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9. 주일예배설교
시편 119편 169~176절
나를 살리시는 말씀
(나를 구원하시는 말씀, 시편 119편-ת편)
■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약 35년 전인 1987년, 세상에 『위험사회』(Risk Society)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사회학자인 그가 진단한 세상은 ‘위험사회’였습니다. 풍요로운 사회를 약속했고, 이를 지향했던 근대화가 가져온 결과는 ‘위험/위기사회’라는 것입니다. 산업 문명은 결국 자연과 인간을 불안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입니다. 풍요를 약속했고, 행복한 세상을 꿈꾸게 했지만, 결과는 불확실성과 위협을 가져왔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조된 불행입니다.
그래서 울리히 벡은 이성과 과학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를 벗어던지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과학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 간의 건전한 토론을 통해 ‘성찰적 근대화’를 이루어 가자고 합니다. 그러면 현대사회에 발생하는 위험 수위를 낮출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벡의 진단은 틀리지 않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위험사회가 맞습니다. 풍요가 가져온 것은 행복이 아니라 위험/위기/위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성과 과학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를 벗어던지자는 벡의 제안은 바른 제안입니다. 그러나 벡이 제안한 ‘성찰적 근대화’는 틀렸습니다. 과학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이 만나 아무리 토론을 해도 위험/위기/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찰’을 물질적이고 성공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성찰(省察)은 본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개념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 시편 119편 강해를 시작할 때는 먼 길처럼 느꼈는데, 어느덧 마지막 시간이 왔습니다. 22번째로 마지막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긴 말씀 묵상의 여정에서 시간마다 시편 기자의 진솔함과 경건함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사모하되 간절하게 사모하고, 기도하되 절박하게 기도하는 그의 모습을 만났습니다. 매번, 매절마다 볼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이 짠하고 애절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 시간에는 이런 모습보다는 다 이루었다는 환호, 행복의 헹가래 같은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도 그의 애절함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한 분위기였습니다. 마지막에는 다를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기대가 어긋났습니다. 169절과 170절을 봅니다.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왜 그는 마지막까지도 애절하고 절박해야 했나?’ 왜 그랬을까요?
이러한 간구는 시편 119편 안에서 수도 없이 만났던 간구였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간구를 더 드려야 하다니... 혹시 하나님이 감동을 덜 받으셨다는 것인가요? 아직도 더 절박해져야 한다는 것인가요? 사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닐까요?
아닙니다. 충분한 것은 없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악에게 희롱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은 세상에 끊임없이 긴장과 갈등, 그리고 공포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악에게 위협당한 채 위험/위기에 빠져있습니다. 이 악은 마귀이고, 우리는 마귀가 희롱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세상에서 기도는 애절할 수밖에 없고, 간구는 절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쉴 수 없습니다. 악의 도전이 계속되는 한 기도와 간구는 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의 애절한 기도와 간구는 마지막까지도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그러므로 오해하지 마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혹시 기도 응답을 못 받아서 계속 기도하는 것인가?’라는 오해입니다. 물론 173절과 175절은 오해를 부를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173절)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175절) 두 구절 다 도움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아직도 응답받지 못했기에 드려야 하는 쉴 수 없는 기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은 잘못 보는 것입니다. 오해입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이유는 응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쉬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응답의 경험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기도를 쉴 수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도와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에 붙잡힌 기도는, 기도를 멈추어야 할 이유를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기도해야 할 이유를 붙잡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기도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더욱 방해를 받게 됩니다. 쉬라고 압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쉬어도 된다는 유혹을 받습니다. 기도하지 못할 이유를 다양하게 쉬지 않고 제시합니다. 그리고 시비할 거리도 제공합니다. ‘피곤하면 안 되잖아. 그러니 좀 더 자.’ ‘기도 뭐 길게 할 필요가 있어? 짧다고 안 들어주신다면, 그분이 하나님이야? 갑질이지!’ ‘그러니 쉬어. 짧게 해. 그만해도 돼!’
이러한 방해와 유혹에 대한 시편 기자의 반응은 무엇인가요? 1절에서부터 176절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기도를 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은 손을 단 한 번도 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더욱 기도하고, 더욱 찬양하고, 더욱 말씀 가운데 거하였습니다. 171절, 172절, 그리고 174절이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하리이다.”(171절)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172절)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174절)
참으로 시편 기자의 태도는 분명합니다. “더욱 기도하세요. 더욱 찬송하세요. 더욱 말씀 가운데 거하세요.”
■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진단처럼 오늘의 세상은 ‘위험/위기사회’입니다. 불확실성에 의해 삶과 생명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위협은 날로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에 벡의 제안처럼 ‘성찰’이 필요합니다. 풍요의 세상에 ‘왜 위험/위기가 커지고만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성찰의 초점을 물질적이고 성공적인 개념에 둔다면, 그 어떤 해답도, 해법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위험과 위기는 물질적 풍요와 성공적 환호에 초점을 맞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예언과 경고는 이미 오래전에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주셨습니다. 아모스 8장 11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이를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 날이 온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 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메시지를 통해 확인되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물질의 풍요가 아니라, 영혼의 결핍입니다. 위험과 위기를 가져오는 것은 행복에 대한 약속이 깨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행복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성찰하지 않고 물질과 성공 개념에 맞춘 성찰은 틀렸습니다.
사실 악이 내놓는 현실에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헛갈립니다. 교회 현장이 너무도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에 심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규모의 경제학의 노예가 되어 크고, 많고, 높은 것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커?’ ‘얼마나 많아?’ ‘얼마나 높아?’에 모든 관심이 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답에 따라 대접과 취급이 달라지는 교회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교회는 너무도 무방비 상태입니다. 176절의 상황이 이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신앙심 깊은 시편 기자가 왜 자신을 잃은 양 같이 방황하고 있다고 말하는 걸까요? 주변 상황이 혼란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꼿꼿하게 살아보려고 버텨도, 혼란과 혼동을 주는 상황 속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만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얼마나 커?’ ‘얼마나 많아?’ ‘얼마나 높아?’의 질문으로 규모의 경제학의 노예가 되게 만드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갖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마귀의 기획입니다. 바로 이 오징어 게임에 우리 모두 심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시편 119편의 마지막 절인 176절이 우리가 이어가야 하는 177절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나는 길을 잃은 양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오셔서, 주님의 종을 찾아 주십시오. 나는 주님의 계명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새번역) “I am your servant, but I have wandered away like a lost sheep. Please come after me, because I have not forgotten your teachings.”(저는 주님의 종인데도, 길 잃은 양처럼 헤매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가르침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찾아와 주시옵소서.) 우리는 이 태도를 참으로 애절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살아내야 합니다.
■ 이해하셨다시피,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사는 것이 더욱 교묘하게 방해받는 시절입니다. 바쁘다는 것에 설득되겠지만, 주님의 약속에 대한 의심과 의문을 제기하는데 설득되고 있습니다. 특히 주님의 말씀은 여러 정답 가운데 하나라는 논리에 설득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물질과 성공에 초점을 맞춘 비성경적 성찰 개념에 신앙공동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협과 유혹의 환경이다 보니 우리의 신앙은 견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것을 이유 삼아 신앙생활을 느슨하게 해도 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환경이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기획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적 처신은 분명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을 22번에 걸쳐 묵상하면서 깨달을 바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하신 손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밤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종일 찬송하는 것입니다.
■ 결국 우리의 영혼과 삶을 살리는 것은 분명합니다.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붙잡힌 기도와 찬송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위험과 위기와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입니다. 이것으로 하늘의 큰 평안이 임하여 위험과 위기와 위협을 덮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것도 장애물이 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오직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