 한국의 안보를 굳건히 하기위해 10월유신을 선포했으나 장기집권 또는 영구집권을 위한 도구로 오해받고, 육영수여사의 시해로 인해 북한정권에 대해 극단적인 증오감으로 번민하고 있던 박정희대통령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오직 역사의 정당한 평가뿐이었다. 국방력 강화에만 매진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고립무원에 빠지자 김영삼총재 같은 순수 민주화운동과 김일성에게 포섭된 친북 반정부 운동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워싱턴의 압박이 강화되자, 김형욱이 미국으로 망명하여 워싱턴의 보호아래 박정희 정부 타도를 외쳤으나 김재규가 지휘하는 중앙정보부요원들에 의해 제거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979년에 박정희대통령과 맞서는 반정부 세력의 중심은 야당인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였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국내의 반정부운동을 진압할 전권을 부여받고 있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때에 이르러 반정부 운동을 진압하는데 대한 회의를 품고 김영삼총재와 박정희대통령의 타협을 통해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려 하였다. 그러나 김영삼총재는 단호했다. 1979년 10월 3일에 비밀히 김재규를 만난 김영삼 총재는 “나는 지금도 박정희씨가 불행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소. 김부장 당신도 마찬가지요. 지금 박정희씨를 구하는 길은 민주주의를 하는 길 이외에는 달리 길이 없소. 그 길이 김부장도 사는 길이오. 김부장은 이 정권의 제2인자나 다름없지 않소. 내가 제명되면 파국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선까지 오게 된 데는 김부장의 책임도 있는 것이 아니겠소." 라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1979년 10월 22일의 김재규의 입장을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그날 당시 중앙정보부 외사국 직원의 해외출장계획서에 결재를 받기 위해 부장실로 들어갔더니 김재규 부장은 얼굴을 책상에 파묻고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김재규 부장은 화를 내더니 "프랑스에는 김형욱이 실종사건으로 시끄러운데 왜 여기에 출장을 보내는가. 싱가포르나 대만으로 변경해"라고 했다고 한다. 그때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북한이 김형욱에게 자금을 지원했는데 그것이 탄로날 것을 우려하여 김형욱을 살해한 것 같다“고 보고했으며, 그 후 중앙정부보가 관련된 사실이 알려지자 김재규를 불신하기 시작했는데, 대통령과 야당 정치인들 모두에게 버림받는다는 위기감이 김재규를 번민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담수비 제막식에 참여했다. 그날 날씨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로서 매우 화창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기분은 아침부터 매우 저조했다고 한다. 삽교천에 도착해서도 그토록 또렷하던 대통령의 날카로운 눈빛이 온데간데 없었으며, 특유의 긴장감도 없었다고 한다. 마치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으며, 간단한 제막식을 마치고 난 박정희 대통령은 냉수를 청해 단숨에 다 들이키고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며 묵묵히 무엇인가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심수봉씨와 신재순씨의 일치된 증언에 따르면 그날 저녁에 김재규는 만찬장에서 차지철과 언쟁을 하더니 박정희 대통령을 향하여 다시 권총을 발사했는데, 그때 박정희 대통령은 그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으며, 김재규의 흉탄이 관통하여 등에서는 선혈을 콸콸 쏟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난 괜찮아"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고 한다.
가난한 한국민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고 튼튼한 국방력의 초석을 다진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화의 화두를 남기고 그렁게 한국민들의 곁을 떠났다. '가난은 나의 스승이고 군림 사회와 특권 계층을 증오하는 것은 나의 생리'라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고 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바램대로 농업담수호인 아산호가 만들어진 것을 보고 새을 마쳤다. 어쩌면 하나님은 김재규라는 여린 인간을 통해 영걸(英傑) 박정희를 데려간 것인지도 모른다. 박정희를 통해 하시려는 그 분의 일을 모두 마쳤기에 그를 데려간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우리가 김재규를 어떻게 평가하든 어쩌면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를 용서하고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첫댓글 -어쩌면 하나님은 김재규라는 여린 인간을 통해 영걸(英傑) 박정희를 데려간 것인지도 모른다. 박정희를 통해 하시려는 그 분의 일을 모두 마쳤기에 그를 데려간 것일지도 모른다- 동감입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 분이 아니었다면 북한처럼 풀뿌리캐먹고 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