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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와현 마루가메 2 - 마루가메의 마루가메성에 들어가서 천수각에 오르다!
2025년 8월 7일 다카마쓰 (高松) 에서 우타즈 (宇多津) 에 도착해 15분을 걸어서 해변에
수족관 (四國 水族館) 에다가 전망대인 158m 높이 스카이 아쿠아리움 소라킨
( コ-ルドタワ- 天空のアクアリウム ソラキン) 을 구경하고는 우타즈역으로 돌아옵니다.
우다츠 에키 宇多津駅 (우다진역) 에서 11시 34분 요산선 쾌속 간논지행 (觀音寺
190엔) 을 타고는 11시 37분 마루카메 丸龜 역에 내려 코안로카에 배낭을
넣고는 택시를 타고 마루카메조 ( 丸龜城) 대수문 앞에 내리니 요금이 750엔 입니다.
마루가메성으로 들어가는데, 1602년에 완공된 성으로 일본에 현존하는 12개 목조 천수각(시코쿠에 4개)
중에 하나이니.... 규모는 작지만 가장 높은 석벽을 자랑하는데 석벽은 부채 처럼 곡선미를 뽐냅니다.
마루카메조( 丸龜城) 성은 66미터 산 위에 자리하니 쓰키미 야구라 유적에서도 마루가메 시내와
사누키의 휴지산이라 불리는 이노산을 감상할수 있다는데, 전시실과 갤러리로 구성된
마루야마 자료관 외에 부채 공방인 다케 우치와에서는 아이들이 몇 명 부채를 만드는게 보입니다.
마루가메성 안에는 오래된 상점을 교류의 장으로 개방한다는 아키토라노야카타관이
있고 또 다스케토로 등롱이라고 해서 고토히;라궁에 참배하는 곤피라마와라
의 상륙 항구로서 번성하던 시절의 등롱으로 정식 명칭은 에도코주토로 라고 합니다.
일본의 성들이 다 그러하듯 먼저 깊은 해자를 두른 다음에 성문을 들어서서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데 150m
미카에리자카 언덕길을 구부러지며 올라가니..... 공격하는 병사들은 엄청 고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윽고 가쁜 숨을 헝떡거리며 올라 천수가 30미터 아래 공터에 도착하니 가게가
보이고 자판기가 두 대가 서 있는지라 천엔 지폐를 넣으니 바로
되돌아 나오는데 성을 구경하고 내려와 500엔 동전을 넣으니 역시 되돌아 나옵니다.
어제 밤에 도요코인 호텔에서 천엔 지폐를 넣었을 때도 되돌아 나온지라 난감해 하는데
현지인이 지폐를 넣으니 정상적으로 작동되는지라 설명을 하니..... 웃으며
동전을 바꾸어 주는데 , 지폐와 동전 모두 신권은 자판기가 인식을 못하는 것 입니다?
천엔 신권 지폐는 위조나 복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 하도록 홀로그램 그림을
넣었는데 그전 만들어진 자판기는 당시 이런 지폐가 없었기 때문에 인식을
못하니 전국에 수백만대가 넘는 자판기를 개조할수도 없으니 난감한 일입니다?
포기하고는 400엔을 내고 텐슈가쿠(천수각)으로 입장하는데 마루가메성의
구조는 삼중3층 망루로 혼카와라키 지붕, 높이 15m 로
2차 세게대전 중이던 1943년 6월 9일에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답니다.
마루가메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천수각은 축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는
일본 12개성 중에 하나이며 천수의 크기는 동서 6칸(11m), 남북 5칸(9m)
이고 성 밑에서 천수를 올려다 보았을 때 커 보이도록 동서로 넓게 지어졌습니다.
외벽에는 방화성이 뛰어난 회반죽을 발랐고 1층에는 비바람에 강하도록 판자
의 가장자리를 포개며 붙인 “시타미이타바리” 형 판자벽이라고 합니다.
또 최상층 “이리모야하후” 박공을 비롯하여 3층의 “지도리하후” 박공에 2층의 “가라하후”
등 각 충에 설치된 장식 덕분에 박지만 위엄있는 분위기를 풍긴다고 말합니다.
천수각 축조연대는 1645년에 막부에 제출한 ‘쇼호 성 편면도’ 에 천수 위치에 커다란 망루가 그려져 있는 것,
쇼와시대인 1948년부터 1950년에 실시한 해체 수리시에 2층 벽 안에서 만지 3년(1660년) 연호가 적힌
팻말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야마자키가 마루메성 재건에 착수한 1643년 부터 1660년 사이 축조된 것입니다.
1층은 천수 안에서 가장 많은 기둥이 설치된데다가 천장이 제일 높은데, 바닥을 보니 서로 폭이 다른 마루청
이 깔려있는데 폭이 넓은 것은 에도시대의 것이고 좁은 것은 쇼와시대에 해체수리시 교체한 것입니다.
마치 예루살렘성 안에 통곡의 벽에 갔는데..... 벽에는 돌이 3층으로 가장 아래쪽이 제일 크고
2층은 중간쯤인 돌이며 3층 부분은 작은 돌을 쌓았는데 이는 원래 성벽
위에 이슬람 옴미아드왕조때 것이 더해지고 나중에는 오스만 터키시대에 높인 것이라고 합니다.
엣날에 천수각의 북쪽은 산노마루에서 니노마루로 올라가는 뒷길이었기 때문에 그 길을 방어
하기 위하여 북쪽 벽에는 적군의 머리 위로 돌을 떨어뜨리는 “이시오토시” 와
실내에서 활이나 총포로 공격 하기 위해 뚫은 삼각형 또는 사각현 구멍인 “사마” 가 보입니다.
기둥의 표면을 살피니 에도시대에 기둥의 표면을 손도끼로 가공한 흔적이 마치 생선
의 비늘 처럼 남아 있는게 보입니다. 그리고 성 안쪽의 윗부분은 회반죽
벽으로 되어 있고 바깥쪽에는 무샤바시리(통로)가 설치되어 있는 걸 볼수 있습니다.
2층으로 오르는데 성의 계단은 경사가 엄청 가파른지라..... 서양인 가족
중에 여자 아이는 내려오면서 겁이 난지라 부드루들 떠는 모습을
보는데.... 굴러 떨어지면 크게 다칠거라는 생각이 들어 아찔합니다?
2층 사면의 벽은 1층이나 3층과 마찬가지로 바닥에서 190cm 높이 까지
회반죽을 두껍게 발랐는데 이는 적군이 성 밖에서 쏘는 총포의
탄환이 관통하지 않도록 방어력을 높인 것서이니 “대고벽” 이라고 부릅니다.
북쪽 벽에 2곳, 동과 서쪽벽에 1곳씩 대포를 쏘는 구멍인 “오오즈쓰사마” 가
바깥과 비슷한 높이에 뚫려있는데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회반죽으로 메꾸어져 있으니 비상시에는 회반죽을 뚫고는 대포를 쏜답니다.
그리고 네 모퉁이에 세워진 귀 기둥에는 덧기둥이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 지진시 등에 발생
하는 수평 방향의 흔들림 방지에 효과적인 “히우치바리” 가 설치되어
있으며, 히우치바리와 귀기둥 그리고 또 다른 안쪽 기둥으로 위에 얹은 대드로를 지탱합니다.
다시 경사가 급한 계단으로 3층으로 올라가니...... 1.2층에 비해 좁은데 쇼와시대에 해체, 수리 내용이
새겨진 명판이 보이고 수리에 사용한 자 등 도구들이 기둥과 대들보에 붙여놓은걸 발견합니다.
쇼와시대에 해체 수리시에 남동쪽 귀퉁이 벽 안에서 기도 팻말이 발견됐으며 거기에는
만지 3년 (1660년) 의 연호가 먹으로 적혀있는데, 조선은 천자의 나라인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지만 일본은 중국 연호를 거부하고 독자연호를 사용한 걸 알수 있습니다.
1660년에 천수가 완공되었거나 아니면 당시 수리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적어도 이때는
이미 천수가 지어져 있었으니 현재는 기도팻말 모조품을 벽 안에 넣어두었다고 합니다.
센고쿠시대 일본은 200개 나라로 갈라져 전쟁으로 날을 지샜던 때문에 성이 2천개가 넘었지만 불탄데다가 태풍
으로 무느지고 도쿠가와 막부는 270개 번에 주 성 하나만 남기고 허물었으며 1868년 무진전쟁과 서남전쟁
으로 무느지고 2차대전때 미군의 공습으로 불탔으며 현대에 도시계획으로 무느뜨리니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루가메성을 구경하다 보니 문득 조종엽 기자가 동아일보에 쓴 “4~5세기 가야계
도래인, 日에 군사-사회시스템 까지 전했을 수도” 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학계에선 4, 5세기 도래인(渡來人)이 발전된 철기나 토기 등을 일본(당시 왜·倭) 에 전파하며 일본이
중앙집권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이에 더해 가야계를
중심으로 한 도래인이 군사· 사회 시스템 같은 ‘소프트웨어’ 도 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조성원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연구원은 한국고대사학회가 16, 17일 여는 세미나 ‘동북아 국제정세와 한국
고대의 이주·정착’에서 ‘고고 자료를 통해 본 4∼5세기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의 이주와 정착’ 을 발표한다.
조 연구원은 이 발표문에서 “4, 5세기 가야계 도래인들은 기술자의 역할만 조명된 탓에 일본
고대사의 주체가 아닌 보조로 인식되고 있다”며 “하드웨어가 올바르게 작동하도록
하기 위해선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며, 이것이 도래 문화 전파의 본질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발표문에 따르면 4세기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은 동북아시아 교역의 중심지인 금관가야로
부터 철기 및 선진문물을 독점 입수하며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학계에선 대체로
일본의 철기와 스에키(須惠器·고대 일본의 도질 토기)가 도래인으로부터 비롯됐다고 본다.
400년 고구려의 남정(南征)으로 금관가야가 붕괴하자, 한반도로부터의 도래는 더욱 본격화됐다. 이 시기 일본
기나이(畿內·수도 주변) 지역 집락 유적에서 한식계(韓式係) 토기가 다량 발굴되는 것이 방증이다.
이때부터 일본에선 각종 철제 무기류가 대량생산됐고, 무덤엔 대량의 무구(武具)와 무기가 부장되기 시작했다.
조 연구원은 “금관가야와 신라에서는 3세기 대부터 나타났던 모습”이라며 “가야계 도래인이 일본에 철기
생산 기술뿐 아니라 고대 군사조직의 운영 및 통솔과 관련된 소프트웨어도 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 했다.
도래인은 일본의 일상도 바꿨다. 일본열도에 말의 존재와 관련된 흔적은 5세기 대부터 확인되는데,
관련 유적에선 도래인과 연관된 이동식 아궁이와 시루 등 토기가 출토됐다. 도래인이 말과
말을 키울 수 있는 기술을 가져왔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말은 운송과 경작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야마토 정권은 독점한 도래 문화를 활용해 권력 기반을 다지는 한편, 선진
문물을 각지의 수장층에 배분하며 지배를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 연구원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4세기 후반∼ 5세기 전반 일본은 고훈시대 (古墳時代·3세기
중후반∼ 7세기 무렵)가 중기로 접어들면서 정치 사회적 변화가 적지 않았다”며 “고대국가로
성장하던 가야계 도래인이 백제계 보다 앞서 이런 변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여행기를 올리는 중에 일본 전 총리 무라야마씨가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동아일보 임혁석, 안규영, 이윤태
기자가 쓴 “침략-식민지배 부정땐 日명예 손상” 퇴임후도 이어간 ‘일본 양심’ 이라는 기사를 올렸는데,
무라야마 총리는 1995년 담화를 통해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사죄를 표명했다.
101세로 별세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는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에 대한 사죄와 반성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인물로 50주년 패전일인 1995년 8월 15일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을 두고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표명한다” 고 밝힌 ‘무라야마담화’ 를 발표했다.
사회당 대표였던 1993년 6월 장기집권을 이어온 자민당의 ‘55년 체제’가 처음 붕괴되면서 권력을 쥘수 있었다.
버블 경제 붕괴로 민심이 돌아선데다, 당내 분열까지 겹치면서 1993년 7월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 것. 자민당-사회당-신당 사키가케 연립내각이 출범하면서 1994년 총리에 오를수 있었다.
그는 자민당이 위기에 놓인게 과거를 제대로 청산할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정치 생명을 걸고 “전쟁의 비참함
을 젊은 세대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내용의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이는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 장관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 와 더불어 일본의 양심을 담은 대표적 담화로 꼽힌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2015년 70주년 담화에서 “앞선 대전(大戰) 때 한 일에 대해 반복해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해 왔다” 며 ‘과거형’으로 사과하자 “미사여구를 늘어놨으며
사죄라는 말을 왜소하게 만들었다” 며 혹평했다. 그는 2020년 ‘신(新)무라야마 담화’를
내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자세야말로 일본의 명예를 손상하는 것” 이라고 강조했다.
무라야마 담화가 일본 정부의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기준점이 됐다. 윤덕민 전 주일 한국대사는 “무라야마 담화
는 한일 관계와 일본 전후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라며 “이후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2010년 ‘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 담화’ 로 이어지며 일본 역대 정부가 계승하는 역사 인식의 기준점이 됐다” 고 말했다.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일본 정부 첫 공식 문서란 점에서 한일 관계사에 기념비적 의미를 갖는다는 평가도 있다.
배영미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은 “무라야마 담화만으로 완성된 건 아니지만 한일 관계의 큰
출발점이 됐다”며 “특히 총리가 직접 공식 발표한 내용이기에 이를 함부로 뒤엎거나 왜곡할 수 없다” 고 짚었다.

첫댓글 역사와 정치 그리고 관광을 아우르는 글과 사진으로 공부합니다.
고마운 말씁입니다.
여기 성도 공격하기가 쉽지는 않을듯 합니다.