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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삭녕최씨 낭장공파 원문보기 글쓴이: 초이스
中國 역사속의 美人들
서시(중국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여인. 이름은 이광 BC500년경)
서시(西施) - "침어(沈魚)"
"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었다. 그 모습을 본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서시는 침어(浸魚)라는 칭호 를 얻게 되었다. 서시는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範려)가 보복을 위해 그녀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어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하였다.
왕소군(서한의 10대 원소의 비 이면서 3남자의 여인. 본명은 장)
왕소군(王昭君) - "낙안(落雁)"
"왕소군의 미모에 기러기가 날개짓 하는 것조차 잊은 채 땅으로 떨어졌다."
이름은 장(? ·檣 ·牆). 자 소군. 일설에는 소군이 이름이고 장이 자라고도 한다. 남군(南郡)의 양가집 딸로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비관하고 있었다. 당시 흉노(匈奴)의 침입에 고민하던 한나라는 그들과의 우호 수단으로 흔히 중국 여자를 보내어 결혼시키고 있었다. BC 33년 왕소군은 원제의 명으로 한나라를 떠나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 연지(閼氏)가 되었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호한야가 죽은 뒤 호한야의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 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다. 이러한 소군의 설화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윤색되고, 흉노와의 화친정책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 여주인공으로 전하여 왔으나 대부분은 사실(史實)로 인정할 수 없다.
후한(後漢) 때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이 추하게 그려졌고, 그 때문에 오랑캐의 아내로 뽑히게 되어 버렸다. 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즈음에 원제가 보니 절세의 미인이고 태도가 단아하였으므로 크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제는 크게 노하여 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진(晉)나라 때에는 문제(文帝) 사마 소(司馬昭)의 이름과 글자가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군(王明君)이라 하였고, 명비(明妃)라고도 불렸다. 그 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허다한 소재를 제공하였다.
《소군사(昭君辭)》《명군탄(明君歎)》이라는 한나라의 악부(樂府)가 가장 오래 된 것이고, 그녀를 소재로 한 희곡으로는 원(元)나라 때의 마치원(馬致遠)이 지은 《파유몽고안한궁추잡극(破幽夢孤?漢宮秋雜劇:漢宮秋)》이 가장 유명하다. 진나라의 석계륜(石季倫)이 지은 《왕명군사병서(王明君辭幷序)》가 있고, 당(唐)나라 이후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등 많은 시인들이 그녀를 소재로 시를 읊었다. 또 둔황[敦煌]에서 발굴된 《명비변문(明妃變文)》에 의하여, 당말 오대(五代)경부터 구전문학(口傳文學)의 소재가 되었음이 밝혀졌다
초선(삼국시대)
초선(貂嬋) - "폐월(閉月)"
"초선의 미모에 달도 부끄러워서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다."
초선은 삼국지 시대인 동한 말년 왕윤의 가기(요즘의 가수)였다. 그녀를 가리켜 천향국색(國色天香)이라 한다.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미녀라는 경성지모(傾城之貌), 경국지색(傾國之色)은 모두 그녀에게서부터 나온 고사이다.
삼국지 초반에 나오는 희대의 동한왕조 간신 동탁에게 발견되어 정쟁에 이용되는 운명에 처한다.
이른 바 달밤에 분향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다는 고사에 이용되었다.
그녀는 계략(이른 바 전형적인 미인계요 연환계)이 성공한 연후에 달밤의 후원에서 왕윤의 무사하기를 기원하고 달에게 절했다.
그때 구름이 달을 가렸기에 왕윤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초선의 미모에 달도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구나(이른 바 폐월(閉月)".
왕윤은 동한왕조를 찬탈하려는 동탁을 죽일 결심으로 계략을 꾸며 초선을 동탁 눈에 뜨이게 하였다. 왕윤은 먼저 여포에게 결혼을 약속하고, 바로 동탁에게 초선을 바친다.
여포는 물론 당대의 영웅이었으나 충분히 젊을 뿐이었다. 동탁 또한 노간신이요 교활하기 그지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호색하기로는 둘째가기 서러운 둘은 양부와 양자가 되어 어울렸다. 초선은 바로 이들이 서로 칼을 들이밀 반간계의 비수로 쓰여진 것이다. 먼저 여포가 초선의 추파에 경도되고, 동탁 또한 아름다운 초선의 눈썹에 혼을 빼앗겼다.
여포가 어쩔 수 없이 초선을 동탁에게 빼앗기다시피 바칠 수밖에 없게 되자 마음속이 자연 불만으로 가득 찼다. 어느 날, 여포가 동탁부에 입부할시 초선을 찾았다. 둘은 봉의정(鳳儀亭)에서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초선은 동탁에게 받은 괴로움을 짐짓 토하였다. 여포는 당연히 분노하였기에 방천화극으로 동탁이 회부하기를 기다려 찔렀다. 여포는 바로 도주하였다. 당연히 두 사람은 서로 극히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다. 왕윤은 여포에게 동탁을 제거하기를 역설하고 여포에게 양부를 죽이게 한다.원대경극에 봉의정《鳳儀亭》이 있는데 이는 바로 이 고사를 올린 것이다.
양귀비(당나라 제7대 현종의비. 이름은 양옥환)
양귀비(楊貴妃) - "수화(羞花)"
"양귀비의 미모에 꽃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미인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누구든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름..바로 그 양귀비이다. 당대(唐代)의 미녀 양옥환(楊玉環)은 당명황(唐明皇) 현종의 에게 간택되어져 입궁한 후로 하루 종일 우울했다. 어느 날 그녀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중에 함수화(含羞花)를 건드렸다. 함수화는 바로 잎을 말아 올렸다. 당명황이 그녀의 '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 에 찬탄하고는 그녀를 '절대가인(絶對佳人)'이라고 칭했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과 무혜비(武惠妃)의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로 궁궐에 들어갔다. 당시 양귀비는 17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런데 어느날 현종이 우연히 자기의 며느리인 양귀비의 어여쁜 자태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해 버렸던 것이다. 그날 이후부터 현종은 양귀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아무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현종은 자신의 측신이자 당대 최대의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高力士)를 불러 이 일을 의논하였다. 결국 고력사는 양귀비의 두 몸종을 매수하여 그녀들에게 양귀비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였다. 양귀비의 몸종들은 매일같이 양귀비를 설득하였으며, 양귀비도 본래 수왕(壽王)에 대한 사랑보다는 부귀영화에 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수왕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수왕을 떠난 양귀비는 우선 화산(華山)으로 가서 여도사(女道士) 생활을 하다가 다시 현종의 궁으로 들어왔다. 양태진(楊太眞)이란 이름은 바로 양귀비가 여도사 생활을 할 때 얻은 호이다. 이때 현종은 아들 수왕에게는 다소 미안했든지 위씨(韋氏) 성을 가진 여인을 아내로 삼도록 배려하였다.
견황후
위문제황후. 와락. 조비가 황제가 된후 곽황후의 총애하게 되자 조비한테서 실총하고 죽음.
문소황후(文昭皇后). 본명 복(宓). 원소의 아들 원식의 처였다가 후에 조비의 처가 되었다.삼국지 등장 여인중 미색으로 치면 초선다음이요, 재주로 치면 따를 이가 없었다고 한다.
원제는 감견부(感甄賦 : 견씨를 느끼며 지은 부)였으나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의심으로 죽임을 당한 어머니를 항상 애통히 여겼던 조예가 어머니의 명예를 그리고 자신의 명예를 위해 낙신부(洛神賦)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명모호치(明眸皓齒 :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곽애
명조때 궁녀.
비운의 여인 이랄 수 밖에 없는 가엾은 여인이다. 궁녀인 그녀는 어느 시기나 그렇지만 궁녀들은 일단 입궁하면 생사는 영원히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명대 초기의 궁정은 원대의 참담한 순장제도를 답습하고 있어서 선종이 붕어하자 그녀도 명(明) 선종(宣宗) 순장을 위해 입궁 20일만에 간택되었다.
절명사는 임종전에 지은 것으로 글자 하나하나에 부모와의 결별의 슬픔을 담고 있다.
《절명사(絶命辭)》
修短有數兮 不足較也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기에 비교하기는 어렵다지만
生而如夢兮 死者覺也 생은 꿈만 같다는 것은 죽은 자만이 알 수 있다..
先吾親而歸兮 ?予之失孝也 먼저 스스로 돌아가려 하니 효를 잃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며
心凄凄而不能已兮 是則可悼也 마음이 괴롭고 괴로워도 어쩔 수 없으니 그저 슬플 뿐이네.
당완
륙유의 외사촌동생이며 안해이다.
송대 시인 육유(陸游)의 사촌여동생이자 처.
그 중 그녀를 기린 시는 얼마나 될련지....
다음은 심원에서 육유가 지은 시에 그녀가 회답한 시라고 합니다.
世情薄, 人情惡, 雨送黃昏花易落. 曉風干, 淚痕殘. 意緘心事, 獨語斜欄. 難, 難, 難!
人成各, 今非昨, 病魂常似秋千索. 角聲寒, 夜?珊. ?人詢問, 咽淚?歡. 瞞, 瞞, 瞞!
세정은 야박하고, 인정은 악합니다. 비는 황혼의 꽃을 쉬이 떨어뜨리고,새벽바람 불어와 눈물자욱을 남기네요.
마음을 적어보내고 싶지만 난간에 기대어 혼잣말만 합니다. 힘들고, 힘들고, 힘듭니다. 감추고, 감추고, 감춥니다.
사람은 각각이 되었고, 오늘은 어제가 아닙니다. 병든 마음은 그네끈처럼 길고, 뿔피리 소리 차가워 밤을 깊어가게 하네요.
누군가 물어볼까 두려워 눈물화장 삼키고 기쁜 척 합니다.
도온
사도온. 사안질의 딸
사도온은 중국 동진시대 사람(약 서기 376년 전후)으로 동진시대의 저명한 여류작가이기도 하다. 사안의 질녀, 사혁의 딸로서 유명한 서예대가 왕희지의 아들 왕응(王凝)의 아내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의 재주가 뛰어 났는데 한번은 삼촌 사안이 서당에서 강의하는데 함박눈이 내리는 지라 "함박눈이 흩날림은 어쩐 일인고?"라고 하면서 학생들보고 대구(대구)를 쓰라고 했다.
이에 사도온은 "버들꽃 마냥 바람에 춤을 추네."라고 했는데, 후에 이 글귀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서기 399년 남편 왕응이 반란군에 의해 살해 된 뒤 사도온은 홀로 여생을 보냈다.
지금까지 전하는 작품으로는 "논어찬"이라는 산문 한편과 "태산음(泰山吟, 태산을 읊음)" 시 2수가 있다.
동진시대, 왕씨(왕희지)와 사씨(사안)의 가문은 거족으로 "옛날 왕사 처마 밑을 날던 제비가 오늘을 평범한 백성의 집에 날아드네." 라는 글귀에서 "왕사"란 바로 왕희지와 사안의 가문을 놓고 하는 말이다.
류려
명청시기 이름난 가수 재녀다. 개성이 강하고 정직하고 총명했는데 지혜가 뛰여났으며 인기가 대단했다. 하동군, 비무군이라고 불리였다.
리사사
리사사는 변경의 염방의 왕연의 딸이였는데 세살때 아버지가 그녀를 불사에 맡겼는데 늙은 중이 그의 머리를 만지자 그녀가 불시로 크게 울어 늙은 중이 그녀를 중감이라여겨 사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송휘종이 그녀의 이름을 흠모하여 그녀와 즐겼다는 고사가 있다.
반소
한조때 반고와 반초의 녀동생.
반소의 자는 혜반이요 또 희(姬)라고도 한다. "전한서(前漢書)를 최초로 집필했던 서한의 대 문호 반표(班彪)의 딸로 14세에 조세숙에게
시집을 갔던 관계로 사람들은 그를 "조대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선한 대 문호 반고(班固)의 여 동생으로 반고가 사망한 뒤 그 뜻을 이어 "전한서"를 완성했는 바
"전한서"의 편찬에서 가장 복잡했던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와 천문지(天文志)"는 반소가 완성한 것이다.
"전한서"는 중국 첫번째의 "기전체단대사(紀傳體斷代史)" 사서로 새로운 역사기록의 방법을 개척한 사서이다.
반소는 또 반초(班超)의 누이로 반초는 중국 고대 유명한 군사가요 문호로서 "붓을 꺾어버리고 전장에 나가다"
"범의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범을 잡을 수 있으랴!"라는 말들은 모두 반초에게서 비롯된 말이기도 하다.
반소는 중국 고대 10대 미녀 중 재주가 가장 출중한 미녀이기도 하다.
반여첩
반첩호. 한성제비로서 서한시기 녀문학가. 반고의 고모이다.
첩여(??) : 중국 한대(漢代) 궁녀의 관명.
반첩여(班??)와 조비연(趙飛燕)은 한(漢) 성제(成帝)의 후궁으로,
성제는 처음에는 반첩여를 매우 총애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조비연에게로 사랑이 옮겨 갔다.
사랑을 잃은 그녀는 임금과의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는데
문득 가을이 되면 쓸모없게 되는 부채와 자신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원가행(怨歌行)(혹은 단선시(團扇詩)라고도 함》이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시는 중국 육조문화(六朝文化)를 대표하는 시문선집인 《문선(文選)》에 전해지고 있다.
新裂齊紈素 새로 자른 제나라 흰 비단이
鮮潔如霜雪 서리나 눈과 같이 선명하고 깨끗하여
裁爲合歡扇 재단해서 합환선을 만드니
團圓似明月 고르게 둥근 것이 보름달과 같구나
出入君懷袖 님의 소매 속에 드나들며
動搖微風發 흔들려져 미풍을 일으켰지만
常恐秋節至 항상 두려운 것은 가을이 되면
凉飇奪炎熱 차가운 바람이 더위를 앗아가
棄捐??中 대나무 상자 안에 버려져
恩情中道絶 은정이 도중에 끊기는 것이다
여기서의 부채는 임금의 총애를 잃은 반첩여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신의 처지를 철이 지나 쓸모없게 된 물건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후로 '추선(秋扇 : 가을철의 부채)'은 남자의 사랑을 잃은 여자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설도(770~832)
자는 홍도이다. 안사의 란 이후 성도에 거주 당대종대력 3년에 출생.
장안(長安)의 양가에서 출생하였으나 14세 때 아버지가 별세하고 패가하자 기녀(妓女)가 되었다.
시(詩)를 잘 짓기로 유명해 시기(詩伎:시에 능한 기녀)라고 불렸다.
후에 검남절도사(劍南節度使) 위천(韋泉)이 그녀의 소문을 듣고 그녀를 대면하였는데 그 기량이 너무 출중하여 관기로 삼았고, 후에 그녀에게 교서(校書)라는 관직을 내리니 이후로 그녀는 여교서(女校書)라고 불렸다고 한다.
만년에 완화계(浣花溪) 근방으로 은거하였는데, 이 곳은 양질의 종이가 생산되는 곳이어서 그녀는 특히 작은 심홍색 종이를 주문하여 이 종이에 시를 써서 지역명사들과 주고 받았다.
후에 이런 식의 종이를 ‘설도전(薛濤箋)’ 또는 ‘완화전(浣花箋)’이라 하여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그녀가 8세 때 아버지가 시를 하나 짓자, 이에 대응하는 시를 연이어서 지은 것이라 한다.
설도 아버지 : 庭除一古桐,聳干入云中 정자 계단에 한그루 오랜 오동나무, 높게 치솟아 구름 속으로 들어갔네
8세의 설도 : 枝迎南北鳥,葉送往來風 가지는 남북의 새를 맞이하고, 잎사귀는 오고가는 바람을 보내는구나
이를 8세 때 지었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혹자는 이 시가 그녀의 일생을 대변한다고 한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일을 겪지만, 특별한 사랑을 만나지 못 하고 한 그루 외로운 오동나무처럼 살아갔다고 말이다.
위자부
한무제황후 위자부. 위황후, 자는 자부 서한때 한무제의 황후이다. 산서성 림분사람이다.위청의 누이.
우현기(844~868)
자는 유휘 혹은 혜란이라고도 불리웠는데 섬서성 서안 (장안)사람이다.
조비연
조비연(趙飛燕) - "작장중무(作掌中舞)"
"가볍기 그지 없어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출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를 지칭할 때는 항상 4대 미인의 한 사람인 양귀비와 더불어 거론된다. 바로 "연수환비(燕瘦環肥)"라는 성어인데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조비연(趙飛燕)은 말랐으나[瘦] 미인이었고, 양귀비[본명: 양옥환(楊玉環)]는 뚱뚱했으나[肥] 미인이였다. 또한 흔히 일컬어 조비연(趙飛燕)은 날씬한 미인의 대명사로 임풍양류(臨風楊柳)형 미인, 양귀비(楊貴妃)는 풍만한 미인의 대명사로 부귀모란(富貴牡丹)형 미인. 이라 한다.
좌분
진무제 사마염이 시인 좌사의 녀동생 좌분의 재주가 뛰여났다는 말을 듣고 후궁에 불러들인다. 덕재가 출중하여 제왕과 대신들이 혀를 두르자 후궁의 뭇 가인들의 질투를 받는다. 좌분은 귀비로 봉해졌지만 쓸쓸하고 따분한 생활을 하다가 죽는다.
주숙진
송대의 저명한 녀사인. 이름난 재녀다. 시사에 능했으며 단장집이라는 문집이 있다.
진원원
형원원이고 자가 완분이였으나 어머니가 사망후 성을 고쳐 진원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소주의 이름난 춤노래기생이였으나 하도 뛰여나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숭정황제의 장인인 전완이 만금을 들여 그녀를 사서 황제한테 바치려 했으나 오삼계가 가로채여 자기의 첩으로 삼았다.
재문희
채염, 즉 채문희 동한 채읍의 딸
채문희(蔡文姬)의 이름은 염(琰)이요, 자는 문희 도는 명희라고 한다.채문희는 동한시기의 대 문호이자 서예가인 채읍(蔡邑)의 딸이다.
동한 말기, 동탁(董卓)은 자기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채읍을 하루에 연속 3급이나 올려주어 중랑장에 까지 올랐다가 급기야는 고향후로 봉을 받았다.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 된 뒤채읍은 동탁이 주는 벼슬을 받았던 관계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사람들은 이 같이 세상에 드문 인재를 죽이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라며 천방백계로 구하려고 했으나결국에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문장은 굴원과 비할 수 있고,효도는 증삼(曾參, 즉 공자의 학생)을 다른다"고 평가했다.
동탁이 멸망한 뒤, 흉노와 강/호의 군사들이 중원을 엄습, 많은 사람들이 흉노로 끌려가게 되었다. 채문희도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흉노에 끌려갔다.
정권을 잡은 후 조조는 스승인 채읍에게
딸이 하나밖에 없음을 생각해서황금 천냥과 백벽 한쌍으로 채문희를 찾아왔다.
이 전에 채문희는 흉노의 좌현왕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다.
그러나 채문희는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또 두 아들과 헤어지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채문희가 35세 되던해 바로 "적벽대전"이 일어났던 서기 208년, 채문희는 조조의 알선으로 장군 동사와 결혼하게 되었다.
재주와 인물이 뛰어 났던 동사는 채문희를 별로 달갑지 않게 대했다. 그러나 어느 한번 어떤 차실로 동사는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이때 채문희가 나서 조조를 찾아가
자기의 신세를 하소연 하는 바람에조조는 자기와 채읍의 인정을 생각해동사를 용서해 주게 되었고,그랬던 관계로 동사는 채문희에 대한 마음을 달리하게 되었다.
후에 동사와 채문희는 세상사를 간파하고
산좋고 물맑은 곳을 찾아 은거하게 되었는데,수렵을 갔던 조조가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조조는 전에 채씨가문에 수만권을 헤아렸던 장서에 대한 말을 꺼냈다. 채문희는 전란 가운데 다 타버리고 남은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400권을 기억에 살아남은 대로 외웠다.
이에 크게 감탄한 조조는 사람을 보내 베끼도록 했으나,채문희는 남녀가 유별하다는 구실로 거절하고 자기가 직접 400권을 기록하여 조조에게 바쳤다.
채문희는 일생에 세 남자에게 시집을 갔었다. 흉노로 잡혀가 좌현왕에게 시집가기 전에 그는 하동 위씨집에 시집을 갔었는데부부는 금슬좋게 지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채문희의 남편은 결혼 1년만에 각혈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탁문군
탁문군. 한나라때 사마상여의 안해.
원산미(遠山眉 : 먼 산의 능선 같은 눈썹)
연화협(蓮花頰 : 연꽃 같은 뺨)
부용부(芙蓉膚 : 부용꽃 같은 피부)
미인의 기준이 그녀로부터 비롯되었을 정도로 절세미인이자
당시의 도덕률과 체제를 뛰어넘는 분방한 행동과 글재주로 유명한 반체제 여류시인이었다.
한나라 제일의 문장가로 손꼽히는 사마상여(司馬相如 )와 사랑의 도피행각으로도 유명하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17세 청상과부가 된 그녀는 아버지 탁왕손(卓王孫)이 열었던 잔치의 손님으로 온 사마상여와
사랑에 빠져 성도(成都)로 도망친다.
이를 반대하는 아버지는 그녀에게 한 푼의 재산도 주질 않았으나, 그녀는 가난을 면하기 위해 시장바닥에서 주막을 차려놓고 손님들에게 술을 따르며 아버지에게 보란 듯이 체면 깎이는 일도 서슴지 않으니,
그녀의 아버지는 이를 보다 못해 결국 훗날 재산을 나누어주어 그들을 용서했다고 한다.
그녀의 행위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파격적이고 용감무쌍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일설에는 남편인 사마상여가 훗날 첩을 들이려고 하자, 변심한 남자 곁에는 있을 수 없으니 떠나겠다는 내용의
《백두음(白頭吟)》이라는 시를 지어 남편의 뜻을 꺾었다고도 한다.
훗날 사마상여가 당뇨병으로 병사하자 그녀는 손수 남편의 조문(弔文)을 작성하였으며 마지막까지 정절을 지쳤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화예부인
화심부인(화예부인이라고도 함) 후촉후주 맹욱의 귀비.
황아
명대 녀 문학가. 자는 수미이고 사천성삭녕사람이다. 양심의 안해 세칭, 황안인. 황부인이라고도 불리였다
후부인
수양제 재위기간 천하의 미인들을 끌어들였는데 후부인은 수천명의 미인들가운데서 한번도 황제와 자보지 못한 녀인의 하나이다. 자결했다.
王凝之 : 왕희지(王羲之)의 차남)의 처로 총명하고 재변이 있기로 유명하였다.
《진서ㆍ왕의지처사씨전(晋書ㆍ王凝之妻謝氏傳)》의 고사를 따르자면,
친척들이 모인 어느 날 갑자기 내리는 눈을 보고 사안(謝安)이 묻기를 "쉴 새 없이 내리는 흰 눈은 무엇을 닮았는가?(白雪紛紛何所似)"라 하자 사랑(謝朗)은 "공중에 소금을 뿌린 듯 하옵니다.(散鹽空中差可擬)"라고 하였으나, 그녀는 "(하지만) 바람에 일어난 버들개지만 못 하옵니다.(未若柳絮因風起)"라고 하여 사람들이 크게 탄복하였으니 이후 그녀는 영서재(?絮才)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시(詩)·송(頌)·부(賦)·뇌(?)등을 지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매우 드물어 《등산(登山)》, 《의혜중산영송(擬?中散詠松)》등의 시만 전해진
버들개지 : 버드나무의 꽃. 솜과 비슷하며,바람에 날려 흩어짐. 柳絮 : 한문으로 직역 풀이하면 '버드나무(의) 솜'으로, 중국어로 버들개지라는 뜻이다.
영서재(?絮才) : 버들개지[絮]를 노래한[?] 재녀[才] 라는 뜻.
리청조(1084~1155)
호는 익안거사. 제남사람.
여황제 무측천
상관완아(664~710)
섬주섬현사람.당고종때 재상 상관의의 손녀.
동소완
이름은 백, 자는 청련 혹은 완군이라고 불렸다.
동소완은 명천계4년(1624년)생. 그의 남편 冒襄은 명말 청초 저명한 문학이다. 冒襄은 명문가족 출신이고 <<명말4공자>>라고 불리우고 당시 이름있는 인물이다.
동소완은 남곡(호북성 장양 부근)의 기생집에서 태여나고 모친 진씨는 남곡의 기생이고 부친董旻은 기생집의 잘골이였다.
동소완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는데 8살때 기생집에 놀러온 문인들과 시를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다뤘다.
13~14살때 탈줄모르는 악기가 없었고 시조와 문학에 대하여 모르는것이 없었다.
더우기 이쁘게 생기고 인물이 출중해서 15살때 명성이 높았다. 순치 7년(1650년)에 병사.
장홍불
풍진삼협중의 장홍불인데 리정의 애처로서 본명은 장출진이다.
하희
원적은 정국. 정목공의 친딸이고 정령공의 녀동생이다.
손상춘
삼국미녀의 하나. 손견의 딸로서 손책, 손권의 동부이모의 녀동생이다.
류현덕의 아내이다. 부인도 잃고 병사도 잃었다는 고사의 주인공이다.
한장제황후
두씨. 두황후는 동한의 정치를 간섭한 황후. 아름답게 생겼으며 수단이 있었다.
한화제황후(등수 81~121)
등수는 동한 호강교위 등훈의 딸이다. 화제가 죽은후 20여년간 집정한바 있고 자기 오빠를 요직에 등용하고 대권을 휘둘렀다.
리향군
기재에 의하면 리향군은 진회하상의 명기로서 노래와 춤을 팔았으나 몸은 팔지 않았다고 한다.
동소완, 류여 등과 함께 명말청초에 이름을 빛낸 미인이다.
홍승(洪昇)의 《장생전(長生殿)》과 함께 청대 희곡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진다. 1690년(康熙 29)부터 1699년까지 세 차례의 개작 끝에 완성된 작품으로 명말(明末)의 공자(公子)인 후방역(侯方域)과 기생 이향군(李香君)의 사랑의 파란을 줄거리로 하고, 여기에 명말(明末)의 부패한 사회상을 풍자한 작품이다.
후방역은 이향군을 기루(妓樓)에서 건져내고 부채에 시(詩)를 써 준다. 그 후 후방역은 완대월(阮大鉞)의 중상모략으로 체포령이 내려져 난징[南京]을 떠난다.
완대월과 고향이 같은 전앙(田仰)이란 자가 이향군을 첩으로 맞아들이고자 하나 향군은 정조를 지키며 필사적으로 반항한다.
혼절하여 머리를 땅에 부딪혀 이마에 상처가 나고 부채는 피로 물든다.
며칠 후, 향군이 낮잠 든 사이에 양문총은 부채에 묻은 피를 복사꽃으로 여기고 가지와 잎을 곁들여 그려서 도화선을 만든다.
후방역이 난징에서 돌아왔으나 향군은 이미 대궐에 불려 들어간 후여서 만나지 못하고 체포된다.
그 후 청(淸)나라 병사에 의해서 난징은 함락되고 후방역은 옥에서 탈출하여 산으로 피신하는데, 여기서 도교(道敎)에 귀의한 향군과 재회하게 된다.
두 사람은 부채를 바라보며 서로 그립던 얘기를 주고받는데, 이것을 본 장도사(張道士)가 부채를 찢어 팽개치며 나라가 위태로운 이 시기에 아직도 정근욕종(情根慾種)을 그리워하느냐고 꾸짖자, 이에 크게 깨닫고 이들은 도교에 입신한다.
작품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인물들을 근거로 하고 있다. 젊은이의 연애이야기가 줄거리를 이루면서도 명말 부패한 정치 현상과 나라를 그르치는 간신들의 행동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인생의 부귀는 뜬구름 같은 것이라는 애수가 숨겨져 있다.
화목란
부친을 대신하여 종군한 화목란은 고대의 하남성 로성 영곽사람이다.
여반남장을 하고 부친을 대신하여 종군한 그녀는 수차례 전공을 세운다.
개선해 돌아오자 황제가 관직을 내리자 목란은 받지 않았고 입궁시키려하자 그녀는 죽음으로 거절한다.
당조초기 효렬장군으로 추봉하고 화목란사를 져 그녀를 기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