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계 불학과 람림에 대해-Systematic Buddhology & Lamrim
- 김 성 철 교수
I. 근대적 불교학의 형성과 그 문제점
현대의 시대정신 중 하나인 휴머니즘(humanism)은 그 연원을 르네상스에 둔다. 서구 중세의 신학 중심적 학문체계에 대한 반동으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학문과 예술을 부흥시킴으로써 교회의 권위에 의해 질식되던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르네상스 운동이었다. 르네상스로 인해, 서구인들의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세계관은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세계관으로 대체된다. 그에 따라 ‘은총의 빛’이 아니라 ‘자연의 빛’에 의해 인간과 세계를 인식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고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신학(theology)과 대립된 인문학(humanities)이 탄생하였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역사와 학문을 연구하여 현실에 적용할 정치와 도덕의 원리를 찾고자 노력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humanist)들은 고문헌을 찾기 위해 수도원의 도서실을 뒤지며 필사본筆寫本(manuscripts)의 수집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이렇게 수집된 필사본들을 해독하고 주석하는 과정에서 근대적 의미의 문헌학文獻學(philology)이 성립하게 된다. 이러한 문헌학적 연구 성과 중 괄목할 만한 것으로, 교황청의 세속적 권리 주장의 근거가 되었던 「콘스탄니누스 대제의 기부증서」가 위조되었음을 고증한 로렌쪼 발라Lorenzo Valla(1405~1457C.E.)의 업적을 들 수 있다. 또 알프스 이북의 인문주의자들은 초기 기독교의 순수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기독교 관계 고전이나 성서에 대해 문헌학적으로 연구하였으며 이들의 노력은 후대에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그 후 18,9세기가 되자 독일의 F.A. 볼프와 P.A. 뵈크의 노력에 힘입어 언어, 문학, 미술, 과학, 신화, 전설, 종교, 제도, 법률, 경제, 민속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다양한 민족들의 고전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대규모적인 고전문헌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문헌학적 연구에서는 사본이나 판본을 수집 정리하고, 교정본을 작성하며, 문헌의 성립 연대를 결정하고, 저자의 진위와 정체에 대해 탐구하며, 본문의 자구를 해석하는 일에 주력한다. 그리고 근대의 서구인들이 문헌학적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것 중에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은 물론이고 기독교의 성경 역시 포함되었다. 1947년 키르베트 쿰란(Khirbet Qumran)의 절벽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The Dead Sea Scroll)와 1946년 이집트의 카이로 북쪽 나그 함마디(Nag Hammadi)에서 발견된 영지주의문서(Gnostic Library) 역시 문헌학적인 연구를 거친 후 기독교 신학의 자료로서 활용된 바 있다.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시대의 서구인들은 이러한 문헌학을 도구로 삼아, 인도와 중국의 고전들을 연구하게 된다. 불전 역시 이들이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방대하고 잡다한 ‘이교도異敎徒’의 문헌들 중 일부였다. 서력 13세기 경 프란시스코會와 도미니크會의 수사들이 몽고에 파견된 이후 수차에 걸쳐 아시아 지방에 카톨릭 선교사가 파견되면서 서구세계에 불교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게 되는데, 불교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가 최초로 이루어진 것은 18세기 초엽이었다. 1716년에서 1732년까지 티베트의 라사(Lhasa)에 머물렀던 카푸친회會 수사 델라 펜나(Della Penna: 1680~1745C.E.)는 그 기간 동안 약 3만5천 단어를 수록한 티베트어 사전을 완성한다. 그리고 몇 가지 티베트어 전적을 번역하였는데 쫑카빠(Tsong-kha-pa: 1357~1419C.E.)의 <보리도차제광론菩提道次第廣論>(Lam rim chen mo)과 <바라제목차경波羅提木叉經>(Prātimokṣasūtra)이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이다. 1844년 뷔르누프(Burnouf)의 <인도불교사입문印度佛敎史入門>(Introduction a l’histoire du Buddhisme indien)이 출간 된 이후 기라성 같은 불교학자들이 출현하면서 수많은 불전을 교정, 번역하게 되는데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 불전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불교신앙자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불전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는 소중한 가치를 갖는다. 불교 전통 내에서도 불전에 대해 주소注疏를 붙이고, 다양한 판본들을 교감하는 과정에서 문헌학적 방법이 동원되어 왔다. 드 용(de Jong)이 말하듯이 문헌학적 연구가 불교학 연구방식의 전부는 아니지만,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어떤 텍스트가 교정되고, 해석되고, 번역되어야 비로소 그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사상을 전개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하는 과정에서 문헌학적 방법이 동원되어 왔다. 드 용(de Jong)이 말하듯이 문헌학적 연구가 불교학 연구방식의 전부는 아니지만,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어떤 텍스트가 교정되고, 해석되고, 번역되어야 비로소 그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사상을 전개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헌학적인 불교연구로 인해 과거에는 맹목적으로 신봉하였던 많은 내용들이 허구일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러나 문헌학적 연구 성과에 토대를 두고 불전에 대해 역사적, 철학적, 종교적 분석을 하는 경우 동일한 소재에 대해서도 각양각색의 학설이 난립하게 된다. 지금은 사라진 조로아스터교나, 그리스․로마의 고전, 또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연구하듯이 단순한 인문학적 취향에서 불전을 연구하는 것이라면, 그 연구 결과 다양한 학설이 난립하게 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학자들이 활발하고 열렬하게 학문 활동에 종사한다는 점을 입증하기에 인문학 분야에서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불교학의 경우는 일반적인 인문학과 그 성격이 다르다. 배후에 그 가르침을 자신의 인생관, 종교관으로 삼고 살아가는 수억의 신도 집단이 있다. 따라서 불교학자가 새로운 학설을 공표하는 경우, 또 그렇게 공표된 새로운 학설이 불자들의 종교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경우 도덕적 책임의 문제가 수반될 수 있다.
현대의 인문학적 불교학의 연구 성과를 취합할 경우, 전통적으로 교학 공부의 지침으로 삼았던 천태天台의 오시교판五時敎判은 억지 주장이 되고, 십이연기설에 대한 태생학적 해석은 아비달마 논사들의 조작이며,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 모호해지고, 선종禪宗의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전통은 허구로 판명되며, 삼론종의 대성자大成者 길장吉藏은 공空 사상을 오해하고 있고, 하택신회는 종파적 이익을 위해 육조 혜능의 전기를 조작한 거짓말쟁이이며, 원효는 자신이 저술한 <금강삼매경>에 버젓이 <금강삼매경론>이라는 주석을 단 꼴이 된다. 우리가 불전에 대한 인문학적인 연구결과에 토대를 두고 불교를 바라볼 경우 대부분의 불전은 후대에 조작된 가짜로 판명되고, 부처님 이후 불교계에서 활동한 고승대덕들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현대 불교학은 훼불의 불교학을 지향하고 있는 것 아닌가? 현대의 불교학자들은 불교신앙을 서서히 말살시키려는 거대한 음모에 자신도 모르게 휩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현대 불교학의 연구 성과를 모두 도외시하고 과거의 불교전통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그러나 분서갱유焚書坑儒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현대인들을 설득하지 못할 수가 있다. 돌아갈 수도 없고 나아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궁지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서구인들에 의해 시작된 현대의 불교학 연구 방법에 무언가 결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일까? 서구적 불교학 방법론을 직수입하여 연구 활동을 해 온 일본학자들의 견해를 검토해 보자.
田村芳朗(다무라 요시로오)는 현대 불교학은 불교에 대한 사상적, 사상사적思想史的 연구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 전문을 인용해 본다.
“인도, 중국, 일본에 걸쳐 불교에 대한 현대의 연구방법은 전적으로 언어학적․문헌학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에 부가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사실에 대한 역사학적인 연구이다. 그런 연구방법들은 근대의 객관적․과학적․실증적 정신의 표출이며 특히 원전을 통한 연구는 근대가 되어 유럽의 학자에 의해서 지지되던 것으로 어쨌든 근대적인 불교연구로서 그 공적은 지대하다고 평가된다. 한편 망실된 연구방법이 있다. 그것은 불교에 대한 사상적, 사상사적 연구이다. 망실된 원인으로는 [일본의 불교학자들이] 유럽 불교학자의 연구방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점을 들 수 있겠다. 유럽의 학자는 온 정성을 기울여 불교를 사상사적으로 연구할 필요는 없었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배경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전사본의 거의 전부가 유럽 학자의 손에 들어가 있었기에 그들은 불전에 대한 언어학적 문헌학적 연구에 몰두했던 것이다.”
田村은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전통적인 교학을 현대에 재생시켜 우리들의 삶 속에서 유용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전통적 교학)을 불교사상사 위에 올려놓은 후 어떤 점이 문제로 되었고 논의되었는지 허심탄회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즉, 다양한 불교 사상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개별적 사상에 대한 이해와 함께 불교사상사에서 그 사상이 발생하게 된 계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불교학 연구 방법에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이 田村의 말대로 불교에 대한 사상적, 사상사적 연구방법뿐일까? 체르밧스키의 불교논리Buddhist Logic, 무르띠의 불교의 중심철학The Central Philosophy of Buddhism 등은 불교에 대한 사상적, 사상사적 방법에 의한 연구 성과로 볼 수 없을까? 과거 서구어권의 학자들 역시 불교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 성과에 토대를 두고 사상적, 사상사적, 비교철학적 연구에 진력해 왔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할 수는 없다.
田村의 논지와 비교할 때, 현대 불교학에 대한 平川彰(히라까와 아끼라)의 비판적 분석은 보다 논리적이고 그 문제점에 대한 해결방안 역시 보다 구체적이다. 平川彰은 <불교학>과 <철학>, <종교학>, <종학宗學>을 구분하면서 불교학의 역할과 범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먼저 불교학은 ‘불교 중에 진리가 담겨 있다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지는 학문 활동이라고 규정한다. 즉, 불교에 대해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는 연구만 불교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平川의 견지에서 볼 때 田村이 말하는 사상적, 사상사적 연구라고 해도 불교에 대한 비판적, 부정적 평가가 도출되는 연구는 불교학의 범위 내에 들어 올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불교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결론을 도출해 내는 학문 활동도 가능하지만 이는 불교학이 아니라 불교에 대한 철학적, 종교학적 접근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학의 범위 내에서 불교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절대 금지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平川은 불교학도 학문인 이상 문헌학적 범위 내에서는 엄밀한 비판적 연구는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울러 平川은 불교학자가 불교에 대해 사상사적으로 연구할 경우 원시불교에서 발달불교까지를 일관하는 불교사의 성립이 가능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연기緣起에 대한 용수龍樹와 세친世親의 해석이 <아함경>의 해석과 모순된다고 본다면 다양한 불교 사상들이 제각각인 것으로 되며 일관된 불교사의 성립은 없다는 말이 되고 만다. 그런 결론을 도출할 경우 이는 철학적 연구이지 불교학적 연구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불교사를 관통하는 불교의 일미성一味性이 부정된다면 불교는 독립된 종교로서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이상과 같은 두 가지 전제, 즉 ‘불교의 진리성에 대한 믿음’과 ‘모든 불교사상을 일관하는 불교사상사佛敎思想史가 성립한다.’는 믿음 위에서 이루어지는 연구만이 불교학이라고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平川은 소위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일반인’으로서의 불교학자의 역할에 한계를 긋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불교학자는 불교에는 일반인의 이해를 넘어선 사상을 담고 있다는 점을 용인하면서 교리에 대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에서는 불교에 대한 우리의 앎이 체화되는 단계를 문사수聞思修 삼혜三慧로 구분한다. 어떤 수행도 하지 않은 채 단지 경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얻어진 이해가 문혜聞慧이며, 선정 중에 마음을 통일한 후 그런 마음으로 교리를 사색함으로써 얻어진 지혜가 사혜思慧이고, 사혜를 통한 이해가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된 것이 수혜修慧이다. 그런데 불교학은 문혜의 단계의 불교이다. 즉, 불교학자는 불교에는 수행을 하지 않은 일반인의 이해를 넘어선 사상을 담고 있다는 점을 용인하면서 교리에 대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문혜의 단계에서 얻어진 지혜는,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는 않았어도 올바를 목표를 가리키는 지혜라고 볼 수 있다. 즉,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위치에 있다. 그러나 자기가 이해한 문혜가 과연 궁극의 목표를 가리키는 진리를 담고 있는지는 문제가 된다. 자기의 이성에는 이것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힘은 없다고 봐야 한다.
平川은 현대적 불교학은 聞․思․修 三慧 중 정확한 聞慧를 제공하려 하는 것으로 그 가치가 인정될 수 있지만, 그런 문혜의 절대성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문혜를 도출해 낸 이성에는 그 절대성을 판정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학에서는 교리를 체계적으로 조직해도 상대적 입장에서 조직해야 한다. 만일 불교학자가 자신이 연구하여 조직한 불교가 유일절대의 불교라고 주장하게 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종학宗學’의 탄생으로 보아야 한다고 平川은 비판한다. 여기서 말하는 ‘宗學’이란 일본의 각 종단 내에서는 ‘종승宗乘’이라고 명명했던 것으로, 정토종, 정토진종, 조동종, 임제종, 일련종 등 일본 내의 다양한 종파에서 불교신행의 지침으로 삼아 온 각 宗祖의 가르침이 宗學인 것이다. 平川의 견해와 같이, 만일 불교학자가 자신의 견지에서 어떤 체계적인 불교학을 구성하여 그에 대해 절대성을 부여할 경우 그는 불교학자의 대열에 들 수 없으며 새로운 宗祖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平川이 宗學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최근 종학의 연구자 수가 점차 감소하고 있으며, 후계자도 적어지고 있고, 전통이 단절될 위험에 처한 종단조차 있다고 우려하면서, 앞으로의 종학은 종조의 저작을 현대인에게 이해되도록 해석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에도江戶시대 일본에서 발달한 종학에는 불교학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곤란한 교리가 많기 때문에 불교의 큰 줄기의 교리에서 보아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종학의 교리는 음미하여 바로 세워야 할 것이라고 平川은 말한다.
이상과 같은 平川의 논지를 종합하면 불교학자란 聞思修 三慧 중 聞慧를 제공하는 것을 그 임무로 삼으며, 그런 문혜는 물론이고 그에 토대를 두고 조직된 교리라고 해도 유일 절대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상대적 입장에서 학문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平川의 제안과 같이 불교학을 연구할 경우 현대 불교학의 문제가 모두 해결될 수 있을까? 상대적 입장에서 불교학을 연구하기에 서로 상충하는 다양한 연구 성과가 도출될 경우, 그런 연구 성과를 토대로 신행활동을 하는 불교신자는 계속 방황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종학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왜냐하면 平川도 지적하듯이 과거의 종학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간주될 수 없는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田村이나 平川이 제안하는 불교학이 정립된다고 해도 불교 신앙인의 입장에서 볼 때 현대 불교학에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해, 그것은 현대 불교학의 연구 성과들 중 가장 타당하고 신뢰할 수 있는 내용들을 취합한 후 하나의 통일된 불교신앙 체계로 수렴시키려는 노력일 것이다.
Ⅱ. 조직신학에 비견되는 체계불학의 필요성
앞으로 불교학자의 역할 중 하나는 현대의 문헌학적 연구 성과에 토대를 두고 대소승을 망라한 불전의 모든 내용을 유기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수미일관首尾一貫한 하나의 신앙체계로 구성해 내어 불교신자에게 제공해 주는 불교학의 정립에 진력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기독교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체계신학)에 해당되는 불교학이다.
기독교 신학은 크게 네 분야로 나누어진다. <성서신학>과 <조직신학>, <실천신학>과 <역사신학>이 그것이다. 이 중 성서신학은 문헌학에 토대를 두고 연구되며, 실천신학과 역사신학 역시 사회과학이나 역사학과의 조우遭遇를 통해 계속 변모해 간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에서 구심점 노릇을 하는 것은 조직신학이다. 조직신학이란 ‘계시된 신앙의 진리를 인간 이성의 수단으로 보고 신학을 전체적인 관련 하에서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기독교 신학’이다. 즉, 기독교의 신앙 내용을 조직적으로 정리하여 마치 집을 짓듯이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이 조직신학의 역할이다. 어거스틴, 칼뱅, 폴 틸리히, 바르트, 부루너 등 수많은 신학자들이 조직신학적 조망이 담긴 저술을 남기고 있는데, 그 내용은 일반적으로 ①神論, ②人罪論, ③기독론, ④구원론, ⑤교회론, ⑥종말론으로 나누어진다. 본소本流에 속한 기독교 신자의 경우 공통적으로 이런 여섯 가지 주제에 대한 조직신학적 조망을 토대로 매일 매일의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서구인들에 의해 성립된 현대 불교학에서 이러한 조직신학에 比肩되는 불교학이 연구되지 않았던 원인에 대해 추적해 보자. 서구의 불교학 연구자들 중 많은 사람은 불교도가 아니었다. 뿌생(Louis de La Vallée Poussin), 뚜찌(Giuseppe Tucci), 라모뜨(Étienne Lamotte) 등은 카톨릭 신자거나 신부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불교를 신앙으로 갖지 않은 몇몇 불교학자가 활동하고 있으며, 서양에서 학위를 받은 국내의 많은 신학자, 종교학자들의 학위 논문이 불교를 주제로 삼고 있다. 이들의 연구에 한계는 없을까? 불교를 신앙으로 갖고 있는 불교학자들 역시 이들이 연구했던 분야를 그대로 답습하면 불교학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입장을 바꾸어 불교를 신앙으로 갖고 있는 동양인이 기독교에 대해 연구하는 경우를 가정해 보는 경우 이들의 연구 한계가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 같다. 서구 문화가 세계의 보편적 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기독교 신학자’로서 평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독실한 ‘불교신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현재의 세계정세와 정반대로 UN본부가 서울에 있고 한국 해군의 항공모함이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국제경찰의 노릇을 하고 있으며 동양의 문화가 전 세계의 보편문화가 되어 있다면, 미개한 서구인들의 종교인 기독교에 대해 우월감과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연구하는 많은 불교신자가 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서구인들 중에도 자신들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동양인의 종교인 불교에 귀의한 후 동양으로 유학을 떠나 자신들의 종교였던 기독교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불교를 신앙으로 갖고 있으면서 기독교를 연구하는 신학자는, 성서신학과 역사신학, 조직신학과 실천신학의 네 가지 분야 중 어디까지 연구하게 될까? 아마 성서신학과 역사신학의 단계에서 그 연구는 멈출 것이다. 조직신학의 경우 과거에 이루어진 조직신학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는 가능해도 새로운 조직신학을 구성해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철저한 불교적 조망 하에 이 세계를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 진정한 불교신앙인이라면, ①神論, ②人罪論, ③기독론, ④구원론, ⑤교회론, ⑥종말론과 같은 조직신학의 주제에 대해 결코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신의 신학적 조망을 구성할 의사도 없고 구성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야스퍼스(Karl Jaspers)가 말하듯이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서 촉발된 학문적 욕구’를 갖고 기독교라는 종교의 정체에 대해 연구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다. 그리고 불교를 신앙으로 갖고 있는 기독교 신학자로서의 삶을 마감하는 임종의 순간에는 아미타불을 염하면서 극락왕생을 발원하든지, 무수겁無數劫 이후의 성불을 다짐하는 보살의 서원을 상기하며 인간으로서의 재생을 기원하게 될 것이다.
이제 입장을 다시 바꾸어 이와 똑같은 조망을 기독교 신앙을 갖고 불교연구에 매진했던 서구의 불교 학자에 대해 적용해 보자. 다른 종교에 소속된 불교학자가 통합적 종교관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 불교에 대한 연구 동기는 지적 호기심일 것이다. 마치 샹폴리용(Champollion)이 로제타(Rosetta)石에 써진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했을 때와 같이…. 이렇게 다른 종교를 갖고 있으면서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서 불교를 연구할 경우 그 연구는 문헌학적 연구와 역사적 연구와 비교철학적 연구의 차원에서 그치기 쉬울 것이다. 사실 서구 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연구는 불전에 대한 번역과 주석, 그리고 비교철학적 연구, 역사적 연구가 거의 대부분이다. 좀 더 나아간다고 해도 환경문제나 정신치료에 대한 해답을 불교에서 모색해 보는 응용불교학적 연구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 기독교를 신앙으로 갖고 있는 서구의 불교학자들은 ‘현대의 문헌학적 연구 성과 중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취사선택하여 기독교의 조직신학에 비견되는 체계적 불교학을 구성함으로써 현재 활동하고 있는 불교 신앙인들에게 삶의 좌표를 제시해 주는 불교학’의 구성은 결코 의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적 불교 연구자들에 의해 이룩된 불교학의 연구성과가, 신앙적 측면에서 볼 때 모두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平川이 말하듯이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그것을 듣고(聞: śruta), 그에 대해 사색한 후(思: cintā), 그것을 체화하는(修: bhāvanā) 세 단계 과정(三慧)을 거쳐 신앙자(또는 신행자)에게 수용되는데, 서구의 문헌학적 불교학은 과거의 불교 전통에서 소홀히 했던 정확한 聞慧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소중한 가치를 갖는다.
서구에서 시작된 현대적 불교학에는 ‘신앙으로서의 불교학’이 결여되어 있다. ‘신앙으로서의 불교학’이란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중시되는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체계신학)에 대응되는 체계적인 불교학으로, 신조어를 만들어 체계불학(Systematic Buddhology)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앙으로서의 불교학’, ‘체계불학’을 구성하려는 노력이 결여되어 있는 인문학적 불교학의 칼부림에 의해 전통 불교가 난자 당하고 있기에, 개인적인 신념을 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불교학을 공부하는 현대의 많은 불교신자들은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Ⅲ. 체계불학의 과제
그러면 우리가 현대의 불자들의 신행의 지침이 되는 불교학, 즉 체계불학(Systematic Buddhology)을 구성하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첫째는 과거의 체계불학, 즉 종학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여 불자들의 신행지침으로 구성해 내는 일이고, 둘째는 현대의 문헌학적 연구 성과에 토대를 두고 새로운 체계불학을 구성해내는 일이다. 히라까와 아끼라平川彰이 말하듯이 기존의 종학宗學에는 불교의 큰 줄기에서 보아 비불교적이라고 간주될 만한 내용이 많이 있다. 따라서 과거의 종학을 그대로 현대적 언어로 풀이할 경우 현대의 문헌학적 연구 성과에 의거하여 그 내용에 많은 수정을 가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현대화된 종학이라고 하더라도 현대 불교학의 위세에 눌려 보편적 체계불학으로 자리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또 과거의 종학宗學은 대부분 자종自宗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한 종파학적宗派學的 성격이 강하기에, 그것을 현대화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종파에 소속된 불자들을 설득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보다 바람직한 것은 후자의 경우와 같이, 현대의 문헌학적 연구 성과들 중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내용들을 취합한 후 대소승의 모든 불교사상을 포괄하는 새로운 체계불학을 구성해 내는 것이리라. 기독교에서 수많은 조직신학자들이 출현하였듯이 불교에서도 앞으로 수많은 체계불학자(Systematic Buddhologist)들이 출현해야 할 것이다.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어도 불교학자는 깨달음으로 가는 정확한 체계불학을 구성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히말라야 산에 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히말라야 산에 가 본 사람들이 써 놓은 여행기를 참조할 경우 히말라야 산으로 가는 정확한 지도를 만들 수 있는 것과 같이,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부처님 이후 2500여 년에 걸쳐 수많은 선지식들이 만들어 놓은 깨달음을 향한 여행기를 참조하여 정확한 체계불학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문적으로 수행을 하고 깨달음의 맛을 본 사람이 현대 불교학의 연구 성과를 면밀히 참조하며 체계불학을 구성한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체계불학을 구성하려고 하는 경우 다양한 연구 성과의 취합聚合과 구성의 원칙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平川이 말하듯이 체계불학자는 자신이 구성한 체계만이 절대적 진실이라고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의 체계불학자가 불교학자로서 남아 있기 위해서는 과거와 같은 ‘종조宗祖’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구성된 다양한 체계불학의 여법성如法性은, 그를 통해 신행 활동을 하는 불자의 인격적 변화와 종교적 체험에 의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체계불학에서는 어떤 내용을 다루어야 할까? 기독교 조직신학의 경우는 하나의 神을 우러르며 신앙생활을 하는 동질적 신자집단을 위한 신앙체계로서 구성되기에 그 내용이 평면적이다. 조직신학의 여섯 가지 주제인 ①신론神論, ②인죄론人罪論, ③기독론, ④구원론, ⑤교회론, ⑥종말론에 대해 공부할 경우 누구든지 어렵지 않게 이에 대해 동일한 조망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처나 아라한 등이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와 아울러 수행을 통해 성취해야 할 궁극적 목표가 되기도 한다. 신행의 수준과 수행의 깊이에 따라 불자들의 추구하는 바가 달라지며, 인간과 세상을 보는 안목 역시 달라진다. 따라서 불자들의 신행 지침이 될 체계불학을 구성할 경우 그 내용은 입체적이어야 한다. 즉, 불보살 등의 성중聖衆과 인간과 세계 등에 대한 평면적 모습도 제공되어야 하지만 그와 함께 성불을 향한 수직적인 향상체계도 제시되어야 한다.
또, 현대적인 체계불학을 구성할 경우 과거의 종학과 비교하여 보다 증광增廣되어야 할 부분은 재가자在家者의 신행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들이다. 불전의 내용 대부분은 전문수행자를 위해 설해진 것들이다. 오랜 시간 동안 깊은 사색을 거쳐야 이해되는 심오하고 방대한 교리, 좌선 수행…. 이에 대한 공부와 수행은 생업에 분주한 대부분의 재가자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현대의 체계불학에서는 불교신행과 일상생활이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활기차며 지혜롭고 선량한 불자로 살아가게 해 주는 재가자의 신행에 대한 내용이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할 것이다.
Ⅳ. <보리도차제론>의 체계불학
그러면 앞 장에서 말한 요건을 충족시키는 체계불학體系佛學은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할까? 체계불학을 구성하려는 불교학자는 다양한 불교사상과 수행법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수미일관首尾一貫한 하나의 체계로 엮어 낼 수 있는 자기 나름의 ‘관觀’도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불교학자의 학문이 어느 정도 무르익은 후에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본고本稿에서는 지금까지 600년 동안 티베트 불교의 신행 지침으로 사용되어 온 쫑카빠(Tsongkhapa: 1357~1419C.E.)의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Byang chub lam gyi rim pa)23)의 체계불학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에 대한 논의를 대신해 보겠다. <보리도차제론>은 앞 장에서 필자가 열거했던 체계불학의 요건을 거의 모두 갖추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현재 전 세계의 불교문화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지에서 신봉되는 초기불교, 즉 남방 상좌부 불교이고, 둘째는 중국, 한국, 일본과 같은 한자 문화권에서 신봉되는 대승불교이며, 셋째는 티베트와 몽고 등지에서 신봉되는 금강승(밀교)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남방 상좌부 불교는 기원 후 2세기 이전까지의 인도불교에 토대를 두고 있고, 한자문화권에는 기원후부터 7세기 이전까지의 인도불교가 전래되었으며, 티베트에는 7세기 이후의 인도불교가 수입되었다. 한자문화권의 경우는 수세기에 걸쳐 인도에서 수입된 다양한 경론經論들을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는 방법을 통해 다시 회통함으로써 불교의 일미성一味性을 구현하게 되지만, 티베트의 경우는 초기불전에서 밀교경전에 이르기까지의 인도에서 성립된 거의 모든 경론들과 인도불교 말기에 이루어진 회통의 사상이 함께 전래되었다. 티베트 불교인들이 회통적 불교관을 지향하게 된 것은 그 불교 수용 과정의 특수성으로 인한 필연적 귀결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회통적 불교관에 토대를 두고 저술된 체계불학(Systematic Buddhology)25)의 금자탑이 쫑카빠의 <보리도차제론>인 것이다.
쫑카빠의 <보리도차제론>의 체계불학은 서력기원 후 1038년 입국한 인도의 고승 아띠샤(Atiśa: 980~1052C.E.)의 교학에 연원을 둔다. 아띠샤는 무분별한 밀교 행법으로 인해 타락한 양상을 보이던 당시의 티베트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Bodhipathapradīpa)을 저술하게 된다. <보리도등론>에서는 불교신행의 길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삼보에 대한 믿음을 갖고 선업을 지어 윤회의 세계 내에서 향상을 추구하는 범부凡夫의 길로 하사도下士道라고 부르고, 둘째는 깨달음을 추구하며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승적 수행자의 길로 중사도中士道라고 부르며, 셋째는 중생의 제도를 위해 윤회의 세계 내에서 살아가는 발보리심한 대승 보살의 길로 상사도上士道라고 부른다. 이렇게 아띠샤에 의해 제시된 불교신행의 체계는 그 후 약 350년이 지나 티베트 불교의 대학장 쫑카빠의 출현에 의해 완성된다. 쫑카빠는 1402년 45세 때 <보리도등론>의 신행체계에 입각하여 보다 풍부한 내용을 담은 <보리도차제론>을 저술하게 되는데, 쫑카빠 이후 현재까지, 달라이라마(Dalai Lāma)가 소속된 겔룩빠(Dge lugs pa)를 위시하여 티베트의 모든 종파에서는 <보리도차제론>의 체계를 수행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보리도차제론>의 출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티베트에서는 그에 대한 수백 권의 해설서와 강의록, 요약집이 출간되어 오고 있다. <보리도차제론>의 체계불학은 티베트 불교인들의 강력한 신앙심의 근원인 것이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불교 입문에서 마지막 보살행에 이르기까지 불교 신행자가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과 수행방법에 대해 순서대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갖추어야 할 지식
① <보리도등론>을 저술한 아띠샤의 전기
② 본 교법의 장점
③ 교법을 배우는 자의 자세
④ 교법을 가르치는 자의 자세
1. 하사도 - 삼악도를 벗어나 내생에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길
① 죽음과 무상에 대한 사유 - 명예욕과 재물욕에서 벗어나 진정한 종교심이 발생함
② 삼악도와 천상의 고통에 대한 사유 - 인간의 소중함을 자각
삼악도三惡道의 고통: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의 고통에 대한 상세한 설명
천상의 고통: 공포, 죽음의 고통 등.
③ 삼보에의 귀의
④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
2. 중사도 - 번뇌를 끊고 삼계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고자 하는 출리심出離心의 성취
① 사성제 중 고성제에 대한 사유 - 출리심을 강화한다.
생노병사의 사고와 팔고에 대한 생각을 체화한다.
② 사성제 중 집성제에 대한 사유
고의 원인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삼독심을 끊을 것을 다짐한다.
③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에 대한 사유
윤회의 과정과 해탈의 이치에 대해 이해한다.
3. 상사도 - 대보리심을 발하여 불과佛果를 위해 보살행을 닦는 길
① 보리심을 발생시킨다
七種因果칠종인과: 知母→念恩→報恩→慈心→悲心→强化→大菩提心
自他相換法자타상환법: 나와 남을 바꾸어 봄으로써 자비심을 훈련함
② 보살행의 실천
육바라밀: 자신의 불법을 성숙시킴
사섭법: 다른 중생을 섭수攝受함
③ 육바라밀 중 선정 바라밀에 해당하는 śamatha(止) 수행에 대한 상세한 부연 설명
오정심: 부정관, 자비관, 연기관, 계분별관, 수식관
관불수행觀佛修行: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리는 수행
④ 육바라밀 중 반야바라밀에 해당하는 vipaśyanā(觀) 수행에 대한 상세한 부연 설명
아공과 법공에 대한 자각(淸淨見)을 지향한다.
사마타가 성취된 경안輕安의 상태에서 <중론>에 대해 귀류논증파적으로 이해함
불교 입문자는 먼저 하사도의 신행부터 철저하게 터득해야 한다. 하사도의 신행에서는 ‘죽음에 대한 명상’과 ‘삼보三寶에 대한 귀의’와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을 중시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재물과 명예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게 되어 진정한 <종교심宗敎心>이 발동하게 된다. 삼보는 우리를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유일한 탈출구이며, 인과응보의 이치는 우리로 하여금 악업을 멀리하고 선업을 지어 향상하는 삶을 살게 해 주는 지침이 된다. 조금이라도 나쁜 마음을 품었거나 악한 행동을 저질렀을 경우 우리는 그 자리에서 즉각 참회해야 한다. 하사도에서는 내세에 초래될 악업의 과보에 대한 공포심을 유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계행을 지키는 도덕적 삶을 살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하사도의 삶은 재가자나 출가자가 공통적으로 닦고 익혀야 할 수행으로 이런 수행이 체화된 사람만이 전문 수행자의 길인 중사도로 들어설 수 있다.
중사도에서는 <출리심出離心>을 가르친다. 하사도에서 가장 모범적인 삶을 살더라도 우리는 기껏해야 하늘나라(천상天上)에 태어날 뿐이다. 하늘나라 역시 윤회의 세계에 속하기에 자신이 지었던 선업의 과보가 소진되면 다시 삼악도에 떨어지고 만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하늘나라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하늘나라에도 고통이 있다. 자신보다 공덕을 많이 쌓아 지위가 높아진 천신에 대한 공포와 하늘나라에서 사망할 때 느끼는 죽음의 공포 등이다. 하늘나라에 태어난 자는 신통력을 갖기에 죽은 후 자신이 태어날 곳을 미리 안다고 한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 복락을 누리며 자신이 지었던 복을 모두 탕진하였기에 다시 태어날 때는 대개 축생이나 아귀, 지옥과 같은 삼악도에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천신은 죽을 때 내생의 자신의 출생처를 보고 극심한 공포에 떤다. 따라서 우리가 선업을 짓고 공덕을 쌓는 하사도의 삶을 살더라도 하늘나라에 태어나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윤회의 세계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곳은 없다. 이 때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 하겠다는 <출리심>이 발동하는 것이다. 중사도는 한 마디로 소승적인 수행자의 길이다. 중사도의 수행자는 계율을 철저히 지키며 번뇌를 다스려 해탈을 지향한다. 그리고 중사도는 사성제와 십이연기와 같은 초기불교의 교학에 입각해 닦는다.
그러나 해탈을 지향하는 중사도가 불교신행의 종착점이 아니다. 왜냐하면 윤회의 세계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다른 중생들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 수행자는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성불成佛을 서원하는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게 된다. 그래서 해탈을 유예하고 윤회의 세계 내에서 살아갈 것을 다짐한 후 상사도인 보살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이러한 보리심을 발發하게 해주는 방법으로 ‘모든 중생을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생각(知母)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칠종인과七種因果에 대한 관찰’을 닦을 것을 권한다. 무시겁無始劫 이래 우리가 윤회해 오는 동안, 지금 눈앞에 보이는 벌레와 같은 미물이라고 하더라도 언젠가 나의 어머니였을 수 있기 때문이다(知母). 어머니의 은혜는 지대하다(念恩). 그렇다면 우리는 전생에 언젠가 나의 어머니였던 모든 중생의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없다(報恩). 이렇게 계속되는 ‘분별을 통한 수행’이 칠종인과의 수행이다. 또 보리심은 나와 남을 바꾸어 보는 자타상환법의 수행에 의해 강화된다. 이렇게 보리심을 발한 자는 계속 윤회하며 보살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데, 발보리심 이후 육바라밀과 사섭법에 의거해 보살의 삶을 살 경우 삼이승三阿僧祇(asaṃkhya: 無數)劫이 지나면 성불하게 된다. 그리고 śamatha(止)와 vipaśyanā(觀)의 쌍운에 의해 얻어지는 <청정견>, 즉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에 대한 지혜는 올바른 보살행을 위한 좌표가 된다.
<보리도차제론>에서는 하사도는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반드시 닦아야 할 공통된 수행이고, 중사도는 초기불교와 대승이 모두 닦아야 할 공통된 수행(-공통도共同道)이며, 상사도는 일반적 대승 수행자와 밀교행자가 모두 닦아야 할 공통된 수행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금강승 수행자의 경우는 상사도까지의 수행이 완성되고 나서 선지식에 의해 대관정大灌頂을 수지하고 금강승 수행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하사도의 마음가짐이 체득되지 않은 중사도의 초기불교 수행자나, 하사도와 중사도의 마음가짐이 체득되지 않은 대승 수행자는 결코 그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다고 쫑카빠는 말한다. 이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덧셈을 익혀야 곱셈을 배울 수 있고, 곱셈에 익숙해 져야 인수분해 문제를 풀 수 있으며, 인수분해 문제를 능란하게 풀 수 있어야 미분학을 공부할 수 있듯이….
지금까지 <보리도차제론>에 제시된 불교 신행과 수행 체계에 대해 간략히 조망해 보았다. <보리도차제론>은 단순한 불교이론서도 아니며, 한 종파의 교리를 선양하기 위한 종학서宗學書도 아니다. 재가불자와 출가수행자, 초기불교도와 대승불교도 모두의 신행과 수행의 지침이 될 수 있는 보편성을 띤 체계불학서로서 저술되었다. 그리고 그 장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① 수행법에 단계를 매겨 제시한다.
② 모든 수행에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여 자발적 수행이 되게 한다.
③ 매 단계의 수행 방법과 그 결과, 또 경계해야 할 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④ 수행의 대부분이 ‘관찰수觀察修’라고 불리는 ‘분별과 반복된 생각을 통한 익힘’이다.
⑤ 재가와 출가, 초기불교와 대승 모두의 지침이 될 수 있는 보편적 수행 체계를 제시한다.
앞으로 그 어떤 불교권에 소속된 학자든 현대 불교학의 연구 성과에 토대를 두고 새로운 체계불학(Systematic Buddhology)을 구성하고자 할 경우 <보리도차제론>의 체계가 그 골격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첨언하고자 한다. 필자가 본고를 통해 체계불학의 필요성을 강조하긴 했지만, 문헌학적 불교학, 역사적 불교학, 비교철학적 불교학과 같은 기존의 인문학적 불교학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앞으로 불전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가 더욱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 방법론이 아니라 인문학적 방법론에 의해 연구되고 있는 현대의 불교학으로 인해 신앙으로서의 불교가 훼손되고 있다는 생각에서, 그 해결 방안의 하나로 기독교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에 비견되는 체계불학(Systematic Buddhology)의 구성을 제안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불교계의 실정에 맞게 새로운 체계불학이 구성된다면, 이는 인문학적 불교학, 또 인접 학문과의 교류를 통해 그 내용을 계속 수정 보완해 나가는 열린 체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